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표(劉表)의 자는 경승(景升), 산양(山陽) 고평(高平)사람이다. 

어려서 지식으로 이름이 나서 '팔준(八俊)'으로 불렸다. 

[주 : 장번(張璠)의 『한기(漢紀)』에 이르길 「유표와 같은 군 사람인 장은(張隱), 설욱(薛郁), 왕방(王訪), 선정(宣靖), 공서공(公緖恭), 유지(劉祗), 전림(田林)이 팔교(八交)가 되고, 혹은 팔고(八顧)라고도 한다. 

『한말명사록(漢末名士錄)』에 “유표와 여남의 진상(陳翔) 자는 중린(仲麟), 범방(范滂) 자는 맹박(孟博), 노국(魯國)의 공욱(孔昱) 자는 세원(世元), 발해군의 원강(苑康) 자는 중진(仲眞), 산양군의 ■부(■敷) 자는 문우(文友), 장검(張儉) 자는 원절(元節), 남양군의 잠질(岑晊) 자는 공효(公孝)가 팔우(八友)가 된다”고 했다」고 한다.

사승(謝承)의 『후한서(後漢書)』에 이르길 「유표는 같은 군 사람인 왕창(王暢)에게 학문을 배웠다. 왕창이 남양태수가 되었는데, 행실이 검소함을 지나쳤다. 이때 유표의 나이 17세였는데, 나아가서 간언하길 “사치는 윗사람을 범하지 않고, 검소함은 아랫사람을 핍박하지 않아야, 무릇 중용(中庸)의 도이니, 이 때문에 거백옥(蘧伯玉 = 춘추시대 위(衛)나라 영공(靈公)때의 대부. 공자의 후원자. ”나라에 도가 있으면 벼슬에 나아가고, 도가 없으면 재능을 감춘다(遽伯玉 邦有道則仕 邦無道 則可卷而懷之)“는 『논어 위령공』편의 고사의 주인공입니다.)은 혼자서 군자가 됨을 부끄러워했습니다. 부군(府君)께서 공자님의 명철한 교훈을 스승으로 삼지 않으시고,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말엽적인 정조를 사모하신다면, 밝게 세상에 직접 남기실 바가 없을 것입니다!” 라 했다. 양창이 대답하길 “검약함으로 실수하는 자는 드물다(以約失之者鮮矣)고 했다(『논어 이인』편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또한 풍속을 바로잡아야 한다.” 고 했다.」고 한다.

키가 8척에 용모가 매우 준수하였다. 대장군의 하급관리인 북군중후(北軍中候)가 되었다. 영제가 죽자 왕예(王叡)를 대신하여 형주자사(荊州刺史)가 되었다. 이 때 산동(山東)에서 동탁(董卓) 토벌군을 일으킬 때 유표 역시 양양(襄陽)에서 군사를 합하였다. 

[주 : 사마표(司馬彪)의 『전략(戰略)』에 이르길 「유표가 처음으로 형주자사가 되었는데(중간 얘기가 빠져있는데, 당시 장사태수 손견이 형주자사 유예를 죽이자, 조서를 내려 유표를 형주자사로 삼았습니다), 강남의 족당(族黨)들의 도적떼가 극성스러웠고, 원술은 노양(魯陽)에 주둔하며 남양의 군사들을 다 가졌다. 오군 사람인 소대(蘇代)가 장사태수를 관할하며, 패우(貝羽)를 화용(華容) 현장으로 삼아서, 각자 험한 병사들로 난을 일으켰다. 유표가 처음 도착하여 단기로 의성(宜城)에 들어가서, 중려(中廬) 사람 괴량(蒯良), 괴월(蒯越), 양양 사람 채모(蔡瑁)를 끌어들여 함께 모의했다. 

유표가 말하길 “족당의 도적들이 매우 성하여, 사람들이 그에 붙지 않으면 원술이 이를 이용하니, 그 화가 지금에 이르렀소. 내가 병사들을 징집하고자 하는데, 두려워하며 모이지 않으니, 낼만한 계책이 있소?”라 물었다. 

