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출처: 史랑방  
 

공손찬(公孫瓚)은 자(字)가 백규(伯珪)고 요서(遼西) 영지(令支) 사람이다. (令의 음은 郞+定. 支의 음은 其+兒.) 군(郡)의 문하서좌(門下書佐,군郡 태수의 속관명)가 되었다. 자의(姿儀,좋은 자태와 풍채)를 갖추고 음성(音聲)이 크니 후태수(侯太守)가 그를 기특하게 여겨(器) 자신의 딸을 처로 삼게 하고는 
[1] 탁군(涿郡)의 노식(盧植)에게로 보내 경서(經書)를 읽게 했다. 뒤에 다시 군리(郡吏)가 되었다. 

 [1] 「전략」典略 - 공손찬은 그 성정이 변혜(辯慧,말재주가 있고 총명함)하여 매번 일을 아뢸 때 조금씩 포함시키지 않고 늘 몇몇 조(曹)의 사무를 총괄하여 말했으나 잊거나 그르치는 일이 없으니 태수(太守)가 그 재주를 기특하게 여겼다. 

유태수(劉太守)가 (※) 사고에 좌죄되어 정위(廷尉)에게로 소환되어 나아가니 공손찬이 수레를 몰며 몸소 도양(徒養,수행하며 잡무를 시중듦)하는 일을 맡았다. 

※ 유태수(劉太守) / 삼국지집해 – 혜동(惠棟, 淸) 왈,「영웅기」에 의하면 태수는 유기(劉基)이다. (惠棟曰, 英雄記太守劉基.) 

그러다 유(劉)(태수)가 일남(日南, 교주 일남군)으로 유배되자 공손찬이 양식(米)과 고기를 갖추어 북망(北芒)(산)에서 선인(先人, 조상)에게 제를 올리며 (※) 술잔을 들고 축도했다. 

 ※「후한서」공손찬전에 의하면 공손찬의 가문이 원래 대대로 2천석 고관의 집안이나 공손찬의 모친이 천한 출신이라 군(郡)의 낮은 관리가 되었다고 했는데, 공손찬 조상 중에 낙양 북쪽인 북망산에 묻힌 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전에는 다른 이의 자식이었으나 지금은 다른 이의 신하이니 응당 일남(日南)으로 가야 합니다. 일남은 장기(瘴氣, 유행성 열병, 학질 등인 장려瘴癘의 원인이 되는 기운)가 있어 혹 돌아오지 못할까 두려우니 이곳에서 선인들께 이별을 고합니다.”  

두 번 절하고 강개(慷慨)히 몸을 일으키니 당시 이를 지켜보던 자들 중에 흐느끼지 않는 이가 없었다. 유(劉)가 (유배지로 가던) 도중에 사면되어 돌아왔다. 공손찬은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낭(郞)이 되었고 요동속국(遼東屬國)의 장사(長史)로 제수되었다. (※)  

※ 속국(屬國)은 군, 국에 비견되는 것으로 변경에 설치되던 특수한 행정단위이고(ex.요동속국, 장액속국 등) (속국)도위(都尉, 속국의 장관)와 승(丞, 수석속관) 한 명씩을 두었습니다. 한편 군(郡)에는 태수 한 명과 승(丞) 한 명을 두었는데, 특히 변경의 군(郡)에는 원래 삼공이나 장군부의 속관인 장사(長史)를 丞 대신 두었습니다. 이것이 확대되어 속국에도 승 대신 장사를 두었고 바로 공손찬이 이에 해당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일찍이 수십 기(騎)를 뒤따라 요새를 순찰하다가 선비(鮮卑)족 수백 기(騎)를 만난 적이 있다. 이에 공손찬이 물러나 비어 있던 정(亭, 역사 驛舍 또는 변경의 척후시설)으로 들어가 뒤따르던 기병들에게 약속했다, 

“지금 (적진을) 부딪치지 않으면 모두 죽을 것이다.” 

그리고는 공손찬이 몸소 양쪽 끝에 칼날이 있는 모(矛,창의 일종)를 쥐고는 말달려 나가 호(胡,북방민족 통칭, 여기선 선비족)를 찔러 수십 명을 살상하고 또한 자신을 따르던 기병 절반을 잃었으나 마침내 벗어날 수 있었다. 선비(鮮卑)가 징예(懲艾,징벌되어 두려움을 품음)하여 뒤에는 감히 다시 새(塞)를 침입하지 못했다. 탁령(涿令,탁군 탁현의 현령)으로 올랐다.  

광화(光和: 영제 178-183년) 중 양주(涼州)에서 적(賊)이 봉기하자 (※) 

※ 양주적(涼州賊)이 봉기한 것은 중평 원년(184년) (후한서 효영제기, 원굉의 후한기, 자치통감) / 유주에서 장순, 구역거 등이 봉기한 것은 중평 4년(187년) (후한서, 후한기, 자치통감)

유주(幽州)의 돌기(突騎) (※) 3천 명을 일으키고 공손찬에게 도독(都督)의 사무를 행한다는 전(傳,부첩符牒)을 내려 이를 거느리게 했다. 

※ 돌기(突騎)는 ‘적진에 충돌할 수 있는 정예기병’이란 뜻인데(「한 서」안사고 주나「후한서」이현 주) 후한 이래 자주 등장하기 시작하는 용어입니다. 당시에 정예기병이나 돌격기병의 통칭, 범칭으로 두루 쓰인 건 아니고 주로 유주나 오환족과 관련되어 쓰이는데, 혹 오환족 등이 쓰던 말을 음차하면서 적당한 뜻을 취해 쓴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군(軍)이 계중(薊中, 광양군 계현. 유주목의 치소)에 도착하니, 어양(漁陽) 사람 장순(張純)이 요서(遼西) 오환(烏丸) 구역거(丘力居) 등을 꾀어 모반하여 계중(薊中)을 겁략(劫略)하고 장군(將軍)을 자칭했다. [2] 

[2]「구주춘추」九州春秋 – 장순(張純)은 미천장군(彌天將軍), 안정왕(安定王)을 자칭했다.

관리와 백성을 약탈하고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속국(屬國)의 여러 성들을 공격하여 이르는 곳마다 잔파(殘破)했다. 

공손찬이 거느리던 부대를 이끌고 장순(張 純) 등을 추토(追討,추격해서 침)하여 공을 세우고 기도위(騎都尉)로 올랐다. 속국(屬國) 오환(烏丸) 탐지왕(貪至王)이 종인(種人)들을 이끌고 공손찬에게로 와서 항복했다. 중랑장(中郞將)으로 오르고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고, 진격하여 (요동)속국(屬國)에 주둔하고 5-6년 동안 호(胡)와 서로 공격했다. 구역거 등이 청주(靑州), 서주(徐州), 유주(幽州), 기주(冀州)의 네 주(州)를 초략해 피해를 입혔으나 공손찬이 이를 막지 못했다.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종정(宗正)인 동해(東海)사람 유백안(劉伯安, 유우劉虞의 字가 백안)이 덕의(德義)를 갖추었고 예전에 유주자사(幽州刺史)를 지내며 은혜와 신의를 드리워 융적(戎狄)들이 그에게 귀부하였으니 만약 그에게 진무(鎭撫)하게 하면 힘들이지 않고도 평정할 수 있다.’ 하였다. 이에 유우(劉虞)를 유주목(幽州牧)으로 삼았다. (※) 

[1] <오서><영웅기><위서>[[유우전]]으로 분할합니다.

※ 유우가 유주목에 임명된 것은 중평 5년(188년) (후한서 유우전, 자치통감)

유우가 임지에 도착해 사자를 호(胡)에게로 보내 이해(利害)로써 고하고 장순(張純)의 수급을 보내라고 꾸짖었다. 구역거(丘力居) 등이 유우가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며 각기 역관(譯)을 보내 스스로 귀부해왔다. 공손찬은 유우가 공을 세우는 것을 시기하여 이에 몰래 사람을 보내 도중에서 기다려 호(胡)의 사자를 죽이게 했다. 호(胡)가 그 정황을 알아채고 샛길을 통해 유우에게로 나아갔다. 유우가 주청하여 각 처의 주둔병들을 파하고 다만 공손찬만을 남겨 보기(步騎,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우북평(右北平)에 주둔하게 했다. 이에 장순(張純)이 처자를 버리고 달아나 선비(鮮卑)에게로 들어갔다가 그의 객(客,문객)인 왕정(王政)에게 살해되었고 그 수급이 유우에게 보내졌다. (※) 

※ 장순이 참수된 것은 중평 6년(189년) 3월 (후한서 효영제기, 후한기, 자치통감) 

왕정을 열후(列侯)에 봉했다. 유우는 이 공으로 이내 태위(太尉)에 임명되고 양분후(襄賁侯)에 봉해졌다. [2] 

[2]「영웅기」- 유우(劉虞)가 태위(太尉) 직을 사양하고는 위위(衞尉) 조모(趙謨), 익주목 유언(劉焉), 예주목 황완(黃琬), 남양태수 양속(羊續)을 천거하여 이들 모두에게 공(公)의 임무를 맡기도록 했다.

