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소견황후전(文昭甄皇后傳)


甄의 발음이 견이냐 진이냐는 링크 참조

문소견황후는 중산군(中山郡) 무극현(無極縣) 사람으로 명제의 어머니이고, 한나라 태보(太保) 견감(甄邯)의 후예이며 집안 대대로 2천 석을 받는 관직을 역임하였다. 아버지 견일(甄逸)은 상채(上蔡)의 현령이었다. 견후는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위서(魏書) : 견일(甄逸)은 상산(常山)의 장씨(張氏)에게 장가들어, 3남 4녀를 얻었는데, 장남은 견예(甄豫)는 빨리 죽었고, 그 다음은 견엄(甄儼)인데, 효렴에 천거되었고, 대중군연(大將軍掾), 곡양(曲梁)의 장(長)이 되었고, 그 다음 아들 견요甄堯)는 효렴에 천거되었다. 장녀는 견강(甄姜), 차녀는 견예(甄脫), 그 다음은 견도(甄道), 그 다음은 견영(甄榮), 그 다음은 지금 말하는 견후(甄后)이다.


견후는 한나라 광화(光和: 178-184) 五年 (182년 12월 15일) 생이다.


(견씨가 태어난 이후) 견씨어머니는 항상 잠을 들때마다 어떤 사람이 옥의(持玉)를 들고 있다가 자신을 덮어주는 것을 보고 모두들 괴이하게 여겼다. 아버지 견일이 (견씨가 3살때) 죽었고, 사람들이 장례식에 찾아왔는데, 이들도 (그 꿈을?) 기이하게 여겼다. 나중에 관상보는 사람인 유량(劉良)이 찾아와 견씨와 그 자매들을 보았는데, 견씨를 가르키면서


"이 아이는 말도 못할 만큼 귀한 인물이 될 것입니다"


하고 말했다. 견후는 어려서부터 다 자랄때까지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8세가 되었을때, 말타는 기술을 뽑내는 자가 문밖에 있어서, 가족들 모두두들 옥상에 올라가 그것을 구경했는데, 오로지 견씨만 그러지 않았다. 모드들 이상하게 생각하며 물었더니, 견후가 대답했다.


"그것은 여인들이 볼만한 것이아니오."


9살이이었을때, 글읽기를 좋아했는데, 글자를 볼떄마다 다 그 뜻을 알고, 수차례 오빠들의 필기구를 빌렸다. 오빠들이말했다.


"니는 여자들이 하는 놀이를 해야 하는건데 왜 책을 읽느냐? 여박사라도 되겠다는거냐?"


견후는 대답했다.


"옛부터 현명한 여자들은, 과거의 일을 배워 자신의 훈계로 하지 않는 것은 없었다고 합니다. 문자를 모르면 어떻게 엣 일을 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후에 천하에 전란이 일어나고, 게다가 기근까지 겹쳤으므로 백성들은 모두 금ㆍ은ㆍ구슬ㆍ옥 등의 보물을 팔았다. 그 당시 견후의 집에는 저장된 곡식이 많았으므로 보물을 많이 사들였다. 견후의 나이는 열 살 남짓하였는데, 어머니에게 아뢰었다.

“지금 세상이 혼란스러운데도 보물을 모두 사들이고 있으니, 죄가 없는 보통 남자라도 보물을 감춘다면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물며 주위에 있는 백성들이 모두 굶주리고 식량도 다 떨어져 가니 어머니께서는 친지들과 이웃 사람들에게 곡물을 나누어 주어 널리 은혜를 베푸십시오.”

