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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후현(
夏侯玄)의 자는 태초(太初)이며, 어려서부터 세상에 이름을 날렸고, 약관의 나이에 산기황문시랑(散騎黃門侍郞)이 되었다.

그는 일찍이 명제를 알현할 때, 황후의 동생 모증(毛曾)과 나란히 앉게 되었는데, 하후현은 이를 치욕스럽게 여겨 불쾌한 표정을 얼굴에 나타냈다. 명제는 이 때문에 하후현을 미워하여 우림감(羽林監)으로 좌천시켰다. 정시 초기에 조상이 정치를 보좌했고, 이 시기에 하후현은 자주 승진하여 산기상시(散騎常侍)와 중호군(中護軍)이 되었다.

세어(世語)에서 이르길:하후현은 세상에서 명성이 높은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중호군(中護軍)으로 있을 때는 무관을 발탁하여 극(戟)을 들고 아문(牙門)을 지키도록 했는데, 이들은 모두 천하의 준걸이었다. 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지방관으로 나가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법을 바로 잡고 교육을 펼쳤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그가 했던 방식을 따르고 있다.

태부(太傅) 사마선왕(司馬宣王)이 하후현에게 시사(時事) 문제에 관해 묻자, 하후현은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무릇 재능있는 자를 관리로 채용하고, 현명한 사람을 등용하는 것은 국가의 기틀입니다. 그러므로 인사권을 대각(臺閣 : 조정)에서 완전히 장악하는 것은 위에서 할 일입니다. 효행을 마을 구석구석에 존재하도록 하고, 우열 판정을 지방 사람들이 하는 것은, 아래 군국(郡國)의 중정관(中正官)의 역할인 것입니다. 무릇 맑은 교화를 신중하게 살펴 선택하려면 상하의 직분을 명확히 구분하여 서로 월권행위를 하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만일 위에서 그 본인의 권한을 넘어 월권행위를 한다면, 아마 근본이 없게 되어 권세를 간청하고 뒷문의 왜곡된 길을 분주하게 달려가 열려 할 것이고, 아래가 서열을 넘어서 월권행위를 한다면 아마 천자가 준 관직이 외부의 하층으로부터 장악되어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될 것입니다. 천자가 준 관직이 아래로 통하게 되는 것은 일반 백성들의 의론을 조성하여 국가의 권한을 장악하는 것인데,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이는 환란의 근원이 됩니다.

주군의 중정관이 관리의 재간과 관직을 헤아린 지 이미 수년이 되었습니다만, 작자의 표준에 서로 차이가 있어 매우 혼란하여 지금까지도 제도가 정비되었음을 듣지 못했습니다. 어찌 상하의 직책이 구별되지 않고 섞여 혼란해져서 각기 제도의 기본이 되는 것을 잃은 데서 기인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중정관으로 하여금 단지 인물의 인품과 덕망, 그리고 재능만을 고찰하도록 하여, 품덕과 재능이 행위와 일치하면 관리로 임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슨 이유겠습니까? 그가 집에서 효행을 나타냈다면 관직에서 설마 충성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친족(九族) 중에서 인자하고 너그러움으로써 칭찬받는 자가 설마 정치의 본질에 철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마을 안에서 바른 판단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설마 일에 임하여 책임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세 종류의 사람이 중정의 관리로 뽑힌다면, 각자에게 해당하는 관직명은 없어도, 그 관리로 임용할 수 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행동에도 크고 작음이 있고, 배열에도 높고 낮음이 있으므로, 임명되는 관직의 등급 또한 분명하게 구분이 있는 것입니다. 중정관이 아래에 있는 인물 선발의 직권을 요구하고, 정권을 담당하고 있는 자가 위에 있는 권한을 위임하여, 상하가 함께 월권 행위를 하여 분규와 혼란을 일으키도록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조정이 관할하는 아래의 관리에 대하여 공적과 과실을 살피는 경우, 많은 관청에 각각 장관이 있어 하루종일 고찰하지만, 그것을 상세하게 검토하지는 못합니다. 마을의 평가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판단을 내려 인품이나 덕망이나 재능을 갖추고 있어 요직에 임명될 수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지위를 잃게 하여 많은 사람들이 놀라 달려갑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풍속을 맑고 평정하게 하려고 하면 얻을 수 있습니까? 천대(天臺 : 궁중)는 아득히 먼 곳에 있으니, 뭇 사람들은 절망을 하게 됩니다. 그들이 도달할 수 있는 곳은 그들의 측근 뿐이니, 누가 꾸미지 않고서 가까이 가서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요구하는 길이 있으니 자기 집에서 몸을 닦고 있는 것은 이미 스스로 향당(鄕黨)에서 이들을 떨치는 것만 못합니다.

