제왕기(齊王紀)

제왕(齊王)은 휘를 방(芳), 자를 난경(蘭卿)이라 한다. 명제(조예)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제왕과 진왕(秦王) 조순(曹詢)을 길렀다. 궁중의 일은 비밀에 속하였으므로 그들이 어느 곳에서 왔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위씨춘추(魏氏春秋) - 혹은 임성왕(任城王) 조해(楷)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청룡 3년(235) 제왕으로 옹립됐다.

경초 3년(239) 12월 1일 명제의 병세가 심하자 제왕을 황태자로 삼았다. 이 날, 조방은 황제의 자리에 올라 대사면을 행했으며, 황후(皇后 : 곽씨)를 존중하여 황태후(皇太后)라고 불렀다. 대장군(大將軍) 조상(曹爽)과 태위(太尉) 사마선왕(司馬宣王)이 정치를 도왔다. 조방은 칙서를 내렸다.

- 나는 보잘것없는 몸으로 대업을 계승했으나, 혈혈단신이어서 슬프고 고통스러워도 누구에게 말할 상대조차 없다. 대장군과 태위는 선제의 유명(遺命)을 받들어 곁에서 나를 보좌하고, 사도ㆍ사공ㆍ총재(冢宰)ㆍ원보(元輔)는 백관을 통솔하여 사직을 안정시키고, 군경ㆍ대부들과 서로 면려하여 짐의 뜻에 따르라. 현재 여러 곳에서 궁전을 짓는 일은 모두 선제의 유조(遺詔)에 따라 멈추라. 관청에 소속된 60살 이상의 노비는 풀어주어 평민이 되도록 하라.

2월 서역에서 몇 차례의 통역을 거쳐 화완포(火浣布)를 바쳤는데, 대장군(大將軍)과 태위(太尉)에게 조서를 내려 백관들에게 보여주도록 했다.


이물지(異物志)에서 이르길: 사조국(斯調國)에 화주(火州)라는 곳이 있는데, 남해(南海) 중앙에 위치한다. 그곳에는 들불이 찬란하게 타고 있는데, 봄과 여름에는 불타오르다가 가을과 겨울이 되면 자연스럽게 소멸된다. 그 불 속에 나무가 자라고 있지만 소멸되지는 않고, 가지나 나무껍질은 오히려 더욱 생명력이 넘쳐 흐른다. 가을과 겨울이 되면 불이 자취를 감추기 때문에 나무도 말라 앙상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곳에 살고 있는 백성들은 항상 겨울이 되면 그 나무껍질을 채취하여 베를 만드는데, 항간에서는 이것을 화완포(火浣布)라고도 했다. 이 베의 색은 약간 검푸른데, 만일 진흙으로 더럽혀졌을 경우 불 속으로 던지면 더욱 선명한 색채를 가지게 된다.


傅子曰: 漢桓帝時,大將軍梁冀以火浣布為單衣,常大會賓客,冀陽爭酒,失杯而汙之,偽怒,解衣曰:「燒之。」布得火,煒曄赫然,如燒凡布,垢盡火滅,粲然絜 白,若用灰水焉。


부자(傅子)에서 이르길: 한나라 환제 때에 대장군 양기가 화완포로 단의를 만들었다. 일찍이 빈객들을 크게 모으고 양기가 고의로 술을 다투다 잔을 흘려 옷을 더럽혔는데 가짜로 노한척하며 옷을 벗고는 말하길 「태워버리라.」하였다. 옷감이 불을 만나자 성대하게 빛을 내는 것이 마치 일반적인 옷감을 태우는 것 같았으나 재를 털어내고 불이 꺼지자 찬연히 결백한 것이 마치 잿물을 사용해 (씻은 것과) 같았다.


수신기(搜神記)에서 이르길: 곤륜(崑崙)산의 구릉(墟)에는 염화산(炎火之山)이 있어 산 위에는 조수초목(鳥獸草木)이 있으나, 그들은 모두 화염 속에서 생육하며 자라고 있다. 그래서 화완포(火浣布)라는 옷감이 있다. 또 이 옷감은 그 산속의 초목 껍질이나 줄기의 껍질로 짠 것이거나, 아니면 그 속에 사는 조수의 깃털로 짠 것이다.


한(漢) 나라 때 서역(西域)에서 예로부터 이 옷감을 헌상해 왔었으나, 중도에 그만 그러한 조공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위(魏)나라 초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그런 옷감이란 있을 수 없다고 의심하였다. 게다가 위문제(文帝)가 화성(火性)이 너무 혹열(酷烈)하면, 생명체의 기를 함유할 수 없는 것이라 여겨 <전론(典論)>이란 책을 지었다. 그 글에서 그는 그런 일이란 있을 수 없다고 밝혀, 그 때문에 똑똑한 자들의 전문조차 끊어지고 말았다.


이어서 위 명제(明帝)가 즉위하자, 삼공(三公)에게 조서를 내려 이렇게 말 하였다.


"선제께서 일찍이 <전론>을 지어서 불후의 격언을 남기셨다. 그 내용을 사당문 밖의 태학(太學)의 돌에 새겨, 석경(石經)과 함께 전하여 후세에 영원토록 보여 주도록 하라."


그런데 서역에서 사신이 와서 화완포(火浣布)를 바쳐 화완포의 존재가 증명되자, 비석에 세웠던 글을 갈아 없애 버려,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臣松之昔從征西至洛陽,歷觀舊物,見典論石 在太學者尚存,而廟門外無之,問諸長老,云晉初受禪,即用魏廟,移此石于太學,非兩處立也。竊謂此言為不然。    


신송지가 옛날에 정벌을 따라 서쪽으로 낙양에 이르러 이전의 유물을 두루 살펴보았는데 전론을 새긴 비석이 태학에 오히려 존재하고 있는 것을 보았으나 묘의 문 밖에는 없었습니다. 여러 장로들에게 물어보니 말하길 진나라가 처음 선양을 받을 때 곧 위나라의 묘당을 사용했는데 이 비석을 태학으로 옮겼다고 하니 두 곳에 세운 것이 아닙니다. 생각건대 이 말(곧 수신기의 기록)은 올바르지 못한 것 같습니다.


또 동방삭(東方朔)의 신이경(神異經)에서 이르길: 남황(南荒) 밖에 화산(火山)이 있는데, 길이는 30리(里) 고 넓이는 50리(里)다. 그 가운데에 불에 타지 않는 나무가 나서 밤낮으로 불에 타 맹우(猛雨)에도 불이 꺼지지 않는다. 불 가운데에 쥐가 있는데 무게가 백근이며 털의 길이가 두 자(尺)가 넘고 가늘기는 실과 같은데 그가히 옷감을 만들만하다. 불속에서만 살아 색깔은 붉고 때때로 밖에 나오면 흰색이다. 물에 대어 쫒으면 즉사하기에 그 털을 뽑아 옷감으로 이용한다.



경초 3년 2월 21일 조서를 내려 말했다.

- 태위(太尉)는 도의를 존중하여 행하고, 정직하며 삼대에 걸쳐 조정에 충성을 다했다. 남쪽에서는 맹달(孟達)을 잡았고, 서쪽에서는 촉나라 오랑캐의 군대를 격파시켰으며, 동쪽에서는 공손연을 멸망시켜 그 공명이 사해를 뒤덮었다. 옛날 주나라 성왕은 태보(太保)와 태부(太傅)의 관직을 세웠고, 가까이로는 한나라의 현종(顯宗)이 등우(鄧禹)를 존경하고 총애하였기 때문에 뛰어난 인재를 우대하려면 반드시 존경받는 지위를 주어야만 한다. 현재 태위를 태부로 임명하고, 부절을 갖고 군대를 통솔하고 안팎의 모든 군사업무를 옛날처럼 취할 수 있도록 하라.

3월 정동장군 만총(滿寵)을 태위에 임명했다.

여름 6월 요동군 동답현(東沓顯)의 관리와 백성들은 바다를 건너 제군의 변방지역에서 살았으므로, 옛날 종성(縱城)을 신답현(新沓縣)으로 바꾸고, 건너온 백성들을 거주하도록 했다.

가을 7월 천자(제왕 조방)는 처음으로 몸소 조회에 나와 공경 등 관원이 정사를 보고하는 것을 들었다.

8월 대사면을 실시했다.

