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소(袁紹)의 자는 본초(本初)이며, 여남(汝南)군 여양(汝陽)현 사람이다. 고조부는 원안(袁安)으로 한의 사도(司徒)를 지냈다. 원안 이하로부터 4대가 삼공의 지위에 오르니, 이로 말미암아 그 위세가 천하를 기울였다. 

[주 : 화교(華嶠)의 『한서(漢書)』에 이르길 「원안의 자는 소공(邵公)으로 어려서부터 학문을 해서 위엄있고 중후한 면모가 있었다. (후한) 명제(明帝)때 초군(楚郡)태수가 되어서 초왕의 옥사를 다루었는데, 사리(事理)를 호소하는 자가 4백 여가나 되었으나 모두 보전되어 구제되었고, 원안은 마침내 명신(名臣)이 되었다. 장제(章帝) 때 (관직이) 사도(司徒)에 이르렀고, 나중에 촉군태수를 지내는 원경(袁京)을 낳았다. 원경의 아들이 원탕(袁湯)인데 태위(太尉)를 지냈다. 원탕의 아들은 넷으로, 장자는 원평(袁平)이고 원평의 동생인 원성(袁成)인데 관직은 좌중랑장(左中郞將)을 지냈으나, 모두 일찍 죽었다. 원성의 동생은 원봉(袁逢)이며 원봉의 아우가 원외(袁隗)인데 모두 삼공의 지위에 올랐다.」고 한다.


『위서(魏書)』에 이르길 「원안 이후로 모두 널리 사랑하고 뭇사람들을 받아들여 구별하여 가리는 바가 없었다. 빈객들이 그 집안에 들어가면, 현명하거나 우둔하거나 모두 다 받아 들여지니, 천하가 귀복한 것이다. 원소는 곧 원봉의 서자(庶子)인데, 원소는 원술의 배다른 형으로 (원소가) 출생하고 난 후에 원성이 (원소를) 아들로 삼았다」

『영웅기(英雄記)』에 이르길 「원성의 자는 문개(文開)로 건장하고 부서를 잘 다스려, 귀척대신이나 권세가, 호걸 들과 대장군 양기(梁冀)이하 모두와 좋은 관계를 맺으니, 그의 말을 따르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경사에는 속담이 퍼지길 "일이 풀리지 아니하면, 문개에게 물어봐라" 라고 했다.]

원소는 용모와 자태가 뛰어나고 용모가 위엄있어, 능히 휘하의 선비들을 절도있게 굴복시키니, 많은 선비들이 그에게 귀부하였고, 태조(=위무제 조조)와는 어릴 적부터 교분이 있었다. 대장군연(大將軍掾)으로서 시어사(侍御史)가 되었고 점차 중군교위(中軍校尉)로 승진하였다가 사례(司隷)교위에 이르렀다. 

[주 : 『영웅기』에 이르길 「원소가 태어나자 아버지가 죽었는데, 두 공(公)이 모두 그를 사랑했다. 어려서 랑(郎) 벼슬을 시키니, 약관의 나이에 복양현장(濮陽縣長)에 제수되었는데 청렴하다는 명성이 있었다. 어미의 상을 당하였고, 상복을 벗게 되자 또 돌아가신 부친을 추모해 상복을 입으니, 무릇 6년간이나 움막살이한 것이다. 그 예를 마치자, 낙양에 은거하고 망령되게 빈객들과 통교하지 않으니, 천하가 그 명성을 듣고 서로 만나지 못한 자가 없었다. 또한 유협(遊俠)을 좋아해 장맹탁(張孟卓), 하백구(何佰求), 오자경(吳子卿), 오덕유(伍德瑜) 등과 모두 분주히 오고가는 벗이 되었다. 벼슬하어 오라는 명에 응하지 않았다. 

중상시(中常侍) 조황(趙黃)이 여러 황문(黃門)의 관리들에게 이르길 “원본초는 앉아서 명성을 지어 팔고, 소환에 응하지 않고 죽음을 키우는 선비이니, 이 아이가 뭘 하려는지 모르겠는가?”라 했다. 원소의 숙부 원외가 이를 듣고 원소를 꾸짖기를 “네가 또한 우리집을 망치겠구나!”라 했다. 원소가 이에 대장군의 명령에 일어나 응하였다.」

신 송지가 살피길 「『위서』에 “원소는 원봉의 서자인데 나중에는 백부 원성에게서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말한 바를 이같이 기록하였으나, 원성에게서 태어난 것이 사실에 가깝습니다. 부인(夫人)이 소생을 추모해 상복을 입었다는 것도, 그 예가 문헌에 없는데 하물며 그 후손이 이를 행할 수 있겠습니까? 나머지 2책은 어느 것이 옳은지 상세하지 않습니다」 

영제(靈帝 168~190)가 붕어하자, 태후의 오라비 대장군 하진(何進)과 원소가 은밀히 여러 엄관(閹官=환관)들을 주살할 것을 모의했는데, [주 : 『속한서(續漢書)』에 이르길 「 원소가 빈객 장진(張津)을 시켜 하진을 설득하길 “황문과 상시(常侍)들이 권력을 쥔 지 오래되었고, 또 영락(永樂)태후와 여러 상시들은 재리(財利)를 독점하여 처리하였으니, 장군께서는 의당 천하를 바로잡아 해내(海內)를 위해 우환거리를 제거하십시오”라 했다. 하진이 이 말이 그럴듯하다고 여겨서, 마침내 원소의 모의를 했다」고 한다.] 태후가 따르지 않았다. 이에 동탁(董卓)을 불러 태후를 협박하고자 하였다.

상시와 황문들이 이를 듣고 모두 하진에게 나아가 사죄하며 조치해달라고 했다. 이때 원소가 하진에게 다시 이 일에 결단한 것을 권하고 두 번 세 번이나 촉구했으나, 하진은 허락하지 않았다. 원소에게 영을 내려 낙양의 무관 관리들을 방략(方略)해 여러 환자(宦者)들을 검속하고 맡게 하였다. 또 원소의 동생인 호분중랑장(虎賁中郞將) 원술(袁術)에게 온후(溫厚)한 호분 병사 2백명을 선발해, 궁궐을 담당해 들어가서, 병기를 지니면서 황문과 계단을 수비하는 문호(門戶)들을 대신하도록 하였다. 

중상시 단규(段珪) 등이 태후의 명이라 속여 하진에게 의논하기 위해 들어오라고 하여 마침내 죽이니, 궁중에서 난이 일어났다. [ 주 : 『구주춘추(九州春秋)』에 이르길 「처음 원소가 하진을 설득하길 “황문과 상시들이 누대로 크게 성(盛)하여 그 위엄이 해내를 복속시키고 있어, 이전 두무(竇武)가 이들을 주살하려 했지만, 오히려 해를 입었으니, 다만 앉아서 하는 말이 누설되어 오영(五營)의 군사들이 병력이 되었던 까닭입니다. 오영의 군사들은 경사(京師=수도)에서 태어나 성장하여, 중인(中人=환관)들에 복종하여 두려워하는데, 두씨가 반대로 그들의 예봉을 사용하니 마침내 과연 반도들이 황문에게 귀복하여 이로써 스스로 파멸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장군께서는 천자의 외숙이란 존귀한 자리에 있고, 2부(승상부, 대장군부)에서 굳센 병사들을 거느리고 있으며, 부하들인 장군과 관리들은 모두 영웅이며 명사(名士)로 즐거이 힘을 다해 죽을 자들이니. 이 일은 손바닥에 쥐고 있으면, 하늘이 그 때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지금 천하를 위해 탐욕스럽고 더러운 자들을 주살하여 없앴다면, 그 공훈(功勳)이 드러나니, 명성을 후세에 누리게 되면, 비록 주나라의 신백[申伯=동주(東周)의 성립을 도운 공신]이라 할지라도 어찌 족히 (장군과 비교되어) 말하겠습니까? 지금 대행[大行=죽은 이전 황제(왕)에 대한 칭호]께서 전전(前殿)에 계시니 장군께서 조서(詔書)로써 병사들을 거느려 지킨다면, 입궁하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라 했다. 