모든 집안의 사람들은 옳은 말이라고 하고 곧바로 견후의 건의에 따랐다.[10]

[10] 위략(魏略) - 后年十四,喪中兄儼,悲哀過制,事寡嫂謙敬,事處其勞,拊養儼子,慈愛甚篤。后母性嚴,待諸婦有常,后數諫母:「兄不幸早終,嫂年少守節,顧留一子,以大義言之,待之當如婦,愛之宜如女。」母感后言流涕,便令后與嫂共止,寢息坐起常相隨,恩愛益密

건안 중에 원소는 둘째 아들 원희를 견후와 결혼시켰다. 원희가 유주자사로 나가게 되자, 견후는 남아서 시어머니를 봉양했다. 기주가 평정될 때, 문제는 업에서 견후와 결혼하였다. 견후는 총애를 받았으며 명제와 동향공주를 낳았다. [11]

[11] 위략(魏略) - 熙出在幽州,后留侍姑。及鄴城破,紹妻及后共坐皇堂上。文帝入紹舍,見紹妻及后,后怖,以頭伏姑膝上,紹妻兩手自搏。文帝謂曰:「劉夫人云何如此?令新婦舉頭!」姑乃捧后令仰,文帝就視,見其顏色非凡,稱歎之。太祖聞其意,遂為迎取。

세어(世語) - 太祖下鄴,文帝先入袁尚府,有婦人被髮垢面,垂涕立紹妻劉後,文帝問之,劉答「是熙妻」,顧攬髮髻,以巾拭面,姿貌絕倫。既過,劉謂后「不憂死矣」!遂見納,有寵。


위서(魏書) - 조비에게 총애 된 견씨는, 더욱 더 소극적인 태도를 취해, 후궁들 중에서 총애를 받고 있는 자들은 더욱 더 마음에 들도록 노력시키고, 총애를 받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격려 충고해 주었다. 조비에게는


"옛날, 황제의 자손이 번창한 것은 많은 측실을 두었기 때문에지요. 넓고 재덕이 뛰어난 여성을 찾아 후계자를 많이 낳으세요."


라고 했다고 한다. 나중에 조비 문제는 후궁이던 임씨(任氏)를 쫒아 내려고 했다. 견후가 문제에게 청했다.


"임씨는 이미 집안이 빠빵한 집안으로, 덕과, 색(色)에서 저희들이 따라갈 수 없는데요? 왜 쫒아내려고 하십니까?"


황제가 대답했다.


"임씨는 서질이 포악하고, 급하고, 순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내 성질을 건드린게 한 두 번이 아니오. 그래서 떠나보내려 하오.".


견후가 울면서 간곡히 청했다.


"저는 敬遇之恩을 받고 있는데, 이것은 사람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만약에 임씨가 쫒겨난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저때문이라 할 것입니다. ..."


하고 청했지만, 문제는 임씨를 쫒아냈다.


건안 16년 10월(211년) 태조가 관중(關中)으로 (마초랑 싸우러) 갔다. 무선황후 변황후(卞皇后)도 따라갔는데, 맹진(孟津)에 머물렀다. 조비는 이때 업성에 있었다. 변황후가 몸이 쇠약해져 병이 들었을 때, 견씨도 걱정한 나머지 하루종일 울고 있었다. 이것을 좌우의 신하들이 변황후의몸에 차도가 있다면서 견후를 달랬다. 하지만 견후는 믿지않고 말했다.


"변황후가 집에 있을때도 항상 아팠는데, 밖에 나와 있는 지금 차도가 있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이것은 날 달래려고 하는 이야기지요?"


하면서 더더욱 변황후를 걱정했다. 나중에 변황후로부터 편지를 받아


"몸이 좀더 나아져서 평상시처럼 되었다"


는 이야기기를 들어서야 견씨는 마음이 풀어졌다. 건안 17년(212년) 5월 대군이 업성으로 되돌아 왔고, 견후는 변황후를 알현하러 갔는데, 변황후의 장막을 보자, 이미 기쁨에 젖어 울었고, 좌우의 신하들이 감동했다. 변씨는 이러한 견씨를 보자 같이 울었다. 변씨는 말했다


"新婦謂吾前病如昔時困邪?吾時小小耳,十餘日即差,不當視我顏色乎!"


