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선변황후전(武宣卞皇后傳)

역경(易經)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남자는 집 바깥에서 바른 위치를 얻고, 여자는 집 안에서 바른 위치를 얻는다. 남자와 여자가 바른 위치를 얻으면, 천지의 대의(大義)에 합치되는 것이다.’

고대의 뛰어난 철인과 제왕들은 후비와 관련된 제도를 명확히 하고, 천지의 덕에 따랐다. 다라서 두 사람의 비 -아황(娥皇)과 여영(女英)- 가 순임금의 빈비(嬪妃)가 되자, 우순(虞舜)의 정치적 도가 지극히 융성하게 되었으며, 태임(太任)과 태사(太姒)가 희씨(姬氏 : 주왕조의 성씨)에게 시집가게 되자, 주나라 왕실은 창성해졌다. 국가의 쇠망과 흥성, 존재와 멸망은 항상 이것(후비의 문제)에서 연유한다. 춘추설(春秋說)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천자의 후비는 12명이고 제후의 후비는 9명이다.”

이 말은 감정의 원리에 따라 고찰해 보아도 바꿀 수 없는 제도인 것이다. 그러나 말세에 들어서면 군왕은 사치스럽고 방종하여 그들의 끊임없는 정욕을 마음대로 충족시킨다. 만일 세상의 남녀가 원망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자연계를 지배하는 조화의 기운에 영향을 주어 동요를 일으키게 될 것이다. 이런 군왕은 오직 미색(美色)만을 중히 여기므로, 후비를 선택할 때에도 정숙하고 단아한 자태를 근본으로 삼지 않는다. 그래서 풍속과 교화는 나날이 쇠미해지고, 국가의 기강은 파괴되어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이니, 어찌 애석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아! 국가를 지배하고 가정을 다스리는 자는 이 점을 영원한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인저!

한(漢)나라의 제도에는 황제의 조모를 태황태후(太皇太后)라 하였고, 황제의 모친을 황태후(皇太后)라고 하였으며, 황제의 정비(正妃)를 황후(皇后)라고 하였고, 기타 내관의 비빈(妃嬪)을 14등급으로 나누었다. 위나라는 한나라의 법제를 답습하였기 때문에 황태후의 칭호는 옛날 제도와 모두 같았으나, 부인 이하의 비에 관해서는 시대에 따라 더하고 덜함이 있었다. 조조가 나라를 세워 처음으로 왕후(王后)를 정한 경우에는 그 아래에 5등급이 있었으니, 부인(夫人)이 있었고, 소의(昭儀)가 있었으며, 첩여(捷伃)가 있었고, 용화(容華)가 있었으며, 미인(美人)이 있었다. 

변란(卞蘭)이 태자(문제)의 미덕을 찬미한 부(賦)를 바쳤는데,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근거가 있다. 태자가 말하기를, “부(賦)란 묘사한 사물에 의탁해 일을 말하는 것이고, 송(頌)이란 성스런 덕의 모습을 찬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작자는 공허한 사구(辭句)를 사용하지 않으며, 찬미하는 대상이 되는 것은 반드시 그 사실에 맞아야 하는데, 변란의 부는 어찌 사실이겠는가? 옛날 오구수왕(吾丘壽王)은 ‘정(鼎)’에 대해 논술하고, 하무(何武) 등은 칭찬의 노래를 해 황금ㆍ비단을 하사받았다. 변란의 부의 내용은 감동시키는 바는 없어도 그 의도는 충분하므로 지금 소 한 마리를 하사하겠다”라고 했다. 그 결과 변란은 친애와 경의를 받았다.

문제는 이 5등급에 귀빈(貴賓)ㆍ숙원(淑媛)ㆍ수용(脩容)ㆍ순성(順成)ㆍ양인(良人)을 더하였다. 명제는 여기에 숙비(淑妃)ㆍ소화(昭華)ㆍ수의(脩儀)를 더하고 순성(順成)이라는 관위(官位)를 빼버렸다. 태화 연간에는 처음으로 부인의 명칭을 회복시키고 그 서열을 숙비보다 높은 위치로 올리도록 명하였다. 부인 이하의 작위를 모두 12동급으로 하고, 귀빈과 부인을 황후 다음에 두었으나 그에 상당하는 작위는 없었다. 숙비의 관위는 상국에 상당하고 작위는 제후왕에 대비되었다. 숙원의 관위는 ‘어사대부’에 상당하며, 작위는 현공(縣公)에 대비되었다. 소희는 ‘현후’에 비견되었고, 소화는 ‘향후’에 대비되었으며, 수용은 ‘정후’에 대비되었고, 수의는 ‘관내후’에 대비되었으며, 첩여는 ‘중이천석(中二千石)’에 상당하였고, 용화는 ‘진이천석(眞二千石)’에 상당하였으며, 미인은 ‘비이천석(比二千石)’에 상당하고, 양인은 ‘천석(千石)’에 대비되었다.


