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류왕은 휘를 환(奐), 자를 경명(景明)이라 하고, 무제의 손자이며 연왕(燕王) 조우(曹宇)의 아들이다.

감로 3년(258) 안차현(安次縣)의 상도향공에 봉해졌다. 고귀향공(조모)이 죽은 후, 대신들이 상의하여 상도향공을 맞이하여 즉위시켰다.

6월 2일 낙양으로 들어가 황태후를 뵙게 하고, 이날, 태극전전(太極前殿)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대사면을 행하고 연호를 바꾸었으며 각각 차등을 두어 백성들에게 작호 및 곡물과 비단을 하사했다.

경원(景元) 원년 여름 6월 4일 대장군 사마문왕을 상국으로 임명하고 진공(晉公)에 봉했으며, 식읍 2군(二郡)을 증가시켜 이전의 것과 합쳐 10군이 되었으며, 구석의 예를 더하여 한결같이 이전의 조서와 같게 했다. 사마소의 형제 및 조카 중에서 아직 후로 봉해지지 않은 자를 정후(亭侯)로 임명하고 돈 1천만 전과 비단 1만 필을 하사했는데, 사마문왕이 간곡히 사양했으므로 그만두었다. 7일, 고인이 된 한 헌제의 부인 조절(曹節)이 세상을 떠나자, 조환은 화림원(華林園)에 임하여 애도하는 의식을 거행하고 사지절을 삼고 조절을 헌목황후(獻穆皇后)로 추증하도록 했다. 안장시킬 때, 수레와 옷 등은 모두 한 왕조의 관례처럼 했다. 11일,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왕관(王觀)을 사공으로 삼았다.

겨울 10월 왕관이 세상을 떠났다.

11월 연왕(조우)이 상주하여 동지(冬至)를 경하하였는데, 그 자신을 신하라고 일컬었다. 조서를 내렸다.

- 고대의 군왕 중에서 간혹 신하의 예로써 대우하지 않은 경우가 있었는데, 연왕은 이런 뜻을 따라야 할 것이다. 상주문에서 연왕이 신하라고 칭하지 않도록 하라! 무릇 대종(大宗)을 계승한 자가 자기를 낳아준 부모에게 낮추어 대접하는데, 하물며 이와 같이 중임을 계승하는 것임에랴! 그러나 만일 부모를 신하나 첩과 똑같이 본다면 마음이 편안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모두 예전(禮典)에 의거하여 처리하는 것이니, 응당 그 마땅함을 다하도록 노력하라.

담당관리가 상주했다.

- 예법에서는 무엇보다도 선조를 존숭하고, 제도에서 가장 큰 것은 국가의 경전을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덕행을 살피고 운명에 따라 모든 제후국을 어루만지고 대종의 무거운 지위를 계승하여 삼조(三祖)가 쌓아 놓은 기초를 발전시키십시오. 바라옵건대 연왕은 존경받는 인척이니 번왕으로 봉하시고, 스스로 신중한 태도를 견지하여 겸양의 덕을 솔선하여 실행하시는 것이 국가의 정전(正典)에 부합되는 것입니다. 성조(聖祖)에서는 사실 연왕을 통상과는 달리 제도적으로 존숭하여 신하의 예가 아닌 것으로 받들어야 합니다. 신 등이 공평하게 논의한 결과, 연왕의 장표(章表)는 옛날 법식처럼 들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폐하의 조서는 나라의 정식서이고, 조정은 공적인 일을 명백히 처리하여 천하에 규범을 보여야 하기 때문에 ‘제조연왕(制詔燕王)’이라 했습니다. 조(詔)ㆍ제서(制書)ㆍ주사(奏事)ㆍ상서(上書) 등(위 두 가지는 詔 종류이고, 아래 두 가지는 신하의 上奏 종류)에서 ‘연왕(燕王)’이라 칭한 것은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바꾸어서 한 차례 쓴 것입니다. 종묘에서 제사를 보좌하는 경우가 아니면 모두 왕의 이름을 칭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주사ㆍ상서ㆍ공문서 및 관리ㆍ백성들은 연왕의 이름과 휘를 쓰지 않음으로써 그를 특별하게 대우하고 제후의 위에 위치하도록 하십시오. 위로는 나라의 전범인 선조를 존숭하며 따라 합치시키고, 아래로는 폐하가 부모님께 효도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따릅니다. 위의 양자는 병행하는 것으로 예법에서 실제로 행동하고 판단할 수 있고, 천하에 널리 알려 실행할 수 있습니다.