괴량이 대답하길 “사람들 중 귀부하지 않는 자들은 인(仁)이 부족한 것이며, 귀부해도 다스려지지 않는 자들은 의(義)가 부족한 것입니다. 진실로 인의의 도가 행해지면, 백성들이 귀의하는 것이 물이 아래로 내려가듯 할 것이니, 이르는 곳마다 따르지 않는 것을 왜 걱정하며, 병사를 일으키는데 어떤 계책을 낼 것이냐고 어찌 물으십니까?” 라 했다. 

유표가 괴월을 돌아보며 물으니, 괴월이 말하길 “평안한 시대를 다스리는 자는 인의를 앞세우고, 난세를 다스리는 자는 권모술수를 먼저 합니다. 병사들이 많지 않으니, 사람들은 얻어야 합니다. 원술은 용맹하나 결단력이 없고, 소대와 패우는 모두 무인이지만 생각이 부족합니다 족당 도적떼의 우두머리는 탐욕과 포악함이 많아 아랫사람들이 걱정거리로 여깁니다. 이 괴월에게는 평소에 닦은 행적이 있어, 이로움으로써 이들에게 보여주게 한다면, 필히 많은 이들이 올 것입니다. 그대께서는 무도한 자를 주살하고, 저들을 위무하고 등용하십시오. 한 주의 사람들이 즐거이 보존하는 마음을 가져서, 그대의 성덕을 들으면, 필히 강보를 업고서라도 올 것입니다. 병사들이 모이고 무리들이 귀부하면, 남으로 강릉을 점거하고, 북으로 양양을 지키면, 형주의 8군은 가히 격문을 전하는 것으로 평정할 수 있습니다. 원술 등이 비록 온다고 해도, 할 수 있는게 없을 것입니다.” 라 했다. 
 
유표가 말하길 “자유(子柔=괴량의 자)의 말은 옹계(雍季; 진(晉) 문공(文公)때 초나라가 쳐들어오자, 호언(狐偃)이란 신하가 일시적 속임수를 쓰자고 하자, 옹계는 어쩔 수 없이 이에 찬성하면서도 장기적인 계책을 세워야 한다고 말한 것)의 논의이며, 이도(異度=괴월의 자)의 계획은 구범(臼犯=구범(咎犯)이라고도 씁니다. 역시 진 문공의 신하로 앞서 말한 호언의 자가 구범입니다.)의 모책이다.” 라 했다. 
 
마침내 괴월을 시켜 사람을 보내 족당 도적떼 우두머리를 회유하니, 오는 자가 55인이었는데, 모두 참수했다. 그 무리를 기습해 취하고, 한편으로는 부곡으로 삼았다. 오직 강하(江夏)적 장호(張虎), 진생(陳生)만이 무리를 데리고 양양을 점거하니, 유표가 이내 괴월과 방계(龐季)를 시켜 단기로 가서 그들을 설득해 항복케 하니, 강남이 마침내 다 평정되었다.」고 한다.

원술(袁術)이 남양(南陽)에 있을 때 손견(孫堅)과 연합하여 유표의 영지를 빼앗고 손견으로 하여금 유표를 공격케 하였다. 손견이 유시(流矢)를 맞고 죽자 원술군은 패하였고 결국 유표를 이기지 못하였다. 

이각(李 )과 곽사(郭 )가 장안으로 들어갔을 때 유표와 연합하여 도와주려 하였고, 유표를 진남장군(鎭南將軍), 형주목(荊州牧)에 삼고 성무후(成武侯)에 봉하여 천자의 부절을 보냈다. 천자가 허(許)에 도읍하자 유표는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으며, 북쪽의 원소와 동맹을 맺었다. 치중 등희(鄧羲)가 유표에게 간언을 하였지만 유표는 듣지를 않아, 결국 등희는 병을 핑계로 물러나 유표대에 죽었다.(終表之世) 

[주 : 『한진춘추(漢晉春秋)』에 이르길 「유표가 등희에게 대답하길 “안으로는 공직(貢職)을 잃지 않고, 밖으로는 맹주(盟主)를 배신하지 않으니, 이것은 천하에 통달되는 의리요. 치중만 어찌하여 괴이하게 말하오?”라 했다.」고 한다.]

장제(張濟)가 군사를 이끌고 형주경계의 양성(穰城)을 공격하였으나, 유시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형주의 관리들이 모두 축하하였으나, 유표가 말했다. "장제는 궁하여서 왔는데 주인이 무례하여 싸움을 벌였으니, 이는 나의 뜻이 아니로다. 나는 조문을 받지 축하는 받지 않겠다." 장제의 군사들을 들여보내게 하니 모두들 듣고서 기뻐하였으며, 결국 유표에게 복종하였다. 
 