스스로 향당에서 이름을 떨치는 것은 이미 주와 군에서 스스로 요구하는 것에 미치지 못합니다. 진실로 그것을 개척하여 길을 만들고 그들이 진실을 꾸미고 근본을 벗어나는 것을 걱정하며, 비록 또 주정관을 엄하게 직책하고, 형벌로 감독을 강화할지라도 어떠한 이익도 없습니다. 각 사람들로 하여금 각기 그 직분을 지키도록 하고, 관장들에게 각자 소속 관리들의 능력 혹은 열등함을 정부에 보고하도록 하며, 정부에서는 관장이 보고한 것에 의거하고 마을에서의 덕행 순서를 참고하여, 각급 관원의 등급과 비교하여 치우침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중정관은 그들의 행동 자취를 고찰하여 그것의 높고 낮음을 판별하고, 등급을 심사하고 결정하여 관직의 승진과 낮춤에 있어 마음대로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조정에서 전면적으로 관여하여서 만에 하나 어떠한 착오가 있다면 그 책임은 당연히 조정의 담당관리가 지어야 합니다. 장관의 등급 배열과 중정의 순위는 응당 실제 수용의 순서에 알맞게 그들을 임용해야 되는데, 만일 그 인물이 부적격한 경우에는 책임은 조정 밖에서도 져야 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조정의 안과 밖이 서로 자료를 참조하여 인물의 장점과 단점의 판정 근거가 세워지고 쌍방이 항상 검사하면, 누가 자신을 꾸미는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된다면 사람들의 마음은 안정되고 일은 이치에 맞을 것이며, 풍속을 정숙하게 하고 관리가 될 인재를 신중히 뽑아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

하후현은 또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고대에 관리를 설치한 것은 만민을 구하고 백성들을 일관되게 관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때문에 백성들은 자신들을 위하는 군장(君長)을 세워 다스림을 받았던 것입니다. 사목(司牧)을 세운 큰 취지는 한 개인에게 전체를 맡기기를 바란 것입니다. 한 사람이면 관리 임무가 일정하고 상하 또한 서로 안정되며, 전체를 맡기면 직무가 단정하게 정리되어 모든 일이 복잡하지 않습니다. 모든 일이 간명하고 직무가 단정하게 정리되고, 상하가 섞이지 않아 잘 다스려진 국가는 종래에 없었습니다.

고대의 선왕이 제후국을 많이 설치한 것은 그 상세한 상황을 살펴볼 수는 없지만, 영토를 나누어 경계를 구분하고, 각자의 땅을 지켰다는 점에서는 이중 통치의 속박을 결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시대가 내려와서 은나라와 주나라의 오등작(五等爵 : 공작ㆍ후작ㆍ백작ㆍ자작ㆍ남작의 오 등급을 세워 천하를 다스림) 제도에 대하여 고찰하면, 영토의 크고 작음과 위계의 귀함과 천함의 차이가 있을 뿐, 또 관리를 주장(主長)으로 하고 백성을 신하로 하여, 이중통치에 따라서 서로 견제하는 것은 없었습니다. 관리의 지휘 계통이 하나가 아니면, 직무는 분명하게 정비되지 않습니다. 직무가 분명하게 정비되지 않으면 모든 일이 어떻게 간단하고 명확하게 되겠습니까?

모든 일이 간단하고 명확하지 않으면, 백성들을 어떻게 안정시킬 수 있겠습니까? 백성들이 안정할 수 없으면, 사악한 일이 일어나고 간사하고 거짓스러움이 자라나게 됩니다. 선왕께서는 사태가 이렇게 될 줄은 충분히 인지하셨기 때문에 직무를 한 사람에게 맡겨 지휘계통을 통일시켰던 것입니다.