하면서,


"견씨는 진짜 효행인 신부겠지요"


라고 감탄했다.


건안21년 (216년)에 조조가 동방 토벌에 출병했을 때, 무선황후(변황후), 문제(조비), 명제(조예; 견씨의 아들), 동향공주(견씨의 딸) 등은 모두 태조를 따라갔지만, 견씨 만은 병을 위해서 업에 머물었다. 다음해 건안22년(217년)9월 귀환했을 때, 변씨를 가까이서 모시는 사람들은 견씨의 안색이 좋은 것을 보고


"2명의 아이들과 떨어져 떨어져 있었는데, 전보다 더 안색이 좋은 것은 왜 그렇습니까?"


라고 물었다. 견씨는


"제 아이들이 어머님(변씨)과 함께 가고 있는데, 나에게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라고 대답했다. 견씨의 총명함이 이와 같았다.



연강(延康) 원년(220)

정월에 문제(조비)가 왕위에 즉위했다.

6월, 남쪽 정벌에 나섰으나, 견후는 업성에 남았다.

황초 원년 10월에 조비는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제위에 오른 후, 산양공(山陽公 : 후한의 헌제)은 두 딸을 위제(魏帝)에게 주어 빈비가 되게 했으며, 곽후(郭后)ㆍ이귀인(李貴人)ㆍ음귀인(陰貴人) 등도 모두 총애를 받았다. 견후는 갈수록 실의에 빠져 원망하는 말을 하게 되었다.

문제는 대노하여 2년 6월에 사자를 파견하여 죽도록 하였으며, 업에 매장하였다.


위서魏書에서 이르길 : 유사有司가 장추궁長秋宮을 세우는 것을 아뢰니, 문제가 새서璽書로 황후를 맞이하려 하여, 이르게 하나, 황후가 상표하길 : “첩이 듣기론 선대의 흥함에서, 국가에 제사를 오래도록 지낼 수 있었던 까닭은, 복을 후사에 물려줬기 때문이라, 후비后妃로 인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그 사람을 살피고 가려서, 내교內敎를 일으켰습니다. 가령 즉위 초에는, 참으로 마땅히 어질고 정숙한 이가 오르게 하여, 육궁六宮을 다스려야 합니다. 첩이 어리석고 고루함을 스스로 반성하니, 자성粢盛의 일을 감내하지 못하고, 병까지 앓았기에, 감히 변변치 못한 뜻을 지키는 바입니다.” 새서가 3번 이르나 황후는 3번 사양했고, 글도 더욱 간절했다. 당시 한더위라, 문제는 추량秋涼을 기다렸다가 다시 황후를 영접하길 원했다. 때마침 황후가 병환으로 위독하더니, 여름 6월 정묘일에, 업에서 죽었다. 문제가 애통해하며 탄식했고, 황후의 새수璽綬를 책증策贈하였다. 

 

신 배송지가 춘추春秋의 의義를 생각하니, 부인의 대악大惡은 숨기고, 소악小惡은 쓰지 않습니다. 문제文帝가 견씨甄氏를 세우지 않았고, 게다가 살해했으니, 일에서 명료하게 드러나 훤히 알 수 있는 바가 있습니다. 위사魏史가 만약 대악이라 여겼다면, 마땅히 숨기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고, 만약 소악이라 여겼다면, 응당 거짓으로 이를 위해 말하지 않았을 것이나, 허문을 보기 좋게 꾸밈이 이 지경에 이르러, 구사舊史에서 들은 바와 다릅니다. 이를 헤아려 말하자면, 그(왕침)가 변卞, 견 여러 후后의 언행의 선함이라고 일컬은 것은, 모두 진실을 말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진씨陳氏가 이러한 것을 덜어낸 건, 진실로 까닭이 있었던 것입니다.