장사태수(長沙太守) 장선(張羨)이 유표를 배반하였는데, 

[주 : 『영웅기(英雄記)』에 이르길 「장선은 남양 사람이다. 앞서 영릉과 계양의 현장이 되었다가, 장강과 상수(湘水) 사이의 민심을 크게 얻었는데, 성품이 굴강(屈强)하여 순종하지 않았다. 유표가 그 사람됨을 천박하게 여기기어, 예우하지 않음이 심했다. 장선이 이 때문에 원한을 품다가, 마침내 유표에게 모반한 것이다.」

유표는 포위한지 몇 년이 되어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장선이 죽자, 그 아들 장역(張 )을 세웠다. 유표는 결국 장역을 공격하여 병합하고, 남으로 영릉(零陵), 계양(桂陽), 북으로 한천(漢川)을 거두어 땅이 수천리에 이르고 병력이 10여만에 이르렀다. 

[주 : 『영웅기』에 이르길 「주 경계의 많은 도적들이 이미 모두 없어지니, 유표가 이에 학관(學官)을 열어 세우자 널리 유생들을 구하게 하고, 기무개(綦毋闓)와 송충(宋忠) 등을 시켜 『오경장구(五經章句)』를 편찬하게 했는데, 이를 후정(後定)이라 부른다.」고 한다] 

조조(曹操)가 원소(袁紹)와 이제 막 대치하고 있을 때, 원소는 사람을 보내 도움을 요청하여, 유표가 허락하였으나 이르지 못하고 또한 조조를 도운 것도 아니었다. 장강(長江)과 한수(漢水) 사이를 보전하여 천하의 변란을 관망하였다. 
 
종사중랑(從事中郞) 한숭(韓嵩)과 별가(別駕) 유선(劉先)이 유표에게 설득하였다. "호걸들이 병립하여 다투고 조조와 원소가 서로 대치하고 있으니, 천하가 중대해짐은 장군께 달려있다고 하겠습니다. 장군께서 패업을 이루시려면 그 피폐함을 타고 일어나시고, 만약 그렇지 않으신다면 진실로 따를 자를 택하셔야 할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10만의 군대를 보유하고서 편안히 앉아 천하를 관망하십니다. 무릇 현명함을 보고서도 돕지를 아니하고, 화의를 청했는데도 얻지 못함은 양쪽의 원망이 장군께로 모이게 되어, 장군은 중립을 지킬 수 없게 됩니다. 조조는 명철하여 천하의 인재들이 모두 그에게 몰리고 있으며, 원소를 깨뜨린 후에 강한(江漢)지역으로 향할 것이니, 장군께서 막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러므로 장군의 계책을 실행하려면 고을을 들어 조조에게 항복하면, 조조는 장군을 중히 쓰실 것이고, 오래 복을 누리시다가 후사를 물려주면 되니, 이를 만전(萬全)의 책이라 하겠습니다." 
 
대장 괴월( 越)도 또한 유표를 권하니, 유표가 의심스러워 한숭을 조조에게로 보내 허와 실을 관찰하게 했다. 한숭이 돌아와서 조조의 큰 덕에 감화되어 유표에게 아들을 인질로 보내자고 설득했다. 유표는 한숭이 조조에게 돌아갔음을 의심하여 매우 화를 내며 한숭과 그의 수행원들을 죽이려 하였으나, 한숭이 다른 의도가 없었음을 알고는 그만 두었다. 

[주 : 『부자(傅子)』에 이르길 「처음 유표가 한숭에게 말하길 “지금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 안정될지 알지 못하는데, 조공은 천자를 끼고 허현에 도읍하였으니, 그대가 나를 위해 그 틈을 살펴봐 주시오.”라 했다. 
 
한숭이 대답하길 “성인은 절개에 통달하고, 그 다음은 절개를 지킨다고 하는데, 이 한숭은 절개를 지키는 자입니다. 무릇 임금을 섬기고 임금을 위하며, 군신의 명분이 정해져 있으니, 죽음으로써 이를 지킵니다. 지금 계책과 명분은 인질을 맡기는 것이니, 오직 장군께서 명하신 것이라면 비록 끓는 물에 뛰어들고 불속으로 들어갈 것이며 죽어도 말이 없을 것입니다. 