겨울 10월 진남장군 황권(黃權)을 거기장군으로 임명했다.

12월 조서를 내렸다.

- 열조(烈祖) 명황제(明皇帝)가 정월에 천하의 신하와 백성을 버리고 등지자, 신하들과 자식들은 오랫동안 기일(忌日)을 슬퍼했다. 지금 하(夏) 왕조의 역법을 회복하여 사용하도록 하라. 이것은 비록 선제의 삼통(三統 : 天ㆍ地ㆍ人)에 관한 논의에 위배될지라도 이것 역시 예의 제도가 바뀌는 충분한 이유이다. 또 하(夏)왕조의 정월은 운수에 있어서 하늘의 바름을 얻는 것이니, 하왕조 역법의 건인(建寅)의 달 -북두성의 병이 축의 방각을 가르치는 달, 즉 12월- 이 정시 원년의 정월이 되는 까닭이니, 건축월(建丑月)을 뒤의 12월로 하라.

정시 원년(240) 봄 2월 1일 시중중서감(侍中中書監) 유방(劉放)을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로, 시중중서령 손자(孫子)를 우광록대부(右光祿大夫)로 삼았다. 6일, 요동 문현(汶縣)ㆍ북풍현(北豊縣)의 백성들이 바다를 건너 흘러들어왔으므로, 제군(齊郡)의 서안현(西安縣)ㆍ임치현(臨淄縣)ㆍ창국현(昌國縣)의 한 귀퉁이를 떼어 신문현(新汶縣)ㆍ남풍현(南豊縣)이라 하고 요동에서 온 유민들을 거주하도록 하였다.

3월 작년 12월부터 이달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17일, 조서를 내려 재판관은 잘못된 판결을 즉시 바르게 처리하여 죄를 감면하고, 가벼운 죄를 지은 자는 심사하여 내보내고, 삼공ㆍ구경ㆍ대부는 바른 말과 탁월한 계책으로 모두 조정에 대한 충성스런 마음을 나타내도록 했다.

여름 4월 거기장군 황권이 세상을 떠났다.

가을 7월 조서를 내렸다.

- 역경(易經)에서 ‘익(益)은 위를 손상시켜 아래를 이익되게 한다. 익괘(益卦)’, ‘절도있게 제도를 사용하면 재산을 손상시키지 않고 백성을 해롭게 하지 않을 수 있다. 절괘(節卦)’라고 했다. 지금 백성들은 옷과 먹을 것이 부족한데 어부(御府 : 궁중에서 입는 의복을 만드는 곳)에서는 금이나 은의 세공물을 많이 만들어 도대체 무엇을 하려 하는가? 지금 금이나 은으로 된 물건 1백50종류를 내놓으면 1천 8백여 근이나 되니, 그것을 녹여 군사비용을 제공하라.

8월 조방이 수레를 타고 낙양의 추수하는 농가를 순시하고, 노인과 열심히 농사짓는 자에게 각기 차등을 두어 상을 주었다.

2년(241) 봄 2월 조방이 처음으로 논어(論語)를 읽고 태상(太常)에게 벽옹(辟雍 : 천자가 만든 태학)에서 희생으로 공자를 제사지내도록하고, 안연(顔淵)을 합쳐서 제사지냈다.

여름 5월 오(吳)의 장군(將) 주연(朱然) 등이 양양군(襄陽) 번성현(樊城縣)을 포위하자, 태부(太傅) 사마선왕(司馬宣王)이 군사들을 인솔하여 이들에게 대항했다.

干寶晉紀曰:吳將全琮寇芍陂,朱然、孫倫五萬人圍樊城,諸葛瑾、步騭寇柤中;琮已破走而樊圍急。宣王曰:「柤中民夷十萬,隔在水南,流離無主,樊城被攻,歷月不解,此危事也,請自討之。」議者咸言:「賊遠圍樊城不可拔,挫于堅城之下,有自破之勢,宜長策以御之。」宣王曰:「軍志有之:將能而御之,此為縻軍;不能而任之,此為覆軍。今疆埸騷動,民心疑惑,是社稷之大憂也。」六月,督諸軍南征,車駕送津陽城門外。宣王以南方暑溼,不宜持久,使輕騎挑之,然不敢動。於是乃令諸軍休息洗沐,簡精銳,募先登,申號令,示必攻之勢。然等聞之,乃夜遁。追至三州口,大殺獲。    


간보진기(干寶晉紀) - 오나라 장군 전종(全琮)이 작피(芍陂)를 침범하고, 주연(朱然), 손륜(孫倫)의 5만 병력이 번성(樊)을 포위하고 제갈근(諸葛瑾) 보즐(步騭)이 조중(柤中)을 침범했다. 전종이 이미 파주(破走)당하였으나 번성(樊)이 에워싸여 급박해졌다. 선왕이 말하길 「조중의 백성 10만이 강의 남쪽에 떨어져 갈팡질팡하여 갈 곳을 모르고 있으며 번성은 공격을 당하여 수개월 동안 포위가 풀리지 않으니 긴급한 일입니다. 청컨대 이를 토벌하고자 합니다.」논의하는 사람들이 모두 말하길 「적들은 멀리 와서 번성을 포위했는데 함락시키지 못하고 견고한 성의 아래에서 (기세가) 꺾였으니 스스로 파멸당할 형국에 있으므로 응당 좋은 계책으로 방어해야한다.」고 하였다. 선왕이 말하길 「병법에 이르길 : 장군이 유능한데 수비하라고 하는 것은 군대를 속박하는 것이요 장군이 무능한데 맡기는 것은 군대를 복멸시키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지금 국경이 소란스럽고 백성들의 마음에 의혹이 있는데 이는 바로 사직의 커다란 걱정입니다.」 6월에 제군을 통솔하여 남정하였고 거가(車駕:황제)가 진양성의 문밖까지 전송하였다. 선왕은 남방이 무덥고 습하므로 응당 시간을 오래 끌어서는 안 된다고 여기고 경기병을 시켜 도발하였으나 주연이 감히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마침내 제군들로 하여금 휴식하고 목욕하도록 명령 내리고는 정예를 고르고 선봉에 설 병사들을 모아 호령을 펼치고는 반드시 공략할 기세를 보였다. 주연 등이 이를 듣고는 마침내 밤중에 도망갔다. 추격하여 삼주구(三州口)에 이르러 크게 살육하고 전리품을 획득하였다.

6월 29일 군사들을 퇴각시켰다. 모일, 정동장군 왕릉(王凌)을 거기장군으로 삼았다.

겨울 12월 남안군(南安郡)에 지진이 일어났다.

3년(242) 봄 정월 동평왕(東平王) 조휘(曹徽)가 세상을 떠났다.

3월 태위 만총이 세상을 떠났다.

가을 7월 18일 남안군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19일, 영군장군(領軍將軍) 장제(將濟)를 태위로 삼았다.

겨울 12월 위군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4년(243) 봄 정월 조방이 관을 쓰는 의식을 거행하고 모든 신하들에게 각각 차등을 두어 하사품을 내렸다.

여름 4월 24일 견씨를 황후로 세우고 대사면을 행했다.

5월 초하루 일식이 있었는데, 개기(皆旣)일식이었다.

가을 7월 조서를 내려 고인이 된 대사마(大司馬) 조진(曹眞)ㆍ조휴(曹休),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 하후상(夏侯尙), 태상(太尙) 환계(桓階), 사공(司空) 진군(陳群), 태부(太傅) 종요(鍾繇), 거기장군(車騎將軍) 장합(張郃), 좌장군(左將軍) 서황(徐晃), 전장군(前將軍) 장료(張遼), 우장군(右將軍) 악진(樂進), 태위(太尉) 화흠(華歆), 사도(司徒) 왕랑(王郞), 표기장군(驃騏將軍) 조홍(曹洪), 정서장군(征西將軍) 하후연(夏侯淵), 후장군(後將軍) 주령(走靈)ㆍ문빙(文聘), 집금오(執金吾) 장패(臧覇), 파로장군(破虜將軍) 이전(李典), 입의장군(立義將軍) 방덕(龐德), 무맹교위(武猛校尉) 전위(典韋)를 태조의 제묘 앞 정원에서 제사지내도록 했다.

겨울 12월 왜국(倭國)의 여왕 비미호(俾彌呼)가 사자를 보내 공품을 바쳤다.

