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張魯)는 자가 공기(公棋)이고 패국 풍현 사람이며, 조부 장릉(張陵)은 촉군에 몸을 의탁했으며, 곡명산(鵠鳴山) 산중에서 도술을 배우고, 도술에 관한 책을 지어 백성들을 미혹시켰다. 

그에세 도술을 배우는 사람은 모두 다섯 말의 쌀을 바쳤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그를 '미적(米賊)'이라고 불렀다. 장릉이 죽은 후, 아들 장형(張衡)이 도술을 받들여 행하였다. 익주목 유언(劉焉)은 장로를 독의사마(督義司馬) [1] 에 임명하고, 별부사마(別部司馬)[2] 장수(張脩)에게 군대를 이끌게 하여 소고(蘇固)를 공격하였다. 


[1] 유언이 익주목을 역임하면서 독자적으로 설치한 관직이다.

[2] 동한시대에 대장군이 5부를 통령했는데 각 부에 교위 1명, 군사마 1명이 있었다. 당시 유언은 벼슬이 대장군이 아니었지만 사마를 둔 것이다.

장로는 마침내 장수를 습격하여 살해하고 그의 군세를 탈취하였다. 유언이 죽은 후 그 아들 유장(劉璋)이 그를 대신하여 익주목이 되었다. 장로가 그에게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장로의 어머니와 그 식구들을 모두 죽였다. 


장로는 한중을 점령하여 요술로써 백성들을 교화시키려 하고, 스스로 '사군(師君)'이라고 했다. 도술을 배운 사람들은 처음에는 '귀졸(鬼卒_'이라 부르고, 본격적으로 도술을 받아 의심스럽거나 미혹되는 것이 없어진 후에는 '좨주(좨酒)'[3] 라고 불렀다. 

[3] 장로가 창시한 일종의 정교일체 정권하에서 최고통치자는 사군(師君)이라 불렸고 이하는 모두 좨주(祭酒) 또느 치두대좨주(治頭大祭酒)라고 하였다.

좨주들은 각각 부하들을 인솔하고 백성을 가르쳤으며, 사람수가 많으면 치두대좨주(治頭大좨酒)라고 불렀다. 

좨주는 백성을 가르치고, 병이 있으면 스스로 자기 과실을 조서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것은 거의 황건과 유사하다. 각 좨주들은 모두 돈을 받지 여관을 지었는데, 그것은 역사(驛舍)[4] 와 유사하다. 

[4] 옛날 차사들이 먹고 마실 수 있도록 길에 설치한 장소.

또 돈을 받지 않는 쌀과 고기를 여관 안에 걸어두어 지나가는 사람이 배가 부를때까지 먹도록 했다. 법령을 위반한 사람은 세 번가지는 너그럽게 용서하지만 그 이후 다시 범하면 징벌하였다. 한인과 소수민족은 이것을 매우 편리하다고 생각하고 좋아했다. 장로는 파군과 한중군에서 거의 30년간 제패했다.(40) 

[40] 전략(典略) - 전략에 이르길 희평 연간에 요사한 도적들이 크게 일어났는데 삼보(三輔)에 낙요(駱曜)가 있었다. 광화 연간에 동방에 장각이 있었고 한중에는 장수가 있었다. 낙요는 백성들에게 면닉법(緬匿法)[1]을 가르치고 장각은 태평도를 만들고 장수는 오두미도를 만들었다.

[1] 도교에서 사용하는 은신법의 일종.
 
태평도는 주술사가 아홉마디의 지팡이로 주술을 행했는데 병든사람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잘못을 생각하게 하여 이로 인해 부수(符水)[2]를 마시게 하고 병이 날로 가벼워지고 나은 사람은 믿음이 있다고 하고 혹시 낫지 않거든 믿음이 없다고 하였다.

[2] 도사가 부적을 태워서 그 재를 넣은 물

장수는 장각과 방법이 대략 비슷한데 조용한 방을 만들어서 병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 가운데 거처하여 잘못을 생각하게 했다. 

또 사람으로 하여금 간령(姦令),좨주(祭酒)가 되게 했는데 좨주는 주로 도덕경을 익히고 마스터하면 간령이라고 불렀다. 귀리(鬼吏)가 되서는 병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주로했다.

기도하는 방법은 병든 사람의 이름을 적고 죄를 자백하는 의사를 설명한다. 3통을 짓는데 하나는 하늘에 올린다고 산위에 올라가서 드러내고 하나는 땅에 묻고 하나는 물에 가라 앉히는데 이를 삼관수서(三官手書)라고 했다.