12월 6일 황룡이 화음현(華陰縣)의 우물 속에 나타났다. 16일, 사예교위 왕상(王祥)을 사공으로 임명했다.

2년(261) 여름 5월 1일 일식이 있었다.

가을 7월 낙랑군(樂浪郡) 밖에 있던 만족 한(韓)ㆍ예맥(濊貊)이 각각 부락민들을 인솔하여 와서 조공을 바쳤다.

9월 8일(?) 조왕간(趙王幹)이 세상을 떠났다. 13일, 다시 대장군에게 진공으로 승진하도록 명하고 상국으로 임명하였으며, 구석을 하사하여 이전의 조칙에 따르도록 하였는데, 대장군은 고사하여 취임하지 않았다.

3년(262) 봄 2월 청룡이 지현(軹縣)의 우물 속에 나타났다.

여름 4월 요동군에서 숙신국(肅愼國)이 사자를 파견하여 이중 삼중의 통역을 거쳐 공물을 바쳤으니, 길이 3척 5촌의 활 30장(張), 1척 8촌 길이의 호목(祜木)으로 만든 화살, 석궁(石弓) 각각 2백 개, 짐승의 가죽, 뼈, 철 종류 세 가지를 자재로 한 개(鎧) 20령(領), 담비 가죽 400장을 바쳤다고 알려왔다.

겨울 10월 촉의 대장 강유가 조양(洮陽)을 침입하였으므로 진서장군 등애가 이에 응해 싸워서 후화(侯和)에서 강유를 격파시키자, 강유는 도주하였다.

이 해(262) 조서를 내려 태조의 제묘 앞 정원에서 고인이 된 군좨주(軍좨酒) 곽가(郭嘉)를 제사지내도록 했다.

4년(263) 봄 2월 또 대장군에게 이전의 조서에서처럼 관직과 위를 승진시키고, 구석 등을 주도록 명령했지만 고사하여 취임하지 않았다.

여름 5월 조서를 내렸다.

- 촉은 작은 나라로써 영토는 협소하고 백성이 적은데도 강유는 그 군대를 혹사시키고 잠시도 쉬게 하지 않았다. 작년에 그는 전쟁에서 진 이후로 또 답중(沓中)에서 경작을 하며 수많은 강인(羌人)을 핍박하고 끊임없이 일을 시켜 백성들은 명령을 견디지 못했다. 약자를 병합하고 우매한 자를 공격하는 것이 군대를 사용하는 방법이고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선공(宣公) 12년에 보임- 적을 공격하여 적으로 하여금 공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손자병법(孫子兵法) 허실(虛失)에 보임- 병법가의 상책이다. 촉이 의지하는 것은 단지 강유뿐이다. 그가 본거지를 멀리 떠난 틈을 타서 공격하면 절반의 힘으로 수비게 두 배의 공을 세울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정서장군 등애에게 장수와 여러 군사를 통솔하여 감송(甘松)ㆍ답중으로 달려가 강유를 포위하여 잡도록 하라. 옹주자사 제갈서(諸葛緖)에게 제군을 인솔하여 무도(武都)ㆍ고루(高樓)로 나아가게 하여 앞과 뒤에서 공격하도록 하라. 만일 강유를 잡는다면 동쪽과 서쪽에서 동시에 진격하여 파촉(巴蜀)을 멸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진서장군 종회(鍾會)에게 낙곡(駱谷)을 지나 촉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가을 9월 태위 고유(高柔)가 세상을 떠났다.

겨울 10월 22일 다시 명령을 내려 대장군에게 이전의 조서처럼 관직을 승진시키고 구석을 내리도록 했다. 11일, 황후에 변씨를 세웠다.

