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출처: 고원님의 블로그史랑방 

 
동탁(董卓)은 자(字)가 중영(仲穎)이고 (양주) 농서(隴西)군 임조(臨洮)현 사람이다.
 (주1) 
 
(1) [영웅기]英雄記 – 동탁의 부친 군아(君雅)는 미미한 관직에서 시작해 영천(潁川) 윤씨위(綸氏尉-윤씨현의 현위)에 임명되었다. 아들이 셋 있었는데, 장자는 탁(擢)으로 자는 맹고(孟高)이고 일찍 죽었다. 차자가 즉 탁(卓)이며, 동탁의 동생 민(旻)은 자가 숙영(叔穎)이다.  ※ 동탁董擢 (맹고) - 동탁董卓 (중영) - 동민董旻 (숙영) 
 
어려서 호협(好俠)하여 일찍이 강(羌-강족) 중에서 노닐며 여러 호수(豪帥-추장, 군장)들과 사귀었다. 그 뒤 (고향으로) 돌아가 들에서 농사짓게 되자 호수(豪帥)들 중에 뒤따라오는 자가 있었는데, 동탁이 그들 모두와 함께 돌아와서는 밭가는 소를 잡아 잔치하며 즐겼다. 여러 호수(豪帥)들이 그 뜻에 감격하니 되돌아가 잡다한 가축 천여 두(頭)를 거두어 동탁에게 선물했다. (주2) 
 
(2) [오서]吳書 - 군(郡)에서 동탁을 불러 리(吏)로 삼고 도적(盜賊)들을 감령(監領-감독하며 다스림)하게 했다. 호(胡)가 나와서 노략질하고 백성들을 다수 붙잡아 가자 양주자사(涼州刺史) 성취(成就)가 동탁을 벽소(辟召)해 종사(從事)로 삼고 병사와 기병을 거느리고 토포(討捕)하게 하니 이를 대파하고 참획한 것이 천 명을 헤아렸다. 

병주자사 단경(段熲)이 동탁을 공부(公府-삼공의 관부)에 추천하자 사도(司徒) 원외(袁隗)가 벽소해 연(掾)으로 삼았다.  (※ [후한서] 권65 단경열전에 의하면, 단경이 병주자사를 지낸 것은 연희 5년=162년 무렵)
 
한나라 환제(桓 帝:146-167) 말, 여섯 군(郡) 양가(良家)의 자식을 우림랑(羽林郎)으로 삼았다. 

동탁은 무재(才武)가 있고 여력(旅力-완력)이 비견될 자가 적을 만큼 뛰어나고(少比) 건(鞬-동개, 화살통) 두 개를 차고 좌우로 치사(馳射-말달리며 활 쏨)했다. 

군사마(軍司馬)가 되어 중랑장 장환(張奐)을 따라 병주(幷州)를 정토해 공을 세우니(※) 낭중(郎中)에 임명되고 겸(縑-고운 비단) 9천 필을 하사받았는데 동탁은 이 모두를 관원(吏)과 병사들에게 나눠주었다. 
 
※ [후한서] 권65 장환열전에 의하면, 연희9년(166년) 여름에 선비족이 흉노, 오환과 연결해 북방을 대대적으로 침입하고 가을에 다시 동강, 선령 등과 연결해 침략하자, 호흉노중랑장 장환이 유주, 병주, 양주와 도요장군, 오환교위 군영 등의 군사를 대거 동원해 북방을 정토하고, 그 이듬해(167년) 강족이 삼보를 침략하자 사마 윤단(尹端), 동탁을 보내 대파함. 또 [후한서] 권72 동탁열전을 보면 해당 부분에서 ‘장환을 따라 한양(천수)에서 모반한 강족을 공격해 격파했다’라 기술해 놓아 [삼국지]와 서로 다릅니다. 병주 vs 한양(양주). 
 
광무령(廣武令-병주 안문군 광무현의 현령), 촉군(蜀郡) 북부도위, 서역무기교위(西域戊己校尉)로 승진했다 면직되었다. 징소되어 병주자사, 하동(河東)태수로 임명되었다가 (주3) 중랑장(中郎將)으로 승진해 황건(黃巾)을 토벌하고 군이 패하자 저죄(抵罪-알맞은 죄를 받음)되었다. 
 
(3) [영웅기]英雄記 - 동탁이 수차례 강(羌), 호(胡)를 토벌하여 앞뒤로 백여 번을 싸웠다.
 
※ [후한서] 동탁열전, 효영제기에 의하면 중평 원년=184년의 일로, 동중랑장(東中郎將)에 임명되어 노식을 대신해 하곡양(下曲陽-기주 거록군 하곡양현)에서 장각 공격
 
한수(韓遂) 등이 양주(涼州)에서 봉기하자 다시 중랑장(中郎將)이 되어 서쪽으로 가서 한수를 막았다. 망원(望垣-양주 천수군 망원현) 골짜기 북쪽에서 강(羌), 호(胡) 수만 명에 의해 포위되어 양식이 끊기었다. 동탁은 물고기를 잡으려는 것처럼 속이며 돌아가는 길에 물을 건너는 곳에 당도해 둑을 만들어 못을 만들고는, 수십 리에 걸쳐 물을 가득 가두어 두었다가 조용히 그의 군사들을 둑 아래로 지나게 한 뒤 둑을 터뜨렸다. 강(羌), 호(胡)가 이 일을 들어 알게 되어 추격했으나 물이 이미 깊어져 있어 건널 수 없었다. 이때 여섯 군(軍)이 농서(隴西)로 올라갔다 다섯 군(軍)이 대패했으나 동탁만이 군사를 보전한 채 되돌아 와 부풍(扶風)에 주둔했다. 
 
전장군(前將軍)에 임명되고 태향후(斄鄕侯)로 봉해졌다가 병주목(幷州牧)으로 징소되었다. (주4)
 
(4) [영제기]靈帝紀 – 중평 5년(188년), 동탁을 징소(徵召)해 소부(少府)로 삼고 칙령을 내려 영(營)의 관원(吏)과 군사들을 좌장군 황보숭(皇甫嵩)에 속하도록 하고 행재소(行在所)로 나아오도록 했다. 동탁이 상언했다, 

“양주(涼州)가 요란(擾亂-혼란)하고 경예(鯨鯢-고래의 암컷과 수컷. 흉포한 악인을 비유)들이 아직 멸해지지 않았으니 지금은 신이 분발해 효명(效命-목숨을 바쳐 힘씀)할 때입니다. 관원과 군사들이 펄쩍 뛰며 은혜를 연모하고 보답할 것을 생각하여 각기 신의 수레를 막고 하는 말이 간절하고 측은하니 길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즉 장차 전장군(前將軍)의 사무를 행하며 마음을 다해 위휼하고 힘써 군을 이끌겠습니다.” 

중평 6년(189년), 동탁을 병주목(幷州牧)으로 삼고 또 칙령을 내려 관원, 군사들을 황보숭에 속하도록 했다. 동탁이 다시 상언했다, 

“신이 장융(掌戎-군대를 지휘함)한 10년 동안 사졸들은 크고 작건 간에 서로 익숙하고 지낸지 매우 오래되고 신이 길러 준 은혜를 연모해 즐거이 국가를 위해 분발해 하루아침에 목숨을 내던질 각오이니, 청컨대 그들을 거느리고 (병)주(州)로 가서 변수(邊陲-변경)에서 힘쓰도록 해 주십시오.” 

동탁이 재차 조칙을 거스르다 때마침 하진(何進)의 부름을 받았다.
 
영제(靈帝)가 붕어하고 소제(少帝)가 즉위했다. 

