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고원님의 블로그 

여포(呂布)의 자는 봉선(奉先)이고 (병주) 오원(五原)군 구원(九原)현 사람이다. 효무(驍武-사납고 용맹함)하여 병주(幷州)에서 복무했다. (병주)자사 정원(丁原)이 기도위가 되어 하내(河內)에 주둔하니 여포를 주부(主簿)로 삼아 크게 친근하게 대우했다. 영제(靈帝)가 붕어하자 정원은 군을 이끌고 낙양으로 가 
(1) 하진(何進)과 함께 여러 황문들을 주살할 것을 도모하고 집금오(執金吾)에 임명되었다. 

(1) [영웅기]英雄記 – 정원(丁原)의 자는 건양(建陽)이다. 본래 한미한 집안 출신이라 사람됨이 추략(麤略-거칠고 치밀하지 않음)하나 무용(武勇)을 갖추어 기사(騎射-말 타기와 활쏘기)에 능했다. 남현(南縣-운중군 사남현沙南?)의 리(吏-아전, 행정관)가 되어 명을 받으면 어려운 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급박한 일이 생겨 도적을 추격할 때는 늘 선두에 섰다. 서(書)를 헤아리고 알았으니 어려서 리(吏)의 재능이 있었다. 

하진이 패망하고 동탁이 경도(京都-수도)로 들어왔는데, 장차 난을 일으키기 위해 정원을 죽이고 그 군사들을 아우르려 했다. 동탁은 여포가 정원에게 신임 받는 것을 보고 여포를 꾀어 정원을 죽이게 했다. 여포가 정원의 머리를 베어 동탁에게로 나아가니 동탁은 여포를 기도위(騎都尉)로 삼고 매우 아끼고 신임하여 부자(父子) 사이가 되기로 맹세했다. 

여포는 활쏘기와 기마에 능하고 여력(膂 力-완력, 용력)이 남보다 뛰어나 비장(飛將)으로 불리었다. 점차 승진하여 중랑장(中郎將)에 이르고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다. 동탁은 스스로 남들을 무례하게 대했기에 그들이 자신을 해칠까 두려워하여 거동할 때 늘 여포로 하여금 자신을 호위하게 했다. 그러나 동탁의 성정은 굳세면서도 편협해 화가 나면 후환을 생각지 않았다. 

일찍이 (여포가) 사소하게 뜻을 거스르자 수극(手戟)을 뽑아 여포에게 던진 일이 있었다. 여포는 용력하고 민첩하여 이를 피하고(布拳捷避之) (2) 동탁에게 사죄하여 동탁의 화 또한 풀렸으나, 이로 말미암아 은밀히 동탁을 원망하게 되었다. 

(2) [시경]에서 ‘無拳無勇, 職爲亂階’라 했는데, 이를 주(注)하여 ‘拳(권)은 力(력)’이라 했다.

동탁은 늘 여포에게 중합(中閤-중문)을 지키게 했는데, 여포는 동탁의 시비(侍婢)와 사통(私通)하니 그 일이 발각될까 두려워하며 내심 불안해했다. 

그 이전에 사도(司徒) 왕윤(王允)은 여포가 주리(州理) 사람으로 장건(壯健)하다 하여 그를 두텁게 대우했다.(※ 州里는 보통 동향이나 동향인을 가리키는데 왕윤은 태원군 기현사람이니 군현이 서로 같지는 않고, 다만 같은 병주 출신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 뒤 여포는 왕윤을 방문하여 동탁이 자신을 거의 죽일 뻔 한일을 말했다. 이때 왕윤은 복야(僕射) 사손서(士孫瑞)와 함께 동탁 주살을 모의하고 있었는데 이로써 여포에게 내응하도록 청했다. 여포가 말했다, 

“부자(父子) 사이인데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왕윤이 말했다,

“그대의 성은 여(呂)이니 본래 골육(骨肉)도 아니오. 지금 죽음을 걱정할 겨를도 없는데 무슨 부자지간이라 하시오?” 

마침내 여포가 이를 허락하고 손수 칼로 동탁을 찔렀다. 이 일은 동탁전에 있다. 

왕윤은 여포를 분무장군(奮武將軍), 가절(假節)로 삼고 의례는 삼사(三司-삼공)에 비견되도록 하고 온후(溫侯)로 올려 봉하여 함께 조정을 장악했다. 여포는 스스로 동탁을 죽인 후 양주인(涼州人)을 두려워하고 꺼리었고(※ 동탁은 양주 농서군 임조현 출신) 양주인 들도 모두 여포에 원한을 품었다. 이 때문에 이각(李傕)등이 마침내 서로 결탁한 뒤 돌아와 장안성(長安城)을 공격했다. (3)

(3) [영웅기] – 곽사(郭汜)는 성 북쪽에 있었다. 여포는 성문을 열고 군을 이끌고 곽사에게로 나아가 말했다, 

“군사들을 물리고 다만 (우리끼리) 몸소 싸워 승부를 가름하자.” 

곽사와 여포는 더불어 싸웠는데 여포가 모(矛)로 곽사를 찌르자 뒤에 있던 곽사의 기병이 앞으로 와 곽사를 구했다. 이에 곽사와 여포는 각각 그만두었다. 

여포가 이를 막지 못했고 마침내 이각 등은 장안으로 들어왔다. 동탁이 죽은 후 60일이 지나 여포 또한 패하니, (4) 수백 기를 이끌고 무관(武關)을 나와 원술(袁術)에게로 가려 했다. 

(4)신 송지가 보건대 [영웅기]에서 이르길 여러 책에서 여포가 4월 23일에 동탁을 죽이고 6월 1일에 패주했다고 하고 또한 그때 윤월은 없었다 하니 60일에는 미치지 못한다. 