11월 대사면을 행했다. 등애와 종회는 군사를 이끌고 촉을 토벌하러 가서 순식간에 이겼다.

이 달 촉의 유선은 등애에게 투항했고, 파촉은 전부 평정됐다.

12월 19일 사도 정충(鄭沖)을 태보(太保)로 삼았다. 21일, 익주를 분할하여 양주를 설치하였다. 22일, 익주의 사대부와 백성들을 특별히 사면시키고, 또 5년 기한으로 조세의 반을 면제해 주었다.

24일, 정서장군 등애를 태위로, 진서장군 종회를 사도로 임명했다. 황태후가 붕어했다.

함희(咸熙) 원년(264) 봄 정월 1일 죄인을 호송하는 수레로 등애를 불렀다. 3일, 장안에 행차했다. 11일, 사자에게 화산(華山)에서 옥과 비단으로 제사 지내도록 했다.

이 달 종회가 촉에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병사들에게 토벌되었고, 등애도 살해되었다.

2월 1일 익주땅에 있는 사람들의 죄를 특별히 사면했다. 30일, 명원곽후(明元郭后)를 안장했다.

3월 17일 사공 왕상을 태위로, 정북장군 하증(何曾)을 사도로, 상서좌복야 순의(荀顗)를 사공으로 임명했다. 19일, 진공(公 : 사마소)의 작위를 진왕(王)으로 승진시키고, 식읍 10군을 더하여 앞의 식읍과 합쳐 20군이 되었다.

한진춘추(漢晉春秋) - 晉公既進爵為王,太尉王祥、司徒何曾、司空荀顗並詣王。顗曰:「相王尊重,何侯與一朝之臣皆已盡敬,今日便當相率而拜,無所疑也。」祥曰:「相國位勢,誠為 尊貴,然要是魏之宰相,吾等魏之三公;公、王相去,一階而已,班列大同,安有天子三公可輒拜人者!損魏朝之望,虧晉王之德,君子愛人以禮,吾不為也。」及 入,顗遂拜,而祥獨長揖。王謂祥曰:「今日然後知君見顧之重!」

27일, 유선을 안락공(安樂公)에 봉했다. 여름 5월 1일 상국진왕이 5등급 작위제도(公ㆍ侯ㆍ伯ㆍ子ㆍ男)를 부활하자고 상주했으며, 갑술일(15), 연호를 바꾸었다. 24일, 무양선문후(사마의)를 진선왕으로, 무양충무후(사마사)를 진경왕(晋景王)으로 임명했다.

6월 진서장군 위관(衛瓘)은 옹주 군대가 성도현에서 얻은 옥과 옥인을 각각 하나씩을 진상했는데, 새겨진 문자는 ‘성신(成信)’이라는 글자 같았고, 주성왕이 벼를 당숙(唐叔)으로부터 진상받아 주공에게 바친예에 따라 백관들에게 보인 후 나라의 상국의 창고에 넣어 두도록 했다.

손성(孫盛) - 옛날 공손술(公孫述)은 성도(成都)에서 몸을 일으켰으므로 ‘성(成)’이라고 불렀다. 두 옥에 새겨진 문자는 아마 공손술이 지었을 것이다.

처음 촉을 평정한 후, 오의 도적이 영안(永安)으로 진입하였으므로 형주와 예주의 여러 군사들을 출동시켜 구원하였다. 7월 적군은 전부 퇴각했다.

8월 3일 중무군(中撫軍) 사마염(司馬炎)에게 상국의 일을 보좌하도록 명령한 것은 주대인데 노공으로 후사 -주공단(周公旦)의 아들 백금(伯禽)- 를 받들게 한 것과 같은 취지이다.

6일, 조서를 내렸다.