명제가 즉위하자, 담당관리가 상주하여 견후에게 시호를 추증하자고 요청하니, 명제는 사공 왕랑에게 모절(旄節)을 갖고 옥책(玉策)을 받들어, 태뢰의 희생으로 견후의 능에 제사지내게 했으며, 별도로 참묘(寢廟 : 능묘 옆에 설치하여 祭典을 행하는 곳)를 업성에 세웠다.[13]

[13] 위서재삼공주(魏書載三公奏) - 「蓋孝敬之道,篤乎其親,乃四海所以承化,天地所以明察,是謂生則致其養,歿則光其靈,誦述以盡其美,宣揚以顯其名者也。今陛下以聖懿之德,紹承洪業,至孝烝 烝,通於神明,遭罹殷憂,每勞謙讓。先帝遷神山陵,大禮既備,至於先后,未有顯諡。伏惟先后恭讓著於幽微,至行顯於不言,化流邦國,德侔二南,故能膺神靈 嘉祥,為大魏世妃。雖夙年登遐,萬載之後,永播融烈,后妃之功莫得而尚也。案諡法:『聖聞周達曰昭。德明有功曰昭。』昭者,光明之至,盛久而不昧者也。宜 上尊諡曰文昭皇后。」是月,三公又奏曰:「自古周人始祖后稷,又特立廟以祀姜嫄。今文昭皇后之於萬嗣,聖德至化,豈有量哉!夫以皇家世(祀)〔妃〕之尊, 而克讓允恭,固推盛位,神靈遷化,而無寢廟以承享(禮)〔祀〕,非所以報顯德,昭孝敬也。稽之古制,宜依周禮,先妣別立寢廟。」並奏可之。

태화 원년(227) 3월

중산군 위창현(魏昌縣)의 안성향(安城鄕)에 있는 식읍 1천 호를 이용하여 견일을 추증하여 봉하고, 시호를 경후(敬侯)라고 했으며 견일의 맏손자 견상(甄像)에게 조부의 봉작을 잇게 했다.

4월, 처음으로 선조의 영묘를 세우려고 땅을 파다가 옥새를 얻었는데, 사방이 1촌 9분이었고, 그 위에 인문(印文)에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었다.

‘천자는 자애로운 모친을 숭앙하고 그리워한다.’

명제는 이 글씨 때문에 얼굴을 고치고 태뢰의 제의로써 종묘에 제사지냈다. 또 명제는 꿈속에서 견후를 본 후에 외가들의 친하고 소원하고 높고 낮음에 따라 차이와 등급을 두었으며, 각기 차별을 두어 임용했고 막대한 하사품을 주었으며 견상을 호분중랑장에 임명했다. 이 달, 견후의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명제는 시복(緦服)을 만들어서 상례(喪禮)에 직접 참여했고, 모든 관료들도 배석했다.

상복제도에는 무거운 것으로부터 가벼운 것까지 다섯 단계가 있는데, 견후의 모친상을 당했을 때 명제가 입은 시복(緦服)은 그 중 하나로 가장 가벼운 곳이다. 의례(儀禮) 상복(喪服)편을 보면, 외친(外親)의 상복은 모두 시복을 입는다.

태화 4년(230) 11월 견후의 옛날 능은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작게 건축되었으므로, 견상을 보내 태위를 겸임하여 부절을 갖고 업성에 가서 토지신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12월에 견후를 조양릉(朝陽陵)에 다시 묻었다. 견상은 귀환하여 산기상시로 승진하였다.

청룡 2년(234) 봄에 견후의 오라버니 견엄(甄儼)에게 안성향목후(安城鄕穆侯)의 시호를 추증했다. 여름에 오나라 군대가 양주에 침입해 오자, 견상을 복파장군(伏波將軍)에 임명하고 절을 주어서 여러 장수를 감독하고 동방 정벌에 나서게 하였으며, 돌아온 이후에 견상을 다시 사성교위(射聲校尉)로 삼았다.