때마침 동탁이 낙양에 도착하여 유우를 대사마(大司馬)로 올리고 공손찬을 분무장군(奮武將軍)으로 삼고 계후(薊侯)에 봉했다. (※) 

※ 중평 6년(189년) 8월 28일(신미일)에 동탁이 소제를 영접해 환궁했고 (윈굉의 후한기, 자치통감), 9월 12일(을유일)에 태위 유우를 대사마로 삼고 동탁이 태위가 됨 (후한서, 자치통감)

관동(關東)의 의병(義兵)이 봉기하니 이에 동탁이 황제를 겁박해 서쪽으로 천도하고 유우(劉虞)를 징소해 태부(太傅)로 삼았으나 도로가 막혀 신명(信命,사자를 보내 전하는 명령)이 도착하지 못했다. 원소(袁紹), 한복(韓馥)이 의논하길, 어린 황제가 간신(姦臣)에게 제압되어 있어 천하 사람들의 마음이 귀의할 곳이 없고 유우는 종실(宗室)이고 이름이 알려져 있어 백성들이 바라는 사람이라 하여 마침내 유우를 황제로 추대했다. (※) 

※원소, 한복 등이 유우를 추대한 것은 초평 2년(191년) 정월 (삼국지 무제기, 원굉의 후한기, 자치통감) 

사자를 보내 유우에게 도착했으나 유우가 끝내 수락하려 하지 않았다. 원소 등이 다시 유우에게 상서의 사무를 겸하며 (영상서사領尙書事) 승제(承制, 황제의 뜻을 받들어 그 권한을 편의로 행사함)하여 (관작을) 봉배(封拜)하도록 권하니 유우는 이 또한 들어주지 않았으나 여전히 원소 등과 연화(連和,연합)했다. [1]  

[1]「구주춘추」九州春秋 – 원소(袁紹), 한복(韓馥)이 옛 낙랑태수(樂浪太守)인 감릉(甘陵) 사람 장기(張岐)를 시켜 의논한 내용을 지니고 유우에게 나아가게 해 (유우가) 존호(尊號)에 오르도록 했다. 유우가 엄중한 목소리로 장기를 꾸짖으며 말했다, 

“경이 어찌 감히 이 같은 말을 꺼내시오! 충효의 도(道)를 다 이루지도 못했소. (더구나) 나는 나라의 은혜를 받은 몸으로 천하가 어지러워진 때에 아직 목숨을 다해 나라의 수치를 제거하지도 못했으니 여러 주군(州郡)의 열의지사(烈義之士)들이 서쪽에서 육력(勠力,협력)해 어린 주인을 도와 영접하기를 바라오. 그런데 도리어 망령되이 역모를 꾸미고 충신(忠臣)을 더럽히려 하오!” 

 /「오서」吳書 – 한복이 원술에게 서신을 보내 (지금) 황제는 효영제(孝靈帝)의 자식이 아니니 강후(绛侯) 주발(周勃)과 관영(灌嬰)이 어린 임금을 주벌하여 폐립하고 대왕(代王, 즉 전한 문제文帝)을 맞아 옹립한 고사를 따르고자 한다 하며, 유우의 공덕, 치행(治行, 정치의 행실, 실적)이 화하(華夏,중국)에서 견줄 이가 없고 지금 공실의 방계친척이니 그 누구도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했다. 또한 말했다, “옛날 광무제가 전한 때 정왕(定王, 유발劉發)의 5대 손으로 대사마(大司馬)로 하북(河北)을 거느리다 경감(耿弇), 풍이(馮異)가 존호에 오르도록 권하니 마침내 경시제(更始帝)를 대신하였습니다. 지금 유공(劉公, 유우를 말함) 자신이 공왕(恭王)의 지별(枝別)이고 그 (대) 수가 또한 다섯이며 (※유우가 공왕의 5대손이라는 말) 대사마(大司馬)로써 유주목(幽州牧)을 겸하니 이는 광무제와 같은 점입니다.” 당시 네 별이 기미(箕尾) 자리에서 모이자 한복이 도참서를 칭탁하며 말하길 신인(神人)이 장차 연(燕) 땅의 분야에서 나타날 것이라 했다. 또한 제음(濟陰)의 남자 왕정(王定)이 옥인(玉印, 옥도장)을 얻었는데 그곳에 ‘우(虞)가 천자가 된다.’(虞爲天子)는 글이 있었다고 말했다. (※) 

※ 여러 징조의 해석 

/ 삼국지집해 – 하작(何焯, 淸) 왈, 네 개의 별이 기미 자리에서 모인 것은 소열(昭烈, 소열제 유비)이 탁군에서 일어난다는 징조이고 ‘우(虞)가 천자가 된다.’는 것은 위(魏)나라가 우(虞, 순임금)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조일청 왈, 당시 위나라가 순임금의 후예라는 말이 있었으므로 이 때문에 의문(義門, 하작의 호)이 이렇게 말했다. 장제전에 보인다. 

(※ 하작의 해석에 의하면 두 가지 사건은 유우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각각 유비와 조비가 황제가 될 조짐이라는 말입니다. 뒤의 虞爲天子에서 虞는 유우가 아니라 순임금의 후예 즉 조비라는 말인데, 장제전에 의하면 위 명제 때 고당륭이 교사를 지내는 일에 관해 논하면서 조씨를 순임금의 후예라고 주장하고 장제가 이를 반박하는데 결국 고당륭의 주장에 따라 위나라는 공식적으로 순임금의 후예임을 표방하게 됩니다.)

또한 두 개의 해가 대군(代郡)에서 뜨는 것을 보고는 유우가 응당 지금 황제를 대신해 즉위할 것이라 했다. 원소 또한 따로 서신을 보내 원술에게 유우를 추대하는 일에 관해 말했다. 당시 원술은 은밀히 불신지심(不臣之心, 신하노릇을 안 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어 국가에 장성한 황제가 있는 것이 이롭지 않다고 여겨 겉으로는 공의(公義)를 칭탁하며 거절하는 답장을 보냈다. 원소가 또한 사람을 시켜 은밀히 유우에게 알리니 유우는 나라에 정통(正統)(황제)이 있으니 신하로서 의당 할 말이 아니라 하며 고사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흉노로 달아나 스스로 관계를 끊고자 한다 하니 이에 원소 등이 유우를 황제로 추대하는 일을 그만두었다. 그러자 유우는 봉직(奉職), 수공(脩貢,중앙조정에 공물을 보냄)하며 더욱 공손하고 엄숙하게 처신하였고, 여러 외국(外國)인 강(羌), 호(胡)가 공헌(貢獻)하고자 하는 바가 있는데 도로가 통하지 않으면 이를 모두 자신이 대신 전송(傳送)하여 경사(京師,수도)로 보냈다.

당시 유우의 아들 유화(劉和)는 시중(侍中)이 되어 장안(長安)에 있었다. 천자가 동쪽으로 돌아가고 싶어 해 유화를 시켜 동탁을 속여 그에게서 달아나 은밀히 무관(武關)을 나와 유우에게로 가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자신을 영접하도록 했다. 유화가 도중에 원술(袁術)을 거쳐 가다 원술에게 천자의 뜻을 설명했다. 원술은 유우를 외원(外援)으로 삼는 것이 유리하다고 보아 유화를 머물게 하고 보내주지 않고는 (유우의) 군대가 도착하면 함께 서쪽으로 간다고 허락하며 유화로 하여금 유우에게 서신을 쓰도록 했다. 

유우가 유화의 서신을 받아 보고는 이에 수천 기(騎)를 보내 유화에게 나아가도록 했다. 공손찬(公孫瓚)은 원술에게 딴 뜻(역심, 야심)이 있음을 알고 군대를 보내지 않도록 하려고 유우를 말렸으나 유우는 들어주지 않았다. 공손찬은 원술이 이 일(자신이 말렸다는 것)을 듣고 원망할까 두려워하여 또한 그의 종제(從弟)인 공손월(公孫越)을 보내 1천 기를 거느리고 원술에게로 나아가 자신과 결탁하게 하고, 원술이 유화를 붙잡고 그 군대를 빼앗도록 은밀히 가르치게(깨우치게) 했다. 이로 말미암아 유우와 공손찬은 더욱 틈이 벌어졌다. (※) 유화가 원술에게서 달아나 북쪽으로 왔으나 다시 원소에게 억류되었다.  

