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귀향공(高歸鄕公)은 휘가 모(髦)이고 자가 언사(彦士)이며, 문제의 손자이고 동해정왕(東海定王) 조림의 아들이다.

정시 5년(244) 담현(郯縣)의 고귀향공으로 봉해졌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학업을 일찍 이루었다.

제왕이 쫓겨나자, 공경들이 상의하여 조모(曹髦)를 맞아들여 즉위시켰다.

10월 4일 고 귀향공(高歸鄕公)이 현무관(玄武館)에 도착하자 대신들은 상주하여 전전(前殿)에서 머물기를 요청했지만, 조모는 선제가 옛날에 살던 곳이라고 하며 피하고 서상(西廂)에 머물려고 했다. 대신들은 또 법가(法駕)로 그를 맞으려고 했지만, 조모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5일, 조모가 낙양으로 들어가자 대신들은 서액문(西掖門) 남쪽에서 맞아 배례하였으며, 조모가 수레에서 내려 인사에 답하려고 하자, 옆에서 안내하는 자가 말했다.

“의례에 따르면 인사하지 않아도 됩니다.”

조모는 말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신하요.”

그리고 인사에 답했다. 지거문(止車門)에 이르러서 조모는 수레에서 내렸다.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말했다.

“옛날에는 수레를 타고 궁궐까지 들어갔습니다.”

조모는 말했다.

“나는 황태후의 부름을 받았을 뿐이지, 어떻게 하는 바를 모르오.”

그래서 그는 그대로 태극동당(太極東堂)까지 걸어가 태후를 만났다. 그 날, 조모는 태극전전(太極前殿)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며 즉위식에 참가한 백관들은 모두 매우 기뻐했다.

魏氏春秋曰:公神明爽雋,德音宣朗。罷朝,景王私曰:「上何如主也?」鍾會對曰:「才同陳思,武類太祖。」景王曰:「若如卿言,社稷之福也。」

조모가 조서를 내렸다.

- 옛날, 삼조(三祖 : 武帝ㆍ文帝ㆍ明帝)는 신과 같은 용감함과 성스러운 덕이 있었으며 천명에 응하여 황제의 자리를 이어받은 것이다. 제왕(齊王)은 황제의 자리를 이은 후, 법도를 위반하고 제멋대로 행동하여 선조의 덕을 뒤엎었다. 황태후는 사직의 중대함을 깊이 생각하고 정치를 보좌하는 대신들의 계획을 받아들여 제왕을 내쫓고 천하를 다스리는 중대한 임무를 나 한 사람에게 주었다. 

나는 보잘 것 없는 몸으로 왕공의 위에 자리하여 아침저녁으로 두려워하며, 선조들의 큰 가르침을 이어 중흥의 대업을 회복시킬 수 없을까 깊은 계곡에 처한 것처럼 전전긍긍하고 있다. 지금 조정의 여러 대신들은 수족이 되어 나를 보좌하고, 사방의 장수들은 병사를 이끌고 무위를 떨쳐 나를 도우며, 모두 덕을 쌓고 공적을 쌓아 황제의 궁전에 충성하고 있다. 

선조ㆍ선부의 덕 있는 신하나 측근에 있는 관료들에 의지하여 국가를 안정되게 한다면 나는 비록 어리석지만 천하를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군왕의 도는 덕망의 두터움을 천지와 같게 하고, 은혜를 온 세상에 펼치며, 자애를 으뜸으로 하고, 좋고 나쁨을 백성들에게 보여주고, 그런 연후에 위쪽에서 교화를 실시하면 아래쪽에서 모든 백성들이 따라 한다고 들었다. 나는 비록 덕이 없고 군왕의 큰 도리와는 멀지만 천하 사람들과 함께 도를 따라가고 싶다. 상서에 ‘백성을 편안하게 하면 은혜이고, 만인이 이것을 생각한다.’는 말이 있다.-

대사면을 실시하고 연호를 바꾸었다. 아울러 황제가 사용하는 수레, 옷, 후궁의 비용을 줄이고, 또 상방(尙方)과 어부(御府)에서 각종 사치스럽고 호화로워 실제적인 용도가 없는 물건을 만들지 못하도록 하였다.

정원(正元) 원년(251) 겨울 10월 7, 시중(侍中)에게 부절(節)을 갖게 하여 사방으로 분산 파견하여 풍속을 관찰하게 하고 군사와 백성들을 위로하게 하였으며,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써 직업을 잃은 사람을 살피도록 하였다. 

8 일, 대장군(大將軍) 사마경왕(司馬景王)에게 고급 관원을 상징하는 황금 월(鉞)을 주어 조정에 들어올 때 빨리 달리지 않고 어떤 일을 상주할 때는 자신의 관직만 말하고 이름을 말하지 않으며 검을 차고 신을 신고 궁전에 오를 수 있도록 했다. 

13일, 황룡이 업현의 우물 속에서 나타났다.(21)

[21] 그 당시 용이 출현하면 사람들은 모두 길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황제는 용이란 군주의 덕을 상징하며, 올라가 하늘에 안주하고, 아래로 내려와서는 밭에 안주하며, 자주 우물 속에 숨어 있는 것이므로 길조가 아니겠는가라고 생각하고는 잠용(潛龍)이란 시를 지어 자신의 덕을 직접 풍자하였으나, 사마문왕은 이 시를 읽고 불쾌하게 생각했다.

19일,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황제를 폐립하는 문제에 관한 정책을 결정한 공적을 논하게 하도록 하여 각기 차이를 두어 작위를 봉하고 식읍을 증가시켰으며, 관직을 올려 주고 하사품을 주었다.

2년(255) 봄 정월 12일, 진동장군 관구검과 양주자사 문흠(文欽)이 반란을 일으켰다. 25일, 대장군 사마경왕이 이들을 정벌했다. 

30일, 거기장군 곽회(郭淮)가 세상을 떠났다.

윤달 16일, 낙가(樂嘉)에서 문흠을 쳐부수자, 문흠은 도주하여 오나라로 달아났다. 21일, 안풍진(安風淮)의 도위(都尉)가 관구검(儉)을 참수하고 머리를 수도로 보내왔다.

세어(世語) - 大將軍奉天子征儉,至項;儉既破,天子先還。臣松之檢諸書都無此事,至諸葛誕反,司馬文王始挾太后及帝與俱行耳。故發詔引漢二祖及明帝親征以為前 比,知明帝已後始有此行也。案張璠、虞溥、郭頒皆晉之令史,璠、頒出為官長,溥,鄱陽內史。璠撰後漢紀,雖似未成,辭藻可觀。溥著江表傳,亦粗有條貫。惟 頒撰魏晉世語,蹇乏全無宮商,最為鄙劣,以時有異事,故頗行於世。干寶、孫盛等多采其言以為晉書,其中虛錯如此者,往往而有之。

29일, 또 회남의 사대부와 백성들 가운데 관구검과 문흠에게 속은 사람을 특별히 사면해 주었다. 진남장군 제갈탄(諸葛誕)을 진동장군으로 삼았다. 사마경왕이 허창에서 사망했다.

2월 5일, 위장군 사마문왕을 대장군 녹상서사(錄尙書事)로 임명했다. 

12일, 오나라 대장 손준(孫峻) 등이 10만 군사를 거느리고 수춘(壽春)에 도달했지만, 제갈탄이 이들을 맞아 싸워 격파시켰으며, 오나라 좌장군 유찬(留贊)을 죽이고 승전보를 수도로 보냈다.

3월, 변씨(卞氏)를 내세워 황후로 삼고, 대사면을 실시했다.

여름 4월 3일, 황후의 부친 변륭(卞隆)을 열후로 봉했다. 23일, 정남대장군 왕영을 표기장군으로 삼았다.

가을 7월, 정동대장군 호준(胡遵)을 위장군에, 진동대장군 제갈탄을 정동대장군에 임명했다.

