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고원님의 블로그  



조인(曹仁)은 자가 자효(子孝)이고 태조(太祖-조조)의 종제(從弟)다. (주1) 
 
(주1) [위서] – 조인의 조부는 조포(曹褒)이고 영천태수를 지냈다. 조인의 부친은 조치(曹熾)이고 시중, 장수교위를 지냈다.
 
어려서 활쏘기, 말타기, 사냥을 좋아했다. 그 뒤 호걸들이 아울러 봉기하자 조인 또한 은밀히 소년(少年-젊은이)들을 모아 천여 명을 얻어 회수(淮水), 사수(泗水) 사이에서 활약하다(周旋) 마침내 태조를 수종해 별부사마(別部司馬) 행(行) 여봉교위(厲鋒校尉)가 되었다. 
 
태조가 원술을 격파할 때 조인은 자못 많은 적군을 참획(斬獲-죽이거나 사로잡음)했다. 
 
서주 정벌(徐州)에 종군하여 조인은 늘 기병을 지휘하며 군의 전봉(前鋒-선봉)이 되었다. 따로 도겸의 장수 여유(呂由)를 공격해 격파하고, 돌아와 팽성(彭城)에서 대군(大軍)과 합쳐 도겸군을 대파했다. 비(費), 화(華), 즉묵(卽墨), 개양(開陽) 공격에 종군하고, 도겸이 별장(別將)을 보내 여러 현들을 구원하자 조인이 기병으로 이를 격파했다. 
 
태조가 여포를 정벌하니 조인은 따로 구양(句陽)을 공격해 함락하고 여포의 장수 유하(劉何)를 사로잡았다. 
 
태조가 황건을 평정하고 천자를 영접해 허현에 도읍하매 조인이 수차례 공을 세우니 광양태수(廣陽太守)로 임명되었다. 태조는 조인의 용략(勇略-용맹과 지략)을 높게 여겼으므로(器) (태수로서) 군(郡)에 두지 않고 의랑(議郎)으로 기병을 지휘하게 했다. 
 
태조가 장수(張繡)를 정벌하니 조인은 따로 주변 현들을 돌며 남녀 3천여 명을 붙잡았다. 태조군이 돌아오며 장수(張繡)에게 추격당했는데 군이 불리(不利)하여 사졸들이 사기를 잃자 조인이 장사(將士-장병)들을 솔려(率厲-격려)해 심히 분발케 하니 태조가 이를 장하게 여겼고 마침내 장수(張繡)를 격파했다.
 
태조는 원소(袁紹)와 더불어 관도에서 서로 오랫동안 대치했는데, 원소가 유비(劉備)를 보내 은강(濦彊-예주 여남군 은강현) 등 여러 현을 돌며 많은 무리를 일으켜 호응하게 했다. 허현 남쪽에서 관원과 백성들이 안정되지 못하자 태조가 이를 근심했다. 
 
조인이 말했다,


“남방 사람들은 대군(大軍)이 바야흐로 (원소와 대치하느라) 목전이 급박하므로 그 사세상 구원해줄 수 없으리라 여기는 터에 유비가 강병(彊兵)으로 당도하니 그들이 배반한 것은 실로 당연한 일입니다. 유비가 새로 원소의 군사를 거느리게 되어 그들을 능히 부릴 수 없을 것이니 공격하면 무찌를 수 있습니다.” 
 
태조가 그 말을 옳게 여기고는 (조인에게) 기병을 거느리고 유비를 공격하게 했다. 조인은 이를 패주시키고 모반한 현을 모두 다시 수습하고 돌아왔다. 
 
원소가 별장(別將) 한순(韓荀)을 보내 서쪽 길을 노략질하고 끊게 하자 조인이 계락산(雞洛山)에서 한순을 공격해 대파했다. 이로 말미암아 원소는 감히 다시는 군사를 나누어 출군하지 못했다. 다시 사환(史渙) 등과 함께 원소의 군량운반 수레를 노략질하고 그 양곡을 불태웠다.
 
