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덕곽황후전(文德郭皇后傳)

문덕광황후는 안평군(安平郡) 광종현(廣宗縣) 사람이며, 조상 대대로 장리(長吏)였다. 곽후가 어렸을 때,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기이하게 여겨 말했다.

장리는 보통 현의 고관ㆍ승(丞)ㆍ위(尉) 등 4백 석으로부터 2백 석까지의 관리를 지휘한다. 그러나 6백 석 이상의 관리를 지휘한다는 설도 있다.

위서에서 이르길: 아버지 곽영(郭永)은 남군(南郡)태수가 되었는데 시호를 경후(敬侯)라고 했다. 어머니의 성은 동씨(董氏)로서 당양군(堂陽君)이며 아들 셋과 딸 둘을 낳았다. 장남 곽부(郭孚)는 고당(高唐)의 령이 되었고, 차녀는 곽욱(郭昱)이며 둘째 딸이 곽후(郭后)가 되었다. 곽후의 동생이 곽도(郭都)이고, 막내동생이 곽성(郭成)이다. 곽후는 중평 원년(184) 3월 10일에 태어났는데 상서로운 기운이 있었다.

“이 아이는 내 딸 중에서 왕이 될 자격이 있다.”

그는 드디어 여왕(女王)이라는 글자로써 자를 삼았다. 곽후는 아주 어려서 부모를 잃었고, 전란의 와중에 유랑했으며, 동제후(銅鞮侯)의 집안에 몸을 의탁하기도 했다. 조조가 위공(魏公)이 되었을 때, 눈에 띄어 동궁(東宮)에 들어왔다. 곽후는 지모와 술수가 있어 때때로 문제에게 의견을 제시하여 받아들이게 했다. 문제가 후계자로 정해졌을 때도, 곽후는 계획을 꾸미기도 했다. 태자가 왕위에 오르자, 곽후는 부인으로 봉해졌으며, 조비가 제위가 오르자, 귀빈이 되었다. 견후가 죽음으로 해서 곽후는 총애받게 되었다.

황초 3년(222)
황후 옹립이 거론되자, 문제는 곽후를 세우려고 하였는데, 중랑(中郞) 잔잠(棧潛)이 상소를 올려 말했다.

- 옛날의 제왕은 천하를 다스림에 있어서 밖(조정의 신하)의 도움 뿐만 아니라 안(궁정)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내조의 문제는 천하가 다스려지고 혼란스러워지는 원인이 되며, 국가의 흥성과 쇠약함도 이로부터 비롯됩니다. 따라서 서릉씨(西陵氏)의 딸 -이름이 루조(嫘祖)이며 황제의 정비(正妃)가 되었음- 은 황제에게 시집갔으며, 영아(英娥) -요의 두 딸로서 아황(娥皇)과 여영(女英)- 등은 순임금에게 시집가서 모두 현명함으로써 상고시대에 향기로운 명성을 떨쳤습니다. 하나라 걸임금이 남소(南巢) 땅으로 도망친 것도 말희(末喜)가 화를 야기시킨 것이며, 은나라의 주가 포락(炮烙)의 구리 기둥에 기름을 바르고 그 아래에는 숯불을 지피고 그 위에 죄인을 놓고 태워서 죽게하는 형벌을 세운 것도 달기(妲己)를 기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선왕과 성철을 그들의 정비를 책립함에 있어서 매우 신중히 하여 반드시 이전부터 계속 내려온 귀족의 가문에서 취했고, 그 중에서도 아주 정숙한 여자를 선택해 후궁, 즉 육궁을 통솔하게 하고 경건하게 종묘에 제사를 올리게 하였으며, 그 결과 부인의 덕교가 계승되고 바르게 되었습니다. 역경에서, ‘가정의 도가 바르게 되면 천하가 안정된다’라고 했으니, 안으로부터 밖으로 미치는 것은 선왕의 법령이고 제도였습니다. 춘추에서 예를 관장하는 종인(宗人)ㆍ흔하의 말에, ‘첩을 정부인으로 삼은 예제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제나라 환공이 규구(葵丘)에서 제후들과 맹약을 결심하면서 또한 말하기를, ‘첩을 아내로 삼는 경우는 없다’고 했습니다. 지금 후궁의 대열에 들어선 첩들은 항상 수레를 타는 제왕의 지위에 근접해 있습니다. 만일 총애 때문에 이런 사람 중에서 황후를 얻는다면, 비천한 사람이 갑자기 고귀한 지위에 오르게 되는 것이니, 신은 후세에 아랫사람이 제왕을 능멸하여 제왕의 권위가 떨어지고 전제(典制)가 느슨해지고 법도가 없어져서 화란이 위로부터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문제는 이 상주를 듣지 않고, 드디어 곽씨를 황후로 삼았다.