3년(235) 견상이 세상을 떠나자, 위(衛) 장군의 직위를 추증하고 봉지를 위창현(魏昌縣)으로 바꾸었고, 시호를 정후(貞侯)라고 하였으며, 그의 아들 견창(甄暢)으로 후사를 잇게 했다. 아울러 견창의 동생인 온(溫)ㆍ위(韡)ㆍ염(豔)을 모두 열후로 삼았다.

4년(236) 견일과 견엄의 봉작을 바꾸어 위창후(魏昌侯)라고 하고, 시호는 옛날의 명칭을 답습했다. 견엄의 부인 유씨에게 동향군의 직위를 주었고, 또 다시 견일의 부인 장씨에게 안희군(安喜君)의 작위를 추증했다.

경초 원년(237) 여름에 담당관리가 칠묘(七廟)의 제도를 의논하여 정했다. 겨울에 또 상주를 올렸다.

천자에게는 7개의 영묘가 있으니, 시조의 묘와 아버지로부터 거슬러올라가 6대까지의 묘를 말한다.

- 대체로 제왕이 흥기하게 되는 것은, 하늘의 명을 받은 군주가 있어야 하고, 신령의 도움을 받는 성비(聖妃)가 있어야 하며, 그런 연후에 그의 세상을 흥성하게 이끌어 왕업을 이룩하는 것입니다. 옛날 고신씨(高辛氏 : 제고)는 4명의 비가 낳은 아들의 운세를 점쳐보니 모두 천하를 지배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손 제지(帝摯)ㆍ도당(陶唐)ㆍ상계(商契)ㆍ주기(周棄)가 대대로 흥성했습니다. 주나라 사람들은 위로는 시조 후직(后稷)을 공손히 받들어 하늘에 제사지냈는데, 왕의 탄생 초기까지 거슬러올라가 보면, 강원(姜嫄)에 근본을 두고 있습니다. 때문에 특별히 그녀를 위해 영묘를 세우고, 대대로 공물을 바쳤던 것입니다. 이것은 주례(周禮) 대사락(大司樂)에서, ‘이칙(夷則)을 연주하고, 중려(中呂)를 노래하며, 대호(大濩)를 춤추어 죽은 어머니에게 공물을 바친다’는 말입니다. 

중국 음율은 12개로 구분되고, 또 양율(陽律) 6개와 음율(陰律) 6개로 구분된다. 이칙(夷則)은 양율에 속하고, 중려(中呂)는 음율에 속하는데, 이 두 음은 조화를 잘 이룬다.

대호(大濩)는 은나라 초대 천자인 탕왕시대에 만들어진 무악(舞樂)이다.

시경 대아(大雅)ㆍ생민(生民)의 시인들은 그녀를 가리기를, ‘주의 시조를 낳은 것은 오직 강원이구나’라고 하여 왕노릇 하는 자에 대해 교화의 근본과 주왕조 시조가 이 여자로부터 태어났음을 설명했습니다. 시경 노송(魯頌)ㆍ민궁에서 또 ‘닫혀 있는 강원의 영묘(靈廟)는 청정하고, 한 알 또 한 알, 한 가지 또 한 가지, 빛나는 강원이여, 그 덕은 바르구나’라고 했습니다. 시경이나 주례에서 찬미하는 희씨 선조의 성덕은 이처럼 아름답고 고상합니다. 위대한 위나라의 길운은 유우(有虞 : 舜)를 계승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제왕의 도를 존중하고 넓혀, 하ㆍ상ㆍ주 3대에는 더욱 융성했습니다. 그 선조의 영묘는 사실 주왕조와 똑같습니다. 오늘 무선황후(武宣皇后)와 문덕황후(文德皇后)는 각자 무제ㆍ문제를 제사지내며 영원한 지위를 얻었습니다. 문소견황후에 이르러서는 하늘이 내려준 상서로움을 누리며, 영명한 폐하를 낳아 기르고, 백성들을 구하는 공업을 세웠으며, 덕은 세상에 가득하여 이 자손들이 왕실을 이을 수 있는 기초를 열어 주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 왕조의 교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영묘를 세워 특별히 제사를 지내는 것도 강원(姜嫄)의 영묘와 똑같은 취지입니다.

