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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 2년(228)에 공손연(公孫淵)이 공손공(公孫恭)을 협박하여 자리를 빼앗았다. 명제는 즉위하여 공손연에게 양열장군(揚烈將軍)과 요동태수의 지위를 주었다. 공손연은 남쪽으로 사자를 보내 손권과 연락을 취하였으며, 예물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1]
[1]「오서吳書」에 기재된 공손연(公孫淵)이 손권(孫權)에게 보낸 표(表) –

“신이 엎드려 생각건대 천지(天地)가 뒤집히고 무망(无妄,뜻밖)의 운을 만나 왕로(王路)가 평온하지 못하고 기울어지고 어지럽습니다. 선인(先人) 이래 대대로 한(漢)나라, 위(魏)나라를 섬기며 섬돌 가장자리에서 기회를 만나 나라를 위해 효절(效節,절의를 다함)하고, 대를 이어 임무를 맡아 번표(藩表,변방)을 지켰으나 오히려 부명(符命,천명을 드러내는 상서로운 조짐)이 돌아갈 곳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매번 후은(厚恩)에 감사하면서도 빈번히 (예전에 보냈던 폐하의) 현귀(顯貴)한 사자를 모욕하였으니 이는 물러나 생각해보건대 신하로서 교제하는 것은 국경을 넘지 않는 법이라 이 때문에 지켜야 할 바를 고집하며 이전 사자들을 물리쳤던 것입니다. 비록 의(義)에는 두 신의(信)가 없는 법이지만, 어찌 감히 (폐하의) 대은(大恩)을 잊겠습니까! 폐하께서 소국(小國)을 진무(鎭撫)하여 길이 보존케 하시고 앞뒤로 배(裴) 교위(校尉)(즉, 교위 배잠이다 / 삼국지집해), 갈(葛) 도위(都尉) 등이 칙계(敕誡)를 받들어 오니, 성지(聖旨)가 두루 치밀하여 두터운 비단처럼 희고 어둠과 밝음이 잘 갖추어지고 드러나 펼치고 보여주시는 바가 제 귀를 끌어대어 말씀하는 듯 하였습니다. 신은 (이 가르침을) 낮에는 노래하여 읊조리고 밤에는 꿈에 나타나니 종신토록 암송한다 하더라도 그 뜻을 족히 알지 못할 것입니다.
 
계말(季末,말세)에 이르러 흉황(凶荒)하고 건곤(乾坤,천지)이 꽉 막히니 병혁(兵革,전란)이 그치지 않고 인민들은 탕석(蕩析,동요하여 뿔뿔이 흩어짐)하였습니다. 이러한 천명(天命)이 장차 돌볼 곳을 우러러보며 사사로이 한쪽 모퉁이에서 운일(雲日,구름과 해.제왕을 비유)를 바라봅니다. 지금 위나라는 충성스럽고 선량한 이를 뽑아 쓰거나 공신(功臣)의 후예를 기리지 않으니, 참소하고 거짓말하는 자로 하여금 그 뜻을 펴게 하여 유주자사(幽州刺史)나 동래태수(東萊太守)의 광오(誑誤,그릇되이 속임)한 말을 들어주어 함부로 주병(州兵)을 일으켜 신의 군(郡)을 해치려 꾀했습니다. (※232년 전예 등의 출병을 말함) 신이 위나라를 의지하지 못하고 위나라는 신을 절멸하려 합니다. 신이 듣건대 신하에게는 거취지분(去就之分,나아가고 물러가는 명분)이 있다 했습니다. 전요(田饒)는 제(齊)나라로 가고 악의(樂毅)는 조(趙)나라로 달아났으니 이는 (원래) 주인을 섬길 수 없었기 때문에 도(道) 있는 주인에게 의지한 것입니다. 진평(陳平), 경황(耿況) 또한 시세의 변화를 보아 끝내 한나라에 귀부하여 제적(帝籍,황실의 전적典籍)에 그 이름을 새겼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폐하의 덕은 다시 나오지 못할 정도로 높고 그 시세(時)는 세상에서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라 이로써 앙모하여 스스로 귀부하려는 마음을 정성스럽게 품으니 멀고 험한 곳을 바라보는 것이 가깝고 평탄한 것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실로 원하건대 신모(神謨,신묘한 모책)로 하루바삐 홍업(洪業,대업)을 정하고 육사(六師,육군,천자의 군대)의 기세를 떨쳐 하(河), 낙(洛) 땅을 거두고 성주(聖)가 되어 종(宗,적통)을 대신하십시오. 천하에 심히 다행한 일일 것입니다!”



/「위략魏略」왈 – 국가(國家,위나라)에서 공손연이 (위나라와 오나라) 양쪽을 오가는 것을 알고, 요동(遼東)의 이민(吏民,관리와 백성)들이 공손연에 의해 그르쳐질까 두려워했다. 그리하여 요동(遼東)에 공문(公文)을 내려 그들을 사면하며 말했다.

“요동(遼東), 현도(玄菟)의 장교(將校), 이민(吏民)들에게 고한다. 역적(逆賊) 손권(孫權)이 난계(亂階,화란禍亂)를 만나 이를 틈타 그의 선인(先人)이 주군(州郡)을 겁략하여 마침내 군흉(羣凶) 이 되었고 스스로 강표(江表,장강 이남)에서 전횡했다. (그러나) 함구장질(含垢藏疾,악행이나 악인을 포용함)하며 그가 교화되기를 바랬으므로 땅을 떼어줘 손권을 왕으로 삼고 남면(南面)하여 고(孤)를 칭하고 상장(上將)을 세우고 구명(九命,관작의 아홉 등급)의 예를 갖추게 해주었다. 손권은 친히 (공손히) 차수(叉手,두 손을 모아 잡음)하고 북쪽을 향해 계상(稽顙,이마를 조아림)했다. 총애를 내려준 신하나 신하로서 영예를 받은 것이 손권 만한 자가 없었다. (그러나) 이리새끼와 같은 야심은 고치기 어려워 끝내 반복(反覆,언행을 뒤집음)함으로 되돌아가 은혜를 저버리고 주인을 배반하고 도천역신(滔天逆神,천도를 업신여기고 거스름)하니 이에 감히 황제의 호칭을 참칭하기에 이르렀으나, 강호(江湖)의 험조함에 의지하여 왕주(王誅,왕법에 의한 주벌)가 아직 가해지지 못했다.
 
근래에 다시 배를 멀리 보내 대해(大海)를 건너 화물(貨物)을 많이 지니고 변민(邊民)들을 속여 유인하자 변민(邊民)들이 무지하여 그와 교관(交關)하였고 장리(長吏) 이하 중에서 이를 금지하는 자가 없었다. 그러다 주하(周賀)를 보내며 배 1백 척을 띄울 정도에 이르렀고 나룻터에 머물며 서로 있고 없는 것을 무천(貿遷,교역)했다. (손권의 사절을) 의심하며 거절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 명마(名馬)를 주어보냈으며 또한 숙서(宿舒)를 보내 주하(周賀)를 뒤따라 가 (손권과) 통호(通好,서로 통하여 우호관계를 맺음)했다. 열 집 되는 작은 고을에도 충신(忠信)한 자는 있으나 군주를 악에 빠뜨린다고「춘추」에 적혀있다. 지금 요동(遼東), 현도(玄菟)가 국조(國朝,조정)를 섬겨 청색이나 자주색 인끈을 드리운 고위관리 출신이 천백(千百)을 헤아리고 사(纚, 머리싸는 수건)를 쓰고 영(纓,관끈)을 드리우고 인수(印綬,관인과 인끈)를 찼으면서도 일찍이 광정(匡正,고쳐서 바로잡음)하는 착한 말을 납언한 자가 없었다. 거북껍질과 보옥이 함 가운데서 깨어지고 호랑이와 외뿔소가 우리에서 뛰쳐나왔다면 이것은 누구의 과오이겠는가? (※논어 계씨편에서 인용. 제대로 보좌하고 간언하지 못한 신하의 잘못이라는 말) 국조(國朝)의 자대부(子大夫,관리,신하의 경칭)로서 부끄러운 일이로다! 옛날 호돌(狐突)이 말하길, ‘아비가 자식에게 두마음을 품으라 가르치면 어찌 임금을 제대로 섬기겠습니까? 책명위질(策名委質,벼슬길에 올라 조정에 몸을 맡김)함에 있어 두 마음을 품으면 죄악입니다.’ 했다. (※「춘추」희공 23년 조를 인용. 호돌의 아들 호모와 호언이 중이(이후 진문공)를 수행하며 진秦나라에 망명 중이었는데, 진晉 회공이 호돌을 구금한 후 아들들을 부르면 사면해준다고 위협하자 이를 거부하며 호돌이 대답한 말.) 지금 너희들이 간사한 꾀에 아첨하고 이를 따르며 위협에 눌려 뒤따르거나 간사하고 미혹된 짓을 하니, 이것이 어찌 유독 부형(父兄)의 가르침이 상세하지 못해서였겠는가? 자제(子弟)들이 가르침을 받음에 있어 잘못 익혔을 따름이로다!
 
