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술의 자를 공로(公路)라고 하며, 사공 원봉(袁逢)의 아들로서 원소의 사촌 동생이며, 의협의 기질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효렴으로 추천되어 낭중에 임명되었으며,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역임했고, 후에 절충(折衝)교위와 호분중랑장이 되었다. 동탁이 황제를 내쫓으려고 할 때, 원술을 후장군으로 임명했지만, 원술은 동탁의 위해(危害)를 두려워 하며 남양으로 도망갔다. 

마침 이때 장수태수 손견이 남양태수 장자(張咨)를 죽이자, 원술은 장자의 남양군을 점거했다. 남양의 호구수는 수백만 명이었지만, 원술은 사치스러웠고, 음란했으며, 욕망대로 행동해, 세금을 징수함에 있어서도 제한을 두지 않았으므로 백성들은 그것을 고통스러워했다. 원술은 원소와 소원해진 후, 형주자사 유표와 화해하지 못하여 북방의 공손찬과 연합했고, 원소는 공손찬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남방의 유표와 연합했다. 그들 형제는 서로 사이가 나빴으므로 이처럼 가까운 사람을 버리고 먼 곳에 있는 사람과 교제를 했던 것이다. 

[주 : 『오서(吳書)』에 이르길 「당시 의론하던 자들은 영제(靈帝)가 도를 잃어서 천하가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고, 소제(少帝)는 유약한데 적신(賊臣=동탁)에 의해 세워졌다고 여겼지만, 또한 모후의 출신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유주(幽州) 목(牧) 유우(劉虞)에겐 오랫동안 덕망이 있었기에, 원소 등은 그를 세워 당시를 편안케 하고자 하였고, 사람을 시켜 이를 원술에게 알렸다. 원술은 한왕실이 쇠퇴하였음을 보고, 몰래 다른 뜻을 품으면서 겉으로는 공의(公義)를 핑계되며 원소와 대적하였다.

원소가 다시 원술에게 글월을 보내 이르길 “이전에 한문절(韓文節=한복(韓馥))과 함께 영세(永世)의 도를 세워 해내(海內)가 재흥(再興)을 주인을 보게 하려 했다. 지금 서쪽에 이름뿐인 유약한 임금이 있지만, 피를 나눈 혈육이 없으며, 공경 이하로는 모두 동탁에게 아첨하며 섬기니, 어찌 신의를 회복할 수 있겠는가! 다만 마땅히 병사를 관문과 요해지에 주둔시켜, 각자가 서쪽(장안의 정부)에 대해 죽음으로 지켜야 한다. 동쪽에서 성군(聖君)을 옹립해 태평하게 보좌하는데, 무슨 의심스런 것이 있겠는가! 또한 한 집안에서 살육을 당하여, 일가 친척을 생각지 않는데, 다시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하늘의 거스르니 상서롭지 못하니, 원컨대 이에 대해서 상세히 생각해 보라”고 했다.

원술이 답서를 보내 이르길 “성주(聖主)께선 총명하시어 주나라 성왕(成王)의 자질이 있으십니다. 역적 동탁이 위란(危亂)하던 틈을 타서 위세로 신하들을 복종시켰으니, 이것은 곧 한 왕실이 작은 액운을 만난 것입니다. 위란이 아직 가득하지 않았기에, 다시 왕실을 재흥시키려 합니다. 그런데 지금 임금께서 ”피는 나눈 혈육이 없다“고 운운한 것이 어찌 무망(誣罔)하지 않습니까! 조상 이래로 누대로 계승해오면서, 충의(忠義)를 먼저하였습니다. 태부(太傅)공께서는 인자하며 측은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 비록 적신 동탁이 반드시 재앙과 위해(危害)가 될 것을 알았어도 신의로써 의(義)를 따랐기에 차마 도망가지 않은 것입니다. 집안이 절멸되어 죽는 일이 가득하지만, 요행히 원근에서 서로 달려가 도와주며, 이때로 인하여 위로는 나라의 적을 토벌하고 아래로는 가문의 치욕의 씻을 것이지, 이 때에 도모한다는 것은 들을 게 아닙니다. 또 ”집안에서 살육을 당하여도 북면(北面)함을 회복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동탁이 하는 짓이지, 어찌 나라에서도 그러겠습니까? 임금의 명령은 하늘이요, 하늫은 원수로 할 수 없느데, 하물며 임금의 명령이 아닌 것이겠습니까! 간절한 진심(赤心)은 동탁을 멸하는데 있을 뿐, 다른 것은 알지 못하겠습니다”」라 했다고 한다.] 

