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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동탁의 사위인 중랑장 우보(牛輔)가 군사를 거느리고 따로 섬(陝-사례 홍농군 섬현)에 주둔하고 있었고, 교위 이각(李傕), 곽사(郭汜), 장제(張濟)를 나누어 보내 진류(陳留), 영천(潁川)의 여러 현들을 공략하게 했다. 동탁이 죽자 여포는 이숙(李肅)을 시켜 섬(陝)으로 가게 하여 조명(詔命-황제의 명령.조령)으로 우보를 주살하려 했다. 우보 등이 역격해 이숙과 싸워 이숙이 홍농(弘農)으로 패주하자 여포가 이숙을 주살했다. (주21) 

 
(21) [위서]魏書 – 우보는 겁이 많고 실수(失守)하니 스스로 편안해하지 못했다. 늘 병부(兵符)를 쥐고 부질(鈇鑕-도끼;형구刑具)을 주변에 두어 스스로 강한 것처럼 보이고자 하였다. 손님을 만날 때는 먼저 상자(相者-관상가)를 시켜 그의 상을 보게 하고 반기(反氣)가 있으면 더불어 함께하지 않았다. 또 점을 쳐서 길흉을 알게 한 연후에 손님을 만났다. 중랑장 동월(董越)이 우보에게로 오자 우보가 그를 첨치게 하니 태하리상(兌下離上)의 점괘를 얻었다. 점쟁이가 말하길, 


“불(火)이 쇠(金)를 이기니 바깥사람이 안에 있는 사람을 도모하는 괘입니다.”

라 하자 즉시 동월을 죽였다. / 

[헌제기]獻帝紀 – 점쟁이가 늘 동월에게 채찍을 맞으니 이 때문에 그에게 보복한 것이다.

 
그 후 우보 영(營) 의 군사 중에 밤중에 배반하여 빠져나온 자가 있어 영(營) 중이 놀라게 되었다. 우보는 모두가 배반했다고 여겨 이내 금보(金寶-금과 보물)를 취해 평소 후대하며 교우하던(厚友-※) 호적아(胡赤兒) 등 5-6 명과 함께 서로 따르며 성을 넘어 북쪽으로 하수를 건넜다. 호적아 등은 우보의 금보(金寶)를 탐내어 우보의 머리를 잘라 장안으로 보냈다.
 
※ 우보의 죽음에 관해서는 [후한서] 동탁열전 해당부분의 주석에 좀 더 자세한 내용이 나옵니다. 

헌제기(獻帝紀) 왈, 우보는 장하(帳下-휘하)인 지호적아(支胡赤兒) 등을 평소 과하게 대우하여 가보(家寶)를 아낌없이 그들에게 주었고 스스로는 20여 병금(餠金-떡 모양의 금)과 대백주영(大白珠瓔-크고 흰 구슬옥돌, 구슬목걸이?)을 둘렀다. 호(胡)가 우보에게 이르길, 

“성 북쪽에 이미 말이 있으니 떠나시지요.” 

우보의 허리를 얽어매어 성을 넘으며 아래에 매달았는데, 미처 땅에 닿기 전 1장쯤 되는 곳에서 우보를 놓쳤다. 우보가 허리를 다쳐 행보할 수 없게 되니 여러 호(胡)들이 함께 그의 금과 구슬을 빼앗고는 머리를 잘라 장안으로 보냈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호적아(胡赤兒)를 이 헌제기에서는 지호적아(支胡赤兒)로 표현한 것인데, 여기서 지호(支胡)는 북방이민족의 일종을 일컫는 호칭(고유명사)으로 보입니다. [삼국지집해]를 찾아보니, 여기서 더 나아가 [삼국지] 동탁전의 이 대목 ‘獨與素所厚友胡赤兒等五六人’ 중 友胡를 支胡가 잘못 와전된 것으로 보는 설도 있더군요. 제가 보기에는 일리가 있는 것 같은데 어쨌든 이 설에 따르면 위 대목의 해석은 “평소 후대하던 지호적아 등 5-6인”이 됩니다.

 
이각 등이 돌아왔을 때 우보가 이미 패망해 무리들이 의탁할 곳이 없어 각자 흩어져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다. 사면의 글도 없는데다가 또한 장안에서 양주인(涼州人)들을 모두 주살하려 한다는 말을 들으니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가후(賈詡)의 계책을 써서 마침내 그 무리들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가며 이르는 곳마다 군사를 거두니 장안에 도착했을 때는 군사가 10여 만에 이르렀고, (주22) 동탁의 옛 부곡(部曲)인 번조(樊稠), 이몽(李蒙), 왕방(王方) 등과 합쳐 장안성을 포위했다. 
 
(주 22) [구주춘추]九州春秋 – 이각 등이 섬(陝)현에 있을 때 모두 두려워 떨며 급히 군사를 끼고 스스로 지키려 했다. 호문재(胡文才), 양정수(楊整脩)는 모두 양주(涼州)의 대인으로 평소 사도 왕윤과 친하지 않았다. 이각이 배반하게 되자 왕윤은 이에 호문재, 양정수를 불러 동쪽으로 가서 (양주인을 모두 죽이려 한다는) 오해를 풀게 했는데, 거짓으로라도 온화한 안색을 꾸미지 않고 말하길, 

“관동(關東)의 서자(鼠子-쥐새끼)들이 무엇을 하자는 것이오? 경들이 가서 불러오시오.” 