이 한숭이 살펴보건대, 조공은 지극히 명철(明哲)하여 반드시 천하를 구제할 것입니다. 장군께서 능히 위로는 천자께 순응하고 아래로는 조공에게 귀의하실 수 있다면, 반드시 백세의 이익을 누릴 것이고, 초국(楚國=형주를 지칭)은 실로 그 보우를 받으니, 이 한숭이 할 수 있습니다. 계획이 정해지지 않았는데, 이 한숭을 경사에 사신으로 보내시어, 천자께서 한숭에게 관직을 내리시면, 곧 천자의 신하고 되고, 장군에게는 예전의 관리가 될 뿐입니다. 임금에게 있으면 임금을 위하는 법이니, 곧 이 한숭은 천자의 명을 지킬 것이고, 의리상 다시는 장군을 위해 죽을 수 없습니다. 장군께서는 다시 생각해서, 이 한숭에게 책무를 지우지 마십시오.”라 했다. 
 
유표가 마침내 그를 사신으로 보내닌, 과연 그가 말한 바처럼 되어, 천자가 그를 시중에 배수하고 영릉태수로 승진시키니, 돌아와 조정과 조공의 덕을 칭송하였다. 유표는 그가 다른 맘을 품고 있다고 여겨, 속료(屬僚) 수백명을 크게 모으고 병사들을 배치시켜놓고 한숭을 만났는데, 크게 노하여 부절을 가지고 그를 참수하려 하여, 꾸짖어 말하길 “한숭 네가 감히 다른 맘을 품었느냐!” 라 했다. 
 
모두 다 두려워하여 한숭에게 사죄하라고 하려 했다. 한숭은 움직이지 않고 유표에게 말하길 “장군께서 이 한숭을 책임지셔야 하는 거지, 한숭이 장군을 책임지지 않습니다.”라 하며, 앞서의 말을 갖추어 진언했다. 유표의 분노가 그치지 않으니, 그의 아내 채씨(蔡氏)가 간언하길 “한숭의 초국의 신망을 받는 자입니다. 또 그 말이 정직하니, (그는) 죽여도 사죄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 했다. 유표가 이에 주살하지 않고 그를 가두었다.」고 한다.] 

유표는 비록 외모는 선비처럼 단아하였지만 마음에 의심과 꺼림이 많으니, 모두가 이러한 무리들이다. 

유비(劉備)가 유표에게로 달아나자, 유표는 후하게 대접했지만 쓰지는 않았다. 

[주 : 『한진춘추(漢晉春秋)』에 이르길 「태조가 처음 유성(柳城)을 정벌할 때, 유비는 유표에게 허도를 습격하라고 설득했지만, 유표는 이 말을 따르지 않았다. 태조가 귀환하게 되자, (유표가) 유비에게 말하길 “그대의 말을 쓰지 않았다가, 이 큰 기회을 그르쳤구려.”라 했다. 유비가 말하길 “지금 천하는 분열되어 날마다 전쟁이 일어나니, 기회가 오는 것에,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만약 이후에라도 그런 기회에 호응할 수 있다면, 이번 일은 후회하기에 족하지 않습니다.” 라 했다.」고 한다.]

건 안(建安) 13년(209) 조조가 유표를 정벌하니, 이르기도 전에 유표는 병들어 죽어버렸다. 처음에 유표와 처는 아끼는 작은아들 유종(劉琮)을 후사로 세우려 하였고, 채모(蔡瑁)와 장윤(張允) 등이 당파를 만들어 큰아들 유기(劉琦)를 강하태수(江夏太守)로 내보내니, 모두들 결국 유종을 후계자로 받들었다. 유기와 유종은 원수가 되었다. 

