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고원님의 블로그 



조상(曹爽)의 자는 소백(昭伯)이다. 어려서 종실(宗室)의 신분으로 근중(謹重)했으므로 명제(明帝-위명제 조예)가 동궁(東宮-태자궁)에 있을 때 매우 가까이하고 총애했다. (명제가) 즉위하자 산기시랑(散騎侍郎)으로 임명되었고, 거듭 승진하여 성문교위(城門校尉)가 되었다. 산기상시(散騎常侍)의 직이 더해졌다가 무위장군(武衛將軍)으로 전임되었으니 그 총애함이 이처럼 특별했다.
 
명제가 병들어 눕자 조상을 침실로 들어오게 해 대장군 가절월 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諸軍事) 녹상서사에 임명하고, 태위 사마선왕(司馬宣王-진 선제 사마의)과 함께, 유조(遺詔)를 받들어 어린 주인을 보좌하게 했다.
 
명제가 죽고 제왕(齊王-조방)이 즉위하자(239), 조상에게 시중(侍中)의 직을 더하고 무안후(武安侯)로 고쳐 봉해(아버지인 조진의 작위를 이어받은 소릉후→무안후 로 改封) 식읍이 1만2천 호에 이르렀고, 검리상전(劍履上殿), 입조불추(入朝不趨), 찬배불명(贊拜不名)의 특전을 내렸다.
 
정밀(丁謐)이 계책을 내어놓았는데, 조상으로 하여금 천자에 고해 선왕(宣王-사마의)을 태부(太傅)로 임명하는 조서를 내리도록 했다. 겉으로는 명목상 선왕(宣王)을 존중하는 것이나, 내심으로는 상서(尙書)의 주사(奏事-국사의 결재를 주청하는 업무)가 먼저 자신을 거치도록 함으로써 그 일의 경중(輕重)을 제어하고자 함이었다. (주1)

(주 1) [위서] - 조상이 동생 조희로 하여금 표(表)를 올리게 했다. “돌아가신 신의 부친 조진은 3조(조조, 조비, 조예)를 섬겨 안으론 총재(塚宰)가 되고 밖으론 상장(上將)이 되었습니다. 선제(先帝-이전 황제, 즉 명제)께서 신을 폐부(肺腑-폐)와 같은 신하로 여겨 장칙발탁(奬飭拔擢)하시어 궁정 내의 군사를 주관케 하셨으나, (신은) 나아가 충성하고 삼가는 행동을 쌓지 못했고, 물러나서는 고양자공(羔羊自公)하는 절도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선제(先帝)의 성체(聖體)가 편치 못하셨을 때 비록 신이 분주히 뛰어다니며 시중을 들고 약재를 써보았으나 조금의 도움도 되지 못해, 외람되게도 태위 사마의와 함께 유조를 받들게 되었으니 참담하고 또 부끄럽습니다.
 
< 참고 : ‘羔羊自公’은 [시경]의 ‘羔羊之皮  素絲五紽  退食自公  委蛇委蛇’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보임. 가죽옷을 꿰매어 입고 물러나서 집에서 밥지어 먹으며 스스로 만족한다. 즉, 검소하고 독실한 생활태도를 비유하는 듯 / 잡소리를 좀 늘어놓지면..고전에 대한 특별한 지식도 없으면서 고사를 배경으로 한 표현이 많은 상주문 해석하려니 상당히 까다롭네요.  그렇게 고생해서 해석해봤자 별다른 영양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_-.. 그리고 조상은 표제인물도 아닌데 분량이 상당히 많습니다. 배송지 주 때문에 그런건데 어쨌든 짜투리 시간 쪼개가며 나름대로 노력은 했지만, 다소 무리한 의역도 많을 테니 감안해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먼가 좀 이상하다 싶으면 반드시 원문과의 대조 확인을 강력추천함-_->
 
신이 듣기로, 우순(虞舜-순임금)이 현인들의 서열을 정함에 직(稷)과 설(契)을 가장 앞에 세웠고, 성탕(成湯-은나라 개국시조)이 공적을 포상할 때는 이(伊-이윤)와 여(呂-태공망 여상?)를 으뜸으로 삼으니 살피고 가려뽑아 널리 발탁하여 뛰어난 것과 어리석은 것이 각각 제 자리를 찾았습니다. 이는 진실로 보세장민(輔世長民-세상을 바르게 하고 백성을 잘 살 수 있게 함)하는 큰 원칙이며 녹훈보공(錄勳報功-훈공을 따져 공적에 보답)하는 법칙이니 자고이래로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부족하고 우매한 신의 관직이 조정의 으뜸이니 스스로 돌아보면 부끄러울 뿐입니다.
 