※「자치통감」호삼성(胡三省, 宋말 元초) 주 – 앞서 유우가 공손찬과 불화가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불화가 더욱 심해진 것이다. 

당시 원술(袁術)이 손견(孫堅)을 보내 양성(陽城,예주 영천군 양성현)에서 동탁을 막게 하니 원소가 주앙(周昂)을 시켜 그 곳(양성)을 빼앗게 했다. (※) 

※ 원술(손견)을 공격해 양성을 빼앗은 인물

손견전 배송지 주 -「오록」吳錄 왈, 당시 관동의 주군(州郡)에서는 서로 겸병해 스스로 강대해지는 데 힘썼다. 원소는 회계 사람인 주우(周喁)를 보내 예주자사로 삼고 (예)주를 내습해 탈취했다. 손견이 개연히 탄식하며 말했다, 

“함께 의병을 일으켜 장차 사직을 구할 것이라 했다. 역적이 거의 격파되었는데 각자 이와 같이 하니 내가 응당 누구와 더불어 육력(戮力,협력)하겠는가!” 

말을 쏟아내고는 눈물을 흘렸다. 주우(周喁)는 자(字)가 인명(仁明)이고 주흔(周昕)의 동생이다.「회계전록」會稽典錄 왈, 당초 조공(曹公,조조)이 의병을 일으켜 사람을 보내 주우(周喁)를 맞이하니 주우가 병중(兵衆)을 수합해 2천명을 얻고는 조공을 따라 정벌하여 군사(軍師)가 되었다. 뒤에 손견과 더불어 예주(豫州)를 다투며 여러 번 싸워 실리(失利)했다. 때마침 차형(次兄,둘째 형)인 구강태수(九江太守) 주앙(周昂)이 원술에게 공격받자 주우가 가서 그를 도왔다. 군이 패하자 향리로 돌아갔다가 허공(許貢)에게 해를 입었다.: 

주흔(周昕), 주앙(周昂), 주우(周喁) 3형제가 모두 원소(조조) 편에 서서 원술과 싸웠는데, 위 본문에서 말하는 원소의 휘하로 손견과 싸운 인물에 대해 기록들이 각각 서로 다른 셈입니다. 즉, 여기의「삼국지」공손찬전 본문과 바로 뒤에 나오는 배송지 주「전략」의 공손찬 표문에서는 주앙,「후한서」공손찬전에서는 주흔, 위의「삼국지」손견전 주「오록」과「회계전록」에서는 주우 입니다. 

원술이 공손월을 보내 손견과 함께 주앙을 공격하게 했는데 이기지 못하고 공손월이 유시(流矢)에 맞아 죽었다. 공손찬이 분노해 말했다, 

“내 동생이 죽은 화(禍)는 원소(袁紹)에게서 비롯되었다.” 

그리고는 출군하여 반하(磐河,강 이름으로 평원군 반현般縣 근처로 보임)에 주둔하며 장차 원소에게 보복할 것이라 했다.  

원소가 두려워하여 자신이 패용하던 발해태수(勃海太守)의 인수(印綬,관인과 인끈)를 공손찬의 종제(從弟)인 공손범(公孫範)에게 주고 그를 발해군으로 보내 공손찬과 결원(結援,결탁)하고자 했다. 그러자 공손범은 발해병(勃海兵)으로 공손찬을 도와 청주, 서주의 황건적을 격파하고 그 군세가 더욱 성해졌고, 계교(界橋,현재 하북성 위현威縣의 동쪽. 당시 거록군, 위군, 청하국의 경계지점. 반현보다는 좀 더 남서쪽) 로 진군했다. [1] 

[1]「전략」典略에 기재된 공손찬이 원소의 죄상(罪狀)에 관해 올린 표(表) – 

“신이 듣기로 황희(皇羲, 복희씨伏羲氏)이래 처음 군신(君臣) 상하간의 일이 있게 되어 교화를 펴 백성을 이끌고 형벌로 난폭함을 금했습니다. 지금 행(行) 거기장군(車騎將軍) 원소(袁紹)는 선궤(先軌,선왕의 법도; 선대의 범례)를 칭탁해 남의 작위를 훔치고 그 성정이 사납고 어지러운데다 그 행위가 음란하고 더럽습니다. 예전 사예교위(司隸校尉)를 지낼 때 때마침 국가에 상화(喪禍, 재앙)가 일어났을 때를 만나 태후(太后)가 이어받아 섭정하고 하씨(何氏, 하진何進)가 보정(輔政)하자 원소가 오로지 간사하게 굴고 아첨하며 정직한 자를 천거하지 않았고 정원(丁原)을 시켜 맹진(孟津)을 불태우고 (※) 동탁(董卓)을 불러들여 난의 근원을 만들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원소의 첫 번째 죄입니다. 

(※ 후한서 공손찬전 이현 주 - 속한서 왈, 하진(何進)이 중상시 조충(趙忠) 등을 주살하고자 하니 이에 하진이 거짓으로 무맹도위(武猛都尉) 정원(丁原)으로 하여금 군사 수천 명을 풀어 하내(河內)에 도적이 있는 것처럼 하여 ‘흑산백(黑山伯)’이라 칭하고, 이 일을 아뢰며 조충 등을 주살해야 한다고 하고 이들이 평음(平陰, 하남군 평음현), 황하의 나루터를 불태워 관청이나 인가가 남아나지 않았다고 하여 태후를 두렵고 놀라게 했다.) 

동탁이 낙양으로 들어온 뒤 주상이 볼모가 되었으나 원소가 권휼(權譎, 권모, 적합한 모책)을 베풀어 군부(君父)를 구하지 못하고 절전(節傳, 부절과 부첩)을 내버려두고 숨어서 도망하여 작명(爵命)을 더럽히고 욕되게 하고 윗사람을 저버리고 불충(不忠)했으니, 이것이 원소의 두 번째 죄입니다.  

원소는 발해태수(勃海太守)가 되어 조용히 융마(戎馬, 군마; 군대)를 선발해 동탁을 공격함이 마땅했으나 부형(父兄)에게 이를 고하지 않아 태부(太傅, 원소의 숙부인 원외袁隗)의 문호(門戶, 가문)와 태복(太僕, 원술의 동복형인 원기(袁基)의 모자(母子)가 하루아침에 죽게 하여 불인불효(不仁不孝)했으니, 이것이 원소의 세 번째 죄입니다. 

원소가 군대를 일으킨 뒤 2년을 지내면서 국난(國難)을 돌보지 않고 스스로 널리 봉식(封殖, 재물을 수탈함)하였습니다. 이에 많은 재산과 양식을 쌓아두고도 오로지 급하지 않은 일에 몰두하여 부실(富室, 부잣집)을 할박(割剝, 착취)하고 수고(收考,잡아가두고 고문함)하여 돈을 뜯어내 백성들이 탄식하며 원통해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이것이 원소의 네 번째 죄입니다.  

한복(韓馥)을 핍박하여 그 빈 지위를 훔쳐 차지하고는 황제의 명(命)과 조은(詔恩, 천자의 조령으로 내린 은혜)을 사칭하여 금인(金印), 옥새(玉璽)를 깎았고 매번 문서를 하달할 때마다 검은 주머니로 밀봉하고 그 글에 ‘조서일봉(詔書一封) 강향후인(邟鄕侯印)’ 이라 적었습니다. (邟의 음은 口+ 浪.) (※) 

(※ 강향후는 당시 원소의 작위이며 ‘조서일봉’은 조서 하나가 봉해져 있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작성한 문서임에도 그걸 조서라고 함부로 사칭한 걸 비판하고 있습니다.) 

옛날 신실(新室, 왕망의 신나라)의 난 때는(or 옛날 왕망은 군주의 의례를 모방하는 등 어지러운 짓을 하여) 점점 심해지다 결국 진짜(황제)가 되었는데 지금 원소가 하는 짓이 이를 본따 모방하고 있으니, 이것이 원소의 다섯 번째 죄입니다. 

원소는 최거업(崔巨業)으로 하여금 별과 해를 살피게 하고 재화(財貨)를 주며 더불어 먹고 마시며 기일을 정해 회합하여 군현(郡縣)을 공격해 노략질하니 이것이 어찌 대신(大臣)으로서 의당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이것이 원소의 여섯 번째 죄입니다. 