원술은 군사를 이끌고 진류를 침입했다. 조조는 원소와 연합해 그를 공격하여 원술의 군대를 크게 무찔렀다. 원술은 남은 군사를 데리고 구강(九江)으로 도주하여 양주자사 진온(陳溫)을 죽이고, 그 주를 지배하여 장훈(張勳)•교유(橋유)등을 대장군으로 임명했다. 

[주 : 신 송지가 『영웅기』를 살펴보니 「진온의 자는 원제(元悌)이며 여남(汝南)군 사람이다. 앞서서 양자자사가 되었다가 병으로 죽었다. 원소가 원술을 보내 그 주에 남아 다스리게 하였는데, (원술은) 패배하여 흩어진 뒤 패국(沛國)으로 달아났는데, 병사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원술이 다시 진우(陳瑀)를 기용해 양주자사로 삼았다. 진우의 자는 공위(公瑋)이며 하비(下邳)사람이다. 진우가 그 주를 다스리게 되었을 때, 원술을 봉구(封丘)에서 패배하여 남으로 수춘(壽春)으로 향하니, 진우는 원술을 막으며 받아주지 않았다. 원술을 퇴각해 음릉(陰陵)을 보전하다가, 다시 군사를 합쳐 진우를 공격하니 진우는 두려워하여 도망쳐 하비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와 같이, 진온이 원술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았으니, 본전(本傳=원술전)과는 같지 않다]

이각은 장안으로 들어가 원술과 손을 잡고 원군으로 삼으려는 생각에서 원술을 좌장군에 임명하고, 양적후(陽翟侯)로 봉한 후 절을 주었으며, 태부 마일제(馬日 )에게 관례에 따라 앞으로 가서 배수(拜授)하도록 했다. 원술은 마일제가 갖고 있던 절을 빼앗고, 그를 억류한 채 돌아왔다. 

[주 : 『삼보결록주(三輔決錄注)』에 이르길 「일제의 자는 옹숙(翁叔)이며, 마융(馬融=후한때 유명한 유학자입니다. 때로는 훈고학의 시조라고 일컬어지는 인물이죠)의 일족의 자식(族子)이다. 소부(少傅) 마융의 업적과 자신의 재학(才學)으로 천거되었다. 양표(楊彪), 노식(盧植), 채옹(蔡邕) 등과 함게 중서(中書)의 교정을 맡았으며, 관위는 구경을 역임하여, 마침내 태보(台輔)에 올랐다」고 한다.

『헌제춘추(獻帝春秋)』에 이르길 「원술이 마일제로부터 부절을 빌려 살펴보고는, 이로 인해 빼앗고 돌려주지 않으며, 군중의 1천여 명을 시켜 그를 재촉하여 징벽(徵辟)하게 하였다. 마일제가 원술에게 말하길 “경의 집안은 선대 이래로 여러 공(公)을 지냈는데 무슨 선비를 천거한다 운운하고, 말을 재촉하게 하는데 공부(公府)의 관리가 겁을 줘서 얻을 있다고 생각하는가!”라 했다. 원술에게 보내주길 청했으나, 원술을 그를 남겨두고 보내지 않았다. 이미 부절을 잃고 굴욕을 당하여, 걱정하고 성내다가 죽었다」고 한다]

이 당시 패국의 상은 하비성의 진규였는데, 그는 과거에 태위를 지낸 진구(陳球)의 조카이다. 원술과 진규는 모두 왕공의 후예이며, 어린 시절에는 서로 교유했는데, 원술은 진규에게 편지를 썼다. 

-- 옛날의 진나라가 통치를 잘못하여 천하의 모든 영웅들이 그 정권을 다투어 빼앗으려 했으나,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사람이 마침내 천명을 받아 정권을 잡았소. 지금 세상의 일은 혼란스럽고 또한 와해되는 형국이니, 진실로 영웅호걸들이 행동을 일으키려고 할 때요. 나는 그대와 친구인데, 어떻게 조조를 곁에서 도울 수 있겠소? 만일 내가 큰 일을 성공시킨다면, 그대는 내가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인 것이오. 진규의 둘째 아들 진응(陣鷹)은 그 당시 하비에 있었는데, 원술은 진응을 위협하여 인질로 삼아 진규를 끌어들이려고 했다. 진규는 회신을 보내며 이렇게 썼다. 