이에 두 사람이 떠났으나 (왕윤의 청을 들어 오해를 풀어주려는 것이 아니라) 실은 군사를 불러 되돌아오려는 것이었다.
 
열흘 뒤 성이 함락되고 여포와 성 안에서 싸웠는데 여포가 패해 달아났다. 이각 등은 군사를 풀어 장안의 노소(老少)를 약탈하고 모두 죽이니 죽은 자들이 낭자(狼籍-어지럽게 흩어짐)했다. 동탁을 죽인 자를 주살하고 왕윤의 시신을 저잣거리에 내버려두었다. (주23) 
 
(주23) 장번(張璠) 의 [한기]漢紀 – 여포는 군이 패하자 청쇄문(靑瑣門) 바깥에 말을 세워놓고 왕윤에게 말했다, 

“공도 함께 가시지요.” 

왕윤이 말했다, 

“국가를 평안케 하는 것이 나의 가장 큰 바람이니 만약 이를 이루지 못하면 봉신(奉身-몸을 바침;직임을 다함)하여 죽을 뿐이오. 조정의 어린 주인이 나를 믿고 의지하는데 화란에 임해 구차하게 위험을 면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할 바가 아니오. 힘써 관동(關東)의 여러 공들에게 말해 국가를 염려하도록 해주시오.” 

이각, 곽사가 장안성으로 들어와 남궁 액문(掖門)에 주둔하며 태복 노규(魯馗), 대홍려 주환(周奐), 성문교위 최열(崔烈), 월기교위 왕기(王頎)를 죽였고 관원, 백성 중 죽은 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사도 왕윤은 천자를 끼고 선평성문(宣平城門) 위로 올라가 군사를 피했는데, 이각 등이 성문 아래에서 배례하며 땅에 엎드려 고개를 조아렸다. 황제가 이각 등에게 말했다, 

“경은 위복(威福-위압과 복덕.또는 그 권한)을 지은 일도 없이 군사를 풀어 종횡하니 어찌하려는 것이오?” 

이각 등이 말했다, 

“동탁은 폐하께 충성했으나 아무 까닭없이 여포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신 등은 동탁을 위해 원수를 갚고자 할 뿐 감히 반역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청컨대 일이 끝나면 정위(廷尉)에게 나아가 죄를 받겠습니다.” 

왕윤은 궁핍해지자 나가서 이각을 만났고, 이각은 왕윤과 처자, 종족 10여 명을 죽였다. 장안성의 남녀대소(男女大小) 중 눈물흘리며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왕윤은 자(字)가 자사(子師)로 태원(太原)군 기(祁)현 사람이다. 어려서 대절(大節)을 갖추니 곽태(郭泰)가 그를 만나보고 높게 여기며 말했다, 

“왕생(王生-오늘날로 치면 왕군 정도의 뜻?)은 하루에 천리 가니 왕좌지재(王佐之才)로구나.” 

곽태가 비록 선달(先達-학문,도덕 등이 앞서는 선배)이나 마침내 함께 정교(定交-교우를 맺음)했다. 삼공(三公)의 관부로부터 아울러 벽소되었으며, 예주자사를 지내며 순상(荀爽), 공융(孔融)을 벽소해 종사(從事)로 삼았고, 하남윤, 상서령으로 승진했다. 사도(司徒)가 되자 왕실을 부축해 떠받들어 대신(大臣)으로서 절의를 얻으니 천자로부터 그 이하가 모두 그에게 의지했다. 동탁 또한 그를 추신(推信-중용하고 신임함)하고 조정 일을 맡겼다. 

화교(華嶠)가 말했다 - 무릇 선비는 정(正)으로 서고 모(謀-책모,계책)로써 구제하며 의(義)로써 이루는 법이다. 만약 왕윤이 동탁을 받들고 그의 권력을 나누었다면 틈을 엿보아 그의 죄를 끊으려 한 것이다. 이 당시는 천하가 풀리기 어려운 때라 근본으로 삼는 것은 모두 충의(忠義)를 주(主)로 하여야 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동탁을 받든 것을 두고 올바름을 잃었다(失正) 할 수 없고, 권력을 나눈 것을 두고 의롭지 않다(不義) 할 수 없으며 틈을 엿본 것을 두고 교활한 속임수를 썼다 할 수 없도다. 이로써 모(謀)로 구제하고 의(義)로 이루어 끝내 정(正)으로 돌아갔구나.

 
동탁을 미(郿) 에 묻었는데 큰 바람과 폭우가 내려 동탁의 묘를 뒤흔들어 장(藏)으로 물이 흘러 드니 그 관곽(棺槨)이 물에 떠다녔다. 이각은 거기장군(車騎將軍), 지향후(池陽侯), 영(領) 사례교위(司隷校尉), 가절(假節), 곽사는 후장군(後將軍), 미양후(美陽侯), 번조는 우장군(右將軍), 만년후(萬年侯)가 되었다. 이각, 곽사, 번조가 조정을 전단했다. (주24) 장제는 표기장군(驃騎將軍), 평양후(平陽侯)가 되어 홍농에 주둔했다.
 
(주24) [영웅기] – 이각은 북지(北地) 사람이고 곽사는 장액(張掖) 사람이다. 다른 이름은 다(多)이다. (※ 곽사=곽다)
 
이 해 한수(韓遂), 마등(馬騰) 등이 항복해 군사를 이끌고 장안에 이르니, 한수를 진서장군(鎭西將軍)으로 삼아 양주(涼州)로 돌아가게 하고, 마등을 정서장군(征西將軍)으로 삼아 미(郿)에 주둔시켰다. 
 
