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고원님의 블로그 



조휴曹休의 자는 문열文烈이고 태조(太 祖=조조)의 족자族子다. 천하에 난이 일자 종족이 각각 흩어져 향리를 떠나게 되었다. 조휴의 나이 10여 세 때에 부친을 여의었는데 혼자서 한명의 객客과 초상을 치뤄 부친을 임시로 장사지내고 노모老母를 부축해 강을 건너 오吳로 갔다.(주1)
 
(주1) [위서魏書]에 이르길 - 조휴의 부친은 일찍이 오군태수吳郡太守를 지냈었다. 조휴가 태수의 관저 벽에서 부친의 초상화를 보고는 탑(榻-좁고 낮은 평상)에서 일어나 절하며 눈물을 흘리니 함께 있던 사람들이 모두 탄식했다.
 
태조가 의병을 일으키자 (조휴는) 성과 이름을 바꿔 형주荊州에 이르러 북쪽으로 돌아가 태조를 만났다. 태조가 좌우에 말하길, “이 아이는 우리 집안의 천리구(千里駒=천리마)로다”고 하며 문제(=조비)와 함께 머물게 하고 아들과 같이 대우했다. 늘 정벌에 수행하여 호표기虎豹騎를 이끌고 숙위宿衛했다.
 
유비가 장수 오란吳蘭을 보내 하변(下 辯-량주 무도군 하변현)에 주둔하게 하자 태조는 조홍曹洪을 보내 이를 공격하게 했는데, 조휴를 기도위로 임명해 조홍의 군무에 참여케 했다. 태조가 조휴에게 말했다, “네가 비록 참군參軍이지만 실제로는 장수(帥)이다” 조홍이 이 영을 듣고 조휴에게 군무를 맡겼다.
 
유비가 장비張飛를 보내 고산固山에 주둔케 하여 군의 배후를 끊으려 했다. 의논하던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의심하자 조휴가 말했다,


“적이 실제로 길을 끊고자 하면 응당 복병으로 몰래 행군해야 하는데, 지금은 오히려 먼저 성세聲勢를 과장하니 이는 실제로는 그들이 이를 실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적군이 아직 집결하지 못했을 때 급히 오란을 공격해야 할 것이고 오란이 격파되면 장비는 달아날 것입니다.”
 
조홍이 이를 좇아 진병進兵했고, 오란을 공격해 대파하니 과연 장비는 달아났다. 태조가 한중의 제군諸軍을 빼내어 장안으로 돌아온 뒤 조휴를 중령군中領軍에 임명했다.
 
문제文帝가 왕위에 오르자(220 년) 영군장군領軍將軍으로 삼고 앞뒤의 공적을 기록해 동양정후東陽亭侯에 봉했다. 하후돈夏侯惇이 죽자 조휴를 진남장군 가절로 임명해 제 군무를 도독케 했다(都督諸軍事) 거가車駕를 내어 전송하여 문제가 수레에서 내려 조휴의 손을 잡고 헤어졌다.
 
손권이 장수를 보내 역양(歷 陽-양주 구강군 역양현)에 주둔케 했는데 조휴가 도착해 이를 격파했다. 또 따로 군사를 보내 강을 건너 무호(蕪湖-양주 단양군 무호현)에 있는 적의 둔영 수천 가家를 불태웠다. 정동장군 영(領-겸직의 의미) 양주자사揚州刺史로 승진하고 안양향후安陽鄕侯에 봉해졌다.(주2)
 
(주 2)[위서魏書]에 이르길 – 조휴가 모친을 여의고 지극히 효성을 다했다. 황제가 시중侍中을 보내 상복을 벗고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도록 하여 조휴가 조서를 받들었으나 형체는 더욱 초췌해졌다.  초 譙로 돌아가 모친을 장사지낼 수 있도록 청하자 황제가 다시 월기교위越騎校尉 설교薛喬에게 조서와 절을 받들어 보내 근심과 슬픔을 전하고 고향집으로 돌아가 상을 치르도록 했다. 하룻밤 묵은 뒤 매장했는데 이를 마치자 행재소行在所로 나아갔다. 황제가 접견하고 친히 위로하니, 조휴를 총애하고 중히 여기는 것이 이와 같았다.
 