만약 잡초가 밭을 해친다고 해서 바람에 따라 불을 놓는다면 지애(芝 艾,영지와 쑥.좋은것과 나쁜것의 비유)가 함께 불타버릴 것이니 어찌 능히 명확히 구별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이 일은 당연히 쉽게 알 수 있는 일로서 비록 성패(成敗)를 감고(鑒古)하지 않더라도 서(書), 전(傳)에 실려있는 바로다. 강남(江南)과 해북(海北,바다 북쪽,여기서는 요동의 공손연을 지칭)이 만리 길로 떨어져 있으나 요동의 군신(君臣)들은 우환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롭고자 하여(利) 의(義)가 불리(不利)해지고 귀해지고자 하여(貴) 의(義)가 불귀(不貴)하게 되었으니 이는 안락하게 거처하는 것을 싫어하며 위망(危亡)의 화(禍)를 구하는 것이고, 충정(忠貞)의 절의를 업신여기고 배반(背叛)의 이름을 거듭 더하는 것이다. 만(蠻), 맥(貊)의 우두머리들도 오히려 예(禮)를 알아 이로써 남을 섬기니 또한 얼굴을 들지 못할 (부끄러운) 일이로다! 더욱이 숙서(宿舒)는 죄없이 강요당해 오(吳)나라에 사자로 보내지니 의롭지 못한 사자의 일을 맡아 처음 집안사람들과 이별할 때 눈물을 흘리며 길을 나섰다. 그러다 성산(成山)에서 주하(周賀)가 죽임을 당하고 그 무리가 뒤집어질 때 숙서는 비록 죽음을 면했으나 혼백(魂魄)이 몸을 떠나버렸다. 어찌 핍박(逼迫)받은 바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가!
 
지금 충신(忠臣) 열장(烈將)들은 모두 요동이 반복(反覆)하여 두 마음을 품은 것에 분노하고 작은 뗏목이라도 바다에 띄워 (정벌하여) 기어코 그 뜻을 이루려 한다. 짐은 천하의 부모로서 천하가 이제 막 안정되었음을 생각하니, 수고로이 간과(干戈)를 움직여 멀리 큰 물을 건너 이처럼 백성들의 노역을 소모하지 않으려 하고 또한 변경에 남겨진 여민(黎民,서민,백성)들이 이처럼 미혹되고 그르쳐진 것을 가엾게 여겨 이 때문에 낭중 위신(衞愼), 소모(邵瑁) 등을 보내 또한 조서를 받들고 가게 해 내 뜻을 알린다. 만약 고굉(股肱) 충량(忠良)한 자라면 능히 절의를 다하고 신의를 세워 당시의 군주를 보좌하고 반사취정(反邪就正,邪에서 正으로 돌아옴)해 큰 공을 세워야 하니 (그리하면) 그 복이 막대할 것이다. 혹시 악역(惡逆)을 행해 물들여졌다고 스스로 꺼리는 자가 있더라도 감히 떠벌리며 오래도록 이척(伊戚,근심)을 품지 말라. 적(賊)의 사자와 교통(交通)한 자들도 모두 사면하여 그와 더불어 경시(更始,고쳐서 다시 시작함)할 것이다.”



손권은 장미(張彌)와 허안(許晏) 등을 사자로 하여 금과 옥 및 진귀한 보물을 보내고, 공손연을 연왕으로 옹립했다. 공손연은 손권이 너무 먼 곳에 있어 의지 할 수 없고 또 재물을 탐하는 것을 걱정하였으므로 사자를 파견하도록 유인하고, 장미와 허안 등을 참수하여 그 머리를 위나라로 보냈다. 

[2]「위략魏略」에 기재된 공손연(公孫淵)의 표(表) –


“신이 전에 교위 숙서(宿舒), 낭중령 손종(孫綜)을 보내 달콤한 말을 하고 후하게 예우하여 오적(吳賊,오나라)을 유인했습니다. 다행히 천도(天道)가 대위(大魏,위나라)를 복조(福助,보우)함에 힘입으니 이 적(賊)이 암연(暗然)히 미혹되어 군하(群下,뭇 수하들)(의 반대)에 거스르고 무리들의 간언을 좇지않고 신의 말을 믿고는 멀리 배와 사자, 많은 장수와 사졸들을 보내 봉배(封拜)하였습니다. 신이 견지하는 바는 저의 본뜻과 같아 비록 죄흔(罪釁,죄가 되는 행동.죄업)임을 우려했으나 내심 퍽 다행으로 여겼습니다. 적(賊)의 무리들은 본래 만 명이라 칭했으나 숙서와 손종이 살펴본 바로는 약 7-8천 명이 답진(沓津,요동군 답씨沓氏현의 나루터.요동반도 남서쪽 끝으로 비정됨)에 도착했습니다. 사자 장미(張彌), 허안(許晏)과 중랑장 만태(萬泰), 교위 배잠(裴潛)을 속여 관리와 군사 4백 여 명을 거느리고 문서(文書)와 명복(命服,관복), 집물(什物,집기)을 지니고 아래로 내려와 신의 군(郡)으로 오게 했습니다. 만태(萬泰)와 배잠(裴潛)은 나머지 화물(貨物)을 따로 지니고 말(馬)을 구입하려 했고, 군장(軍將,장수) 하달(賀達)과 우자(虞咨)는 남은 무리들을 거느리고 배가 있는 곳(船所)에 있었습니다.


신이 본래 서늘한 때를 기다려 장미(張彌) 등을 치려 했으나, 장미 등의 군사가 매우 많은데다 신이 오나라의 명을 즉시 받들지 않는 것을 보면 의심을 품고 그들이 먼저 일을 꾀할까 두려웠습니다. 이에 태도를 바꿔 목숨을 걸고 즉시 진병하여 포위한 뒤 장미(張彌), 허안(許晏), 만태(萬泰), 배잠(裴潛) 등의 수급을 베었습니다. 군사들을 따르던 관리들은 모두 사오(士伍) 소인(小人)으로 (사졸들의 노비?) 동서(東西,물품)를 급사(給使)하는 자들이었는데 자유를 얻지 못하여 면박(面縛)하고 항복을 청하니 차마 주살할 수 없어 곧바로 청을 들어주어 변경의 성으로 옮겨 그 곳을 충실하게 했습니다.


따로 장수 한기(韓起) 등을 보내 삼군(三軍)을 이끌게 하니 급히 달려가 답(沓,앞의 답진)에 도착했습니다. 영장사(領長史) 유원(柳遠)을 시켜 빈주례(賓主禮)를 베푸는 것처럼 하여 하달(賀達), 우자(虞咨)를 유인하고 삼군(三軍)을 잠복시켜 그들이 (배에서) 내려오기를 기다렸으며 또한 많은 말과 화물(貨物)을 몰아 교역하려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하달과 우자는 의심을 품어 내려오지 않았고 저자에서 화물을 구입하려던 5-6백 명을 내려보내 교역하려 했습니다. 이에 한기 등이 비로소 금고(金鼓,징과 북)를 울리며 예리한 화살을 어지러이 쏘아 3백여 급을 베었고 상처를 입고 물에 뛰어들었다 익사한 자가 약 2백여 명에 이르렀고, 산골짜기로 달아났다 돌아와 항복한 자와 숨었다가 굶어 죽은 자는 이 숫자에 들어있지 않습니다. 노획한 은인(銀印,은 도장), 동인(銅印,구리 도장), 병기(兵器), 화물(資貨)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삼가 서조연(西曹掾) 공손형(公孫珩)을 보내 적(賊) 손권이 신에게 준 부절, 인수(印綬), 부책(符策,부신으로 쓰는 죽간), 구석(九錫), 집물(什物)과 장미(張彌) 등이 갖고 있던 가짜 부절(위나라 입장에선 손권이 가짜황제이므로 이렇게 칭한 것), 인수, 수급을 봉송(奉送)합니다.”
 