8월 2일, 촉나라의 대장군 강유가 적도(狄道)를 침범하자, 옹주자사 왕경(王經)이 조서(洮西)에서 강기와 대전하였는데, 왕경은 크게 패하고 돌아와서 적도성을 지켰다. 

22일, 장수교위 등애(鄧艾)를 안서장군 대리로 임명하고, 정서장군 진태(陳泰)와 힘을 합쳐 강유를 방어하도록 했다. 

19일, 또 태위 사마부를 보내 뒤를 잇는 부대가 되도록 하였다.

9월 21일, 황제는 상서 공부를 끝마치고, 경전을 직접 강의한 사공 정충(鄭沖), 시중 정소동(鄭小同) 등에게 각기 다르게 하사품을 주었다. 

25일, 강유가 물러나 촉나라 경내로 돌아갔다.

겨울 10월, 조서를 내렸다.

- 나는 덕이 부족하여 외적의 포학한 행위를 막을 수 없었으므로 촉나라의 적군들로 하여금 국경 지대를 침범하도록 하였다. 조서 싸움에서 져서 사망한 장수의 수가 모두 천여 명이나 된다. 어떤 이는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어 원귀가 돌아오지 못했고, 어떤 이는 적군의 포로가 되어 타향에서 떠돌아다니고 있다. 나는 이 때문에 깊이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지금 관련 있는 군의 전농(典農) 및 안이호군(安夷護軍)ㆍ무이호군(撫夷護軍) 등 각각 부에서, 관리들로 하여금 이런 사람들이 있는 가솔들을 위문하도록 하고, 1년간 부역을 면제해 주도록 하라. 힘을 다해 싸우다 전사한 사람들에게는 모두 옛 제도에 따라 조치하고 누락되는 바가 없도록 하라. -

11월 16일, 농 우(隴右) 사군(四郡 : 농서ㆍ남안ㆍ천수ㆍ광위)과 금성은 매년 적군의 침공을 받았으며, 어떤 사람은 모반하여 적에게 투항하기도 했는데, 그 친족으로 국내에 남아 있는 자들은 불안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그들을 사면해 주었다.

12월 5일(?), 조서를 내렸다.

- 지난 번 조서 싸움에서 장수와 관리ㆍ병사ㆍ백성들 중에 전쟁터에서 싸우다 사망했거나 조수에 빠져 익사한 사람들이 있는데, 유골을 거두지 못하고 들녘에 방치해 두었으므로 항상 이 일을 가슴 아프게 생각했다. 지금 정서장군과 안서장군은 각각 부하들을 시켜 전쟁터나 해안가에 버려진 시체를 찾아내어 거두어들이고 주검은 매장하여 유족이나 죽은 자를 위로하도록 하라.-

감로(甘露) 원년(256) 봄 정월 24일, 청룡이 지현(軹縣)의 우물 속에서 나타났는데, 28일에 패왕(沛王) 조림이 세상을 떠났다.

위씨춘추(魏氏春秋) - 二月丙辰,帝宴群臣於太極東堂,與侍中荀顗、尚書崔贊、袁亮、鍾毓、給事中中書令虞松等並講述禮典,遂言帝王優劣之差。帝慕夏少康,因問顗等曰:「有夏既 衰,后相殆滅,少康收集夏眾,復禹之績,高祖拔起隴畝,驅帥豪雋,芟夷秦、項,包舉宇內,斯二主可謂殊才異略,命世大賢者也。考其功德,誰宜為先?」顗等 對曰:「夫天下重器,王者天授,聖德應期,然後能受命創業。至於階緣前緒,興復舊績,造之與因,難易不同。少康功德雖美,猶為中興之君,與世祖同流可也。 至如高祖,臣等以為優。」帝曰:「自古帝王,功德言行,互有高下,未必創業者皆優,紹繼者咸劣也。湯、武、高祖雖俱受命,賢聖之分,所覺縣殊。少康、殷宗 中興之美,夏啟、周成守文之盛,論德較實,方諸漢祖,吾見其優,未聞其劣;顧所遇之時殊,故所名之功異耳。少康生於滅亡之後,降為諸侯之隸,崎嶇逃難,僅 以身免,能布其德而兆其謀,卒滅過、戈,克復禹績,祀夏配天,不失舊物,非至德弘仁,豈濟斯勳?漢祖因土崩之勢,仗一時之權,專任智力以成功業,行事動 靜,多違聖檢;為人子則數危其親,為人君則囚繫賢相,為人父則不能衛子;身沒之後,社稷幾傾,若與少康易時而處,或未能復大禹之績也。推此言之,宜高夏康 而下漢祖矣。諸卿具論詳之。」翌日丁巳,講業既畢,顗、亮等議曰:「三代建國,列土而治,當其衰弊,無土崩之勢,可懷以德,難屈以力。逮至戰國,強弱相 兼,去道德而任智力。故秦之弊可以力爭。少康布德,仁者之英也;高祖任力,智者之雋也。仁智不同,二帝殊矣。詩、書述殷中宗、高宗,皆列大雅,少康功美過 于二宗,其為大雅明矣。少康為優,宜如詔旨。」贊、毓、松等議曰:「少康雖積德累仁,然上承大禹遺澤餘慶,內有虞、仍之援,外有靡、艾之助,寒浞讒慝,不 德于民,澆、豷無親,外內棄之,以此有國,蓋有所因。至於漢祖,起自布衣,率烏合之士,以成帝者之業。論德則少康優,課功則高祖多,語資則少康易,校時則 高祖難。」帝曰:「諸卿論少康因資,高祖創造,誠有之矣,然未知三代之世,任德濟勳如彼之難,秦、項之際,任力成功如此之易。且太上立德,其次立功,漢祖 功高,未若少康盛德之茂也。且夫仁者必有勇,誅暴必用武,少康武烈之威,豈必降于高祖哉?但夏書淪亡,舊文殘缺,故勳美闕而罔載,唯有伍員粗述大略,其言 復禹之績,不失舊物,祖述聖業,舊章不愆,自非大雅兼才,孰能與於此,向令墳、典具存,行事詳備,亦豈有異同之論哉?」於是群臣咸悅服。中書令松進曰: 「少康之事,去世久遠,其文昧如,是以自古及今,議論之士莫有言者,德美隱而不宣。陛下既垂心遠鑒,考詳古昔,又發德音,贊明少康之美,使顯於千載之上, 宜錄以成篇,永垂于後。」帝曰:「吾學不博,所聞淺狹,懼於所論,未獲其宜;縱有可采,億則屢中,又不足貴,無乃致笑後賢,彰吾闇昧乎!」於是侍郎鍾會退 論次焉。

여름 4월 4일, 대장군 사마문왕은 곤룡포와 면류관을 하사받고 붉은 신발이 여기에 첨가되었다.

10일, 조모는 태학(太學)을 시찰하고 여러 유생들에게 하문(下問)을 했다.

“성인은 신비한 도를 깊이 통찰하고, 천지를 관찰하여 처음으로 8괘를 만들었으며, 후대의 성인이 다시 이것을 둘로 겹쳐서 64괘로 만들었소. 효(爻)를 조합시킨 그 수는 극치에 달하오. 이 역(易)에 관한 대의는 모든 형상을 포괄하는데, 하대에는 연산(連山)이 있었고, 은대에는 귀장(歸葬)이 있었으며, 주대에는 주역(周易)이라 하였으니 이는 무슨 까닭이요?”

역학박사 순우준(淳于俊)이 대답했다.