무릇 천하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가 세 가지 있으니, 덕(德)과 작위(爵), 나이(齒)가 그것입니다. 사마의는 본래 고명하고 중정(中正-치우치지 않고 올바름)하여 고위직에 두어도 그 이름으로 족히 뭇 사람들을 안돈시키고 그 도리로 아랫사람들을 거느리니 그 첫 번째입니다. 대략(大略)을 품고 문무(文武)에 모두 능하며 정벌의 훈공을 거듭 이루어 멀고 가까운 것에서 공을 세우니 그 두 번째 입니다. 만리 길에서 돌아와 친히 유조를 받들고 안팎 가리지 않고 황가(皇家)를 보좌하니 그 세 번째입니다.
 
게다가 노인으로 방국(邦國)의 기강을 세우고 조정을 체련(體練)했으니, 덕을 논하자면 길보(吉甫-윤길보)나 번중(樊仲-중산보仲山甫)보다 뛰어나고, 공적을 논하자면 방숙(方叔)이나 소호(召虎)보다 앞서니 무릇 이들의 장점을 사마의가 모두 겸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두 주선왕 때 인물로, 길보, 번중은 현신으로 유명하고, 방숙, 소호는 용맹한 신하로 정벌전에 공을 세움)
 
신은 헛 이름에 불과한데 오히려 저를 더 높은 곳에 두시니, 천하인들이 신이 종실이라 총애를 받은 것이라 하며, 나아갈 때를 알 뿐 물러날 때를 모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산처럼 높아 현명하신 폐하께서 신의 말을 살펴주시어 사마의를 태부, 대사마로 삼아 주십시오. 상(上)으로는 현인을 가려 쓰는 폐하의 현명함을 보여주시고, 중(中)으로는 사마의의 문무를 현창하시고 하(下)로는 어리석은 신이 비방하고 책망하는 말을 듣는 것을 면하게 해주소서.”
 
이에 황제가 중서감 유방(劉放)을 시켜 손자(孫資)에 명해 조서를 쓰게 했다
 
“옛날 오한(吳漢)이 광무제를 보좌해 사방을 정벌하여 평정한 공으로 대사마(大司馬)에 임명되어 그 명칭이 지금에까지 이르렀다. 태위(사마의)는 품행이 정직하고 공적이 해내(海內)를 덮었기에 선제(先帝)께서 본래 그 관위를 바꾸려 하셨으나 늦어져 시행되지 못했다. 지금 대장군이 태위를 대사마로 천거하니 이는 선제(先帝)의 원래 뜻에 부합하며 또한 덕을 고양하고 공훈을 높여 현량(賢良)을 밝히고 서열을 분별하고 장소(長少)를 바르게 하는 것이다. 비록 단(旦-주공 단), 석(奭-소공 석)과 같은 이들이 여망(呂望-강태공 여망)의 아래에 위치했다 한들 어찌 그것이 잘못된 것이겠는가! 짐은 매우 기쁘도다.
 
짐이 생각건대 선제(先帝)께서는 본래 군자로서 낙천지명(樂天知命-하늘의 뜻에 순응함)하셨으니 티끌만한 의심으로 꺼린 것은 아니나, 마땅히 백인(柏人)과 팽망(彭亡)의 일을 돌아보았기 때문에 저회(低徊-생각에 잠겨 고심함)하셨으니 그 뜻이 있었도다! 이는 또한 선제(先帝)가 대신들을 경애하고 중히 여겨 은애(恩愛)로 지극히 후대한 것이다. 옛날 성왕(成王)이 보부(保傅-태부, 태보)의 관직을 만들고 근래에 한(漢) 현종(顯宗-후한 명제)이 등우(鄧禹)를 태부로 삼았으니 이는 모두 준걸들을 존숭한 때문이다. 이에 태위를 태부로 임명한다.”
 
< 참고 : 한고조 유방이 백인(柏人-기주 조국趙國 백인현)에서 유숙하려다 지명이 迫人(핍박하다)과 유사하다 하여 이 곳을 피해 화를 면했고, 후한 광무제 휘하 장수로 촉의 공손술을 정벌하던 잠팽(岑彭)이 팽망(彭亡-글자그대로 풀이하면 팽이 죽는다)이란 곳에서 자객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일이 있습니다. 이는 모두 이름글자와 관련된 금기사항을 얘기하는 건데, 사마의를 대사마로 임명하면 사마(司馬)라는 글자가 서로 겹치는 한편, 사마의의 성씨인 사마(司馬) 앞에 대(大)자를 붙이는 셈이라 적절치 않다는 뜻인 듯. 또 진서 선제기에 보면 그 당시 대사마들이 재직중에 누차 죽었다하여 태부로만 임명했다는 내용이 나오죠. 조상은 태부, 대사마로 천거했지만, 이런 불길함을 피하기 위해 대사마는 기각하고 태부로만 임명한다는 취지로 백인팽망(柏人彭亡)이 거론된 것>
 
조상의 동생 조희(曹羲)는 중령군(中領軍), 조훈(曹訓)은 무위장군(武衛將軍), 조언(曹彥)은 산기상시 시강에 임명했다. 나머지 여러 동생들은 모두 열후에 봉해 시종케 하고 궁정을 드나들며 더할 나위없는 총애를 받았다.
 