대장군 하진(何進)은 사례교위 원소(袁紹)와 함께 엄관(閹官-환관)들을 주살할 것을 모의했으나 태후(太后)가 들어주지 않았다. 이에 하진은 동탁을 불러 군사를 거느리고 경사(京師-수도)로 오게 하고 아울러 은밀히 영을 내려 상서하도록 하니 이르길, 

“중상시 장양(張讓) 등이 총행을 훔치고 총애 받는 것을 틈타 해내를 어지럽혔습니다. 옛날 조앙(趙鞅)은 진양(晉陽)의 갑사를 일으켜 임금 곁의 악인을 내쫓았습니다. 신은 곧바로 종(鐘)을 울리고 북을 치며 낙양으로 가서 장양 등을 토벌할 것입니다.”

라 하여 태후를 협박하고자 했다. 동탁이 도착하기 전 하진이 패망했다. (주5) 
 
(5) [속한서]續漢書 – 하진(何進)은 자가 수고(遂高)이고 남양 사람이며 태후(太后)의 이모(異母-이복) 형(오빠)이다. 하진은 본래 도가(屠家-도살업자. 백정)의 자식이고 부친은 하진(何眞)이다. 

하진(何眞)이 죽은 뒤 하진(何進)은 여동생을 황문(黃門)에 맡겨 액정(掖庭-비빈, 궁녀들의 거처)에 들어가게 했는데, 총애를 받아 광화(光和) 3년(180년)에 황후(皇后)가 되자 하진이 이로 말미암아 귀해지고 총행을 받았다. 

중평(中平) 원년(184년) 황건이 봉기하자 하진을 대장군으로 임명했다. 

[전략]典略에 기재된 동탁의 표(表)

 – 신이 엎드려 생각건대, 천하에 역란이 그치지 않는 이유는 황문상시(黃門常侍) 장양(張讓) 등이 천상(天常-하늘의 법도)을 업신여기고 왕명(王命)을 조천(操擅-마음대로 좌지우지함)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부자 형제가 모두 주군(州郡)을 점거하고 있으면서 서신 한 통이 궁문을 나가면 이내 (뇌물을 받아) 천금을 얻고 경기(京畿) 여러 군(郡)의 기름지고 좋은 수백만 전답이 모두 장양 등에 속하게 되니 이로써 원망의 기운이 위로 들끓고 요적(妖賊)이 봉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신이 전에 조서를 받들어 어부라(於扶羅)를 토벌할 때 장사(將士-장졸)들이 굶주리자 하수 건너기를 거부하며 모두 이르길, 경사(京師)로 가서 먼저 엄수(閹豎-환관)들을 주살해 백성의 해악을 제거하고 대각(臺閣-상서대)에 물자를 직접 요청하고자 한다고 하였고, 신이 뒤따르며 달래었으나 신안(新安-홍농군 신안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신이 듣기로 양탕지비(揚湯止沸-끓는 물을 퍼내었다 다시 부어 끓는 것을 잠시 멈추는 것. 임시방편)는 멸화거신(滅火去薪-불을 끄고 장작을 제거함. 근본적 해결)만 못하다 했습니다. 종기를 터뜨리는 것이 비록 고통스러우나 길러서 살찌우는 것보다는 나으니, 물에 빠진 뒤에 배(船)를 불러 봤자 후회막급일 것입니다. -
 
중상시 단규(段珪) 등은 황제를 겁박해 소평진(小平津)으로 달아났는데 동탁이 마침내 자신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망(北芒)에서 황제를 영접하고 궁으로 돌아왔다. (주6) 
 
(6) 장번(張璠) 의 [한기]漢紀 – 황제는 8월 경오일에 여러 황문들에게 겁박 받아 걸어서 곡문(穀門)을 나와 달아나 하수가에 이르렀다. 여러 황문들은 하수에 투신하여 죽었다. 이때 황제는 나이 14세이고 진류왕은 9세로, 형제가 홀로 밤중에 보행해 궁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 [후한서] 효영제기나 황후기에 의하면 이때 소제의 나이는 17세) 

날이 어두워지니 반딧불 빛을 쫓아 수 리를 가다가 민가를 만나 노거(露車-휘장, 지붕이 없는 수레)에 실려 (궁으로) 호송되었다. 신미일, 공경(公卿) 이하 신하들이 동탁과 함께 북망(北芒) 판(阪) 아래에서 황제를 영접했다. 

[헌제춘추]獻帝春秋 – 그 이전에 아이들이 다음과 같은 노래(謠)를 불렀다, 

‘후(侯)가 후(侯)가 아니고 왕(王)이 왕(王)이 아니로다. 천승(千乘) 만기(萬騎)가 북망(北芒)으로 달아나는구나.’ 

동탁이 이때 때마침 도착해 현양원(顯陽苑)에 주둔했다. 황제가 되돌아온다는 말을 듣고 군사들을 이끌고 황제를 영접했다. 

[전략]典略 - 황제가 동탁의 군사들을 멀리서 바라보고는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군공(群公-뭇 공)들이 동탁에게 말했다,

“군사를 물리라는 조령이 있었소.” 

동탁이 말했다, 

“공들은 나라의 대신이 되어 왕실을 광정(匡正-바로잡음)하지 못해 국가가 파탕(播蕩-파천)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소. 어찌 군사를 물린단 말이오!” 

그리고는 함께 성으로 들어갔다.

[헌제기]獻帝紀 - 동탁이 황제와 얘기했으나 황제가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이에 다시 진류왕과 얘기하며 화란(禍亂)이 일어난 이유를 물으니 진류왕이 자초지종을 대답하며 빠뜨리는 바가 없었다. 동탁이 크게 기뻐하며 이에 폐립(廢立)할 뜻을 품었다. 

[영웅기]英雄記 – 하남 중부 연(河南中部掾-하남군 중부도위의 연) 민공(閔貢)이 황제와 진류왕을 부축해 낙사(雒舍)로 와서 멈추었다. 황제 홀로 말 한 필을 타고 진류왕과 민공은 함께 말 한 필에 타고서 낙사(雒舍) 에서부터 남쪽으로 갔다. 공경 백관들이 북망 판 아래에서 황제를 봉영하고 전 태위 최열(崔烈)이 앞에서 이들을 이끌었다. 동탁이 보기(步騎) 수천을 거느리고 와서 봉영하니 최열이 꾸짖으며 (자리를) 피하라 했다. 동탁이 최열에게 욕하며 말했다, 

“밤낮으로 3백 리 길을 달려왔는데 어찌 피하라 하시오. 내가 경의 머리는 자르지 못하겠소?”

 앞으로 와서 황제를 배알하며 말했다, 

“폐하께서 상시(常侍) 소황문(小黃門)으로 하여금 이처럼 난을 일으키게 하여 화패(禍敗-화로 인한 실패)를 취했으니 책임이 적지 않습니다.(爲負不小)” 

또 진류왕에게 가서 말했다, 

“제가 동탁입니다. 내게 안기십시오.” 

그리고는 민공(閔貢)의 품으로부터 진류왕을 취했다. 

[영웅기] - 어떤 본(本)에서는 왕이 동탁의 품에 안기지는 않고 동탁과 왕이 나란히 말을 타고 갔다고 한다. 
 
이때 하진의 동생인 거기장군 하묘(何苗)가 하진의 군사들에게 살해되자 (주7) 하진, 하묘의 부곡(部曲)은 소속될 곳이 없어 모두 동탁에게로 나아갔다. 

(7) [영웅기] - 하묘(何苗)는 태후의 동모(同母-동복) 형(오빠)이고 먼저 시집온 주씨(朱氏)의 아들이다. 하진의 부곡장(部曲將) 오광(吳匡)은 평소 하묘가 하진과 마음을 같이 하지 않는 것을 원망하고 또한 그가 환관과 통모한 것으로 의심했다. 이에 군중에 영을 내리길 

“대장군(하진)을 죽인 자는 거기장군(하묘)이다.”