“복희는 수황(燧皇)의 그림에 따라 팔괘를 만들었으며, 신농이 이것을 발전시켜 64괘를 만들었습니다. 황제ㆍ요ㆍ순은 그 변화에 통달하고 하ㆍ은ㆍ주 삼대는 시대에 따라 마땅하게 만들었으니, 질(質: 질박함)과 문(文 : 우미함)이 이일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때문에 역이란 바뀌는 것입니다. 연산이라고 한 것은 산으로부터 운기가 나와 천지에 이어지는 것 같은 것이고, 귀장이라는 것은 모든 사물이 그 속으로 돌아가 숨는 것을 뜻합니다.”

조모가 또 물었다.

“만일 복희가 수황에 의거하여 ‘역’을 만들었다면, 공자는 무엇 때문에 수인씨(燧人氏)가 죽은 후 복희씨가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았소?”

이 질문에 대해 순우준은 대답할 수 없었는데, 조모가 또 하문했다.

“공자가 연(撚)ㆍ상(象) -역의 괘(卦) 및 효(爻)의 해석- 을 만들고, 정현(鄭玄)이 주를 달았으니, 비록 성인과 현인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해석한 경전의 의미는 한 가지요. 그러나 지금 연ㆍ상은 경전의 본문과 이어지지 않고 있는데, 이것을 주해에 연결시키면 어떻소?”

순우준이 대답하여 말했다.

“정현이 연과 상을 경전에 합친 것은 학자들의 성찰을 줄이고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조모가 또 하문했다.

“만일 정현이 이것을 합친 것이 학문하는 사람에게 진실로 편리하다면, 공자는 무엇 때문에 이것들을 합쳐 학자들이 이해하도록 하지 않았는가?”

순우준이 대답하여 말했다.

“공자는 아마 그의 해석이 주 문왕이 만든 문과 서로 뒤섞이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합치지 않은 것 같습니다.이것은 성인이 겸허한 태도로 합치지 않는 것입니다.”

조모가 하문하여 말했다.

“만일 성인이 합치지 않은 것을 겸허한 태도라고 한다면, 정현은 무엇 때문에 혼자 겸허한 태도를 갖지 않았나?”

순우준이 대답하여 말했다.

“옛날 도리는 광대하고 심원하며, 폐하의 질문은 심오하고 원대하니 신은 상세한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조모가 또 물었다.

“역의 계사전(繫辭傳)에서 ‘황제ㆍ요ㆍ순은 옷을 늘어뜨리고 천하를 다스렸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복희ㆍ신농 시대에는 옷이 없었다는 것이오. 그러나 성인이 천하를 교화시키는 데 무엇 때문에 이러한 차이가 생기는가?”

순우준이 대답했다.

“삼황의 시대는 사람이 적고 새와 짐승이 많았기 때문에, 그 깃털이나 가죽을 얻어 천하 사람들의 수요를 만족시킬 수 있었습니다. 황제 시대에 이르러서 사람의 수가 많아지고 새와 짐승의 수가 적어졌기 때문에 옷을 만들게 되었으니, 시대의 변화에 따른 것입니다.”

조모가 또 질문했다.

“역 설괘전(說卦傳)에는 건괘를 하늘을 대표하는 것으로 삼고 있지만, 또 금ㆍ옥, 노둔한 말로도 삼을 수 있고, 자질구레한 사물과 나란히 제시할 수도 있겠는가?”

순우준이 대답했다.

“성인은 역을 해석함에 있어서, 멀리 있는 것으로 예를 들기도 하고, 가까이 있는 것으로 예를 들기도 합니다. 가까운 것으로는 몸 주변의 여러 사물을 사용하고, 멀리 있는 것으로는 천지를 사용합니다.”

역경 강의가 끝나자, 조모는 또 상서를 강의하도록 명했다. 조모가 질문했다.

“정현은 ‘계고(稽古) -상서 요전(堯典)에 약계고제요(若稽古帝堯)라고 되어 있다- 가 하늘과 같다는 것은 요가 하늘과 같음을 말한다.’라고 했고, 왕숙은‘요는 옛날 도리에 따라 생각하고 실행한다.’고 했다. 이 두 해석은 다른데, 어떤 것이 옳은가?”

박사 유준(庾峻)이 대답하여 말했다.

“전대의 학자들이 내린 해석에는 각기 차이가 있으므로 저에게는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지를 판단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상서의 홍범(洪範)에서는 ‘세 사람이 점을 쳤는데 그 중 일치한 두 사람의 말을 따랐다’라고 했습니다. 가규(賈逵)ㆍ마융(馬融) 및 왕숙(王肅)은 모두 ‘옛날 돌에 따라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홍범편의 견해로부터 보면, 왕숙의 해석이 비교적 정확하다고 생각됩니다.”

조모가 질문을 했다.

“공자는 ‘하늘은 세상에서 가장 크므로 요는 하늘을 법으로 삼았다-논어(論語) 태백(泰伯)― 고 했소. 요의 위대함은 하늘의 위대함을 자신의 법칙으로 삼아 그것에 의지한 것이며, 옛날 도리에 따라 생각하는 것은 지고함과 차이가 있소. 지금 전적을 펼쳐 의미를 열어 성인의 덕을 밝히는데, 요의 성덕을 버리고 달리 미세한 점에 대해 칭찬하는 것이 어찌 작가의 뜻이라고 할 수 있는가?”

유준이 대답하여 말했다.

“신은 스승의 견해를 받아 따르고 있으므로 아직 상서의 대의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 학설의 좋은 점을 선택하는 것도 폐하께서 결정하십시오.”

이어서 상서 요전(堯典)의 사악(四嶽)이 곤(鮌)을 추천한 일에 이르게 되었다. 조모는 또 질문했다.

“고대 대인(大人)은 천지와 그 덕을 일치시켰고, 해와 달과 그의 밝은 지혜를 일치시켰으므로 생각을 함에 있어 치밀하지 않음이 없고, 밝은 지혜는 비추지 않는 곳이 없었소. 지금 왕숙은 ‘요는 곤이 어떠한 인물인지 분명하게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시험삼아 임용한 것이다’라고 했소. 이와 같이 성인의 밝은 지혜에도 부족한 점이 있는가?”

유준이 대답했다.

“비록 성인이 광대함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때문에 우임금은‘사람의 진가를 알 수 있는 것이 명지(明智)인데, 요가 사람을 안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최종적으로 성인과 현자를 받아들여 빛나는 업적을 이룬 것은 성인의 덕을 완성시켰기 때문입니다.”

조모가 또,

“각기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은 성인만이 만들 수 있는 것이오. 만일 시작을 좋게 할 수 없다면 어떻게 성인이라 할 수 있겠소? 우가 말하기를, ‘요제는 이것을 어려워했다’고 했지만, 최종적으로 성인과 현자를 임명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의 진가를 바르게 알았다는 말이고, 성인에게도 어려운 일임을 의미하는 것인지, 성인에게도 부족한 점이 있다는 말은 아닐 것이오. 경전 -상서(尙書) 고요모(皐陶謨)- 에는 ‘다른 사람의 진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이 명지이고, 이 명지가 있다면 사람을 바르게 임명할 수 있다’라는 말이 있소. 만일 요가 곤의 능력을 의심하여 9년간 시험 삼아 임용하고 사람을 관직에 등용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를 성인이라 할 수 있겠소?”

유준이 대답했다.

“제가 경서나 전(傳 : 주석)을 보면, 성인의 행동에도 과실이 있습니다. 때문에 요는 사흉(四凶 : 요 임금 시대의 사악한 사람)에게 잘못을 범했고, 주공단은 이속(二叔 : 관숙ㆍ채숙)에게 잘못을 범했으며, 공자는 재여(宰予 : 복상 기간의 단축을 제청하고, 낮잠을 자서 공자에게 비난당한 제자)에게 잘못을 범했습니다.”

조모가 질문했다.