시중 마우(馬宇)가 간의대부 충소(种邵), 좌중랑장 유범(劉範) 등과 모의하여 마등에게 장안을 습격하게 하고 자신들은 내응하여 이각 등을 주살하려 했다. 마등이 군사를 이끌고 장평관(長平觀-※)에 도착했으나 마우 등의 모책이 누설되자 탈출해 괴리(槐里-우부풍 괴리현)로 달아났다. 번조가 마등을 공격하여 마등이 패주하고 양주로 돌아갔다. 또 괴리를 공격하니 마우 등이 모두 죽었다. 이때 삼보(三輔) 백성이 수십만 호에 이르렀으나 이각 등이 군사를 풀어 겁략하고 성읍을 공표(攻剽-공격하여 겁탈함)하니 인민들이 굶주리고 곤궁하여 2년 동안 서로 잡아 먹어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주25)
 
(25) [헌제기]獻帝紀 – 이때 새로 천도하여 궁인들이 다수 의복을 잃어버리자 황제가 어부(御府-임금의 곳집)의 비단(繒)을 내어 그들에게 주려 했다. 이각이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하며 말했다, 

“궁중에 옷이 있는데 어찌 다시 지으려 하십니까?” 

조령으로 마구간 말 백여 필을 팔고 어부(御府)의 대사농(大司農)이 잡다한 비단(雜繒) 2만 필을 내어 마구간 말을 판 값과 함께 스스로 생존하지 못하는 공경 이하 빈민들에게 하사했다. 이각이 말했다, 

“저희 집 저각(邸閣-곳간)에 쌓아 둔 것이 조금 있습니다.” 

그리고는 (하사품을) 모두 실어가서는 자신의 영(營)에 두었다. 가후(賈詡)가 이르길, 

“황상의 뜻을 거슬러서는 안됩니다.”

라 했으나 이각은 따르지 않았다.
 
※ 전서음의(前 書音義) 왈, 장평은 판(阪-둑)의 이름이고 지양궁 남쪽에 있다. 이곳에 장평관(長平觀)이 있고 장안으로부터 50리 떨어져 있다. ([四]前書音義曰:「長平, 阪名也, 在池陽南. 有長平觀, 去長安五十里 / [후한서] 동탁열전 주)
 
제장들이 권력을 다투어 마침내 번조(樊稠)를 죽이고 그 군사를 아울렀다. (주26) 
 
(주26) [구주춘추]九州春秋 – 마등, 한수가 패하자 번조(樊稠)가 추격해 진창(陳倉)에 이르렀다. 한수가 번조에게 말했다, 

“천지가 뒤집어져 가히 알수 있는 일이 없소. 본래 서로 다툰 것은 사사로운 원한이 아니고 왕가(王家)의 일일 뿐이오. (나는) 족하와 같은 주리인(州里人-같은 주 출신)이니 지금은 비록 사소하게 어긋났으나(小違) 응당 대동(大同)해야 하니 서로 더불어 좋은 말을 하며 헤어지고 싶소. 해후(邂逅)함이 만에 하나 여의치 않더라도 뒤에 다시 서로 볼 날이 있을 것이오!” 

함께 기병을 물리고 앞에서 말을 접하고 팔을 맞잡으며 매우 오랫동안 서로 대화를 나눈 뒤 헤어졌다. 이각의 형의 아들인 이리(李利)는 번조를 수종했었는데, 이리가 돌아와 이각에게 고하길 한수, 번조가 서로 말을 나란히 하여 대화했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으나 의애(意愛-정의情誼.우정)가 매우 친밀했다고 말했다. 이각이 이에 번조가 한수와 더불어 사사로이 화친하여 다른 뜻을 품었다고 의심했다. 번조가 군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관(關)을 나가려 하며 이각에게 군사를 늘려주도록 청했다. 이에 번조를 회의에 청하고는 그 자리에서 번조를 죽였다.
 
곽사가 이각과 더불어 번갈아가며 서로 의심하니 장안 내에서 전투(戰鬪)했다. (주27) 

(주 27) [전략]典略 – 이각은 여러 차례 술자리를 베풀며 곽사를 청했는데 혹 곽사를 (자기 집에) 머물게 해 재우기도 했다. 곽사의 처는 이각이 곽사에게 비첩(婢妾)을 주어 자신의 총애를 빼앗을까 두려워하여 그들을 이간시킬 것을 생각했다. 때마침 이각이 선물을 보내자 (곽사의) 처는 메주로 약을 만들었다. 곽사가 막 먹으려 하자 처가 말했다, 

“음식이 밖에서 왔으니 혹 변고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는 약을 들어 내 보여주며 말했다, 

“한 둥지에 두 수컷(수탉)이 있을 수 없는 법인데(一棲不二雄) 저는 장군이 왜 그렇게 이공(李公)을 믿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날 이각이 다시 곽사를 청해 크게 취했다. 곽사는 이각이 약을 탄 것으로 의심하여 분즙(糞汁-똥물)을 짜내어 마시니 (취기가) 이내 풀렸다. 이에 마침내 혐극(嫌隙-서로 싫어하며 벌어진 틈)이 생기게 되고 군사를 조련해(治兵) 서로 공격했다.