라 했다. 그리고는 군사를 이끌고 동탁의 동생 동민과 함께 주작궐(朱爵闕) 아래에서 하묘를 공격해 죽였다.

동탁은 또한 여포(呂布)를 시켜 집금오 정원(丁原)을 죽이고 그 군사를 아우르니 이 때문에 경도(京都-수도)의 병권(兵權)은 오직 동탁에게 있게 되었다. (주8)
 
(8) [구주춘추]九州春秋 – 동탁이 처음 낙양으로 들어왔을 때 보기(步騎)가 3천을 넘지 않으니 군사가 적어 원근을 복종시키지 못할까 스스로 꺼리었다. 약 4-5일 동안 밤중에 군사를 보내 네 성문을 나가게 했다가 다음날 깃발과 북을 벌이고 입성하게 하며 널리 말하길, ‘서쪽의 군사가 또 낙양에 도착했다’고 했다. 사람들이 이를 알아채지 못하고 동탁의 군사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여겼다. 
 
그 이전에 하진은 기도위 태산(太 山)사람 포신(鮑信)을 고향으로 보내 모병하게 했었는데 때마침 그가 도착하여 원소에게 말했다, “동탁이 강병(彊兵)을 끼고 다른 뜻을 품고 있으니 지금 조속히 도모하지 않으면 장차 그에게 제어 받을 것입니다. 그는 이제 막 도착해 피로하니 습격하면 가히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원소가 동탁을 두려워하여 감히 실행하지 못하자 포신은 마침내 향리로 되돌아갔다.
 
이때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자 책령을 내려 사공(司空) 유홍(劉弘)을 면직하고 동탁이 그를 대신하게 했다가 이내 태위(太尉)로 올리고 절월(節鉞), 호분(虎賁)을 내렸다. 마침내 황제를 폐위시키고 홍농왕(弘農王)으로 삼았다. 뒤이어 또 홍농왕과 하태후(何太后)를 죽였다. 영제(靈帝)의 작은 아들 진류왕을 세우니 이 분이 헌제(獻帝)이다. (주9) 
 
(9) [헌제기]獻帝紀 – 동탁이 황제 폐위를 꾀하며 군신(群臣)들을 조당(朝堂)에 모이게 하고 의논하며 말했다, 

“큰 것은 천지(天地)(의 도리)이고 그 다음이 군신(君臣)(의 도리)이니 이로써 다스리는 것이오. 지금 황제는 암약(闇弱)하여 종묘를 받들며 천하의 주인이 되지 못하오. 이윤(伊尹), 곽광(霍光)의 고사에 의거해 진류왕을 (황제로) 세우고자 하는데 어떠하오?” 

상서 노식(盧植)이 말했다, 

“상서(尙書-서경)를 살펴보면 태갑(太甲)이 즉위한 뒤 밝은 정치를 하지 않아 이윤이 그를 동궁(桐宮)으로 내쳤습니다. 창읍왕(昌邑王)은 즉위한 지 27일 만에 그 죄과(罪過)가 천 여 가지에 이르니 이 때문에 곽광이 그를 폐위했습니다. 지금 황상께서는 춘추가 어리고 행동에 있어 실수한 바도 없으니 예전의 고사에 비할 일이 아닙니다.” 

동탁이 노해 자리를 파하고 노식을 죽이려 했으나, 시중 채옹(蔡邕)이 권하여(말려) 면할 수 있었다. 9월 갑술일, 동탁이 다시 군신(群臣)들을 크게 모이게 한 뒤 말했다, 

“태후(太后-하태후를 가리킴)가 영락태후(永樂太后-영제의 모친인 효인황후 동씨 즉, 동태후를 가리킴)를 핍박해 근심하다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부고(婦姑-고부)간의 예의를 거스르고 효순(孝順)하는 절의가 없는 것이오. 천자는 어리고 연약하여 임금답지 못하오. 옛날 이윤은 태갑을 내치고 곽광은 창읍왕을 폐위한 일이 전적(典籍)에 드러나 있고 모두 이를 착한 일로 여기오. 지금 태후는 의당 태갑과 같고 황제는 의당 창읍왕과 같소. 진류왕이 어질고 효성스러우니 마땅히 황조(皇祚-황위)로 올려야 하오.” 
 
/ [헌제기거주]獻帝起居注에 기재된 책(策-책문) 

– “효령황제(孝靈皇帝-영제)는 고종(高宗)들이 미수(眉壽-장수)를 누리던 복을 다하지 못하고 일찍 신자(臣子)들을 버리셨다. 황제가 승소(承绍- 계승)하니 해내에서 측망(側望-몸을 기울여 기대하며 바라봄)했으나, 황제는 천자(天姿-타고난 자태)가 경조(輕佻-경박)하고 위의(威儀)에 있어 삼가지 못해 상을 당해 만타(慢惰-태만)하여 쇠(衰)함이 예전과 같았다. 흉덕(凶德)이 이미 두드러지고 음예(淫穢-음란하고 더러움)함이 드러나 신기(神器)를 욕보이고 종묘(宗廟)를 더럽혔도다. 황태후의 가르침에 모의(母儀-어머니로서 갖춰야 할 도리)가 없어 통정(統政)이 거칠고 어지러워졌다. 

영락태후(永樂太后-동태후)께서 갑자기 붕어하시니 중론에서는 이를 미심쩍어 하였다. 삼강의 도(三綱之道)와 천지의 기(天地之紀)에 허물이 있게 되었으니 그 죄가 크도다. 

진류왕 협(協)은 성덕(聖德), 위무(偉茂-크고 빼어남)하며 규구(規矩-품행이 단정하고 올바름), 막연(邈然-높고 심원함)하여 아랫사람을 넉넉히 대하고 윗사람을 기쁘게 하니 요임금의 겉모습이 있도다. 상을 치루며 슬퍼하고 서러워하고 삿된 것을 말하지 않으니 기억(岐嶷-어릴때부터 재능이 뛰어남)의 성정으로 주성(周成-주성왕)의 아름다움이 있다. 휴성미칭(休聲美稱–아름다운 명성과 칭찬)이 천하에서 들리니 의당 홍업(洪業)을 이어받아 만세를 통어하며 가히 종묘를 받들 만하다. 황제를 폐하고 홍농왕으로 삼고, 황태후는 섭정으로 복귀한다.” 

상서(尙書)가 책문 읽기를 마쳐도 군신들이 아무 말이 없자 상서 정궁(丁宮)이 말했다,

“하늘이 한실에 화를 내려 상란(喪亂)이 크고 많았습니다. 옛날 제중(祭仲)이 홀(忽)을 폐하고 돌(突)을 세우니 춘추에서는 그 권(權-임기응변)을 크게 여겼습니다. 이제 대신들은 사직을 위한 계책을 알맞게 헤아려 하늘과 사람의 뜻에 실로 부합하니 만세를 부르길 청합니다.” 

동탁은 태후가 폐위되었으므로 공경 이하 신하들이 포복(布服-베옷)을 입지 못하게 하고 장례를 치를 때 소의(素衣-소복)를 입게 할 뿐이었다.
 
※ 이 무렵 간략한 사건 순서(후한서 효영제기, 효헌제기 등 참고) 
: 중평 6년(189년) 4월 - 영제가 죽고 소제 즉위 / 6월 - 효인황후 동씨(동태후. 영제의 생모) 급사/ 8월 – 중상시 장양, 단규 등이 하진을 살해. 동탁이 집권 / 9월 – 소제가 폐위되고 헌제가 즉위. 그 이틀 뒤 영사황후 하씨(하태후. 소제의 생모) 짐살 / 10월 – 영사황후 장례 / 초평 원년(190년) 1월 – 산동병 봉기. 그 직후 홍농왕(소제) 짐살.
 