또 말했다,
 
“숙서(宿 舒), 손종(孫綜)이 전에 오(吳)에 갔을 때 적(賊) 손권이 신 집안의 소대(小大,자식)에 관해 묻자 숙서, 손종이 신에게 3명의 자식이 있고 공손수(公孫脩)는 이와 별도로 죽은 제 아우에 속한다고 대답하니 (※양자로 들였다는 얘기인 듯) 손권이 감히 간교(姦巧)하게도 배명(拜命)을 임의로 농단하였습니다. 삼가 (손권이 제 자식들에게 내린) 인수(印綬)와 부책(符策)을 봉송합니다. 신이 비록 옛 사람들의 귀를 씻는 기풍(洗耳之風,더러운 말을 들었을 때 귀를 씻어내 고결함을 유지한다는 의미)은 갖추지 못했으나 적(賊) 손권에게서 더러운 것을 받은 일을 부끄럽게 여기며 이미 천주(天誅,천벌)을 대신 행했으나 아직도 분이 다 풀리지 않습니다.”
 
또 말했다,
 
“신의 부친인 공손강(公孫康)은 예전에 손권의 사자를 죽여 서로 원수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번에 속임수를 써서 사자를 보내 유인하니 이로써 손권으로 하여금 마음을 기울이고 나라를 비우며 녹(祿)을 고갈하게 하고, 상경(上卿)을 멀리보내 그에게 명하여 총애를 줌이 극진하게 하며, 남토(南土)를 진동시키며 예수(禮數,예의)를 빈틈없이 갖추게 하였습니다. 또한 손권이 숙서와 손종을 대우함에 결활(契闊,수고)하며 몸을 굽히니 군신(君臣), 상하(上下)가 모두 환대하며 정성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장미 등) 4명의 사자가 죽임을 당하여 만리에 효시(梟示)되고 사중(士衆,사졸)들은 흩어져 나룻터에서 도륙되어 그 참치(慚恥,수치)가 널리 알려지고 그 통욕(痛辱,몹시 큰 치욕)이 하늘에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손권의 원질(怨疾,원한과 증오)이 장차 기골(肌骨,살과 뼈)에 새겨질 것이니, 만약 하늘이 그의 기업을 쇠약하게 하여 패망함에 이른다면 손권은 장차 안으로 상처입어 분격(憤激)하여 죽을 것입니다. 만약 (손권의) 기운(期運,운수)이 아직 다하지 않았다면 장차 독석(毒螫,해독)을 퍼뜨릴 것이니 필시 장사(長虵, 긴 뱀;흉악한 인물을 비유,여기서는 손권을 가리킴)가 (저에게) 위해를 끼칠까 두렵습니다. 서주(徐州)의 여러 둔(屯)과 (청주) 성양(城陽,198년 조조가 여포를 격파한 뒤 북해,낭야 등을 분할해 성양군 설치)등의 군(郡)들은 (오나라와) 서로 접하며 가까우니 만약 많은 배들이 뒷날 해문(海門,강이 바다로 나오는 입구)으로 향하는 일이 있어 그 소식을 얻으면 속히 신에게 알려 미리 대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또 말했다,
 
“신의 문호(門 戶,가문)가 실로 깊고 무거운 은혜를 입었고 대임을 이어받아 섬긴 이래 연달아 영총(榮寵,영예와 총애)을 입어 그 특별함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니, 제 직분으로는 응당 죽음으로 보답하고 힘을 다하여 죽음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러나 신이 광우(狂愚,광망되고 우매함)하고 의계(意計,심계,지모)가 미암(迷闇,미혹되고 어두움)하여 즉시 적(賊)을 사로잡지 않아 이로써 의심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전에 사세(事勢)에 관해 진술한 장표(章表)는 (※손권에게 올린 주[1]의 표문을 말하는 듯) 실은 다만 이 적(賊)을 파폐(罷弊,피폐)케 하여 곤박해져 스스로 절멸되도록 하려던 것일 뿐, 실로 누대에 걸친 은혜를 감히 저버리고 참도(僭盜,참람된 도적)에게 붙으려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뒤 애증(愛憎)을 갖고 있는 자가 이 일을 빌미로 무고하여 (죄의) 절목(節目,조목)을 거짓으로 만들어내니 끝내 명청(明聽,=성청聖廳?)이 저자에 호랑이가 있다고 의심하게 만들게 하여(거짓된 유언비어를 믿게 만들어) 은혜로운 마음을 옮기고 총애하던 마음을 바꾸게 하고 위노(威怒,진노)를 불러 일으켜 거의 침몰할 지경에 이르렀고 길이 모욕을 입었습니다. 다행히 자애로운 은혜로 삼유(三宥,죄를 감면해주는 세가지 정황인 불식不識,과실過失,유망遺忘.또는 그런 제도;왕공이 죄를 범했을 때 세번 용서해주는 것)를 베푸신 덕분에 허물을 (바로잡아) 보충하고 책임을 해제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천위(天威,천자의 위엄)가 멀리까지 끼쳐 용서받지 못했다면 일찍이 산산이 부숴지고 선인을 욕되게 하여 제사를 폐하게 되었을 것이니 어찌 스스로 깨달아 이런 미미한 공이라도 세웠겠습니까. 신이 이긴 일에 기뻐하며 스스로 즐겁다가도 이와 같은 변고에 생각이 미치면 두려움이 남아 가슴이 뛰고 감히 편녕(便寧,안녕)하지 못합니다. 오로지 폐하께서 봄날 생명을 낳고 온전히하는 것과 같은 인자함을 존숭하시어, 분노를 없애고 혐극을 막고 미세한 허물을 억눌러 막아주시고, 현재로써 헤아려 지난날을 밝히어 신의 본심을 살펴 주시고, 길이 포용하여 삼천(三泉,삼중천,지하 깊은 곳으로 죽어서 묻히는 곳을 비유)에서도 직분을 품도록 해 주십시오.”
 
또 말했다,
 
“신이 광영(光榮)을 입고 은정(恩情)에 보답하지 못했으면서 죄흔(罪釁)으로 견노(譴怒,견책)를 자초했으니 저를 주륙해 뭇 사람들에게 경계로 삼음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제가) 법령(典)을 넘고 상궤(常)를 어기며 거짓으로 오(吳)와 통한 것은 실로 궁박(窮迫)하여 아직 보효(報效,힘써 보답함)하지 못했음을 스스로 유념하고 천위(天威)의 독벌(督罰)이 가해져 홀연히 죽어 스스로 허물을 씻지 못할까 길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감히 1년 동안 궐(闕)과의 관계를 스스로 폐하고 사자를 보내 오(吳)를 유인하였고 그들이 필시 올 것임을 알았습니다. 손권이 (우리) 군(郡)에게 화친을 청한 지 여러해에 이르렀으나 당초 한마디도 응답하지 않았기에 이제 손권이 (우리의) 사자를 얻으면 필시 의심하지 않고 (회답하러) 올 것이라 여겼습니다. 이때에 이르러 일거에 행동하여 과연 헤아린 바 대로였으니 상경(上卿)과 많은 무리들이 와서 흡혁(翕赫,성대한 모양), 풍성하고 재화(財貨), 뇌유(賂遺,뇌물)가 나라를 기울일 정도로 극진하였으며, 그들이 도착한 뒤 사로잡히고 흩어지고 사망한 자가 천여 명에 달하였고 절멸되어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이는 실로 포악하고 교활한 적의 예봉이었으나 교만한 무리의 공교로움을 꺾어 천하에 널리 보이고 그 기업을 파손하니 족히 참담한 수모라 할 만합니다. 신이 정성스럽게 나라에 진력할 것을 생각하여 비록 비상(非常)한 과오가 있으나 또한 비상한 공(功)이 있으니, 원컨대 폐하께서 저의 유궐(踰闕,궁문을 뛰어넘음.불충을 의미)한 허물을 용서하시고 보잘것없는 저의 선행을 취해 국은(國恩)을 입어 종시(終始)를 보전하도록 해 주십시오.”