위서(魏書) - 后上表謝曰:「妾無皇、英釐降之節,又非姜、任思齊之倫,誠不足以假充女君之盛位,處中饋之重任。」后自在東宮,及即尊位,雖有異寵,心愈恭肅,供養永壽 宮,以孝聞。是時柴貴人亦有寵,后教訓獎導之。後宮諸貴人時有過失,常彌覆之,有譴讓,輒為帝言其本末,帝或大有所怒,至為之頓首請罪,是以六宮無怨。性 儉約,不好音樂,常慕漢明德馬后之為人。


곽후는 일찍이 형제자매를 잃었으므로, 사촌 오라버니 곽표(郭表)에게 아버지 곽영(郭永)의 뒤를 계승하게 하고, 봉거도위(奉車都尉)에 임명했다. 곽후의 외가 친척 유비(劉斐)는 다른 나라 사람과 혼인했는데 -봉후국(封候國) 이외의 나라, 예컨대 촉국(蜀國)이나 오국(吳國) 사람과 결혼한 것을 말함- 곽후는 이 일을 듣고는 유비에게 칙령을 내렸다.

- 모든 친척들을 시집보내고 장가보낼 때, 자연히 향리나 문호의 사람들과 배필을 정해야 하며, 세력의 강성함으로 말미암아 다른 나라의 사람과 혼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곽후는 누이의 아들 맹무(孟武)가 향리로 돌아와 첩을 구하자 즉시 그 일을 제지했다. 그리고 나서 모든 친척들에게 칙령을 내려 말했다.

- 지금 세상은 여자가 적으므로 마땅히 그녀들을 장수에게 시집보내야 하며, 황후의 친척이라는 인연으로 해서 그녀들을 첩으로 취해서는 안된다. 마땅히 각자 스스로 삼가며 죄로 인한 참수가 없도록 하라.

위서에서 이르길: 곽후는 곽표(郭表)와 맹무(孟武)에게 소칙으로 경계하며 말하기를,


“한 황조의 친척으로서 스스로를 온전하게 할 수 있었던 사람이 적은 것은 모두 교만하고 사치스러웠기 때문이니,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고 했다.

5년(224) 명제가 동쪽으로 정벌하러 갔지만, 곽후는 허창의 영시대(永始臺)에 남아 있었다. 당시 장마비가 백여 일 이상 내려 성벽과 누각마저 파손되니, 담당관리가 상주하여 다른 거처로 옮길 것을 요청하자, 곽후는 말했다.

“옛날(춘추시대) 초나라의 소왕이 사냥하러 멀리 나갔는데, 소왕의 부인 정강(貞姜)은 점대(漸臺)에 남아 있었소. 강물이 갑자기 밀려와 초왕이 파견한 사자가 그녀를 맞이하러 왔으나, 부절도 없이 왔소. 그녀는 떠나지 않고 마침내 빠져 죽었소. 지금 황제께서는 먼 곳에 출정가 있는데, 나는 다행스럽게도 정강과 같은 환란도 만나지 않았거늘 곧바로 거처를 옮기면 어찌하겠소?”

이 말을 듣고 여러 신하들은 감히 더 이상 말도 못했다.

6년(225) 문제는 동쪽으로 오나라를 정벌하러 광릉(廣陵)에 이르렀는데, 곽후는 조씨의 고향인 초궁(譙宮)에 남아 있었다. 그때 곽표가 숙직 경호를 하기 위해 남아 있었는데, 물을 막고 물고기를 잡으려 하니, 곽후가 그것을 지지하며 말했다.

“물은 군수물자를 수송하는 뱃길이므로 막힘이 없어야 하오. 지금은 재목도 부족하고, 집안에는 이런 일을 맡아 할 노복이나 문객(文客)도 눈앞에 없소. 당신이 물고기를 잡으려는 것은 관의 대나무를 사사로이 취해 들보나 둑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오. 그러나 지금 봉거도위가 부족한 것이 물고기이겠소?”

명제는 즉위하자 곽후를 존칭하여 황태후라고 하였으며 영안궁(永安宮)이라고 불렀다.

태화 4년(230) 명제는 조칙을 내려 곽표를 안양정후에 봉하고, 오래지 않아 또 작위를 경후로 승진시켰으며, 그의 식읍을 더하여 이전에 갖고 있던 것과 합하여 5백 호가 되게 했고, 중뢰장군으로 승진시켰으며, 곽표의 아들 곽상(郭詳)을 기도위에 임명했다. 그해 명제는 곽태후의 부친 곽영(郭永)을 안양향경후(安陽鄕敬侯)로 추증하고, 모친 동씨를 도향군(都鄕君)으로 추증했다. 곽표를 소덕(昭德)장군으로 승진시키고, 금자(金紫 : 광록대부) 자리를 특별히 주었으며, 곽표의 둘째 아들 곽훈(郭訓)을 기도위로 임명했다. 맹무(孟武 : 곽태후 언니의 아들)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 명제는 그를 후하게 장사지내고 사당을 세우려고 했는데, 곽태후가 이 소식을 듣고 못하도록 막으면서 말했다.

“전란 이래 사방의 분묘가 도굴된 것은 후한 장례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수양릉(首陽陵)은 후인들의 모범이 될 수 있습니다.”