하진이 그 말을 받아들였으나, 후에 다시 의심이 생겼다. 원소는 하진은 변란을 바꿀까 두려워하여, 하진을 위협하여 말하길 “지금 (계획해서 모의한 일) 섞어 짜놓은 것은 거의 완성되었고, 그 형세는 이미 노출되었으니, 장군께서 어째서 빨리 결단하지 못하십니까? 일을 미뤄두면 변란이 생기고, 나중에 화가 닥칠 것입니다”라 했다 하진은 끝내 따르지 않았다가, 결국 패망하고 말았다.」고 한다]

원술이 거느린 호분 병사들이 남궁의 가덕전(嘉德殿)과 청쇄문(靑瑣門)에 불지르고, 단규 등을 압박해 나오게 하려 했다. 단규 등은 탈출하지 못하자, 황제[이 불운의 황제를 역사서에선 소제(少帝)라 부르고 이름은 유변(劉辯)입니다]와 황제의 동생 진류왕(陳留王)을 위협해 소평진(小平津)으로 달아났다. 원소는 이미 참수한 환자들을 사례교위 허상(許相)에게 처리하게 하고, 마침내 병사를 거느리고 여러 엄인(閹人=환관)들을 체포하니, 노소를 가지리지 않고 다 죽였다. 혹 수염이 없어 (환관들로) 오인하여 죽이는 일이 있으니, 스스로 형체를 보여주어 나중에 죽음을 면할 지경에 이르렀다. 

환자들 중에는 혹 선행을 행하여 스스로를 보전하였지만 오히려 이러한 일에 이르렀다. 그 마구 죽이는 것이 이와 같았다. 죽은 자가 2천여명이나 되었다. 단규 등을 급히 추격하니 단규 등은 모두 강으로 달아나 죽었다. 황제가 환궁하게 되었다.

동탁이 원소를 부러 황제를 폐위하고 진류왕을 옹립할 것을 모의하였다. 이때 원소의 숙부 원외가 태부(太傅)가 되었는데, 원소가 (모의할 것을) 거짓으로 허락하고, 말하길 “이것은 큰 일이니, 나가서 마땅나서 태부와 의논하십시오”라 했다. 동탁이 말하길 “유씨의 종족은 다시 남겨 둘 순 없소”라 했다. 원소가 불응하여, 칼을 가로 눕히고 길게 읍(揖)한 후 도망갔다. 

[주 : 『헌제춘추(獻帝春秋)』에 이르길 「동탁이 황제를 폐위하고자 하여 원소에게 말하길 “황제는 어리고 어리석어 만세의 주인이 되지 못하오. 진류왕이 오히려 더 나으니 지금 그분을 옹립하고자 하오. 사람에게 작은 지혜나 있으면 큰 의혹과 어리석음이 있는데, 다시 어찌될 것인지 알겠으며, 마땅히 또한 이렇게 해야하는 것이니, 경은 영제(靈帝) 폐하를 보지 못했소? 이것이 사람들에게 분노하여 해독을 끼치게 하는 것임을 생각해 보시오”라 했다.
 

원소가 말하길 “한가(漢家)가 천하의 임금노릇한 지 4백여년인데, 그 은혜는 윤택하여 깊고도 두터워, 억조 백성들이 이를 받들어 온 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황제가 비록 유충(幼沖)하나 선하게 천하를 펼쳐 열지 않은 것이 없는데, 공께서는 어찌 적자를 폐하고 서자를 세워, 뭇사람들이 공의(公議)를 따르지 않을까 두렵습니다”라 했다. 

동탁이 원소에게 말하길 “이 바보같은 아이야(豎子)! 천하의 일을 어찌 결정하지 못하겠는가? 내가 지금 이 일을 하면 누가 감히 따르지 않겠는가? 그대는 이 동탁의 칼이 불리하다고 말하는가?”라 했다. 원소가 말하길 “천하의 건장한 자가 어찌 동공 뿐이겠습니까?”라 하며 패도(佩刀)를 꺼내 가로 눕히며 읍한 후 나갔다.」고 한다.

신 송지가 살피건대, 원소는 이 때 동탁과 틈이 벌어지지 않아서, 동탁이 그와 함께 자문하고 모의한 것입니다. 만약 말하고 논의한 것이 같지 않다면 다시 멸시하여 “바보같은 아이”라 하고, 복수할 마음(推刃之心)이 있었다면 원소가 다시 응답할 때 강하게 굴복시키는 것이 극심하였을 것인데, 동탁이 또 어찌 그를 용인하고 해를 가하지 않았겠는가? 또 원소가 이 같이 말했다면, 나아가서는 진실하고 옳지 않았으며 물러서서는 겸손함을 거슬러 기만하였으고, 세력이 성하여 두각을 나타내려는(競爽) 뜻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哮鬫) 예봉을 부딪쳤으니, 공업(功業)에 뜻을 둔 자라면 이치상 어찌 그렇게 하겠는가! 이 말은 망령됨이 심하다.]

원소가 탈출하고 나서는 마침내 기주(冀州)로 도망갔다. 시중(侍中) 주비(周毖), 성문교위(城門校尉) 오경(伍瓊), 의랑(議郞) 하옹(何顒)은 모두 다 명사로써 동탁이 그들을 신뢰했는데, 은밀히 원소를 위하여 이에 동탁에게 말하길 “무릇 폐립(廢立)은 대사로써 보통 사람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 원소는 대체(大體)에 통달하지 못하고 두려워했기에 도망간 것이지,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지금 그를 급하게 잡아들이면 형세상 필히 변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원씨는 은혜를 4대 동안 베풀어, 그 가문과 인연있는 관리들이 천하에 많으니, 만약 호걸들을 거두어 무리들을 모으며, 영웅들이 이로 인하여 봉기하여, 산동(山東) 지역은 공의 소유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차라리 그를 사면하여 한개 군의 태수로 배수하면, 원소는 죄에서 벗어나게 된 것에 기뻐할 것이니, 반드시 우환거리가 없을 것입니다”라 했다. 동탁이 이 말을 그럴 듯 하게 여겨, 이에 원소를 발해태수로 배수하고, 항향후(邟鄕侯)에 봉했다.

원소가 마침내 발해에서 병사를 일으켜 장차 동탁을 주살하려고 했다. 

원소는 스스로 거기장군(車騎將軍)이라 호칭하며 맹주가 되어 기주목 한복(韓馥)과 함께 유주목(幽州牧) 유우(劉虞)를 세워 황제로 삼고, 사신을 보내 문서를 받들고 유우에게로 가게 하니, 유우는 감히 받지 않았다.

후에 한복의 군대가 안평(安平)에서 공손찬(公孫瓚)에게 패배당하였다. 공손찬이 마침내 병사를 이끌고 기주로 들어가 동탁토벌을 명분으로 삼아, 안에서 한복을 습격하고자 하니 한복이 스스로 불안한 마음을 품었다. [주 : 『영웅기』에 이르길 「봉기(逢紀)가 원소를 설득하길 “장군이 대사를 일으키셔서 사람들이 군자를 지급해주길 바라는데, 한 주를 점거하지 못하면 스스로 보전하지 못합니다”라 했다. 원소가 대답하길 “기주는 병사가 강성한데, 나의 군사들은 굶주리고 곤핍하니, 설득으로 변설하지 못하면 소용할 바가 없다”고 했다. “공손찬에게 서로 편지를 보내어 그를 이끌어내어 남으로 내려 오게 하여서 습격하여 기주를 취하십시오. 공손찬은 반드시 올 것이고 한복은 두려워 할 것입니다. 이때 사신을 보내 이해관계를 유세하고 화복에 관해서 진언한다면 한복은 공손히 양보할 것입니다. 이 틈을 타서 그 지위를 차지 하십시오”라 했다. 원소가 그 말을 따랐더니, 공손찬이 과연 내려 왔다.」고 한다.] 

동탁이 서쪽으로 관(關)으로 들어가자[낙양에서 장안으로 수도를 옮긴 것, 보통 관중지역으로 들어간 것을 '입관(入關)하다'는 성어 비슷하게 씁니다.], 원소는 돌아서 연진(延津)에 주둔하니, 이로 인해 한복은 황망하고 군색해졌다. 

진류(陳留)군 사람 고간(高幹)과 영천(潁川)군 사람 순심(荀諶)을 사신으로 보내 한복을 설득하길 “공손찬이 승세를 타서 남쪽을 향해 내려오고 있고, 여러 군(郡)에서 거기에 호응하고 있는데, 원거기장군은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오고 있으니, 이런 의도는 알 수 없지만 생각건대 장군에게 위협할려는 것입니다”라 했다. 