무선변황후는 낭야군(郎耶郡) 개양현(開陽縣) 사람으로 문제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가기(歌妓)출신이지만,(주)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초현이 있던 조조는 변후(卞后)를 받아들여 첩으로 삼았다.

[주]위서(魏書) - 변후는 한 연희(延熙) 3년(160) 12월 모일에 제군(齊郡)의 백정(白亭)에서 태어났다. 이때 누런 기운이 집 위에 가득하여 아버지 변경후(卞敬侯)는 이상하게 생각하여 점사(占師) 왕단(王旦)에게 물으니,


“이것은 길조입니다”


라고 했다.

나중에 그녀는 조조를 따라 낙양에 왔다. 동탁이 난을 일으켰을 때, 조조는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낙양을 떠나 동쪽으로 달아나 난을 피했다. 원술이 조조가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잘못 전했을 때, 그 당시 조조를 따라 낙양으로 온 첩들은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다. 변후는 그녀들을 저지하며 말했다.

“군왕의 생사 여부를 아직 확실히 알지도 못하면서 여러분이 오늘 집으로 달아나버리고 내일 군왕이 여기에 있다면, 우리는 무슨 낯으로 군왕을 바라볼 수 있겠소? 설령 화가 눈앞에 닥치더라도 함께 죽는다면 무슨 두려움이 있겠소!”

모두들 변후의 말을 듣고 따랐다. 조조는 이 말을 듣고서 그녀를 잘 대해 주었다.

건안 초년에 본처 정부인이 폐위되자, 조조는 변후에게 그 자리를 잇도록 했다. 자식들이 여럿되지만 어머니가 없으므로 조조는 변후에게 그들을 양육하도록 했다.

위서(魏略) - 태조에게는 정부인(丁夫人)이 있었고, 또 유부인(劉夫人)도 있었는데, 유부인이 조앙(曹昻: 자는 자수(子脩))과 청하장공주(清河長公主)를 낳았다. 유부인은 일찍 죽었다. 그래서 정부인이 조앙을 길렀다. 조앙은 양(穰)에서 죽었다. 정부인은 항상 조조에게 말했다.


"내 아들을 죽여놓고 와서는, 아무렇지도 않는듯 하다니, 어찌 그럴 수가 있소!"


하고는 절도도 없이 통곡했다. 태조는 이러한 정부인에게 화를 내며, 친정으로 되돌아가게 하여, 그녀의 분노를 꺽으로 하였다. 나중에 태조가 다시 정부인을 만나려 찾아왔으나, 부인은 베틀에 앉아 있었다. 사람이 와서 말했다.


"조공이 왔습니다."


정부인은 꿈쩍을 안했다. 태조가 도달해서 정부인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부디 나랑 같이 집에 돌아갑시다"


정부인은 고개도 돌아보지않고 아무말도 안했다. 태조는 되돌가가다가 집밖에 서서 말했다.


"정말로 같이 안가겠소?"


정부인은 아무말도 안했다. 태조가 말했다.


"나랑 아예 안 만나겠다는 것이오?"


그래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태조가 말했다.


"정말로 결판을 내자는 것이오?"


결국에 헤어지게되었고, 친정사람들에게 정부인을 개가 시키라고 했지만, 친정사람들은 감히 그렇게 못했다.예전에 정부인이 정실(正室)이었고, 또한 조앙도 살아 있었을때, 정부인은 변부인과 그 자식들을 깔 보았다. 나중에 변부인은 정실이 되었는데, 그때의 구박은 잊고, 태조가 밖으로 나갔을때는, 사람을 파견하여 물품을 정부인에게 주고나, 가끔 만나기도 하고, 정부인을 상석에 앉히고 자기는 하석에 앉고, 맞이하고 보내는 것을 예전처럼 하였다.정부인은 감사해하며 말했다.


"나는 이미 폐출된 몸인데, 어찌 그대는 나를 이렇게 대하는 것이오?"


그후 정부인은 죽었고, 변후는 태조에게 부탁해서 자사지내기를 청하였고, 허락을 받았다.그후 허도의 성 남쪽에 장사지냈다. 나중에 태조가 병이들어 누워있을때, 이제는 다시 일어나기는 힘들것을 알고, 한탄하며 말했다.