병든 사람의 집에서 쌀 5두를 거둔 것을 법도로 했으므로 오두미사(五斗米師)라고 부른다

진실로 병을 고치는데는 아무런 이득이 없는데 다만 음란하고 망령될 뿐이었지만 소인들은 어둡고 어리석어 앞다퉈서 이를 섬겼다.

뒤에 장각이 주살당하고 장수 역시 죽었다. 장노가 한중에 있을때에 이르러 그 백성들이 장수의 사업을 믿고 따르는 것으로 인해 마침내 증식 하였다.

교사(教使)는 의사(義舍)를 만들어 쌀과 고기를 비치해서 행인들을 멈추게 하고 작은 잘못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 은닉해주어 오두미도에 열성적으로 참여하면 죄를 면해주었다. 월령에 의거하여 봄과 여름에는 살생을 금지했고 술도 금지했다. 유민중에 이 땅에 의지한 사람들은 감히 받들지 않을수 없었다.

신 배송지가 말하건대 “ 장수는 응당 장형의 오식으로 전략(典略)의 잘못이 아니라 베끼는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입니다”하였다.

후한 말에 조정은 장로를 정벌할 힘이 없었으므로, 그에세 사자를 보내어 진민중랑장(鎭民中郞將)으로 삼고, 한녕태수(漢寧太守)로 임명하였으며, [1] 장로는 공물을 헌상하여 의무만을 다했다. 

[1] 겸직을 표시한 것이다.

백성들 중에 땅속에서 옥인(玉印)을 주운 자가 있었으므로, 현상하여 부하들은 장로를 받들어 한녕왕(漢寧王)으로 삼으려고 했다. 장로의 공조(功曹)에 있는 파서군(巴西郡) 사람 염포(閻圃)가 장로에게 간했다. 


" 한천(漢川)의 백성들은 10만 호가 넘고, 생산물이 풍부하며 토지가 비옥하고, 사방의 지형이 오새이니 당신이 천자를 보좌할 수 있다면 춘추시대의 패자 제환공과 진문공 같이 될 것이고, 그 다음에 후한 초 광무제에게 돌아간 두융(竇融) [2] 처럼 부귀를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2] 동한사람으로 왕망의 난때 하서에서 5개의 군으로 할거했다가 이후 광무제 유수에게 항복하여 공로를 인정받아 안풍후(安豐侯)에 봉해졌으며 대사공을 역임했다.

현재 황제의 뜻에 따라 관원을 설치하여 권한을 주고, 형벌은 단행하기에 충분한 세력을 갖고 잇으니, 왕으로 칭하는 것을 서두를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왕으로 불림을 잠시 미루어 재앙과 횡액을 초래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장로는 염포의 말에 따랐다. 한수•마초가 난을 일으켰을 때, 관서(關西)의 주민 수만 명이 자오곡(子午谷)으로부터 장로에게 달려왔다. 

건안 2년(215)에 조조는 산관(散關)에서 무도(武都)로 나가 장로를 정벌하러 떠나 양평관(陽平觀)에 도착했다. 장로는 한중을 바치고 투항하려 했지만, 그의 동생 장위(張衛)는 수긍하지 않고 수만 군대를 지휘하여 양평관을 방허하며 견고하게 지키고 있었다. 조조는 이들을 격파시키고 촉으로 침입했다.(41) 


[41] 위명신주(魏名臣奏)에 실린 동소(董昭)의 표에 이르길

「무황제가 양주종사와 무도에서 항복한 사람의 말을 따라 이르길 

"장노는 공격하기 쉽고 양평성 밑의 남, 북산은 서로가 멀리 떨어져 있어 수비할 수 없으니 믿을만하다"

고 하였습니다. 직접 가서 지형을 보는데 이르러서는 들은 것과 같지 아니하므로 탄식하며 말하길 

‘다른 사람의 헤아림은 내 뜻에 맞는 경우가 드물구나!’ 

하였습니다. 양평산 위의 둔영들을 공격하는데 있어 제대로 이기지도 못하고 상처 입은 병사들이 많았습니다. 무황제는 뜻을 이루지 못하자 군대를 데리고 후방을 막으면서 돌아가고자 고(故) 대장군 하후돈과 장군 허저를 보내 산 위의 병사들에게 소리쳐 돌아오도록 하였습니다. 전군이 다 돌아오지도 못했는데 밤중이라 길을 잃어 적의 군영으로 잘못 들어갔고 적들은 (기습이 있는 줄 알고) 모두 퇴산하였습니다. 