한복이 말하길 “어찌해야 하오?”라 하니, 순심이 말하길 “공손찬은 연(燕)과 대(代) 지역의 군졸에 기대어 있으니 그 예봉은 당해낼 수 없습니다. 원씨는 한 시대의 영걸(英傑)이니, 필히 장군이 항복하지 않게 할 것입니다. 무릇 기주는 천하의 중요한 자산이니, 만약 두 영웅이 병력을 합치고 성 아래서 교전한다면, 위망(危亡)이 서서 기다릴 것입니다. 무릇 원씨는 장군의 옛 친구요, 또한 동맹을 맺었으니, 당장 장군을 위한 계책으로는 기주를 들어 원씨에게 양보하는 것 만한 것이 없습니다. 원씨가 기주를 얻게 되면, 공손찬은 (원소와) 능히 더불어 싸우지 못하고, 필히 장군을 후덕하게 대우해 줄 것입니다. 기주를 친한 벗에게 맡기면 이로써 장군은 현명하게 양보했다는 명성을 가지게 되고, 자신은 태산(泰山)에서 편안하게 있게 됩니다. 원컨대 장군께선 의심치 마소서!”라 했다. 한복이 본래 겁이 많아 이 때문에 그 계책이 옳다고 여겼다. 

한복의 장사(長史) 경무(耿武), 별가(別駕) 민순(閔純), 치중(治中) 이력(李歷)이 한복에게 간언하길 “기주가 비록 비루한 곳이지만, 갑옷을 두른 군사가 백만이요 곡식은 10년을 지탱할 수 있습니다. 원소는 외로운 빈객이며 군사는 궁색하여, 우리를 쳐다보고 코로 숨쉬는 것이 비유컨대 어린 아이가 팔에 있는 것과 같아, 젖 먹이는 것을 끊으면 바로 굶겨 죽일 수 있습니다. 어찌 이 주를 주시려고 합니까?”라 했다. 

한복이 말하길 “나는 원씨의 옛 관리였고, 또한 재주가 원본초만 못하다. 덕을 헤아려 보고 양보하는 것은 옛사람들이 귀하게 여긴 바이니 제군들만 어찌 병통이 된다고 하는가!”라 했다. 종사(從事) 조부(趙浮), 정환(程奐)이 병사를 항거할 것을 청했으나, 한복은 따르지 않았다. 이에 원소에게 양보하니, 원소가 마침내 기주목을 맡게 되었다.

[주 : 『구주춘추』에 이르길 「한복이 도독종사 조부, 정환을 파견해 강노(强弩)군 만명을 거느리고 하양(河陽)에 진영을 베풀고 주둔하게 하였다. 조부 등은 한복이 기주를 원소에게 주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맹진(孟津)에서부터 동으로 달려 내려왔다. 이 때 원상(袁尙)이 조가(朝歌)의 청수구(淸水口)에 있었는데, 조부 등이 배후에서 오는데 함선이 수백척이고 군수가 만여 명이며, 정연한 병사들이 북을 우리며 밤에 원소의 진영을 지나가니, 원소가 이를 매우 싫어하였다. 

조부 등이 도착하자, 한복에게 말하길 “원본초의 군대는 군량이 없고, 제각기 흩어져 있으며, 비록 장양(張楊), 어부라(於扶羅)의 새로운 귀부병력이 있다고 해도, 잘 등용치 않을 것이니,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저희 종사 등이 청컨대, 직접 병사를 살피시고 막으신다면, 열흘 사이에 적의 병사들은 반드시 흙이 무너지고 기와가 풀어지듯 패할 것입니다. 명장군께서는 다만 성문만 맡고 베게를 높이 베시고 있으면, 무엇을 걱정하고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라 했다. 한복이 이를 따르지 않고 기주목의 지위를 피해, 나와서 조충(朝忠)의 옛 집에서 살았다. 아들 한재(韓齎)를 보내 여양(黎陽) 땅에서 기주목의 인수를 원소에게 주었다」고 한다] 

종사(從事) 저수(沮授, 주; 저(沮)의 음은 저(葅)이다)가 원소에게 설득했다. 

“장군께서는 약관의 나이에 조정에 올라 해내에 이름을 떨쳤습니다. (황제를) 폐립하는 때는 만나서는 충의를 분발하셨습니다. 단기로 탈출해 나오니, 동탁이 두려운 마음을 품었습니다. 하수(河水) 이북을 다스리시니 발해(勃海) 지역이 머리를 조아립니다. 한 군(郡)의 군졸을 떨쳐 기주의 무리들을 모으니, 위엄은 하삭[河朔=하수 이북지역에 대한 범칭]에 떨치고, 명망은 천하에 중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황건적인 교활하게 난을 일으키고, 흑산적[黑山賊=후한 말 진정(眞定)현 사람 장연(張燕)이 이끄는 이끈 반란군. 흑산에서 봉기하였기에 흑산이라 불림. 한 때는 상산, 조군, 중산, 상당, 하내의 여러 군을 휩쓸었지만, 후에 원소에게 패하고 조조에게 항복함. 『위서』 권 8에 『장연전』이 있습니다]이 발호하고 있지만, 온 군대가 동쪽으로 향하니 청주는 가히 평정될 수 있습니다. 

돌아와 흑산을 토벌하고 장연은 가히 멸망시킬 수 있습니다. 회군하여 북으로 머릴 돌리면, 공손찬은 반드시 패망할 것입니다. 그 위세가 융적(戎狄)을 위협하면, 흉노는 반드시 복종할 것입니다. 대하(大河)의 북쪽을 횡행하시고, 사주[四州=기주(冀州), 청주(靑州), 병주(幷州), 유주(幽州)]의 땅을 합치신 다음, 영웅의 재주들을 모으고, 백만의 군대를 끼고 서경[西京=장안]에서 대가[大駕=황제의 어가]를 맞이하시어 낙읍(洛邑)에서 종묘를 회복시키고 천하에 호령하면서 회복되지 않은 곳을 토벌하신다면, 이 것으로 예봉을 다투면 누가 적수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몇 년 하시면, 이 공업은 어렵지 않습니다”라 했다.

원소가 기뻐하여 말하길 “이것이 바로 내 뜻이오”라 했다. 곧, 표를 올려 (저수를) 감군(監軍), 분위장군(奮威將軍)으로 삼았다.


[주 : 『헌제기』에 이르길 「저수는 광평(廣平)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큰 뜻이 있었고, 권략(權略)이 많았다. 주의 별가로 벼슬하여, 무재(茂才)로 천거되었으며, 2개 현의 현령을 역임하였고, 또 한복의 별가(別駕)가 되었는데, (한복이) 표를 올려 기도위(騎都尉)에 배수했다. 원소가 기주를 얻게 되자, 또 그를 불러 들였다.」고 한다.


『영웅기』에 이르길 「바로 이해의 연호는 초평(初平)이고, 원소의 자가 본초(本初)이기에, 스스로 연호의 글자와 화합하니 반드시 화란(禍亂)을 이겨 평정할 수 있다고 여겼다[초평이란 연호를 견강부회식으로 뜻풀이 하자면 “초(初 본초, 즉 원소)가 평정(平)한다”가 됩니다.]」고 한다]

동탁이 집금오(執金吾) 호모반(胡母班)과 장작대장(將作大匠) 오수(吳脩)를 보내 조서를 갖고 가 원소를 회유하게 했으나, 원소는 하내(河內)태수 왕광(王匡)을 시켜 그들을 죽였다.


[주 : 『한말명사록(漢末名士錄)』에 이르길 「호모반의 자는 계피(季皮)이며, 태산군 사람인데, 어려서 산양(山陽)군의 탁상(度尙), 동평(東平)군의 장막(張邈) 등 8명이 아울러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의에 나아가고, 인사(人士)를 떨쳐 다스리니, 세상에서 그들을 팔주(八廚)라 불렀다」고 한다

사승(謝承)의 『속한서(續漢書)』에 이르길 「호모반은 왕광 누이동생의 남편인데, 동탁이 호모반에 조서를 받들고 하내(河內)로 가서, 의병을 풀게 하였다. 왕광이 원소의 뜻을 받아 들여서, 호모반을 잡아 감옥에 가두고. 그를 참수하여 군대에 보이게 하려 했다. 