이각은 영(營)에 천자를 볼모로 잡아두고 궁전 성문을 불태우며 관사(官寺-관청)를 약탈하고 승여(乘輿-임금의 수레)와 의복, 어물(御物-임금이 쓰는 물건)을 모두 거두어 자기 집에다 두었다. (주28) 
 
(주 28) [헌제기거주]獻帝起居注 – 당초 곽사가 천자를 영접해 자신의 영(營)으로 행차하게 하려고 꾀하니 밤중에 달아나 이각에게 이를 고한 자가 있었다. 이각은 형의 아들인 이섬(李暹)을 시켜 수천 군사를 거느리고 궁을 포위하게 하고는 수레 3대(乘)로 천자를 영접했다. 양표(楊彪)가 말했다,

“자고로 제왕(帝王)은 신하의 집에 머물지 않는 법입니다. 거사하여 응당 천하인의 마음에 합치해야 하니, 제군들이 이와 같이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섬이 말했다, “장군의 계책이 이미 정해졌소.”

그리고는 천자가 수레 한 대, 귀인 복씨(伏氏)가 수레 한 대, 가후(賈詡), 좌령(左靈)이 수레 한 대에 타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걸으며 수종했다. 이날 이각은 다시 승여(乘輿)를 옮겨 북오(北塢)로 행차하게 하고는 교위(校尉)를 시켜 오(塢)의 문(門)을 감독하게 하여 안팎을 격절(隔絶-막아서 끊음)했다. 여러 시종하던 신하들이 모두 굶주린 기색이 있고 이때 날이 무척 더웠으나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얼어붙었다. 황제가 쌀 5곡(斛), 소뼈 5구(具)를 구해 좌우(左右-주변사람들)에 하사하려 하자 이각이 말했다, 

“아침 저녁으로 상을 올리는데 쌀을 어디에 쓰시렵니까?” 

그리고는 썩은 소뼈를 주니 모두 냄새가 나 먹을 수 없었다. 황제가 대노하여 힐책하고자 하니 시중 양기(楊琦)가 봉사(封事-봉해진 상소문)를 올려 말했다, 

“이각은 궁벽한 변방의 사람이라 오랑캐 풍속에 익숙합니다. 또 패역(悖逆)을 범했음을 스스로 알아 늘 앙앙(怏怏-원망하거나 불만스러움)한 기색을 띄고 있으니 거가를 도와 황백성(黃白城)으로 행차해 그 분을 풀려 합니다. 신이 원하건대 폐하께서 참으시어 그의 죄를 더욱 드러내는 일이 없기 바랍니다.” 

황제가 이를 가납했다. 당초 이각이 황백성(黃白城)에 주둔했었으므로 이에 그곳으로 (거가를) 옮기고자 하 것이다. 이각은 사도(司徒) 조온(趙溫)이 자신과 뜻을 함께하지 않는다 하여 이에 조온을 오(塢) 안에 두었다. 조온은 이각이 승여를 옮기려 한다는 것을 듣고 이각에게 서신을 보냈다. 

“공은 예전에 동공(董公-동탁)을 위해 원수를 갚은 것이라 칭탁했으나 실제론 왕성(王城)을 도륙하여 함락하고 대신들을 살륙하니 천하의 모든 가호(家戶)가 도(道)를 알지 못하게 되었소.(天下不可家見而戶釋) 이제 눈흘긴 사소한 틈으로 서로 다투다 천 균(鈞-1균은 30근.여기서는 아주 무거운 것을 비유)의 원수가 되니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각기 요생(聊生-편안히 믿고 의지하며 삶)하지 못하고 일찍이 개오(改寤-깨달아 고침)하지 못하여 마침내 화란(禍亂)이 되었소. 조정에서 이에 밝은 조명(詔命)을 내려 화해시키고자 하나 조명이 거행되지 못해 은택(恩澤)이 나날이 줄어드는데 다시 승여(乘輿)를 황백성(黃白城)으로 모시고자 하니 이는 실로 노부(老夫)가 이해하지 못할 일이요. [주역]에서 ‘처음 과오를 범해 분에 넘치게 되고 두번째 (물을) 건너고 세번째 이를 고치지 않아 정수리까지 빠뜨리는 것은 흉한 일’ (一過爲過, 再爲涉, 三而弗改, 滅其頂, 凶)이라 했소.(※) 

※ [주역]의 원문은 “過涉滅頂 凶(과섭멸정 흉)”인데 조온은 이 ‘과/섭/멸정’을 하나하나 나눠 말한 것. ‘지나치게(분에 넘치게) 물을 건너다 정수리까지 빠뜨리는 것(머리까지 물에 잠김)은 흉하다’ 정도의 뜻으로 생각됩니다.

조속히 더불어 화해하여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 주둔하는 것만 못하니, 위로는 만승(萬乘-천자)을 편안케 하고 아래로는 생민(生民)을 보전하니 어찌 심히 다행한 일이 아니겠소!” 

이각이 대노하여 사람을 보내 조온을 죽이려 했다. 그의 종제 이응(李應)이 조온의 옛 연(掾)이었기에 이를 간언하니 며칠 뒤에 그만두었다. 황제는 조온이 이각에게 서신 보낸 일을 듣고 시중 상흡(常洽)에게 물었다. 

“이각이 장부(臧否-선악)를 알지 못하는데 조온의 말이 매우 절절하니 가히 마음을 얼어붙게 할만하오.” 

(상흡이) 대답했다, 

“이응이 이미 이를 이해시켰습니다.” 

황제가 이에 기뻐했다.