여포는 스스로 동탁을 죽여 원술의 원수를 갚았으므로(※ 제후연합군이 봉기하자 동탁이 원외, 원기 등 원씨 일가를 살육했으니 그 원수를 갚았다는 것) 그의 덕을 보고자 했으나 원술은 그의 반복(反覆-언행을 이리저리 고침)함을 꺼리어 여포를 거절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북쪽으로 원소(袁紹)에게로 가니, 원소는 여포와 함께 상산(常山-기주 상산국)에서 장연(張燕)을 공격했다. 장연은 정병 1만 남짓에 기병이 수천에 이르렀다. 여포는 적토(赤兔)라 불리는 좋은 말을 가지고 있었다. (5)

(5) [조만전]曹瞞傳 – 그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사람 중에 여포가 있고 말 중에 적토가 있다.”고 했다.

그가 친근하게 지내던 성렴(成廉), 위월(魏越) 등과 함께 적의 예봉을 꺾고 적진에 돌진하여 마침내 장연군을 격파했다. 

그리고 군사들을 구해 더욱 늘리고 장사(將士-장졸)들이 노략질을 일삼으니, 원소가 이를 근심하고 꺼렸다. 여포가 그 뜻을 알아채고 원소로부터 떠날 것을 청했다. 원소는 그가 돌아와 자신을 해칠까 두려워하여 밤중에 장사를 보내 여포를 습격해 죽이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 일이 드러나자 여포는 하내(河內)로 달아나 장양(張楊)과 합쳤다. (6) 

(6) [영웅기] – 여포는 자신이 원씨(袁氏)에게 공(功)이 있다하여 원소 휘하의 제장들을 업신여기며 오만하게 굴고 (그들의 관직이) 함부로 서치(署置)한 것이라 하여 족히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여포가 낙양으로 돌아간다고 청하자 원소는 여포를 영(領) 사례교위(司隷校尉)로 삼았는데, 겉으로는 응당 보내줄 것이라 말했으나 내심으로는 여포를 죽이려 했다. 

다음 날 (여포가) 출발하려 할 때 원소는 갑사(甲士) 30인을 보내며 여포를 전송하는 것이라 말했다. 여포는 그들을 장막 옆에 멈추게 하고 거짓으로 사람을 시켜 장막 안에서 쟁(箏)을 연주하게 했다. 원소의 군사들이 누워있자 여포는 머지않아 장막을 나와 떠났는데 원소의 군사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밤중에 거사하여 여포의 이불을 베고는 여포를 죽인 것으로 여겼다. 다음 날 원소가 신문(訊問)하여 여포가 아직 살아있음을 알게 되자 이에 성문을 닫았다. 여포는 마침내 군을 이끌고 떠났다. 

원소는 군사들에게 이를 추격하게 했는데 모두 여포를 두려워하여 감히 가까이 다가가려는 자가 없었다. (7)

(7) [영웅기] – 장양과 그의 부곡(部曲), 제장(諸將)들은 이각, 곽사의 구모(購募-현상수배)를 받자 함께 여포를 도모하려 했다. 여포가 이를 듣고 장양에게 말했다, 

“나는 경(卿)의 주리(州里)이니 경이 나를 죽이더라도 경에게는 (그 공이?) 미약할 것이오. 차라리 나를 (산 채로 붙잡아) 팔아넘기느니만 못하니, (그리 한다면) 가히 이각, 곽사에게 지극한 관작과 총애를 얻을 것이오.” 

이에 장양은 겉으로는 이각, 곽사에 따르는 것처럼 했으나 실제로는 여포를 보호했다. 이각, 곽사는 이를 우려하여 다시 크게 봉하는 조서를 내리고 여포를 영천(潁川)태수로 삼았다. 

[[장막전]]으로 분할

유비가 동쪽으로 가서 원술을 공격하자 여포는 하비(下邳)를 습격해 차지하고, 유비가 되돌아가 여포에 귀의했다. 여포는 유비를 소패(小沛)에 주둔하게 하고, 서주자사(徐州刺史)를 자칭했다. (10) 

(10) [영웅기] - 여포가 처음 서주(徐州)에 들어왔을 때 원술에게 서신을 보냈다. 원술이 답서를 보내 말했다, 

“지난 날 동탁이 난을 일으켜 왕실을 파괴하고 나의 문호(門戶)에까지 해를 입혔는데, 내가 관동에서 거병했으나 능히 동탁을 도열(屠裂-사지를 찢어 죽임)하지 못했소. 그런데 장군이 동탁을 주살하고 그 수급을 보내니 나를 위해 원수를 갚고 치욕을 쓸어 없앤 것이고 당세인 들에게 나의 면목을 세워주어 사생(死生-생사)에 부끄럽지 않게 했으니 그 공이 첫째요.

 지난날 장수 김원휴(金元休-김상金尙)가 연주로 향하여 막 봉구(封丘)에 이르렀을 때 도리어 조조에게 격파되어 흩어져 달아나니 거의 멸망할 지경에 이르렀소. 장군이 연주를 격파해 멀고 가까운 곳 사람들에게 다시 내 면목을 세워주니 그 공이 두 번째요. 

내가 태어난 이래 천하에 유비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데, 유비가 거병해 나와 더불어 싸웠소. 내가 장군의 위령(威靈)에 힘입어 유비를 격파했으니 그 공이 세 번째요. 장군은 내게 이 세 가지 큰 공을 세워주었으니 내가 비록 불민(不敏)하지만 생사(生死)로 받들겠소. 장군은 여러 해 동안 싸우느라 군량이 부족해 고통스럽다 하여 이제 쌀 20만 곡을 보내니 도로에서 맞이해 주시오.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응당 다시 끊이지 않게 보낼 것이오. 만약 병기(兵器)와 전구(戰具-싸움도구)에 부족한 점이 있으면 크건 작건 오직 명하기 바라오.” 

여포가 이 서신을 읽고 크게 기뻐하며 마침내 하비로 갔다. 