호모반이 왕광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르길 “자고(自古) 이래로 항복한 지역의 제후가 병사를 일으켜 경사(京師)로 향했던 적은 없습니다. 『유향전(劉向傳)』에 이르길 ‘쥐잡을 때는 그릇을 조심해야 한다(擲鼠忌器)’고 하였으니 그릇(器)조차 조심해야 하는데, 하물며 동탁은 지금 궁궐 내에 있어서 천자의 병풍같은 울타리가 되고 있고, 어린 군주가 궁에 있는데 어찌 토벌할 수 있겠습니까? 저와 태부(太傅) 마공(馬公), 태복(太僕) 조기(趙岐), 소부(少府) 음수(陰脩)가 함께 조명(詔命)을 받았습니다. 관동의 여러 군(郡)이 비록 실로 동탁을 미워하고 있지만, 오히려 왕명을 받들었기에 감히 면목을 손상시켜 욕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족하(足下)만 혼자 저를 옥에 가두어, (저를 죽여) 그 피를 발라 북을 울리려 하니, 이것은 패악무도함이 너무한 것입니다. 저와 동탁이 무슨 친척 관계가 있고, 의리상 어찌 그와 악을 같이 하겠습니까? 족하는 범과 시랑같은 입을 크게 벌려, 긴 독을 토해내었고, 동탁이 천도하는 것에 성내시니, 어찌 이리도 혹독하십니까? 죽음은 한 사람에게 어려운 것이지만, 치욕은 미친 자에게 해를 입는 것입니다. 만약 죽은 자에 영혼이 있다면, 응당 황천(皇天)에 가서 족하를 고소할 것입니다. 무릇 혼인은 화복의 기미요, 지금 그것이 드러났습니다. 주머니에 넣어 한 몸체를 만들고 지금 피떡이 되었습니다. 죽은 사람의 자식 둘은 그대의 조카이니, 이 몸이 죽은 후, 삼가 시체 옆에 오지 않도록 해주십시오.”라 했다. 왕광이 그 글월을 받아보고는 호모반의 두 자식을 품고 울었다. 호모반이 마침내 옥에서 죽었다. 호모반은 일찍이 태산의 부군(府君)과 하백(河伯)을 뵈었는데, 그 일이 『수신기(搜神記)』에 있지만, 말이 많아서 싣지 않는다.」고 했다]

동탁은 원소가 관동을 얻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원소의 종족인 태부(太傅) 원외(袁隗) 등을 모두 다 주살하였다. 이 때에 호협(豪俠)들이 많이 원소에게 귀부했는데, 모두 그를 위해 복수할 것을 생각하였고, 주군에서 기의한 것 중에는 그의 명성을 빌리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한복이 두려운 마음을 품고 원소를 따라 가자 도망치는 것을 택하여, 가서 장막(張邈)에게 의지했다.


[주 : 『영웅기』에 이르길 「원소는 하내의 주한(朱漢)을 도관종사(都官從事)로 삼았다. 주한이 이에 앞서 한복이 예를 차리지 않았다고 하여, 속으로 원한을 품고 있었고, 또 원소의 뜻을 불러 맞이하려고, 마음대로 성곽의 병사를 꺼내 한복의 집을 포위해 지키고, 칼을 뽑아 그 집에 올라갔다. 한복이 누각 위로 달아나니, 한복의 큰 아기를 잡아다 그 양 다리를 잘랐다. 원소가 또한 주한을 세워 잡아다, 그를 죽였다. 한복이 오히려 두려운 마음을 품고 그래서 원소에게 보복하고자 달아날 방법을 찾았던 것이다」고 한다] 

후에 원소가 사신을 장막에게 보내, 토의할 것이 있다하여 장막과 귓속말을 하였다. 한복이 그 자리 위에 있다가, (자신을 해칠) 계획을 짜는 것을 보았다 생각하여, 얼마 안되어 일어나 뒷간에 가서 자살하였다.


[주 : 『영웅기』에 이르길 「공손찬이 청주의 황건적으로 쳐서 크게 격파하고, 돌아와 황종(黃宗)에 주둔하며, 그 군수와 현령을 바꾸니, 기주의 장리(長吏)들 중 그 풍모를 바라보면 호응하지 않는 것이 없어, 성문을 열고 그를 받아들였다. 원소가 직접 공손찬을 정벌하러 가서, 계교(界橋)의 남쪽 20리에서 전투를 벌였다. 공손찬의 보병 3만여 명이 방진(方陳)을 이루었고, 기병이 양 날개가 되어 좌우 각각 5천여 필이었으며, 백마의종(白馬義宗)은 중견(中堅)이 되어서 또 두개의 부대(校)로 나누어서, 좌교는 우측에 쏘고 우교는 좌측에 쏘아대었으며, 깃발과 갑옷이 천지를 빛나게 비추었다.

원소가 국의(麴義)에게 영을 내려 팔백명을 이끌고 선봉에 서고, 강노(强弩)부대 1천명은 양옆에 끼고 뒤를 잇고, 원소 자신은 보병 수만명으로 후위에서 진을 형성했다. 국의는 오래동안 양주(凉州)에 있어서, 강(羌)족의 방식에 대해 잘 익혔기에, 그 병사들은 모두 다 날랜 정예였다. 공손찬이 그 병사가 적은 것을 보고, 바로 기병을 보내 그들을 짓밟고자 했다. 국의의 병사들이 모두 방패 아래 숨고는 움직이지 않다가, 채 수십 보에 이르지 않은 거리까지 이르자 이네 동시에 다함께 일어나, 먼지를 휘날리며 크게 소리치고 곧장 앞으로 돌진하고, 강노가 우레처럼 발사되니 맞은 자는 다 쓰러졌다. 적진에 임하여 공손찬이 맡긴 기주자사 엄강(嚴綱)의 갑병(甲兵)의 목 천여 급을 베었다. 

공손찬 군대가 패배하니, 보병과 기병이 달아나 다시는 진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국의가 추격해 교계까지 이르렀다. 공손찬의 후위 병사들이 돌아와 다리 위에서 싸우니, 국의가 다시 이를 격파하고 마침내 공손찬의 진영에 도착해 그 아문(牙門)을 뽑아 버리니, 진영 중에 남은 무리들이 모두 다시 흩어져 달아났다. 

원소가 후방에 있다가 다리 근처 십수리에 도착하지 않아서, 말에서 내려 안장을 풀어놓고, 공손찬이 이미 패배하는 것을 지켜 보며 방비를 갖추지 않고 있었는데, 오직 휘하의 강노부대 수십 명과 대극(大戟) 병사 수십명만이 따라 왔다. 공손찬의 부하로 흩어졌던 기병 2천 여필이 마침내 도착해 곧바로 원소를 여러 겹으로 포위하니, 화살이 비내리듯 쏟아졌다. 

별가종사(別駕從事) 전풍(田豊)이 원소를 끼고서 퇴각하여 빈 담 속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원소가 투구(兜鍪)를 땅에 벗어두고 말하길 “대장부가 적 앞에 당하여 죽게 되어서 담장 틈으로 들어왔으니, 어찌 살아날 수 있겠소?”라 했다. 강노가 이에 어지러이 발사되니, 많은 이가 죽거나 다쳤다. 공손찬의 기병은 이것이 원소인지 모르고 또한 차츰 물러나 퇴각하였다. 국의의 병사들과 마주쳤으나 이내 흩어져 도망갔다. 

공손찬은 매양 적들과 싸우면서 항상 백마를 타고, 비지 않은 곳이 나타나면 추격해 들어가서 수차례 적을 사로잡고 이기니, 적들이 서로 말하길 “백마는 마땅히 피해야 한다”고 했다. 이에 (백마는) 적들이 기피하는 바가 되어, 백마 수천 필을 골라 기사(騎射)의 병사를 선발해, 호칭을 백마종사라 하였다. 한편으로는 오랑캐(胡夷)에서 건강한 자들은 항상 백마를 탔는데, 공손찬에게는 이런 건장한 기병 수천 기가 있어, 많이들 백마를 탔기에 이렇게 호칭했다고도 한다.

원소가 이제 공손찬을 격파하고 나서, 군사를 이끌고 남으로 박락진(薄落津)에 도착하였을 때, 때마침 빈객들과 여러 장수들이 함께 모였는데, 위군(魏郡)의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흑산적 우독(于毒)과 함께 업성(鄴城)을 함락해 마침내 업성 태수 율성(栗成)을 죽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적은 10여부 나누어져 있고, 그 수가 만여 명인데, 업(鄴)성 중에 모여 있었다. 윗자리에 앉은 여러 빈객들 중 집이 업성에 있는 자들은 모두 걱정하고 두려워해 안색을 잃고, 혹은 일어나 울며 눈물을 흘렸으나, 원소의 용모는 변하지 않고 태연자약하였다. 적들 중 도승(陶升)이란 자는 예전에 (위군) 내황(內黃)현의 작은 관리로써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 혼자만 부하들을 거느리고 성쪽 성을 넘어 들어가, 주(州)로 통하는 문을 닫고 지켜서 다른 도적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고, 수레에 원소의 집안과 여러 의관중 주(州) 내에 있던 것을 싣고, 자신이 직접 지켜서서, 척구(斥口)까지 호송하여 돌아왔다. 