이각이 공경들을 곽사에게 보내 화해를 청하게 하자 곽사가 이들을 모두 붙잡아 두었고 (주29) 여러달 동안 서로 공격하니 죽은 자가 만명을 헤아렸다. (주30)
 
(29) 화교(華嶠) 의 [한서]漢書 – 곽사가 공경들을 대접하며 이각 공격하는 일을 의논했다. 양표(楊彪)가 말했다, 

“뭇 신하들이 더불어 싸워 한 사람은 천자를 겁박하고 한 사람은 공경들을 볼모로 삼으니 이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이오?” 

곽사가 노해 손수 칼로 베어죽이려 하자 중랑장 양밀(楊密)과 좌우에서 다수 간하니 곽사가 이에 돌려보냈다.
 
(30) [헌제기거주]獻帝起居注 – 이각은 그 성정이 귀괴(鬼怪)한 좌도(左道-유교에 어긋나는 다른 종교.사도)의 술법을 좋아하니 늘 도인(道人)과 여무(女巫-무녀)가 있어 노래부르고 북을 치며 하신(下神-신내림)하고 육정(六丁-도교의 신.육갑六甲 중의 정신丁神)에 제사지내고 부핵(符劾-부적), 염승(厭勝-주술)의 도구로 하지 않는 바가 없었다. 또 조정(朝廷) 성문(省門-궁문) 밖에 동탁을 위해 신좌(神坐)를 만들어 놓고 여러 차례 소와 양으로 제사지내고 이를 마치면 성합문(省閤問)을 지나 기거하며 입견(入見)하기를 구했다. 

이각은 3개의 도(刀)를 차고는 손에는 또 채찍과 합쳐 칼 하나를 쥐었다. 시중(侍中), 시랑(侍郎)은 이각이 병장기를 차고 있는 걸 보고 모두 놀라고 두려워했는데 또한 검을 차고 도(刀)를 지니고는 먼저 (어전으로) 들어가 황제 곁으로 갔다. 이각이 황제에게 대답할 때 때로 ‘명폐하(明陛下)’라 하고 때로 ‘명제(明帝)’라 했는데, 황제에게 곽사가 무상(無狀-공적이나 착한 행실이 없음;죄가 커서 그 죄상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음)하다고 말하면 황제 또한 그의 뜻에 따라 응답했다. 이각이 기뻐하며 궁을 나가서 말했다, 

“명폐하(明陛下)께서는 실로 현명한 성주(聖主)이시다.” 

내심 자신하며 스스로 천자의 환심을 얻었다고 여겼다. 비록 (자신은) 그러했으나 근신(近臣)들은 검을 차고 황제 곁에 있지 못하게 하고자 하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 자들이 장차 나를 도모하려는 것인가? 그러니 모두 도(刀)를 지니고 있구나.”

시중(侍中) 이정(李禎)은 이각의 주리(州里) 사람으로 평소 이각과 교우했는데 이각에게 말했다,

“(근신들이) 도(刀)를 지니는 것은 군중(軍中)에서는 그럴 수 밖에 없는 일로 이는 국가의 고사(故事-예로부터 내려온 전례)입니다.”

이에 이각이 이해했다. 
 
천자는 알자복야(謁 者僕射) 황보력(皇甫酈)이 양주의 구성(舊姓-예로부터 내려온 성씨. 세족)으로 전대(專對-남의 물음에 자신의 지혜로 대답함)하는 재주가 있다하여 그를 보내 이각, 곽사를 화해시키도록 했다. 황보력은 먼저 곽사에게로 나아가니 곽사가 (화해하라는) 조명(詔命)을 받들었다. 이각에게 나아가니 이각은 수긍하지 않으며 말했다, 

“내게 여포를 토벌한 공이 있고 4년 동안 국정을 보좌해 삼보(三輔)를 편안케 한 것은 천하가 아는 바요. 곽다(郭多=곽사)는 말을 훔치는 도둑놈(盜馬虜)일 뿐인데 어찌 감히 나와 더불어 대등할 수 있겠소? 내가 틀림없이 그를 죽일 것이오. 그대는 양주(涼州) 사람으로 나의 방략(方略)과 사중(士衆-군사)을 보건대 족히 곽다를 제압할 수 있다 생각지 않으시오? 곽다는 또 공경들을 겁박해 볼모로 잡고 있어 소행이 이와 같은데 그대는 실로 곽다를 이롭게 하려 하나 나 이각이 담력이 있음을 절로 알게 될 것이오.” 

황보력이 대답했다, 

옛날 궁후(窮后) 예(羿) 는 자신이 활을 잘 쏘는 것을 믿고 환난(患難)을 생각하지 않다 패망하게 되었고 가까이로는 동공(董公)이 강성했음은 명장군도 눈으로 직접 본 바입니다. 안으로는 왕공(王公)이 있어 내주(內主)가 되고 밖으로는 동민, 동승, 동황이 있어 경독(鯁毒)이 되었으나, 여포가 은혜를 입었으면서 도리어 그를 도모하자 잠깐 사이에 그 목이 장대끝에 걸리게 되니 이는 용맹하되 꾀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장군은 몸은 상장(上將)이 되어 절월을 움켜쥐고 자손들은 권력을 쥐고 종족들은 총애를 입고 국가의 좋은 작위는 모두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제 곽다는 공경들을 겁박해 볼모로 삼고 있고 장군은 지존(至尊)을 위협하니 누가 가볍고 누가 무겁습니까? 장제(張濟)가 곽다(郭多), 양정(楊定)과 더불어 함께 모책을 세우고 또 관대(冠帶-관과 띠;벼슬아치)가 붙었습니다. 양봉(楊奉)은 백파적의 우두머리(白波帥)일 뿐이나 오히려 장군의 행동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아니 장군이 비록 그에게 관직을 주고 총애하나 진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각이 황보력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를 꾸짖어 밖으로 나가게 했다. 
 
