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고원님의 블로그  



하후연夏侯淵의 자字는 묘재妙才이고 하후돈의 집안동생(族弟)이다. 태조(=조조)가 고향집에 있을 때 일찍이 현의 관리에게 일을 저질렀는데 하후연이 중죄를 대신 떠맡았고 태조가 방책을 내어 그를 구하여 죄를 면한 적이 있다.(주1) 
 
(주1) [위략魏略]에서 이르길, 연주, 예주에 대란이 일었을 때, 하후연은 기근 때문에 어린 아들을 버렸으나 죽은 아우의 딸은 살렸다.
 
태조가 군을 일으키자 별부사마別部司馬, 기도위騎都尉로 삼아 수행했고 진류, 영천 태수로 승진했다. 원소와 관도官渡에서 싸울 때는 독군교위督軍校尉의 직을 맡았다. 원소가 격파되자 연주, 예주, 서주徐州의 군량을 감독했는데 식량이 모자랄 때 하후연이 계속 군량을 이어서 보내주어 군이 다시 분발할 수 있었다. 
 
창희昌狶가 모반하자 우금于禁을 보내 공격하게 했는데 이기지 못하자 다시 하후연을 보내 우금과 힘을 합치게 했다. 마침내 창희를 공격하여 10여 둔영을 항복시켰고 창희는 우금에게 나아가 투항했다. 하후연이 돌아오자 전군교위典軍校尉에 임명했다.(주2) 
 
(주2)[위서魏書]에서 이르길, 하후연은 장수가 되어 행군이 매우 빨라 항상 적이 예상치 못한 곳에 나타났으므로(出敵之不意) 군중에서 이를 두고 말하길, “전군교위 하후연은 3일에 5백리, 6일에 천리를 간다”고 했다.
 
제남(濟南-청주 제남국), 낙안(樂安-청주 낙안국)의 황건적 서화徐和, 사마구司馬俱 등이 성을 공격하여 관원을 살해했다. 하후연이 태산(泰山-연주 태산군), 제(齊- 청주 제국), 평원(平原-청주 평원군)의 군사들을 이끌고 공격하여 대파하고 서화를 참수하여 여러 현들을 평정했고 그들의 양곡을 거두어 군사들에게 공급했다. 
 
건안 14년(209년), 하후연을 행령군行領軍으로 임명했다. 태조가 손권을 정벌하고 돌아올 때 하후연으로 하여금 제장들을 지휘해 여강廬江에서 반란을 일으킨 뇌서雷緖를 공격케 했다. 뇌서를 깨뜨리자 또 정서호군征西護軍으로 서황徐晃을 지휘해 태원太原의 도적을 공격했는데, 20여 둔영을 함락시키고 도적의 우두머리 상요商曜를 참수하고 그 성을 도륙했다. 
 
한수를 정벌하는데 수행하여 위남渭南에서 싸웠으며 주령朱靈을 이끌고 유미隃糜, 견저汧氐를 평정했다. 태조와 안정安定에서 만나 양추楊秋를 항복시켰다.
 
건안 17년(212년), 태조가 업으로 돌아갈 때 하후연을 행行 호군장군護軍將軍으로 삼아 주령, 노초路招 등을 지휘해 장안에 주둔케 했다. 남산南山의 도적 유웅劉雄을 격파하고 그 무리들의 항복을 받았다. 
 
한수, 마초의 잔당인 양흥梁興을 호(鄠-사례주 우부풍 호현)에서 포위하여 무찌르고 양흥을 참수하고 박창정후博昌亭侯에 봉해졌다. 
 
마초가 양주자사 위강韋康을 기(冀-양주 천수군 기현)에서 포위하자 하후연이 위강을 구원하려 했는데, 도착하기 전에 위강이 패했다. 기성에서 2백 여 리 떨어진 곳까지 마초가 와서 이에 맞서 싸웠는데 군이 불리했고 견저汧氐가 모반하자 하후연은 군을 이끌고 퇴각했다. 
 