[전략]典略 – 김원휴(金元休)의 이름은 상(尙)이고 경조(京兆) 사람이다. 김상은 같은 군 출신의 위휴보(韋休甫), 제오문휴(第五文休)와 함께 이름을 날리니 그들을 삼휴(三休)라 불렀다. 김상은 헌제(獻帝)가 처음 연주자사로 삼자 동쪽으로 갔는데, 태조가 이미 연주를 차지하고 있자 남쪽으로 가서 원술에게 의탁했다. 원술은 제호를 참칭하고 김상을 태위(太尉)로 삼고자 했는데, 감히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못하고 사사로이 사람을 시켜 넌지시 뜻을 전했으나 김상은 뜻을 굽히지 않았고 원술 또한 감히 강박하지 못했다. 건안 초, 김상이 달아나 돌아오려다 원술에게 해를 입었다. 그 뒤 김상의 상(喪-관)과 태부 마일제의 상(喪)이 함께 경사(京師-수도)에 이르렀다. 천자는 김상의 충렬(忠烈)을 가상히 여겨 그를 위해 탄식하고 백관들에게 조령을 내려 조문하게 하고 김상의 아들 김위(金瑋)를 낭중에 임명했으니, 마일제(에 대한 예우)와 서로 같지 않았다. 

[영웅기] – 여포가 물과 뭍으로 동쪽으로 내려와 하비 서쪽 40리 되는 곳에 도착했다. 유비의 중랑장 단양(丹楊)사람 허탐(許耽)은 밤을 틈타 사마 장광(章誑)을 여포에게로 보냈다. 그가 말했다, 

“장익덕(張益德-장비)이 하비상 조표(曹豹)와 서로 다투어 익덕이 조표를 죽이니 성중에 대란이 일어 서로 믿지 못합니다. 단양병(丹楊兵) 천 명이 서쪽 백문성(白門城) 안에 주둔하고 있는데 장군께서 동쪽으로 왔다는 말을 듣고 모두 펄쩍 뛰며 다시 살아난 듯이 기뻐하고 있습니다. 장군의 군사들이 성 서문(西門)으로 향하면 단양군(丹楊軍)이 즉시 성문을 열어 장군을 안으로 들여보낼 것입니다.” 

이에 여포는 밤중에 진격하여 새벽에 성 아래에 도착했다. 날이 밝자 단양병이 성문을 열어 여포의 군사들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여포는 성문 위에 앉아 보병과 기병으로 불을 놓아 익덕의 군을 대파하고, 유비의 처자식과 군자(軍資-군자금), 부곡(部曲), 제장들의 가구(家口-가족)를 노획했다. 

원술이 장수 기령(紀靈) 등과 보기(步騎) 3만을 보내 유비를 공격하니 유비는 여포에게 구원을 청했다. 여포의 제장들이 여포에게 말했다, 

“장군은 늘 유비를 죽이고자 했으니 이제 가히 원술의 손을 빌릴 만합니다.” 

여포가 말했다, 

“그렇지 않소. 원술이 만약 유비를 격파하면 북쪽으로 태산(太山)같은 제장들과 연결될 것이니 나는 원술에게 포위당하게 되오. 구원하지 않을 수 없소.” 

곧 보병 1천, 기병 2백을 엄비해 급히 유비에게로 나아갔다. 

기령 등은 여포가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모두 군을 거두고 감히 다시 공격하지 못했다. 여포는 패(沛) 남서쪽 1리 되는 곳에 둔치고 영하(鈴下-시종 군사)를 보내 기령 등을 청하니 기령 등이 또한 여포를 청해 함께 먹고 마셨다. 여포가 기령 등에게 말했다, 

“현덕(玄德-유비)은 내 동생이오. 동생이 제군(諸君)들에게 곤란을 겪으니 이 때문에 구원하러 왔소이다. 내 성정이 어울려 싸우는 것은 좋아하지 않으나 다만 싸움을 화해시키는 것은 좋아하오.” 

여포는 문후(門候-문지기 관원)에 명해 영문(營門)에 극(戟) 하나를 세우게 했다. 여포가 말했다, 

“제군(諸君)들은 내가 극(戟)의 소지(小支-극의 가지창 부분)를 쏘는 것을 보시오. 적중하면 제군들은 응당 화해한 후 떠나고 적중하지 않으면 남아서 결투(決鬪)하시오.” 

여포가 활을 들어 극을 쏘았는데 소지(小支)를 정확히 맞췄다. 제장들이 모두 놀라 말하길, ‘장군은 천위(天威)를 갖추고 있다’고 했다. 다음날, 다시 연회를 베푼 뒤 각자 군을 물렸다. 

건안 원년(196년) 6월, 밤중에 여포의 장수 하내(河內)인 학맹(郝萌)을 반란을 일으켜 군사들을 이끌고 여포의 치소인 하비부(下邳府)로 쳐들어왔다. 청사의 합문 밖에 이르러 함께 함성을 지르며 합문을 공격했는데, 문이 견고해 들어가지 못했다. 여포는 반란을 일으킨 자가 누군지 몰랐기에 곧바로 부인을 이끌고 과두단의(科頭袒衣-관을 쓰지 않은 맨머리에 옷을 갖춰 입지 못함)로 측간으로 들어가 벽을 밀어내고 빠져나갔고, 도독 고순(高順)의 군영으로 가 고순의 군영 문을 곧바로 밀어젖히고 들어갔다. 고순이 말했다, 

“장군께서 말하지 않은 것이 있지 않으십니까?” 

여포가 말했다, 

“하내 놈들의 말소리였소.” 

고순이 말했다, 

“이는 학맹이로군요."

고순은 즉시 엄병(嚴兵)하여 (하비)부로 들어가 학맹의 군사들에게 일제히 궁노(弓弩)를 쏘았다. 학맹의 군사들은 어지러워져 패주했는데 날이 밝자 그들의 군영으로 되돌아갔다. 학맹의 장수 조성(曹性)이 학맹에게 반기를 드니, 학맹은 조성을 찌르고 조성은 학맹의 한쪽 어깨를 찍었다. 고순이 학맹을 참수하고는 조성을 수레에 태워 여포에게로 보냈다. 여포가 묻자 조성이 대답했다, 

“학맹은 원술의 모책을 받들었습니다.” 

함께 모의한 자가 모두 누구인지 묻자 조성이 말했다, 

“진궁(陳宮)이 공모했습니다.” 