5년(244) 봄 2월 조서를 내려 대장군 조상에게 군대를 이끌고 촉나라를 토벌하도록 했다.

여름 4월 초하루에 일식이 나타났다.

5월 8일 상서(尙書)를 읽고 태상에게 벽옹에서 태뢰(太牢) -소ㆍ양ㆍ돼지의 세 가지 희생(犧牲)을 갖춘 제수(祭需)- 를 바쳐 공자를 제사지내고, 안연을 함께 제사지내도록 하였다. 태부(사마선왕), 대장군(조상) 및 강의를 하는 시강(侍講)에게 제각기 차이를 두어 상을 주었다. 21일, 대장군 조상이 군대를 인솔하여 돌아왔다.

가을 8월 진왕 조순이 세상을 떠났다.

9월 선비족이 돌아와 투항하여 내지로 옮겨왔으므로 요동 속국을 설치하고 창려현(昌黎縣)을 세워 그곳에서 살도록 했다.

겨울 11월 21일 태조의 제묘 앞 정원에서 고인이 된 상서령(尚書令) 순유(荀攸)를 제사지내도록 명했다. 27일, 진국(秦國)을 되찾아 경조군(京兆郡)이라고 했다.

신송지가 생각하길 원래 공신을 위 왕조의 영묘에서 제사지내면서 순욱이 제외된 것은 그가 만년에 무제(태조)와 생각이 어긋났으며, 또 관위(官位) 자체가 한나라의 신하이지 위왕조의 신하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정욱(程昱)을 승진시키고 곽가(郭嘉)를 남겨 두고, 종요(鍾繇)를 앞에, 순유(荀攸)를 뒤에 둔 의도는 상세히 알 수가 없다. 서타(徐他)가 모반을 하고, 허저(許楮)는 근심을 하였지만, 지고한 충성심은 먼 옛날 한대의 김일제(金日磾)와 같다. 또 동관(潼關)의 위기는 허저 이외에는 구하지 못하는 것이다. 허저의 공적은 전위(典韋)를 뛰어넘거늘, 오늘날 전위는 제사 지내면서 허저는 지내지 않으니 이해하지 못할 노릇이다.

12월 사공(司空) 최림(崔林)이 세상을 떠났다.

6년(245) 봄 2월 17일 남안군(南安郡)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26일, 표기장군 조엄(曹儼)을 사공으로 삼았다.

여름 6월 조엄이 세상을 떠났다.

8월 19일 태상 고유(高柔)를 사공으로 삼았다. 모일, 좌광록대부 유방을 표기장군으로, 우광록대부 손자를 위장군으로 삼았다.

겨울 11월 태조의 제묘에서 역대의 선조를 함께 제사지내고, 앞에서 제시한 건국 공신 21명을 처음으로 제사지냈다.

12월 5일 조서를 내려 고인이 된 사도 왕랑이 지은 역전(易傳)을 학생들의 관리등용 수험과목으로 삼으라고 명령했다. 29일, 조서를 내렸다.

- 명일(明日 : 정월 1일), 모든 신하들을 모이도록 하라. 태부(사마선왕)는 수레를 타고 궁전으로 오도록 하라.

7년(246) 봄 2월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高句驪)를 정벌하였다.

여름 5월 예맥(濊貊)을 정벌하여 모두 격파시켰다. 동이(東夷)의 한나해(韓那奚) 등 수십 개국이 각기 종족을 이끌고 투항했다.

가을 8월 6일 조서를 내렸다.

- 근래에 나는 시장에서 관노비를 파는 것을 보았다. 나이는 모두 70살이었고, 그들은 쇠약하거나 죽음을 앞둔 병에 걸린 사람들이었으니, 천하의 백성 중에서 가장 곤궁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관가에서는 그들의 체력이 다하여 더 이상 쓰지 않았거늘 오히려 또 팔고 있으니, 나아가고 물러남이 모두 정리에 맞지 않는다. 지금 그들을 전부 풀어주어 평민이 되도록 하라. 만일 그 중에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자가 있다면 군이나 현에서 구제하도록 하라.

신(臣) 송지(松之)의 의견(案) - 명제는 즉위하자마자 ‘관노비(官奴婢) 중에서 60세 이상은 면제하여 평민이 되도록 하라’는 조서를 내렸니, 이 조서가 내려진 이상 영원한 규범이 되어야 한다. 7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 70세 이상의 병든 관노비가 시장에서 매매된다는 것을 질책하는 이 조서는 사실상 이해하기 힘들다.

7일, 조서를 내렸다.

- 나는 19일에 직접 봄 제사를 주관해야 되므로 어제 밖으로 나갔다가 길을 닦는 것을 보았다. 만일 비가 내린다면 또다시 닦아야 할 것이므로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다. 나는 항상 백성들이 힘은 적은데 부역이 많다고 생각하고 이 때문에 밤낮으로 근심하고 있다. 길을 닦는 것은 오고 감을 편리하게 하기 위함인데, 관리들이 노인이나 어린이를 채찍질하여 아름답게 꾸미려는 데 힘쓰고 있으니, 그들은 견디지 못할 정도로 피곤하여 떠돌며 갈 곳을 잃었고, 심지어 상심함이 끊이지 않고 있다고 들었는데, 짐이 어떻게 편안한 마음으로 수레를 타고 종묘로 가서 선조의 향기나는 덕을 나타낼 수 있겠는가? 오늘 이후로 이 뜻을 분명히 알아 기록하도록 하라.

겨울 12월 천자는 예기를 전부 배우고 태상(太常)에게 명하여 벽옹(辟雍)에서 태뢰(太牢)를 바쳐 공자(孔子)를 제사지내고, 안연(顏淵)을 함께 제사지내도록 했다.[6]

習鑿齒漢晉春秋曰: 是年,吳將朱然入柤中,斬獲數千;柤中民吏萬餘家渡沔。司馬宣王謂曹爽曰:「若便令還,必復致寇,宜權留之。」爽曰:「今不脩守沔南,留民沔北,非長策 也。」宣王曰:「不然。凡物置之安地則安,危地則危,故兵書曰,成敗,形也,安危,勢也,形勢御眾之要,不可不審。設令賊二萬人斷沔水,三萬人與沔南諸軍 相持,萬人陸鈔柤中,君將何以救之?」爽不聽,卒令還。然後襲破之。袁淮言于爽曰:「吳楚之民脃弱寡能,英才大賢不出其土,比技量力,不足與中國相抗,然 自上世以來常為中國患者,蓋以江漢為池,舟楫為用,利則陸鈔,不利則入水,攻之道遠,中國之長技無所用之也。孫權自十數年以來,大畋江北,繕治甲兵,精其 守禦,數出盜竊,敢遠其水,陸次平土,此中國所願聞也。夫用兵者,貴以飽待飢,以逸擊勞,師不欲久,行不欲遠,守少則固,力專則彊。當今宜捐淮、漢以南, 退卻避之。若賊能入居中央,來侵邊境,則隨其所短,中國之長技得用矣。若不敢來,則邊境得安,無鈔盜之憂矣。使我國富兵彊,政脩民一,陵其國不足為遠矣。 今襄陽孤在漢南,賊循漢而上,則斷而不通,一戰而勝,則不攻而自服,故置之無益于國,亡之不足為辱。自江夏已東,淮南諸郡,三后已來,其所亡幾何,以近賊 疆界易鈔掠之故哉!若徙之淮北,遠絕其間,則民人安樂,何鳴吠之驚乎?」遂不徙。