건안 19년(214년), 조구趙衢, 윤봉尹奉 등이 마초 토벌을 도모하자 강서姜敍가 노성鹵城에서 군을 일으켜 이에 호응했다. 조구 등이 마초를 속여 성을 나가 강서를 공격하게 한 뒤 마초의 처자를 모두 죽였다. 
 
마초는 한중으로 달아났다가 다시 돌아와 기산祁山을 포위했다. 강서 등이 급히 구원을 요청했는데 여러 장수들이 의논하기를 태조의 절도節度를 기다리자고 했다. 하후연이 말했다, “공(=위공 조조)께서는 업에 계시니 왕복하는데 4천리 길이오. 회답에 따르려 하다가는 강서 등은 필시 패할 것이니 급히 공격해야 하오.”
 
마침내 이를 실행해 장합에게 보기 5천을 주어 선두에 서서 진창陳倉의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게 하고 하후연 자신은 군량을 감독하며 후미에 있었다. 장합이 위수 가에 도착하자 마초가 강족과 저족 수천 명을 이끌고 장합에 맞섰다. 싸우기도 전에 마초가 달아나니 장합은 진군하여 마초군의 무기를 거두었다. 하후연이 도착했을 때는 여러 현들이 이미 다 항복한 상태였다.
 
한수는 현친(顯 親-양주 천수군 현친현)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하후연이 공격하려 하자 달아났다. 하후연은 한수의 군량을 거두고 추격하여 약양성(略陽城-양주 천수군 약양현)에 이르렀고 한수와 20리 떨어져 있었다. 제장들이 이를 공격하고자 했는데 어떤 이가 말하길 마땅히 흥국성興國城의 저족氐族을 공격해야 한다고 했다. 
 
하후연이 말했다, “한수의 군사가 정예하고 흥국성이 견고하므로 공격하여 급히 함락시킬 수 없으니 장리長離의 여러 강족羌族들을 공격하는 것이 더 나은 계책이오. 장리의 강족들 다수가 한수군에 있으므로 필시 돌아가 자신의 가족을 구원하려 할 것이오. (한수가) 만약 강족을 포기하고 홀로 지키면 고립될 것이고, 장리를 구원하고자 하면 관병官兵과 들판에서 싸워야 하니 반드시 사로잡을 수 있소” 
 
이에 하후연은 독장督將을 남겨 치중(輜 重-군수물자)을 지키게 하고 경무장한 보병과 기병(輕兵步騎)으로 장리에 이르러, 강족의 둔영을 공격해 불태우고 많은 수의 무리들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한수의 군중에 있던 강족들은 각기 자신들의 종족의 부락으로 돌아가니 과연 한수는 장리를 구원하였고 하후연 군과 진영을 벌여 대치했다. 
 
제장들이 한수의 병력이 많음을 보고 이를 꺼려 영채를 구축하고 참호를 만든 뒤 싸우려 하자 하후연이 말했다, “내가 천리를 이어 싸워왔는데 지금 다시 영채와 참호를 만들면 병졸들이 피로해지니 오래 견딜 수 없소. 적이 비록 그 숫자가 많으나 쉬운 상대일 뿐이오.” 
 
그리고는 북을 울리며 진격해 한수군을 대파하고 대장기를 빼앗아 약양으로 돌아왔다. 진군하여 흥국성을 포위하자 저족의 왕 천만千萬은 마초에게로 달아나고 남은 무리들은 투항했다. 
 
군을 돌려 고평(高平-양주 안정군 고평현)의 도각(屠各-흉노의 일족)을 공격하니 모두 흩어져 달아났고 그들의 양곡과 우마를 거두었다. 이에 하후연에게 절節을 내렸다.
 
당초 포한(枹罕- 양주 농서군 포한현)의 송건宋建이 양주涼州의 혼란을 틈타 하수河首 평한왕平漢王을 자칭했었다. 태조는 하후연을 보내 제장들을 지휘해 송건을 공격하게 했다. 하후연이 포한에 도착해 포위한 지 한 달 남짓 만에 이를 함락시키고 송건과 그가 두었던 승상 이하 관원들을 참수했다. 
 