이때 진궁이 그 자리에 있었는데 얼굴이 붉어져 곁에 있던 사람들이 알아차릴 정도였다. 여포는 진궁이 대장(大將)이므로 이를 불문에 부쳤다. 조성이 말했다, 

“학맹이 늘 이에 관해 물었으나 저 조성은 말하길 ‘여장군은 대장으로 비범하니 공격할 수 없다’고 했으나 뜻밖에 학맹이 광혹(狂惑)되어 그치지 못했습니다.” 

여포가 말했다, 

“경이 건아(健兒)요!” 

조성을 잘 치료하고 보살폈고 상처가 다 낫자 학맹의 옛 군영을 안무(安撫)하고 그 군사들을 거느리게 했다. 

원술은 여포와 결탁해 원군으로 삼고자 하여, 이에 자신의 아들을 위해 여포의 딸을 청하니 여포가 이를 허락했다. 원술은 사자 한윤(韓胤)을 보내 제호를 참칭한 일에 관해 여포에게 고하고 아울러 며느리(여포의 딸)를 맞이하고자 했다. 

패상(沛相) 진규(陳珪)는 원술과 여포가 혼인으로 맺어지면 서주(徐州)와 양주(揚州)가 합종(合從)하는 것이니 장차 국난(國難)이 되리라 여겼다. 이에 여포에게로 가서 설득했다, 

“조공(曹公-조조)이 천자를 봉영(奉迎)해 국정을 보좌하고 그 위령(威靈)을 세상에 드날리고 장차 사해를 정벌할 것이니, 장군께서는 의당 그와 함께 힘을 모아 계책을 세워 태산 같은 안녕을 도모해야 합니다. 지금 원술과 혼인을 맺으면 천하에 불의(不義)의 이름을 덮어쓰게 되니 필시 누란지위(累卵之危-큰 위험)가 있을 것입니다.” 

여포는 또한 원술이 당초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은 일에 원망을 품고 있었으므로, 딸이 이미 길을 떠났으나 이를 뒤쫓아 되돌아오게 하여 혼인을 끊고, 한윤을 형구에 묶어 보내니 허도의 저자거리에 효수(梟首-참수되어 목이 내걸림)되었다. 

진규는 아들인 진등(陳登)을 태조에게 사자로 보내고자 했으나 여포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때마침 사자가 당도해 여포를 좌장군(左將軍)에 임명하자, 여포는 크게 기뻐하며 즉시 진등이 가는 것을 들어주고, 아울러 장(章-문체의 일종)을 받들고 가서 사은(謝恩)하게 했다. (11) 

(11) [영웅기] – 당초 천자가 하동(河東)에 있을 때 손수 붓으로 판서(版書)를 써서 여포에게 와서 영접하도록 했다. 여포의 군(軍)에는 비축된 양식이 없어 능히 응하지 못하니 사자를 보내 글을 올렸다. 조정에서는 여포를 평동장군(平東將軍)으로 삼고 평도후(平陶侯)에 봉했는데, 사자가 산양(山陽)의 경계에서 문자(文字-문서)를 잃어버렸다. 또한 태조가 손수 서신을 보내 여포를 후하게 위로하고 몸을 일으켜 천자를 영접하여 응당 천하를 평정할 뜻을 품어야 한다고 했다. 아울러 조서를 내려 공손찬, 원술, 한섬, 양봉 등을 구포(購捕-상을 걸고 체포함)했다. 

진등이 태조를 접견하며 진술하기를, 

‘여포는 용맹하나 꾀가 없고 거취(去就-행동거지)가 가벼우니 의당 조기에 도모해야 한다.’ 

고 했다. 태조가 말했다, 

“여포는 이리새끼와 같은 야심(野心)을 가진 자로 실로 오래도록 기르기 어려우니, 경이 아니면 누가 능히 그 실체를 통찰할 수 있겠소.” 

이에 진규의 관질을 중(中) 2천석으로 올리고 진등을 광릉(廣陵)태수로 삼았다. 헤어질 때 태조는 진등의 손을 잡으며 말하길, 

“동쪽의 일은 경에게 부탁하오.”

라 하고는, 진등에게 명해 은밀히 부중(部衆)을 모아 내응(內應)하도록 했다. 

여포가 크게 기뻐하며 다시 사자를 보내 천자에게 글을 올렸다, 

“신이 본래 대가(大駕-천자의 수레)를 영접해야 했으나 조조가 충효로운 것을 알기에 (조조가) 봉영(奉迎)해 허현에 도읍하게 했습니다. 신이 예전에 조조와 더불어 싸웠기에, 이제 조조가 폐하를 보부(保傅-보위하고 보좌함)하니 신이 바깥의 장수로서 스스로 뒤따르려 했으나 혐의(嫌疑-의심, 원한)가 남아있을까 두려워 이 때문에 서주(徐州)에서 대죄(待罪)하고 있으며 진퇴(進退)에 있어 스스로 안녕하지 못합니다.” 

태조에게 답서를 보냈다, 

“내가 남에게 죄를 지었으니 몸이 나뉘고 머리가 잘려야 하나 손수 노고를 위로받고 후하게 포장(褒獎-칭찬하고 장려함)받았소. 거듭 원술 등을 구포(購捕)하는 조서를 받았으니 나는 응당 목숨을 다해 힘쓰겠소.”

태조는 다시 봉거도위 왕칙(王則)을 사자로 보내 조서와 평동장군의 인수(印綬-관인과 인끈)를 가지고 가서 여포를 임명하게 했다. 또한 태조가 손수 써서 여포에게 보낸 서신에서 말했다, 

“장군을 크게 봉하는 문서를 산양둔(山陽屯)에서 잃어버렸소. 국가에 좋은 금이 없어 내가 스스로 집안의 좋은 금을 취해 관인을 다시 만들고, 국가에 자수(紫綬-자주색 인끈)가 없어 내가 차고 있던 자수(紫綬)를 보내 내 마음을 보이나, 장군이 쓰기에 좋지 않을지도 모르겠소. 원술이 천자를 칭하니 장군이 이를 제지하고 (원술의) 장(章)이 통하지 못하게 했소. 조정에서는 장군을 믿고 있고 거듭 중임했으니 서로 충성(忠誠)을 밝히도록 합시다.” 