원소가 도착하여 마침내 척구에 주둔하며, 도승을 건의(建義)중랑장으로 삼았다. 이에 군대를 이끌고 조가(朝歌)의 녹장산(鹿場山), 창암곡(蒼巖谷)에 진입하여 우독을 토벌하였는데, 5일동안 포위하며 공격하여 이들을 격파하고, 우독과 장안(=조정)에서 임명한 기주목 호수(壺壽)를 베었다. 마침내 산을 따라 북행(北行)하여, 여러 적들인 좌자장팔(左髭丈八) 등을 공격해 모두 참수했다. 또 유석(劉石), 청우각(靑牛角), 황룡(黃龍), 좌교(左校), 곽대현(郭大賢), 이대목(李大目), 우저근(于氐根) 등을 공격해, 모두 그들의 둔영과 성벽을 도륙하니, 도망쳐 달아난 자들만 벗어날 수 있었고, 참수된 것이 수만급이나 되었다. 원소가 다시 돌아와 업성에 주둔했다.

초평(初平) 4년(193) 천자가 태부(太傅) 마일제(馬日磾)와 태복(太僕) 조기(趙岐)를 시켜 관동의 분쟁(여기서는 원소와 공손찬의 분쟁)을 화해하게 하였다. 조기는 별도로 하북으로 가니, 원소가 1백여리 위에 나와 맞이하고, 절하며 황제의 명을 받았다. 조기가 원소의 진영에 있으면서, 글을 써서 공손찬에게 알렸다. 

공손찬이 사신을 갖추어 파견해 원소에게 글을 보내길 “조태복은 주소(周召=주나라 성왕(成王)을 보좌한 주공(周公) 단(旦)과 소공(召公) 석(奭)을 이른다. 둘다 어린 군주를 보좌한 공을 대표)의 덕으로 명을 받들고 와서, 조정의 은혜를 떨쳐서 화목하게 되기를 보여주어, 환한 것이 구름 개인 뒤에 해를 보는 것 같으니, 어떤 기쁨이 이와 같겠소? 옛날 가복(賈復)과 구순(寇恂) 또한 병사로 다투어 서로 위해를 가하고자 했으나, 광무제의 관용을 만나 친히 함께 폐하를 뵙고 수레에 함께 다러서 나오니, 당시 사람들이 이를 영광으로 여겼소. 스스로 살피컨대 변경의 비루한 자로 장군과 함께 이 복을 같이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것은 진실로 장군이 돌보심이요, 이 공손찬에게는 다행이오”라고 했다. 국의는 후에 공(功)을 믿고 방자하고 교만하니, 원소가 그를 죽였다.」고 한다]

처음, 천자가 제위에 오른 것은 원소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하동(河東)에 있게 되자, 원소가 영천(潁川)의 곽도(郭圖)를 사신으로 파견했다. 곽도가 돌아와 원소에게 천자를 영접해 업에 도읍하자고 설득했지만, 원소가 따르지 않았다.


[주 : 『헌제전(獻帝傳)』에 이르길 「저수(沮授)가 원소를 설득하길


“장군께서 여러 세대 동안 (황제를) 보필하시었고, 세상을 충의로써 구제하였습니다. 지금 조정이 멀리 떨어져 있고, 종묘는 훼손되어 무너졌으며, 여러 주군 외부의 의병에 의탁하고 있는데, 안으로는 서로 멸할 것을 도모하고 있으니, 군주를 보존하고 백성을 구휼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지금 주의 성들이 조잡하나마 평정되어 가고 있으니, 황제의 대가(大駕)를 펼쳐 영접해 업도에 궁을 안치시키면, 천자를 끼고 제후들에게 호령하고, 군사와 말을 길러 조정에 불복하는 자들을 토벌하니, 누가 이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라 했다. 원소가 기뻐하며 장차 이를 따르고자 했다.

곽도와 순우경(淳于瓊)이 말하길


“한왕실이 무너져 간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이를 흥하게 하려 하지만,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또 지금 영웅들이 여러 주군들에 웅거하여 점유하고 있는데, 소위 진(秦)이 그 사슴을 잃었으니, 먼저 얻는 자가 왕이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천자를 영접해 우리와 가까운 곳에 하면, 움직일 때마다 번번히 표를 올려 보고해야 하고, 이를 따르자면 권력이 가벼워지고 이를 어기면 명을 거역하는 것이 되니,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라 했다. 

저수가 말하길


“지금 조정을 영접하는 것은 지극히 의로운 것이며, 또한 시의에 맞는 대계(大計)이니, 만약 빨리 도모하지 않으면 반드시 먼저 차지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무릇 권력은 그 기회를 잃지 않고, 공업은 빨리 승리하는데 있으니, 장군께서는 이를 도모하십시오!”


라 했으나, 원소는 그의 말을 쓸 수 없었다. 

(배송지) 이 책(『삼국지 원소전』)을 살펴보니, 저수의 계책으로 되어 있으니, 본전(『헌제전』)과 어긋난다.」고 한다.]

태조(=조조)가 천자를 영접해 허(許)현에 도읍하고 하남(河南)의 땅을 거두어 들이자, 관중(關中) 지역이 모두 귀부했다. 원소가 후회하며, 태조에게 천자를 옮겨 견성(鄄城)에 도읍하여 자기와 가깝게 하고자 하였으나, 태조가 이를 거절하였다. 천자가 원소를 태위(太尉)로 삼았다가 대장군(大將軍)으로 바꾸고 업후(鄴侯)에 봉하였다.


[주 : 『헌제춘추(獻帝春秋)』에 이르길 「원소는 자신의 반열이 태조 아래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화내며 말하길 “조조는 여러번 죽을 뻔 했는데, 내가 번번이 그를 구해주었다. 지금 은혜를 배신하고서는 천자를 끼고 나에게 호령하는구나!”라 했다. 태조가 이를 듣고 대장군의 직위를 원소에게 양보했다」고 한다.]

원소가 후작을 사양하며 받지 않았고, 얼마 후 역경(易京)에서 공손찬을 격파하고, 그의 병사들을 거두어 들였다.


[주 : 『전략(典略)』에 이르길 「이로부터 원소가 공물을 바치는 것이 드물고 교만해졌고, 사사로이 주부(主簿) 경포(耿苞)를 시켜 은밀히 고하길 “붉은 덕(赤德)은 쇠잔하여 다하였고, 원(袁)은 황윤(黃胤)이 되니, 마땅히 하늘의 뜻에 순응하십시오(일종의 참위설인데, 적덕은 한나라를 말합니다)”라 했다. 원소가 경포가 은밀히 고한 일을 군부(軍府)의 장수와 관리들에게 보여주었다. 의론하던 자들이 모두 경포가 요사스럽고 망령되엇으니, 마땅히 주살해야 한다고 하니, 원소가 이에 경포를 죽여 스스로 해명하였다.」고 한다.

『구주춘추(九州春秋)』에 이르길 「원소가 북해(北海)군의 정현(鄭玄)을 끌어다 불러 놓고는 예로 대우하지 않으니, 조융(趙融)이 이를 듣고 말하길 “현인(賢人)은 군자가 바라는 자입니다. 현인을 예우하지 않으면, 이것은 군자의 바램을 그르치는 것입니다. 무릇 귀하께서 하실 일은 감히 만백성의 환심을 잃지 않는 것인데, 하물며 군자에게서는 이겠습니까? 군자의 바램을 잃으면, 이런 일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습니다.”라 했다.」고 한다.

『영웅기』에는 태조가 지은 『동탁가(董卓歌)』가 실려 있는데, 그 가사에 「덕행(德行)이 어그러져 빠져있지 않으나, 변고(變故)가 어려움에서 비롯되는 것은 늘 그런 법. 정강성(鄭康成=정현의 자(字)가 강성입니다. 북해군 출신으로 후한말의 대학자입니다. 『후한서』 권 35에 정현의 열전이 있습니다. 후한서에 의하면, 관도에서 조조와 원소가 대치하고 있을 때 원소가 원담을 보내, 정현을 강권하여 종군하게 해서 부득이하게 군중으로 오게 되었으나, 오던 도중에 죽었다고 합니다)이 술을 돌리더니 땅에 쓰러져 기절하고, 곽경도(郭景圖)는 원상(園桑)에서 명이 다했다」고 한다. 이 같은 글에서 보면, 정현은 병없이 죽었다. 나머지 책들을 보지 못했기에, 여기에 실어 기록해둔다.]