-- 옛날에 진나라 말기는 잔인한 폭력과 음란함과 포악함이 천하에 가득했으며, 그 해독은 백성들에게 펴졌었소. 낮은 위치에 있는 백성들은 살아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진나라는 붕괴된 것이오. 지금은 비록 한나라 말기이지만, 멸망한 진나라처럼 가혹하고 잔폭함은 존재하지 않고 있소. 조장군(조조)이 명민하고 무용이 있으면서 시대의 요청에 순응하여 과거의 구범을 부흥시키고, 흉악한 세력을 쓸어버리고 전국을 평정하고 있으니 확실히 성공할 것이오. 나는 그대가 한마음으로 힘을 합하여 한왕조를 보좌하고 있지만, 법규도 없는 세력을 몰래 세워 직접 화를 시험해 보니 어찌 애통하지 않으리오! 만일 그대사 길을 잃었다가 돌아올 줄 안다면, 오히려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오.나는 그대의 옛 친구이기 때문에 그대에게 진실된 마음을 털어놓는 것이오. 비록 듣기 좋은 말은 아니지만, 육친의 애정이 들어있소. 나로 하여금 사사로이 아부나 하여 그대를 받아들이게 한다면 나는 죽음에 처하더라도 할 수 없소. 

흥평 2년(196) 겨울에 천자는 이각•곽사 등에게 추격당하여 조양(曹陽)에서 패하자, 원술은 부하를 소집하여 말했다. 

"지금 유씨(劉氏; 한나라)는 쇠미하고 천하는 큰 혼란에 휩싸였소. 우리 가문은 4대가 모두 오아공대신을 지냈는데, 이는 백성들이 의지하는 곳이오. 나는 하늘의 뜻에 순응하여 민심을 받아들이려고 하는데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하오?" 

모두 감히 대답하지 못하고 잇는데, 주부 염상(閻象)이 나아가 진언하여 말했다. 

"옛날 주나라는 후직으로부터 문왕에 이르기까지 인덕을 쌓아 공을 세웠고,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그 중에 3분의 2를 지배한 것도 은나라에 신하로서 복종하였기 때문입니다. 명공꼐서는 대대로 번영하였지만 주나라의 번찬과 같은 것은 없었으며, 한나라의 왕실이 비록 쇠약하지만 은나라의 주왕처럼 잔폭하지는 않았습니다." 

원술은 침묵한 채 말을 하지 않았고 매우 불쾌해했다. 그러나 원술은 하내 사람 장형(張炯)의 복괘(卜卦)를 들어 참람하게도 황제를 자칭했다.

[주 : 『전략(典略)』에 이르길 「원술은 원(袁)씨의 성은 본래 진(陳)에서 나왔는데, 진은 순(舜)임금의 후손이며, 토(土)가 화(火)를 이으니 (오행) 운행의 차례에 순응함을 얻게 되었다고 여겼다. 또 참문(讖文)을 보니 이르길 “한(漢)을 대신할 자는 응당 도고(塗高)이다” 라 했다 스스로 자신의 이름자가 이에 해당한다고 여겨 이에 제호(帝號)를 세우고 중씨(仲氏=두번째, 즉 자신을 순임금의 후예라 여기고 순임금 다음으로 두번째 제위에 올랐다는 말입니다)라 칭했다」라 한다

//집해(集解)에서 혜동(惠棟)이 말한다 : 《전략(典略)》에서는 중씨(仲氏)라 하였다. 

//전대흔(錢大昕)이 말한다 : 충가(沖家)라 함은, 沖人沖子(무슨 말인지 모름ㅠㅠ)이다. 마땅히 충(沖)이 옳다.

//심도(沈濤)가 말한다 : 중(仲)은 곧 원술이 참칭한 국호이다. 가(家)라 함은, 이전에 한씨(漢氏)가 한가(漢家 : 한나라)를 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공손술(公孫述)이 스스로 천자를 칭하여 국호를 성가(成家)라 한 것도, 참칭한 국호가 성(成)임을 뜻하는 것이다.

//《전략》에서 말한다 : 나라를 세우고 중씨(仲氏)라 칭하였으니, 중(仲)을 충(沖)이라 하는 것은 틀린 것이다.]