영묘는 시대가 변하고 관계가 멀어지면 헐리는 것이 상례이다. 단지 특별한 인물은 왕조의 지속적인 보존이 된다. 예를 들면, 주나라의 칠묘(七廟)에는 후직(后稷)ㆍ문왕(文王)ㆍ무왕(武王)의 묘가 헐리지 않았고, 현존하는 왕의 아버지로부터 4대 묘를 세우고, 왕이 바뀌면 먼 선조의 묘를 헐고, 전왕(前王)의 묘를 세운다. 주나라에서는 이 칠묘 이외에 특별히 강원(姜嫄)의 묘가 세워졌다.

그러나 가원의 경우와는 달리 묘를 훼손시키지 못하게 하는 제도가 없어 빛나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처럼 두려워하는 것은 공적을 평하고 덕을 보고하는 옛날의 가르침이 후세에 잊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효심을 분명히 하여 후세에 나타낼 수 있습니다. 문소황후의 영묘는 대대로 공물을 바쳐 제사지내고, 음악을 연주하고 시조의 묘와 똑같이 예우하여 훼손되지 않는 법전으로 영원히 빛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명제는 칠묘 건립에 관한 상주문을 모두 금책(金策)에 새겨 금속 상자에 보관하도록 했다.

명제는 외가(外家)의 일을 끊임없이 생각했다.

경초 말년, 견창은 아직 어렸지만, 사성교위로 삼고 산기상시의 자리를 주었으며, 또한 대저택을 특별히 지어주고, 제왕이 수레를 타고 직접 찾았다. 또 그 집의 뒤뜰에 견상의 어머니를 위해서 묘를 지었고, 그 지역을 위양리(渭陽里)라고 이름하여 외가를 추모했다.

시경(詩經) 진풍(秦風)ㆍ위양(渭陽)편은 진나라 강공(康公)이 어머니를 그리며 지은 작품이다. 강공의 어머니는 진헌공(晋獻公)의 딸이다. 진(晋) 나라에 소동이 일어났을 때, 헌공의 아들 중이(重耳)가 진(秦)을 의존하고, 그곳에 체류하고 있던 중에 강공의 어머니는 죽었다. 나중에 중이는 목공(穆公)의 원조를 받아 진(晋)으로 귀국하였는데, 당시 태자였던 강공은 위수(渭水) 북쪽까지 가서 동생을 보내며 어머니가 없음을 생각하고 즉시 이 시를 지었다. “나의 구씨(舅氏)를 보내려고, 이곳 위양리(渭陽里)에 이르렀네.”

가평 3년(251) 정월 제왕 조방(曹蒡) 시대이다. 견창이 세상을 떠났으므로, 거기장군의 작위를 추증하고, 시호를 공후(恭侯)라고 했다. 아들 견소(甄紹)가 부친의 작위를 이었다.

태화 6년(232) 명제의 사랑하는 딸 조숙(曹淑)이 요절하였는데, 명제는 그의 시호를 평원의공주(平原懿公主)라 하고, 그녀를 위해 묘를 세웠다. 견후는 이미 죽은 종손(從孫) 견황(甄黃)의 관을 꺼내 공주와 합장시키고, 견황을 열후로 추증, 봉했으며, 부인 곽씨(郭氏)의 사촌동생 곽덕(郭悳)을 그 후계자로 하여 견씨의 성을 잇도록 하고 평원후(平原侯)로 책봉해 평원의공주의 작위를 계승하도록 했다.(20)

[20] 孫盛 - 於禮,婦人既無封爵之典,況于孩末,而可建以大邑乎?德自異族,援繼非類,匪功匪親,而襲母爵,違情背典,於此為甚。陳群雖抗言,楊阜引事比並,然皆不能極陳先王之禮,明封建繼嗣之義,忠至之辭,猶有闕乎!詩云:「赫赫師尹,民具爾瞻。」宰輔之職,其可略哉!