남양(南陽)출신의 하안(何晏), 등양(鄧颺), 이승(李勝), 패국(沛國) 출신의 정밀(丁謐), 동평(東平) 출신의 필궤(畢軌)는 모두 명성이 있던 인물로 이무렵 출사했으나 명제는 그들이 부화(浮華-실속없이 화려하고 사치함)하다 하여 쫓아내었다. 그러다 조상이 정권을 잡자 다시 서임되어 조상의 복심(腹心-심복, 측근)이 되었다. 등양 등이 조상의 위명(威名)을 천하에 떨치기 위해 촉을 토벌하도록 권했고 조상이 이에 따랐다. 선왕(宣王)이 이를 제지했으나 막지 못했다.
 
정시 5년(244), 조상이 서쪽으로 장안에 도착해 6-7만의 대군을 일으켜 낙곡(駱谷)을 따라 들어갔다. 그 해 관중(關中)과 저족, 강족이 군수품을 대지 못해 소와 말, 노새와 나귀가 다수 죽었고 백성과 이민족이 도로에서 울부짖었다. 낙곡으로 들어가 수백 리를 행군했을 때 적이 산에 의지해 방비하자 진군할 수 없었다.
 
조상의 참군(參 軍)인 양위(楊偉)가 조상을 위해 형세를 설명하며 급히 철군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장차 패하리라고 말했다. (주2) 등양과 양위가 조상의 면전에서 논쟁했는데 양위가 말했다, “등양과 이승이 장차 국가의 대사를 망치려 하니 죽여야 합니다.” 조상이 이를 불쾌히 여겼으나 마침내 군을 이끌고 돌아왔다.(주3)

(주 2) [세어] – 양위(楊偉)의 자는 세영(世英)으로 풍익(馮翊) 사람이다. 명제 때 궁실을 수리하자 양위가 간언했다, “지금 궁실을 짓느라 생민(生民)들 묘의 소나무 잣나무를 함부로 베고 비수(碑獸)와 석주(石柱)를 훼손하고 있습니다. 죽은 이에게 죄를 짓고 효자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니 이는 후세의 법칙으로 삼을 만한 일이 아닙니다.”
 <참고 : 배주로 종종 등장하는 [세어]는 유의경의 [세설신어]가 아니라 진나라 곽반이 지은 [위진세어 魏晉世語]임 >
 
(주 3) [한진춘추] – 사마선왕(사마의)이 하후현(夏侯玄)에게 말했다, “[춘추]에서 이르길, 직책이 크면 은덕이 막중하다 했소. 옛날 무황제(조조)께서 두 번이나 한중에 들어갔다 거의 대패할 지경에 이르렀다는 건 군도 잘 알 것입니다. 흥평의 지세(興平路勢)가 지극히 험한데 촉이 이미 이를 선점했으니 진군하여 싸워서 뺏지 못하면 퇴로가 차단당해 필시 전군이 무너질 것이오. 장차 그 책임을 어찌 감당하려는 것이오!” 하후현이 이를 두려워하여 조상에게 말하자 군을 물려 퇴각했다. 비의(費禕) 가 진병하여 3령(낙곡의 심령, 아령, 분수령)을 점거하여 조상의 퇴로를 끊자, 조상이 요해지를 다투어 힘껏 싸워 겨우 통과할 수 있었다. 소, 말과 군량을 수송하던 자들 중 거의가 죽거나 실종되어 강족과 호인들이 원망했고, 관우(關右=관서)가 거의 텅텅 빌 지경에 이르렀다. 
 
당초 조상은 선왕(宣 王)이 나이와 덕이 높아 늘 부친을 대하듯 섬겼기에 감히 전횡하지 못했다. 하안 등이 조상에게 함께 나아가, 권세가 무거워지면 이를 남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설득하였다. 이에 하안, 등양, 정밀을 상서(尙書)로 삼고 하안에게 관리임용을 관장케 하고, 필궤를 사례교위, 이승을 하남윤에 임명하여, 제반 업무가 선왕을 거치는 일이 드물어졌다. 이에 선왕은 병을 칭하고 조상을 피했다. (주4)

(주 4) 당초 선왕(宣王)은 조상을 위나라의 폐부(肺腑)와 같은 신하라 하여 늘 먼저 추천했고 조상은 선왕(宣王)의 명망이 높으므로 또한 스스로를 낮추었었다. 정밀, 필궤 등은 조상에 임용된 뒤 여러 차례 조상에게 말하길, 선왕은 큰 뜻을 품고 있고 민심을 크게 얻고 있으니 그를 천거하여 대임을 맡겨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이때부터 조상은 선왕을 늘 시기하고 방비하게 되었다. 비록 예를 갖추는 모양새는 남아 있었으나 실제 업무는 모두 선왕을 거치지 않도록 했다. 선왕은 조상과 다투기에 역부족이었고 또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그를 피했다.
 