이에 여포가 진등을 보내 장(章)을 받들고 가서 사은(謝恩)하게 하고, 아울러 좋은 인끈(綬) 하나를 보내 태조에게 답례했다. 

당초 여포는 진등이 서주목(徐州牧)을 받아오기를 원했었는데, 진등이 돌아오자 분노하여 극(戟)을 뽑아 탁자를 찍으며 말했다, 

“경의 부친이 내게 조공(曹公-조조)과 협력하길 권하여 공로(公路-원술)와의 혼사도 끊었소. 내가 구하던 것은 지금 하나라도 얻은 것이 없는데, 경의 부자는 나란히 현중(顯重-지위가 오르고 권세가 중해짐)되었으니 경이 나를 팔아먹은 것이오! 경이 나를 위해 말했다면, 그 말이 무엇이었소?” 

진등이 태연하게 천천히 여포를 깨우치듯 말했다, 

“제가 조공을 만나 이르길, ‘장군을 대우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호랑이를 기르는 것과 같아 응당 고기를 배불리 먹여야 하니, 배부르지 않으면 장차 사람을 해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공이 이르길, ‘경의 말과 같지 않소. 비유하자면 매를 기르는 것과 같아서 배가 고프면 부릴 수 있으나 배가 부르면 날아가 버릴 것이오.’라 했으니, 그 말이 이와 같았습니다.” 

이에 여포가 노기를 풀었다.

원술이 분노하여 한섬(韓暹), 양봉(楊奉) 등과 세력을 연결하고 대장 장훈(張勳)을 보내 여포를 공격했다. 여포가 진규에게 말했다, 

“지금 원술 군이 쳐들어온 것은 경 때문이오. 이 일을 어찌해야 되겠소?” 

진규가 말했다, 

“한섬, 양봉과 원술은 졸지에 합해진 군사일 뿐입니다. 책모(策謀)가 평소에 정해져 있던 것도 아니니 능히 서로 유지할 수 없습니다. 제 아들인 진등이 이미 이를 헤아렸으니, 비유하자면 닭들이 서로 연결한 것으로 함께 둥지를 틀지 못하니 가히 뿔뿔이 흩어질 것입니다.” 

여포가 진규의 계책을 채용해 사람을 보내 한섬, 양봉을 설득하길, 자신과 힘을 합해 원술 군을 공격하고 빼앗은 군자(軍資)는 모두 한섬, 양봉에게 준다고 했다. 한섬, 양봉이 이를 좇아서 장훈을 대파했다. (12) 

(12) [구주춘추]九州春秋 – 여포가 한섬, 양봉에게 서신을 보냈다, 

“두 장군이 대가(大駕)를 모시고 동쪽으로 온 것은 나라에 으뜸 공을 세운 것으로 응당 그 공훈이 죽백(竹帛)에 기록되어 만세(萬世)에 불후(不朽)할 것이오. 지금 원술이 반역하니 응당 함께 주살하고 토벌해야 하는데, 어찌 적신(賊臣)과 힘을 합해 도리어 이 여포를 공격하시오? 

나는 동탁을 죽인 공이 있어 두 장군과 더불어 공신(功臣)이오. 이제 가히 함께 원술을 공격해 천하에 공을 세울 만하니, 이때를 놓쳐서는 안 되오.” 

한섬, 양봉이 이 서신을 받고 계획을 바꿔 여포를 따랐다. 여포가 진군하여 장훈 등의 둔영과 백보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 때, 한섬과 양봉의 군사들이 동시에 공격해 열 명의 장수를 참수하고, 살상(殺傷)되고 물에 떨어져 죽은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영웅기] – 그 뒤 여포는 또 한섬, 양봉의 2군과 함께 수춘(壽春-양주 구강군 수춘현)으로 향하니, 물과 뭍으로 아울러 진격하며 지나는 곳마다 노략(虜略)했다. 종리(鍾離-양주 구강군 종리현)에 이르러 크게 노획하고 되돌아갔다. 회수(淮水)를 건너 그 북쪽에 도달한 뒤 원술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족하(足下-귀하)는 군(軍)이 강성한 것을 믿고 늘 호언하기를, (휘하의) 맹장(猛將), 무사(武士)들이 서로 탄멸(呑滅)하고자 하여 늘 이를 억제한다고 하셨소. 내가 비록 용맹하지 못하지만 회수 남쪽에서 한 때의 시간동안 호보(虎步-범처럼 거님)하였으나 족하는 수춘에 쥐새끼처럼 숨어 있고 고개를 내미는 자 조차 없으니 맹장, 무사들은 모두 어디에 있단 말이오? 족하는 큰소리 쳐서 천하를 속이는 것을 좋아하지만 어찌 천하인 들을 모두 속일 수 있겠소? 

옛날 군사들이 교전할 때에도 그 사이에 사신은 오갔고, 책략을 꾸미는 것도 나 여포가 선창(先唱)한 일이 아니오.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니 다시 소식 전할 수 있을 것이오.” 

여포 군이 모두 건넌 뒤에 원술이 친히 보기 5천을 일으켜 이를 이끌고 회수 가에 이르자, 여포의 기병들이 모두 회수 북쪽에서 크게 비웃은 뒤 되돌아갔다. 