명제는 그 결과 공손연을 대사마로 임명하고 낙랑공(樂浪公)으로 봉하였으며, 부절을 주어 이전과 같이 
군수의 지위를 겸하도록 했다. 
[3]

[3]「위명신주」(魏名臣奏,위나라 명신들의 상주문을 모은 진수의 저작)에 기재된 중령군(中領軍) 하후헌(夏侯獻)의 표(表) –


"공손연(公孫淵)이 지난날 감히 왕명(王命)을 어겨 계공(計貢,군국郡國의 호구, 부세, 옥송 등을 기록한 장부인 계부計簿를 올리고 방물을 바치는 것)을 폐절(廢絶)하고 실로 양쪽을 함께 끼었습니다. (지세가) 험조함에 의지하고 또한 손권(孫權)을 믿어 이 때문에 감히 발호(跋扈)하여 해외에서 자휴(恣睢,방자하게 눈을 부릅뜸)했습니다. 숙서(宿舒)가 친히 적(賊) 손권의 군중(軍衆)과 부고(府庫)를 보고는 그들이 약소(弱少)하여 의지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알아 이로써 적(賊,손권)의 사자를 참수할 계책을 결정했습니다. 또한 고구려(高句麗), 예맥(濊貊)이 공손연과 원수 사이가 되어 아울러 구초(寇鈔,침략)했습니다. 이제 밖으로는 오(吳)의 원조를 잃고 안으로는 호(胡)의 침략을 받게 되니 필시 국가(國家,위나라)가 능히 육도(陸道,육로)를 따라 쳐들어올 것을 알고 사세상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때를 틈타 의당 사자를 보내 화복(禍福)을 보여야 합니다. 봉거도위 종홍(鬷弘) 은 무황제(武皇帝,조조) 때 처음으로 사명(使命,사자의 명)을 받들어 도로를 개통했습니다. 문황제(文皇帝,조비)가 즉위하고 사명(使命)을 통하고자 하여 종홍을 보내 처자를 거느리고 향리(鄕里)로 돌아가게 하고 수레와 소, 비단 백 필을 하사했습니다. (※종홍이 원래 요동 출신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종홍은 은혜를 입어 국조(國朝,조정)에 죽을 각오로 헌신하려 하여 (요동으로) 되돌아갈 뜻이 없었으므로 처자는 남겨두기를 청하고 자신은 사명(使命)을 받들었고 그리하여 공손강(公孫康)이 신첩(臣妾)을 칭했습니다. (※) 

※ 공손강이 죽은 해 : 공손도전 본문 vs 위명신주
: 앞의 본문 기술에 의하면, 공손강 죽고 공손공 계위 (연도 불명) - 문제가 제위에 오르고 (220년 10월,문제기) 공손공을 거기장군으로 임명(221년 3월,문제기)…의 순서이므로 이때에는 공손강이 이미 죽은 뒤입니다. 따라서 문제기와 공손도전을 감안해보면 위명신주 이 대목은 ‘공손강’이 될 수 없고 ‘공손공’이어야 맞습니다. 그러나 위명신주는 당대 인물의 직접발언 즉 원사료에 해당하므로 그냥 무시해버릴 수는 없고 공손도전 본문에서의 정리가 잘못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다만 좀 무리긴 하지만 두 기사가 모두 맞을 경우를 상정해볼 수는 있습니다. 즉, 여기서의 즉위를 조조를 이어 위왕이 된 것으로 본다는 전제하에, 공손강의 죽음을 이때(즉, 220년 1월) 이후와 221년 3월 사이의 일로 보는 것입니다. 220년 1월 문제가 위왕 즉위 – 그 직후 종홍을 요동으로 보내자 공손강 칭신 – 공손강 죽고 공손공 계위 – 220년 10월에 문제가 제위에 오르고 221년 3월 거기장군 임명…이런 식으로요. 어쨌든 공손강은 221년 3월 이전에 죽은 것은 확실한데, 공손강을 거기장군으로 임명한 것은 공손공의 계위를 승인한다는 의미가 있으므로 시간간격이 그리 멀지 않을 것이므로 대략 220년 무렵으로 추정됩니다.


종홍이 사명을 받들어 (황제의) 뜻에 부합했으므로 관내후의 작위를 내렸습니다. 종홍은 그 성정이 과열(果烈,과단성있고 열렬함)하여 나라에 성심을 다하고 밤낮으로 권권(拳拳,정성스럽고 간절함)하고 스스로 진력했습니다. 관족(冠族,대대로 고관을 배출한 집안)의 자손으로 어려서 학문을 좋아하여 서(書), 기(記)에 널리 통해 많은 부문에 미쳤고 구론(口論)이 빠르고 민첩하며 변설이 속되지 않고 전고(典誥,전적)에 의지하여 마치 가슴속에서 꺼내는 듯 하였고, 더불어 본군(本郡,출신 군)에서 벼슬할 때는 늘 남보다 뛰어나 그 지방의 사인(士人,선비)들이 평소 그를 경복(敬服)했습니다. 만약 사자를 보내려 하신다면 가히 종홍을 보낼만 합니다. 그리하여 종홍이 스스로 옛 땅(고향)에 도착한다면 그 땅의 풍속에 익숙할 것이라, 이해(利害)로써 설득한다면 그의 변설은 족히 그들의 뜻을 움직일 만하고 현명함은 그 일을 분명히 드러내 보여줄 만하고 재주는 이를 해낼 만하고 말(辭)은 신의를 보일만 합니다. 만약 그 계책을 따른다면 비록 역생(酈生,역이기)이 제왕(齊王)을 항복시키고 육가(陸賈)가 위타(尉佗)를 설득한 일이라 하더라도 또한 이를 넘어설 수 없을 것입니다. 먼 길을 가고자 하면 천리마(騏驥)를 풀어서 놓아주면 안되고 장차 독질(篤疾,중병)에 걸리려 하면 편작(扁鵲)을 폐해서는 안된다 했습니다. 원컨대 어리석은 제 말을 살펴 주십시오.”

 
사자가 도착한 후, 공손연은 무장병을 배치하여 진을 만들고, 나와서 사자와 회견하였다. 또 여러 차례 국내의 빈객이 되어 사악한 말을 서슴지 않았다. 
[4]

[4] 「오서吳書」- 위나라에서 사자 부용(傅容), 섭기(聶夔)를 보내 공손연(公孫淵)을 낙랑공(樂浪公)으로 삼았다. 공손연의 계리(計吏,계부計簿를 중앙조정에 보고하는 상계上計 업무를 관장하는 관리.상계리上計吏)가 낙양에서 돌아와 공손연에게 말했다,


“사자는 좌준백(左駿伯)으로 (※중화서국본 표점이나 삼국지사전에서는 인명으로 보았음) 그 사자를 모두 용력(勇力)있는 자를 뽑아 범상한 인물들이 아닙니다.”


이로 말미암아 공손연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부용, 섭기가 도착하자 학관(學館) 내에 머물게 했다. 공손연은 먼저 보기(步騎,보병과 기병)로 학관을 둘러싸게 한 후 안으로 들어가 임명을 받았다. 이에 부용, 섭기가 크게 두려워했고 이로 말미암아 낙양으로 돌아간 후 그 정황을 보고했다.

※ 이 무렵 공손연과 위, 오 사이의 교섭

228년 숙부인 공손공을 내쫓고 공손연 집권. [위] 이를 추인하며 양렬장군, 요동태수에 임명

229년 [오] (황룡黃龍 원년, 위나라 태화3년) 4월 손권 칭제 - 5월 장강(張剛), 관독(管篤)을 요동에 파견 (권46 오주전)

230년 [위] 2월, 공손연을 거기장군에 임명 (권3 명제기)

232년 [오] (가화嘉禾 원년, 위나라 태화6년) 3월, 주하(周賀), 배잠(裴潛)을 요동에 파견 – (당초 위나라가 전예田豫에게 명해 물길을 따라 공손연을 치려다, 공손연이 손권과 결탁하자 파군하도록 한 뒤) 10월, 주하 등이 돌아오는 길에 전예가 요격해 성산(成山,산동반도 동단)에서 주하를 죽임(명제기, 전예전). 공손연이 숙서(宿舒), 손종(孫綜)을 보내 손권에게 칭번하니(주하 등을 뒤따라와서 이때 오나라에 도착한 것임) 공손연에게 작위를 더해줌 (이 작위가 바로 ‘연왕’으로 보입니다.) (오주전)

233년 [오] (가화 2년, 위나라 청룡靑龍원년) 정월, 손권의 조서에서 공손연을 ‘사지절 독유주 영 청주목 요동태수 연왕’(使持節督幽州領靑州牧遼東太守燕王)으로 칭함. 3월, 숙서, 손종을 되돌려보내고, 장미(張彌), 허안(許晏), 하달(賀達) 등이 1만을 거느리고 호송하며 보물과 구석을 공손연에게 주려 함 – 공손연이 이들을 죽이고 위나라에 다시 붙음 – 손권이 대노해 출병하려 했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포기. (오주전) [위] 12월, 공손연이 장미, 허안의 수급을 보내오자 대사마 낙랑공(樂浪公)에 봉함. (명제기)

위나라 경초(景初) 원년(237)에 천자는 유주자사 관구검( 丘儉) 등에게 천 자의 도장을 찍은 문서를 갖고 가서 공손연을 응징하도록 했다. 공손연은 군대를 출동시켜, 요수(遼隧)에서 맞아 관구검과 교전하였 다. 관구검은 상황이 불리하자 돌아왔다. 공손연은 스스로를 연왕이라 하고, 백관과 담당관리를 설치하였다. 