- 이전에 역신 종회가 반란을 계획하여 원정중인 장수와 병사들을 모아 무력으로 위협하여 자신의 간사한 모의와 대역무도함을 말하게 하였으며, 백성들을 핍박하여 모두 말하도록 하자 순식간에 장사들은 놀라 두려워하였다. 상국좌사마(相國左司馬) 하후화(夏侯和)와 기사조속(騎士曹屬) 주무(朱撫)는 이때 사자로서 성도에 머물렀고, 중령군사마(中領軍司馬) 가보(賈輔)와 낭중 양수(羊琇)는 각각 종회의 군사업무에 참여하였지만, 하후화ㆍ양수ㆍ주무는 모두 절의(節義)를 견지하고 조금도 굴하지 않았으면서 종회의 흉악한 발언을 거부하고, 위엄에 임해 돌아보지 않고 말은 정의롭고 격렬했었다. 가보는 산장(散將) 왕기(王起)에게, ‘종회는 사악하고 흉포하므로 장수와 병사들을 전부 죽이려 할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또 ‘상국은 이미 30만 대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와서 종회를 토벌하였습니다’라고 하며 유리한 형세를 과장되게 말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감격시켰다. 왕기가 나와 가보의 말을 여러 군사들에게 전하자 장수와 병사들은 더욱 분발했다. 그들에게 뚜렷한 은총을 주어 충의를 나타내는 것은 당연하다. 지금 하후화와 가보를 향후(鄕侯)에, 양수와 주무를 관내후(關內侯)에 임명하라. 왕기는 가보의 말을 선전하여 장병들에게 알렸으므로 특별한 상을 주어야 된다. 지금 왕기를 부곡(부대)의 장(將)으로 임명하라.

16일, 위장군 사마망(司馬望)을 표기장군으로 삼았다.

9월 1일 종무군 사마염을 무군대장군으로 임명했다. 14일, 조서를 내렸다.

- 역적 오나라는 흉포한 정치와 잔학한 형벌을 행하고, 조세를 거둠에 있어 한도가 없다. 오제(吳帝) 손휴(孫休)는 등구(登邱)를 사자로 보내 교지태수에게 명하여 그 땅의 백성들을 강제로 호송하도록 하고, 병사들을 징발하도록 하고 있다. 오의 대장 여흥(呂興)은 백성들의 부노하는 마음을 이용하고, 또 관군이 파촉을 평정하는 틈을 타서 즉시 호걸들을 규합하여 등구를 주살하고 태수나 장리(長吏 : 현의 장관)를 내쫓아 관리와 백성들을 위로하고 국가(위)의 명령을 따랐다. 구진군(九眞郡)과 일남군(日南郡)에서는 여흥이 역적을 등지고 조정에 귀순하였고, 또 마음을 일제히 호응하여 여흥과 협력한다고 들었다. 여흥은 일남주군(日南州郡)에 문서를 보내 큰 계획을 알리고, 병사들을 이끌고 합포(合浦)에 도달하여 일의 이로움과 해로움을 설명했다. 한편으로는 도위 당보(唐譜) 등을 진승현(進乘縣)으로 파견하여 남중도독호군(南中都督護軍) 곽익(霍弋)을 통해 표문을 올려 자신의 기대를 진술했다. 또 교지의 장수 관리는 각각 표문을 올려 자신의 기대를 진술했다. 또 교지의 장수 관리는 각각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여흥은 사업을 창조했는데, 크고 작은 관리들이 모두 그의 명령을 따르고 있습니다. 군에 있는 산적이 여러 군으로 들어와 서로 세력을 이었지만, 그 계획이 다르고 각자 오에 두 마음을 갖고 있음이 두렵습니다. 잠시 시기의 마땅함을 헤아려 여흥을 독교지제군사(督交阯諸軍事)ㆍ상대장군(上大將軍)ㆍ안정현후(安定縣侯)로 삼고 조정에서 포상을 내려 변방을 어루만져 주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했다. 그들의 충심과 성의는 언사 속에 나타나 있었다. 옛날(춘추시기) 주국(邾國)의 의부(儀父)가 노나라와 결맹한 것은 춘추의 칭찬을 받아들였다. 두융(竇融)은 한으로 돌아와 특별한 예우를 받았다. 지금 위나라의 위엄은 먼 곳까지 떨쳤고, 육합(六合)을 어루만지고 있으므로 천하를 포옹하여 온 세상을 통일시켜야 한다. 여흥은 우선 조정에 투항하였고 군사를 이끌고 귀순하여 만리 먼 곳으로부터 정의의 깃발을 들고 달려와서 관리를 보내 정치적인 일을 관리해주기를 청했으니 그에게 은총을 주어 높은 작위를 주는 것이 마땅하다. 여흥 등이 은총을 받아 충성하는 마음을 갖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먼 곳에 있는 사람들도 이 소리를 듣고 반드시 모두 다투어 권할 것이다. 지금 여흥을 사지절ㆍ도독교주제군사(都督交州諸軍事)ㆍ남중대장군(南中大將軍)에 임명하고, 안정현후로 봉하여 적절하게 판단하여 직무를 처리하고 집행한 후에 상주하도록 허락한다.