원소는 전 호아도위(虎牙都尉) 유훈(劉勳)과 처음 함께 군대를 만들었으나(거병했으나) 유훈이 공적을 세우고 또한 장양(張楊)을 항복시켰으나 사소한 일에 분노하여 유훈을 억울하게 해쳤습니다. 참소하는 사특한 자를 신용하고 공 있는 자를 살해했으니 이것이 원소의 일곱 번째 죄입니다. 

원소는 또한 상주하여 전 상곡태수(上谷太守) 고언(高焉), 감릉상(甘陵相) 요공(姚貢)에게 횡포하게 돈을 내라 하였으나 돈이 모두 갖추어 않자 이 둘을 모두 죽였으니 이것이 원소의 여덟 번째 죄입니다. 

「춘추」春秋의 뜻에서는 자식은 모친의 지위에 따라 귀해진다 했습니다. 원소의 모친은 비사(婢使, 계집종)이니 원소는 실제로는 미천(微賤)한 자로 다른 이의 후사가 될 수 없고 의(義)로 볼 때 마땅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풍륭(豊隆, 융숭)한 중임(重任)을 차지하여 왕작(王爵)을 더럽히고 원씨 종족을 욕되게 하니, 이것이 원소의 아홉 번째 죄입니다. 

또한 장사태수(長沙太守) 손견(孫堅)은 예전에 예주자사(豫州刺史)를 겸하며 동탁을 내쫓아 달아나게 하고 능묘(陵廟)를 소제(掃除, 청소)하여 그 공이 막대합니다. 그런데 원소가 주앙(周昂)으로 하여금 그의 지위를 훔치게 하고 손견의 양식을 끊어 손견이 더욱 깊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여 동탁이 주벌되지 않게 했으니, 이것이 원소의 열 번째 죄입니다. 

신이 또한 매번 후장군(後將軍) 원술(袁術)의 서신을 받아보면 그가 이르길 원소는 원술의 일족이 아니라 했습니다. (※)

(※ 원소가 실제 원씨가 아닐 리가 없고, 앞서 말했듯 원소가 천출이고 또 서로 대립하는 입장이니까 일부러 비하하기 위해서 한 말로 보입니다.)

원소의 죄악은 비록 남산의 대나무라도 전부 붓으로 만들어 써도 이루 다 기재하지 못할 것입니다. 옛날 희주(姬周, 희씨의 주나라)의 정치가 미약해지고 왕도(王道)가 능지(陵遲, 쇠퇴)하여 천자가 천도하고 제후들이 배반하자 제환공(齊桓公)은 가정(柯亭)에서 맹약을 세우고 진문공(晉文公)은 천토(踐土)에서 회맹하니, 형초(荊楚)를 정벌하여 정모(菁茅, 풀의 이름. 고대에 제사지낼 때 술을 거르는데 씀)를 바치게 하고 조(曹)나라, 위(衞)나라를 주벌해 그들의 무례함을 드러내었습니다. 신이 비록 탑용(闒茸, 비천)하여 명성이 선현들에 비할 바가 아니나 조정의 은혜를 입고 이와 같은 중임을 담당하고 부월(鈇鉞)의 직임을 맡고 있어 말씀을 받들어 죄인을 토벌해야 하니 곧 제장(諸將)들과 주군병(州郡兵)들과 더불어 원소 등을 토벌하겠습니다. 만약 이 일이 성공하여 죄인들을 붙잡으면 대략 제환공, 진문공의 공효를 이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공전(攻戰, 싸움)의 형상(形狀, 상황)은 앞뒤로 계속해서 상주하겠습니다.”  

그리고는 군대를 일으켜 원소와 서로 맞서 싸우니 원소가 이기지 못했다. 

엄강(嚴綱)을 기주(冀州), 전해(田楷)를 청주(靑州), 선경(單經)을 연주(兗州)(자사)로 삼고 각 군현의 관리를 배치했다. 원소가 광천(廣川, 청하국 광천현)에 주둔하고 장수 국의(麴義)에 명해 선두에 서서 공손찬과 싸우게 하니 엄강을 사로잡았다. 공손찬군은 발해(勃海)로 패주하고 공손범과 함께 계(薊)로 돌아가 계현의 큰 성 동남쪽에 작은 성을 쌓으니 유우와 서로 가까워 점점 더 서로 원망하였다. 

※ 이무렵 관련사건 연표

- 초평 2년(191년) 정월, 원소, 한복 등이 유우를 황제로 추대했으나 유우가 거절. (삼국지 무제기, 후한기, 자치통감)

- 초평 2년 2월, 손견이 동탁군의 호진, 화웅 등을 양인(陽人,하남군 양현梁縣에 속한 취聚)에서 격파. (삼국지 손견전, 후한서 효헌제기, 자치통감) (양현과 본문의 양성은 서로 가까운 곳이므로 본문의 일은 이 무렵의 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 초평 2년 7월, 원소가 기주를 차지 (삼국지 무제기, 후한기, 자치통감. cf. 이때 공손찬이 유비를 평원상平原相에 임명; 후한기)

- 초평 2년 11월, 발해를 침범한 황건적을 공손찬이 동광(東光,발해군 동광현)에서 대파 (후한서 효헌제기)

- 초평 3년 초, 계교전투 (후한서 효헌제기, 자치통감) (cf. 이해 겨울, 조조가 원소와 힘을 합쳐 공손찬의 유비, 선경, 도겸을 평원군, 동군 일대에서 격파; 삼국지 무제기) 

※ 한편 계교전투 전후해서 삼국지 원소전 주(영웅기), 후한서 원소전, 공손찬전의 사건기술이 약간 다릅니다.

①삼국지 원소전 주 영웅기 : 공손찬이 청주 황건적을 대파하고 광종(廣宗,거록군 광종현≒계교)으로 환둔 – 태수와 현령을 바꿔 임명하니 기주 장리들이 대거 호응 – 원소의 공격과 국의의 활약 – 엄강 참수 등 원소가 공손찬군 대파 – 계교까지 추격하여 다시 격파

②후한서 원소전 : 초평 2년 겨울, 공손찬이 황건을 대파하고 반하(槃河)로 환둔 – 하북이 진동하여 기주 여러 성들이 호응 – 원소의 공격과 국의의 활약 – 엄강 참수 등 공손찬군 대파 – 계교까지 추격하여 다시 격파 – 초평 3년 공손찬이 용주(龍湊,평원군, 발해군 경계의 황하 나루터)에서 다시 싸움을 걸자 격파 – 공손찬 유주로 돌아감 – 초평 4년 초 천자가 태복 조기(趙岐)를 보내 관동을 화해시키고 각기 군사를 파하도록 하자 공손찬의 요청으로 화해하고 원소가 환군.

③후한서 공손찬전 : 공손월 죽음에 분노해 반하(槃河) 주둔 – 그리고는 배송지 주(전략)와 유사한 내용의 표문 올리고 원소 공격하자 기주의 여러 성이 공손찬을 따름 – 원소가 두려워하여 발해태수 인수를 공손범에게 주고 결탁하려 함 – 공손찬이 청주, 기주, 연주자사, 군현의 태수, 현령 임명 – 계교에서 크게 싸워 공손찬이 패하고 계로 환군 – 원소가 최거업(崔巨業)을 보내 수만 군으로 고안(故安, 탁군 고안현) 포위했으나 함락하지 못하고 퇴군 – 공손찬이 보기 3만으로 추격해 거마수(巨馬水)에서 원소군 대파, 승세를 타고 남진해 평원군에까지 이름 – 청주자사 전해를 보내 제(齊) 땅을 점거 – 원소군과 2년 동안 싸움(초평 3년 ~ 초평 4년?) – 식량이 부족해 공손찬군 피폐 – 원소가 원담을 청주자사로 삼아 파견, 전해가 패하여 퇴환함 – 이해 공손찬이 유우를 격파하고 사로잡아 유주를 모두 차지했다고 함 (유우가 죽은 해는 후한서 효헌제기에 의하면 초평4년) 

이 기록들을 삼국지 공손찬전 본문과 함께 취합하면 대략 이렇게 정리됩니다. 