사자에게 부절을 갖게 하고 파견하여 선비의 선우에게 옥새를 주고, 변방 백성들을 지배하도록 하였고 선비족을 꼬여 북방(위나라)을 침략했다.  

[5]「위서魏書」- 공손연(公孫淵)은 이 변고가 유독 관구검(毌丘儉) 만 출병시키는 데에 그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는 (위나라의 다음 공격을) 방비했다. 사자를 보내 오나라에게 사죄하고 연왕(燕王)을 자칭하며 여국(與國,우호국)이 되기를 청했다. 그러나 오히려 관속(官屬)들로 하여금 직접 위나라에 곧장 상서하게 했다.


“대사마(大司馬) 장사(長史) (※당시 위나라가 임명한 공손연의 공식 관직이 대사마임) 신 곽흔(郭昕), 참군(參軍) 신 유포(柳浦) 등 789인이 말씀 드립니다. 올해(경초 원년인 237년) 7월 기묘일(14일)의 조서를 받아 엎드려 간절히 읽으니 정백(精魄)이 흩어져 신명(身命) 둘 곳을 모르겠습니다. 곽흔 등이 엎드려 스스로 살펴보건대 땅강아지,개미와 같은 보잘것없는 추물이라 시세에 맞추어 쓰일 만한 그릇이 아니나 천년의 운을 만나 공손연의 조고(祖考,죽은 할아버지.즉 공손도) 이래 광명한 덕을 입어 혜택이 스며들고 풍성하고 영화로워 촌척(寸尺)의 공도 없으면서 두터운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포장(褒獎, 표창과 장려)을 입어 천부(天府,조정)에 이름을 올리고(※벼슬을 받았다는 말) 아울러 노둔하고 절름거리는 보잘것없는 자가 용(龍)에 빌붙고 천리마(驥)에 의탁하여 청색 인끈과 자색 인끈을 드리우고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었으니 감은하여 보답할 것을 생각하며 죽을 땅을 가리지 않아야 마땅할 정도입니다. 신이 듣기로 명군(明君)은 위에 있으면서 청정(聽政,정사에 관해 아뢰는 말을 들음)하여 적절한 말을 채택하고 신하는 아래에 있으면서 자신의 뜻(情)을 숨기지 않는다 하니 이를 빌미로 법을 범하는 것을 무릅쓰고 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합니다.
 
(우리) 군(郡)이 번표(藩表,변경)에 있어 (조정에) 밀접하나 기속되지는 않았고 원래 3주(州)(청주,유주,기주/삼국지집해)에서는 전수비조(轉輸費調)하여 상사(賞賜,하사품)의 비용을 대니 한 해에 누억이 쓰여 중국을 허모(虛耗)시켰습니다. (※변경 군에서 변경수비나 북방민족 대책을 위해 비용이 많이 들었고 부족분을 중앙조정에서 대어주었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그 러나 도리어 (이민족이나 도적이) 발호(跋扈)하여 변수(邊陲,변경)를 침략하여 봉화가 (올라) 서로 바라보고 우격(羽檄,긴급사태를 알리는 공문)이 보내졌고 성문이 대낮에도 닫기고 길에는 다니는 사람이 없었고 주군(州郡)에 전란이 일어 (백성들이) 달아나고 흩어지며 뒤집히고 죽어나갔습니다. 공손연의 할아버지인 공손도가 처음 군(郡)으로 부임하여 황잔(荒殘)한 땅을 이어받아 일월(日月)과 같이 밝게 열고 신무(神武)한 책략을 세워 오합지졸과 같았던 백성들을 합치고 땅을 쓸어 생업을 영위하게 하니 풍속이 다른 땅(殊俗)에 그 위엄이 진동하여 밝게 빛나고 그 덕택(德澤)이 뭇 생명들에게 끼쳤습니다. 요(遼) 땅이 무너지지 않은 것은 실로 공손도에 힘입은 것입니다. 공자(孔子)가 이르길, ‘(관중이 제환공의 재상이 되어 제후를 거느리고 천하를 바로잡았으니) 관중(管仲)이 아니었다면 나는 피발좌임(被髮左袵,머리를 풀어헤치고 옷섶을 왼쪽으로 여밈.이민족의 풍습을 의미)하며 살았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만약 공손도가 아니었다면 군(郡)은 일찍이 폐허가 되고 백성들은 노(虜,오랑캐)의 정(廷)에 붙잡히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유풍(遺風)과 여애(餘愛,선인이 남겨놓은 은덕)가 길이 존재하여 불후(不朽)하니 공손도가 죽은 뒤 관리와 백성들이 감모(感慕)해 흔쾌히 (공손도의) 아들 공손강을 추대하고 그를 존숭하며 떠받들었습니다. 공손강이 홍서(洪緖,대업)을 이어받아 아름다운 꾀를 홍대하게 하고 문(文)을 밝게 비추고 무(武)를 열렬히 하여 덕(德)에 힘쓰고 인(仁)을 심었습니다. 그리하여 경련(京輦,도읍)을 염려해 익익(翼翼,공경하고 삼가는 모양)하여 정성껏 공대하고 나라를 보좌해 난을 평정하여 그 효적(效績,공적)이 분운(紛紜,매우 많은 모양)하였고 공이 융성하고 행적이 커서 그 공훈이 왕부(王府,제왕의 부고)에 간직되었습니다. 공손도, 공손강이 무황제(武皇帝,조조) 시절 휴명(休明,아름답고 청명함)한 때를 만나 책명(策名)의 헤아림에 부합하여 한실을 보좌하였고 몸을 낮추어 위질(委質)하고 자신을 낮추어 위나라를 섬겼습니다. 소(小)에 처하여 대(大)를 미워하지 않고 두려워하며 복종하니 이에 (위나라의) 높은 풍도를 사모하여 그에 의탁하였고 흥성한 아름다움을 회앙(懷仰,앙모)했습니다. 무황제(武皇帝) 또한 마음을 비우고(겸손히) 접납(接納)하여 불차(不次,차서나 상례에 의하지 않음)로 대우하여 크고 미세한 공을 가리지 않고 늘 잊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이르길, ‘바다 북쪽의 토지를 떼어내 그대에게 주니 대대로 자손들이 실로 이를 가지도록 하라.’ 명하셨습니다. 황천후토(皇天后土,하늘과 땅 또는 하늘과 땅의 신)가 실로 그 덕음(德音)을 들었습니다. 크고 작은 신하와 서민들이 모두 진심으로 탄복하며 이를 받들어 주선(周旋)하고 감히 실추(失墜)시키지 않았습니다.