하북(河北)이 평정된 후 호관(壺關)을 포위하는데 종군했다. 태조가 영을 내렸다,


“성이 함락되면 모두 파묻어 죽여라.”


여러 달이 지나도록 함락하지 못했다. 
 
조인이 태조에게 말했다,


“성을 포위할 때는 필히 활문(活門)을 보여주어 이로써 그들이 살아날 길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지금 공(公)께서 반드시 죽일 것이라 말씀하시니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굳게 지키게 하였습니다. 게다가 성이 단단하고 양곡이 많아 이를 공격하자니 사졸들이 상하고 수비하자니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지금 (적의) 견고한 성 아래에 머물면서(頓兵堅城) 공격해 포로들을 반드시 죽이겠다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태조가 이를 따르니 성이 항복했다. 이에 조인의 앞뒤 공을 기록해 도정후(都亭侯)에 봉했다.
 
형주(荊州) 평정에 종군했다. 조인은 행(行) 정남장군(征南將軍)으로 임명되어 강릉(江陵)에 남아 주둔하며 오장(吳將) 주유(周瑜)를 막았다. 주유는 수만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고 전봉(前鋒) 수천 명이 처음으로 당도했다. 조인은 성에 올라 이를 보고 3백 명을 뽑고는, 부곡장(部曲將) 우금(牛金)을 보내 거꾸로 싸움을 걸게 했다. 적이 많고 우금(牛金)의 군사가 적었으므로 마침내 포위되었다. 
 
장사(長史) 진교(陳矯)가 함께 성 위에 있었는데 우금 등이 거의 몰살되려는 것을 보고 좌우(左右-주변사람들)가 모두 안색을 잃었다. 조인이 의기(意氣)로 매우 분노해 좌우에 일러 말을 가져오게 하니 진교 등이 함께 조인을 말리며 말했다,


“적의 군사가 흥성하니 당해낼 수 없습니다. 설령 수백 명을 버린다 한들 큰 손해가 아닌데 어찌 장군께서 몸소 가려 하십니까!” 
 
조인이 응낙하지 않고 마침내 갑옷을 입고 말에 오르고는 휘하의 장사(壯士) 수십 기를 거느리고 성을 나섰다. 적과 백여 보 떨어진 곳의 해자(溝)에 접근했다. 진교 등은 조인이 응당 해자 가에 머물며 우금을 돕는 형세를 취할 것이라 여겼으나 조인은 해자를 뛰어넘어 곧바로 전진해 적의 포위망 안으로 돌진해 들어갔고 이에 우금 등이 풀려날 수 있었다. 남은 군사들이 모두 빠져나오지 못했으므로 조인이 다시 돌아가 돌진해 우금의 군사를 벗어나게 하고 여러 명을 잃었으나 적이 이내 물러났다. 
 
진교 등은 당초 조인이 나가는 것을 보고 모두 두려워했는데 조인이 되돌아오는 것을 보자 감탄하며 말했다,


“장군은 실로 천인(天人)이십니다!”


삼군(三軍)이 그 용맹에 감복했다. 태조가 더욱 장하게 여겨 안평정후(安平亭侯)로 옮겨 봉했다.(轉封)
 
태조가 마초(馬超)를 토벌하며 조인을 행(行) 안서장군(安西將軍)으로 삼아 제장을 지휘해 동관(潼關)을 막게 하고 위남(渭南)에서 마초를 격파했다. 
 
소백(蘇伯), 전은(田銀)이 모반하자 조인은 행(行) 효기장군(驍騎將軍)으로 임명되어 7군(七軍)을 지휘해 전은 등을 토벌하고 이를 격파했다. 다시 조인을 행(行) 정남장군(征南將軍), 가절(假節)로 삼았고 번(樊)에 주둔하며 형주를 진수하게 했다. 
 