동탁을 상국(相國)으로 올리고 미후(郿侯) 에 봉하고 찬배불명(贊拜不名-천자를 배알할 때 이름을 부르지 않음), 검리상전(劍履上殿-검을 차고 신발을 신은 채 어전에 오름)하도록 했다. 또 동탁의 모친을 지양군(池陽君)에 봉하고 가령(家令), 승(丞)을 두도록 했다. 

동탁은 정병(精兵)을 이끌고 온데다가 때마침 제실(帝室) 의 대란을 만나니 폐립(廢立)을 마음대로 하고 무고(武庫-무기고) 갑병(甲兵-갑옷과 무기; 무장병)과 국가의 진보(珍寶-보물)를 차지하여 천하에 위세를 떨쳤다. 동탁의 성정은 잔인하고 어질지 못해 엄한 형벌로 사람들을 위협하고 눈 흘긴 원한조차 반드시 되갚으니 사람들은 스스로를 보전하지 못했다. (주10) 
 
(10) [위서]魏書 – 동탁은 원하는 바가 끝이 없으니 빈객(賓客)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상(相)은 그 귀함이 무상(無上-더할 수 없이 높음)하오.” 

[영웅기] - 동탁이 위엄을 떨치고자 하여, 시어사 요용종(擾龍宗)이 동탁에 나아가 일을 아뢰면서 검을 풀지 않자 곧바로 때려죽이니 경사(京師)가 진동했다. 하묘(何苗)의 관을 파헤쳐 그 시신을 꺼내고 사지를 마디마디 찢어 길 가에 내버렸다. 또 하묘의 모친 무양군(舞陽君)을 붙잡아 죽이고 시신을 원(苑-동산)의 탱자나무 울타리(枳落) 가운데 내버리고는 다시 거두어서 염(斂)하지 않았다.
 
일찍이 군사를 보내 양성(陽 城-예주 영천군 양성현)에 도착한 일이 있다. 때마침 2월 사(社-지신제. 또는 이를 지내는 장소)를 지낼 때라 백성들이 각기 사(社) 아래에 모여 있으니 그 남자들을 모두 참수하고는, 그들의 소와 수레를 몰아 그 부녀와 재물을 싣고 수레의 끌채와 굴대에 그들의 목을 매달고 수레를 늘어세워 낙양으로 돌아왔는데, 적(賊)을 공격해 크게 노획했다고 말하며 만세를 불렀다. (낙양의) 개양성문(開陽城門)으로 들어와 그 머리를 불태우고 부녀들은 갑병(甲兵)에게 주어 비첩(婢妾)으로 삼게 했다. 궁인(宮人), 공주(公主)를 간란(姦亂-간음)하는 데까지 이르니 그 흉역함이 이와 같았다.
 
당초 동탁은 상서(尙書) 주비(周毖), 성문교위(城門校尉) 오경(伍瓊) 등을 신임해 그들이 천거한 한복(韓馥), 유대(劉岱), 공주(孔伷), 장자(張咨), 장막(張邈) 등을 임용해 나가서 주군(州郡)을 다스리도록 했다. 그러나 한복 등은 관직에 취임하자 모두 군사를 합쳐 장차 동탁을 토벌하려 했다. 동탁이 이를 듣고 주비, 오경 등이 통정(通情)해 자신을 팔아먹었다(배반했다)하여 이들을 모두 참수했다. (주11)
 
(11) [영웅기] - 주비(周毖)는 자가 중원(仲遠)이고 무위(武威) 사람이다. 오경(伍瓊)은 자가 덕유(德瑜)이고 여남 사람이다. 

사승(謝承)의 [후한서]後漢書 – 오부(伍孚)는 자가 덕유(德瑜)이고 어려서 대절(大節)을 갖추어 군(郡)의 문하서좌(門下書佐)가 되었다. 그 본읍(本邑)의 장(長)이 죄를 짓자 태수는 오부를 시켜 출교(出敎)하게 하고 조하(曹下)의 독우(督郵-군郡의 감찰관)에게 명해 그를 체포하게 했다. 오부는 교서를 받는 것을 거부하고 땅에 엎드려 우러러보며 간언했다, 

“임금이 비록 임금답지 못해도 신하는 신하답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명부(明府-태수, 주목 등 고관에 대한 경칭)께서는 어찌 저에게 교서를 받아 밖으로 나가 본읍의 장을 잡아오라 하십니까? 다른 관리로 바꾸어 주시기 바랍니다.”

태수가 이를 기특하게 여겨 들어주었다. 그 뒤 대장군 하진(何進)이 벽소해 동조속(東曹屬)으로 삼고 점차 승진해 시중, 하남윤, 월기교위가 되었다. 

동탁이 난을 일으키자 백료(百僚-백관)들이 진율(震慄)했다. 오부는 작은 갑옷을 입고 조복 안에 도(刀)를 감추어 차고 동탁을 만나 틈을 보아 동탁을 찔러 죽이려 했다. 대화가 끝나고 동탁이 합(閤-쪽문)으로 전송했는데 오부가 이틈을 타 도(刀)를 꺼내어 동탁을 찔렀다. 동탁이 힘이 세고 물러서자 맞추지 못했고 즉시 오부를 체포했다. 동탁이 말했다, 

“경은 반역하고자 하는가?” 

오부가 큰소리로 말했다, 

“너는 내 임금이 아니고 나는 너의 신하가 아닌데 어찌 반역하는 일이 있겠는가? 너는 나라를 어지럽히고 임금 자리를 빼앗아 죄가 가득하고 악이 크니 지금이 바로 내가 죽는 날이라 이 때문에 와서 간적(姦賊)을 주살하려 한 것일 뿐이다. 시조(市朝-시장과 조정)에서 너를 거열(車裂)해 천하에 사죄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구나.” 

마침내 오부를 죽였다. 

(주석자인 배송지의 견해) 사승(謝承)이 기록한 오부(伍孚)의 자(字)와 본군(本郡-출신 군)이 오경(伍瓊)과 같은데, 죽음에 이르게 된 경위는 오부와 서로 다르다. 오부가 오경의 다른 이름인지 또는 따로 오부란 인물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대저 상세하지 않다.
 
※ [삼국지집해]를 보면 동명이인인지 동일 인물인지에 관한 후대의 여러 설을 소개하고 있는데, 제가 볼 때는 그 중에서 동명이인 설이 맞는 것 같습니다. 요약하자면, [삼국지] 순유전에 순유가 월기교위 오경(伍瓊) 등과 공모해 동탁 암살을 도모했다는 대목이 있는데 서로 관직이 일치하므로(월기교위) 사승서의 오부=순유전의 오경(오부는 오경의 다른 이름)로 보는 한편, 이 오경은 위 동탁전 본문의 오경과는 관직, 죽음에 이르는 경위, 죽는 시기가 서로 다르므로(동탁전 본문의 오경은 장안 천도 전 – 순유전의 오경은 장안 천도 후) 출신과 이름이 우연히 같은 동명이인이라는 내용입니다. 즉, 순유전 오경 = 사승서 오부 ≠ 동탁전 오경
 
하내태수(河內太守) 왕광(王匡)은 태산병(泰山兵)을 보내 하양진(河陽津)에 주둔시키고 장차 동탁을 도모하려 했다. 동탁은 의병(疑兵-속이는 군사)을 보내 평음(平陰)에서 물을 건너려 하는 것처럼 하고는, 은밀히 정예병을 보내 소평(小平)에서 북쪽으로 건너 왕광의 뒤를 둘러싸고 공격해 진(津) 북쪽에서 대파하여 거의 몰살시켰다. 
 