하후연은 별도로 장합 등을 보내 하관(河關-양주 농서군 하관현)을 평정하고 황하를 건너 소황小湟으로 들어가자 하서河西의 강족들이 모두 항복하여 농우隴右가 평정되었다. 
 
태조가 조령을 내려 말했다, “송건이 처음 반역한 지 30여 년인데 하후연이 일거에 섬멸하였고 관우(關右=관서)를 호보(虎步-호랑이처럼 위풍당당한 걸음)하니 그가 향하는 곳에 앞을 가로막을 자가 없었다. (虎步關右 所向無前) 중니(仲尼=공자)가 ‘나도 너와 함께 (안회에) 미치지 못한다’라 한 적이 있도다”
 
(참고-[논어] 공야장(公冶長) 편에 나오는 고사입니다. 공자가 제자인 자공에게, 안회와 자공 자신과 비교하면 어떠냐고 묻자,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깨우치니(聞一知十) 자신이 미치지 못한다고 대답하자, 공자가 너뿐만 아니라 나 또한 안회에 미치지 못한다 하며 안회를 극찬한 대목, 즉 여기서는 조조 자신=공자, 하후연=안회에 비유하여 하후연의 용병술을 극찬하는 의미입니다. 물론 공을 치하하고 격려하는 발언으로서 일종의 립서비스 성격도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겠지요)
 
건안 21년(216년), 식읍 3백 호를 더 늘려주어 이전과 아울러 8백 호가 되었다. 돌아와 무도武都의 저족과 강족을 하변(下辯-양주 무도군 하변현)에서 공격하여 저족의 양곡 10여 만 곡斛을 거두어들였다. 
 
태조가 서쪽으로 장로를 정벌할 때 하후연 등은 양주의 제장들과 후왕侯王 이하 관원들을 이끌고 휴정休亭에서 태조와 합류했다. 태조가 매번 강족과 호인(胡人-흉노)들을 접견할 때마다 하후연으로 그들을 두렵게 했다. 
 
장로가 항복하고 한중이 평정되었을 때 하후연을 행行 도호장군都護將軍으로 삼아 장합, 서황 등을 지휘해 파군巴郡을 평정케 했다. 태조가 업으로 돌아갈 때 하후연을 남겨 한중을 지키게 하고 하후연을 정서장군征西將軍에 임명했다.
 
건안 23년(218년), 유비가 양평관陽平關에 주둔하자 하후연들이 제장들을 이끌고 이에 맞섰는데 서로 지키면서 해를 넘겼다.
 
건안 24년(219년) 정월, 유비가 밤에 녹각鹿角을 불사르며 포위하자 하후연이 장합에게 동쪽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경병輕兵을 이끌고 남쪽을 지켰다. 유비가 장합에 싸움을 걸었는데 장합군이 불리했다. 하후연은 지휘하던 병력의 절반을 나누어 장합을 돕게 했는데 유비의 습격을 받아 마침내 하후연이 싸우다 죽었다. 시호를 내려 민후愍侯라 했다.
 
당초, 하후연이 비록 여러 차례 싸움에서 이겼으나 태조가 늘 경계하여 말했었다, “장수가 되어 마땅히 겁을 내고 나약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고 항상 용맹에만 의지해서는 안되오. 장수는 본래 용맹을 근본으로 삼으나 이를 실행함에는 지모와 계책을 써야 하는 법이오. 오직 용맹만을 알고 그것에만 의지한다면 일개 필부에 대적할 수 있을 뿐이오."
 
하후연의 처는 태조의 처제이다. 큰 아들인 하후형夏侯衡은 태조의 동생인 해양애후(海陽哀侯)의 딸을 아내로 맞아 그 은총이 특히 융성했다. 하후형은 하후연의 작위를 세습했다가 안녕정후安寧亭侯로 고쳐 봉해졌다. 
 
황초黃初 연간에 둘째 아들 하후패夏侯霸에게 작위를 내렸다. 태화太和 연간에 하후패의 동생 4명에게도 작위를 내렸는데 모두 관내후에 봉했다. 
 