공손연은 난초와 돌과 같은 자태(蘭 石之姿,고아하고 지조가 굳음을 말함)를 지니고 태어나 어려서 개제(愷悌,온화하고 붙임성이 좋음)한 가르침을 품고 문무의 덕을 겸비하여 충혜(忠惠)하면서도 곧으니 생민(生民)들이 흠앙(欽仰,흠모)하여 그를 경애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공손연이 조고(祖考,할아버지인 공손도)를 찬융(纂戎,선인의 업적을 계승함)해 만민들에 군림하며 예(禮)로써 나라를 다스리고 아름다운 교화가 흐르게 하였고 독견선도(獨見先覩,홀로 보고 먼저 살펴보는 혜안?)하여 먼 지방에까지 (조정 질서의?) 그물을 맺고(羅結遐方) 근왕(勤王)의 의(義)로써 험한 길도 평지처럼 여기니 세재(世載,대를 이어 덕을 갖춤), 충량(忠亮)하고 그 명분을 떨어뜨리지 않았습니다. 손권이 그 의(義)를 사모하여 만리 길을 멀다 않고 여러 해 동안 사자를 보내 자신과 결원(結援)하고자 하니 비록 (보낸 사자가) 끊기고 죽임을 당해도 옛 원한을 염두에 두지않고 섬섬(纖纖,가늘고 긴 모양)히 왕래하며 우호관계를 맺고자 했습니다. 공손연의 집절(執節,절의를 지킴)이 더욱 굳어져 이로움을 좇아 굽히지 않고 절의를 지키려는 뜻이 비석(匪石,돌이 아님.굳건하기는 하나 움직일 수 있는 돌과 달리 굳건하면서도 움직일 수 없음을 말함)하여 확고하고 더욱 견고해 졌습니다. 도리어 단심(丹心)이 보명(保明,보증)되지 못할까 두려워하면서도 겸손한 말과 후한 폐물로 손권의 사자를 유인해서 오도록 해 효수하고 조정에 바쳐 두 마음이 없음을 보였습니다. 손권이 비록 멀리 있으나 물길이 잘 통하여 돛배를 일으켜 곧바로 이르면 격한(隔限,격리되거나 한정됨)될 바가 없습니다. 공손연은 원한이 깊음을 돌아보지 않고 신하의 절조를 보존하는데 유념하여 강한 오(吳)의 환심을 끊고 위나라를 섬기는 마음을 밝혔으니 신령과 지신이 밝게 비추어 보천(普天,하늘,천하)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홍렬(洪烈,큰 공적)을 아름답게 여기고 무공(武功)을 훌륭히 여겨 휴명(休命,아름다운 명령,임금의 명령)을 크게 내리니 그 총애가 (주나라 때) 제나라, 노나라에 버금가고 아래로 배신(陪臣,제후의 신하,즉 곽흔 등 자신을 말함)에까지 미쳐 두루 개복(介福,큰 복)을 받았습니다. 실로 하늘을 덮을 정도의 큰 은혜라 끝내 한결같이 하여 고굉(股肱,팔다리)의 힘을 다해 길이 녹위(祿位,봉록과 작위)를 보전하고 하루라도 염려하지 않으면 두루 잔혹(殘酷)한 꼴을 당할 것입니다. 후하게 육양(育養)해준 것을 생각하고 힘써 쌓아준 은혜를 유념하고 슬픈 마음을 이루지 못하고 통절히 버림받으니 온 나라가 울부짖으며 가슴을 치며 피눈물을 흘립니다. 무릇 삼군(三軍)이 정벌하는 바는 만이(蠻夷), 융적(戎狄)(과 같아) 교만 방자하여 삼가지 않는 이런 곳에 무력을 쓰는 법이고 (※「국어」에서 인용) 의로운 나라가 도리어 주토(誅討)당한다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대저 성왕(聖王)의 제도와 오복(五服)의 지경(域)에서 직공을 바치지 않는 일이 있으면 (우선) 문덕(文德)을 닦고 또다시 (직공이) 이르지 않으면 그 연후에 정벌하는 법입니다. 공손연은 소심익익(小心翼翼,근신하며 공경히 처신함)하여 자신의 지위에서 각공(恪恭,삼가며 공손함)하고 일에 부지런하고 윗사람을 받들었으니 가히 힘썼다(勉) 할만하고, 충성과 절의를 다하다 도리어 환화(患禍,재앙)을 입었습니다. (시경에서 시인이) 소변(小弁)을 짓고 (굴원이) 이소(離騷)를 지은 것이 모두 이와 같은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설령 아첨하는 간사한 자가 참소하는 달콤한 말을 했다 해도 오히려 맑게 통찰하여 그를 증오하며 선(善)을 알아보아야 마땅합니다. 참소하는 교묘한 말이 그럴싸하게 들려 혹 성청(聖聽,임금의 귀)을 어지럽혔다면 글로 고해 그 연유를 알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만약 (공손연에게) 죄가 있다고 믿는다면 응당 삼유(三宥)를 베풀어야 합니다. 만약 죄를 뉘우치지 않는다면 그의 공을 헤아려 (죄를) 낮추어주고 응당 팔의(八議,
)에 두어야 마땅합니다. 

※ 팔의(八議) -「주례」에서의 팔벽八辟과 같은 것으로, 죄인에 관해 의논해 죄를 감면해주는 여덟가지 사항 또는 그러한 한나라 제도. 議親(황실종족), 議故(황족과의 교분), 議賢, 議能, 議功, 議貴(고관이나 고위 작위), 議勤(근실한 자), 議賓(이전 왕조의 자손)

그러나 잠군(潛軍,은밀한 군대)으로 틈을 엿보아 습격해 대병(大兵,대군)이 갑자기 들이닥쳤고 과(戈,창의 일종)가 춤추며 멀리 달려와 요(遼) 땅을 충격(衝擊)했습니다. 개나 말도 죽는 것을 싫어하는데 하물며 사람이겠습니까! (그리하여) 관리와 백성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왕사(王師,제왕의 군대)를 꺾고 욕되게 하였습니다.

공손연이 비록 억울한 죄를 뒤집어썼으나 바야흐로 위태로운 때가 닥쳐 오로지 성은(聖恩) 만을 믿고 의지하며 창연(悵然)히 거듭 달아나며, 필시 간신(姦臣)이 교제(矯制,왕명을 거짓으로 꾸밈,또는 꾸며진 조서)하여 망령되고 방자하게 혹독한 짓을 하는 것이라 여기니 이에 신 등에게 말했습니다. ‘한나라 안제(安 帝) 건광(建光) 원년(121년)에 요동속국(遼東屬國)의 도위(都尉) 방분(龐奮)이 3월 을미일(15일)의 조서를 받아보니 유주자사 풍환(馮煥)과 현도태수 요광(姚光)을 가두라고 적혀 있었소. (그러나) 미루어 살펴보건대 을미일의 조서는 없었으므로 시어사(侍御史)를 유주(幽州)에 보내 교제(矯制)한 간신을 가두고 고문하였소. 지금 자사(刺史,유주자사 관구검)가 혹 그릇되이 교제(矯制)를 받든 것이 아니겠소?' 신 등이 의논하여 이르길, 자사(刺史)가 군대를 일으켜 천하를 뒤흔드니 아마 교제(矯制)는 아닐 것이며 필시 (진짜) 조명(詔命,임금의 명)이 맞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러자 공손연이 면앙(俛仰) 탄식(歎息)하며 자신의 죄없음에 스스로 가슴아파하였습니다. 그러나 토지가 사람을 기르는 곳임을 깊이 생각하고 (적인狄人이 빈豳 땅을 침범하자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고공(古公,고공단보)이 지팡이를 짚고서 기(岐,기산)로 떠난 뜻을 사모하니 이에 관(冠)을 벗어던지고 불(紱,인끈)을 풀고 임록(林麓,산림山林)으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신 등이 그를 말리며 죽음을 맹세하고 부문(府門)을 둔수하며 (그가) 고집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7영(營)의 호사(虎士)와 5부(部)의 만이(蠻夷)들은 각기 소포(素飽)를 품고 같은 마음으로 꾀하지 않아 (분격해) 팔뚝을 휘두르고 함성을 지르며 문을 밀치고 나갔습니다.


근교(近郊)의 농민(農民)들은 호미와 괭이를 놓아두고는 땔나무를 베어 몽둥이를 만들고 탁자를 고쳐 방패를 만들어 달려가 부난(赴難,위난을 구하기 위해 달려감)하여 군려(軍旅,군대)를 이루어 비록 끓는 물과 타오르는 불에 뛰어든다 해도 죽을지언정 삶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공손연이 비록 외로이 버려졌지만 원망할 뿐 분노하지는 않았으므로 사람을 보내 군(軍)에 명하여 간범(干犯,죄를 범함)하지 말도록 손수 쓴 글로 말하니 그 말이 간측(懇惻,간절)하고 지극히 정성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관리(吏)와 군사들이 흉특하고 사나워 해산하지 않고 기어이 목숨을 다해 투사(投死,목숨을 던지며 진력함)하며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공손연은 관리와 군사들이 교령(敎令)을 따르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여 이에 몸소 달려가 스스로 (이들을) 화해(化解,가르쳐 이해시킴)하니 겨우 멈추게 할 수 있었습니다. 한그릇 밥의 (사소한) 은혜에 대해서도 필부(匹夫)가 죽음으로 보답하는데 하물며 공손연은 누대에 걸쳐 백성들에게 신의를 맺고 민심(民心)에 은혜를 드리웠습니다.