: 초평 2년 공손월 죽음에 분노해 공손찬 반하(磐河 또는 槃河) 주둔 → 원소가 두려워하며 발해태수 직 양보 → 11 월, 공손범의 발해병이 증원되어 황건적 격파 → 겨울, 계교(광종) 주둔 → 기주의 군현들 다수가 호응 → 초평 3년 초 계교전투, 공손찬 대패 → 공손찬이 용주에서 다시 도전했으나 패배 (위에 말한 무제기 초평 3년 겨울 기사와 관련?) → 공손찬 계로 패퇴 → 원소가 공격해오자 물리치고 공손찬 다시 남하 → 전해를 보내 청주 땅에서 일진일퇴 (cf. 이때 유비가 전해를 따라감) → 초평 4년 원담이 파견된 이후 전해군 패퇴  

한편, 뒤에 나오는 원소가 공손찬에게 보낸 서신(한진춘추)에서 원소 스스로 말하는 바에 따르면, 발해태수 직을 공손찬 측에게 양보한 것과 공손월 사망의 시간순서가 삼국지, 후한서 공손찬전 본문과는 서로 다릅니다. (발해태수 인수를 주어 우호 → 공손찬이 호의를 배반하고 예주 공격, 공손월 사망 → 공손찬 출군, 계교전투로 이어짐) 이 한진춘추에 의거한다면 위의 사건들과 함께 이렇게 정리됩니다. 

: 공손찬 측에게 발해태수 양보 (적어도 원소가 한복을 몰아내고 업을 차지한 뒤의 일일 것이므로 초평 2년 7월 이후로 추정) → 원소, 원술 싸움 와중에 공손월이 죽고 이를 보복하기 위해 반하 주둔 → 11월, 황건적 격파 → 겨울, 계교(광종) 주둔 → (이하 같음) 

유우(劉虞)는 공손찬이 변고를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군대를 일으켜 공손찬을 습격했다. (※) 

※ 유우의 공손찬 습격과 유우의 죽음은 초평 4년 (193년) 겨울 (후한서 유우전, 효헌제기, 자치통감) 

유우가 거용(居庸,상곡군 거용현)으로 달아났다. 공손찬이 거용을 공격해 함락하고 유우를 사로잡고는 유우를 압송해 계(薊)로 돌아왔다. 때마침 동탁이 죽자 (※) 

※ 동탁이 죽은 것은 초평 3년인 192년 4월 23일이나 공손찬이 유우를 격파한 것은 그 다음해인 초평 4년으로 서로 같은 해는 아닙니다. 동탁이 죽은 뒤 조정에서 보낸 단훈이 이무렵 공손찬에게 도착했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천자가 사자 단훈(段訓)을 보내 유우의 봉읍을 늘려주고 6주(州)를 감독하게 하고, 공손찬은 전장군(前將軍)으로 올리고 역후(易侯)에 봉했다. 공손찬은 유우가 존호(尊號)를 칭하려 했다고 무함하고 단훈을 위협해 유우를 참(斬)하게 했다. [1] 

[1]「위씨춘추」魏氏春秋 – 당초 유우(劉虞)가 융적(戎狄)을 화집(和輯,화합, 화목)하자 공손찬은 호이(胡夷)는 막기 어려우니 복종하지 않는 것을 틈타 공격해야 하는데 이제 재물과 상을 더해주면 필시 더욱 한나라를 경시할 것이라 이는 한때의 명성에 힘쓰는 것이지 장구한 심려가 아니라 여겼다. 이 때문에 유우가 상을 주고 하사하면 공손찬이 번번이 약탈해 빼앗았다. 유우가 수차례 만나기를 청했으나 공손찬은 병을 칭하며 가지 않았다. 그러다 공손찬이 원소와의 싸움에 패하게 되자 유우가 그를 치고자 하여 동조연(東曹掾)인 우북평 사람 위유(魏攸)에게 이에 관해 말했다. 위유가 말했다, 

“지금 천하가 목을 빼 고대하며 공에게 귀의하고 있으니 모신(謀臣)과 조아(爪牙,용맹한 무장)가 없을 수 없습니다. 공손찬의 문무(文武)능력이 족히 믿을만하니 비록 작은 악행이 있더라도 실로 용인(容忍)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공손찬 치는 일을 그만두었다. 1년 뒤 위유가 병으로 죽자 유우는 다시 관속(官屬)들과 의논하고 은밀히 군사들에게 공손찬을 습격하게 했다. 공손찬은 당시 그의 부곡(部曲)이 바깥에 흩어져 있어 패할까 스스로 두려워하여 동쪽 성문을 파고 달아나려 했다. 

유우의 군대는 부오(部伍,대오, 대열)가 없고 싸움에 익숙지 않았고 또한 백성들의 가옥을 아껴 불 지르지 못하게 했다. 그리하여 공손찬이 불을 놓고 이를 틈타 정예병으로 충돌하니 유우군이 크게 허물어지고 거용성(居庸城)으로 달아났다. 공손찬이 이를 공격하여 그 가속들을 데리고 돌아왔고 주(州)의 관부사람들을 살해하고 의관(衣冠,의관을 갖춘 사대부), 선사(善士,덕 있는 선비)들을 거의 모두 죽였다. 

 /「전략」典略 – 공손찬이 유우를 저자에서 햇볕에 드러내놓고는 축도했다, 

“만약 (유우가) 천자(天子)가 될 자라면 하늘은 비를 내려 그를 구해주소서.” 

당시 몹시 더웠고 온종일 비가 내리지 않으니 마침내 유우를 죽였다. 

 /「영웅기」英雄記 – 유우가 살해되자 옛 상산상(常山相) 손근(孫瑾), 연(掾) 장일(張逸), 장찬(張瓚) 등이 충의(忠義)로 분발(憤發)하여 함께 유우에게로 나아가 공손찬을 극구(極口) 욕한 뒤 같이 죽었다.

공손찬이 상주하여 단훈을 유주자사로 삼았다. 그리하여 공손찬이 교만하게 굴고 (다른 이의) 과오는 기억하고 선행은 잊어버리니 많은 이들이 해를 입었다. [2] 

[2]「영웅기」英雄記 – 공손찬이 안팎을 통수하게 되자 의관(衣冠) 자제들 중 빼어난 재주를 갖춘 자는 필히 억눌러 궁고(窮苦,곤궁)한 지경에서 곤핍당하게 했다. 어떤 이가 그 까닭을 물으니 공손찬이 대답했다, 

“지금 의관(衣冠) 집안의 자제들과 선사(善士)들을 취해 그들을 부귀하게 하면 이들은 모두 당연히 얻을 바를 얻었다 생각하며 남의 은덕(善)에 감사하지 않을 것이오.” 

방자한 자들을 총애하고 대우하여 그 부류가 대다수 용렬한 아이(庸兒)들이라 예전 복수사(卜數師,점쟁이)였던 유위대(劉緯臺), 비단을 팔던 이이자(李移子), 고인(賈人,상인) 악하당(樂何當) 등 세 명과 같았으니(같은 부류였으니), 그들과 더불어 형제의 맹세를 정하고는 공손찬 자신을 백(伯)이라 칭하고 세 사람을 중(仲), 숙(叔), 계(季)라 일컬었으며, 그들의 부(富)가 모두 거억에 달하고 때로 그들의 딸을 취해 자신의 아들에게 짝 지워주고는 늘 옛날의 곡주(曲周,곡주후 역상酈商), 관영(灌嬰)과 같은 부류라 칭하며 이에 비유하였다. 

(※ 역상, 관영은 한고조 유방의 개국공신이고 관영은 바로 이이자처럼 비단장사 출신입니다.)

유우의 종사(從事)였던 어양(漁陽) 사람 선우보(鮮于輔), 제주(齊周), 기도위(騎都尉) 선우은(鮮于銀)이 유주(州)의 군대를 이끌고 공손찬에게 보복하려 하였는데, 연국(燕國) 사람인 염유(閻柔)가 평소 은혜로움과 신의가 있었으므로 함께 염유를 추천해 오환사마(烏丸司馬,호오환교위의 사마)로 삼았다. 염유가 오환(烏丸), 선비(鮮卑)를 초유(招誘)해 호(胡)와 한인(漢人) 군사 수만 명을 얻고는 공손찬이 임명한 어양태수(漁陽太守) 추단(鄒丹)과 노현(潞縣, 어양군 노현) 북쪽에서 싸워 대파하고 추단을 참(斬)했다. 원소는 또한 국의(麴義)와 유우의 아들 유화(劉和)를 보내 군대를 거느리게 하니 선우보(鮮于輔)와 합쳐 공손찬을 공격했다. 

공손찬군이 수차례 패하자 이에 달아나 역경(易京, 기주 하간국 역현으로 기주, 유주의 접경지점)으로 돌아가 굳게 지켰다. [3] 

[3]「영웅기」- 앞서서 이런 동요(童謠)가 있었다, 

“연(燕)의 남쪽 가, 조(趙)의 북쪽 끝, 중앙이 맞지 않고 크기가 숫돌(礪)과 같구나. 오직 이 가운데 있어야, 세상을 피할 수 있으리.” 