그는 구강태수를 회남윤에 임명했으며 공경을 설치하고, 성 북쪽 교외에서 봄 제사를 지내고, 성 남쪽 교외에서 겨울 제사를 지냈다. 황음과 사치는 더욱 심해져만 갔으며, 후궁 수백 명이 모두 화려한 옷을 입었고, 매우 많은 식량을 낭비하였는데, 

[주 : 『구주춘추(九州春秋)』에 이르길 「사례교위(司隷校尉) 풍방(馮方)의 딸로써 천하의 절색(國色)이며, 난을 피해 양주(揚州)로 왔는데, 원술이 성에 올랐다고 그녀를 보고 기뻐하며, 마침내 (후궁으로) 들였으며, 매우 사랑하고 총애했다. 여러 부인들이 그 총애함을 훼방하여, 말하길 “장군의 귀인(貴人)이면 지조와 절개가 있어야 하는데, 때가 되면 그때마다 울고 근심스러워해서, 필히 오랫동안 (원술이 당신의) 경중(敬重)을 보도록 해야 하오” 라 했다. 풍씨는 그 말이 옮다고 여겼기에, 후에 원술을 볼 때마다 눈물을 흘렸더니, 원술을 이것을 심지(心志)가 있다고 여겨, 더욱 가련히 여겼다. 여러 부인들이 이 때문에 함께 그녀를 목졸라 죽이고, 그녀를 측간(廁)의 들보에 매달아 두었는데, 원술은 실로 (그녀가) 뜻을 얻지 못하고 죽었다 하여, 더욱 후하게 장사지내 주었다」고 한다] 


오히려 군사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렸고 강회(江淮) 일대는 특히 곤궁하여 백성들이 사람을 잡아먹을 정도였다. 원술은 이전에 여포에게 패한 적이 있고, 후에는 또 조조에게 패하여 첨산(灊山)으로 가서 그의 부하 뇌박(雷薄)•진란(陣蘭)에게 투항하려 했으나 거절당하여 근심과 두려움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청주로 가서 원담에게 투항하려고 했으나 질병으로 길 위에서 죽었다. 

[주 : 『위서(魏書)에 이르길 「원술이 원소에게 제호를 바치며 이르길 “한나라가 천하를 잃은지 오래되어, 천자는 손에 끌려 다니며, 정사(政事)는 한갓 (권신의) 집안에 있고, 호걸 영웅들은 각축하며 강토를 나눠 찢으니, 이것은 주나라 말기에 전국(戰國) 칠웅(七雄)이 세력을 나눴던 것과 다를 바 없으며, 끝내는 강한 자가 겸병하게 될 뿐입니다. 더하여 우리 원씨가 천명을 받아서 왕이 되게 되었고, (그 징표인) 부서(符瑞)는 밝게 빛나고 있습니다. 지금 형(君)께서는 4주를 옹유(擁有)하고 있고, 백성들의 호구는 백만이요, 강한 것으로는 이보다 더 큰 것으로는 비할 바가 없으며, 덕을 논하자면 이보다 더 높은 것으로는 비할 바가 없습니다. 조조는 쇠퇴하고 미약한 한실을 붙잡고 돕고 있다지만, 어찌 끊어진 천명을 잇고 이미 멸망한 것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라 했다. 원소는 몰래 이 말을 그렇다고 여겼다」고 한다.

『오서(吳書)』에 이르길 「원술은 뇌박(雷薄) 등이 저항하고 있는 곳에 3일간 머물러 있었는데, 군사들이 양식을 끊어 버리니, 이에 돌아와 강정(江亭)에 있었는데, 수춘(壽春)과 80리 거리였다. 주방에 물으니, 아직 보리 부스러기가 30곡(斛=10말) 남아있다고 하였다. 이때 더위가 극심하여서 꿀물을 얻고자 하였지만, 또 꿀이 없었다. 난간 위에 걸터앉아 한참동안이나 탄식하더니, 이에 크게 외치길 “이 원술이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구나!”라 했다. 이로 인해 땅에 엎어져 피를 한 말 정도 토해내고는 죽었다」고 한다]

그는 처자식을 원술의 부하인 여강태수 유휸(劉勳)에게 의탁하였는데, 손책이 유훈을 격파시킨 이후에는 또 다시 손책에게 거두어졌다. 원술의 딸은 또한 손권의 아들 손분(孫奮)에게 시집보냈다. 

<<진수의 평>>
원술은 사치스럽고 방자하고 음탕하였으므로, 자신의 일생이 다할 때까지 영화를 지킬 수 없었던 것은 자업자득이다. 
 
후한서에 이르길 

원술이 남양에 있을때 그 호구가 수백만이었으나 원술은 법도를 세우지 않고, 약탈을 일삼았다. 그는 사치스럽고 방자하였으므로 (그 영지에) 편안할 날이 없었고, 백성들은 이로 인하여 항상 고통을 받았다.


원술은 자신이 (명문으로) 유명하다는 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겼으나, 그 천성이 교만하고 사치스러웠으므로 자신만이 고귀하다고 여기며 모든 것을 깔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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