동탁은 산동(山東)의 호걸들이 아울러 일어나자 두려워하며 편안해 하지 못하니, 초평 원년(190년) 2월 천자를 옮겨 장안에 도읍했다. 낙양의 궁실을 불태우고 능묘(陵墓)를 모두 파헤쳐 보물(寶物)을 취했다. (주12) 
 
(주12) 화교(華嶠)의 [한서]漢書 – 동탁이 장안으로 천도하려 하며 공경 이하 관원들을 불러 크게 의논했다. 사도(司徒) 양표(楊彪)가 말했다, 

“옛날 반경(般庚)이 다섯 번째 천도하자 은(殷)나라 백성들이 서로 원망하니 이 때문에 세 편(三篇-[서경]의 반경 상, 중, 하편을 말함. ※)을 지어 천하 백성들을 깨우쳤습니다. 지금 해내가 안온(安穩)하니 아무 까닭 없이 도읍을 옮기면 백성들이 경동(驚動-놀라서 동요함), 미비(麋沸-들끓고 혼란스러움)하여 개미떼처럼 모여 난을 일으킬까 두렵습니다.” 

동탁이 말했다, 

“관중(關中)이 비요(肥饒-비옥)하니 이 때문에 진(秦)나라는 여섯 나라를 병탄할 수 있었소. 지금 서경(西京-장안)으로 옮긴 뒤 설령 관동의 호강(豪彊)들이 감히 망동하는 자가 있더라도 우리의 강병(彊兵)으로 짓밟아 가히 창해(滄海-대해)에까지 내몰 수 있소.”

양표가 말했다, 

“해내가 동요하는 것은 매우 쉬우나 안돈시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또 장안의 궁실이 괴패(壞敗-헐고 무너짐)되어 창졸간에 복구할 수 없습니다.” 

동탁이 말했다, 

“무제(武帝) 때 거처하던 두릉(杜陵) 남산 아래에 온전한 와요(瓦窑- 기와 굽는 가마)가 수천 군데 있으니 양주(涼州)의 재목(材木-목재)들을 동쪽 아래로 가져와 궁실을 지으면 그 일이 어렵지 않소.”

동탁은 뜻대로 되지 않자 이내 작색(作色-불쾌한 얼굴빛을 드러냄)하며 말했다, 

“공이 내 계획을 가로막으려는 것이오? 변장(邊章), 한약(韓約-한수)이 서신을 보내 와 조정은 필히 도읍을 옮기라 했소. 만약 (변장, 한수가 배반해) 대병(大兵-대군)이 동쪽 아래로 내려와 내가 서로 구할 수 없는 지경이 되면 공은 곧바로 원씨와 더불어 서쪽으로 가면 될 것이오.”

양표가 말했다, 

“서방(西方)에서 저 양표로부터 길을 인도받아 질러오면 돌아보건대 천하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의논을 그만두었다. 동탁은 사례교위 선번(宣璠)에 명해 재이(災異)를 이유로 핵주(劾奏-죄를 탄핵하며 상주함)하게 하고는 이에 의거해 양표를 면직시켰다. 
 
[속한서]續漢書 – 태위(太尉) 황완(黃琬), 사도(司徒) 양표(楊彪), 사공(司空) 순상(荀爽)이 함께 동탁을 방문하자 동탁이 말했다

“옛날 고조(高祖)께서 관중(關中)에 도읍하고 11세(世-대)를 이은 뒤 중흥하여 다시 낙양에 도읍했소. 광무제 때부터 지금까지 또한 11세(世)이며 석포실참(石苞室讖)을 살펴보건대 의당 다시 장안으로 환도해야 하오.” 

좌중이 모두 경악하여 감히 대꾸하는 자가 없었다. 양표가 말했다, 

“도읍을 옮기고 제도를 바꾸는 것은 천하의 대사이니 이 모두는 응당 민심에 의거하고 시의(時宜)에 따라야 합니다. 옛날 반경(盤庚)이 다섯 번째 천도하자 은나라 백성들이 서로 원망하니 이 때문에 세 편을 지어 그들을 깨우쳤습니다. 지난 날 왕망(王莽)이 찬역하여 오상(五常-다섯 가지 윤리규범: 인의예지신 or 父義、母慈、兄友、弟恭、子孝)을 바꾸고 어지럽히고 경시(更始-경시제 유현劉玄. ※), 적미(赤眉) 때에는 장안을 불태우고 백성들을 잔해(殘害)해 백성들이 유망하여 남은 이가 백 명 중에 하나도 없게 되어 광무제가 천명을 받아 다시 낙읍(洛邑-낙양)에 도읍하니 이는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이제 바야흐로 성주(聖主)가 들어서서 한조(漢祚)를 광륭(光隆-빛나고 융성하게 함)하는데 아무런 까닭 없이 궁묘(宮廟), 원릉(園陵)을 내버리면 백성들이 경악하여 의심을 풀지 않을까 두려우니, 필시 미비(麋沸)하여 개미떼처럼 모여 요란해 질 것입니다. 석포실참(石苞室讖)은 요사스러운 글이니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동탁이 작색(作色)하며 말했다

“양공(楊公)이 국가의 계획을 가로막으려는 것이오? 관동(關東)이 바야흐로 어지러워져 곳곳에서 적(賊)이 봉기했소. 효함(崤函-효산崤山과 함곡函谷)의 험고함은 나라의 중방(重防)이며 또 농우(隴右-농서)에서 나무를 취하면 공부(功夫-공역)가 어렵지 않소. 두릉(杜陵) 남산(南山) 아래에 효무제 때의 예전 도자기 굽던 곳이 있어 벽돌과 기와를 만들면 하루아침에 마련할 수 있으니 궁실(宮室) 관부(官府)야 어찌 족히 말할 필요가 있겠소! 백성은 소민(小民)이니 어찌 족히 더불어 의논하겠소? 만약 앞에서 막는 자가 있으면 내가 대병(大兵)으로 그들을 몰아낼 것이니 어찌 자유자재로 막을 수 있겠는가!” 

백료들이 두려워하며 실색(失色)했다. 황완이 동탁에게 말했다, 

“이는 큰일이니 양공의 말을 거듭 생각해보셔야 합니다!” 

동탁이 자리를 파하고 그날 즉시 사례(교위)에게 양표와 황완에 대해 상주하게 하고는 그들 모두를 면관시켰다. 대가(大駕-어가)가 이내 서쪽으로 가고 동탁 부(部)의 군사들이 낙양성 바깥 면(外面) 100리를 불태웠다. 또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남북궁(南北宮)과 종묘(宗廟), 부고(府庫), 민가(民家), 성 안을 불태워 모두 쓸어버렸다. 또 여러 부실(富室-부호)을 붙잡아 죄악을 들어 그들의 재물을 몰수하였고 죄 없이 죽음을 당한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헌제기]獻帝紀 – 동탁이 산동병(山東兵)을 붙잡자 돼지기름을 베 십여 필에 바르고는 그들의 몸에 싸맨 뒤 불을 지르니 먼저 다리부터 불이 붙었다. 원소의 예주종사(豫州從事) 이연(李延)을 붙잡아 삶아서 죽였다. 동탁이 총애하던 호(胡-흉노 또는 북방 이민족 통칭)가 총애를 믿고 방종하다 사례교위 조겸(趙謙)에게 살해되었다. 동탁이 대노하며 말했다, 

“내가 개(狗)를 사랑해도 남들이 그 개를 꾸짖지 못하게 하는데 하물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겠느냐!” 

이에 사례(교위)의 도관(都官)을 불러서는 때려 죽였다.
 