시중 신비와 유엽 등이 군대의 후방에 있으면서 하후돈과 허저에게 말하길 ‘관병이 이미 적군의 둔영을 점거했고 적들은 퇴주했습니다.’고 하자 그 둘은 믿지 않았습니다. 하후돈이 나아가 친히 이를 보고 마침내 돌아와 무황제에게 아뢰니 병사를 진군시켜 평정했으므로 운이 좋게 이긴 것입니다. 이는 가까운 일이므로 관리들이 알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양기(楊曁)의 표에 이르길

「무황제가 비로소 장노를 정벌할 때 10만 대군으로 친정하고 직접 작전 방략을 하달하여 백성들의 보리를 베어 군량으로 삼았습니다. 장위의 수비는 대체로 말할만한 것이 못됩니다. 지형은 험악하고 수비하기는 쉬우니 비록 정병 호장(虎將)이 있다 하더라도 형세상 베풀어 질수가 없었습니다. 병사를 대치시킨 지 3일 만에 회군하고자하여 말하길 ‘군사를 일으킨 지 30년, 하루아침에 상대방과 대치하게 됐으니 어찌할까?’라고 하였습니다. 이 계획이 이미 정해졌는데 하늘이 우리 위나라를 도운지라 장노의 수비가 저절로 무너졌고 이로 인해 평정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

세어(世語)에 이르길 장노가 5관 연속을 보내 항복했지만 동생인 장위는 산을 가로질러 양평성을 쌓고서는 저항하니 왕사가 나아갈 수 없었다. 장노가 파중(巴中)으로 도망가고 군중의 식량이 떨어지니 태조는 장차 돌아가려고 하였다. 서조연(西曹掾) 동군(東郡)사람 곽심(郭諶)이 말하길 

‘(퇴각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장노가 이미 항복했고 남은 관리들도 반역하지 않았으니 장위가 비록 동의하지 않고 있지만 비주력 부대는 공격할 만합니다. 현군을 동원해 깊이 들어가서 전진하면 반드시 이길 것 이지만 물러나면 패배를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자 태조가 이를 의심하였다. 밤중에 야생 사슴 수천마리가 장위의 군영에 돌입하자 군대가 크게 놀랐다. 밤에 고조(高祚) 등의 사람들이 장위의 군대와 잘못 만났는데 고조가 북을 울리며 무리를 모으자 장위가 두려워하였고 이로써 대군이 뒤집어져 끝내 항복하게 된 것이다.

 
장로는 양평관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땅에 무릎을 꿇고 배례하며 투항하려고 했다. 그런데 염포가 또다시 말했다. 

"지금은 추격당하는 상태이므로 공로는 반드시 크지 아니할 것입니다. 두호(杜濩 ; 두읍후)를 달아나게 하여 박호(朴胡)와 항거하도록 한 이후에 귀순하면 공로는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때문에 장로는 남산으로 달려가 파중(巴中)으로 들어갔다. 측극에 잇는 사람들이 진귀한 보물을 쌓아놓은 창고를 모두 불태우려 하자 장로가 말했다. 

"나는 본래 조정의 명에 따라 귀순하려 했지만, 실현될 수 없을 것이오. 현제 도망치는 것은 조조 군대의 예봉을 피해보려는 것이지 결코 나쁜 뜻이 없소. 진귀한 물품을 쌓아놓은 창고는 국가의 것이오." 장로는 창고를 굳게 닫아놓고 떠났다. 조조는 남정(南鄭)으로 입성하여 이 말을 듣고 장로를 크게 칭찬하였으며, 또 장로는 본래 귀순할 마음이 있었으므로 사람을 보내 위로하고 설득했다. 장로는 가족들을 데리고 나왔고, 조조는 그를 영접하여 진남장군으로 삼아 빈객의 예우를 했으며, 낭중후( 中侯)에 봉하고 식읍 1만 호를 주었다. 장로의 다섯 아들과 염포 들을 열후로 삼았으며,(42) 

[42] 신(臣) 송지가 보건데 장로에게 비록 선심이 있다하나 패배한 후에 항복한 것이므로 지금 만호를 내려 총애하고 다섯 아들을 후에 봉한 것은 지나치다고 여겨진다.

습착치가 말하길 

「장로가 왕을 칭하고자 할 때 염포가 간언하여 멈췄고 지금은 그를 열후에 봉했다. 무릇 상벌이라는 것은 권선징악 하는 근본이라 진실로 법도를 밝힐 수 있다면 가깝고 먼 것과 궁벽한 것이 없는 것이다. 지금 염포가 장로에게 간쟁하여 왕을 칭하지 말도록 했으니 태조가 이를 추봉했다. 장래의 사람 중에 누가 이에 따르지 않을 것을 생각하겠는가! 근원을 막아버리면 말류는 저절로 그친다는 것은 이를 말한 것인가 ! 