책봉하는 조서가 도착하기 전에 여흥은 부하들에게 살해되었다.

겨울 10월 1일 조서를 내렸다.

- 옛날 성덕이 있는 제왕은 혼란을 진압하여 조용하게 하여 세상을 구하고 천하를 보존시켜 공적을 이루었다. 비록 문(文)과 무(武)라는 방법은 다르지만 훈공의 결과는 같다.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간(干)과 척(戚)을 휘둘러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어떤 경우에는 군대를 이끌어 난폭하고 오만한 자를 위협했다. 백성을 사랑하고 국가를 보호하며,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품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먼저 문교(文敎)를 닦아 백성들에게 법칙을 말하고, 부득이한 이후에야 군대를 출동시켜야 되는데, 이것은 역대 군주들과 일치하는 점이다. 과거 한나라 말기에 천하가 분열되고 구주(九州)가 전도되자, 유비와 손권이 이 기회를 틈타 난을 일으켰다. 삼조는 주원을 평안하게 하기 위해 하루의 여유도 없었는데, 적에게 머물게 하고 평정시키지 못한 것이 몇 세대를 지나왔다. 다행히 종묘의 선조들에게 의지하고 대신들이 충성심과 용무로 정치를 보좌하여 사방으로 군사를 나가게 하여 파촉을 평정하였으니 많은 시간을 소모하지 않고 한 번의 싸움으로 이겼다. 근래 오나라는 쇠약하고, 통치는 혼란스러우며, 촉ㆍ한이 평정되자 고립되어 원조가 없었으므로 속하의 교(交)ㆍ형(荊)ㆍ양(揚)ㆍ월(越) 4주의 백성들은 조정에 의탁하려는 생각이 분분하다. 지금 교지의 적장 여흥은 반드시 삼군을 인솔하고 만리 밖에서 조정으로 귀순하고, 무릉읍후(武陵邑侯)의 상엄(相嚴) 등은 5현을 규합하여 조정에 받아주기를 청했으며, 예장(豫章)ㆍ여릉군(廬陵郡)의 산민(山民)은 모여서 오나라에 반기를 들어 조북(助北)장군을 그들의 우두머리의 칭호로 삼았다. 또 오나라 손휴는 병들어 죽고, 통수권자가 바뀌었으며, 나라 안이 안정되지 않았으므로 민심은 표류했다. 적장 시적(施績)은 적국의 명신이지만 회의를 품고 스스로 의심하고, 주군에 대한 마음과 한이 깊었다. 이와 같았으므로 많은 사람이 가까이 있는 자를 배신하고, 굳건한 뜻을 가진 자가 없었다.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멸망의 징조가 이처럼 분명한 적은 없었다. 만일 관군이 출동하여 남하하여 장강ㆍ한수에 다다른다면 강남 백성들은 반드시 아이 손을 잡고 왕의 군대를 영접할 것이니, 이것은 필연적인 이치이다. 그러나 관군을 출동시키면 노역과 비용의 손실이 있다. 가장 좋은 것은 조정의 위신과 덕망을 널리 알려 황제의 인자함과 신의를 나타내어 오나라의 백성들로 하여금 귀순과 융화의 이로움을 알도록 하는 것이다. 상국 삼군사 서소(徐紹)ㆍ수조연(水曹椽) 손혹(孫或)은 옛날의 수춘에서 우리 군사에게 붙잡혔다. 서소는 본래 위정부(爲政府) 남릉(南陵)의 도독이었지만 재간이 탁월하고, 손욱은 손권의 지족(支族 : 分家) 자손이지만 충실하고 선량하다. 지금 서소를 남쪽에서 돌려보내고, 손욱을 그의 부관으로 삼아 국가의 명령을 선양하고, 오나라 사람들에게 알리도록 하라. 설명한 말은 모두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만일 그들이 깨달을 수 있다면, 정벌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조정에서 만든 적을 승리하는 책략이며 옛날부터 있어온 옳은 방법이다. 서소에서 산기상시를 겸임하도록 하고 거기도위와 도정후로 봉하고, 순욱은 급사황문시랑(給事黃門侍郞)을 겸임하도록 하고, 관내후의 작위를 주노라. 서소 등이 이곳에 하사받은 첩과 남녀 시비는 모두 스스로 가도록 하여 국가의 은혜를 밝히고, 그들로 하여금 다시 돌아오게 할 필요 없게 조정의 위대한 신의를 널리 나타내라.