문제가 손권을 정벌할 때(222년) 조휴를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가황월假黃鉞에 임명해 장료 등과 여러 주,군(州郡)의 2십여 군軍을 이끌게 했는데, 손권의 대장大將 여범呂範 등을 동포洞浦에서 공격해 무찔렀다. 양주목揚州牧에 임명되었다.
 
명제明帝가 즉위하자(226년) 장평후長平侯에 봉해졌다. 오나라 장수 심덕審德이 환(皖-양주 여강군 환현)에 주둔하자 조휴가 이를 격파하고 심덕의 목을 베었다. 그 즈음에 오나라 장수 한종韓綜, 적단翟丹 등이 군사를 이끌고 조휴에게 와서 투항했다.
 
식읍 4백호를 늘려 이전과 아울러 모두 2천 5백 호가 되었다. 대사마大司馬로 승진했는데 양주를 도독都督하는 것은 예전과 같았다.
 
태화 2 년(228년), 명제가 두 갈래 길로 오吳를 정벌했는데 사마선왕(司馬宣王=사마의)을 보내 한수漢水를 따라 내려가게 하고 조휴는 제군을 지휘해 심양(尋陽-양주 여강군 심양현)으로 향하게 했다. 적장이 거짓으로 투항하여 조휴가 적진 깊숙이 들어갔는데 싸움이 불리하자 퇴각해 석정(石亭-여강군 환현에 속하는 요새)에서 묵었다.
 
밤 중에 군이 놀라고 사졸들이 혼란스러워져, 버리고 온 갑병(甲兵-갑옷과 무기)과 치중輜重이 매우 많았다. 조휴가 글을 올려 사죄하자 명제가 둔기교위屯騎校尉 양기楊曁를 보내 위로하고 예우와 포상을 더욱 늘렸다. 조휴는 이 일로 인해 등에 옹(癰-악창, 악성종기)이 생겨 죽었다. 시호를 장후壯侯라 했다. 아들 조조曹肇가 후사를 이었다.(주3)
 
(주3) [세어世語]에 이르길, 조조曹肇의 자字는 장사長思이다.
 
조조曹肇는 당세當世에 재도(才 度-재능과 기량)가 있었고 산기상시散騎常侍, 둔기교위屯騎校尉를 역임했다. 명제가 병에 걸리자 연왕燕王 조우曹宇 등과 함께 후사를 부탁했다. 그 후 명제는 생각이 바뀌어 조서를 내려 조조를 후侯로서 사저로 돌아가게 했다. 정시正始 연간에 죽었고 위장군衛將軍으로 추증되엇다. 당초 문제文帝가 조휴의 식읍 3백호를 나누어 조조의 동생 조찬曹纂을 열후에 봉했었는데 이후 진오장군殄吳將軍으로 임명했다. 조찬이 죽자 전장군前將軍으로 추증했다. (주4)
 
(주4) 장은張隱의 [문사전文士傳]에 이르길 – 조조曹肇의 손자 조터曹攄는 자가 안원顔遠인데 젊어서 지조가 높고 박학하여 글짓는 재주(才藻)가 있었다. 진晉나라에 임관하여 공부公府에서 벼슬하고 낙양령洛陽令을 역임했는데 유능하다는 명성이 있었다. 대사마 제왕 경冏(팔왕의 난을 주도한 황족 중 한 명인 사마경)이 정사를 보좌하자 조터는 제 사람(齊人)인 좌사左思와 함께 기실독記室督에 임명되었다. 중랑中郎을 지내다 양양襄陽태수, 정남사마征南司馬를 역임했다. 천하가 난이 일자 조터는 적을 토벌하기 위해 오向로 향했는데 싸움에 져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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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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