황보력이 나와서 성문(省 門-궐문)으로 나아가 이각이 조령을 따르기를 거부하며 그 언사가 불순했다고 아뢰었다. 시중(侍中) 호막(胡邈)은 이각에게 총행을 받고 있었는데, 조서를 전하는 자를 불러 그 말을 꾸미게 했다. 또 황보력에게 말했다, 

“이장군이 경을 박하게 대하지 않았고 또한 황보공이 태위(太尉)가 된 것은 이장군의 힘이오.” 

황보력이 대답했다, 

“호경재(胡敬才), 경은 국가의 상백(常伯-주나라 관직 이름;여기에서 유래하여 시중, 산기상시 같이 황제 측근에서 보좌하는 신하를 가리킴)이 되어 보필하는 신하인데 말이 이와 같으니 어찌 쓸모가 있겠소?” 

호막이 말했다, 

“경이 이장군의 뜻을 잃은걸 생각하면 쉽지 않을까 두려울 뿐이오! 나와 경은 누구를 섬기는 자요?” 

황보력이 말했다, 

“나는 누대에 걸쳐 은혜를 입었고 몸은 또한 늘 위악(幃幄-장막;궁정)에 있었소. 임금이 모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는 법이니 국가의 일에 연루되어 이각에서 죽임을 당한다면 이는 즉 천명(天命)이오.” 

천자는 황보력의 답변이 절절함을 듣고 이각이 이를 들을까 두려워 해 이내 황보력을 내보내게 했다. 황보력이 겨우 영문(營門)을 나섰을 때 이각이 호분 왕창(王昌)을 보내 그를 불러오게 했다. 왕창은 황보력이 충직함을 알았으므로 그를 보내주고는 돌아가 이각에게 답하길 '추격했으나 미치지 못했다'고 했다. 천자는 좌중랑장 이고(李固)를 시켜 절을 지니고 가서 이각을 대사마(大司馬)로 임명하고 삼공(三公)의 위에 두었다. 이각은 스스로 귀신(鬼神)의 힘을 빌린 것이라 여겨 여러 무당들에게 후사했다.
 
※ 경독(鯁 毒)은 말그대로 하면 ‘생선가시독’이란 뜻이나 문맥상 부정적으로 쓰인 말은 아닙니다. [삼국지집해]에서는 鯁을 更, 毒을 督으로 두어 鯁毒=更督 으로 보는 설을 소개하고 있고 [삼국지사전]에서는 '鯁은 鯁固(경고,강직하고 꿋꿋함)하여 목에 걸린 가시같음을 비유하는 말이고 毒은 安.'으로 해설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밖으로는 동민, 동승, 동황이 번갈아 다스렸다’ 또는 '동민 등이 강직하게 직언하는 골경신의 역할을 했다' 대략 이 정도의 뜻이 됩니다.
 
이각의 장수 양봉(楊奉)이 이각의 군리(軍吏) 송과(宋果) 등과 함께 이각 죽일 것을 모의하다 일이 누설되자 마침내 군사를 거느리고 이각에 반기를 들었다. 이각의 군사들이 배반하여 점차 쇠약해졌다. 장제(張濟)는 섬(陝-홍농군 섬현)으로부터 와서 화해시켰는데 이에 천자가 빠져나올 수 있었고 신풍(新豐), 패릉(霸陵) 사이에 도착했다. (주31) 
 
(31) [헌제기거주]獻帝起居注 – 당초 천자가 나와서 선평문(宣平門)에 당도하여 막 다리를 건너려는데 곽사군 수백 명이 다리 사이를 차단하며 

‘이 분이 천자요?’

라 물으니 수레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각군 수백 명이 모두 대극(大戟)을 쥐고 승여거(乘輿車)의 좌우에 있었는데, 시중 유애(劉艾)가 크게 외치길 ‘이분이 천자이시다’라고 하고는 시중 양기(楊琦)를 시켜 수레의 휘장을 높이 들게 했다. 황제가 여러 군사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이 물러서지 않고 어찌 감히 지존을 박근(迫近-가까이 닥침)하려는 것이냐?” 

이에 곽사 등의 군사가 물러났고 다리를 건넌 뒤 사중(士衆)들이 모두 만세를 외쳤다.
 
곽사가 다시 천자를 겁박하여 미(郿) 로 돌아가 도읍하고자 했다. 천자가 양봉의 영(營)으로 달아나자 양봉이 곽사를 공격해 격파하고 곽사는 남산(南山)으로 달아났다. 양봉과 장군 동승(董承)은 천자를 모시고 낙양으로 돌아가려 했다. 이각, 곽사는 천자를 보낸 것을 후회하여 다시 서로 화해하고는 천자를 추격해 홍농(弘農)의 조양(曹陽)에서 따라붙었다. 양봉은 급히 하동(河東)의 옛 백파적의 우두머리 한섬(韓暹), 호재(胡才), 이락(李樂) 등을 불러 합쳐서는 이각, 곽사와 더불어 크게 싸웠다. 양봉군이 패하자 이각 등은 군사를 풀어 공경 백관들을 죽이고 궁인을 약탈해 홍농(弘農)으로 들어갔다. (주32) 
 
(주 32) [헌제기]獻帝紀 – 이때 상서령 사손서(士孫瑞)가 난병(亂兵)들에게 해를 입었다. 

