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고원님의 블로그

 


하후상(夏侯尙)의 자는 백인(伯仁)이고 하후연의 종자(從子-조카)다. 문제(文帝-조비)와 서로 친한 벗이었다. (주1)
 
[주1] [위서魏書] – 하후상은 주획(籌畫-계책)과 지략(智略)을 갖추어 문제(文帝)가 그를 중시하고 포의지교(布衣之交)를 맺었다
 
태 조(太 祖-조조)가 기주를 평정할 때 하후상은 군 사마(司馬)로 기병(騎兵)을 이끌고 정벌전에 종군했다. 그 뒤 오관장(五官將-오관중랑장, 조비가 태자가 되기 전 직책)의 문학(文學)이 되었다. 위나라가 처음 세워지자 황문시랑(黃門侍郎)으로 관직이 올랐다. 대군(代郡)의 호(胡-흉노 또는 북방이민족 통칭)가 반란을 일으키자 언릉후(鄢陵侯) 조창(曹彰)을 보내 정토(征討)했는데, 이때 하후상은 조창의 참군(參軍)으로 수행해 대(代) 땅을 평정하고 돌아왔다.
 
태조가 낙양에서 죽자 하후상은 지절(持節)로서 재궁(梓宮-임금의 관)을 받들어 업으로 돌아왔다. 이전의 공으로 평릉정후(平陵亭侯)에 봉하고 산기상시에 임명했다가 중령군(中領軍)으로 올렸다.
 
문제(文帝)가 제위에 오르자 평릉향후(平陵鄕侯)로 고쳐 봉하고(更封)하고, 정남장군 영(領-겸직의 의미) 형주자사, 가절 도독남방제군사(都督南方諸軍事-남쪽의 군무를 총괄하는 도독)로 관위가 올랐다.
 
하후상이 상주했다,


“상용에 있는 유비의 별군(別軍)은 산길이 험난하다 하여 아군을 경계하지 않으니, 만약 기병(奇兵-기습부대)으로 은밀히 행군해(潛行) 출기불의(出其不意-적이 뜻하지 않은 곳으로 나아감)하면 그 형세로 볼 때 촉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이에 제군(諸軍)을 이끌고 상용을 격파해 3군(郡) 9현(縣)을 평정하고 정남대장군으로 관위가 올랐다. 손권이 비록 칭번(稱藩-스스로 번국임을 칭함)했으나 하후상은 전투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했는데, 그 후 과연 손권은 두 마음을 품었다.
 
황초 3년(222), 거가(車駕)가 완(宛)으로 행차하여, 하후상을 보내 조진과 함께 제군(諸軍)을 이끌고 강릉을 포위하게 했다.
 
강(江 -장강)을 사이에 두고 손권의 장수 제갈근(諸葛瑾)과 대치했는데, 제갈근이 강으로 들어가 강 가운데 섬을 점령하고 강 가운데서 수군을 나누었다. 하후상은 밤에 많은 유선(油船-기름을 실은 배)으로 보기(步騎) 1만 여 명을 이끌고 하류에서 몰래 강을 건너 제갈근의 제군(諸軍)을 공격했다. 강을 끼고 양쪽에서 적군의 싸움배를 불사르고 물과 육지에서 함께 공격해 깨뜨렸다. 성을 함락시키기 전에 전염병이 돌자 조칙(詔敕)을 내려 군을 이끌고 철군하도록 했다. 식읍 6백호를 늘려 이전과 합쳐 모두 1,900호가 되었다. 가월(假鉞)하고 목(牧)으로 올렸다(형주자사→형주목)
 
형주는 황폐해지고 밖으로 만이(蠻 夷)와 접했으며 오나라와는 한수(漢水)를 경계로 삼았는데 옛 백성들은 대다수 강남(江南-장강 남쪽)에 거처했다. 하후상이 상용으로부터 길을 뚫어 서쪽으로 7백여리를 행군하자, 산민(山民-산에 사는 백성) 만이(蠻夷)가 다수 복종하였고 5-6년간 투항한 자가 수천 가(家)에 이르렀다.
 
황초 5년(224), 창릉향후(昌陵鄕侯)로 옮겨 봉했다(徙封). 하후상이 애첩을 사랑하여 적실(適室-본부인)이 총애를 잃었다. 적실은 조씨(曹氏)였고 이 때문에 문제(文帝)가 사람을 보내 애첩을 교살(絞殺-목졸라 죽임)했다. 하후상은 비탄에 빠져 병이 들어 제 정신이 아니었고, 이미 첩을 매장했으나 다시 보고싶은 마음을 이기지 못해 그녀를 보러 나가기도 했다. 문제(文帝)가 이 일을 듣고 화를 내며 말했다, “두습(杜襲)이 하후상을 업신여기더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구나.” 그러나 옛 신하로서 은총이 약해진 것은 아니었다.
 
황초 6년, 하후상의 병이 깊어져 경도(京都)로 돌아왔다. 문제(文帝)가 여러 번 행차하여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하후상이 죽자 시호를 내려 도후(悼侯)라 했다. [주2]
 
[주2] [위서]에 기재된 조서 – 하후상은 어려서부터 시종(侍從)하며 정성으로 절의를 다했으니 비록 성씨가 다르지만 골육(骨肉-혈육)과 같아, 안으로는 복심(腹心-심복,측근)으로 삼고 밖으로는 조아(爪牙-발톱과 이빨 같은 용맹한 신하)로 삼았다. 지략이 깊어 지모가 과인보다 뛰어났으나 불행히도 일찍 죽었으니 그 운명을 어찌할 것인가! 정남대장군 창릉후(昌陵侯)의 인수(印綬)를 추증한다
 
아들 하후현(夏侯玄)이 후사를 이었다. 또한 하후상의 식읍 3백 호를 나누어 하후상 동생의 아들(조카)인 하후봉(夏侯奉)에게 하사하고 관내후(關內侯)에 봉했다.


[[하후현전]]으로 분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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