습착치의 한진춘추에서 이르길: 이 해에 오나라 장수 주연이 조중에 들어와 수 천명을 참하고 노획하므로 조중의 백성과 관리들 만 여가가 면수를 건넜다. 사마선왕이 조상에게 말하길 「만약 곧바로 돌아오도록 한다면 반드시 다시 도적들을 불러올 것이니 응당 당분간 머무르도록 해야 하오.」조상이 말하길 「지금 면수의 남쪽을 지키지 아니하고 백성들을 면수의 북쪽에 머물러두게 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오.」선왕이 말하길 「그렇지 않소. 무릇 사물은 안전한 곳에 두면 안전한 것이고 위태로운 곳에 두면 위태로운 법이오. 그러므로 병서에서 이르길 : 성패는 형(形)에 있고 안위는 세(勢)에 있으니 형세는 무리를 이끄는 요체로 살피지 않을 수 없다 하였소. 만약 적 2만명이 면수를 끊고 3만명이 면수 이남의 군대와 대치하며 만명이 육로로 조중을 습격한다면 그대께서는 장차 어찌 구하려고 하시오?」하였으나 조상은 듣지 않고 끝내 (면수 이북으로 간 백성들로 하여금) 돌아오도록 하였는데 주연이 이후에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원회(袁淮)는 조상에게 말하길 「오초지방의 백성들은 유약하고 무능하니 영재나 대현의 인물은 그 땅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역량을 비교하자면 중국과 서로 항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상세이래로 항상 중국의 걱정거리가 된 이유는 대체로 장강과 한수를 수로로 삼고 배들을 쓸모로 삼으면서 유리하면 육지에 올라와 노략질하고 불리하면 물속으로 들어가 공격을 하려고 해도 길이 멀어 중국의 장기가 쓰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손권은 10년 이래 강북을 수차례 공격하고 갑병을 보수하며 방어를 정밀하게 하면서 수차례 도적질을 해 왔는데 감히 물에서 멀리 떨어져 육지의 평토에 주둔하는 것이 바로 중국이 듣기 원하는 바입니다. 무릇 군대를 움직이는 자는 배부른 상태에서 배고픈 자들을 기다리고 편안한 상태에서 지친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을 귀중하게 여기니 군대는 오래되길 원하지 않고 행군은 멀리가길 원하지 않으며 지키는 바가 적으면 견고하고 힘을 전일하게 쓰면 굳건해집니다. 당금에 응당 회한의 이남을 버려서 퇴각해 피하여야 합니다. 만약 적들이 중앙에 들어와 거하면서 변경을 침입해 온다면 곧 그 단점을 따라서 중국의 장기가 쓸모 있어지게 됩니다. 만약 감히 오지 못한다면 곧 변경이 안녕을 얻고 노략질하는 도적의 우환이 없게 됩니다. 우리나라로 하여금 부유하고 군대가 강성하며 정치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백성들이 화합하도록 한다면 그 나라를 정복하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닙니다. 지금 양양은 외롭게 한수의 남쪽에 있는데 적군이 한수를 따라 북상하면 곧 끊어져 통하지 않게 되니 한번 싸워 이기게 되고 공격하지 않아도 스스로 복종하게 되므로 놔둔다 하더라도 나라에 보탬이 없고 잃는다 하더라도 치욕이 되지 않습니다. 강하로부터 동쪽 회남의 여러 군들은 3명의 군주가 다스린 이래로 몇 번이나 잃었는데 적국의 강역과 가까워 쉽게 노략당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백성들을) 회북으로 옮겨 그 사이를 멀리 끊어 놓는다면 곧 백성들이 안락한 생활을 누릴테니 어찌 놀라는 일이 있겠습니까? 」라 하였으나 마침내 옮기지 않았다.


8년(247) 봄 2월 1일 일식이 나타났다.

여름 5월 하동군 분(汾) 북쪽에 있는 10현을 분리하여 평양군(平陽郡)이라 했다.

가을 7월 상서 하안(何晏)이 상주했다.

- 국가를 잘 다스리는 자는 반드시 먼저 그 자신을 다스리고, 그 자신을 다스리는 자는 그가 배운 바에 따라 신중하게 합니다. 배운 것이 바르면 그 자신이 바르게 되고, 그 자신이 바르면 법령 같은 것이 없어도 모든 일을 잘 처리합니다. 배운 것이 바르지 못하면 그 자신도 바르지 못하고, 그 자신이 바르지 못하면 비록 명령을 내릴지라도 백성들이 복종하여 따르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백성의 군주가 되는 자는 교유할 때 반드시 정직한 사람을 선택하여 교류해야 하고, 음탕한 음악을 내쫓고 듣지 말며, 간사한 인물을 멀리하여 접근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야 사악한 마음이 생기지 않아 바른 도리만으르 드높일 수 있습니다. 말세의 어리석은 군주는 이익이 되는 것과 손해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군자를 배척하고 소인을 가까이 하고 충의롭고 선량한 사람은 멀리하고 간사하고 아첨떠는 사람을 총애하므로, 전인들은 제왕 곁을 차지하고 어지럽히는 사람을 사직에 사는 쥐에 비유했던 것입니다. 제왕의 어리석음과 밝음을 살펴보면 이런 일을 누적시킨 것입니다. 때문에 성현은 이 점을 가르치고 가장 큰 걱정으로 생각합니다. 순임금이 우임금을 경계하여, ‘이웃이구나, 이웃 이구나<상서 익직(益稷)>’라고 한 것은 접근하는 신하를 신중히 선택해야 된다는 말이고, 주공이 성왕을 경계하여 ‘친구여 친구여<상서 낙고(洛誥)>’라고 한 것은 교유할 때 신중히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상서 여형편(呂刑篇)에서 ‘천자 한 사람이 좋은 일을 하면, 억조의 백성들이 이익을 받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후로, 식건전(式乾殿 : 황후의 궁전)에 가거나, 후원에서 노닐 때는 대신들이 따라와서 유희와 연회를 종용하고, 동시에 문서를 열람하고 정사를 상의하여 폐하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고, 또 폐하를 위하여 유가 경전의 의미를 말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을 만대의 모범으로 삼아야 합니다.

겨울 12월 산기상기ㆍ간의대부 공예(孔乂)가 상주했다.

- 예법에는 천자의 궁전에 조각을 하고 다듬는 제도는 있지만, 붉은 색으로 꾸미는 것은 없습니다. 응당 예법에 따라 옛 제도를 회복해야 됩니다. 지금 천하는 이미 평정되었고, 임금과 신하가 명분이 정해져 분명하게 구분되었으므로, 폐하는 천자의 위치에서 게을리하지 않고 공평한 마음을 쓰고 상주고 벌주는 것을 신중히 살펴 행사하기만 하면 됩니다. 후원에서 말타기를 배우는 것을 멈추고, 나갈 때 반드시 수레나 연(輦 : 천자가 타는 수레)을 탈 수 있으면, 이것이 천하의 행복이며 신하들이 원하는 것입니다.

하안과 공의는 모두 나아가 조방의 결점에 대해 간언을 했던 것이다.

9년(248) 봄 2월 위장군ㆍ중서령 손자와 30일, 표기장군ㆍ중서감 유방이 관직에서 물러났다.

3월 1일 사도 위진(衛臻)이 관직에서 물러나 후작의 신분으로 사저로 돌아갔으며, 모두 특진(特進 : 제후 중에 공적이 있는 사람에게 주는 관직명)에 임명되었다.

4월 사공 고유가 사도로 임명되었다. 광록대부 서막(徐邈)은 사공으로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가을 9월 거기장군 왕릉을 사공으로 임명했다.

겨울 10월 거센 바람이 집을 훼손시키고 나무를 부러뜨렸다.

가평 원년(249) 봄 정월 6일 천자가 수레를 타고 고평릉(高平陵)을 참배했다.(주1) 태부 사마선왕이 상주하여 대장군 조상, 조상의 동생 중령군 조의, 무위장군 조훈(曹訓), 산기상시 조언(曹彦) 등이 파면되어 후작의 신분으로 사저로 돌아갔다. 10일, 담당관리가 상주하여 황문(黃門)의 장당(張當)을 체포하여 정위에게 넘겨주고, 그의 진술에 따라 조사해 보니 조상 등과 함께 반란을 계획한 흔적이 없었다.그러나 상서 정밀(丁謐)ㆍ등양(鄧颺)ㆍ하안(何晏), 사예교위 필궤, 형주자사 이승(李勝), 대사농 환범(桓範) 등은 모두 조상과 통하여 음모했으므로 그들 및 삼족을 모두 멸하였다. 구체적인 기록은 조상전(曹爽傳)에 있다. 18일, 대사면을 행했다. 19일, 태부(太傅) 사마선왕(司馬宣王)을 승상(丞相)으로 임명했지만, 그는 사양하고 원래의 자리에 있었다.(주2)

(주1)손성의 위세보(孫盛魏世譜) - 고평릉(高平陵)은 명제의 능묘로써 낙수(洛水) 남쪽(南) 대석산(大石山)에 있으며, 낙성(洛城)으로부터 90리 떨어진 곳이다.