※ 후한서 권54 양진(楊震)열전 중 양표전 이현 주(양진의 증손이 양표) - 반경(般庚)은 은나라 왕의 이름으로, 박(亳) 땅으로 천도하니 은나라 사람들이 서로 더불어 원망했다. 탕(湯)이 박(亳)으로 옮기고 중정(仲丁)이 효(囂)로 옮기고 하단갑(河亶甲)이 상(相)에 거처하고 조을(祖乙)이 경(耿)에 거처하니 반경(般庚)과 함께 모두 다섯 번이다. (盤庚, 殷王之名也. 胥, 相也. 遷都於亳, 殷人相與怨恨. 湯遷亳, 仲丁遷囂, 河亶甲居相, 祖乙居耿, 并般庚五也) 
 
※ 왕망 말 경시제 무렵 간략한 사건 순서 (후한서 광무제기)

22년 - 광무제 유수(劉秀), 형 유연(劉縯)과 함께 완에서 거병
23년 – 유수의 족형인 유현(劉玄)을 경시제(更始帝)로 추대. 곤양전투에서 왕망이 보낸 왕심, 왕읍의 대군 격파(곤양昆陽은 영천군의 속현). 왕망이 부하에 의해 살해당하고 경시제 장안 입성. 왕망의 신(新) 멸망
24년 -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켜 자립하거나 군웅 봉기 
25년(건무建武 원년) – 유수가 하북을 정토하고 돌아오던 길에 제장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호(鄗- 기주 상산국 원씨元氏현. 광무제가 원씨로 개명)에서 황제 즉위. 비슷한 무렵 적미적이 유분자(劉盆子)를 황제로 옹립. 적미가 장안에 침입하고 경시제는 고릉으로 달아났다 이후 적미에 의해 살해당함 (적미赤眉는 왕망 말 농민 반란군으로 눈썹에 붉은 칠을 했다고 해서 붙은 이름)
 
동탁은 서경(西京-장안)에 도착해 태사(太師)가 되고 상보(尙父)라 칭했다. 청개금화거(靑蓋金華車)를 탔는데 조화양번(爪畫兩轓)하니 (※) 이때 사람들이 간마거(竿摩車)라 불렀다. (주13) 
 
※ 청개금화거(靑蓋金華車)는 푸른 일산에 금으로 장식된 수레, 조화양번(爪畫兩轓)은 일산 살 끝이 발톱처럼 굽어 있고 양 번(轓-수레 양 옆에 귀처럼 튀어나온 부분. 진흙 튀는 걸 막는 용도)에 그림이 그려진 것

(13) [위서]魏書 – 그가 천자를 핍박했다는 말이다

[헌제기]獻帝紀 – 동탁은 태사(太師)가 된 데다가 또 상보(尙父)를 칭하려 하며 채옹(蔡邕)에게 이에 관해 물었다. 채옹이 말했다, 

“옛날 (주)무왕이 천명을 받아 태공(太公-강태공)을 스승(師)으로 삼자 주 왕실을 보좌하고 무도한 자를 정벌하니 이 때문에 천하에서 그를 존중해 상보(尙父)라 칭한 것입니다. 지금 공의 공덕이 실로 높고 높으나 관동이 모두 평정되고 거가(車駕)가 동쪽으로 돌아올 때를 기다려 그 연후에 이를 의논해야 마땅합니다.” 

이에 그만두었다. 경사(京師)에서 지진(地震)이 있자 동탁이 또 채옹에게 물었다. 채옹이 대답했다, 

“땅이 진동하는 것은 음(陰)이 성하다는 것이니 대신(大臣)이 법제를 뛰어넘어(거슬러) 생긴 일입니다. 공이 청개거(靑蓋車)를 타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이를 합당한 일이 아니라 여깁니다.” 

동탁이 이를 좇아 고쳐서 금화조개거(金華皂蓋車-금으로 꾸며진 검은 일산의 수레)를 탔다.
 
[후한서] 권72 동탁열전 해당 부분 이현 주 

- 금화(金華)는 금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수레다. 조(爪)는 개궁(蓋弓-일산의 살대) 끝머리가 발톱(爪)의 형태를 말한다. 轓(번)의 음은 甫+袁이고 광아(廣雅)에서 거상(車箱)이라 했다. 속한지에서 번(轓)은 길이가 6척으로 아래가 굽어 있고 넓이는 8촌이라 했다. 또 이르길, 황태자가 청개 금화조(青蓋金華蚤: 蚤= 爪)에 화번(畫轓)을 탔다고 했다. 간마(竿摩)는 서로 핍근(逼近)함을 일컫는다. 지금(이현은 당나라 때 사람) 풍속에서 간인(干人-고관귀인)을 섬기는 자를 일러 상간마(相竿摩)라 한다.-
 
동탁의 동생 동민(董旻)은 좌장군이 되어 호후(鄠侯) 에 봉해지고 형의 아들(즉, 조카) 동황(董璜)은 시중(侍中) 중군교위(中軍校尉)가 되어 전병(典兵-군사를 관장함)했으며 종족 안팎이 아울러 조정의 반열에 올랐다. (주14) 

(14) [영웅기] – 동탁의 시첩(侍妾)들이 품에 안고 있는 자식들(갓난아기)이 모두 후(侯)로 봉해지니 금자(金紫-금인자수 즉, 금 관인과 자주색 인끈으로 열후가 하사받던 것)를 가지고 놀았다. 손녀의 이름은 백(白)으로 이때 아직 성년이 되지 않았으나(未笄) 위양군(渭陽君)에 봉해졌다. 미성(郿城) 동쪽에 단(壇)을 세우니 너비 2장 남짓에 높이 5-6척이었다. 동백(董白)을 금화청개거(金華靑蓋車)에 타게 하고 도위(都尉), 중랑장(中郎將), 자사(刺史)와 1천석 관원으로 미성(郿城) 에 있던 자들을 각기 수레에 타고 잠필(簪筆-붓을 관이나 홀에 끼움)하여 동백을 위해 도종(導從-앞뒤에서 수종함)하게 하고는, 단 위로 올라가서 형의 아들(조카)인 동황(董璜)을 시켜 사자(使者)가 되어 (동백에게 위양군의) 인수(印綬-관인과 인끈)를 주게 했다.

공경(公卿)들이 동탁을 만날 때 수레 아래에서 알배(謁拜-배알)했으나 동탁은 예를 행하지 않았다. 삼대(三臺-아래※ 참고)를 호령해 상서(尙書) 이하 관원을 불러 그들이 직접 동탁 부(府)로 와서 일을 아뢰도록 했다. (주15) 
 
(15) [산양공재기]山陽公載記 – 당초 동탁이 전장군이 되었을 때 황보숭(皇甫嵩)은 좌장군이 되어 함께 한수(韓遂)를 정벌하니 각자 서로를 아래라 여기지 않았다. 그 뒤 동탁이 소부, 병주목으로 징소되며 그 군사를 황보숭에 속하도록 하자 동탁이 대노했다. 동탁이 태사(太師)가 되어 황보숭이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수레 아래에서 배례하자 동탁이 황보숭에게 물었다. 

“의진(義眞-황보숭의 자가 의진)은 아직도 복종하지 못하시겠소?”

 황보숭이 말했다, 

“명공(明公)이 이런 지위에 이를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동탁이 말했다, 

“홍곡(鴻鵠-큰 기러기와 고니. 큰 인물을 비유)은 실로 원대한 뜻이 있으니 다만 연작(燕雀-제비와 참새. 보잘것없는 인물을 비유)이 알지 못할 뿐이오.” 

황보숭이 말했다, 

“옛날 명공과 더불어 (저도) 함께 홍곡(鴻鵠)이었으나 뜻하지 않게 금일에 이르러 (명공이) 봉황(鳳皇)으로 변했을 뿐입니다.” 

동탁이 웃으며 말했다, 

“경이 더 일찍 복종했다면 오늘 배례할 일은 없었을 것이오.” 

장번(張璠) 의 [한기]漢紀 – 동탁이 손바닥을 부딪치며 황보숭에게 말했다, 

“의진(義眞)은 두렵지 않으시오?” 

황보숭이 대답했다, 

“명공이 덕으로 조정을 보좌하여 큰 경사가 이제 막 닥쳤는데 두려워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만약 형(刑)을 문란하게 하여 마음대로 한다면 장차 천하가 모두 두려워할 것이니 어찌 저 황보숭 혼자만 그렇겠습니까?” 