"내가 예전부터 수많은 행동을 해왔지만, 마음에 부담이 되는 것은 거의 다 없는데, 만약에 사람이 죽어서 영혼이라는 것이있어서, 내 아들 조앙이 나에게 '내 어머니는 어디에 있습니까?'하고 묻는다면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하고 말했다.


魏書曰:后性約儉,不尚華麗,無文繡珠玉,器皆黑漆。太祖常得名璫數具,命后自選一具,后取其中者,太祖問其故,對曰:「取其上者為貪,取其下者為偽,故取其中者。」


위서에 이르길 : 태후는 천성이 검약하여 화려한 것을 숭상하지 않아 옷에 문채와 주옥이 없었으며 그릇은 모두 검은 빛의 옻이었다. 태조가 일찍이 유명한 귀고리를 몇 개 얻었는데 태후에게 명하여 스스로 하나를 선택하도록 했다. 태후가 중등의 물건을 취하니 태조가 그 이유를 물었고 대답하길 :「상등품을 취하는 것은 탐욕스러운 것이고 하등품을 취하는 것은 위선이므로 중등품을 취한 것입니다.」



문제가 태자가 되었을 때, 측근 장어(長御 : 여관의 우두머리였음)가 변후에게 축하하며 말했다.

“장군께서 -그 당시 오관중랑장이었던 조비- 태자를 제수받은 이래, 온 세상의 사람들은 기뻐하지 않음이 없으니, 황후께서는 창고안에 있는 귀중한 보물을 그들에게 나눠 주십시오.”

변후는 이 말을 듣고 나서 오히려 말했다.

“군왕은 조비가 나이가 많다고 생각하고 그를 후사(後嗣)로 삼은 것이며, 나는 단지 자식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했다는 허물을 면하여 다행일 뿐이거늘 무엇 때문에 보물을 그들에게 나눠 주겠소!”

장어가 돌아와서 이런 사실을 조조에게 낱낱이 알리니, 조조는 기뻐하며 말했다.

“화가 나도 얼굴빛을 바꾸지 않고, 기뻐도 절도를 잃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것이다.”

건안 24년(219)

왕후(王后)에 제수되었는데, 사령서에서 말했다.

- 부인 변씨는 여러 자식을 양육함에 있어서 어머니 도리의 모범이 될만한 덕을 갖고 있도다. 이제 그 관위가 왕후로 승진하여 그 의식을 행하니 국내에서 사형죄를 받은 사람도 그 죄를 한 등급 덜어 주겠노라.

건안 25년(220)
조조가 붕어하자 문제가 즉시 왕위에 올랐으며, 왕후의 존호를 왕태후(王太后)라고 했다. 조비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때는 왕후의 존호를 황태후(皇太后)라고 하였고, 영수궁(永壽宮)이라고 일컬었다.


魏書曰:后以國用不足,滅損御食,諸金銀器物皆去之。東阿王植,太后少子,最愛之。後植犯法,為有司所奏,文帝令太后弟子奉車都尉蘭持公卿議白太后,太后 曰:「不意此兒所作如是,汝還語帝,不可以我故壞國法。」及自見帝,不以為言。


위서에 이르길 : 태후는 국용이 부족함으로 인하여 음식을 절약하여 여러 금은으로 만든 기물들은 모두 물리게 하였다. 동아왕 조식은 태후의 작은 아들로 가장 사랑하였다. 이후에 조식이 법을 어기고 관리가 상주를 올리자 문제는 태후의 조카인 봉거도위 변란으로 하여금 공경의 의론을 들고 태후에게 가서 말하도록 하였다. 태후가 말하길 :「이 아이가 이러한 일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너는 돌아가서 황제에게 말하길 나 때문에 국법을 파괴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라.」하였다. 스스로 황제를 보는데 이르러서는 이 문제를 꺼내 말하지 않았다.


臣松之案:文帝夢磨錢,欲使文滅而更愈明,以問周宣。宣答曰:「此陛下家 事,雖意欲爾,而太后不聽。」則太后用意,不得如此書所言也。


신 송지가 생각건대 : 문제가 동전을 가는 꿈을 꿨는데 (동전의) 문자를 없애고자 하면 할수록 더욱 선명하였으므로 이로써 주선(周宣)에게 물어보니 주선이 대답하여 말하길 :「이는 폐하의 집안일인데 비록 하고자는 하여도 태후께서 들어주지 않으실 것입니다.」라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태후의 의중은 이 책(위서)에서 말한 것과 같지 않습니다.