 

손성이 말하길 - 예법에 부인이 이미 봉작을 받는 전제가 없거늘 하물며 아이에게 대읍을 봉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곽덕은 스스로 (조씨와) 종족이 다르고 다른 부류에 빌붙어 공로가 없고 친속도 아니면서 모친의 작위를 이어받은 것은 정리와 전제에 모두 굉장히 위배되는 것이다. 진군이 비록 항언하고 양부가 비슷한 고사를 인용하였지만 모두 선왕의 예법을 남김없이 진술하고 봉건왕조의 후계자를 세우는 의리에 관해 밝히지 않았으므로 지극히 충성스러운 말에도 오히려 부족한 점이 있었구나! 시경에 이르길 :「혁혁한 사윤이여 백성들이 더불어 그대를 바라본다.」고 하였는데 재보의 직무를 가히 생략할 수 있겠는가!


晉諸公贊曰:德字彥孫。司馬景王輔政,以女妻德。 妻早亡,文王復以女繼室,即京兆長公主。景、文二王欲自結于郭后,是以頻繁為婚。德雖無才學,而恭謹謙順。甄溫字仲舒,與郭建及德等皆后族,以事宜見寵。 咸熙初,封郭建為臨渭縣公,德廣安縣公,邑皆千八百戶。溫本國侯,進為輔國大將軍,加侍中,領射聲校尉,德鎮軍大將軍。泰始元年,晉受禪,加建、德、溫三 人位特進。德為人貞素,加以世祖姊夫,是以遂貴當世。德暮年官更轉為宗正,遷侍中。太康中,大司馬齊王攸當之藩,德與左衛將軍王濟共諫請,時人嘉之。世祖 以此望德,由此出德為大鴻臚,加侍中、光祿大夫,尋疾薨,贈中軍大將軍,開府侍中如故,諡恭公,子喜嗣。喜精粹有器美,歷中書郎、右衛將軍、侍中,位至輔 國大將軍,加散騎常侍。喜與國姻親,而經趙王倫、齊王冏事故,能不豫際會,良由其才短,然亦以退靜免之。


진제공찬에 이르길 : 곽덕(郭悳)은 자가 언손(彥孫)이다. 사마경왕이 정치를 보좌하면서 그의 딸을 곽덕에게 시집보냈다. 처가 일찍죽자 문왕이 다시 그의 딸을 아내로 잇게 하였는데 곧 경조장공주이다. 경왕과 문왕은 다만 곽후와 맺어지고 싶었기에 이로써 빈번히 혼사를 치룬 것이다. 곽덕은 비록 재주와 학식이 없지만 공경스럽고 근면하며 겸손하고 화순하였다.


견온(甄溫)은 자가 중서(仲舒)로 곽건(郭建), 곽덕 등과 모두 황후의 친족인데 일을 마땅하게 처리하여 총애를 받았다. 함희 연간초에 곽건을 임위현공에, 곽덕을 광안현공에 봉하였는데 봉읍이 모두 8000호였다. 견온은 본래 국후의 신분이었는데 승진시켜 보국대장군에 임명하고 시중을 가했으며 사성교위, 덕진군대장군을 겸임하였다. 태시 원년 진나라가 선양을 받고 곽건, 곽덕, 견온 3인에게 특진의 자리를 더했다. 곽덕은 위인이 올곧고 질박한데다 더하여 세조의 자형이라 이로써 마침내 당세에 굉장히 존귀하였다. 곽덕은 말년에 관직이 다시 변하여 종정이 되었다가 시중으로 옮겼다. 태강 연간에 대사마 제왕 사마유가 번국으로 가던 때에 곽덕과 좌위장군 왕제(王濟)가 더불어 간청하였는데 당시의 사람들이 훌륭하게 여겼다. 세조는 이로써 곽덕을 훌륭하게 여겼고 이로 말미암아 곽덕으로 나가 대홍려로 임명하고 시중, 광록대부를 더했는데 얼마 후 병으로 죽었다. 중군대장군으로 추증하고 개부시중은 전과 같이 하며 시호는 공공(恭公)으로 하고 아들인 곽희()가 자리를 이었다. 곽희는 질박하고 도량이 있어 중서랑, 우위장군, 시중을 역임하고 관위가 보국대장군에 이르렀고 산기상시를 더했다. 곽희는 국가와 인척관계에 있는데 조왕 사마륜과 제왕 사마경의 사건에서 능히 그 사이에 낄 수 없었던 것은 진실로 재주가 보잘 것 없었기 때문이지만 또한 물러나 청정한 생활을 하는 것으로 면한 것이다.