하안 등이 정무를 전횡하여 낙양 야왕(野 王)의 전농(典農)이 관장하는 뽕밭 수백 경(頃)을 함께 나누어 가지고, 탕목지(湯沐地-목욕하는 곳)를 부수어 산업(産業)으로 삼았다. 권세에 편승해 관물(官物)을 절취하고 연고에 의거하여 주군(州郡)에 뇌물을 요구했다. 유사(有司)들은 그 위세를 바라 보기만 할 뿐 감히 그 뜻을 거스르지 못했다. 하안 등이 정위 노육(盧毓)과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노육의 속관이 작은 과실을 범하자 조문을 뒤져 법에 따라 처벌했다. 주관하는 자로 하여금 먼저 노육의 인수를 거두어 들이게 한 후에 황제에 아뢰었으니 그들이 위세를 부리는 것이 이와 같았다.
 
조상의 음식, 수레, 복식은 승여(乘輿-임금의 수레)에 비견되고 상방(尙方-궁중에서 사용되는 물건을 만드는 곳)의 진완(珍玩-진기한 물건)을 집에 가득 채웠다. 처첩들이 후실에 가득했으며 또한 선제(先帝-명제 조예)의 재인(才人-궁녀) 7-8명과 장리(將吏), 사공(師工-악사), 고취(鼓吹-취주악대), 양가의 자녀 33 명을 사사로이 취해 모두 기악을 연주하게 했다. 조서를 거짓으로 꾸며 재인 57명을 뽑아 업대(鄴臺)로 보내 선제(先帝)의 첩여(妤教- 궁녀의 관직이름)로 하여금 그들을 가르치게 해 기녀로 삼았다. 태악(太樂)의 악기와 무기고의 금병(禁兵)을 제멋대로 취했다. 굴실(窟室)을 만들어 사방에 비단창문을 달고 하안 등과 어울려 여러 차례 연회를 열어 술을 마시고 음악을 연주했다.
 
조희가 이를 크게 우려하여 수차례 간언하여 제지했다. 또 글 3편을 지어 교만함과 음란함이 지나치면 재앙에 이른다는 뜻을 진술했는데, 그 문장이 매우 절절했으나 감히 조상을 바로 책망하지는 못하고 여러 동생들을 훈계하는 것처럼 빗대어 표현했다. 그러나 조상은 그것이 자신에게 말하는 것임을 알아채고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조희가 간언하여 깨우쳤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울면서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했다. 선왕(宣王)이 조상을 은밀히 방비했다.
 
(정시) 9년(248) 겨울, 이승이 서울을 떠나 형주자사로 부임하는 길에 선왕을 방문했다. 선왕은 병이 위중한 척 하여 자신의 쇠약한 형상을 보여주었다. 이승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사실이라 여겼다. (주5)
 
(주 5) [위말전] – 조상 등은 이승에 명해 선왕(宣王-사마의)에게 작별인사를 고하며 그의 동태를 살피게 했다. 선왕은 이승을 접견할 때, 이승은 스스로 별다른 공로도 없이 특은을 입어 본주(本州-이승이 형주 남양 출신이기에 형주를 본주라 일컬음)에 부임하여 작별인사를 드린다 했다. 선왕은 두 명의 계집종에게 부축하게 하고 옷을 손에 쥐고 있었는데 옷자락이 흘러내렸다. 또 위로 입을 가리켜 목마르다고 하자 계집종이 죽을 올리는데 선왕은 죽그릇을 손에 쥐고 먹는데 모두 흘러내려 가슴팍을 적셨다.
 
이승은 이를 사실로 여기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지금 주상이 아직 어리셔서 천하가 명공을 믿고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명공의 옛 풍질이 재발했다고 하더니 존체가 이 지경일줄 어찌 짐작했겠습니까!” 선왕은 느릿느릿 호흡을 가다듬어 겨우 말을 이었다, “나이들고 병에 걸려 죽음이 눈앞에 닥쳤소. 군이 병주(幷州)로 가거든 호(胡)와 가까우니 그들을 잘 방비해야 할 것이오. 다시 보지 못할까 두렵소이다.” 이승이 말했다, “송구스럽게도 본주로 돌아가는 것이지 병주가 아닙니다” 이에 선왕이 또 혼동하며 말했다, “군이 병주에 도착하거든 노력해서 자신의 몸을 잘 지키시오.” 혼동하여 헛소리를 계속 하자 이승이 다시 말했다, “송구스럽게도 병주가 아니라, 형주(荊州)입니다”
 
이에 선왕이 잘못을 깨닫고 말했다, “이 사마의가 늙어서 정신이 오락가락해 군의 말을 잘못 알아들었구려. 이제 본주 자사로 돌아가면 성덕장렬(盛德壯烈)히 공훈을 세우도록 하시오. 이제 군과 헤어지면 내 기력이 쇠해 뒤에 다시 만나기는 힘들 것이니, 내 힘으로는 주인의 예도 다하지 못하니 죽을 날이 가까웠구려. 사마사, 사마소 형제는 군과 우의로 맺어져 있으니 서로 저버리지 마시오. 이것이 나의 두 번째 구구한 바램이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목이 메었다. 이승 또한 크게 탄식하며 대답했다, “마땅히 가르침을 받들고, 황제의 칙명에 따르겠습니다”
 