공손찬은 역(易)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여겨  그곳에 경(京)을 쌓아 굳게 수비했다. 공손찬의 별장(別將)이 적에게 포위되는 일이 있자 구원하지 않으려 했다. 그가 말했다, 

“한 명을 구원하면 뒤에 장수가 구원을 믿고 힘써 싸우지 않을 것이다. 이제 이를 구원하지 않으면 뒤에 장수는 응당 스스로 힘쓰는데 유념할 것이다.” 

이리하여 원소가 처음 북쪽으로 공격할 때, 공손찬의 남쪽 경계 상의 별영(別營)에서는 스스로 헤아려보아 지키자니 스스로 굳게 지킬 수 없고 또한 필시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 여겨 이 때문에 혹 스스로 그 장수(將帥)를 죽이기도 하고 혹 원소의 군대에게 격파되기도 하여 마침내 원소군이 곧장 그 문 앞에(역경에) 이르도록 만들었다. 

신 송지가 보건대, 동요(童謠)의 말은 모두 증험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이 기록에 이르러서는 증험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동요가 지어져 대저 공손찬으로 하여금 시종 역(易)을 보전하기만 할 뿐 하는 일 없고 원대한 방략이 없도록 하였다. 그러나 과거 공손찬은 황건을 격파한 위세로 인해 그 의지(意志)가 장원(張遠)하였으니 이에 세 주(州)의 자사(刺史)를 두고 원씨(袁氏)를 멸할 뜻을 품었으나 이로써 패망하기에 이르렀다.

주위에 10중의 참호를 파고 참호 안쪽에 경(京,언덕)을 쌓아 (각기) 모두 높이가 5-6장이었고 그 위에 루(樓)를 세웠다. 중앙의 참호(안쪽)에 있는 경(京)은 특별히 높이가 10장으로 (공손찬) 자신이 그곳에 거주하며 곡식 3백만 곡(斛)을 쌓아두었다. [4] 

[4] 「영웅기」 - 공손찬의 제장(諸將)들 집집이 각기 높은 루(樓)를 만드니 루(樓)의 숫자가 천(千)으로써 헤아릴 정도였다.(수천이라는 말) 공손찬이 철문(鐵門)을 만들고 루(樓) 위에 거주하며 좌우를 물리치고 비첩(婢妾, 계집종과 첩)들이 곁에서 시중들며 문서(文書)는 밧줄로 끌어올렸다.

공손찬이 말했다, 

“예전에는 천하의 일은 가히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켜 평정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지금 보건대 이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군대를 쉬게 하며 밭일에 힘써 곡식을 쌓아두느니만 못하다. 병법에 이르길 ‘백 개의 루(樓)는 공격하지 않는다.’ 하였다. 이제 내가 루로(樓櫓,높은 망루, 고루)를 천중(千重)으로 세워 두었으니 (쌓아둔) 이 곡식을 다 먹을 즈음에는 족히 천하의 일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원소를 (이를 공격하느라) 피폐하게 하고자 했다. 원소가 장수를 보내 이를 공격하게 했으나 여러 해 동안 함락하지 못했다. [5] 

[5]「한진춘추」漢晉春秋 – 원소가 공손찬에서 서신을 보냈다, 

“나는 그대(足下)와 더불어 이미 예전에 맹세와 약속을 하였거니와 거듭 반란을 토벌한다 서약하여 친애함이 백이, 숙제보다 더해 붉은색과 푸른색처럼 분명하니, 여력동궤(旅力同軌,진력하며 행동을 함께 함)하여 춘추시대 제(齊)나라, 진(晉)나라의 발자취를 뒤쫓기로 하였소. 이 때문에 인수을 풀어줘 북쪽이 남쪽을 차지하게 하고 기름진 땅을 분할해 조정을 받들게 했으니 (※) 이는 나의 진실한 마음이 분명하다는 징험이 아니겠소? 

<<※ 인불을 풀어준 것 / 삼국지집해 – 발해태수의 인수를 공손찬의 동생인 공손범에게 준 것을 말한다.>>

어찌 그대가 열사(烈士)의 높은 뜻을 저버리고 뒤이어 화망(禍亡)의 위험을 뒤쫓아 우의를 내버린 채 생각을 고치고 호의를 원망으로 바꿔 몰래 병마를 보내 예주(豫州)를 침범할 줄 알았겠소. (※) 

<<※ 공손찬의 예주 침범 / 삼국지집해 – 주앙(周昂)을 공격한 일을 말한다. 본전(本傳)에 의하면 주앙을 공격한 것이 앞이고 공손범에게 인수를 준 것이 뒤의 일이다. 

삼국지와 후한서 공손찬전 : 원술을 도와 예주의 주앙 공격, 공손월 사망 → 공손찬이 설욕하기 위해 원소 공격하러 출군 → 공손범에게 발해태수 인수를 주어 달램(이후 계교전투로 이어짐)

한진춘추 이 대목 : 발해태수 인수를 주어 우호 → 공손찬이 호의를 배반하고 예주 공격, 공손월 사망 → 공손찬 출군 (계교전투로 이어짐)>>

처음 그대의 갑졸(甲卒)이 남쪽에 있으며 군진에 친히 임해 화살이 어지러이 발사되고 칼날이 격렬히 부딪친다는 말을 듣고 그대의 화(禍)를 더하고 헛되이 내 허물을 늘릴까 저어하여 이 때문에 간절한 서신을 올려 그대가 마음을 고쳐 뉘우치길 바랐소. 그러나 그대는 초연(超然)히 스스로 방종하여 그 위세와 간사함를 자부하며 천망(天罔,하늘의 그물; 조정의 통치나 법률을 비유)을 삼켜버릴 수 있고 영웅호걸을 멸할 수 있다 여겨 과연 그대의 동생을 칼날 끝에서 죽게 하였소. 

이 말이 아직 귀에 쟁쟁한데 그대는 거듭 화(禍) 의 근원을 다스려 마음에 새기며 자책하지 않고 다만 끝없는 분노를 왕성하게 하여 역순(逆順)의 율(津)을 돌아보지 않고 원망을 품고 백성을 해치며 나를 찾아왔소. 그리고는 말 달리고 활 당기며 내 강토(疆土)에 거처하며 생민(生民)들에게 두루 해독을 끼치고 그 허물이 백골(白骨)에까지 드리웠소. 그리하여 내가 부득이하게 계교(界橋) 싸움에 나섰소. 당시 그대 군대의 기세는 천둥처럼 진동하고 준마(駿馬)가 번개처럼 일어난 반면 내 군대는 처음 합해져 기계(機械)는 엄비되지 않아 강약(彊弱)이 서로 다르고 군사의 많고 적음에 차이가 있었으나, 하늘의 도움을 빌려 적은 군사로 크게 이겨 마침내 패배해 달아나는 적을 짓밟고는 영루를 짓고 관(館)에 주둔하며 취식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하늘의 위엄이 돕고 예(禮)가 있는 곳에 복이 풍성히 내린 징표가 아니겠소? 

그러나 그대는 여전히 만족해하지 않고 다시 남은 무리를 규합하고 내 모적(蛑賊, 악인)을 이끌고 발해(勃海)를 불태웠소. 내가 또한 편안하지 못하여 용하(龍河= 龍湊)에서 군대를 부리니, 나약한 병졸들이 앞에서 유인하고 대군(大軍)은 아직 강을 건너지도 않았으나 그대는 담(膽)이 찢어지듯 놀라 무리가 흩어져 진격을 명하는 북을 울리지도 못한 채 패하고 군사들이 요란(擾亂)하여 군신(君臣)이 아울러 달아났소. 이는 또한 그대가 한 일이고 내 허물이 아니오. 이 이후로 화극(禍隙,불화에서 비롯된 재앙)이 더욱 심해져 내 군대가 분(忿)을 이기지 못해 마침내 죄 없는 그대 병졸들의 시체를 쌓아 언덕을 만들고 두개골이 들에 가득 찰 지경에 이르렀으니 저들에게 죄가 없음을 가엾게 여겨 일찍이 개연(慨然)히 눈물 흘리지 않은 적이 없소.  

그 뒤 그대의 서신을 받아보니 그 말이 완약(婉約,순하고 공손함)하여 지난 잘못을 고치고 앞으로 선행을 닦겠다(改往脩來)는 말이 있었소. (※) 

<<※ 화해의 말(改往脩來) 

/삼국지집해 – 하작(何焯) 왈, 이는 조기(趙岐)를 통해 화해할 때 했던 말을 가리킨다. 