/ [삼보결록주]三輔決錄注 – 사손서는 자가 군영(君榮)이고 부풍 사람으로 대대로 학문(學門-학문하는 집안)이었다. 사손서는 어려서 가업을 이어 박달(博達-널리 사물에 통달함)하여 통하지 않는 바가 없었고 벼슬하여 현위(顯位-높은 직위)를 역임했다. 동탁이 주살당한 뒤 대사농(大司農)으로 오르고 국삼로(國三老-※)가 되었다. 

※ 삼로(三老)는 원래 주나라 때 왕이 부친의 예로 대접한 왕의 스승을 일컫는 것인데, 한고조 이후로 지방통제나 농촌교화를 위해 현, 향에 설치된 향관의 명칭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현삼로, 향삼로. 군-현-향-정-리. 한서 고제기) 그 이외에 나이가 많고 명망있는 중앙조정의 인물을 예우해 삼로(三老-세가지 덕을 안다고 해서 삼로), 오경(五更-다섯가지 일을 안다고 오경)으로 삼았는데, 향관인 삼로와 서로 구별하기 위해 때로는 이 삼로를 나라 차원의 삼로 즉 ‘국삼로’라 하기도 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국삼로(國三老)’라는 명칭만으로 보자면 [한서]에는 기술이 없고, [후한서]에서는 왕망 말 경시제가 족부 유량을 국삼로로 삼은 이래, 양통(楊統)이란 인물이 광록대부에 이르고 국삼로가 되었다 하고(양통은 건초(建初: 후한 3대 황제인 장제 때 연호.76-83년) 연간에 팽성령이 되고 90세에 죽었다고 함), 또 안제(6대 황제. 재위 106-125) 때 이충(李充)이 좌중랑장으로 올랐다가 나이 88세로 국삼로가 되었다 합니다. 그외 이 사손서를 포함해서 모두 4가지 케이스입니다. 

매번 삼공(三公)에 결원이 생길 때마다 사손서가 늘 후보로 올랐다. 태위 주충(周忠), 황보숭(皇甫嵩), 사도 순우가(淳于嘉), 조온(趙溫), 사공 양표(楊彪), 장희(張喜) 등이 공(公)이 될 때 모두 사손서에 양보하려 했다. 천자가 허현에 도읍하고 사손서의 공을 추론(追論)하여 아들 사손맹(士孫萌)을 담진정후(澹津亭侯)에 봉했다. 사손맹은 자가 문시(文始)이고 또한 재학(才學-재주와 학식)이 있고 왕찬(王粲)과 친했다. (벼슬을 받아) 국(國)으로 나아갈 때에 이르러 왕찬이 시를 지어 사손맹에게 선물하니 사손맹이 이에 답했고 왕찬집 중에 있다.
  
천자는 섬(陝)으로 달아나 북쪽으로 하수를 건넜는데 치중(輜重)을 잃어 보행(步行)하며 오직 황후(皇后) 귀인(貴人)만이 수종했고, 대양(大陽-하동군 대양현)에 도착해 인가(人家-민가)의 집에 머물렀다. (주33) 
 
(33) [헌제기]獻帝紀 – 당초 의논하는 자들이 천자가 하수 물길을 타고 동쪽으로 내려가게 하려 하자 태위 양표(楊彪)가 말했다, 

“신은 홍농 사람으로 (지리를 잘 아는데) 여기서부터 동쪽으로 가면 36곳의 여울이 있으니 만승(萬乘-천자)께서 가실 만한 곳이 아닙니다.” 

유애(劉艾)가 말했다, 

“신이 전에 섬령(陝令-섬현의 현령)을 지내 그곳의 위험을 압니다. 사(師-군대)가 있어도 뒤집히곤 하는데 하물며 사(師)가 없는 지금이겠습니까. 태위의 모책이 옳습니다.” 

이에 그만두었다. 북쪽으로 물을 건너려 하여 이락(李樂)을 시켜 배를 갖추게 했다. 천자는 걸어서 하수 기슭으로 갔는데 기슭이 높아 내려갈 수 없었다. 동승(董承) 등이 모의하여 말굴레를 서로 잇대어 황제의 허리에 매려 했다. 이때 중궁(中宮)의 복(僕) 복덕(伏德)이(※ [자치통감] 해당부분에서는 복덕을 복황후의 오빠(兄)로 기술) 중궁을 부축하며 한 손에 10필의 비단을 지니고 있으니, 복덕의 비단을 취해 이어붙여 연(輦)을 만들었다. 

행군교위 상홍(尙弘)이 힘이 세었으므로 상홍에 명해 앞에서 황제를 업고 아래로 내려가게 해 배에 오를 수 있었다. 그 나머지 사람들 중 물을 건너지 못한 자가 매우 많자 다시 배를 보내 건너지 못한 자들을 거두었는데, 모두 다투며 배에 매달리자 배 위의 사람이 칼로 내리쳐 손가락을 끊으니 배 안에 (잘린) 손가락들이 양손으로 움겨쥘 만한(掬) 정도에 이르렀다. 
 