장자(長子) 원담(袁譚)을 보내 청주를 맡게 하였는데, 저수(沮授)가 간언하길 “이것을 필히 재앙의 시초가 될 것입니다”라 했다. 원소가 듣지 않고 말하길 “내가 여러 아이들을 시켜 각각 1주에 웅거하게 하고자 한다”라 했다.


[주 : 『구주춘추』에 실린 저수가 간언한 것은 다음과 같다.


“세상에서 한 마리 토끼가 길거리를 뛰어가면 온 사람들이 뒤쫓는데, 한 사람이 이를 잡으면 탐하던 자들이 모두 그쳐서, 나눠 정해지게 되는 까닭이라 칭합니다. 또 나이가 같으면 현명한 자로, 덕이 같으면 점을 쳐서 맡기는 것이 옛날의 제도입니다. 원컨대 위로는 선대(先代)의 성패(成敗)에 대한 경계를 생각하시고, 아래로는 토끼를 쫓다가 나눠 정하게 되는 뜻을 생각하십시오”


라 했다. 원소가 말하길


“내가 네 아이에게 각각 한 주를 맡아 그 능력을 살펴보고자 하오”


라 했다. 저수가 나오면서 말하길


“화(禍)가 여기에서 시작되겠구나!”


라 했다.

원담이 처음 청주에 도착하여 도독(都督)이 되었지만 아직 자사(刺史)는 되지 못하였는데, 후에 태조가 그를 자사로 배수하였다. 그 땅은 하수 이서로부터 시작하여, 대개 평원(平原)군을 지나지 않고 끝났다. 

끝내는 북으로 전해(田楷)를 없애고, 동으로 공융(孔融)을 공격하니, 병력이 바닷가까지 빛을 발하였는데, 이때 백성들은 주인이 없어 흔연히 그를 추대하였다. 그러나 신용하는 것이 대범치 못하여, 가까운 자의 말을 좋아하여 받아들이고, 뜻이 방자하고 음란 사치하여, 농사일(稼穡)의 어려움을 몰랐다. 

화언(華彦), 공순(孔順) 등은 모두 간사하고 아첨하는 소인배요, 왕수(王脩) 등은 관직을 갖춰놓는데 그칠 뿐이었다. 그러나 능히 빈객들을 접대하고, 명사들을 숭모하고 공경하였다. 처남을 시켜 병사를 거느리고 내부에 있게 하였는데, 좀도둑들에 대해 영이 내려 오자 시정(市井)의 밖에서서는 전야(田野)를 노략질했다. 따로 두 장수를 시켜 병사를 휘하 현들에서 모집하게 하였는데, 뇌물을 주는 자가 있으면 면해주고 뇌물이 없으면 끌려가니, 빈약(貧弱)한 자들이 많았고, 이에 쥐처럼 숨어있는 언덕과 들판 중에 이르자 병사를 풀어 체포하고 색출하는데, 마친 조수(鳥獸)를 사냥하는 것 같았다. 읍(邑)에 1만호가 있는 곳이어도, 호적에 오른 것은 수백도 차지 않았고, 부세를 거두어 내는 것은 삼분의 일도 되지 않았다. 현사(賢士)들을 초빙하였지만, 가지 않았다. 군대의 기일에 달려 가지 않아도, 그 족당(族黨)은 편안히 살며 또한 죄줄 수 없었다」고 한다.] 

또 가운데 아들 원희(袁熙)에겐 유주(幽州), 사위 고간(高幹)에겐 병주(幷州) 자사로 삼았다. 그의 병사는 수십만이고, 심배(審配), 봉기(逢紀)에게 군사를 통괄하게 하고, 전풍, 순담(荀譚), 허유(許攸)를 모주(謀主)를 삼고, 안량(顔良)과 문추(文醜)에겐 군사를 거느리게 하고, 정예군사 10만과 기병 1만 필을 선별해, 장차 허도를 공격하려 했다. 

[주 : 『세어(世語)』에 이르길 「원소의 보병은 5만이고, 기병은 8천명이었다」고 한다.

손성(孫成)이 평하여 말하길 「위무제가 최염(崔琰)에게 할 말을 살펴보니 “어제 귀주(貴州)의 호적을 살펴보았는데, 가히 30만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고 한다.

이로써 추론해 보건대, 단지 기주의 뛰어난 병사들도 이와 같을 뿐인데, 하물며 유주, 병주 및 청주를 겸해서랴? 원소가 크게 군대를 일으키니, 반드시 군사를 다하여 일으켰을 것이니, 10만에 근사했을 것이다.

『헌제전』에 이르길 「원소가 장차 군대를 남쪽으로 보내려 하니, 저수와 전풍이 간언하길


“군대가 출병한지 여러 해를 지나, 백성들은 피폐하고 창고에는 저축해 둔 바가 없는데, 부역(賦役)은 한창 많으니, 이것은 나라의 심대한 우환입니다. 마땅히 먼저 사신을 보내 천자에게 승첩(勝捷)의 사실을 보고하고, 농사에 힘쓰고 백성들을 편안케 하십시오. 만약 이것이 통하지 않는다면, 조씨에게 우리의 왕로(王路)와 멀어져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그런 연후에 진격해 여양(黎陽)에 주둔하여 차츰 하남(河南)에 군영을 짓고, 선박을 더 제작하며 군수물자를 수리하고 나서, 정예기병을 나눠 파견해 (허도의) 주변 지역을 초략하여, 저들이 편안치 못하게 하면 우리는 저들의 달아난 병사들을 취하게 됩니다. 그러면 3년 안에 이 일은 가히 앉아서 평정될 것입니다”


라 했다. 심배(審配)와 곽도(郭圖)가 말하길


“병서에 적힌 병법에는 열배면 포위하고 다섯배면 공격하여 적과 능히 싸울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명공(明公)의 신무(神武)함은 하삭의 강역을 차지하고서 조씨를 정벌하고 있습니다. 비유컨대 이는 손바닥 뒤집는 것과 같아, 지금 때에 맞춰 취하지 않으면, 훗날 도모하기 어렵습니다”


라 했다. 저수가 말하길


“무릇 난을 구제하고 폭악한 자를 주살하는 것을 의병(義兵)이라 부릅니다. 강성함을 믿고 방자한 것을 교병(驕兵)이라 합니다. 군대가 의로우면 적이 없고, 교만한 자는 먼저 멸망합니다. 조씨가 천자를 영접해 허도에 궁은 안치시켰는데, 지금 병사를 일으켜 남쪽으로 향하는 것은 의로움에서 있어 위배되는 것입니다. 또한 조정에 대한 승리(廟勝)의 계책은 강약에 있지 않습니다. 조씨의 법령이 이미 행해지고 있고, 군사들은 정예고 단련되었으며, 공손찬처럼 앉아서 포위당할 자가 아닙니다. 지금 만안(萬安)의 방법을 버리고 명분없는 군대를 일으키니, 저윽이 공을 위해서 두렵습니다”


라 했다. 곽도 등이 말하길


“무왕(武王)은 주(紂)를 정벌했으나, 불의(不義)하다고 말하지 않는데, 하물며 병력이 조씨에게 가해지는데 명분이 없겠습니까! 또한 공의 군대의 무신들은 있는 힘을 다하고 장수와 병사들은 분노하고 있으니, 사람들은 스스로 다한다고 생각하는데, 때가 되었는데 일찍 대업을 평정하지 않으면 그르치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무릇 하늘이 주는데 취하지 않으면, 도리어 그 허물을 받게 되니, 이것이 바로 월나라가 패권을 차지하고 오나라가 망한 까닭입니다. 감군(監軍:저수)의 계책은 그 계책이 편안함을 지니는데 있어, 때를 보고 기회의 변화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라 했다. 원소가 이 말을 따랐다. 곽도 등이 이로 인해 저수를 참소하길


“(감군의 직책은) 내외를 감독 통할하고, 위세는 삼군에 떨치는데, 만약 그같이 침잠하고 성한다면 어찌 제어하겠습니까? 무릇 신하가 군주와 같지 않으면 창성하고, 군주가 신하와 일치하지 못하면 망하니, 이것은 황석(黃石=장자방 장량의 스승. 병법서 『삼략(三略)』의 저자로 알려진 인물)이 기피한 바입니다. 또한 밖에서 군사를 제어한다 해도 내부를 아는 데는 마땅치 않습니다”


라 했다. 원소가 그를 의심했다. 이에 감군을 나눠 삼도독으로 삼고, 저수 및 곽도와 순우경에게 각각 1군을 맡도록 하고, 마침내 합쳐서 남으로 향했다」고 한다.]