“요가 곤을 임명하여 9년간 이룬 것이 없었고, 5행의 배열을 혼란하게 하고 -상서(尙書) 홍범(洪範)-, 백성들은 어둠 속에 있었소. 공자가 재여에게 잘못을 범한 것에 이르러서는 단지 말과 행위 사이의 문제이므로 일의 중요성은 요의 과실과 같지 않소.주공의 관숙ㆍ채숙ㆍ에 대한 일은 상서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박사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유준이 대답했다.

“이는 모두 선현들도 의심하는 바이므로, 신의 짧은 식견으로는 연구하여 논할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낮은 곳에 있는 백성들 중에서 우순(虞舜)이라 부른 환(鰥)이 있다(상서 요전: 순이 직접 후계자에 대해서 사악하게 추천을 구한 사건)’라는 말이 있습니다.”

조모가 질문했다.

“요의 시대에는 홍수로 재해가 생기자 사흉을 조정에 임명했소. 이것은 현인을 빨리 등용하고 백성들을 구제해야만 되었던 것이오. 순은 이미 나이가 많았고 성덕이 빛났지만 오랫동안 임용되지 못하였는데, 무엇 때문이오?”

유준이 대답했다.

“요는 탄식하여 현자를 구하여 직접 자리를 양도하려고 했지만, 사악은‘우리는 덕행이 없으면 제위를 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요는 또 사악에게 신분이 낮은 사람이라도 현자이면 추천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순이 추천되었던 것입니다. 순이 추천된 근본 원인은 사실 요에게 있었습니다. 이것은 성인이 사람들의 마음을 만족시켜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조모가 질문을 했다.

“요는 이미 순에 관한 평판을 들었으면서도 때에 이르러 등용하지 못했고, 또 그 당시 충성스런 신하도 그를 추천하지 않았으며, 사악에게 신분이 낮은 현자를 추천하도록 한 이후에야 천거되었소. 이것은 적극적으로 성인을 임용하여 백성을 위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소.”

유준이 대답했다.

“이러한 점은 신과 같이 어리석은 견해로서는 미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모는 또 예기를 강의하도록 명했다.
조모가 말했다.

“태고시대 백성들은 덕을 세웠고, 다음 시대 백성들은 도덕을 널리 전하는 데 힘썼소-예기 곡례 상- 나라를 어떤 방법으로 다스리든지 교화에는 각기 차이가 있소. 어떤 정치를 실시하면 덕행을 세울 수 있고, 어떤 정치를 실행하면 이룰 수 없겠는가?”

박사 마조(馬照)가 대답했다.

“태고시대 백성의 덕을 세웠다는 것은 삼황오제(三皇五帝) 시대에 덕으로 백성을 교화시키는 것을 가리키고, 다음 시대에 널리 전하는 데 힘썼다는 것은 삼왕(三王 : 夏ㆍ商ㆍ周ㆍ)의 시대에는 예로써 국가를 다스렸음을 말합니다.”

조모는 질문했다.

“이 양자의 교화 결과에는 두터움과 엷음의 차이가 있음을 말하는가, 군주의 자질에 우열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시대 상황이 그렇게 만든 것인가?”

마조가 대답했다.

“사실 시대에 따라 순박함(質)과 수식(文)의 구분이 있기 때문에 교화에도 두터움과 얇음이 있는 것입니다.”(24)

[24] 제집재제자서시생정상(帝集載帝自敘始生禎祥曰) - 「昔帝王之生,或有禎祥,蓋所以彰顯神異也。惟予小子,支胤末流,謬為靈祇之所相祐也,豈敢自比于前哲,聊記錄以示後世焉。其辭曰:惟正始三年九月辛未朔,二 十五日乙未直成,予生。于時也,天氣清明,日月輝光,爰有黃氣,煙熅于堂,照曜室宅,其色煌煌。相而論之曰:未者為土,魏之行也;厥日直成,應嘉名也;煙 熅之氣,神之精也;無災無害,蒙神靈也。齊王不弔,顛覆厥度,群公受予,紹繼祚皇。以眇眇之身,質性頑固,未能涉道,而遵大路,臨深履冰,涕泗憂懼。古人 有云,懼則不亡。伊予小子,曷敢怠荒?庶不忝辱,永奉烝嘗。」

부창의 진제공찬(傅暢晉諸公贊)에 이르길:고귀향공은 항상 중호군(中護軍)사마망(司馬望), 시중(市中) 왕침(王沈), 산기상시(散騎常侍) 배수(裴秀), 황문시랑(黃門侍郞) 종회(鍾會) 등과 동어전(東御殿)에서 모여 토론회를 가졌고, 동시에 문학론을 썼다. 배수를 유림장인(儒林丈人), 왕침을 문적선생(文籍先生)이라 이름을 짓고, 사마망이나 종회에게도 각기 이름을 짓도록 했다. 황제는 성격이 급했으므로 이들을 소집할 때에는 그들이 빨리 도착하기를 바랬다. 배수 등은 궁중 안에서 관직 생활을 했으므로 즉각 올 수 있었지만, 사마망은 외부에서 근무하였으므로 특별히 추봉거(追鋒車 : 빠른 거마)와 근위대의 병졸 5명을 지급하여 모임이 있으면 거마를 타고 빨리 도착했다.

5월, 업성과 상락(上洛)에서 모두 단 이슬이 내렸다고 보고를 했다.

여름 6월 1일, 연호를 감로(甘露)라고 고쳤다. 20일, 청룡이 원성현(元城縣) 내의 우물 속에서 나타났다.

가을 7월 5일, 위장군 호준(胡遵)이 세상을 떠났다. 

9일, 안서장군 등애가 촉나라 대장 강유를 상규에서 크게 무찔렀으므로 조서를 내렸다.

- 우리 군대는 온 힘을 다해 출동하지 않았지만 적군을 무너뜨렸으며, 사로잡은 자와 죽인 자가 만여 명이나 된다. 최근 전쟁에서 승리한 것으로 이와 같은 것이 없었다. 지금 사자를 파견하여 장수와 병졸을 포상하고 대연회를 성대하게 거행하여 온종일 즐겁게 술을 마시도록 할지니 나의 마음을 전하라.-

8월 26일, 대장군 사마문왕에게 대도독(大都督)의 칭호를 더하고, 조정에 들어와 어떤 일을 상주할 때에 이름을 적지 않아도 된다고 하고, 황금 월을 주었다. 

29일, 태위 사마부를 태부로 삼았다.

9월, 사도 고유를 태위로 삼았다.

겨울 10월, 사공 정충(鄭沖)을 사도로 삼고, 상서좌복사(尙書佐僕射) 노육(盧毓)을 사공으로 삼았다.

2년(257) 봄 2월, 청룡이 온현(溫縣)의 우물에 나타났다.

3월, 사공 노육이 세상을 떠났다.

여름 4월 3일, 조서를 내렸다.

- 현도군(玄菟郡) 고현현(高顯縣)의 관리와 백성이 반란을 일으켜, 현장(縣長) 정희(鄭熙)가 적에게 살해되었다. 평민 왕간(王簡)은 정희의 시체를 등에 업고 밤을 낮으로 이어서 달려가 정희의 고향까지 운반했으니 그의 충의와 정절은 칭찬하고 장려할 만하다. 지금 특별히 왕간을 충의도위(忠義都尉)에 임명하고, 그의 특출한 행위를 표창하라. -

24일, 정동대장군 제갈탄을 사공으로 임명했다.

5월 1일, 조모가 벽옹으로 가서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시를 짓도록 명했다. 시중 화유(和逌)와 상서 진건(陳騫) 등은 제한된 시간을 초과하여 시를 지었으므로, 담당 관리는 그들의 관직을 파면하라고 상주하였다. 조모가 조서를 내렸다.