이승이 작별인사하고 나와 조상과 만났다. 이승이 말했다, “태부의 말씀이 혼란스럽고 입으로는 그릇의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남쪽을 가리키면 북쪽을 보는 식입니다. 또 내가 병주로 간다고 말하기에 내가 형주로 가는 것이지 병주가 아니라고 답했습니다. 천천히 또박또박 말하니 그제야 제가 형주로 간다는 걸 알아차렸습니다. 또한 주인의 예도 행하지 못해 전송할 때 방에서 나오지도 못했습니다.” 다시 조상등을 향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태부의 병환이 다시 회복되기 어려운 지경이니 애처로운 일입니다.”
 
정시 10년(249) 정월, 거가(車駕-임금의 수레)가 고평릉(高平陵)을 참배하는데 조상 형제가 모두 수행했다. (주6) 선왕(宣王)은 병마를 이끌고 먼저 무기고를 점거하고 도성을 나와 낙수(洛水) 부교(浮橋)에 주둔했다.

(주 6) [세어] – 조상의 형제가 예전에 여러 차례 함께 성 밖을 나가자 환범이 말했다, “만기(萬機-천하의 정치,정무)를 총괄하는 사람과 금병(禁兵)을 통솔하는 사람이 함께 나가서는 안됩니다. 막약 성문을 폐쇄해버리는 이가 있다면 어느 누가 다시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조상이 말했다, “누가 감히 그럴 수 있겠는가!” 이로부터 다시는 함께 나가지 않았으나 이때에 이르러 모두 함께 성밖을 나갔다.

조상에 관해 다음과 같이 상주했다.
 
“신이 예전에 요동에서 돌아왔을 때 선제(先 帝-위 명제 조예)께서 폐하와 진왕(秦王-조순曹詢), 그리고 신을 어상(禦床)으로 오르게 해 제 팔을 잡고 말씀하시길 깊이 뒷일을 염려한다 하셨습니다. 이에 신은 ‘2조(조조와 조비)께서 또한 신에게 뒷일을 맡긴 것은 폐하께서도 보신 바이니 근심하실 일이 아닙니다. 만의 하나 뜻밖의 일이 생긴다면 신은 마땅히 죽음으로 명을 받들겠습니다.’고 말씀드렸었고, 이는 황문령 동기(董箕) 등과 병을 간호하던 재인(才人)들도 모두 들어 알고 있는 일입니다.
 
지금 대장군 조상이 그 고명(顧 命)을 저버리고 국법을 어지럽히니, 안으로는 참람되게도 군주의 의례를 모방하고 밖으로는 권력을 농단하고 있습니다. 여러 영(營)을 파괴하고 금병(禁兵-친위병)들을 모두 장악하고, 백관의 요직에 모두 자기와 친한 자들만 앉혔습니다. 숙위하던 오래된 자들은 모두 쫓아내고 새로운 인물로 채워 사사로운 계책을 꾸미니, 그들 일당의 뿌리가 더욱 깊어져 그 방자함이 날로 더해갑니다. 또한 황문 장당(張當)을 도감(都監)으로 임명하여 서로 교류하며 지존(至尊)의 동태를 살피고 신기(神器-정권, 제위)를 엿보며 2궁(황궁과 태후궁)을 이간시켜 골육의 정을 다치게 했습니다.
 
천하가 흉흉하고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있는데, 지금 폐하가 남에 기대어 보위에 앉아서 어찌 오래 안전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선제께서 폐하와 신을 어상에 함께 오르도록 한 본의와 어긋나는 일입니다. 비록 신이 늙어서 쓸모없으나 어찌 감히 지난날의 맹세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옛날 조고(趙高)가 득세하자 이 때문에 진(秦)나라가 망했고 여씨와 곽씨(呂霍)를 일찍 처단했기에 한나라는 오래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는 폐하께서 본보기로 삼을 만한 일이니 지금이 (이전 맹세에 따라) 신이 목숨을 바칠 때입니다.
 