魏書又曰:太后每隨軍征行,見高年白首,輒住車呼問,賜與絹帛,對之涕泣曰:「恨父母不及我 時也。」太后每見外親,不假以顏色,常言「居處當務節儉,不當望賞賜,念自佚也。外舍當怪吾遇之太薄,吾自有常度故也。吾事武帝四五十年,行儉日久,不能 自變為奢,有犯科禁者,吾且能加罪一等耳,莫望錢米恩貸也。」帝為太后弟秉起第,第成,太后幸第請諸家外親,設下廚,無異膳。太后左右,菜食粟飯,無魚 肉。其儉如此。


위서에 또 이르길:태후가 매번 군대를 따라 원정에 동행할 때 나이가 많고 머리가 하얗게 센 사람을 보면 항상 수레를 멈추고 불러 (생활을) 물어보고 견백(絹帛)을 상으로 내리고는 대하여 눈물을 흘리며 말하길 :「부모가 지금까지 살아 계시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라고 하였다. 태후가 매번 외친을 볼 때마다 틈을 내주지 않고 항상 말하길 「거처함에 있어 응당 절검(節儉)에 힘써야하니 마땅히 상을 바라 스스로 안일하게 지낼 것을 생각하면 안 될 것이다. 외척들은 응당 나의 대우가 너무 박함을 기괴하게 여길 것이나 나는 스스로 항상 지키는 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무제를 섬긴지 사오십년으로 검소한 생활을 영위한 지 오래되어 스스로 사치스럽게 바꿀 수가 없다. 법령을 범하는 사람이 있거든 나는 또한 능히 죄를 1등 더 가할 수 있으니 금전이나 곡량의 방면에서 무슨 은사를 바라지 말도록 하라.」황제가 태후의 동생인 변병을 위해 집을 지어줬는데 집이 완성되고 태후가 그 집에 행차하여 여러 외친들을 청하여 연회를 베풀었는데 특이한 반찬이 없었다. 태후 좌우의 사람들도 채소에다가 조밥을 먹었을 뿐 (반찬에) 어육(魚肉)이 없었으니 그 검소한 것이 이와 같았다.


명제가 즉위하자 태후를 높여서 태황태후(太皇太后)라고 했다.

황초 연간에 문제가 태후의 부모에게 작위를 추증하려고 하자, 상서 진군(陳群)이 상주를 올렸다.

- 폐하께서는 성현의 덕망이 있어 천명을 받들어 제위를 올랐으며, 지금은 업을 일으키고 구제도를 혁신하는 시기로써 마땅히 후세의 영원한 법식(法式)이 있어야 합니다. 이제 전적에 있는 조문에 의거해 보아도 부인에게 봉토를 나누어 주고 작위를 수여한 예는 없습니다.

예전(禮典)에서도 부인은 남편의 작위에 따른다고 하였습니다. 진왕조는 옛날의 법도를 어겼는데도 한왕조가 그것을 그대로 이어받았으니, 이것은 선왕의 훌륭한 법식이 아니었습니다.

문제가 말했다.

“이 상주문이 옳으니 이전의 명령을 시행하지 말라. 그리고 이 상주문을 책으로 만들고 조칙을 내려 그것을 대각(臺閣 : 관행에 기록한 기록 문서 따위를 보관하는 창고)에 깊숙이 넣어 두어 영원히 후세의 법식이 되도록 하라.”

태화 4년(230) 봄 명제는 문제의 전적에 위배하면서 곧바로 태후의 조부 변광(卞廣)에게 개양공후(開陽恭侯)라는 시호를 내렸고, 태후의 부친인 변원(卞遠)을 경후(敬侯), 조모 주씨(周氏)를 양도군(陽都郡)에 봉했고, 경후의 부인들에게도 모두 작호(爵號)와 인수(印綬)를 수여했다.

5월에 변후가 붕어했다.


7월에 조조가 묻힌 고릉(高陵)에 합장시켰다.


처음에 태후의 동생 변병(卞秉)은 공적이 있어 도향후(都鄕侯)에 봉해졌다.

황초 7년(226)


개양후(開陽侯)로 승진되었고, 식읍 1천2백 호를 받았으며, 소열(昭烈)장군이 되었다.

위서(魏略)에 이르길 : 일찌기, 변황후의 동생 변병은, 건안 연간이 되어서야 별부사마가 되었는데, 변황후가 항상 태조에게 (그의 벼슬이 낮다고) 원망하는 말을 하자, 태조가 답하길


'단지 (니가) 나랑 얽혀서 처남이 된 건데, (오히려) 많은게 아니냐?'


변황후가 태조에게 그에게 돈과 비단을 (더) 내려주길 원하자, 태조가 또 말하길


'단지 니가 훔쳐다가 주는 것일 뿐인데, (그래도) 모자라냐?'