이때 동해(東海) 사람 소건(蕭建)이 낭야상(瑯邪相)이 되어, 거(莒-서주 낭야국 거현)를 치소로 삼고 성을 보전해 스스로 지키며, 여포와 서로 통하지 않았다. 여포가 소건에게 서신을 보냈다, 

“천하 인들이 거병한 것은 본래 동탁을 주살하려는 것이었소. 내가 동탁을 죽이고 관동(關東)으로 와서는 군사를 구해 서쪽으로 대가(大駕)를 영접해 낙경(洛京-낙양)을 광복(光復-새로이 회복함)하려 했으나, 제장들은 도리어 서로 공격하며 나라를 염려하지 않았소이다. 나는 오원(五原) 사람으로 (오원은) 서주와 5천여 리 떨어져 있고 하늘의 북서쪽 구석에 있는데 지금 하늘의 남동쪽 땅을 다투려고 온 것은 아니오. 거(莒)는 하비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의당 서로 통해야 하오. (그리하지 않는) 군(君-그대)은 마치 군(郡)에서는 저마다 스스로 황제노릇하고 현(縣)에서는 왕 노릇하는 것과 같소이다. 옛날 악의(樂毅)가 제(齊)를 공격할 때 순식간에 제(齊)의 70여 성을 떨어뜨렸으나 오직 거(莒), 즉묵(卽墨), 두 성은 떨어뜨리지 못했으니 이는 그 중에 전단(田單)이 있었기 때문이오. 내가 비록 악의는 아니지만 군(君) 또한 전단은 아니니, 내 서신을 받거든 지혜로운 자들과 잘 의논해보도록 하시오.” 

소건이 서신을 받자 주부(主簿)를 보내 전(牋-서신)을 지니고 가게하고 좋은 말 다섯 필을 바쳤다. 그 뒤 장패(臧霸)가 소건을 습격하여 격파하고 소건의 자실(資實-군수물자)을 빼앗았다. 여포가 이 일을 듣고 친히 보기(步騎)를 이끌고 거현으로 향했다. 고순(高順)이 간언했다, 

“장군께서 몸소 동탁을 주살하여 이적(夷狄)들에게 위세를 떨쳤으니 단좌고분(端坐顧盼-단정히 앉아 주위를 돌아봄)한다면 멀고 가까운 곳에서 자연 외복(畏服)할 것입니다. 가벼이 친히 출군해서는 안 됩니다. 혹 이기지 못한다면 명성을 손실함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여포는 이에 따르지 않았다. 장패는 여포의 노략질을 두려워하여 과연 성 위로 올라가 맞서니 여포는 이를 함락하지 못하고 군을 이끌고 하비로 되돌아왔다. 그 뒤 장패는 여포와 다시 화해했다. 

건안 3년(198년), 여포가 다시 모반하여 원술 편에 서고, 고순(高順)을 보내 패(沛)에서 유비를 공격해 격파했다. 태조는 하후돈(夏侯惇)을 보내 유비를 구원했으나 고순에게 패했다. 

태조가 친히 여포를 정벌해 그 성 아래에 도착하고 여포에게 서신을 보내 화복(禍福)에 관해 진술했다. 여포는 항복하고자 했으나 진궁(陳宮) 등이 스스로 죄가 깊었으므로 그 계책을 저지했다. (13) 

(13) [헌제춘추] – 태조군(太祖軍)이 팽성(彭城)에 이르자 진궁이 여포에게 말했다, 

“의당 역격(逆擊)하여 이일격로(以逸擊勞-편안히 쉰 군으로 지쳐있는 군을 들이침)한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습니다.” 

여포가 말했다, 

“저들이 와서 공격할 때를 기다려 사수(泗水) 속으로 몰아넣는 게 더 낫소.” 

태조군의 공격이 급박해지자 여포는 백문루(白門樓) 위에서 군사들에게 말했다, 

“경들은 서로 공격하지 마시오. 나는 응당 명공에게 자수(自首)할 것이오.” 

진궁이 말했다, 

“역적(逆賊) 조조가 어찌 명공과 같습니까! 오늘 항복하는 것은 계란을 바위에 던지는 것과 같으니 어찌 몸을 보전할 수 있겠습니까!” 

여포가 사람을 보내 원술에게 구원을 청하고 스스로 천여 기를 이끌고 출전했다 패주하고 성으로 돌아가 보전하고 감히 출성하지 못하였고 (14) 원술 또한 능히 구원하지 못했다. 

(14) [영웅기] – 여포가 허사(許汜), 왕해(王楷)를 보내 원술에게 위급함을 고했다. 원술이 말했다, 

“여포가 내게 딸을 보내지 않았으니 이치상 응당 패하게 되어 있소. 어찌 다시 와서 알리는 것이오?” 

허사와 왕해가 말했다, 

“명상(明上)께서 지금 여포를 구원하지 않으면 실패를 자초하게 됩니다! 여포가 무너지면 명상(明上) 또한 무너질 것입니다” 

이때 원술이 제호를 참칭했으니 이 때문에 그를 (명공이 아니라) 명상(明上)이라 부른 것이다. 이에 원술은 엄병(嚴兵)하여 여포를 성원(聲援)했다. 여포는 자신이 딸을 보내지 않은 일로 원술이 구원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비단으로 딸의 몸을 얽어 말 위에 묶은 뒤 밤중에 친히 딸을 데리고 나가 원술에게 보내려 했는데, 태조의 군사들과 조우해 그들이 활을 쏘며 가로막아 통과할 수 없자 다시 성으로 돌아왔다. 

여포는 진궁, 고순에게 성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기병을 이끌고 (출격해) 태조의 양도(糧道-군량수송로)를 끊으려 했다. 여포의 처가 말했다, 

“장군께서 친히 조공(曹公-조조)의 양도를 끊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진궁, 고순은 평소 서로 불화하니 장군께서 한번 나가시면 진궁, 고순은 필시 합심하여 함께 성을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일에 차질이 생긴다면 장군께서는 어디에서 자립(自立)하시겠습니까? 원컨대 장군께서는 이 점을 살피시어 진궁 등에 의해 그르쳐지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첩이 옛날 장안에 있을 때 이미 장군에게 버림받았으나 다행히 방서(龐舒)가 사사로이 첩의 몸을 숨겨주었으니, 지금 첩을 돌볼 필요는 없습니다.” 

여포는 처의 말을 듣고 고민하며 결단하지 못했다. 

[위씨춘추]魏氏春秋 – 진궁이 여포에게 말했다, 

“조공(曹公)이 멀리서 왔으니 사세상 오래 버틸 수 없습니다. 만약 장군께서 보기(步騎)를 이끌고 출둔(出屯)하면 밖에서 세력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저는 남은 군사들을 이끌고 안에서 성문을 닫고 수비하다가, (적군이) 장군께로 향한다면 제가 군을 이끌고 그 배후를 치고, 성을 공격한다면 장군께서 밖에서 구원하면 됩니다. 열흘을 지나지 않아 필시 적군의 군량이 다할 것이니 이를 들이치면 격파할 수 있습니다.” 