/「후한서」효헌제기, 조기전, 원소전, 원굉의「후한기」등에 의하면 초평3년(192년) 8월 관동을 진무하기 위해 태복 조기(趙岐)가 파견되고 초평 4년 초(3월 이전임)에 조기(趙岐)의 중재로 원소, 공손찬이 화해함 >>

나는 예전의 우호를 회복하는 것이 기쁘고 또한 만민들이 안녕하지 못함을 가여이 여겨 매번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돌아오며 서신의 뜻에 따랐소. 그러나 한 계절이 다하기도 전에 그대가 다시 침범하여 북변에서 우격(羽檄,깃털을 꽂아 긴급함을 표시한 공문)의 글이 일찍이 도착하지 않은 적이 없소. 나는 이 때문에 몹시 비통하여 마음 둘 곳이 없었소.

무릇 삼군(三軍)의 통수자가 되고 열장(列將)의 임무를 맡아서는 의당 엄한 서릿발처럼 분노하고 때에 맞춰 내리는 비처럼 기뻐하고 장부(臧否, 선악, 득실), 호오(好惡, 좋아함과 싫어함; 좋고 나쁜 점)를 탄연(坦然)히 볼 수 있어야 하오. 그러나 그대는 그 덕(德)을 자주 바꾸고 강하고 약함에 따라 모책을 고쳐, 급하면 몸을 굽히고 여유를 되찾으면 방종해져 행동에는 정단(定端, 일정한 두서)이 없고 말에는 준칙이 없으니 장사(壯士)로서 어찌 이 같을 수 있소! 그런데도 도리어 노약자를 잔인하게 죽여 유주 땅이 분원(憤怨,분노하고 원망함)하고 무리들이 배반하고 친한 이들이 떠나가 그대 홀로 남아 일당도 없게 되었소. 또한 오환(烏丸), 예맥(濊貊)이 모두 그대와 같은 주(州)이고 나와 풍속이 다르나 각기 분신(奮迅, 맹렬한 기세로 일어남), 격노(激怒)하여 예봉를 다투고 있고 또한 동쪽과 서쪽의 선비(鮮卑)는 발꿈치를 들고 내게 귀부해왔소. 이는 나의 덕으로 부른 것이 아니라 그대가 그들을 내몰아 내게 보낸 것이오. 무릇 거칠고 위태로운 때를 만나고 전쟁의 위험에 처하여 안으로는 동맹의 서약을 거스르고 밖으로는 융적(戎狄)의 마음을 잃으면 향리에서 군사가 일어나고 화(禍)가 소담(蕭牆,내부를 비유)에서 생기는 법이니 장차 패업을 정하는 것이 또한 어렵지 않겠소! 

예전에 서산(西 山,흑산적?)이 횡행하여 출병(出兵), 평토(平討)했으나 때마침 국의(麴義)의 패잔병이 죽을까 두려워 도명(逃命)하니 (※) 

<<※ 국의의 패잔병 

/ 삼국지집해 - 본지(삼국지 위지) 원소전 배송지 주에서「영웅기」를 인용하여, ‘국의가 (초평 4년 원소, 공손찬이 화해한) 뒤에 공을 믿고 교만방자하게 구니 이에 원소가 그를 죽였다’ 했다. 

/ 서산(西山)은 중화서국 점교본에서 고유명사로 표시되어 있으며 바로 뒤에 나오듯 이 무렵 관련 기사에서 가끔 등장하는데, 업의 북쪽이나 북서쪽으로 장연 등 흑산적이 활동하던 태행산맥 일대를 일컫는 말이고 (뒤에 인용한 삼국지집해 참조) 여기서는 흑산적을 지칭하는 것 같습니다. >>

이에 대군(大軍)을 머물게 하고 군대를 나눠 소탕했으니 이 군대가 외로이 전행(前行,선행)하여 계교(界橋)에서 깃발을 빼앗고 보루를 함락하고 선봉에 서서 적을 제압한 것이오. 애초에 듣기로 그대는 금인(金印)을 새기고 자수(紫綬)를 둘러 원수(元帥)로서 명하여 춘추시대 때 맹명(孟明)이 수치를 갚았듯 설욕한다고 말했다 하니 이리하여 병사들이 목을 빼고 열심히 깃발을 바라보았으나 괴이하게도 빛과 그림자를 감추고 고요하여 들은 바도 없이 졸지에 도륙되고 멸해졌으니 가여운 일이 아니겠소. 

무릇 천하를 평정하겠노라는 분노와 장구한 공을 바라는 마음이 있어 권변으로 군대를 부리고 융마(戎馬)를 기르면서, 배반자를 토벌하지 않고 복종하는 자를 거두지 않아 위회(威懷,위엄과 회유함)가 아울러 상실된다면 어찌 공을 세울 수 있겠소? 이제 옛 수도가 회복되고 천망(天罔)이 수선되어 죄인은 곧 망하고 충성스럽고 유능한 이는 날개를 달게 되고 화하(華夏,중국)가 엄숙히 정돈되어 아름다운 시대가 시작되길 기대하니 장차 병기를 거두어들이고 소와 말을 들에 흩어 방목하려는데 어찌 그대는 홀로 구구한 병사들을 지키고 군(軍) 내부의 광활함에 의지하여 악명(惡名)을 즐겨 빨리 쇠망하고 아름다운 덕이 오래도록 이어지는 것을 망치려 하시오? 크게 헤아려보건대 이는 좋은 계책이 아니오. 의당 지난날의 원한을 풀고 혐극을 없애 나와의 옛 우호를 돈독히 해야 하오. 만약 나의 이 말에 잘못이 있다면 황천(皇天)이 이를 들을 것이오.”

공손찬이 이에 답하지 않고 군비를 더욱 늘리고 닦았다. 관정(關靖)에게 말했다, 

“지금 사방에서 범이 다투듯 쟁탈하나 분명 내 성 아래로 와서 서로 버티며 해를 넘긴 자가 없었소. 원본초(袁本初,원소)가 나를 어찌할 수 있겠소!”

건안 4년(199년), 원소가 전체 군으로 이를 포위했다. (※)  

※「후한서」공손찬전, 「자치통감」에서는 원소가 역경의 공손찬을 공격하기 시작하고 흑산적에게 구원 요청한 것은 건안 3년(198년), 흑산적이 구원을 결정하고 공손찬이 아들인 공손속에게 서신을 보낸 사건 등은 건안 4년으로 적고 있습니다. 한편「후한서」효헌제기, 원굉의「후한기」에 의하면, 원소가 공손찬을 완전히 제압한 것은 건안 4년 3월입니다. 

공손찬이 아들을 보내 흑산적(黑山賊)에게 구원을 청하고 또한 스스로 돌기(突騎)를 거느리고 곧바로 나와 서남산(西南山) 곁에서 (※) 

※ 서남산(西南山) 

/ 삼국지집해 - 조일청(趙一淸, 淸) 왈, 南 자는 군더더기 글자이고(※‘서남산’이 아니라 ‘서산’이 맞는다는 말) 서산(西山)은 태행산(太行山)을 말한다. (삼국지) 장연전(張燕傳)에서 ‘상산, 조군, 중산, 상당, 하북(하내河內의 오기인 듯)의 여러 산골짜기가 모두 서로 통했다’ 했으니 바로 이것이다. 

노필(삼국지집해 저자)이 살펴보건대, 범엽의 후한서 공손찬전과 자치통감에서는 모두 ‘出傍西山’이라 하여 南자가 없다. (자치통감의 이 대목) 호삼성(胡三省) 주(注)에 의하면, 역경(易京)으로부터 서쪽으로 (탁군) 고안현 염향(閻鄕) 서쪽에 이르기까지 여러 산들이 중산(中山)의 경계에 연접하여 이 산골짜기가 깊고 넓었으니 흑산의 여러 적들(黑山諸賊)이 모두 이곳에 의지했다. 사종영(謝鍾英,淸) 왈, 지금 웅현(雄縣,역경이 있는 곳임)의 서북쪽으로 자형관(紫荊關)에 이르기까지 모두 서산(西山)이다. 

흑산적의 부중을 끼고 기주(冀州)에서 횡행하여 원소의 배후를 끊고자 했다. 

장사(長史) 관정(關靖)이 공손찬을 설득하며 말했다, 

“지금 장군의 장졸들은 모두 이미 토붕와해되었으나 그들이 여전히 서로 지키며 버티는 것은 그들 거처의 가족을 돌아보며 그리워하고 장군이 그들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장군이 굳게 지키며 시간을 보내면 원소는 분명 스스로 물러날 것이고, 그들이 물러난 뒤에는 사방의 군사를 다시 합칠 수 있습니다. 만약 장군이 이제 이들을 버리고 떠난다면 군에 진중(鎭重,위중함; 권위를 갖춘 인물)이 없게 되니 머지않아 역경이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장군은 근본(本)을 잃어버리고 초야(草野)에 외로이 있게 될 것이니 어찌 성공하겠습니까!” 