- 나는 우매하지만 문학을 좋아하여 널리 시부(詩賦)를 모아 정치의 득실을 알게 되었는데, 이처럼 혼란스러움은 사람을 진실로 불안하게 하오. 지금 화유 등을 파면시키라. 그리고 지금 이후로 여러 신하들은 모두 옛날의 올바른 도리를 깊이 음미하여 배우고 경전을 밝히고 닦아 얻어서 나의 기대를 만족시켜 주라.-

5일, 제갈탄(諸葛誕)이 나아가 복종하지 않고 군대를 출동시켜 반란을 일으켜서 양주자사(揚州刺史) 낙림(樂林)을 살해했다. 

6일, 조정에서는 제갈탄에게 협박당한 회남(淮南)의 장수ㆍ병사ㆍ백성을 사면시켰다. 

7일, 조서를 내렸다.

- 제갈탄은 흉악한 반란을 일으켜 양주를 혼란 속에 빠지게 했다. 옛날(전한 초기) 경포(黥布)가 반란을 일으키자 한 고조는 직접 정벌하였고, 외효(隗囂)가 조정을 등지고 저항하자 광무제 유수(劉秀)는 서쪽으로 정벌을 나갔다. 또 우리 위 왕조의 열조(烈祖), 명황제는 직접 오와 촉을 정벌하였는데, 이러한 일은 모두 격노하여 군대의 위세를 떨쳐서 조정의 위엄을 지킨 것이다. 지금 황태후와 나는 직접 정벌하여 악한 반란자들을 빨리 평정시켜 양주를 안정시켜야만 할 것이다.-

9일, 조서를 내렸다.

- 제갈탄(諸葛誕)은 반란을 일으켜 충의로운 사람들을 협박하였지만, 평구장군(平寇將軍) 임위정후(臨渭亭侯) 방회(龐會), 기독(騎督) 편장군(偏將軍) 노번(路蕃)은 각각 부하를 이끌고 성문을 부수로 뚫고 나와 조정으로 돌아왔다. 그들의 용맹성과 장렬함은 응당 장려해야 한다. 방회를 향후(鄕侯)로 봉하고, 노번을 정후(亭侯)로 삼으라.-

6월 6일. 조서를 내렸다.

- 오나라는 하구(夏口)의 여러 군사를 감독하는 진군장군(鎭軍將軍)ㆍ사흠후(沙欠侯) 손일(孫壹)에게 부절을 주어 감독하도록 했는데, 손일은 본래 적국 왕의 같은 족속으로서 상장(上將)의 위치에 있지만, 하늘을 두려워하고 운명을 깨닫고 화복에 대해 깊이 이해하여, 후회하고 깨달은 군사들을 이끌고 멀리 우리나라에 의탁했다. 비록 은나라 말기 미자(微子)가 은나라를 떠났고, 악의(樂毅)가 연나라로 도망갔을 지라도 또한 이런 행위에 불과하다. 오늘 손일을 시중 거기장군으로 삼아 부절을 주고 교주목(交州牧)과 오후(吳侯)에 임명하고, 부서를 개설하여 뜻있는 자를 초빙하여 삼공과 똑같은 대우를 누리도록 하고, 고대에 후백(侯伯)을 임명할 때의 팔명(八命)의 예법에 따라 천자의 곤룡포ㆍ면류관ㆍ붉은 신발을 하사하여 모든 대우를 후하게 하라.-

臣松之以為壹畏逼歸命,事無可嘉,格以古義,欲蓋而名彰者也。當時之宜,未得遠遵式典,固應量才受賞,足以酬其來情而已。至乃光錫八命,禮同台鼎,不亦過 乎!於招攜致遠,又無取焉。何者?若使彼之將守,與時無嫌,終不悅于殊寵,坐生叛心,以叛而愧,辱孰甚焉?如其憂危將及,非奔不免,則必逃死苟存,無希榮 利矣,然則高位厚祿何為者哉?魏初有孟達、黃權,在晉有孫秀、孫楷;達、權爵賞,比壹為輕,秀、楷禮秩,優異尤甚。及至吳平,而降黜數等,不承權輿,豈不 緣在始失中乎?

25일, 조서를 내렸다.

- 지금 짐이 잠시 항현(項縣)에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대장군 사마문왕이 천명을 받들어 모반한 적을 징벌하기 위해 회포(淮浦)에까지 나아갔다. 옛날, 상국이나 대사마가 출정할 때는 모두 상서와 함께 갔으므로, 지금 옛날 제도를 따라야 한다. -

그래서 산기상시(散騎常侍) 배수(裵秀)ㆍ급사황문시랑(給事黃門侍郎)종회(鍾會)로 하여금 모두 대장군과 함께 가도록 명령했다.

가을 8월, 조서를 내렸다.

- 옛날(전한 시대) 연의 자왕(刺王)이 반역을 꾀하였을 때, 한의(韓誼) 등은 간언을 하다가 살해되었는데, 한 왕조에서는 그들의 아들에게 높은 관직을 주었다. 제갈탄이 포악한 난리를 일으켰을 때, 주부(主簿) 선륭(宣隆)과 부곡독(部曲督) 진결(秦潔)은 절개와 의리를 지켜 일이 발생하자 굳건히 고수하다가 제갈탄에게 살해되었다. 이는 비간(比干: 주왕의 포악함을 간언하다가 살해됨)처럼 신임은 없었지만, 비간과 똑같이 충간하다 죽임을 당한 것이다. 지금 선륭과 진계의 아들을 기도위로 임명하고, 식읍과 상을 더하고, 널리 알려 그들의 성스럽고 충의로운 행위를 나타내라.-

9월, 대사면을 행했다.

겨울 12월, 오나라 대장 금단(金端)과 전역(全懌) 등이 부하를 인솔하여 투항했다.

3년(258) 봄 2월, 대장군 사마문왕은 수춘성을 함락시키고 제갈탄을 참수했다.

3월, 조서를 내렸다.

- 옛날에 적을 이기고 적의 시체를 거두어 경관(京觀 : 시체를 쌓아 올려 그 위에 흙을 가득 덮는 것)을 만든 까닭은 반역자를 징벌하고 무공을 빛내기 위해서였다. 전한 효무제(孝武帝)가 원정(元鼎) 연간에 동향(桐鄕)을 문희(聞喜)로 바꾸고, 신향(新鄕)을 획가(獲嘉)로 바꾼 것은 남월(南越)이 멸망한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대장군은 직접 육융(六戎)을 통솔하여 구두(丘頭)에 진영을 두고, 안으로는 흉악한 무리들을 평정하고, 밖으로는 침략자를 무찔러서 만민을 구제하는 공을 세워 사해에 명성을 떨쳤다. 그가 적을 무찌른 곳에는 아름다운 지명이 있다. 지금 구두를 무구(武丘)로 바꾼 것은 무력으로 반란을 평정하였음을 나타내어 후대에 잊히지 않도록 한 것이다. 이것 또한 경관이나 이읍(二邑 : 棟鄕ㆍ新鄕)의 의미를 바꾼 뜻이다.-

여름 5월, 대장군 사마문왕을 상국으로 임명하고, 진공(晉公)으로 봉했으며, 식읍 여덟 군을 주고 구석(九錫)의 예를 더했는데, 사마문왕은 아홉 차례에 걸쳐 사양하고서야 허락하였다.

6월 13일, 조서를 내렸다.

- 옛날 남양군(南陽郡)의 산적이 난을 일으키고 태수 동리곤(東里袞)을 위협하여 인질로 삼으려 했을 때, 공조(功曹) 응여(應余)는 단신으로 동리곤을 지켜 위험에서 벗어나도록 했다.응여는 뒤엎어지는 혼란 속에서 자기 몸을 죽여 주군을 구하였다. 사도는 지금 응여의 손자 응륜(應倫)을 관리로 삼아 충절을 지킨 영웅의 행운에 보답하도록 하라.