하후패는 정시 연간에 토촉호군討蜀護軍 우장군右將軍에 임명되었고 박창정후博昌亭侯에 봉해졌다. 평소 조상曹爽과 가까웠는데 조상이 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의심하는 마음이 일어 망명하여 촉으로 들어갔다. 하후연의 예전 공훈을 이유로 하후패의 아들은 사면되고 낙랑군樂浪郡으로 옮겨졌다.(주3) 
 
(주3) 위략 – 하후패의 자는 중권仲權이다. 하후연이 촉에 의해 죽음을 당했으므로 하후패는 늘 이를 갈며 증오했고 촉에게 보복하고자 하는 뜻이 있었다. 황초 연간에 편장군이 되었다. 
 
자오子午 전투에서 하후패를 불러 선봉으로 삼았다. (참고-244년 대장군 조상이 촉 정벌할 때의 일로서, <조상전>에 의하면 조상군 주력이 낙곡 즉 당락도를 통해서 들어간 걸로 나와있는데 아마 자오도 쪽으로도 진군했던 모양입니다) 진군하여 흥세興勢를 포위하고 전곡曲穀에 진채를 내렸다. 촉 사람들이 그가 하후패임을 알아보고 군사를 출격시켜 공격했다. 하후패는 녹각 사이에서 몸소 싸웠고 구원병이 도착하여 위기를 벗었다. 
 
그 뒤에 우장군에 임명되어 농서에 주둔했는데 병사를 기르고 융족과 화친하여 그들의 환심을 샀다. 정시 연간에 하후유夏侯儒의 뒤를 이어 정촉호군征蜀護軍이 되어 정서장군의 관할에 속하게 되었다. 정서장군 하후현夏侯玄은 하후패의 조카(從子-하후현은 하후연의 조카인 하후상의 아들입니다. 그러니 친형제의 아들은 아니고 사촌동생 혹은 육촌동생의 아들입니다. 즉 친조카는 아니고 조카뻘인 셈입니다)이고 조상의 이종사촌동생이다. 
 
사마선왕이 조상을 주살하고 하후현을 소환하여 하후현은 동쪽으로 갔다. 하후패는 조상이 주살된 소식을 듣고 또 하후현이 소환되니 필시 화가 자신에게도 미칠 거라 여겨 내심 두려워했다. 또한 이전에 하후패는 옹주자사 곽회와 서로 불화했었는데 곽회가 하후현의 뒤를 이어 정서장군에 임명되니 하후패가 더욱 불안해 하여 이 때문에 마침내 촉으로 달아났다. 
 
남쪽으로 음평陰平을 넘었다가 길을 잃었는데 양식이 떨어져 말을 죽이고 도보로 걸었다. 다리를 다쳐 바위 아래에 누워있는데 길을 찾아보았으나 어디인지 알지 못했다. 촉이 이를 듣고 사람을 보내 하후패를 영접했다. 
 
당초 건안 5년(200년), 하후패의 사촌여동생(從妹)이 13살일 때 고향 집에 있었는데, 땔나무를 줏으러 나왔다 장비에게 사로잡혔었다. 장비는 그녀가 양가의 딸임을 알아채고 아내로 삼아 딸을 낳았는데 뒤에 그 딸이 유선의 황후가 되었다. 이 때문에 하후연이 죽었을 때 장비의 처는 청하여 하후연을 매장했었다. 
 
하후패가 촉으로 들어가자 유선과 서로 만났는데 유선이 말했다, “경의 부친이 해를 입은 것은 내 선친의 칼날에 의한 것은 아니었소.” 자신의 아이를 보여주며 말했다, “이 아이는 하후씨의 외손자(甥)요” 관작을 두텁게 내리고 총애했다.
 
하후패의 동생 하후위夏侯威는 관직이 연주자사에 이르렀다. (주4) 
 
(주 4) [세어世語]에 이르기를, 하후위의 자는 계권季權이고 의협을 행했다(任俠) 형주, 연주 2주의 자사를 역임했다. 아들 하후준夏侯駿은 병주자사를, 차남 하후장夏侯莊은 회남태수를 역임했다. 하후장의 아들 하후담夏侯湛은 자가 효약孝若이고 문장에 재능이 있고 박식하여 관직이 남양상南陽相, 산기상시散騎常侍 에 이르렀다. 하후장은 진晉 경양황후景陽皇后의 자부(姊夫-언니의 남편)였는데 이로 인해 일문이 번성했다.
 