그리하여 태조의 치세가 끝날 때까지 변병의 관직은 변함이 없었고, 재산 또한 늘지 않았다.


변병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변란(卞蘭)이 뒤를 이었다. 변란은 어렸을 때부터 재능과 학식도 있었으며,(주1) 일찍이 봉거도위(奉車都尉)와 유격장군(遊擊將軍)이 되었으며, 아울러 산기상시(散騎常侍)로 봉해졌다. 변란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변휘(卞暉)가 뒤를 이었다.(주2) 

[주1] 위략(魏略) - 변란(蘭)이 태자(太子)의 미덕(德美)을 찬미한 부(賦)를 지어 바쳤는데, 태자(太子 : 조비)가 말하길,


‘부(賦)란 묘사한 사물에 의탁해 일을 말하는 것이고, 송(頌)이란 성스런 덕(盛德)의 모습을 찬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작자(作者)는 공허한 사구(辭)를 사용하지 않으며, 찬미하는 대상이 되는 것은 반드시 그 사실에 맞아야 하는데, 변란의 부는 어찌 사실이겠는가? 옛날 오구수왕(吾丘壽王)은 정(鼎)에 대해 논술하고, 하무(何武) 등은 칭찬의 노래를 해 황금(金)과 비단(帛)을 하사받았다. 변란의 부의 내용은 감동시키는 바는 없어도 그 의도는 충분하므로 지금 소 한 마리를 하사하겠다.’


라고 했다. 그 결과 변란은 친애(親)와 경의(敬)를 받았다.

[주2] 위략(魏略) - 명제(明帝) 때 국외에 두 난적(오와 촉)이 있었고, 명제는 궁실(宮室)에 남아 있었으므로, 변란(卞蘭)은 항상 가까이서 모시며 자주 엄하게 간언을 했다. 명제는 그 의견을 따를 수는 없었지만, 그의 진심만은 받아들였다. 나중에 변란은 알콜중독(苦酒)과 당뇨병(消渴)에 걸렸는데, 그 당시 명제는 무녀의 물을 이용한 치료법을 신임하여 사자에게 물을 가져가 변란에게 주도록 하였지만 변란은 마시지 않았다. 조서를 내려 그 이유를 묻자,


“병을 치료하는 데는 마땅한 치료약이 있거늘 어찌 제가 이것을 믿겠습니까?”


라고 했다. 명제는 안색을 바꿨지만, 변란은 끝까지 복종하지 않았다. 결국 변란은 당뇨병이 심해져 죽었다. 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은 변란의 솔직한 발언을 좋아하여, 명제가 그를 면전에서 힐책했기 때문에 자살했다고도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또한 변병의 작위와 봉록을 나누어 변란의 동생 변림(卞琳)을 열후에 봉했다. 변림은 보병교위(步兵校尉)까지 이르렀다. 변란의 아들 변륭(卞隆)의 딸이 고귀향공의 황후가 되었으며, 변륭은 황후의 부친이 되었으므로 광록대부에 봉해졌고, 특진의 지위를 받았고 저양향후(雎陽鄕侯)로 봉해졌고, 그의 처 왕씨는 현양향군(顯陽鄕軍)이 되었다. 이와 동시에 변륭의 전처 유씨(有氏)도 순양향군(順陽鄕君)이 되었는데, 이는 그녀가 황후의 친어머니이기 때문이다. 변림의 딸 또한 진류왕의 황후가 되었는데, 그 당시 변림이 이미 죽은 후 이후이기 때문에 변림의 처 유씨에게만은 광양향군(廣陽鄕君)의 작위를 주었다.

<진수의 평>
위왕조의 후비들은 부귀를 얻었지만 쇠망한 한가의 외척과 달리 고위관직에 있으면서 조정의 정치에 관여하지는 않았다. 위나라는 지난 일을 경계삼아 방법을 바꾼 것이며, 이 점에 있어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것이다. 진군의 주의(奏議)와 잔잠(棧潛)의 책론(策論)을 회고하면, 그들은 왕된 자의 규범을 만들어 후세에 까지 영원히 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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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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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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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10
17:39:31
(*.104.141.18)
배주가 아닌 것을 파란색으로 바꿨고 번역되어 있는 것을 바꿨습니다. 조앙 얘기는 약간 뭉클하군요.

코렐솔라

2013.07.10
23:44:36
(*.52.89.87)
으악, 조앙 어무니 얘기에 낚여서 주석의 뒷부분을 하나 빠트렸군요 ㅜㅠ

코렐솔라

2016.08.04
15:55:05
(*.46.174.164)
dragonrz님의 번역을 반영해 이제 모든 주석이 번역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http://rexhistoria.net/157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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