이에 앞서 태조는 유비(劉備)를 시켜 서주로 가서 원술(袁術)을 막게 하였다. 원술이 죽자, 유비는 서주자사 차주(車冑)를 죽이고, 군대를 이끌고 소패(小沛)에 주둔했다. 원소가 기병을 보내 그를 돕게 했다. 태조가 유대(劉岱), 왕충(王忠)을 보내 이를 공격하게 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건안(建安) 5년(201) 태조가 동으로 유비를 정벌했다. 전풍이 원소에게 태조의 배후를 습격하라고 설득했으나, 원소의 자식의 병 때문에 사양하고 허락지 않으니, 전풍이 지팡이를 들어 땅을 치며 말하길


“무릇 만나기 힘든 기회를 만났는데, 어린 자식의 병 때문에 그 기회를 그르치다니, 애석하도다!”


라 했다. 태조가 이르러 유비를 격파하니, 유비는 원소에게로 달아났다. 


위씨춘추(魏氏春秋)에 실린 격주군문(檄州郡文): [[격주군문]]으로 분할

원소가 여양(黎陽)으로 진군하여셔 안량(顔良)을 보내 백마(白馬)에서 유연(劉延)을 공격하게 했다. 저수가 또 간언하길


“안량의 성품이 급하고 좁아, 비록 용맹하다 하더라도 혼자 맡길 수 없습니다”


라 했으나, 원소가 듣지 않았다.

태조가 유연을 구원하고, 안량과 싸워 안량의 군대를 격파하고 그를 참수했다.


주 : 《헌제전》; 원소가 출발에 임박하였을 때, 저수가 그의 종족을 모아놓고 그의 재산을 나눠 주면서 말했다. 


埶存則威無不加,埶亡則不保一身。哀哉! 번역이 여러 의견이 있어 그 중 두 가지를 올립니다.

"무릇 세력이 존속한다면 위세가 가해지지 않는데가 없고 세력이 멸망하면 한 몸조차 보존할수 없으니 슬프구나 !"
“무릇 (우리) 세력이 남아있더라도 (내) 위엄은 없어져서 더해질 것도 없고, 세력이 사라지면 몸 하나도 보존하지 못하니, 슬프도다!”


라 했다. 그의 일족의 자제들이 말하길


“조공의 군사와 말은 상대가 되지 않는데, 어째서 걱정하십니까?”


라 했다. 저수가 말하길


“조 연주(曹 兗州=조조, 조조가 연주자사를 맡은 일 때문에 이렇게 부름, 유비를 유예주라 부르는 것과 같음)의 빼어난 재략에다 또 천자를 끼고 있는 것을 자산으로 삼고 있으니, 우리가 비록 공손찬을 이겼다 해도 군사들은 실지로 피폐한데, 장수와 주군은 교만하니, 군대는 격파되어 패배하는 운세가 이번 출병에 있을 것이다. 양웅(揚雄)이 ‘육국(六國=전국 칠웅 중에서 진(秦)을 제외한 여섯 나라)이 어리석은 것이(蚩蚩), 영(嬴=진(秦)나라의 왕실의 성, 곧 진나라)을 위하고 희(姬)성의 주나라를 약하게 하였다’고 한 것은 지금의 일을 이른 것이다”


고 하였다.

원소가 하수를 건너니 연진(延津)의 남쪽에 진영을 쌓고 유비와 문추(文醜)를 시켜 도전하게 했다. 태조가 이들을 격파하고 문추를 참수했으면, 다시 싸워서 원소군의 대장을 사로잡았다. 원소군이 크게 놀랬다.


주 : 『헌제전』에 이르길 「원소가 장차 하수를 건너려 할 때 저수가 간언하길


“승부의 변화에 상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은 의당 연진에 머물러 주둔하여 병사를 관도(官渡)로 나눠 보내어, 만약 이겨 사로잡으면 돌아와 환영해도 늦지 않으며, 난관이 될 만한 것을 만들어 놓으면 군사들은 돌아올 수 없게 됩니다”


라 했으나 원소가 따르지 않았다. 저수가 건널 때에 임하여 탄식하길


“위로는 뜻만 가득차 있고 아래로는 공을 세우기에 힘쓰는 구나. 유유(悠悠)히 흐르는 황하여, 나는 돌아오지 못하리라”


라 했다. 이에 병으로 사직하였다. 원소가 그를 원망하여, 이에 그에 속한 병사를 줄여 곽도에게 속하게 하였다.

태조가 관도로 돌아왔다. 저수가 또 말하길


“북쪽엔 병사의 수효가 많아서 과단성있고 날랜 것은 남쪽에 미치지 못하고, 남쪽에 양곡이 비고 적어서 재화로는 북쪽에 미치지 못합니다. 남쪽의 이로움은 급히 결전하는데 있고, 북쪽의 이로움은 천천히 취하는 것에 있습니다 마땅히 천천히 지구전을 펼쳐 날로 달로 시간을 소비하십시오”


라 했으나 원소가 따르지 않았다. 연이은 군영이 점차 진전하여 관도에까지 닥쳐왔다가 합전(合戰)하게 되니, 태조군이 불리하였으나, 군영을 회복하였다.

원소가 높은 망루(高櫓)를 만들고 토산(土山)을 일으켜, (조조군의) 진영 속으로 활을 쏘니 진영에서는 모두 방패로 덮고서는 다들 크게 두려워했다. 태조가 이에 발석거(發石車)를 만들어 원소의 누각을 공격하니 모두 격파되고, 원소군에서는 이를 벽력거(霹靂車)라 불렀다.


주 : 『위씨춘추(魏氏春秋)』에 이르길 「옛날에도 화살과 돌이 있었고 또 전(傳)에 이르길 “괴(旝=돌쇠니)가 작동하면 북을 친다”고 하였는데 『설문』에 이르길 “괴는 돌을 쏘는(發石) 것이다”라 하였으니, 이에 발석거를 만든 것이다.

원소가 땅굴(地道)를 만들어 태조의 진영을 습격하여 했다. 태조가 번번이 안쪽에서 긴 참호를 만들어 막아내고, 또 정예병을 보내 원소군의 운반수레를 습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거기에 실린 양곡을 다 불살라 버렸다. 태조가 원소와 서로 대치한지 시일이 오래되어, 백성들을 피폐하고 곤핍하니, 많은 이가 반역하여 원소에게 호응하였고 군량도 모자랐다. 


원소가 순우경 등에게 병사 1만 여명을 거느리고 북으로 (군량) 운반수레를 맞이하게 하였는데, 저수가 원소를 설득하길


“장기(蔣奇)를 따로 파견해 바깥에서 원호하는 지군(支軍)으로 삼으면, 조공이 노략질하는 것을 끊으실 수 있습니다”


라 했다. 원소가 다시 따르지 않았다. 순우경이 오소(烏巢)에 숙영했는데, 원소군과 거리가 40리 떨어져 있었다. 태조가 이에 조홍(曹洪)을 남겨 수비토록 하고, 자신은 보기(步騎) 5천을 거느리고 야음을 타 몰래 와서 순우경을 공격하였다. 원소가 기병을 보내 구원토록 하였지만, 패주하였다. 순우경 등을 격파하여 모두 다 참수하였다. 태조가 돌아오는데 진영에 이르지 않아서, 원소의 장수 고람(高覽)․장합(張郃) 등이 휘하 군대를 거느리고 항복하였다. 원소군이 크게 궤멸하니, 원소와 원담이 단기(單騎)로 퇴각하여 하수를 건넜다. 나머지 군사들은 거짓 항복하였다가, 모두 다 파묻혔다.