이에 공손찬이 그만두고 출전하지 않았다. [6] 

[6]「영웅기」- 관정(關靖)은 자(字)가 사기(士起)이고 태원 사람이다. 본래 혹리(酷吏,법령에 철저한 혹독한 관리)로 아첨하는 자이며 큰 모책은 없었는데 공손찬에게 특별한 신임과 총애를 받았다.

구원군이 도착하면 안팎으로 원소를 공격하고자 했다. 사람을 보내 아들에게 서신을 전해 구원군이 도착할 기한을 정하고 불을 올려 호응하기로 했다. [7] 

[7]「전략」典略 - 공손찬이 행인(行人,사자의 통칭 또는 관직명) 문칙(文則)에게 서신을 들여보내 아들 공손속(公孫續)에게 고했다, “원씨(袁氏)의 공격이 마치 신귀(神鬼)와 같아 북과 뿔피리소리가 땅 속에서 울리고 사다리와 충차가 내 루(樓) 위에서 춤추고 있다. 나날이 궁박해지고 짓밟히니 의지할 곳이 없구나. 너는 응당 머리를 부순다는 각오로 간절히 장연(張燕)에게 청해 속히 경기병을 보내도록 하고, 도착한 뒤 북쪽에서 봉화(烽火)를 올리면 내가 안으로부터 출전할 것이다. 그렇게 되지 못한다면 내가 죽은 뒤에 천하가 비록 넓다 한들 네가 발붙일 땅을 찾고자 하여도 어찌 가능하겠는가!”  

/「헌제춘추」獻帝春秋 – 공손찬은 계성(薊城)이 붕괴하는 꿈을 꾸고 자신이 필히 패할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공손속(公孫續)에게 몰래 사자를 보냈다. 원소의 척후병이 이를 가로채 진림(陳琳)을 시켜 그 서신의 글을 다음과 같이 고치게 했다. 

“대저 옛날 주(周)나라가 쇠하던 때 시체가 널리고 피가 흘렀다고 듣고는 이를 믿지 않았는데 오늘 내가 직접 그 같은 상황에 부딪치게 될 줄 어찌 알았겠느냐!” 

그 나머지 말은「전략」에 기재된 바와 같다.

원소의 척후병이 그 서신을 가로채 기약한 바대로 불을 올렸다. 공손찬은 구원군이 도착한 것으로 여겨 이에 밖으로 나가 싸우고자 했다. 원소가 복병을 두어 이를 공격해 대파하였고 공손찬은 다시 역경으로 돌아가 수비했다. 원소가 땅굴을 만들고 공손찬의 루(樓)를 부딪쳐 파괴하여 점차 가장 가운데 쌓은 경(中京)에까지 이르렀다. [8] 

[8]「영웅기」英雄記 – 원소의 부(部)를 나누어 공격하여 땅을 파 길을 만들고 역경의 루(樓) 아래에 구멍을 뚫고 점점 전진해 나무를 대어 지탱하고 족히 절반쯤 도달했다 판단했을 때 이내 나무기둥을 불태우니 루(樓)가 곧바로 기울어져 넘어졌다. 

(※ 공손찬의 루(樓)가 언덕(京) 위에 있으니까 그곳을 향해 땅굴을 파면서 그 땅굴을 나무기둥으로 떠받치고, 절반쯤 이르렀을 때 나무기둥을 불태워서 땅굴을 무너뜨리면 지반이 무너져 루(樓)도 함께 무너졌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공손찬은 필히 패하게 될 것임을 스스로 알고 그 처자를 모두 죽인 뒤 이내 자살했다. [9] (※ 공손찬 생몰 : ? – 199년)

[9]「한진춘추」漢晉春秋 - 관정(關靖)이 말했다, 

“내가 듣기로 군자는 남을 위험에 빠뜨리면 필히 자신도 그 고난을 함께 한다 했으니 어찌 홀로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는 말을 채찍질해 원소군에게로 돌진한 뒤 죽었다. 원소는 모두의 수급을 허(許)로 보냈다.

※「자치통감」호삼성 주 – 공손찬의 계책은 진궁(陳宮)의 계책과 같은 것이다. 진궁의 계책은 여포가 쓰지 않았으나 공손찬의 계책은 관정이 제지하였으니, 이로써 오로지 계책을 결정하는 것뿐 아니라 계책을 돕는 것 또한 어려운 일임을 알 수 있다.

선우보(鮮于輔)가 그 부중을 거느리고 왕명(王命)을 받들었다. 선우보를 건충장군(建忠將軍)으로 임명해 유주(幽州)의 여섯 군(郡)을 감독하게 했다. 태조(太祖,조조)가 원소와 관도(官渡)에서 서로 맞서니 염유(閻柔)가 태조에게 사자를 보내 직무를 받고 호오환교위(護烏丸校尉)로 올랐다. 그리고 선우보가 몸소 태조에게로 와서 좌도요장군(左度遼將軍)에 임명되고 정후(亭侯)에 봉해졌고, 되돌려 보내져 본주(本州,즉 유주)를 진무(鎭撫)했다. [1] 

[1]「위략」魏略 - 선우보(鮮于輔)가 관도에서 태조(太祖)를 뒤따랐다. 원소가 격파되어 달아나니 태조가 기뻐하여 선우보를 돌아보고 말했다, 

“지난 해 본초(本初,원소)가 공손찬의 머리를 보내오니 나는 홀연(忽然,갑작스럽고 놀라움)해 했으나 이제 그를 이겼소. 이는 하늘의 뜻이며 또한 제군들(二三子)의 힘이오.

태조가 남피(南皮)를 격파하자 염유가 부곡(部曲)과 선비(鮮卑)족을 거느리고 명마(名馬)를 바치며 군(軍)을 받들고 삼군오환(三郡烏丸)을 정벌하는데 종군하여 그 공으로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다. [2] 

[2]「위략」- 태조가 염유(閻柔)를 매우 총애하여 매번 그에게 말했다, 

“나는 경을 내 자식처럼 여기며 또한 경이 나를 부친처럼 대해주길 바라오.” 

이로 말미암아 염유가 오관장(五官將,오관중랑장 조비)에 의탁하고 형제처럼 지냈다.

선우보 또한 그 부중을 이끌고 종군했다. 문제(文帝,조비)가 제위에 오르자 선우보를 호아장군(虎牙將軍), 염유를 도요장군(度遼將軍)으로 임명하고 모두 현후(縣侯)로 올려 봉하고 특진(特進)의 지위를 내렸다.

※ 삼군오환(三郡烏丸) – 오환족은 원래 동호(東胡)의 후손으로 추정되고 묵돌(묵특)이 동호, 월지 등 주변 민족을 격파 통일해 흉노제국을 건설한 이래 흉노에 복속했습니다. 그러다 후한 광무제가 중국을 재통일할 때 오환돌기가 함께 활약하기도 했는데, 그 뒤 오환족을 유주, 병주 경내에 나누어 거주하게 하면서 기병자원으로 활용하며 흉노, 선비, 예맥 등을 막는 울타리 구실을 하게 합니다. (중국의 전통적인 이이제이나 순이(順夷)-역이(逆夷) 개념의 일환인데, 오환은 당시 여러 북방민족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중국에 우호적인 태도로 취했음) 그러다 후한 말 삼국시대에 우북평, 요서, 요동(속국) 세 군의 오환이 반란을 주도하거나 원소에 협력하는 등 활발히 활동하며 주목을 받게 되고 (전통적으로 최대 적대국인 흉노는 당시 분열된 채 중국에 내속되어 크게 쇠퇴한 상황이었음) 이들을 三郡烏丸이라 부른 것으로 보입니다. 이 삼군오환은 뒤에 원씨가 패망하는 과정에서 조조에 의해 평정되고 조위의 기병자원으로 활용됩니다.

<진수의 평>

공손찬은 역경을 지키다가 그곳에서 전멸을 당했다. 공손도는 포학하고 자제력이 없었으며, 공손연은 더욱 더 흉악해져서 그들의 종족마저 멸망시키게 하였다. 도겸은 혼란으로 인해 걱정하다가 죽었고, 장양은 신하들에게 살해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주군을 지배했지만 일반 백성들만도 못하였으니 실제로 평론할 가치가 없다. 장연•장수•장로는 도적의 생활을 하면서도 근심을 떨쳐 버리고 선조들의 제사를 지켰으니 이들을 공손찬 등과 비교하면 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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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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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이니 추가 안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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