(주2)孔衍漢魏春秋 - 詔使太常王肅冊命太傅為丞相,增邑萬戶,群臣奏事不得稱名,如漢霍光故事。太傅上書辭讓曰:「臣親受顧命,憂深責重,憑賴天威,摧弊姦凶,贖罪為幸,功不足 論。又三公之官,聖王所制,著之典禮。至于丞相,始自秦政。漢氏因之,無復變改。今三公之官皆備,橫復寵臣,違越先典,革聖明之經,襲秦漢之路,雖在異人,臣所宜正,況當臣身而不固爭,四方議者將謂臣何!」書十餘上,詔乃許之,復加九錫之禮。太傅又言:「太祖有大功大德,漢氏崇重,故加九錫,此乃歷代異 事,非後代之君臣所得議也。」又辭不受。    


공연의 한위춘추에 이르길 - 조서를 내려 태상 왕숙(王肅)으로 하여금 태부를 승상으로 책봉하게 하고 봉호를 1만호 늘리며 군신들이 주의를 올릴 때 이름을 쓰지 못하며 한나라 곽광의 고사대로 하도록 하였다. 태부가 상서하여 사양하며 이르길 「신이 친히 고명을 받으며 걱정이 깊고 책임이 막중하였으나 천위에 기대어 간사한 무리들을 없애고 속죄할 수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으니 공로는 족히 논할 것이 못됩니다. 또한 3공의 관직은 성왕의 제도이며 전례에 적혀있는 것입니다. 승상에 이르러서는 진시황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한나라가 그대로 이어받아 바꾸지 않았습니다. 지금 3공의 관제가 모두 완비됐는데 이유 없이 다시금 총신으로 (승상을 삼는다면) 앞선 제도를 어긴 것이고 성명한 경전을 바꿔 진한의 길을 답습하는 것인데 비록 다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신이 응당 바로잡아야 하거늘 하물며 신 자신이 이에 당하여 굳게 다투지 않는다면 사방의 의논하는 자들이 장차 신을 무엇이라 하겠습니까!」상서하길 10여 번이 되자 조서를 내려 마침내 허락하고 다시 9석의 예를 가하였다. 태부는 다시 말하길 「태조께서 대공대덕이 있으시어 한씨가 높고 무겁게 여긴 연고로 9석을 내린 것입니다. 이는 곧 조대가 바뀔 때의 비정상적인 일이니 후대의 군신이 의논할 바가 아닙니다. 」하고는 또한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여름 4월 8일 연호를 바꾸었다. 19일, 태위 자제가 세상을 떠났다.

겨울 12월 9일 사공 왕릉을 태위로 삼았다. 18일, 사예교위 손례를 사공으로 삼았다.

겨울 10월 특진 손자를 표기장군으로 임명했다.

11월 사공 손례(孫禮)가 세상을 떠났다.

12월 27일 동해왕 조림이 세상을 떠났다. 18일, 정남장군 왕창(王昶)이 장강을 건너 급습하여 오나라 군사를 격파시켰다.

3년(251) 봄 정월 형주자사 왕기(王基), 신성태수 진태(陳泰)가 오를 공격하여 격파시키자 수천 명이 항복하였다.

2월 남군(南郡)에 이릉현을 설치하여 항복하여 온 사람들을 거주시켰다.

3월 상서령 사마부(司馬孚)를 사공으로 삼았다.

4월 9일 정남장군 왕영을 정남대장군으로 임명했다. 17일, 대사면이 있었다.

5월 20일(?) 태위 왕릉이 자살했다.

6월 조표(曹彪)에게 죄를 대신하여 죽도록 했다.

가을 7월 19일 황후 견씨가 떠났다. 28일, 사공 사마부를 태위로 임명했다.

8월 5일 태부(太傅) 사마선왕(司馬宣王)이 세상을 떠나고 위장군(衛將軍) 사마경왕(司馬景王)을 무군대장군(撫軍大將軍)ㆍ녹상서사(錄尙書事)로 삼았다. 22일, 견황후를 태청릉(太淸陵)에 안장했다. 27일, 표기장군(驃騎將軍) 손자(孫資)가 세상을 떠났다.

11월 담당관리로부터 태조 제묘에서 제사를 받는 여러 공신들을 당시 관직에 따라서 순서를 정해야 된다는 상주가 있었는데, 태부 사마선왕은 높은 공적과 존중받는 작위로 가장 높은 위치에 놓였다.

12월 광록훈(光祿勳) 정충(鄭沖)을 사공으로 삼았다.

4년(252) 봄 정월 2일 무군대장군(撫軍大將軍) 사마경왕(司馬景王)을 대장군(大將軍)으로 삼았다. 2월, 장씨(張氏)를 세워 황후(皇后)로 삼고 대사면을 행하였다.

여름 5월 물고기 두 마리가 무기창고 지붕 위에 나타났다.[주1]

겨울 11월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 왕창(王昶), 정동장군(征東將軍) 호준(胡遵), 진남장군(鎮南將軍) 관구검(毌丘儉) 등에게 조서를 내려 오나라(吳)를 정벌하도록 했다.

12월 오의 대장군 제갈각(諸葛恪)이 맞아 싸워 동관에서 위나라 군사를 크게 무찔렀다. 위나라 군사는 전세가 불리했으므로 돌아왔다.[주2]

[주1] 한진춘추 - 처음에 손권은 소호(巢湖)를 막아 동흥제(東興隄)를 쌓았다. 그 후에 회남 지역을 정벌했다가 무너뜨리고 다시 쌓지 않았다. 이 해 제갈각이 장수와 군사에게 다시 둑을 쌓게 하고 좌우의 산을 연결하였으며 중간에 성을 쌓고, 전단(全端)과 유략(留略)에 시켜 지키게 하고 군을 이끌고 돌아왔다. 제갈탄이 사마경왕에게 (탄식하며?) 말했다.


「(오나라)놈 들이 마침내 이르렀으니 이를 이용해야합니다. 문서(文舒=왕창)에게 강릉을 압박하게 하고, 중공(仲恭=관구검)으로 하여금 무창으로 향하게 하여서 오군을 상류에 억류시키고 그 후 정졸을 골라 양 성을 공격하면 구원이 이를 때, 큰 수확이 가능할 것입니다.」


경제는 이를 좇았다.



[주2] 한진춘추(漢晉春秋) - 관구검과 왕창은 동쪽의 군세가 패배했다는 것을 듣고 각기 주둔지를 불사르고 도망하였다. 조정에서 논의를 하면서 제장들을 깎아내려 내쫓자고 하자 사마경제가 말했다.


「내가 공휴의 말을 듣지 않아 이지경에 이르렀는데 제장들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모두 원래대로 하였다.(용서하였다) 사마문왕이 감군으로 있으면서 제군을 총괄하였는데 오로지 문왕의 작위만을 깎아내렸을 뿐이다. 이 해 옹주자사 진태가 병주에 칙령을 내려 힘을 합쳐 호인을 토벌하게 해달라고 청구했는데 사마사가 이를 쫓았다. 군사가 다 모이지 않았는데 안문, 신흥 두 군에서 놀라서 반란을 일으켰다. 경왕이 또 사과하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나의 허물이고, 현백의 책임이 아니다!」


이에 위인들 모두가 부끄러워 하고 감복하기도 했다.


습착지가 말하기를 : 사마대장군은 두 번 패한 것을 끌어다가 자신의 허물로 여겨서 허물은 소멸되고 업적은 융성하게 되었으니 지혜롭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이에 실패를 꺼리고 허물을 밀어내며 많은 사람에게 잘못을 돌리고 항상 공로만을 쥐고 실패한 것을 감추려 했다면 윗사람이 아랫 사람의 마음이 흐트러지고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뿔뿔이 흩어졌을 것이니 아주 잘못 되었을 것이다. 군주가 된 사람이 만약 이 이치를 장악하여 국가를 다스린다면 실수를 행하였으나 이름을 드날릴 것이며 군사에서는 좌절하였다고 하나 싸워서는 이길 것이니 비록 백번 패해도 괜찮은데 하물며 두번인 경우에야 어떻겠는가!


5년(253) 여름 4월 대사면이 있었다.