[주 : 장번(張璠)의 『한기(漢紀)』에 이르길 「원소의 군졸 약 8만명을 죽였다」고 한다]

저수가 원소가 강을 건너는 것에 따라가지 못하고, 사람들 손에 잡혀서 태조에게 보내지니,


주 : 『헌제전』에 이르길 「저수가 크게 소리치길


“이 저수가 항복한 것이 아니요 군대에 사로잡혔을 뿐이다”


라 했다. 태조와 그는 옛 인연이 있어서, 도리어 저수에게 말하길


“세력 범위가 달랐고, 마침내 기용하는 것이 무너지고 끊겼으니, 오늘을 도모하지 않으면, 이에 서로 잡힐 것이오”


라 했다. 저수가 대답하길


“기주는 실책을 범하여서 북으로 달아나게 되었소. 이 저수는 힘과 지혜과 모두 모자랐으니, 당연히 잡히게 된 것 뿐이오”


라 했다. 태조가 말하길


“본초는 모략이 없어 그대의 계책을 써주지 않았던 것이고, 지금 난을 만나게 기율을 넘어서게 되어 나라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으니, 당연히 서로 더불어 도모해야 하오”


라 했다. 저수가 말하길


“(나의) 숙부와 어머니, 동생들이 원씨에게 명을 걸고 있으니, 만약 공의 영험함을 입게 된다면 속히 죽여주는 것이 복이 될 것이오”


라 했다. 태조가 탄식하며 말하길


“내가 일찍 (저수를) 얻었더라면 천하는 족히 심려치 않았을 것이다”


라 했다.


태조가 그를 후하게 대우하였다. 후에 원씨에게 돌아갈 것을 모의하다 죽임을 당했다.

처음 원소가 남으로 향할 때, 전풍(田豊)이 원소를 설득하길 “조공은 용병을 잘하며 변화가 끝이 없지만, 군사가 비록 적다 하나 가벼이 여겨서는 안되며, 지구전으로 대적하는 것이 좋습니다. 장군께서는 산하(山河=태산과 황하)의 험고함에 웅거하여, 4주의 병사를 가지고 있으니, 밖으로는 영웅들과 결탁하고 안으로는 농사와 군사에 힘쓴 연후에 정예병을 추리고, 이들을 나누어 기병(奇兵)으로 만들어, 빈곳을 틈타 교대로 나와 하남(河南)지역을 어지럽히고, 우측을 구원하면 좌측을 치고 좌측을 구원하면 우측을 쳐서, 적들이 군명을 쫓아다님에 피로하게 하고 백성들은 생업을 편안히 하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우리는 힘들이지 않고 저들은 이미 지치게 되었으니, 2년도 못되어 앉아서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종묘를 위한 승리의 계책을 내놓았는데도, 한번의 싸움에 성패(成敗)를 결정짓고자 하시니, 만약 뜻대로 되지 않으면 후회해도 늦습니다”라 했다. 원소가 따르지 않았다. 전풍이 간절히 간언했으나, 원소는 매우 노하여 무리들의 기세를 꺾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를 형틀에 묶었다.

원소군이 패배하고 나자 어떤 이가 전풍에게 말하길 “그대는 반드시 중하게 되실 것입니다”라 했다. 전풍이 말하길 “만약 우리 군이 유리했다면 나는 보전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 군대가 패하였으니 나는 죽을 것이다”라 했다. 원소가 돌아와서 주윗사람들에게 말하길 “내가 전풍의 말을 듣지 않았더니, 과연 웃음거리가 되었다”하고 마침내 그를 죽였다.


[주 : 『선현행장(先賢行狀)』에 이르길 「전풍의 자는 원호(元皓)이고, 거록(鉅鹿)현 사람인데, 혹자는 발해군 사람이라 한다. 전풍은 타고난 자질이 웅걸하고, 권략(權略)에 기이한 게 많았다. 어려서 부모의 상을 당하여 상을 치르는데 애닲음을 다하니, 해와 달이 가도 웃지 않았다. 널리 보고 많은 것은 알아 그 명성이 그 고을에 자자했다. 처음 태위부(太尉府)에 불려 갔다가 무재(茂才)로 천거되어, 시어사(侍御史)로 옮겨갔다. 환관들이 조정에 가득하여 영현(英賢)들이 해를 입자, 전풍이 이에 관직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원소가 기의(起義)하자, 겸손한 말과 후한 예물로 전풍을 초빙했는데, 전풍은 왕실에 어려움이 많고 자신의 뜻이 바로잡아 구제하는데(匡救)에 있어서, 이에 원소의 명에 호응하니, (그를) 별가(別駕)로 삼았다. 원소에게 천자를 영접하라고 권하였지만, 원소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원소가 후에 전풍의 모책을 이용하여 공손찬을 평정했다. 

봉기(逢紀)는 전풍의 명석하고 강직함을 꺼려하여, 수차례 원소에게 그를 참소하니, 원소가 그를 마침내 기피하게 되었다. 원소군이 패배하자, 흙이 무너지듯 북으로 달아나고 군사들은 거의 없어졌는데, 군중에서 모두 가슴을 치며 울면서 말하길 “지난번에 전풍이 여기 있었더라면, 여기까지 이르지는 않았다”고 했다.

원소가 봉기에게 말하길 “기주의 사람들이 우리 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응당 나를 염두에 두고 있으며, 오직 전별가만이 이전에 나에게 그만두라고 간언하여 여느 사람들과 같지 않았으니, 내가 또한 그를 보기 부끄럽다”고 했다. 
봉기가 다시 말하길 “전풍이 장군의 퇴각을 듣고 손을 치고 크게 웃었으니, 그의 말이 적중한 것을 기뻐했습니다”라 했다. 원소가 이에 전풍을 해치려는 뜻이 있게 되었다.

처음 태조가 전풍이 종군하지 않는다는 것을 듣고는 기뻐하며 말하길 “원소가 반드시 패할 것이다”라 했다. 원소가 달아나게 되자 다시 말하길 “지난번 원소가 전별가의 계책을 썼었더라면, 아직도 어찌되었을지 모를 것이다”라 했다.」 

손성(孫盛)이 말하길 「전풍과 저수가 간언한 것을 보니, 비록 장량과 진평이라도 이보다 나을 것인가? 그래서 군주는 귀히 (신하의) 재주를 살피고, 신하는 군주를 살펴야 한다; 군주가 충량(忠良)한 자를 등용하면 곧 패왕의 왕업이 융성할 것이고, 신하가 어두운 임금을 받들면, 엎어져 망하는 화가 이르른다. 존망(存亡)과 영욕(榮辱)이 늘 반드시 여기에서 비롯된다. 전풍은 원소가 장차 패할 것을 알았고, 패하면 자기가 반드시 죽는데도, 호랑이 입에 들어가는 것은 감내하면서도 충성된 모범을 다했으니, 열사(烈士)가 행하는 바이요 자기를 보전하러 생각지 않는다.

무릇 제후의 신하는 의에 따라 거취(去就)가 있어야 하는데, 하물며 전풍은 원소에게 순수한 신하가 아니질 않는가! 시경에 이르길 “장차 너를 버리고 떠나, 저 낙원을 나는 가련다(逝將去汝,適彼樂土)”고 한 것은, 어지러운 나라를 떠나 도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말 한 것이다.」]

기주의 성읍이 많이 배반하였으나, 원소가 다시 공격하여 평정시켰다. 군대가 패배한 이후로 병이 나서, (건안) 7년(203)에 걱정하다 죽었다.

이하 [[원담, 원상전]]으로 분할

<<진수의 평>>

원소와 유표는 모두 위엄과 무용이 있었고, 넓은 도량과 식견이 있었기에 그 당시 이름을 떨쳤다. 

유표는 한강 남쪽을 지배하고, 원소는 황하 북쪽에 세력을 구축하였으나, 그들은 모두 겉으로는 관대했지만 속으로는 질시하고, 모략을 좋아하였으며, 결단력이 없고, 인재가 있어도 등용하지 않고, 좋은 말을 듣고도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적자를 내쫓고 서자를 세우고, 예의를 버리고 편애를 숭상했으므로, 후계자의 시대에 이르러서 고통을 당하고 사직이 엎어졌어도 결코 불행한 것이 아니다. 

초나라 항우는 범증(范增)의 계략을 듣지 않아 왕업을 잃었는데, 원소가 전풍을 죽인 것은 항우의 실책보다 더한 것이다.


분류 :
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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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13.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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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22
16:43:42
(*.104.141.18)
주석 수정! 별 거 한 것 없고 진림 것만 따로 뺐습니다.

코렐솔라

2013.10.17
20:28:31
(*.166.245.166)
헌제기 저수의 말의 경우 구다라님의 번역으로 대체합니다.

http://rexhistoria.net/community_three/65240#comment_65276

코렐솔라

2013.10.22
13:35:04
(*.104.28.52)
저수의 발언의 경우 윗 부분은 한어대사전출판사에서 출간한 후한서전역의 해당부분에 관한 번역과 악록서사에서 출간한 후한서금주금역에 의거하여 한 dragonrz님의 번역이고 http://rexhistoria.net/65407 아래 것은 구다라님의 번역입니다. http://rexhistoria.net/65810 참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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