초국선현전(楚國先賢傳) -余字子正,天姿方毅,志尚仁義,建安二十三年為郡功曹。是時吳、蜀不賓,疆埸多虞。宛將侯音扇動山民,保城以叛。余與太守東里袞當擾攘之際、迸竄得出。音即 遣騎追逐,去城十里相及,賊便射袞,飛矢交流。余前以身當箭,被七創,因謂追賊曰:「侯音狂狡,造為凶逆,大軍尋至,誅夷在近。謂卿曹本是善人,素無惡 心,當思反善,何為受其指揮?我以身代君,以被重創,若身死君全,隕沒無恨。」因仰天號哭泣涕,血淚俱下。賊見其義烈,釋袞不害。賊去之後,余亦命絕。征 南將軍曹仁討平音,表余行狀,并脩祭醊。太祖聞之,嗟歎良久,下荊州復表門閭,賜穀千斛。袞後為于禁司馬,見魏略游說傳。

28일, 대규모의 회남을 토벌하는 고적을 사정(査定)하고 각기 분별하여 작위와 상을 주었다.

가을 8월 12일, 표기장군 왕창(王昶)을 사공으로 삼았다. 

4일, 조서를 내렸다.

- 노인을 부양하고 교육을 진흥시키는 것은 삼대(三代 : 夏ㆍ殷ㆍ周)가 교화를 세우고, 명성을 영원히 남긴 까닭이다. 이러한 시대에는 반드시 삼로(三老)ㆍ오경(五更)을 두어 숭상하고 존경하였으며, 그들의 의견을 청하여 가르침을 받아 성실하게 사서(史書)에 기록했다. 

주대에는 늙어 관직에서 물러난 관리를 천자가 삼로ㆍ오경이라 하여 부형(父兄)의 예로써 대우하고, 천하에 효제(孝第)의 도를 나타냈다.

이렇게 한 연후에 천하는 이것을 법칙으로 삼아 아랫사람들도 그것을 보고 감화되었다. 덕을 행하는 고상한 사람을 선발하여 그 삼로ㆍ오경의 임무에 충실히 임하게 해야 되노라. 

관내후(關內侯) 왕상(王祥)은 인의를 따라 행하고 평소보다 순수하고 견고한 마음을 갖고 있다. 관내후 정소동(鄭小同)은 순박하고 온순하고 공순하며 효를 행하고 우정이 두터우며 예법에 따르지 않는 것이 없다. 지금 왕상을 삼로에 임명하고, 정소동(小同)을 오경(五更)에 임명하라.-

조모는 직접 관련 있는 대신들을 인솔하고, 고대 예의에 따라 삼로ㆍ오경을 존경하며 받들었다.

[28] 한진춘추(漢晉春秋) - 帝乞言於祥,祥對曰:「昔者明王禮樂既備,加之以忠誠,忠誠之發,形于言行。夫大人者,行動乎天地;天且弗違,況於人乎?」祥事別見呂虔傳。小同,鄭玄孫 也。玄別傳曰:「玄有子,為孔融吏,舉孝廉。融之被圍,往赴,為賊所害。有遺腹子,以丁卯日生;而玄以丁卯歲生,故名曰小同。」

위명신주재태위화흠표(魏名臣奏載太尉華歆表曰)- 「臣聞勵俗宣化,莫先於表善,班祿敘爵,莫美於顯能,是以楚人思子文之治,復命其胤,漢室嘉江公之德,用顯其世。伏見故漢大司農北海鄭玄,當時之學,名冠 華夏,為世儒宗。文皇帝旌錄先賢,拜玄適孫小同以為郎中,長假在家。小同年踰三十,少有令質,學綜六經,行著鄉邑。海、岱之人莫不嘉其自然,美其氣量。跡 其所履,有質直不渝之性,然而恪恭靜默,色養其親,不治可見之美,不競人間之名,斯誠清時所宜式敘,前後明詔所斟酌而求也。臣老病委頓,無益視聽,謹具以 聞。」魏氏春秋曰:小同詣司馬文王,文王有密疏,未之屏也。如廁還,謂之曰:「卿見吾疏乎?」對曰:「否。」文王猶疑而鴆之,卒。鄭玄注文王世子曰「三 老、五更各一人,皆年老更事致仕者也」。注樂記曰「皆老人更知三德五事者也」。蔡邕明堂論云:「更」應作「叟」。叟,長老之稱,字與「更」相似,書者遂誤 以為「更」。「嫂」字「女」傍「叟」,今亦以為「更」,以此驗知應為「叟」也。臣松之以為邕謂「更」為「叟」,誠為有似,而諸儒莫之從,未知孰是。

감로 3년, 청룡과 황룡이 돈구현(頓丘縣)ㆍ관군현(冠軍縣)ㆍ양하현(陽夏縣)의 경계 지역에 있는 우물 속에서 나타났다.

4년(259) 봄 정월, 황룡 두 마리가 영릉현(寧陵縣) 경계 지역의 우물 속에서 나타났다.

여름 6월, 사공(司空) 왕창(王昶)이 세상을 떠났다.

가을 7월, 진류왕(陳留王) 조준(峻)이 세상을 떠났다.

겨울 10월 1일, 신성군(新城郡)을 분할하여 또 상용군(上庸郡)을 설치했다.

11월 18일, 거기장군 손일이 비구니에게 살해되었다.

5년(260) 봄 정월 1일, 일식이 나타났다.

여름 4월, 관청에 조서를 내려, 이전에 내린 명을 실시하도록 하고, 또 대장군 사마문공을 상국(相國)으로 임명하고 진공(晉公)으로 봉했으며 구석의 예를 더했다.

5월 7일, 고귀향공이 세상을 떠났고, 향년 20세였다.[30]


[30] 한진춘추(漢晉春秋) - 조모는 위의 권세가 날로 사라져 가는 것을 보고 그 분을 이기지 못하여 시중 왕침, 상서 왕경, 산기상시 왕업을 불러 이르길 


"사마소의 제위 찬탈 야심은 길가는 사람들도 아는 바이니 나는 폐위 당한 치욕을 앉아서 받을 수는 없소. 오늘 당장 경들과 함께 직접 출병하여 그를 토벌하려 하오"

라고 했다. 왕경이 말하길

"
옛날 노나라(魯)의 소공(昭公)은 계씨(季氏)들의 전횡을 참지 못하고 패망하여 나라를 잃었고 천하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지금 권력이 그들 집안에 있게 된 지가 이미 오래되었고, 조정의 사방에서는 모두 그를 위해 죽을 사람들이 있으며, 반역이냐 순응이냐 하는 이치를 돌아보지 않은지가 하루 정도만이 아닙니다. 또 숙위들은 텅 비어 있고 병기와 갑옷도 적고 약한데, 폐하께서는 무슨 물자를 이용하시려고 하시며, 하루아침에 이와 같이 하여서 고질병을 제거하려고 하다가 그것을 더 깊게 하지는 않겠습니까?  화란은 아마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니 마땅히 다시금 자세히 살펴야 할 것입니다."

조모는 왕경이 간했으나 듣지 않고 이내 가슴 속에서 판령을 꺼내 땅에 던지며 말하길 

"일은 결정되었소! 정작 죽는다 하더라도 무엇이 한스럽겠소? 하물며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것도 아닌데"

라고 했다. 이 윽고 궁궐로 들어가 태후(명제의 비 곽황후, 조모의 모친)께 아뢰었다. 그러나 왕침과 왕업이 급히 달려가 사마소에게 알려주자 사마소는 그에 대한 방비를 했다. 조모는 마침내 동복 수백 명을 이끌고 북을 치고 소리치면서 출병했다. 사마소의 동생인 둔기교위 사마주가 궁전으로 들어가 동쪽 지차문에서 조모와 맞닥뜨렸는데, 좌우의 사람들이 질책하자 사마주의 병사들이 급히 도망쳤다. 중호군 가충이 또한 조모를 기다리고 있다가 남쪽 궐문 부근에서 싸웠다. 태자사인 성제가 가충에게 묻길 

"사태가 급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말씀해 주십시오!"