5월 오나라 태부 제갈각이 합비의 신성을 포위하자, 태위(太尉) 사마부(司馬孚)에게 조서를 내려 그들을 막도록 했다.[주1]

가을 7월 제갈각이 물러나 돌아갔다.[주2]

[주1]漢晉春秋 - 是時姜維亦出圍狄道。司馬景王問虞松曰:「今東西有事,二方皆急,而諸將意沮,若之何?」松曰:「昔周亞夫堅壁昌邑而吳楚自敗,事有似弱而彊,或似彊而弱, 不可不察也。今恪悉其銳眾,足以肆暴,而坐守新城,欲以致一戰耳。若攻城不拔,請戰不得,師老眾疲,勢將自走,諸將之不徑進,乃公之利也。姜維有重兵而縣軍應恪,投食我麥,非深根之寇也。且謂我并力于東,西方必虛,是以徑進。今若使關中諸軍倍道急赴,出其不意,殆將走矣。」景王曰:「善!」乃使郭淮、陳泰 悉關中之眾,解狄道之圍;敕毌丘儉等案兵自守,以新城委吳。姜維聞淮進兵,軍食少,乃退屯隴西界。    


한진춘추에 이르길 - 당시에 강유 역시 출병하여 적도를 포위하였다. 사마경왕이 우송(虞松)에게 묻길 「지금 동방과 서방에 일이 있어 두 쪽이 모두 위급한데 여러 장수들은 의지가 꺾였으니 어찌하면 좋은가?」 우송이 말하길 「옛날 주아부가 창읍을 견벽하니 오나라와 초나라가 스스로 패퇴하였는데 일에는 약해보이지만 강한 것이 있고 혹은 강해보이지만 약한 것이 있으니 살피지 않으며 안 됩니다. 지금 제갈각은 정예병들을 모두 끌고 와서 족히 예기를 드러내 신성에 주둔하여 한 번의 결전을 벌이고자 합니다. 만약 성을 공격하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전투를 청해도 그럴 수 없다면 병사들은 피로하게 될 것이니 기세가 장차 스스로 떠나게 되어 있어 여러 장수들이 빨리 출전하지 않는 것이 마침내 공의 이득입니다. 강유는 중병을 거느리고 현군으로 제갈각의 군세에 호응하는데 우리 땅에서 식량을 구하는지라 뿌리가 깊은 적이 아닙니다. 또한 말하길 우리가 동쪽에 힘을 모으고 있어 서쪽은 반드시 텅비게 될 것이므로 이로써 빨리 진군한 것입니다. 지금 만약 관중의 여러 군대로 하여금 빨리 진군하도록 하여 예상치 못하게 출병한다면 아마도 바로 도망칠 것입니다. 」하니 경왕이 말하길 「훌륭하구나!」하고는 이에 곽회, 진태에게 명령을 내려 관중의 군대를 모두 이끌고 적도의 포위를 풀고 관구검에게 명령을 내려 군대를 지휘하여 스스로 지키되 신성은 오나라가 마음대로 공격하게 내버려 두도록 하였다. 강유는 곽회의 군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듣고 군량이 적자 마침내 퇴각하여 농서의 경계에 주둔하였다.

[주2] 이때, 장특(張特)이 신성을 지키고 있었다. 위략(魏略)에서 이르길: [[장특전]]으로 분할


8월 조서를 내렸다.

- 이미 고인이 된 중랑 서평(西平)의 곽수(郭脩)는 절개를 지켜 품행을 높이고 마음이 곧았다. 이전에 촉나라 대장 강유(姜維)가 곽수가 지키는 군을 침범하여 약탈을 자행하여, 곽수를 붙잡아 촉나라로 돌아갔었다. 작년 촉나라의 대장군 비의(費衤)가 많은 군사를 인솔하여 위나라 변방을 침범하려는 음모를 세우고, 한수(漢水)를 지나면서 많은 빈객을 초대하여 연회를 열었을 때, 곽수는 모두 앉아 있는 중앙에서 몸소 비의를 찔러 죽였는데, 그 용감함은 섭정(攝政)을 능가했으며, 공로는 부개자(傅介子) -한나라 사람으로 누란왕(樓蘭王) 안귀(安歸)를 참수시킴- 를 능가했다. 그는 자신의 몸을 희생해 인(仁)을 이루고, 생명을 버리고 신의를 얻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소. 일이 끝나 보상과 은총을 더함은 충의로운 행위를 드높이기 위함이며, 그의 자손에게 복을 주는 것은 장래 사람들에게 그의 행위를 본받도록 장려하고 권하기 위함이다. 곽수를 장락향후(長樂鄕侯)로 추증하고, 식읍 1천 호를 주고, 시호를 위후(威侯)라고 하라. 그리고 그의 아들에게는 부친의 작위를 잇도록 하고, 봉거도위(奉車都尉)에 임명하여 은 1천 병, 비단 1천 필을 하사하라. 죽은 자와 산 자에게 명예와 은총을 주어 영원히 후세에 전하라.


위씨춘추에서 이르길 : 곽수(郭脩)의 자는 효선(孝先)으로, 본디 행실로써 서주(西州)에 이름이 알려졌다. 강유가 그를 겁박하였으나, 곽수는 굴하지 않았다. 유선이 (곽수를) 좌장군으로 삼자, 곽수는 유선을 찌르려 하였는데,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어, 매번 경하(慶賀)할 때마다 절하며 앞으로 나아갔으나 유선을 좌우에서 모시고 있는 사람들에게 저지되어 일이 바로 이루어질 수 없게 되자 비의를 죽였다고 한다.

신 배송지가 옛날 사생취의(舍生取義 : 목숨을 버리고 의를 취함) 한 것을 볼 때, 반드시 이치가 있어, 어떤이는 은덕을 느끼고 (이를) 품고서 (거사를 실행했으며), 목숨을 버리며 후회를 남기지 않았고, (또) 어떤 이는 이해를 결판짓는 기회에서, 기회에 응하여 분발하였으니, (위의) 조서에서 말하는 섭정, 부개자에 대한 칭송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번) 일은 이와 같은 부류가 아닌데, 즉 함부로 망령되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위와 촉은 비록 적국이긴 하나, 조양자가 지씨를 멸한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연나라 태자 단의 위급한 때였던 것도 아닙니다 ; 또 유선은 보통 이하의 군주이고, 비의는 중간 정도의 재능을 가진 재상이므로, 두 사람의 존망은 (나라의) 흥망과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곽수는 위에 있을 때 서주(西州)의 남자일 뿐이었고, 일찌기 촉에 사로잡혔으니, 이미 욕을 당하지 않으려 절개를 지켰던 것이 아니고, 또 위나라에 대해서도 녹봉을 받은 빚이 없으니, 당시 임금의 부림을 받았다고 할 수도 없으므로, (이는) 이유도 없이 별것도 아닌 일에서 헛되이 그 몸을 망친 것이니, 의(義)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공(功)을 세운 것도 아닙니다. 가히 '절류번포(折柳樊圃)' 라 할 수 있고, 여기에서 말하는 광부(狂夫)가 바로 이를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소제 조방이 즉위하여 이 해에 이르기까지 국내의 군ㆍ국ㆍ현ㆍ도 등을 많이 설치했다가 철회하고, 오래지 않아 다시 설치한 것 등은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6년(254) 봄 2월 1일 진동장군 관구검이 상서를 올렸다.

- 이전에 제갈각이 합비의 신성을 포위하였을 때, 성안에서는 병사 유정(劉整)을 보내 포위망을 뚫고 소식을 전하도록 하였는데, 적군에게 붙잡혀 전하려는 소식을 추궁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유정에게, ‘제갈공은 너를 살려주려고 하니 전부 말하라’라고 했습니다. 유정은 욕을 하면서 ‘죽은 개새끼들, 이것이 무슨 말이냐! 나는 반드시 죽어서 위나라 귀신이 되지 구차하게 삶을 구하지 않을 것이고, 귀신이 되어서 너희들을 따라가겠다. 나를 죽이려면 빨리 죽여라!’고 하고, 죽음에 이르러서도 끝내 다른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또 병사 정상(鄭像)을 성밖으로 내보내 소식을 전하려 했는데, 어떤 사람이 제갈각에게 이 일을 말하였으므로 제갈각은 기마대를 보내 포위망을 따라 발자취를 찾아 정상을 붙잡아 돌아왔습니다. 너댓 명이 말채찍으로 정상을 때리고, 손을 뒤로 결박하여 성 주변으로 데려가더니 그에게 성안을 향해 ‘후원할 대군은 벌써 낙양으로 돌아갔다. 일찍 투항하는 것이 낫다’라고 큰소리로 외치도록 했다. 정상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대군들은 벌써 포위망 밖에까지 와 있으니, 여러분 힘내시오’라고 외쳤다. 적군은 칼로 그의 입을 잘라 말을 못하게 했지만, 정상은 여전히 큰소리로 외쳐 성안에서 듣고 알도록 했습니다. 유정과 정상은 일개 병사로써 신의를 지키고 절조를 보존했습니다. 그들의 자식들은 응당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합니다.