여포가 이를 옳게 여겼다. 여포의 처가 말했다, 

“지난날 조씨(曹氏-조조)는 공대(公臺-진궁)를 어린아이처럼 (귀하에) 대했는데도 오히려 그를 버리고 우리에게로 왔습니다. 지금 장군이 공대를 대우함이 조공보다 더 후하지 않은데, 성 전부를 그에게 맡긴 채 처자를 버리고 외로운 군(軍)으로 멀리 나가려 하십니다. 만약 하루아침에 변고가 생긴다면 첩이 어찌 장군의 처로 남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여포가 그만두었다. 

여포가 비록 효맹(驍猛-사납고 용맹함)했으나 꾀가 없고 시기(猜忌-의심하고 꺼림)가 많아 그 무리들을 능히 제어하지 못하고 다만 제장들을 믿고 의지했는데, 제장들은 각각 뜻이 달라 스스로 의심하니 이 때문에 매번 싸울 때마다 패전이 많았다. 태조가 참호를 파고 성을 포위한지 석 달이 지나자 위아래의 마음이 흐트러지니, 여포의 장수 후성(侯成), 송헌(宋憲), 위속(魏續)이 진궁을 포박하고 그 군사들을 이끌고 투항했다. (15) 

(15) [구주춘추] – 당초 여포의 기장(騎將) 후성(侯成)은 객(客)을 시켜 말 15필을 방목하게 했는데, 객이 이 말들을 모두 몰고 떠나 패성(沛城)으로 향하면서 유비에게 귀부하려고 했다. 후성은 스스로 기병을 이끌고 이를 뒤쫓아 말들을 모두 되찾아 돌아왔다. 제장들이 모여 하례하자 후성은 5-6곡(斛)의 술을 빚고 사냥해서 잡은 10여 두의 돼지를 내놓았는데 먹고 마시기 전에 먼저 돼지 반 마리와 다섯 두(斗)의 술을 가지고 여포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고 말했다, 

“장군의 은덕으로 잃어버렸던 말을 뒤쫓아 되찾았습니다. 제장들이 와서 하례해서 직접 술을 조금 빚고 사냥으로 잡은 돼지를 내놓았습니다. 감히 먹고 마시기 전에 먼저 작으나마 장군께 바칩니다.” 

여포가 대노해 말했다, 

“내가 술을 금했는데 경은 술을 빚어 제장들과 형제처럼 함께 먹고 마시니, 나를 죽이기로 공모라도 하는 것이오?” 

후성이 크게 두려워하며 떠났다. 빚은 술을 버리고 제장들을 되돌려 보냈다. 이로 말미암아 스스로 의심을 품게 되었고, 태조가 하비를 포위하자 후성은 마침내 군사들을 이끌고 항복했다. 

송본 십일가주 손자병법에서 조조가 말하기를, 

“10으로써 적의 1을 에워싸는 것, 이것은 장수의 지혜와 용맹함이 비등하고 병사가 이둔(利鈍=날카롭거나 둔함)한 것이 비슷한 경우를 이르는 것이다. 만약 주(主=수비하는 쪽)가 약하고 객(客=공격하는 쪽)이 강한 경우, 나 조조는 2배의 병력으로 하비를 포위하여 여포를 산 채로 잡았다."

여포는 그 휘하들과 함께 백문루(白門樓)에 올랐으나 군사들이 둘러싸 위급해지자 내려와서 항복하니, 마침내 여포를 사로잡았다.

여포가 말했다, 

“묶은 것이 너무 조이니 조금 느슨하게 해 주시오.”

태조가 말했다, 

“범을 묶는데 꽉 조이지 않을 수 없다.” 

여포가 청했다, 

“명공(明公)이 근심하던 것이 나 여포인데 이제 내가 이미 항복했으니 천하에 걱정할 게 없소이다. 명공이 보병을 이끌며 내게 기병을 이끌게 한다면 어찌 천하를 평정하지 못하겠소이까?” 

태조는 의심하는 기색을 띄었다. 유비가 진언했다, 

“명공은 여포가 정건양(丁建陽-정원)과 동태사(董太師-동탁)를 섬기던 일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이에 태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포가 유비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이 아이가 가장 믿지 못할 놈이다!” (16) 

(16) [영웅기] - 여포가 태조에게 말했다, 

“내가 제장들을 후대했으나 제장들은 위급해지자 모두 나를 배반했소.” 

태조가 말했다, 

“경은 처를 저버리고 제장들의 부인을 사랑했으면서 어찌 후대했다 하시오?” 

여포는 입을 다문 채 말이 없었다. 

[헌제춘추] - 여포가 태조에게 물었다, 

“명공은 어찌 이렇게 수척해 지셨습니까?” 

태조가 말했다, 

“군(君)이 어찌 나를 알아보시오?” 

여포가 말했다, 

“예전 낙양에 있을 때 온씨원(溫氏園)에서 만났습니다.” 

태조가 말했다, 

“그렇소. 내가 그 일을 잊었었소. 내가 수척해 진 것은 좀 더 빨리 (군을) 사로잡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 했기 때문이오.”

여포가 말했다, 

“제(齊) 환공(桓公)은 활에 맞은 띠고리를 버리고 (그 활을 쏜) 관중(管仲)을 재상으로 삼았습니다. 지금 나 여포로 하여금 고굉(股肱-팔다리)의 힘을 다하게 한다면 공의 전구(前驅-말을 타고 선도하는 자, 선봉)가 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여포가 꽉 조이게 포박되어 있었으므로 유비에게 말했다, 

“현덕, 경은 빈객으로 앉아 있고 나는 사로잡힌 포로 신세가 되었구려. 느슨하게 묶어달라고 한마디 해줄 수 없겠소?” 