태위 장제, 상서령 사마부 등 신하들 모두, 조상이 무군지심(無君之心)을 품고 있어 그 형제들이 친위군을 지휘해 숙위(宿衛)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황태후께 상주했습니다. 이에 태후께서 명하시길 상주한대로 시행하라 하셨습니다. 이에 신이 담당관원과 황문령(黃門令)에 명하여 조상, 조희, 조훈의 관직과 병권을 파하고 각자 본래 관직인 후(侯)로서 사저로 돌아가라 명하고, 만일 거가(車駕)를 억류하면 군법으로 처리하라 했습니다. 신이 병에 걸린 몸으로 군사를 이끌고 낙수 부교로 나아간 것은 비상사태를 살펴 대비코자 함입니다.” (주7)
 
(주 7) [세어] – 그 이전 선왕(宣王)이 군사를 이끌고 대궐을 따라 무기고로 향할 때 조상의 영문을 지났다. 조상의 처 유포(劉怖)가 집을 나와 청사로 가서 장하수독(帳下守督)에게 말했다, “공께서 밖에 계시는데 지금 병란이 일어났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소?” 독(督)이 말했다, “부인께서는 염려마십시오.” 이에 문루로 올라가 노(弩)를 당기고 화살(箭)을 올려놓고 쏘려고 했다. 장수 손겸(孫謙)이 뒤에서 끌어당기며 이를 제지하면서 말했다, “사태가 어찌 돌아갈 지 알 수 없소이다!” 이와 같이 세 번을 말려 선왕이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조상은 선왕의 상주문을 가진 채 천자에게 알리지 않았으며 궁지에 몰려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주8) 대사농 패국(沛國) 출신의 환범이 병란이 일어났다는 것을 듣고 태후(太后)의 소환에 응하지 않고 조서를 위조해 평창문(平昌門)을 열고 검(劍)과 극(戟-창의 일종. 가지창이 덧붙여진 모양의 미늘창)을 뽑아들고 성문을 지키는 관원을 위협하여 남쪽으로 조상에게로 달아났다. 선왕이 이 일을 알고 말했다, “환범이 계책을 꾸밀 것이나 조상은 필시 이를 쓰지 못할 것이오.”
 
(주8) 간보(干寶)의 [진기] - 조상은 거가를 이수(伊水)의 남쪽에 머물게 했는데, 나무를 베어 녹각을 세우고 둔갑병(屯甲兵) 수 천명을 뽑아 호위하게 했다.
 
[위말전] – 선왕이 동생인 사마부에게 말하길, 폐하가 밖에서 노숙할 수 없다며 장막과 태관(太官-음식을 담당하는 관직), 식기를 재촉해 보내 행재소(行在所-궁성밖에 임금이 임시는 머무는 곳)로 가게 했다.

환범이 조상을 설득하기를, 거가를 모시고 허창으로 가서 외병(外兵)을 부르자고 했다. 조상의 형제가 머뭇거리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자 환범이 다시 조희(曹羲-조상의동생)에게 말했다, “지금에 이르러 경의 가문이 다시 빈천한 자로 돌아가려 한들 그럴 수 있겠소? 게다가 필부조차 인질 한 명을 잡아 살아나고자 하는 법인데, 지금 경은 천자를 끼고 있으니 천하에 영을 내리면 누가 감히 응하지 않겠소?” 그러나 조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중 허윤(許 允)과 상서 진태(陳泰)는 조상 스스로 한시바삐 돌아가 죄를 받으라고 설득했다. 이에 조상은 허윤과 진태를 선왕에게 보내 돌아가 죄를 받고 죽음을 청하도록 하고 선왕의 상주문을 천자에게 알렸다. (주9)

(주 9) 간보(干寶)의 [진서] – 환범이 성을 나가 조상에게로 가자 선왕이 장제에게 말했다, “꾀주머니(智囊)가 갔구나” 장제가 말했다, “환범이 지모가 있으나 굼뜬 말이 땅이 떨어진 콩에 연연하듯(駑馬戀棧豆) 조상은 필시 그의 계책을 쓰지 않을 것입니다.”
 
[세어] – 선왕이 허윤과 진태로 하여금 조상에게 말뜻을 전하게 하고 장제 또한 서신을 보내 선왕의 뜻을 전했다. 또한 조상이 신임하는 전중교위 윤대목(尹大目)을 보내 조상에게 말하길, 단지 관직에서 파면할 뿐이라 하고 이를 낙수(洛水)에 맹세했다. 조상이 이를 믿고 군사를 해산했다.
 
[위씨춘추] – 군사를 해산하고 조상이 말했다, “나는 별로 잃는 거 없이 부가옹(富家翁-돈 많은 늙은이)으로 살 수 있다” 환범이 소리내어 울며 말했다, “조자단(조진)은 빼어난 인물이나 당신들 같은 형제를 낳았으니 송아지를 키웠을 뿐이오! 어쩌다가 오늘 당신들에게 연루되어 내 일문이 멸족당하게 되었소이다!”
 