라고 하자, 가충이 말하길 

"공(사마소)이 그대들을 키운 것은 바로 오늘을 위해서이다. 오늘의 일은 물을 것도 없다."

라고 했다. 그래서 성제가 즉시 앞으로 나아가 조모를 찔렀는데 그 칼날이 등으로 나왔다.

사마소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서 스스로 땅에 떨어지듯 넘어지며 말하길

"천하사람들이 나를 뭐라 하겠는가!" 태부 사마부가 달려가서 황제에게 넓적다리를 베게 하고 곡하였는데 아주 애통해 하면서 말하였다.

"폐하를 살해한 것은 신의 죄입니다."

세어(世語) - 王沈、王業馳告文王,尚書王經以正直不出,因沈、業申意。

진세공찬(晉諸公贊)에서 이르길 - 沈、業將出,呼王經。經不從, 曰:「吾子行矣!」干寶晉紀曰:

우보(干寶)의 진기(晉紀) - 成濟問賈充曰:「事急矣。若之何?」充曰:「公畜養汝等,為今日之事也。夫何疑!」濟曰:「然。」乃抽戈犯蹕。

위씨춘추(魏氏春秋) - 황제(조모)는 장차 대장군(사마소)을 주살하려고 하면서, 관리에게 조서를 내려 사마소의 직위를 상국으로 승진시키고 구석을 수여한다고 했다. 

황제는 그날 밤 용종복야 이소와 황문종관 초백 등을 직접 이끌고 능운대를 내려가 병사들에게 무기를 지급한 뒤, 사마소의 수여식을 기회로 삼아 그를 맞이해 오는 사신을 파견하고 스스로 출병하여 토벌하려고 했는데 때마침 비가 내려 수여식을 중지했다. 

다음 날 마침내 왕경 등과 만나 황소조(3)를 가슴에서 꺼내며 말하길 

"이런 일(사마소가 제위를 찬탈하려는 행위)을 참아 낼 수 있다면 무슨 일인들 참아내지 못하겠소? 오늘 당장 이 일(사마소를 주살하려는 일)을 결행하겠소."

라고 했다. 

황제는 마침내 칼을 뽑아 들고 수레에 올라 궁궐을 숙위하는 창두(4)와 관동을 이끌고 전고를 치면서 운룡문을 나섰다. 그때 가충이 군대를 이끌고 밖에서 들어오자 황제의 군대는 패하여 흩어졌다. 황제가 여전히 천자라고 외치면서 칼을 휘두르며 분전하자 병사들은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가충이 나서서 장병들을 질책하자 기독 성쉬의 동생 성제가 창을 들고 돌진하여 황제는 전사했다. 그때 폭우가 쏟아지고 천둥과 번개가 치면서 하늘이 어두워졌다.

위말전(魏末傳) - 賈充呼帳下督成濟謂曰:「司馬家事若敗,汝等豈復有種乎?何不出擊!」倅兄弟 二人乃帥帳下人出,顧曰:「當殺邪?執邪?」充曰:「殺之。」兵交,帝曰:「放仗!」大將軍士皆放仗。濟兄弟因前刺帝,帝倒車下。

황태후 곽씨는 명령을 내렸다

- 나는 덕이 없어 가정의 불행을 만났다. 이전에 동해왕의 아들 조모를 옹립하여 명제의 후계자로 삼으려 했던 것은 그가 글을 좋아하고 신하들의 주장(奏章)을 헤아렸으므로 이 중임을 완성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것인데, 성정이 거칠고 그것이 날이 갈수록 심해져만 갔다. 나는 여러 번 질책을 했지만, 그는 오히려 마음속에 원망하는 생각을 담고, 악역무도한 말을 서슴지 않으면서 나를 비방하여 마침내 두 궁전(황제와 황태후의 궁전)의 관계는 끊어졌다. 그가 하는 말은 참고 들을 수 없었는데, 하늘과 땅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은밀히 조령(詔令)을 보내 대장군에게 종묘를 받들 수 없으니 사직을 전복시킬까 봐 두렵고, 죽어서 선제들을 뵐 면목이 없음을 말했다. 대장군은 그가 아직 나이 어리니 마음을 고쳐 착한 쪽으로 돌아올 것이라며 그를 두둔했다. 그러나 이 아들은 반항하고 나섰으며 행동은 더욱 지나쳤고, 일찍이 활을 들어 나의 궁정으로 쏴서 나의 머리에 꽂히기를 빌었지만, 화살은 내 앞에 떨어졌다. 나는 대장군에게 조모를 내쫓을 수밖에 없음을 수십 차례 말했다. 이 아들은 그사이의 일을 상세히 듣고 자신의 죄가 무겁다는 것을 깨닫고 암살을 꾀하였다. 나의 측근에 있는 자들을 매수하여 내가 복용하는 약에 몰래 틈을 타서 독약을 넣으려고 몇 차례나 계획했었다. 이 일이 드러나자 그는 이 기회를 틈타 병사들을 직접 인솔하여 서궁(西宮 : 황태후 궁전)으로 쳐들어와 나를 죽이고, 밖으로 나가 대장군을 해치려고 했다. 그는 시중왕침ㆍ산기상시(散騎常侍) 왕업(王業)[31] 상서 왕경(王經)을 불러 품안에서 조서를 꺼내 그들에게 보여주고 오늘 이일을 시행해야 된다고 말했다. 

[31] 세어(世語) - 왕업(業)은 무릉현(武陵) 사람이고, 후에 진(晉)나라의 중호군(中護軍)이 되었다.

나는 계란을 쌓아 올리는 것보다도 더 큰 위험에 빠졌었다. 나는 나이 많은 미망인인데 어찌 또 남은 목숨을 안타까워했겠는가? 단지 선제가 남긴 뜻을 실현시킬 수 없다는 것이 고통스러웠으며, 사직이 곧 전복되려 하는 것만이 비통했을 뿐이다. 종묘 신령의 도움으로 왕침ㆍ왕업이 즉시 대장군에게 달려가 보고하여 먼저 경비를 엄하게 하였다. 

이 아이는 곧 측근에 있는 사람들을 인솔하여 운룡문(雲龍門)을 뚫고 나와 전쟁용 북을 천둥같이 울리며 직접 칼을 뽑아 들고 측근에 있는 자들과 함께 병사들이 진을 친 사이로 들어오다가 선봉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 아이는 도리에 어긋나는 반역 행위를 하고, 또 자기 스스로 커다란 화(죽음)속에 빠졌으니, 슬픈 나의 마음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옛날 한 창읍왕(昌邑王)은 죄를 짓고 쫓겨나 평민이 되었으니, 이 아이도 평민의 예식으로 매장하는 것이 적당할 것이고, 조정의 내외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이 아이의 행위를 알도록 하라. 또 상서 왕경은 흉악무도한 사람이니, 그와 그의 일족을 체포하여 모두 정위로 보내라.-

8일, 태부 사마부, 대장군 사마문왕, 태위 고유, 사도 정충 등이 머리를 조아려 상주하였다.

- 신 등은 황태후의 칙령을 받았습니다. 고인이 된 고귀향공은 악역무도하고 스스로 커다란 재화 속에 빠졌는데, 한 창읍왕(昌邑王)이 죄를 지어 쫓겨난 선례에 따라 평민의 예식으로 안장했습니다. 

신 등은 대신의 지위에 있으면서 재난을 구하여 혼란을 바로잡지도, 사악한 반란을 제어할 수도 없었습니다. 칙령을 받고 두려워 벌벌 떨고만 있었습니다. 춘추(春秋)의 대의에 의하면, 왕 노릇하는 자에게는 천하가 집입니다. 그러나 ‘주나라 양왕은 정나라에서 거주하였다 -춘추(春秋) 희공(喜公) 24년’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어머니에게 효도를 다할 수 없었기 때문에 와의 자격을 버린 것입니다. 