태조가 웃으며 말했다, 

“어찌 내게 말하지 않고 사군(使君-주자사 급의 고관에 대한 경칭. 여기서는 유비)에게 소명(訴明-호소)하시오?” 

여포를 살려주려는 뜻을 품고 포박을 느슨하게 해주라 명했다. 주부(主簿) 왕필(王必)이 달려와 진언했다, 

“여포는 사나운 포로이고 그 무리들이 가까이 밖에 있으니 느슨하게 해주면 안 됩니다.” 

태조가 말했다, 

“본래 느슨하게 해주려 했으나 주부가 말을 듣지 않으니 어찌하겠소?” 

이에 여포를 액살(縊殺-목을 매어 죽임)했다. 여포는 진궁, 고순 등과 함께 모두 효수(梟首)되어 허도로 보내졌고 그 뒤 매장되었다. (17) 

(17) [영웅기] – 고순(高順)은 사람됨이 청백(淸白-청렴결백)하고 위엄이 있었으며 술을 마시지 않고 궤유(饋遺-선물)를 받지 않았다. 칠백 여 군사를 거느렸으나 천 명이라 일컬었는데, 개갑(鎧甲-갑옷), 투구(鬪具-싸움 도구)가 모두 정련(精練), 정제(齊整)하고 매번 공격할 때마다 격파하지 못함이 없으니 함진영(陷陳營)이라 불렀다. 고순이 매번 여포에게 간언하길, 

“무릇 집안을 무너뜨리고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충신(忠臣)이나 밝고 지혜로운 자가 없어서가 아니라 다만 그들이 쓰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장군께서 거동(擧動)하실 때 치밀히 생각하지 않고 번번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길 좋아하시니 그런 잘못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라고 했다. 여포는 그의 충성됨을 알았으나 능히 쓰지는 못했다. 여포는 학맹의 반란을 진압한 후 다시 고순을 소원하게 대하고 위속(魏續)이 안팎의 친척이라 하여 고순이 거느리던 군사들을 모두 빼앗아 위속에게 주었다. 그러다 싸움이 있게 되자 영을 내려 위속이 거느리던 군사를 고순이 이끌게 했는데 고순은 또한 끝내 원망하는 마음을 품지 않았다. 

태조가 진궁을 사로잡았을 때, 그의 노모와 딸을 살려야 할지 그렇지 않은지에 관해 물었다. 진궁이 대답했다, 

“제가 듣기로 효(孝)로써 천하를 다스리는 자는 남의 부모를 해치지 않는다 하고 사해(四海)에 인(仁)을 베푸는 자는 남의 제사를 폐하지 않는다 했습니다. 노모의 일은 공에게 달려 있을 뿐 제게 달린 일이 아닙니다.” 

태조가 명을 내려 그의 노모를 죽을 때까지 보살피게 하고 그의 딸을 시집보내 주었다. (18) 

(18) 어씨(魚氏-어환)의 [전략] – 진궁(陳宮)의 자는 공대(公臺)이고 동군(東郡) 사람이다. 강직(剛直) 열장(烈壯-장렬)하고 어려서 해내(海內)에 이름이 알려진 선비들과 모두 서로 연결(連結-교우)했다. 천하에 난이 일자 처음에는 태조를 따랐는데 그 뒤 스스로 의심을 품고 여포를 따랐다. 여포를 위해 획책(畫策-계책을 세움)했으나 여포는 매번 그 계책을 따르지 않았다. 하비에서 패하자 군사들이 여포와 진궁을 붙잡았는데, 태조가 그들 모두를 만나보고 평생에 관해 말하니 여포는 살려 달라는 말을 했다. 태조가 진궁에게 말했다, 

“공대, 경은 평소에 늘 스스로 지계(智計-지모)를 갖추어 남음이 있다고 자부했는데 이제 결국 이리 되었으니 어찌된 일이오?” 

진궁이 돌아보며 여포를 가리켜 말했다, 

“다만 이 사람이 내 말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만약 그가 내 말을 좇았다면 필시 사로잡히는 신세는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태조가 웃으며 말했다, 

“오늘 일은 무어라 하시겠소?” 

진궁이 말했다, 

“신하가 되어 충성하지 않고 자식이 되어 효도하지 않았으니 죽는 것이 그 운명입니다.” 

태조가 말했다, 

“경의 뜻이 그러하다면 경의 노모는 어찌하시려오?” 

진궁이 말했다, 

“제가 듣기로 장차 효로써 천하를 다스리려는 자는 남의 부모를 해치지 않는다 했으니, 노모의 존부(存否-생사)는 명공에게 달려 있습니다.” 

태조가 말했다, 

“경의 처자는 어떠하오?” 

진궁이 말했다, 

“제가 듣기로 장차 천하에 인정(仁政)을 베풀려는 자는 남의 제사를 끊지 않는다 했습니다. 처자의 존부 또한 명공에게 달려 있습니다.” 

태조가 다시 말하지 않았다. 진궁이 말했다, 

“청컨대 저를 밖으로 내보낸 뒤 죽여서 군법을 밝히십시오.” 

그리고는 내보내기를 재촉하니 제지할 수 없었다. 태조가 울면서 전송했으나 진궁은 다시 되돌아보지 않았다. 진궁이 죽은 뒤 태조가 그 일가를 대우함이 당초(진궁이 태조 휘하에 있을 때)보다 더 후했다. 

분할: [[진등전]]

진수의 평: 

평한다. 여포는 효호(虓虎-포효하는 범)의 용맹을 지녔다. 그러나 특출한 지략은 없었고 경박하고 교활하게 반복(反覆-언행을 이리저리 바꿈)하여 그의 안중에는 오직 이익 밖에 없었으니,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런 자가 이멸(夷滅-멸망)되지 않은 적이 없다. 

옛날 한(漢) 광무제는 방맹(龐萌)에게 속았고 근래 위(魏) 태조(太祖) 또한 장막에게 그르쳐졌으니, ([상서]에서)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 즉 지혜로움(哲)이고 요임금도 이를 어렵게 여겼다 하더니, 과연 그러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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