동탁이 묵연(黙然-침묵)했고 마침내 황보숭과 서로 화해했다.
 
※ [자치통감] 호삼성 주에서는 삼대(三臺)=상서대(尙書臺)+어사대(御史臺)+부절대(符節臺)라 하고 / [후한서] 권74 上 원소여포열전 이현 주에서는 진서(晉書-남북조 송나라의 사영운謝靈運 찬)를 인용해 상서(尙書)=중대(中臺), 어사(御史)=헌대(憲臺), 알자(謁者)=외대(外臺)이고 이를 합쳐 삼대라 함.
 
미(郿)현에 오(塢)를 쌓으니(築郿塢-※) 높이가 장안성의 담장과 같고 30년 먹을 곡식을 쌓았는데, (주16) ‘일을 이루면 천하에 웅거하고 이루지 못하면 이곳을 지키며 족히 노년을 마칠 것’이라 말했다. 
 
(16) [영웅기]에서 미(郿)는 장안에서 260리 떨어져 있다고 했다.
 
※ 오(塢)는 본래 작은 방어용 성채를 말합니다. [후한서] 동탁열전 해당 부분에서는 “미현에 오를 쌓아 높이와 두께가 7장이었고 만세오(萬歲塢)라 불렀다” (又築塢於郿, 高厚七丈, 號曰「萬歲塢」)라 기술.
 
일찍이 미(郿)에 도착해 오(塢)로 행차한 일이 있는데 공경 이하가 횡문(橫門) 바깥에서 조도(祖道-노신路神에게 제를 올려 길 떠나는 사람의 안전을 축원하며 주연을 열어 전송하는 것)했다. 동탁은 미리 장만(帳幔-장막)을 펼쳐 술자리를 열고는 꾀어서 항복시킨 북지(北地)의 반란자 수백 명을 좌중으로 데려와 먼저 그의 혀를 자르거나 혹 팔다리를 베거나 혹 눈을 파내고 혹 가마에 넣어 삶기도 했는데 미처 죽지 않아 술잔과 탁자 사이로 굴러다니니 모인 자들 이 모두 전율하여 수저를 떨어뜨렸으나 동탁은 태연자약하게 먹고 마셨다. 
 
태사(太史)가 기(氣)를 보고는(望氣) 대신(大臣) 중에 육사(戮死-주륙 당해 죽음)할 자가 있을 것이라 했다. 전 태위 장온(張溫)이 이때 위위(衛尉)였는데 평소 동탁과 친하지 않아 동탁이 내심 그를 원망했다. 이에 하늘에 이변이 있게 되자 색구(塞咎-죄악을 메움)하고자 하여 사람을 시켜 장온이 원술과 교관(交關-서로 왕래함)했다고 말하게 하고는 마침내 매질하여 그를 죽였다. (주17) 
 
(17) [부자]傅子 – 영제(靈帝) 때문에 방(牓)을 써 붙여 관직을 파니 이에 태위 단경(段熲), 사도 최열(崔烈), 태위 번릉(樊陵), 사공 장온(張溫) 같은 무리들이 모두 많게는 1천만 적게는 5백만 전을 바쳐 삼공(三公)의 관직을 샀다. 단경은 수차례 정벌하여 큰 공을 세웠고, 최열은 북주(北州)에서 중명(重名-중한 명성)이 있었고, 번릉은 능히 우시(偶時-시세에 적합함)하니 모두 한 시대의 현사(顯士-이름을 드날린 선비)였으나 재물을 써서 관위를 얻었는데, 하물며 유효(劉囂), 당진(唐珍), 장호(張顥) 같은 무리겠는가!

[풍속통]風俗通 - 사례(교위) 유효(劉囂)는 여러 상시(常侍)들과 친하게 지내(黨) 지위가 공보(公輔-삼공과 사보 ; 재상급 고관)에 이르렀다.

[속한서]續漢書 – 당진(唐珍)은 중상시 당형(唐衡)의 동생이다. 장호(張顥)는 중상시 장봉(張奉)의 동생이다.

법령이 가혹하고 애증(愛憎)에 따라 형이 문란하며 서로 번갈아 무고를 받으니 억울하게 죽은 자가 천명을 헤아렸다. 백성들이 서로 오오(嗷嗷-원망하여 떠들썩함)하며 도로에서 눈빛을 나누었다. (주18) 
 
(18) [위서]魏書 – 동탁이 사례교위 유효(劉囂)를 시켜 관원(吏)과 백성 중 자식으로 불효한 자, 신하로서 불충한 자, 관원(吏)으로서 청렴하지 않은 자, 동생으로 불순(不順)한 자를 명부에 적고 이에 들어맞는 자들을 모두 그 몸은 죽이고 재물은 관아로 몰수시켰다. 이에 애증(愛憎)에 따라 서로 일으키니(고발하니) 백성들 다수가 억울하게 죽었다.
 
동인(銅人-동상), 종거(鐘虡-종과 받침대)를 모두 부수고 오수전(五銖錢)을 허물어 다시 주조해 소전(小錢)을 만들었다. 크기 5푼에 문장(文章)이 없고 육호(肉好-동전의 가장자리와 구멍)에 윤곽(輪郭)이 없었으며 갈거나 줄질해서 다듬지 않았다. (※ 조잡하게 만들었다는 말) 이에 돈 가치가 가벼워져 물건이 귀해지고 곡식 1곡(斛)이 수십만 전에 이르렀다. (※ 승(升)-두(斗)-곡(斛). 1곡은 10두. 당시 곡식 1곡은 부피로는 약 20리터, 무게로는 약 15kg 정도로 추정됨) 이 이후로 전화(錢貨-돈)가 유통되지 않았다.

초평 3년(192년) 4월, 사도 왕윤(王允), 상서복야 사손서(士孫瑞), 동탁의 장수 여포(呂布)가 공모해 동탁을 주살했다. 이때 천자가 병에 걸렸다 막 낫게 되어 미앙전(未央殿)에서 큰 모임을 열었다. 여포는 같은 군(郡) 출신의 기도위 이숙(李肅) 등을 시켜 친병(親兵) 10여 명을 거느리고는 거짓으로 위사(衛士)의 복장을 입고 액문(掖門)을 지키게 했다. 여포는 조서를 품고 있었다. 
 
동탁이 도착하자 이숙 등이 동탁을 막았다. 동탁이 놀라 여포는 어디 있냐고 외쳤다. 여포는 

“(적을 토벌하라는) 조서가 내렸다.”

고 말하고는 마침내 동탁을 죽이고 삼족을 멸했다. 주부 전경(田景)이 동탁의 시신 앞으로 달려가니 여포가 또 그를 죽였다. 모두 세 사람을 죽이니 나머지 사람들은 감히 움직이는 자가 없었다. (주19) 

(19) [영웅기] – 이때 다음과 같은 요언(謠言)이 있었다. 

“천리초(千里草)가 푸르고 푸르나 열흘 뒤를 점쳐 보면(十日卜) 오히려 살지 못하겠구나.”(※ 千里草는 董, 十日卜은 卓의 파자) 

또 동도(董逃-동탁이 달아난다는 뜻)라는 노래가 지어졌다. 또 도사(道士)가 포(布-베. 여기선 여포의 포 암시)에 ‘여(呂)’ 자를 적어 동탁에게 보여줬으나 동탁은 그것이 여포를 말하는 것을 알지 못했다. 

동탁이 모임에 참석하러 나서면서 보기(步騎-보병과 기병)를 벌여 세우고 영(營)에서 궁(宮)으로 갔는데 조복(朝服)을 입고 도인(導引-인도)케 하여 그 가운데로 행차했다. 말이 넘어져 앞으로 가지 못하니 동탁이 내심 괴이하게 여겨 그만두려 했으나 여포가 행보하기를 권하자 이에 충갑(衷甲-겉옷 안에 갑옷을 입음)하고 들어갔다. 