[주 : 『전략(典略)』에 이르길 「유표의 병들자, 유기가 돌아와 병세를 살폈다. 유기의 성품은 인자하고 효성스러워, 채모와 장윤은 유기가 유표를 뵙고 부자가 서로 감복하여 다시 (유기에게) 후계자로 맡길 뜻이 있게 될까 두려워 하여, 말하길 “장군께서는 그대에게 강하를 진무하여 나라의 동쪽 울타리가 되라고 명하셨으니, 그 책임이 지극히 중합니다. 지금 사람들을 풀어놓고 왔으니, 필히 견책과 꾸지람을 받아서, 부친의 기쁜 마음을 해치고 병은 더 위독해 질 것이니, 이것은 효성스럽고 공경하는 일이 아닙니다.” 라 했다. 마침내 대문 밖에서 저지당하여, 뵙지 못하게 하니, 유기는 눈물을 흘리며 떠나갔다.」고 한다.] 

괴월과 한숭과 동조연(東曹 ) 부손(傅巽) 등이 유종에게 조조에게 항복할 것을 설득하였다. 유종이 말했다. "여러분들과 함께 초(楚)땅(형주 양양지방은 옛날 춘추시대의 초나라 자리임)에 웅거하여 선군의 유업을 지켜왔는데, 천하를 관망하여 보니, 어찌 불가한 것을 한단 말인가." 
 
부손이 대답했다. "거스르고 순응함은 마음에 있고, 강함과 약함은 세상을 정하는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신하로서 군주를 막는 것은 반역이며, 새로 초나라를 건설하여 국가를 통제함으로 조조의 세력을 막을 수 없으며, 유비가 조조의 적수가 된다 하나 또한 당해낼 수 없습니다. 이 세가지 모두 단점이어서 조조의 군대를 막으려 한다면 반드시 패망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유종이 말했다. "난 그렇게 못하겠소." 
 
부손이 말했다. 

주: <부자>[[부손전
]] 으로 분할

 "진실로 유비가 조조를 막아낼 수 없으면 비록 초땅을 보존한다 할지라도 스스로 존립할 수 없으며, 진실로 유비가 조조를 막아낸다고 한다면 유비는 장군 밑에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장군께서는 의심하지 마소서." 
 
조조군이 양양에 이르자, 유종은 항복하였고, 유비는 하구(夏口)로 달아났다. 

한진춘추』에 이르길 「왕위(王威)가 유종을 설득하며 “조조는 이미 장군의 항복을 얻었고 유비는 달아났기에, 필히 해이해져 방비를 하지 않을 것이니, 가벼운 무장으로 단기로 나갈 것입니다. 만약 제게 뛰어난 병사 수천만 주신다면, 험준한 곳으로 요격하면, 가히 조조를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조조를 사로잡으면 위엄은 천하에 진동하니, 앉아서 범처럼 걸어나간다면, 중하(中夏=중원)가 비록 넓다 한들, 격문을 돌리는 것만으로 평정할 수 있으니, 다만 한번의 승리만을 거두어서 금일 보전하여 지키는 게 아니게 될 것입니다. 이같은 기회는 만나기 어려우니 놓칠 수 없습니다.” 라 했다. 유종이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수신기(搜神記)』에 이르길 「건안 초에 형주에 동요가 퍼졌는데 “ 8~9년 사이에 비로소쇠퇴해지려 하여, 13년에 이르러서는 남기는 것도 없구나.” 라 했다. 중흥(中興) 이래로 형주만 혼자 보전되고, 유표가 형주목이 되니, 백성들 또한 풍족하고 안락했는데, 건안 8년과 9년에 이르러서 비로서 쇠퇴함을 당하는 것을 말한다. 비로소 쇠퇴해졌다는 것은 유표의 아내가 죽고, 여러 장수들도 아울러 죽음을 말한다. 13년에는 남겨진 것이 없다는 것은, 유표 또한 죽음을 당하고, 이 때문에 망하고 격파된다는 것이다. 
 
이 때, 화용(華容)현에 여자가 있었는데 홀연히 울며 외치길 “형주에 장차 큰 상(喪)이 생길 것이다”라 했다. 말에 허물이 있어, 현에서는 이를 요언(妖言)이라 하여, 한달여 동안 옥에 가두었는데, 옥중에서 홀연히 통곡하길 “유형주(劉荊州=유표)가 오늘 죽는구나” 라 했다. 화용은 주에서 수백리 떨어진 곳에 살았는데, 곧장 말보는 관리를 보내 시험삼아 살펴 보게 하니, 유표가 과연 죽었고, 현에는 이에 그녀를 풀어주었다. 계속에서 또 노래하길 “뜻하지 않게 이립(李立)이 귀인이 되는구나”라 하였다. 그 후에 아무런 기미가 없었지만, 태조가 형주를 평정하고 나서, 축군(逐郡) 사람으로 자는 건현(建賢)인 이립을 형주자사로 삼았다. 