선제(先帝,예전 황제)가 처음 흥한 이래 폐하에 이르기까지 누대에 걸쳐 공손연을 영예롭게 하여 풍성한 공(功)과 아름다운 덕(德)으로 책명(策名,신하명부에 이름을 올림.출사함) 포양(褒揚,포장,표창)되니 낭묘(廊廟,조정)에서 드러나 훌륭한 옷을 입고 빼어난 신발을 신은 채 밝은 글을 읊으며 (조정의 국록으로) 입을 채웠습니다.(※ 제갈량전에서는 ‘以爲口實’이 말로써 입을 채웠다 즉 화제거리로 삼았다, 회자되었다 이런 뜻으로 쓰였는데, 여기서는 문맥상 국록을 받았다는 의미로 보임) (여 우처럼 교활하게) 파묻었다가 (다시) 파내는 것을 옛사람들은 수치스럽게 여겼습니다. 소백(小白,제환공)과 중이(重耳,진문공)는 오히려 신의(信)를 사모하고 드리움으로써 패업을 융성히 할 수 있었습니다.「시경」에서는 문왕(文王)을 찬미하여 만방(萬邦)이 믿고 따른다 하였고,「논어」(안연편)에서는 중니(仲尼,공자)가 (정치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식(食,먹을 것,경제를 비유)을 버리고 신의(信)를 보존해야 한다고(去食存信) 칭했습니다. 신의(信)야말로 덕(德)이고 또한 실로 큰 것입니다. 지금 오(吳), 촉(蜀)이 함께 황제가 되어 정족(鼎足)하여 천하가 요탕(搖蕩,요동)해 통일되지 못했으니 신 등이 늘 이에 관해 두렵고 위태로운 심정입니다. 공손연은 금성(金城,철옹성)의 견고함에 의거하고 화목한 백성들에 의지하며 나라가 부유하고 군대가 강하니 가히 횡행(橫行)할 만합니다. (그러나 위나라에) 책명위질(策名委質)하여 수사선도(守死善道,목숨을 걸고 바른 도를 지킴)하며 충성이 지극하고 의(義)를 다하니 구주(九州)의 모범이 될 만합니다. 이제 바야흐로 두 적(敵)이 틈을 엿보는 중이라 누가 천하를 평정할 지 아직 모르므로 이를 경계하지 않으면 공손연이 해(害)를 초래할 것입니다. 부드러우면 삼키고 억세면 토해내는 것은 왕자(王者,제왕된 자)의 도(道)가 아닙니다. 신 등이 비록 비루한 자들이나 실로 이를 수치스런 일이라 여깁니다. 만약 하늘이 없다면 신의 군(郡) 하나의 길흉은 알 수 없으나 만약 하늘이 있다 한다면 또한 어찌 두렵겠습니까!

신 등이 듣기로 (어떤) 가문에 출사하여 2대에 이르면 주인(主)으로 섬기고 3대에 이르면 임금(君)으로 섬긴다 합니다. 신 등은 황량한 변경 땅에서 태어나고 규두(圭竇,홀 모양의 작은 출입구,한미한 집안을 비유) 출신으로 위나라로부터 큰 도움을 받지 않고 대대로 공손씨(公孫氏)에 예속했으니 사여해준 은혜에 목숨으로 보답하여 사력을 다할 것입니다. 옛날 괴통(蒯通,괴철蒯徹)의 말이 곧바르니 한고조가 그를 주살하려다 용서해주었고, 정첨(鄭詹,숙첨叔詹)의 언사가 순(順)하니 진문공이 그의 죽을 죄를 용서해주었습니다. (※) 

※ 한서 괴통전에 의하면, 한신이 죽을 때 ‘괴통(원래 괴철蒯徹인데 한무제의 이름 유철劉徹을 피휘해서 괴통으로 표기)의 계책을 쓰지않은 것이 후회된다’고 하자 한고조 유방이 괴통을 붙잡아 죽이려 하며 “네가 한신에게 모반을 가르쳤다니 어째서냐?”고 묻습니다. 이때 괴통이 “개는 각기 그 주인이 아닌 자를 향해 짖습니다. 그때에 신은 오로지 제왕 한신을 알았을 뿐 폐하를 알지 못했습니다…”고 대답해서 용서를 받습니다. 한편,「국어」에 의하면 진문공이 정나라를 침공하고는 군사를 물리는 조건으로 정나라의 대신인 숙첨을 요구했는데, 숙첨은 예전 진문공이 천하를 방랑하며 정나라를 들렀을 때 그를 귀빈으로 대우하거나 아니면 아예 죽여버리라고 간언했던 인물이나 결국 진문공이 그를 무사히 돌려보내 줍니다. 즉, 유방이 괴통, 진문공이 숙첨(정첨)에게 그랬듯, 자신들이 그 주인인 공손연을 위하는 것을 용서해달라는 취지의 말입니다.

신 등이 미련하고 어리석어 대절(大節)에 통달하지 못하고 구차하게 일개(一介,보잘것없는 것)에 집착하여 간담(肝膽,속마음)을 드러내보이니 그 말이 용린(龍鱗)을 거슬려 만번 죽을 죄에 해당합니다. 오로지 폐하께서 널리 무육(撫育,잘 돌보며 기름)하고 밝게 고하시어 소원(疏遠)한 신하들이 길이 보지(保持,보전)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경초 2년(238) 봄에 조정에서는 태위 사마의(司馬懿)를 보내 공손연을 토벌하도록 했다. 


6 월, 군대가 요동에 도착하였다. 
[6]

[6] 「한진춘추漢晉春秋」 - 공손연이 자립하여 소한(紹漢) 원년(元年)이라 칭했다. 위나라가 장차 토벌한다는 말을 듣고 다시 오나라에 칭신(稱臣)하며 (오나라) 군대가 북벌하여 자신을 구원해달라고 청했다. 오나라가 그 사자를 죽이려 하자 양도(羊衜)가 말했다,


“(공손연의 사자를 죽이는 것은) 불가합니다. 이는 필부(匹夫)의 분노를 드러내 패왕(霸王)의 계책을 내버리는 것이니, 이때를 틈타 사자를 후대하여 기병(奇兵,기습군,正兵의 반대)을 몰래 보내 그가 일을 이루도록 기다리느니만 못합니다. 만약 위나라가 공손연을 쳐서 이기지 못하면 우리 군이 멀리 달려갔으니 이로써 멀리 떨어진 오랑캐(遐夷)에게 은혜를 베풀어 만리 바깥에까지 의(義)로 뒤덮은 것이 됩니다. 만약 싸움이 연이어 풀리지 않아 머리와 꼬리가 나뉘어지면 우리가 그 부근의 군(郡)을 노략하고 구략(驅略)한 뒤 돌아오면 되니 또한 족히 천벌을 가해 지난 일을 설욕할 수 있습니다.”


손권이 말했다,


“옳은 말이오.”


그리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대거 출병하며 공손연의 사자에게 말했다,


“뒤의 소식을 기다리시오. 응당 간서(簡書,죽간에 쓴 글,편지)를 좇아 필히 동생과 휴척(休戚,기쁨과 근심), 존망(存亡)을 함께할 것이니 비록 중원(中原)에서 죽더라도 나는 달게 받아들일 것이오.”


또 말했다,


“사마의(司馬懿)가 향하는 곳에 앞을 가로막을 자가 없으니 심히 동생이 염려되오.”

이에 맞서 공손연은 장군 비연(卑衍)과 양조(楊祚) 등을 파견하여 보병 과 기병 수만 명을 
(※)요수에 주둔시켰으며, 주위에 20리 이상의 참를 팠다. 

※ 요수(遼隧=遼隊) / 삼국지집해 (수경주 인용문 중 괄호는 삼국지집해의 인용문 중 생략한 대목을 제가 추가한 것임)

「한서」지리지에 의하면 ‘요동군 요수(遼隊)현’이고 (이를 注하여) 안사고는 ‘隊의 음은 遂’라 했다. (※ 이 한서와 뒤의 수경주에 나오는 遼隊는 위 본문을 비롯해 삼국지, 진서 등에 나오는 遼隧의 다른 표기로 보임. 즉, 遼隧=遼隊)「수경水經」대요수(大遼水) 주(注)에서는 ‘대요수가 남쪽으로 흘러 요수현(遼隊縣)의 옛 성 서쪽을 지나는데 (왕망은 그 이름을 고쳐 순목(順睦)이라 했고) 공손연이 장군 필연(畢衍,바로 뒤에 나오는 卑衍(비연)의 다른 표기로 보임)을 보내 요수(遼隊)에서 사마의를 막았으니 즉 이곳이다.’라고 하였다. 소요수(小遼水) 주(注) 에서는 ‘소요수가 서남쪽으로 흘러 양평현을 지나고 (담연[淡淵,담수연못]을 이루고 이 담연은 진나라 영가永嘉 3년[309년]에 말랐다. 소요수는) 또한 요수현(遼隊縣)을 지나 대요수(大遼水)에 유입된다. 사마선왕(사마의)이 요동을 평정하여 이 물가에서 공손연을 베었다.’고 했다.「일통지一統志」에서는 ‘요수(遼隊)의 옛 성이 지금 봉천부(奉天府) 해성현(海城縣) 서쪽’이라 했다. 사종영(謝鍾英) 왈, 요수(遼隧)는 건무(建武,후한 광무제 때 연호) 초에 폐지되었는데 (삼국지) 관구검전에 의하면 관구검이 유주자사로 옮겨져 경초 원년에 유주의 제군을 인솔해 양평에 이르러 요수에 주둔했다 했으니 아마 환제, 영제 뒤에 다시 세워진 것 같다. 전점(錢坫,淸) 왈, (요수遼隧는) 지금 봉천부 해성현 서쪽의 우장(牛莊)이다.