조방이 조서를 내렸다.

- 빛나는 작위는 일등공신을 기리기 위함이고, 두터운 상을 주는 것은 열사를 총애하기 위함이다. 유정과 정상은 연락할 사자를 뽑는데 응모하여 성을 나와 서신을 전하기 위해 몇 겹으로 에워싸인 포위망을 뚫고 칼과 창을 피하지 않고 자신을 돌보지 않으면서 신의를 지키려했다. 불행하게 붙잡혔으나 더욱 절조를 지켜 육군(六軍)의 대세를 드높이고 성을 지키는 사람들의 두려움을 가라앉혀 안정되게 하고, 위험에 임하면서도 돌아보지 않고 한마음으로 명을 전했다. 옛날 춘추시대 때 해양(解楊)은 초나라에 잡혔으나 두 마음을 갖지 않고 죽었으며, 서한 때 진나라의 노중대부(路中大夫)는 죽음으로써 사명을 다했는데, 이런 사람들을 유정과 정상에 비교해도 그들은 뛰어넘을 수 없다. 지금 유정과 정상에게는 관중후(關中侯)의 작위를 주어, 병사의 명부에서 삭제하라. 그들의 자식들에게는 작위를 잇게 하고, 뒷일은 부곡장(部曲將)이 나랏일로 죽었을 때 하는 것에 따라 처리하라.

22일, 중서령(中書令) 이풍(李豐)은 황후의 부친 광록대부 장집(張緝) 등과 결탁하여 대신을 바꾸고, 태상 하후현(夏侯玄)을 대장군으로 삼으려고 모의하였다. 일이 발각되었고, 연루된 자는 모두 주살당했다. 23일, 대사면을 행했다.

3월 황후 장씨(張氏)를 내쫓았다.

여름 4월 왕씨(王氏)를 황후로 세웠으며, 대사면을 행했다.

5월 황후(后)의 부친인 봉거도위(奉車都尉) 왕기(王夔)를 광명향후(廣明鄕侯)ㆍ광록대부(光祿大夫)ㆍ특진(特進)의 자리에 임명하였으며, 왕기의 처 전씨(田氏)를 선양향군(宣陽鄕君)으로 삼았다.

가을 9월 대장군(大將軍) 사마경왕(司馬景王)은 황제의 계획을 황태후(皇太后)에게 말했다.(주1) 19일, 황태후가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주2)

(주1)세어급위씨춘추병운(世語及魏氏春秋並云)- 이 해 가을, 강유(姜維)가 농우(隴右)로 침입하였다. 그 당시 안동(安東) 장군 사마문왕(司馬文王)은 허창(許昌)을 지키고 있었는데, 강유를 정벌하기 위해 수도에 불러들였다. 황제는 평락관(平樂觀)에서 군대에 임하여 지나왔다. 중령군(中領軍) 허윤(許允)과 가까운 신하들은 사마문왕이 거부하자 그를 살해하려고 모의하고, 그 군대를 지휘하에 두고 대장군을 추방하려고 했다. 조서는 이미 어전에 올려졌고 사마문왕이 조정으로 들어왔을 때, 황제가 마침 밥을 먹고 있었는데, 관리 운오(雲午) 등이 ‘파란 머리 닭, 파란 머리 닭(靑頭鷄, 靑頭鷄)’이라고 노래하였다. ‘파란 머리 닭’이란 오리를 뜻한다. 황제는 두려워 감히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마문왕은 병사를 이끌고 성으로 들어갔다. 사마문왕은 이 때문에 황제를 폐위할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臣松之案夏侯玄傳及魏略,許允此年春與李豐事相連。豐既誅,即出允為鎮北將軍,未發,以放散官物收付廷尉,徙樂浪,追殺之。允此秋不得故為領軍而建此謀。    


신 송지가 생각건대 하후현전과 위략을 보면 허윤이 이 해 봄에 이풍의 사건에 연루되어 이풍이 이미 주살당하자 즉시 허윤을 진북장군으로 보냈는데 떠나기 전에 관부의 물품을 함부로 사용했다는 죄목으로 잡혀 정위에게 붙여지고 낙랑으로 유배당했는데 도중에 보낸 사람에게 살해당하였습니다. 허윤은 이 해 가을에 중령군이 되어 이 계책을 짤 수 없었습니다.


(주2) 위서(魏書)曰:是日,景王承皇太后令,詔公卿中朝大臣會議,群臣失色。景王流涕曰:「皇太后令如是,諸君其若王室何!」咸曰:「昔伊尹放太甲以寧殷,霍光廢昌邑以 安漢,夫權定社稷以濟四海,二代行之于古,明公當之於今,今日之事,亦唯公命。」景王曰:「諸君所以望師者重,師安所避之?」於是乃與群臣共為奏永寧宮 曰:「守尚書令太尉長社侯臣孚、大將軍武陽侯臣師、司徒萬歲亭侯臣柔、司空文陽亭侯臣沖、行征西安東將軍新城侯臣昭、光祿大夫關內侯臣邕、太常臣晏、衛尉 昌邑侯臣偉、太僕臣嶷、廷尉定陵侯臣(繁)〔毓〕、大鴻臚臣芝、大司農臣祥、少府臣(褒)〔袤〕、永寧衛尉臣(禎)〔楨〕、永寧太僕臣(閎)〔閣〕、大長 秋臣模、司隸校尉潁昌侯臣曾、河南尹蘭陵侯臣肅、城門校尉臣慮、中護軍永安亭侯臣望、武衛將軍安壽亭侯臣演、中堅將軍平原侯臣德、中壘將軍昌武亭侯臣廙、 屯騎校尉關內侯臣陔、步兵校尉臨晉侯臣建、射聲校尉安陽鄉侯臣溫、越騎校尉睢陽侯臣初、長水校尉關內侯臣超、侍中臣小同、臣顗、臣酆、博平侯臣表、侍中中 書監安陽亭侯臣誕、散騎常侍臣瑰、臣儀、關內侯臣芝、尚書僕射光祿大夫高樂亭侯臣毓、尚書關內侯臣觀、臣嘏、長合鄉侯臣亮、臣贊、臣騫、中書令臣康、御史 中丞臣鈐、博士臣範、臣峻等稽首言:臣等聞天子者,所以濟育群生,永安萬國,三祖勳烈,光被六合。皇帝即位,纂繼洪業,春秋已長,未親萬機,耽淫內寵,沈 漫女色,廢捐講學,棄辱儒士,日延小優郭懷、袁信等於建始芙蓉殿前裸袒游戲,使與保林女尚等為亂,親將後宮瞻觀。又於廣望觀上,使懷、信等於觀下作遼東妖 婦,嬉褻過度,道路行人掩目,帝於觀上以為讌笑。於陵雲臺曲中施帷,見九親婦女,帝臨宣曲觀,呼懷、信使入帷共飲酒。懷、信等更行酒,婦女皆醉,戲侮無 別。使保林李華、劉勳等與懷、信等戲,清商令令狐景呵華、勳曰:『諸女,上左右人,各有官職,何以得爾?』華、勳數讒毀景。帝常喜以彈彈人,以此恚景,彈 景不避首目。景語帝曰:『先帝持門戶急,今陛下日將妃后游戲無度,至乃共觀倡優,裸袒為亂,不可令皇太后聞。景不愛死,為陛下計耳。』帝言:『我作天子, 不得自在邪?太后何與我事!』使人燒鐵灼景,身體皆爛。甄后崩後,帝欲立王貴人為皇后。太后更欲外求,帝恚語景等:『魏家前後立皇后,皆從所愛耳,太后必 違我意,知我當往不也?』後卒待張皇后疏薄。太后遭(合)〔郃〕陽君喪,帝日在後園,倡優音樂自若,不數往定省。清商丞龐熙諫帝:『皇太后至孝,今遭重 憂,水漿不入口,陛下當數往寬慰,不可但在此作樂。』帝言:『我自爾,誰能奈我何?』皇太后還北宮,殺張美人及禺婉,帝恚望,語景等:『太后橫殺我所寵 愛,此無復母子恩。』數往至故處啼哭,私使暴室厚殯棺,不令太后知也。每見九親婦女有美色,或留以付清商。帝至後園竹間戲,或與從官攜手共行。熙白:『從 官不宜與至尊相提挈。』帝怒,復以彈彈熙。日游後園,每有外文書入,帝不省,左右曰『出』,帝亦不索視。太后令帝常在式乾殿上講學,不欲,使行來,帝徑 去;太后來問,輒詐令黃門答言『在』耳。景、熙等畏恐,不敢復止,更共諂媚。帝肆行昏淫,敗人倫之敘,亂男女之節,恭孝彌頹,凶德寖盛。臣等憂懼傾覆天 下,危墜社稷,雖殺身斃命不足以塞責。今帝不可以承天緒,臣請依漢霍光故事,收帝璽綬。帝本以齊王踐祚,宜歸藩于齊。使司徒臣柔持節,與有司以太牢告祀宗 廟。臣謹昧死以聞。」奏可。