만약 이를 밝히지 않고 초란(燋爛:불을 예방하는 것이 아니라 불을 끄기 위해 분투하다 몸이 타는 것)의 공로를 무겁게 여긴다면 풍부한 작위와 후한 상이 싸우다 죽은 병사들에게 미칠 것이고 곧 백성들은 난리를 이롭게 여기며 풍속이 앞 다투어 살벌하게 될 것이니 무력분쟁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태조가 이를 봉한 것은 가히 상벌의 근본을 알았다고 말할만하니 비록 탕왕이나 무왕이 같은 상황에 처했더라도 이보다 더 잘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

위략(魏略) - 황초(黃初) 연간에 염포(圃)의 식읍을 증가시키자, 예의를 표하였다. 십 여년 후 사망했다.

진서(晉書) - 서융사마(西戎司馬) 염찬(閻纘)은 염포(圃)의 손자다.

자기 아들 조팽을 장로의 딸과 결혼시켰다. 장로가 죽은 후 그에게 원후(原侯)라는 시호를 하사했다. 그의 아들 장부(張富)가 작위를 계승했다.(43) 

[43] 위략(魏略) - 위략에 이르길 : 유웅명(劉雄鳴)은, 남전(藍田) 사람이다. 젊어서 약을 캐고 사냥을 하는 것을 업으로 삼았는데, 항상 복거산(覆車山) 아래 있으면서, 매번 새벽같이 구름과 안개 속으로 나가면서도, 길을 알고 헤매지 않아, 이때 사람들이 이로인해 말하길 그가 능히 구름과 안개를 다룬다고 하였다. 곽사, 이각의 난 때,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로 갔다. 건안 연간, 주군에 복속하였고, 주군에서 표를 올려 소장(小將)으로 삼았다. 마초 등이 모반하였을 때, (마초를) 따르지 않아, 마초가 그를 격파했다. 후에 태조에게로 가자, 태조가 그의 손을 잡고 말하길


"고가 바야흐로 관중으로 들어가려는데, 꿈에서 한 신인을 얻었소. 그게 바로 경이구려!"


이에 후히 그를 예우하고, 표를 올려 장군으로 삼고는, 그의 도당을 맞아들이도록 하였다. 그의 무리들이 항복하길 원치 않아, 마침내 (그를) 겁박하여 모반하니, 여러 망명자가 모두 그에게 가서 의지하였고, 군사가 수천명이 되었으며, 무관의 길을 점거하였다. 태조가 하후연을 보내서 격파하자, 유웅명은 남쪽으로 한중으로 도망갔다. 한중이 격파되자, 갈곳이 없고 궁해져서, 다시 돌아와 항복했다. 태조가 그의 수염을 잡고 말하길


"늙은 도적넘아, (이제) 진짜 너를 얻었구나!"


그 관직에 복직되었고, 발해로 옮겨졌다. 이때 정은(程銀), 후선(侯選), 이감(李堪)은 모두 하동 사람인데, 흥평의 난리(흥평 연간에 있었던 삼보의 난)때, 각자 수천여 가를 영유하게 되었다. 건안 16년, 마초와 연합했다. 마초가 격파되어 도망갈 때, 이감은 전장에서 죽었다. 정은, 후선은 남쪽으로 한중으로 들어갔는데, 한중이 격파되자, 태조에게로 가서 항복했고, 모두 그 관작을 회복했다.

* 평하여 말한다.--- 공손찬은 역경을 지키다가 그곳에서 전멸을 당했다. 공손도는 포학하고 자제력이 없었으며, 공손연은 더욱 더 흉악해져서 그들의 종족마저 명망시키게 하였다. 도겸은 혼란으로 인해 걱정하다가 죽었고, 장양은 신하들에게 살해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주군을 지배했지만 일반 백성들만도 못하였으니 실제로 평론할 가치가 없다. 장연•장수•장로는 도적의 생활을 하면서도 근심을 떨쳐 버리고 선조들의 제사를 지켰으니 이들을 공손찬 등과 비교하면 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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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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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18
16:04:35
(*.104.141.18)
추가할 주석이 없습니다.

무명

2013.09.09
13:48:27
(*.97.200.204)
장유에게 군대를 이끌게 하여 소고(蘇固)를 공격하였다.
인명용 한자로는 脩을 유가 아니라 수라 읽는다고 했으니 장수로 고치는 것이 옳지 않나요?
제가 잘못된 지적을 했다면 죄송합니다만...

코렐솔라

2013.09.09
13:52:23
(*.0.203.44)
장수가 맞습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바로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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