하후위의 동생 하후혜夏侯惠는 관직이 낙안태수에 이르렀다.(주5) 
 
(주 5) [문장서록文章敍錄]에 이르기를, 하후혜의 자는 치권稚權이고 어려서 학문에 재능이 있다고 알려졌었고 상주하여 시시비비를 의논하는 것에 능했다. 산기 황문시랑을 역임했고 종육(鍾毓-종요의 아들이자 종회의 형)과 더불어 여러 차례 논쟁했는데 그의 견해가 채택되는 일이 많았다. 연상燕相, 낙안태수로 승진했다. 37세에 죽었다.
 
하후혜의 동생 하후화夏侯和는 관직이 하남윤에 이르렀다.(주6)  
 
(주 6) [세어世語]에 이르기를, 하후화는 자가 의권義權이고 변설에 능해 논쟁에 재주가 있었다. 하남윤, 태상을 역임했다. 하후연의 셋째 아들은 하후칭夏侯稱이고 다섯째 아들이 하후영夏侯榮이다. (하후패의) 종손(從孫-형제의 손자)인 하후담(하후담은 하후패 동생인 하후위의 손자)이 그 순서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후칭의 자는 숙권叔權인데 어릴 때부터 아이들을 모아 대장 노릇하는 것을 좋아했다. 군대가 전쟁하고 진을 벌이는 것을 흉내내며 놀았는데 명을 위반하는 자는 채찍으로 종아리를 때리니 감히 거스르는 자가 없었다. 하후연이 내심 이를 기특하게 여기고 항우전項羽傳과 병서를 읽으라 하니 이를 거절하며 말했다, ‘혼자서 스스로 할 수 있는데 어찌 남에게서 배우겠습니까?’ 
 
16세 때에 하후연과 더불어 밭에 나갔다 호랑이를 보고 하후칭이 말을 몰아 쫓으려 했으나 이를 못하게 말리자 화살을 한 대 쏘아 거꾸러뜨렸다. 태조가 그 명성을 듣고 그의 손을 붙잡고 기뻐하며 말하길, “내가 너를 얻었구나!”라고 했다. 문제와 더불어 포의지교(布衣之交-불우한 시절부터 사귄 벗)를 맺어 연회할 때마다 함께 앉았고 관원들이 이를 말렸으나 제지할 수 없었다. 세상에 이름이 높은 이들이 여럿 와서 교제했는데 18세에 죽었다.
 
하후칭의 동생인 하후영은 자가 유권이다. 어려서 총명하여 7살에 능히 문장을 짓고 하루에 천 글자를 암송했고 경전을 눈으로 일별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문제가 이를 듣고 그를 불렀다. 빈객이 백여 명이었는데 모두 명함을 받쳐 올렸고 거기엔 그들의 향읍과 이름, 성씨가 적혀 있었는데 세상에서 소위 말하는 작리자爵里刺였다. 이를 하후영에게 보여주니 한번 훑어보고는 이야기하는데 한 사람의 경우도 틀리는 점이 없으니 황제가 이를 더욱 대견하게 여겼다. 
 
한중에서 패할 때 하후영의 나이 13살이었는데 좌우에서 달아날 것을 권했으나 이를 거절하며 말했다, “임금과 부친이 어려움에 처했는데 어찌 죽음을 피하겠는가!” 그리고는 검을 휘두르며 싸워 끝내 군진에서 죽었다.
 
하후형이 죽자 아들인 하후적夏侯績이 후사를 이었고 호분중랑장虎賁中郎將에 임명되었다. 하후적이 죽자 아들인 하후포夏侯褒가 후사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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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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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12.04
11:4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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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비 로리콘이 본문 내용처럼 되어 있길래 다시 색깔 입혀서 주석으로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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