조조가 유종을 청주자사(靑州刺史)로 삼고 열후에 봉했다. 

[주 : 『위무고사(魏武故事)』에 실린 영(令)에 이르길 「초는 강한(江漢)지역 산천의 험준함을 가지고 있어, 나중에 복종하더라고 앞서는 강성하여, (전국시대 때) 진(秦)나라와 우열을 다투었는데, 형주는 곧 옛 그 땅이다. 유진남(劉鎭南=진남장군에 임명되었던 유표를 지칭)이 오랫동안 그 백성들을 부려 왔다. 그가 죽은 후 여러 자식들은 정치(鼎峙)하기에, 비록 끝까지 보전하기 어려워도 오히려 해를 바로잡을 만 하다. 

청주자사 유종은 마음이 높고 뜻은 청렴하며, 지혜는 깊고 생각은 넓으며, 영화를 가벼이 하고 의리를 중시 하며, 이익을 박하게 하고 덕을 후하게 하고, 만리 떨어진 곳의 일을 업신여기고, 삼군의 군대도 버리고, 중정(中正)의 대체을 돈독히 하며, 명예를 교령(敎令)하여, 위로는 선군의 유업을 밝히고, 아래로는 불후의 나머지 복을 도모한다. 

포영(鮑永)은 병주를 버리고, 두융(竇融)이 5군(郡)을 떠난 것도 비유하기 족하지 않다. 비록 열후로 한주의 지위에 봉해졌으나, 오히려 이런 총애가 그 사람에게 알맞지 않음을 한스러워 하여, 자주 본주로 돌아올 것을 구한다. 감사(監史=자사)는 비록 높지만, 질록(秩祿)은 많지 않다. 지금 집행한 일을 들어주고, 표를 올려 유종을 간의대부(諫議大夫) 참동군사(參同軍事)로 삼으라」고 했다.] 

괴월 등 제후가 된 사람이 15명이었다. 괴월은 광록훈(光祿勳), 

주: <부자>[
[괴월전]] 으로 분할

한숭은 대홍려(大鴻), 

주: <선현행장>[[한숭전]
]으로 분할

등희는 시중(侍中),

[주 : 등희는, 장릉(章陵) 사람이다]

유선은 상서령(尙書令)이 되었으며, 그 나머지 많은 이들이 큰 벼슬을 받았다. 

주:
<영릉선현전>[[유선, 주불의전]]으로 분할

보충:<양양기구기>[[채모전]]

- 평하여 말한다.

동탁은 사람이 비뚤어져 계통이 없고 잔인하고 포학하며 비정했으니, 문자로 역사를 기록한 이래로 이와 같은 자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영웅기에서 이르길: 옛날 거인이 임조(臨爪)에 출현하자 구리로 된 인물상을 만들었는데, 임조에 동탁이 태어났을 때는 구리로 된 인물상은 훼손되었다. 세상에서는 동탁이 존재하기 때문에 대란이 일어나고, 대란이 일어났기 때문에 동탁이 멸망했다고 했다.

원술은 사치스럽고 방자하고 음탕하였으므로, 자신의 일생이 다할 때까지 영화를 지킬 수 없었던 것은 자업자득이다. 
 
원소와 유표는 모두 위엄과 무용이 있었고, 넓은 도량과 식견이 있었기에 그 당시 이름을 떨쳤다. 

유표는 한강 남쪽을 지배하고, 원소는 황하 북쪽에 세력을 구축하였으나, 그들은 모두 겉으로는 관대했지만 속으로는 질시하고, 모략을 좋아하였으며, 결단력이 없고, 인재가 있어도 등용하지 않고, 좋은 말을 듣고도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적자를 내쫓고 서자를 세우고, 예의를 버리고 편애를 숭상했으므로, 후계자의 시대에 이르러서 고통을 당하고 사직이 엎어졌어도 결코 불행한 것이 아니다. 

초나라 항우는 범증(范增)의 계략을 듣지 않아 왕업을 잃었는데, 원소가 전풍을 죽인 것은 항우의 실책보다 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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