20일, 무군대장군ㆍ신창향후 사마염을 진왕의 태자로 임명했다.

이 해(264) 둔전을 관리하는 관원을 없애고, 부세와 역무를 균등화 했으며, 각 군에 있는 전농(중랑장)을 모두 군의 태수로 삼고 전농(典農) 도위를 현령장으로 삼았다. 촉나라 백성들에게 국내로 옮길 수 있도록 권유하고 모집하였으며, 2년간의 양식을 주고, 20세가 되는 자의 부역ㆍ조세를 면제해 주었다. 안미현(安彌縣)ㆍ복록현(福祿縣)에서 각각 가화(嘉和)가 자라난다고 보고를 올렸다.

2년(265) 봄 2월 19일 구인현(朐肕縣)에서 신령스런 거북이를 잡아 바쳤으므로, 황제는 이것을 상국의 창고에 넣어두도록 했다. 25일, 호분위 장수는 옛날 성도에서 여러 진영으로 말을 타고 가서 종회가 반역한 것을 알리다가 죽어TDmamfh 장수의 동생 장기에게 관내후의 작위를 주었다.

여름 4월 남심지현(南沈疻縣)에서 단 이슬이 내렸다고 보고했다. 오나라가 사자 기척(紀陟)과 홍구(弘夻)를 보내 화친을 청했다.

5월 조서를 내렸다.

- 상국 진왕은 널리 신(神)과 같은 생각을 펴서 천하에 행하였고, 무공을 진동시키고 빛나게 하여 위엄이 황량한 땅을 뒤엎었으며, 좋은 풍습으로 교화시키려는 노력으로 천하를 유력한 것이다. 강남(오의 영역) 지역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고 구제와 교육에 우선적으로 힘썼으며, 무력을 억누르고 인의(仁義)를 숭상하여 조정의 위엄과 덕을 빛냈다. 포고가 전해진 결과, 오나라는 즉시 응하여 사자를 보내 공헌하고 귀순할 뜻을 나타내며, 보옥ㆍ비단ㆍ진귀한 옥 같은 것으로 성의를 나타냈다. 그러나 진왕은 겸양함이 지나쳐 소유하고 있는 물품을 모두 기록하여 조정에 보내왔는데, 이것은 귀속된 오나라 백성들을 위로하고, 그들이 바치는 성의를 존중하여 따른 것이 아니다. 오제 손호(孫皓)가 바친 각종 물품은 전부 진왕에게 돌려보내어 옛 뜻에 부합되게 하라.

진왕이 완강히 고사했으므로 그만두었다. 또 진왕에게 명하여 면류관에 12개의 옥을 더하고, 천자의 깃발을 세우며 나가고 들어오는 경위(警偉) 및 명칭을 모두 천자와 같게 하고, 금근거(金根車)를 타고, 6필의 말이 수레를 끌게 하고, 오시거(五時車 : 다섯 계절의 색을 칠한 수레)를 부거(副車)로 설치하고 모두(旄頭)ㆍ운한(雲罕)을 두고, 음악은 팔일(八佾 : 천자의 무악, 8명이 8열로 춤추는 것)의 무악을 연주하게 하고, 궁전에 종을 거는 대를 설치하도록 명했다. 또 왕비를 왕후로, 세자를 태자라 하고, 왕자, 왕녀, 왕손의 작호를 이전의 의례에 따라 부르도록 했다. 30일, 대사면을 행했다.