동탁이 죽은 뒤 당시 해와 달이 청정해지고 미풍도 일지 않았다. 동민, 동황 등과 종족의 노약자들은 모두 미(郿) 에 있었는데 모두 되돌아가다 그 군하(群下-수하)들에게 칼로 베이거나 화살을 맞았다. 

동탁의 모친은 나이 90세로 달아나 오(塢)의 문에 이르러 “나는 죽음을 면하게 해달라.”고 간청했으나 이내 참수되었다. 

원씨(袁氏)의 문생(門生-문하의 학생), 고리(故吏-옛 속관)들은 미(郿) 에서 죽은 여러 원씨들을 다시 묻고, 동씨(董氏)의 시신들을 그 곁에 거두어 모아서 불태웠다. 동탁의 시신은 저잣거리에 내버려두었다. 

동탁이 평소 비대하여 기름이 흘러 땅을 적시고 이 때문에 (주변에 있던) 풀이 붉어졌다. 시신을 지키던 관원이 날이 저물자 큰 심지를 동탁의 배꼽 위에 두고 등불을 밝히니 밝은 빛이 아침까지 이르렀고 여러 날을 이와 같이 하였다. 그 뒤 동탁의 옛 부곡(部曲)이 불태워져 재가 된 것을 거두어 모두 하나의 관(棺)에 넣고는 미(郿) 에 묻었다. 동탁의 오(塢)에는 금 2-3만 근, 은 8-9만 근이 있었고 주옥(珠玉-구슬과 옥), 면기(錦綺-비단과 능직), 기완(奇玩-기이한 노리개), 잡물(雜物)은 모두 산처럼 높고 언덕처럼 쌓여 있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장안의 사서(士庶-선비와 서민)들이 모두 서로 경하했으며, 동탁에 아부했던 자들은 모두 하옥되어 죽었다. (주20)
 
(20) 사승(謝承)의 [후한서]後漢書 – 채옹(蔡邕)은 왕윤(王允)과 같은 자리에 있었는데 동탁이 죽었다는 말을 듣자 탄석(歎惜-탄식)하는 소리를 냈다. 왕윤이 채옹을 책망하며 말했다, 

“동탁은 나라의 대적(大賊)으로 임금을 살해하고 신하를 주륙하니 천지(天地)가 그를 돕지 않고 사람과 신령이 함께 그를 미워했소. 그대는 왕의 신하가 되어 대대로 한나라의 은혜를 받았소. 나라의 임금이 위난을 겪음에 일찍이 도과(倒戈-창을 거꾸로 잡음)하지 않았으면서 동탁이 천주(天誅-천벌)를 받으니 다시 탄식하고 애통해하는 것이오?” 

곧바로 그를 붙잡아 정위(廷尉)에 넘겼다. 채옹은 왕윤에게 사죄하며 말했다, 

“(제가) 비록 불충하나 대의(大義)와 고금의 안위(安危)는 알고 있습니다. 귀로는 듣기 싫은 소리라도 입으로는 늘 놀려 대는 바인데 어찌 나라를 저버리고 동탁을 향했겠습니까? 미치광이 장님의 말이라 그릇됨과 우환이 들락거리긴 하나 원컨대 경수(黥首-이마에 묵으로 글자를 새김)의 형벌을 받을지언정 한사(漢史) 쓰기를 계속하도록 해 주십시오.” 

공경들이 채옹의 재주를 아까워해 모두 함께 왕윤에게 간언했다. 왕윤이 말했다, 

“옛날 무제(武帝)는 사마천(司馬遷)을 죽이지 않아 방서(謗書-(무제를) 비방하는 글. 즉, [사기])를 써서 후대에 전해지게 했소. 이제 바야흐로 국조(國祚)가 중쇠(中衰-번창하다가 쇠망함)하여 융마(戎馬-군마)가 교외에 있는데 영신(佞臣-간신)으로 하여금 어린 주인의 좌우에서 집필(執筆)하도록 할 수는 없소. 뒤에 우리들은 모두 방의(謗議-비방하는 논의)를 받게 될 것이오.” 

마침내 채옹을 죽였다. 
 
/신 송지가 보건대(주석자인 배송지의 견해), 채옹이 비록 동탁에게 친임 받았으나 그 진정으로 볼 때 필시 일당은 아니었다.(不黨) 어찌 동탁이 간흉(姦凶)하여 천하에 독이 됨을 몰랐겠는가? 그가 사망했다는 것을 듣고 이치상 탄석(歎惜)했을 리 없다. 설령 다시 그렇게 하라고 해도 응당 왕윤과 같이 있던 자리에서는 도리어 말하지 않았을 것이니 이는 사승(謝承)의 망령된 기록일 것이다. 

사천(史遷-사마천의 별칭)의 기전(紀傳)은 세상에 널리 뛰어난 공을 세운 것인데, 왕윤은 효무제가 응당 일찍이 사마천을 죽였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니 이는 견식 없는 자(非識者)의 말이다. 다만 사마천이 효무제의 실책을 숨기지 않은 것은 그의 일을 정직하게 적은 것일 뿐, 어찌 비방했다 할 수 있겠는가! 

왕윤은 충정(忠正)하여 가히 내성불구(內省不疚-속마음을 살펴보아 허물되지 않음.[논어] 안연편에서 따온 말. ※)한 자라 이를 만하니 이미 비방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더욱이 채옹을 죽이려 했을 리 없다. 당시 논의가 채옹을 응당 죽여야 한다는 것이었을지라도 (이 논의에) 더불어 함께 하지 않았을 텐데 어찌 그가 자신을 비방할까 우려하여 그릇되이 착한 이를 죽였겠는가! 이는 모두 무망불통(誣罔不通-거짓되고 이치에 통하지 않음)함이 심하구나. 
 
/ 장번(張璠) 의 [한기]漢紀 – 당초 채옹은 언사(言事-정사에 대한 간언)를 올렸다 유배당하니 천하에 이름을 알리고 의(義)로써 지사(志士)들을 감동시켰다. (유배지에서) 되돌아와 안에서 총애 받던 자들이 그를 미워하니 채옹이 이를 두려워하여 이내 바닷가로 망명하고 왕래하며 태산(太山) 양씨(羊氏)에 의탁해 10년을 지냈다. 

동탁이 태위가 되자 벽소해 연(掾)으로 삼았고, 고제(高第-높은 성적)로 시어사치서(侍御史治書)로 임명되었다 사흘 만에 마침내 상서(尙書)에 이르렀다. 그 뒤 파동태수(巴東太守)로 올랐다가 동탁이 아뢰어 시중(侍中)으로 (수도에) 남겨 두도록 했고 장안에 도착해 좌중랑장(左中郎將)이 되었다. 동탁이 그 재주를 중히 여겨 후대했다. 매번 조정에 일이 있을 때마다 늘 채옹에게 명해 초안을 갖추도록 했다. 왕윤이 장차 채옹을 죽이려 하자 이때 명사(名士)들이 다수 그를 위해 말하니(변호하니) 왕윤이 후회하고 그만두려 했으나 채옹은 이미 죽은 뒤였다.

[[이각, 곽사전]]으로 분할

<<진수의 평>>

동탁은 사람이 비뚤어져 계통이 없고 잔인하고 포학하며 비정했으니, 문자로 역사를 기록한 이래로 이와 같은 자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옛날 거인이 임조(臨爪)에 출현하자 구리로 된 인물상을 만들었는데, 임조에 동탁이 태어났을 때는 구리로 된 인물상은 훼손되었다. 세상에서는 동탁이 존재하기 때문에 대란이 일어나고, 대란이 일어났기 때문에 동탁이 멸망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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