후음(侯音)이 완(宛)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주변 현의 무리 수천 명을 초략하자 조인이 제군을 이끌고 후음을 공파하여 참수하고는 번으로 돌아와 주둔하고 정남장군(征南將軍)에 임명되었다. 
 
관우가 번을 공격하고 이때 한수(漢水)가 범람하여 우금 등 7군이 모두 물에 잠기고 우금이 관우에게 항복했다. 조인은 인마(人馬) 수천으로 성을 지켰는데 성에서 물에 잠기지 않고 남은 부분이 수 판(板)에 불과했다. (※성의 높이 2척 = 1판 / 호삼성 주) 
 
관우가 배를 타고 성으로 와서 여러 겹으로 포위하여 안팎이 단절되었고 양식이 떨어지려 하고 구원병은 도착하지 않았다. 조인이 장사(將士)들을 격려하고 필사의 각오를 보이자 장사들이 감복하여 모두 하나가 되었다. 서황(徐晃)의 구원군이 도착하고 물 또한 점차 줄어들었다. 서황이 밖에서 관우를 공격해 조인은 포위를 허물고 벗어날 수 있었고 관우는 퇴주(退走)했다.
 
조인은 어릴 때 행검(行 檢-바른 품행)을 닦지 않았으나 장성해 장수가 되자 엄정(嚴整)하고 법령을 받들어(奉法令) 늘 과(科-법령)를 좌우에 두고 이를 살펴 사무를 처리했다. 언릉후(鄢陵侯) 조창(曹彰)이 북쪽으로 오환(烏丸)을 정벌할 때 문제(文帝-조비)는 동궁(東宮-태자궁)에 있었는데 서신을 써서 조창을 훈계해 이르길, “장수가 되어 법을 받드는 것(奉法)은 응당 정남(征南-정남장군 조인)과 같아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문제가) 왕위에 오르게 되자 조인을 거기장군, 도독형양익주제군사(都督荊揚益州諸軍事-형주,양주,익주의 군무를 총괄)로 임명하고 진후(陳侯)로 올려 봉하고 식읍을 2천 늘리니 예전과 함께 모두 3,500호가 되었다. 조인의 부친 조치(曹熾)를 추사(追賜)해 진목후(陳穆侯)라는 시호를 내리고 수총(守塚-묘지기) 10가를 두었다. 
 
그 뒤 불러서 완으로 돌아와 주둔케 했다. 
 
손권이 장수 진소(陳邵)를 보내 양양을 점거하자 조인에게 조서를 내려 이를 토벌케 했다. 조인은 서황과 함께 진소를 공파하고 양양으로 들어가서 장군 고천(高遷) 등을 시켜 한수 남쪽의 부화민(附化民)들을 한수 북쪽으로 이주시켰다. 
 
문제(文帝)는 사자를 보내 조인을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또 조서를 내려 임영(臨潁-예주 영천군 임영현)으로 옮겨 주둔케 하고 대사마(大司馬)로 올렸다.
 
다시 제군을 지휘해 오강(烏江)을 점거하고 돌아와 합비(合肥)에 주둔했다. 
 
황초 4년(223년)에 죽었다. 시호를 내려 충후(忠侯)라 했다. (주2)
 
(2) [위서]魏書 – 조인은 이때 나이 56세였다. / [부자]傅子 – 조대사마(曹大司馬-대사마 조인)의 용맹은 맹분, 하육도 (이보다) 더하지 못한다. 장료(張遼)가 그 다음이다.
 
아들 조태(曹泰)가 후사를 이었다. 관직이 진동장군(鎭東將軍), 가절에 이르렀고 영릉후(甯陵侯)로 옮겨 봉해졌다.(轉封) 조태가 죽자 (조태의) 아들 조초(曹初)가 후사를 이었다. 또 봉지를 나눠 조태의 동생 조해(曹楷), 조범(曹範)을 모두 열후에 봉했다. 우금(牛金)은 관직이 후장군(後將軍)에 이르렀다.
 

[[조순전]]으로 분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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