가을 8월 9일 상국 진왕이 세상을 떠났다. 10일, 진의 태자 사마염이 왕위와 관직을 계승하고, 전국의 정치적 업무를 수행했다. 대우는 이전과 똑같았다.

8월 양무현(襄武縣)에서 거인이 나타났는데, 키가 30장 남짓되고, 발 길이는 3척 2촌이고, 백발로 황색 홑옷을 입고, 황색 두건을 썼으며, 지팡이를 짚고 백성 왕시(王始)에게 크게 말했다.

“지금은 노나라가 평정되어 태평한 시대가 되었구나.”

9월 모일 대사면을 행했다. 7일, 사도 하증(何曾)이 진 승상이 되었다. 12일, 표기장군 사마망(司馬望)을 사도로, 정동대장군 석포(石苞)를 표기장군으로, 정남대장군 진건(陳騫)을 거기장군으로 임명했다. 24일, 진문왕을 안장시켰다.

11월 강거(康居)ㆍ대완(大宛)이 명마를 바쳤으므로, 상국의 창고에 보내 귀속시켜 먼 곳에서 물건을 바친 공로를 전국에 나타내도록 했다.

12월 13일 위나라에 내린 하늘의 은혜는 영원히 떠나고, 천명은 진(晉)나라로 옮겨졌다. 모든 공경(公卿)ㆍ사대부(士具)들에게 조서를 내려 남쪽 교외에 의식을 갖춰 설치하도록 하였으며, 사자를 보내 황제의 옥새ㆍ수(綏)ㆍ칙서를 받들어 진왕 사마왕(晉嗣王)에게 주도록 했다. 그 법식은 한위(韓魏)가 교차할 때의 예에 따랐다. 15일, 사자를 보내 칙서를 받들도록 했다. 조환은 궁전을 나와 금용성(金墉城)으로 옮겨 기거했으며, 그 이후에는 업성(鄴)의 관사에서 줄곧 기거하였다. 당시 그는 20세였다.

위세보(魏世譜) - 황제는 진류왕(陳留王)으로 봉해졌다. 58세 되는 대안(大安) 원년에 세상을 떠났고, 시호를 원황제(元皇帝)라고 하였다.

- 평하여 말한다

고대에는 천하를 공고의 것으로 생각하고, 오직 현자들에게 주었다. 후세에는 왕위를 세습하여 적자를 후계자로 세웠다. 만일 적자가 없으면 방계 친족 중에서 덕행이 있는 사람을 선발하였는데, 가령 한대의 문제ㆍ선제가 그러했으니, 이는 바꿀 수 없는 법칙이다. 그런데 명제는 이와 같이 하지 않고 사사로운 애정을 중시하여 어린 아이를 어루만지며 기르고, 그에게 천자의 자리를 전해주었고, 또 적합한 인물에게 위탁의 책임을 맡기지 않고 반드시 일족을 정치에 참여시킨 결과 조상은 주살되고, 제왕 조왕도 자리에서 쫓겨났다. 

고귀향공 조모는 재간이 있고 총명하여 어린 시절에 완성을 보았으며, 의론을 좋아하고 문장을 애호하여 문제의 풍모를 갖춘 인물이었다. 그러나 사람됨이 경솔하고 분노에 차면 함부로 행동하여 끝내는 스스로 큰 재난 속으로 빠져들었다. 

진류왕(조환)은 정사에 관해 묻지 않고 재상이 정치를 하도록 하고 한위(漢魏)의 전례를 받들어 황위를 진(晉)에게 양도하였다. 그래서 진나라로부터 대국(大國)으로 봉해지고, 진왕조의 빈객이 되어 산양공(山陽公 : 후한의 헌제)보다 더 총애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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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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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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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에 색깔+ 한자의 문제 해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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