청룡 3년(235) 봄 곽후가 허창에서 붕어했다. 장례제도에 따라 능묘를 만들었다.

3월 11일, 수양릉 서쪽에 매장했다. 


위략魏略에서 이르길 : 명제明帝가 이미 즉위해, 견후甄后의 죽음을 그리며 슬퍼하였기에, 태후는 근심하다 갑자기 죽었다. 견후가 죽었을 때, 황제를 이부인李夫人에게 맡겼다. 곽태후가 죽으니, 이부인은 곧 견후가 참소란 화를 당해, 대렴大斂도 받지 못하고, 머리를 풀어헤쳐 얼굴을 덮었다고 말하니, 황제는 슬프고 한스러워 눈물을 흘리며, 태후를 빈장殯葬함이, 모두 견후의 고사와 같게 하도록 명했다.

한진춘추漢晉春秋 : 애초에, 견후가 주살된 건, 곽후郭后가 총애 받아서였고, 초빈할 때는, 머리를 풀어헤쳐 얼굴을 덮고, 쌀겨로 입을 막게 하고는, 마침내 곽후를 황후로 세워, 명제를 기르게 했다. 황제가 이를 알고는, 속으로 항상 원한을 품고, 자주 울며 견후가 죽을 때의 상황을 물었다. 곽후가 말하길 “선제께서 친히 죽이신 건데, 어찌하여 나에게 책문하는 것이냐? 또한 너는 사람의 자식이 되어, 죽은 부친을 원수로 삼고 추궁하며, 전 모친을 위해 그 뒤의 모친을 능멸하고 죽일 수 있느냐?” 명제가 노하여, 마침내 그녀를 핍박하여 죽이고는, 칙서로 초빈을 견후의 고사처럼 치르게 하였다.


魏書載哀策曰:「維青龍三年三月壬申,皇太后梓宮啟殯,將葬于首陽之西陵。哀子皇帝叡親奉冊祖載,遂親遣奠,叩心擗踊,號咷仰訴,痛靈魂之遷幸,悲容車之向 路,背三光以潛翳,就黃壚而安厝。嗚呼哀哉!昔二女妃虞,帝道以彰,三母嬪周,聖善彌光,既多受祉,享國延長。哀哀慈妣,興化閏房,龍飛紫極,作合聖皇, 不虞中年,暴罹災殃。愍予小子,煢煢摧傷,魂雖永逝,定省曷望?嗚呼哀哉!」



명제는 곽표의 작위를 올려 관진후(觀津侯)라 하고, 5백 호를 증가시켜 전에 있었던 것과 합쳐 1천 호가 되게 했으며, 곽상을 부마도위로 승진시켰다.


명제는 즉위하여 어머니 견후가 죽어 이 세상에 없음을 생각하고 슬퍼하였기 때문에 곽태후(郭太后)는 우려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견후가 죽자, 명제는 이부인(李夫人)에게 모든 일을 맡겼다. 곽태후가 죽자, 이부인은 처음으로 견후가 차언에 의한 화를 만났고, 시신을 관에 넣는 의식인 대렴(大斂)을 받을 수 없었으며,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얼굴을 덮었다고 했다. 명제는 슬퍼 한탄하며 눈물을 흘리고, 곽태후의 장례식 역시 모두 견후에게 했던 것처럼 하라고 명령했다.

4년(236)
곽태후의 부친 곽영을 관진경후(觀津敬侯)로 삼고, 부인 동씨(董氏)를 당양군(堂陽君)으로 삼았다. 곽후의 오라버니 곽부(郭浮)에게 양리정대후(梁里亭戴侯)를 추증했고, 곽도(郭都)에게는 무성정효후(武城亭孝侯)를 추증했으며, 곽성에게는 신락정정후(新樂亭定侯)를 추증하고, 모든 사자를 파견하여 칙명을 받들어서 소를 희생으로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곽표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곽상이 그 뒤를 이었다. 또 곽표의 작위와 영지를 그의 동생 곽술(郭述)에게 나누어 주고 열후로 삼았다. 곽상이 죽자, 그의 아들 곽조(郭釗)가 뒤를 이었다.

<진수의 평>
위왕조의 후비들은 부귀를 얻었지만 쇠망한 한가의 외척과 달리 고위관직에 있으면서 조정의 정치에 관여하지는 않았다. 위나라는 지난 일을 경계삼아 방법을 바꾼 것이며, 이 점에 있어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것이다. 진군의 주의(奏議)와 잔잠(棧潛)의 책론(策論)을 회고하면, 그들은 왕된 자의 규범을 만들어 후세에 까지 영원히 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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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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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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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10
18:03:02
(*.104.141.18)
번역된 주석들을 추가했습니다.

코렐솔라

2013.12.03
18:20:38
(*.52.91.73)
수양릉 뒤에 있는 위략과 한진춘추의 번역은 처사군님 작품입니다. http://blog.naver.com/kyspert/110176183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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