- 황제 조방은 이미 성년이 되었지만, 국가의 정무를 직접 처리하지 않고, 부인에게 탐닉하고 여색에 빠져 매일 배우들을 불러들여 추악한 유희를 즐기고 있고, 후궁 여자들을 맞아 내전에 머물게 하여 인륜의 질서를 파괴하고 남녀의 정절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소. 공손함과 효도하는 마음은 날마다 줄어들고, 도리에 역행하는 오만함만이 점점 심해져 하늘이 명한 대업을 잊고 종묘를 받들 수 없게 되었소. 겸태위(兼太尉) 고유에게 간책(簡冊)을 받들어 종묘에 제사지내어 보고하고 조방을 제나라로 돌려보내 옛날대로 번왕을 담당하도록 하여 황제의 자리에서 떠나도록 하시오.

이 날 황제는 다른 궁전으로 옮겨 머물렀으며, 이때 그는 스물 셋이었다. 사자가 부절을 갖고 호송하였다. 하내군(河內郡) 중문(重門)에 제왕의 궁궐을 만들었고, 제도는 모두 번국의 예식과 같았다.(주1) 22일, 곽태후가 명을 내렸다.

- 동해왕(東海王) 조림(曹霖)은 고조 문황제(文皇帝)의 아들이다. 조림의 여러 아들들은 위나라와 가장 가까운 인척이다. 조림의 아들 고귀향공(高貴鄕公) 조모(曹髦)에게는 대업을 이룰 역량이 있으니, 그를 명제의 후계자로 삼으려고 한다.(주2)

[주1] 위략(魏略) - 王將廢帝,遣郭芝入白太后,太后與帝對坐。芝謂帝曰:「大將軍欲廢陛下,立彭城王據。」帝乃起去。太后不悅。芝曰:「太后有子不能教,今大將軍意已成,又 勒兵于外以備非常,但當順旨,將復何言!」太后曰:「我欲見大將軍,口有所說。」芝曰:「何可見邪?但當速取璽綬。」太后意折,乃遣傍侍御取璽綬著坐側。 芝出報景王,景王甚歡。又遣使者授齊王印綬,當出就西宮。帝受命,遂載王車,與太后別,垂涕,始從太極殿南出,群臣送者數十人,太尉司馬孚悲不自勝,餘多 流涕。王出後,景王又使使者請璽綬。太后曰:「彭城王,我之季叔也,今來立,我當何之!且明皇帝當絕嗣乎?吾以為高貴鄉公者,文皇帝之長孫,明皇帝之弟 子,於禮,小宗有後大宗之義,其詳議之。」景王乃更召群臣,以皇太后令示之,乃定迎高貴鄉公。是時太常已發二日,待璽綬於溫。事定,又請璽綬。太后令曰: 「我見高貴鄉公,小時識之,明日我自欲以璽綬手授之。」

[주2] 위서(魏書) - 景王復與群臣共奏永寧宮曰:「臣等聞人道親親故尊祖,尊祖故敬宗。禮,大宗無嗣,則擇支子之賢者;為人後者,為之子也。東海定王子高貴鄉公,文皇帝之孫,宜 承正統,以嗣烈祖明皇帝後。率土有賴,萬邦幸甚,臣請徵公詣洛陽宮。」奏可。使中護軍望、兼太常河南尹肅持節,與少府(褒)〔袤〕、尚書亮、侍中表等奉法 駕,迎公于元城。魏世譜曰:晉受禪,封齊王為邵陵縣公。年四十三,泰始十年薨,諡曰厲公。

<<진수의 평>>

고대에는 천하를 공고의 것으로 생각하고, 오직 현자들에게 주었다. 후세에는 왕위를 세습하여 적자를 후계자로 세웠다. 만일 적자가 없으면 방계 친족 중에서 덕행이 있는 사람을 선발하였는데, 가령 한대의 문제ㆍ선제가 그러했으니, 이는 바꿀 수 없는 법칙이다. 그런데 명제는 이와 같이 하지 않고 사사로운 애정을 중시하여 어린 아이를 어루만지며 기르고, 그에게 천자의 자리를 전해주었고, 똑 적합한 인물에게 위탁의 책임을 맡기지 않고 반드시 일족을 정치에 참여시킨 결과 조상은 주살되고, 제왕 조왕도 자리에서 쫓겨났다.

고귀향공 조모는 재간이 있고 총명하여 어린 시절에 완성을 보았으며, 의론을 좋아하고 문장을 애호하여 문제의 풍모를 갖춘 인물이었다. 그러나 사람됨이 경솔하고 분노에 차면 함부로 행동하여 끝내는 스스로 큰 재난 속으로 빠져들었다. 

진류왕(조환)은 정사에 관해 묻지 않고 재상이 정치를 하도록 하고 한위(漢魏)의 전례를 받들어 황위를 진(晉)에게 양도하였다. 그래서 진나라로부터 대국(大國)으로 봉해지고, 진왕조의 빈객이 되어 산양공(山陽公 : 후한의 헌제)보다 더 총애를 받았다.

분류 :
위서
조회 수 :
8327
등록일 :
2013.05.03
11:18:05 (*.148.47.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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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09
17:15:51
(*.104.141.18)
주석이 색깔이 하나도 없었고 번역된 강유 농우 주석의 번역이 엉뚱한 곳으로 가 있어서 수정했습니다.

동흥제 관련 한진춘추 번역은 KM 학생님 작품입니다.http://rexhistoria.net/108588

코렐솔라

2013.08.13
17:15:20
(*.0.203.183)
그건 그렇고 수신기를 읽고 있는데 배송지가 여기다가 화완포에 대한 평을 썼군요. 아마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헛소리를 한다고 했으려나.;;

venne

2014.04.16
22:00:26
(*.186.21.9)
곽수를 붙잡아 초나라로 돌아갔었다. 작년 위나라의 대장군 비의(費衤)가

초나라, 위나라 -> 촉나라로 수정요청합니다.

코렐솔라

2016.10.06
00:42:10
(*.55.70.40)
넵, 2년이 넘게 지나긴 했지만 이제 발견해서 반영했습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코렐솔라

2016.10.06
00:40:40
(*.55.70.40)
환제 때 화완포에 대한 얘기와 전론을 세긴 비석, 주연이 사마의한테 털린 간보진기의 얘기는 dragonrz님의 번역입니다. http://rexhistoria.net/158591

주연이 약탈해대자 양양을 포기하자는 습착치의 주석과 공연의 한진춘추에서 태부를 승상으로 임명하는 일화, 우송이 대답하는 일화, 허윤이 참여한 것은 말도 안 된다는 배송지의 평 역시 dragonrz님의 번역입니다. http://rexhistoria.net/158592

번역 감사합니다.

위의 것들은 모두 위에 한문이 있고 밑에 dragonrz님의 번역이 있기에 번역이 안 된 것이 아님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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