마침내 조상 형제는 파면당해 후(侯)로서 사저로 돌아갔다. (주10)

(주 10) [위말전] – 조상의 형제가 집으로 돌아가자, 낙양현에 조칙을 내려 백성 8백인을 뽑고 위부(尉部)에 명해 조상의 자택을 사방으로 포위했다. 각 모서리에는 높은 망루를 세우고 그 위에서 조상 형제의 거동을 감시했다. 조상이 궁지에 몰려 고민하다 활을 지니고 후원으로 가자, 망루 위의 사람이 ‘전 대장군이 동남쪽으로 간다!’고 소리쳤다. 조상이 청사로 돌아와 형제와 함께 의논했는데 선왕의 의중을 어떤지 알지 못하여 선왕에게 서신을 보냈다. “비천한 저 조상은 두렵고 두렵습니다. 무상히 화를 초래했으니 마땅히 죽어야 할 목숨입니다. 이전에 가인(家人-집안사람, 하인)을 보내 양식을 가져오게 했으나 지금까지 도착하지 않아 여러 날을 굶어 마른 곡식으로 아침저녁 끼니를 잇고 있습니다.” 선왕이 서신을 받아보고 크게 놀라며 즉시 답장을 보냈다, “양식이 부족하단 걸 미처 알지 못했소. 지금 쌀 1백 곡과 육포, 소금, 메주, 대두를 보내오.” 그리고 이 물건들을 보냈다. 조상 형제는 즉시 기뻐하며 죽임을 당하지는 않으리라 여겼다.
 
당초 장당(張當)이 사사로이 재인(才人) 장(張)씨, 하(何)씨 등을 뽑아 조상에게 바쳤었는데 (조정에서는) 부정한 일이 있다 의심하여 장당을 구금하여 치죄했다. 장당이 진술하기를, 조상이 하안 등과 함께 은밀히 반역을 꾸며 이전에 훈련시켜 놓은 군사로 오는 3월 중에 거사할 것이라 했다. 이에 하안 등을 잡아들여 하옥했다.
 
공경(公卿) 조신(朝臣)들이 의논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내렸다. “ [춘추]의 뜻으로 볼 때, 임금의 친척은 장수가 되어선 안되고 장수가 되려고 하면 반드시 죽인다고 했다. 조상은 살붙이로서 대대로 특별한 총애를 입었고 선제(先帝)께서는 조상의 손의 잡고 유조를 남기며 천하의 일을 부탁하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더러운 마음을 품어 고명을 저버리고 하안, 정밀, 장당 등과 함께 신기(神器)를 도모했도다. 환범의 일당도 같은 죄인으로 모두 대역부도(大逆不道)한 자들이다.”
 
이에 조상, 조희, 조훈, 하안, 등양, 정밀, 필궤, 이승, 환범, 장당 등을 잡아들여 모두 주살하고 3족을 멸했다. (주11)
 
(주11) <위략>

[등양전]으로 분할


[정밀전]으로 분할
 

[필궤전]으로 분할

[이승전]으로 분할

[환범전]으로 분할

 
[세어] – 그 이전에 조상은 두 마리 호랑이가 뇌공(雷公)을 입에 물고 있는 꿈을 꾸었다. 뇌공이 마치 2되 가량의 주발과 같았는데 이를 궁정에 풀어놓았다. 조상이 이 꿈을 불쾌히 여겨 점치는 이를 불러 물었다. 영대승(靈臺丞) 마훈(馬訓)이 말했다, “병란이 우려됩니다.” 퇴청하고 난 뒤 아내에게 말했다, “장차 조상은 병란으로 망할 것이니 열흘을 넘기지 못할 것이오.”
 
[한진춘추] – 안정(安定)사람인 황보밀(皇甫謐)이 정시 9년(248) 낙양에서 꿈을 꿨다. 자신이 종묘에서 나오는데 거기장군(왕윤의 조카인 왕릉을 말하는 듯)과 많은 무리들이 종묘에 물건을 바치며 ‘대장군 조상을 주살했다’고 고하는 꿈이었다. 잠에서 깨어 자신의 읍인(邑人)에게 이를 말하자 읍인이 말했다, “군께서는 조나라 사람의 꿈(曹人之夢)을 지어내신 겁니다. 우리 조정에는 공손강(公孫强)이 없는데 어찌 그와 같겠습니까? 게다가 조상 형제는 중병(重兵)을 관장하고 또 상서의 사무를 장악하고 있으니 누가 감히 모반하겠습니까?” 황보밀이 말했다, “조상에게는 조숙(曹叔) 진탁(振鐸)의 청이 없으니 다만 천기(天機)를 잃으면 즉시 흩어질 뿐이오. 어찌 공손강(公孫强)에게 의지하리? 옛날 한나라 때 염현(閻顯)은 모후(母后)의 존엄에 의지하고 나라의 위명(威命)을 장악했으니 가히 중신이라 이를 만하나, 내시 19명이 하루 아침에 죽여버렸소. 하물며 조상형제이겠소?”
 