청룡 연간에 명제는 또 견후의 사촌형 아들인 견의(甄毅)와 견상의 동생 3명을 모두 열후로 삼았다. 견안은 자주 상소하여 그 시대의 정치에 대한 의견을 진술하였고, 관직은 월기교위까지 올랐다.

가평 연간에 명제는 또 견창의 아들 2명을 열후로 삼았다. 견후의 형 견엄의 손녀를 제왕 방의 황후로 삼았는데, 그녀의 부친은 이미 죽었으므로, 모친에게 광락향군(廣樂鄕君)이라는 자리를 주었다.

<진수의 평>
위왕조의 후비들은 부귀를 얻었지만 쇠망한 한가의 외척과 달리 고위관직에 있으면서 조정의 정치에 관여하지는 않았다. 위나라는 지난 일을 경계삼아 방법을 바꾼 것이며, 이 점에 있어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것이다. 진군의 주의(奏議)와 잔잠(棧潛)의 책론(策論)을 회고하면, 그들은 왕된 자의 규범을 만들어 후세에 까지 영원히 전하였다.

분류 :
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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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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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5.06
11:37:25
(*.104.28.52)

개인적인 주석 하나 달아놓습니다.

코렐솔라

2013.05.28
00:34:52
(*.52.89.212)
건안 중에 원소는 둘째 아들 원희를 견후와 결혼시켰다. 원희가 유주자사로 나가게 되자, 견후는 남아서 시어머니를 봉양했다. 기주가 평정될 때, 문제는 업에서 견후와 결혼하였다. 견후는 총애를 받았으며 명제와 동향공주를 낳았다.

가 맞는 번역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문제(원희)가 아니고 당연히 문제는 조비입니다.

"원망하는 말도" 가 아니고 "원망하는 말을" 입니다.

221년 6월의 위치가 사자를 보내 바로 앞에 나와야 한답니다.

이상 삼국지갤러리의 오역 수정이었습니다.

코렐솔라

2013.07.10
17:53:54
(*.104.141.18)
주석 추가했습니다.

Shuruppak

2013.11.01
11:27:28
(*.152.218.158)
건안21년 (216년)에 조조가 동방 토벌에 출병했을 때, 변황후, 조비, 명제 조방(견씨의 아들), 동향공주(견씨의 딸) 등은 모두 태조를 따라갔지만, 견씨 만은 병을 위해서 업에 머물었다.

여기서 명제 조방이 아니라 조예인것 같습니다.

코렐솔라

2013.11.01
12:06:59
(*.166.245.168)
헛 그렇군요, 지적 감사합니다. 바로 수정했습니다.

코렐솔라

2013.12.03
19:17:12
(*.166.245.165)
위서에 있는 장추궁과 배송지가 춘추의 의라고 표현하는 부분은 모두 처사군님의 번역입니다! http://blog.naver.com/kyspert/110176183365

코렐솔라

2016.08.30
22:14:49
(*.234.104.249)
맨 마지막의 손성의 평과 곽덕에 대한 일화는 dragonrz님의 번역입니다. http://rexhistoria.net/157990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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