지금 고귀향공은 충동적으로 행동하여 인륜을 저버리고 국가를 위험에 빠지게 했으며, 스스로 멸망하여 사람과 신을 모두 버렸습니다. 평민의 예식으로 안장하는 것은 확실히 옛날 제도와 부합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등은 황태후 전하의 자애로움을 생각했습니다. 비록 마음속에 대의가 있지만 애통해하고 안타까워하는 정이 있으니, 신들도 마음속으로는 참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더해 고귀향공을 왕의 예의로써 안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32]

[32 한진춘추(漢晉春秋) - 고귀향공(高貴鄉公)은 낙양(洛陽) 서북쪽 30리쯤 되는 낙수(洛水)의 지류에 매장되었다. 볼품없는 수레가 몇 대 따랐고, 관에 선행하는 깃발도 없었다. 사람들은 모여들어 이것을 보고는 ‘이분은 이전에 살해된 천자(天子)다’라고 하고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으며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 자도 있었다.

臣松之以為若但下車數乘,不設旌旐,何以為王禮葬乎?斯蓋惡之過言,所謂不如是之甚者。

황태후는 이 의견을 따랐다.

곽태후는 사자에게 부절을 주어 중호군(中護軍)ㆍ중뢰장군(中罍將軍) 사마염(司馬炎)을 북쪽으로 보내 상도향공(常道鄕公) 조황(曹璜)을 명제의 후계자로 맞이하도록 했다. 

9일, 여러 공이 황태후에게 상주했다.

- 전하(황태후)의 성덕은 빛나고 성대하여 천하를 안정시켰으므로, 조서를 내려 번국과 똑같이 ‘령(令)’으로 칭하십시오. 청컨대 지금 이후로 전하의 영서(令書)는 모두 ‘조제(詔制)’로 칭하여 선대의 선례와 똑같이 하도록 하십시오.

21일, 대장군이 상국ㆍ진공ㆍ구석의 특별한 은총을 완강히 사양하니, 황태후는 조서를 내렸다.

- 공적이 있으면 숨기지 않는 것이 주역의 큰 뜻이고, 사람을 완성시키는 아름다움은 옛 현인들이 존중했던 것이다. 지금 대장군의 사양을 듣고 그의 상주문을 조정 안팎에 공표하고, 그의 겸허한 아름다움을 밝히도록 하라.-

26일, 대장군 문왕이 말씀을 올렸다.

- 고귀향공은 시종과 병사들을 이끌고 칼을 뽑고 금고(金鼓)를 울려 신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달려왔었습니다. 저는 날카로운 무기끼리 부딪치는 것을 두려워하며 장병들에게 상해를 입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명령을 어기는 자가 있다면 군법에 따라 처리한다고 했습니다. 

기독(騎督) 성쉬(成焠)의 동생인 태자사인(太子舍人) 성제(成濟)는 병사들이 진열하고 있는 곳을 뚫고 들어가 고귀향공을 상하게 하여 마침내 생명을 잃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이미 성제를 체포하여 군법에 따라 처리했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신하된 자의 충절은 죽어서도 두 마음을 품지 않고, 군주를 섬기는 도의는 감히 위험을 피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전에는 변고가 갑자기 발생하여, 그 재화는 화설처럼 빠른 속도로 밀려왔지만, 실제로 저는 고귀향공에게 몸을 버려 죽을 각오로 황제만 지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 음모는 본래 위로는 황태후를 위험하게 하고 종묘를 전복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정치를 보좌하는 무거운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으므로 국가의 안정을 원칙으로 삼아야 하는데, 비록 명령에 따르다 죽어도(황태후에게 위험을 줄 경우) 그 책임이 더욱 무거울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때문에 이윤과 주공의 비상한 수단으로 사직의 어려움을 안정시키고, 부단히 사람을 보내 명령을 펴려고 했으나 황제가 있는 수레 근처에도 갈 수 없었으며, 그 사이에 성제가 갑자기 진중(陳中)으로 뚫고 들어와 큰 변고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소식을 들은 후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슬프고 애상하여 어느 곳에서 이 생명을 끊어야 될지를 몰랐습니다. 법률에 따르면 임금에게 대역무도한 죄를 지으면 그 부모와 처자를 모두 죽인다고 합니다. 성제는 흉악모두한 반역자로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여 주살되는 것을 용서받지 못할 만큼의 죄를 지었습니다. 즉시 시어사에게 명하여 성제 일족을 체포하고 정위로 넘겨 그들의 죄를 판단하도록 하십시오. - [33]

[33] 위씨춘추(魏氏春秋) - 成濟兄弟不即伏罪,袒而升屋,醜言悖慢;自下射之,乃殪。

황태후는 조서를 내렸다.

- 다섯 가지 형벌에 해당하는 범죄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는 것이다. 보통 사람으로 효도하지 않는 자식이 있으면 고발하여 그를 처벌하도록 하는데, 어찌 그 불효 아들을 군주가 되게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아녀자로서 대의에 밝지는 못하지만, 성제가 대역무도한 죄를 지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대장군의 뜻이 간절하고, 말이 애통하기 때문에 그의 상주를 따르겠다. 이 일을 멀고 가까운 곳에 알려 일의 처음과 끝을 이해시키라.- [34]

[34] 세어(世語) - 初,青龍中,石苞鬻鐵於長安,得見司馬宣王,宣王知焉。後擢為尚書郎,歷青州刺史、鎮東將軍。甘露中入朝,當還,辭高貴鄉公,留中盡日。文王遣人要令過。文王問苞:「何淹留也?」苞曰:「非常人也。」明日發至滎陽,數日而難作。

6월 1일, 조서를 내렸다.

- 고대에는 군왕의 이름과 자를 만들 때, 범하기 어렵게 쉽게 피할 수 있는 것으로 했다. 지금 상도향공의 휘와 자는 피하기가 매우 어려우니 조정 대신들은 어떻게 바꿀 것인지 상의하도록 하라.

<<진수의 평>>

고대에는 천하를 공고의 것으로 생각하고, 오직 현자들에게 주었다. 후세에는 왕위를 세습하여 적자를 후계자로 세웠다. 만일 적자가 없으면 방계 친족 중에서 덕행이 있는 사람을 선발하였는데, 가령 한대의 문제ㆍ선제가 그러했으니, 이는 바꿀 수 없는 법칙이다. 그런데 명제는 이와 같이 하지 않고 사사로운 애정을 중시하여 어린 아이를 어루만지며 기르고, 그에게 천자의 자리를 전해 주었고, 똑 적합한 인물에게 위탁의 책임을 맡기지 않고 반드시 일족을 정치에 참여시킨 결과 조상은 주살되고, 제왕 조왕도 자리에서 쫓겨났다.

고귀향공 조모는 재간이 있고 총명하여 어린 시절에 완성을 보았으며, 의론을 좋아하고 문장을 애호하여 문제의 풍모를 갖춘 인물이었다. 그러나 사람됨이 경솔하고 분노에 차면 함부로 행동하여 끝내는 스스로 큰 재난 속으로 빠져들었다. 

진류왕(조환)은 정사에 관해 묻지 않고 재상이 정치를 하도록 하고 한위(漢魏)의 전례를 받들어 황위를 진(晉)에게 양도하였다. 그래서 진나라로부터 대국(大國)으로 봉해지고, 진왕조의 빈객이 되어 산양공(山陽公 : 후한의 헌제)보다 더 총애를 받았다.
분류 :
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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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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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5.04
21:43:09
(*.52.89.212)

이름은 고귀향공기인데 내용은 제왕기가 들어있어서 수정했습니다;;;;

코렐솔라

2013.07.09
17:29:11
(*.104.141.18)
주석위치를 수정하고 한문의 수정, 배주가 아닌 것을 파란색으로 처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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