< 참고: 曹人之夢 - [사기] 관채세가에 나오는 일화를 일컫는 것. 춘추시대 조(曹)나라 사람이 꿈을 꿨는데, 여러 사람들이 사궁(社宮)에 모여 조나라를 망하게 할 것을 모의할 때 조숙 진탁(주 무왕의 동생으로 조나라의 시조)이 이를 말리며 공손강을 기다릴 것을 청하여 허락받았다는 내용. 그 후 공손강이 출사했으나 10년 뒤 송나라의 침공을 받아 멸망. 참고로, 조조는 조숙 진탁의 후예라고 자칭함>
 
[세어] – 당초 조상이 출성했을 때 사마(司馬-관직명) 노지(魯芝)는 관부에 남아 있었다. 변고가 생겼다는 말을 듣고는 둔영의 기병을 이끌고 진문을 돌파해 조상에게로 갔다. 조상이 주살되고 난 후 어사중승으로 발탁되었다. 조상이 인수를 풀고 나아가려고 할 때 주부(主簿) 양종(楊綜)이 이를 제지하며 말했다, “공께서는 임금을 끼고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데 어찌 이를 버리고 동시(東巿- 사형집행장을 비유)로 가신단 말입니까?” 그러나 조상이 이를 듣지 않았다. 유사(有司-담당관원)가 아뢰길, 양종이 조상을 이끌어 모반했다고 하자 선왕이 말했다, “각자 자기 주인을 위해서 한 일일 뿐이다.” 양종을 사면하고 상서랑으로 임명했다. 노지의 자는 세영(世英)이고 부풍사람이다. 그 뒤 관직이 특진 광록대부에 이르렀다. 양종의 자는 초백(初伯)이고, 그 뒤 안동장군 사마문왕(사마소)의 장사(長史)로 임명되었다.
 
// 신 송지가 살펴보건대, 하후담(夏侯湛)이 지은 노지의 명(銘-금석이나 기물에 새긴 글)과 간보(干寶)의 진기(晉紀)에서는 조상이 주살되고 난 후 선왕이 노지를 병주자사로 발탁하고 양종을 안동장군(사마소)의 참군으로 임명했다고 하니, 세어가 전하는 바와 서로 다르다.




가평(嘉平:249-254) 연간에 공신의 대를 잇기 위해 조진의 족손(族孫) 조희(曹熙)를 신창정후(新昌亭侯)에 봉하고 3백호의 식읍을 내려 조진의 후사를 잇게 했다. (주12)
 
(주12)
 
 (주 12) 간보의 [진기] – 장제는 조진의 훈공으로 볼 때 그 제사가 끊어지게 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며 조희(曹熙)를 후사로 삼게 했다. 또한 장제는 자신의 말이 신의를 잃은 것을 스스로 질책하다 병이 들어 죽었다. (조상에게 서신을 보내 파면하는데 그친다고 낙수에 맹세했으나(또는 사마의의 맹세를 전했으나) 이를 어긴 일을 가리킴)
 
[하안전]으로 분할
 
황보밀(皇甫謐)의 [열녀전列女傳]에 이르길 – 조상(曹爽)의 종제(從弟)인 문숙(文叔)은 초군(譙郡)사람인 하후문녕의 딸 영녀(令女)를 아내로 삼았다. 문숙이 일찍 죽고 거상기간이 끝나자, 영녀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신의 나이가 젊고 자식이 없으므로 집안에서 개가시킬까 두려워 머리카락을 잘라 신표로 삼았다. 그 후 과연 집안에서 그녀를 개가시키려 했는데 영녀가 이 소식을 듣자 칼로 양쪽 귀를 자르고 조상에 의지해 생활을 이어갔다. 조상이 주살당하고 조씨가 멸족하자 영녀의 숙부는 조씨와의 혼인관계를 끊는다고 상서하고, 강제로 친정으로 돌아오도록 했다. 이때 하후문녕은 양상(梁相-예주 양국의 相)이었는데 그 딸이 절개를 지키는 것을 불쌍히 여기고 또 조씨에는 남은 일족이 없으니 그녀가 뜻을 꺾기를 바랐다. 이에 사람을 보내 그 뜻을 알리니 영녀가 탄식하고 울면서 말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옳은 말씀입니다.”


집안에서는 이를 믿고 방비가 느슨해졌다. 이에 영녀가 몰래 침실로 들어가 칼로 코를 베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모친이 그녀를 불렀으나 응답이 없어 마침내 발견되었는데 피가 넘쳐 흘러 침상에 가득했다. 온 집안이 크게 놀라 분주히 달려갔는데 이 장면을 보고 슬프고 참혹해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어떤 이가 그녀에게 말했다,


“인생사가 먼지가 작은 풀 위에 떨어져 있는 것과 같은데 어찌 이다지도 고생을 사서 하는가! 게다가 남편의 집안이 멸족되었는데 누구를 위해 수절하겠다는 것인고?”


영녀가 말했다,


“제가 듣기로 어진 자는 성쇠(盛衰)를 좇아 절개를 바꾸지 않고, 의로운 자는 존망(存亡)을 좇아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 했습니다. 예전에 조씨(曹氏)가 번성할 때도 끝까지 함께 할 생각이었는데 하물며 지금 쇠망한 때 저버릴 순 없습니다. 어찌 제가 금수(禽獸)와 같은 짓을 하겠습니까!”


사마선왕(司馬宣王-사마의)이 이를 듣고 기특하게 여겨 양자를 받아들여 조씨의 후사를 잇는 것을 허락하니 그 이름이 세상에 드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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