 / 이 수경주 내용이나 뒤에 나오는 사마의와의 전투 양상(+진서 선제기)을 볼 때, 요수(遼隧 또는 遼隊)는 대요수와 소요수가 합류하는 부근의 지명으로 중국에서 요동으로 들어오는 길목이고, 종래 요동군의 치소이자 공손 씨의 본거지인 양평(襄平)은 이 요수(遼隧)의 북동쪽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삼국지사전」요수(遼隧) 항목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현 이름으로 서한(전한)이 설치함. 치소는 지금의 요령성 안산(鞍山) 서쪽 태자하(太子河) 부근.”

사마의의 군대가 도착한 후, 공손연은 비연에게 명령하여 맞아 싸우도록 했다. 사마의는 장군 호준(胡遵) 등을 보내어 그들을 쳐부수게 했다. 사마의는 군대에 명령을 내려 주위에 참호를 파도록 하고, 군대를 인솔하여 동남 쪽으로 달려가더니, 동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매우 신속하게 양평으로 달려갔다. 비연 등은 양평이 무방비 상태로 있음을 걱정하고 밤중 에 도주하였다. 

사마의의 각 부대는 
(※)수산(首山)으로 나아갔으며, 

※ 수산(首山) / 삼국지집해 – 호삼성(胡三省,淸) 왈, 수산(首山)은 양평 서남쪽에 있었다. 조일청(趙一淸, 淸) 왈, (독사)방여기요(方輿紀要) (권37)에 의하면 수산(首山)은 요동도사(遼東都司)의 서남쪽 15리 되는 곳에 있었는데, 일명 수산(手山)으로 산 정상의 돌 위에 손바닥을 닮은 무늬가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반미(潘眉,淸) 왈, 수산(首山)은 지금의 요양주(遼陽州) 서남쪽 15리로 해성현(海城縣)의 경계와 접하는 곳이었다. 

공손연은 또 비연 등을 보내어 
크게 무찌르고, 성 아래까지 진군하여 주위에 참호를 팠다. 마침 30여 일간 장마가 져 요수가 불어났으므로, 운송선은 
(※) 요구(遼口) 입구에서 성 아래 까지 직행하였다. 

※ 요구(遼口) / 삼국지집해 – 호삼성 왈, 요구(遼口)는 요수(遼水)의 나루터로 요수를 건너는 입구다. 사종영(謝鍾英,淸) 왈, 의심컨대 혼하(渾河)가 요하(遼河)로 들어가는 입구로 보인다. (胡三省曰, 遼口遼水津渡之口也. 謝鍾英曰, 疑卽渾河入遼河之口.) / 강들이 서로 만나는 곳의 이름에 口가 붙는 경우가 많은데, 이 대목까지의 정황을 보면 요구(遼口)는 소유수가 대요수로 유입되는 지점 즉 요수(遼隊=遼隧)를 말하는거 같습니다. 즉, 사마의군은 대요수를 건너 요수(遼隧) 일대를 장악한 뒤 소요수의 물길을 따라 양평성(부근)에까지 물자를 운반했는데, 비가 내려 물이 불어나자 소요수 물이 양평성 바로 가까이에까지 닿게 되었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비가 그치자, 사마의는 흙산을 쌓고 누대를 만들어, 그 위에서 연발식 화살을 성안으로 쏘았다. 공손연은 급박해졌다. 성안에는 양식이 다 떨어져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을 지경에 이르렀으며 죽은 자가 매우 많았고, 장군 양조 등은 투항했다. 


8월 7일 밤에 길이가 수십 장 되는 유성이 수산의 동북쪽에서 양평성 동남쪽으로 떨어졌다. 

23일, 공손연의 군대는 무너지고, 공손연의 아들 공손수(公孫脩)와 함께 수백 기병대를 데리고 포위를 뚫고 동남쪽으로 도망갔다. 사마의의 대군은 이들을 급습하였는데, 유성이 떨어진 곳에서 공손연 부자를 죽였다. 성은 함락되었고, 
상국(相國) 이해 수천 명을 참수시켰으며 공손연의 머리를 낙양으로 보냈으니, 요동군ㆍ대방군(帶方郡)ㆍ낙랑군ㆍ현도군은 전부 평정되었다. (※ 공손연 재위 : 228 – 238년)

이 전에 공손연의 집에는 기괴한 일이 여러 번 있었다. 이를테면 개가 두건을 쓰고 붉은 옷을 입고 지붕 위에 있었고, 밥할 때 어린 아이가 솥단지 안에 삶겨 죽었던 것이다. 양평 북쪽 시장에서 날고기를 팔았는데, 큰 것은 길이와 둘레가 각기 몇 척이고, 머리 ㆍ눈ㆍ입술만 있고 발과 손은 없었지만 움직일 수 있었다. 점[卜]에 말했다. 

"형체는 있으나 완전하지 않고, 몸은 있으나 소리가 없다는 것은 그 나라가 멸망하려는 것이다." 

중평 6년(189)에 공손도가 요동을 점거한 이래, 공손연에 이르기까지 3대를 지나, 총 50년 만에 멸망했다. 
[1]

[1] 「위략魏略」- 당초 공손연(公孫淵)의 형 공손황(公孫晃)은 (숙부인) 공손공(公孫恭)을 위해 임자(任子,볼모)가 되어 낙양에 있었는데, 공손연이 공손공의 지위를 겁박해 빼앗자 공손연이 끝내 (스스로) 보전하지 못할 것이라 여겨 수차례 표(表)를 올려 국가가 공손연을 토벌하도록 청했다. 황제는 공손연이 이미 권력을 잡았으므로 (토벌하지 않고) 그를 달래었다. 그러다 공손연이 배반하게 되니 이에 국법(國法)에 따라 공손황이 연루되었다. 공손황이 비록 전에 한 말이 있고 좌죄되길 바라지 않았으나 안으로는 (공손연의) 골육(骨肉)이니 공손연이 격파되면 자신에게도 죄가 미칠 것을 알았다. 공손연의 수급이 (낙양에) 도착하자 공손황은 스스로 필히 죽을 것을 헤아려 자신의 아들과 함께 서로 마주보며 큰 소리로 울었다. 당시 황제 또한 그를 살리려 했으나 유사(有司,담당관원)가 불가하다고 하니 마침내 그를 죽였다.


보충: 공손문의(公孫文懿 : 공손연. "문의"는 공손연의 자)의 집에는 개가 있었는데, (그 개가)관모와 두건, 붉은 옷을 갖추어 입고 지붕으로 올라갔으니 이것이 바로 견화(犬禍 : 개로 암시되는 재앙)이다. 건물의 꼭대기는 높고 위험한 곳이며, 하늘의 경계와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꼭대기 위에는 아무 것도 없으며, (가장 높은 곳에 있게 되니)자만하는 마음이 생겨 개가 관을 쓰고 오른 것이다. 훗날 문의는 연왕(燕王)을 자칭하였고, 이로 인하여 위나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경방(京房)의 《역전(易傳)》에서 말하기를, "임금이 올바르지 않으면 신하가 (지위를)빼앗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리하여 개가 문을 나온다." (진서 28권)

보충: 공손문의 대에, 양평(襄平) 북부의 시장에서 고기가 생겼다(시장에서 팔았다, 또는 도축했다 정도로 보면 될 듯). (고깃덩어리의) 둘레는 각각 수 자에 이르렀으며, 머리와 눈 · 입 · 부리는 있었으나 손발이 없고 움직이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적상(赤祥 :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조짐을 보이는 현상)이다. 점괘에 이르기를 "형태가 있으나 이루어지지 않고, 몸이 있으나 소리를 내지 않으면 그 나라는 망한다"라 하였는데, 문의는 결국 위나라의 침략을 받아 죽었다. (진서 2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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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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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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