양봉, 한섬 등은 마침내 천자를 모셔 안읍(安邑-하동군 안읍현)에 도읍하니 (황제는) 소달구지를 타고 태위 양표(楊彪), 태복 한융(韓融) 등 근신(近臣)으로 수종하는 자는 10여 명이었다. 한섬을 정동장군, 호재를 정서장군, 이락을 정북장군으로 삼으니 양봉, 동승과 함께 지정(持政-집정)했다. 한융을 홍농으로 보내 이각, 곽사 등과 연화(連和-연합,우호)하자 약탈한 궁인(宮人), 공경, 백관들과 승여(乘輿) 거마(車馬) 몇 승을 되돌려보냈다. 이때 황충(蝗蟲-누리)이 일고 날이 가물어 곡식이 없어 수종하던 관원들은 대추와 채소를 먹었다. (주34) 
 
(34) [위서]魏書 – 승여(乘輿)가 이때 가시울타리 안에 거처했는데 문호(門戶)가 닫히지 않았다. 천자가 뭇 신하들과 더불어 모이면 병사들은 울타리 위에 엎드려(기대어) 구경하며 서로 짓누르며 웃어댔다. 제장(諸將)들이 전권(專權-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름)하니 때로는 상서(尙書)를 매질해 죽이기도 했다. 

사례교위가 출입할 때는 백성이나 군사들이 그를 내동댕이쳤다. 제장들이 혹 계집종을 성합(省閤)에 보내거나 혹 스스로 술을 가져 와 먹었는데 천자의 음식보다 나았으며 시중(侍中)이 통하지 못하게 하고 떠들썩하게 외치고 욕했으나 끝내 제지하지 못했다. 또 다투어 표(表)를 올려 여러 영벽(營壁-영루)의 백성들을 부곡(部曲)으로 삼고 그들에게 예유(禮遺-예물)를 내려줄 것을 청했다. 의사(醫師), 주졸(走卒-심부름꾼)들이 모두 교위(校尉)가 되니 어사(御史)가 인장을 새겨 주지 못해 송곳으로 그려 문자를 보이고 혹 때로는 이것조차 얻지 못했다.
 
제장들이 서로 통수되지 못해 위 아래가 어지러워지고 양식이 다했다. 양봉, 한섬, 동승은 이에 천자를 모시고 낙양으로 돌아가려 하여 기관(箕關)을 나와 지도(軹道)로 내려갔다. 장양(張楊)이 식량을 가지고 도로에서 영접하자 대사마(大司馬)로 임명했다. 이 일은 장양전(張楊傳)에 있다. 

천자가 낙양으로 들어오니 궁실은 모두 불타고 가맥(街陌-길거리)은 황무(荒蕪-황폐)하여 백관들은 형극(荊棘-고난)을 겪으며 언덕이나 담장 사이에 의지했다. 주군(州郡)에서는 각기 군사를 끼고 스스로를 지킬 뿐 당도하는 자가 없었다. 기궁(飢窮-굶주림으로 곤궁함)이 점차 심해지자 상서랑(尙書郎) 이하가 몸소 나가 땔나무를 캐고 혹 담벽 사이에서 굶어죽기도 했다. 
 
이에 태조(太祖-조조)가 천자를 영접해 허현에 도읍했다. 한섬(韓暹), 양봉(楊奉)은 왕법(王法)을 받들지 못해 각기 달아나 서주(徐州), 양주(揚州) 사이에서 노략질하다 유비(劉備)에게 죽임을 당하고 (주35) 동승(董承)은 1년 남짓 태조를 따르다 주살되었다. 
 
(35) [영웅기] – 유비는 양봉(楊奉)을 유인해 서로 만난 뒤 그 자리에서 그를 붙잡았다. 한섬(韓暹)은 양봉을 잃고 세력이 외로워지니 이때 달아나 병주로 되돌아가려 하다 서추(杼秋-예주 패국 서추현)의 둔수(屯帥) 장선(張宣)에게 요격되어 죽임을 당했다.
 
건안 2년(197년), 알자복야(謁者僕射) 배무(裴茂)를 보내니 관서(關西)의 제장들을 이끌고 이각을 주살하고 삼족을 멸했다. (주36) 곽사는 그의 장수 오습(五習)에게 습격받아 미(郿)에서 죽었다. 
 
(36) [전략]典略 – 이각의 머리가 도착하자 조령으로 높이 매달았다.
 
장제(張濟)는 굶주리다 남양으로 가서 노략질했는데 양(穰-형주 남양군 양현)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고 종자(從子-조카) 장수(張繡)가 그 무리를 거느렸다. 호재(胡才), 이락(李樂)은 하동(河東)에 머물렀는데, 호재는 원가(怨家-원수)에게 죽임을 당하고 이락은 병으로 죽었다. 한수, 마등은 스스로 양주(涼州)로 돌아가 번갈아가며 서로 침범했고, 그 뒤 마등은 들어와 위위(衛尉)가 되고 아들인 마초(騰超)가 그 부곡을 거느렸다. 
 
건안 16년(211년), 마초가 관중(關中)의 제장들과 한수와 함께 배반하자 태조가 이를 정벌해 격파했다. 이 일은 무제기에 있다. 한수는 금성(金城)으로 달아났다가 그의 장수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마초는 한양(漢陽=천수)을 점거했다. 마등은 좌죄되어 삼족이 멸해졌다. 조구(趙衢)등이 의병(義兵)을 일으켜 마초를 토벌하자 마초는 한중으로 달아나 장로(張魯)를 따랐고, 그 뒤 유비에게로 달아나 촉(蜀)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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