진나라 시대가 시작되면서부터, 처음으로 제왕이 천자의 도를 따르지 않고 자기 한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을 갖고 직무를 담당하고, 바르지 못한 태도로 아랫사람을 대하였습니다. 그러한 지방 장관들의 바르지 못함을 두려워하여 감찰관을 세워 그들을 감독하도록 하였고, 감찰관의 바르지 못함이 묵인될 것을 두려워하여 사제를 두어 규명하도록 했습니다. 지방장관과 감찰관의 일은 중복시키고, 감찰관과 사제가 서로에게 조사를 하도록 하였으므로, 사람들은 두 마음을 품게 되고 위와 아래가 일을 함에 있어일치가 안되어 서로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한대는 진대의 제도를 계승하여 어떠한 보충이나 고침도 없었습니다. 위 왕조가 흥성한 이래 정사가 바빠 거기까지 미칠 틈이 없었고, 은나라와 주나라의 오등작의 법전은 비록 회복시키는 것은 곤란했을지라도 대체적인 표준을 세워 행정제도를 하나로 통일시킬 수는 있었습니다. 지금 현의 영장인 장리(長吏)는 모두 국군이 관리와 백성을 관리하도록 위임한 것인데, 현재 그들의 위에는 또 군수, 주의 자사가 이중 삼중으로 있습니다. 대략적인 상황만을 살펴볼 때, 그 군수가 관할하는 범위는 대체로 주와 같으며, 이 양자는 중복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군수의 관위를 생략하고, 단지 자사만을 임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자사의 직책이 존재하는 이상, 감독 사찰의 임무는 계속해야 합니다. 군이 폐지된 결과, 수만은 군수와 장리를 고향으로 돌려보내어 농사를 짓도록 하고 복잡한 비용을 줄이도록 하면 재정을 넉넉하게 하고 식량을 더욱 많이 생산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이로운 점입니다.

큰 현을 다스리는 인물은 모든 군수를 담당할 수 있는 자질을 갖고 있는데, 판단을 요구하는 논쟁에 있어서는 항상 군숭와 어긋나는 의견을 내놓습니다. 순종하는 경우에는 평안하고, 자기의 의견을 견지하면 다투게 됩니다. 무릇 어우러진 국의 좋은 맛은 이질적인 것을 조화시킨 데 있습니다. 그것과 똑같이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이익은 서로 도울 수 있는 데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순종하면 평안을 지킬 수 있으며, 이것은 거문고와 비파를 같은 소리로 연주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만일 불필요한 중간기구인 군수를 쓸어 없앤다면 관리의 수를 줄이고 모든 일을 간명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로 이로운 점입니다.

또 군을 다스리는 관리의 직책은 여러 현을 감독하는 것인데, 그들은 왕왕 자신들의 고향 친구나 마을 일을 도와 비호하곤 합니다. 만일 그들이 바라는 것을 돕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들은 곧 공적인 일을 빌어 제약을 가할 것입니다. 백성의 곤궁함과 재해는 이로부터 생기는 것입니다. 만일 군과 주를 모두 병합한다면 혼란의 원인을 자연스럽게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세 번째 이로운 점입니다.

현재는 한말의 쇠망하고 황폐해진 것을 이어, 백성들은 곤고함에 빠져 있고 현명하고 재능있는 자가 극히 드물어 정치적인 일을 담당할 수 있는 사람이 적습니다. 군과 현의 훌륭한 관리의 수는 비례하지만 왕왕 똑같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군은 현의 성과를 받고 있고, 무거운 정치적인 임무는 아래현에서 취급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리 선발에 있어서는 군에서 우선적으로 충족시킵니다. 이것은 곧 백성과 친한 선량한 관리는 본래 낮은 위치에 있다는 것입니다. 관리는 백성의 생명과 관련이 있는데, 현의 관리는 왕왕 재질이 낮고 비루합니다. 지금 만일 군과 현을 병합하고, 현리로는 청렴하고 선량한 자를 많이 선발하여 임무에 임하게하면, 커다란 교화가 날리 실시되어 물 흐르듯이 선을 따르게 되어 민중과 만물은 모두 안녕된 생활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네 번째 이로운 점입니다.

칙명을 내려 1만 호의 현을 다스리게 하여 군수의 이름을 주고, 5천 호 이상을 다스리게 하여 도위의 이름을 주며, 5천 호 이하를 다스리게 하는 것은 지금까지처럼 현의 영장으로 하고, 작은 현의 장관인 장 이상은 공적에 따라서 자리를 옮겨주고, 능력이 있으면 승진하고 다스리는 곳도 그에 따라서 확대시키십시오. 이것은 재능있는 자를 등용시켜 공을 보게 하는 효과가 있는 순서입니다. 만일 나라를 다스리는 제도가 일관되게 한 가지로 정해지면 관리의 재능도 질서가 있게 되고, 정치의 효과도 정제되어 정확하게 됩니다. 이것이 다섯 번째로 이로운 점입니다.

만일 중복되어 있는 군수를 감량한다면, 현의 일은 주에 빨리 도달할 수 있게 되어 정사에 틈이 생기지 않으며, 관원들도 머물러 적체되는 것이 없게 됩니다. 삼대(하ㆍ은ㆍ주)의 풍화(風化)는 비록 반드시 완전히 회복할 수는 없지만 행정의 간소화와 단일화의 효과는 오히려 기대할 수 있습니다. 백성들에게 편의를 주고 나가는 비용을 줄이는 길은 이 정책에 있습니다.
"

하후현은 또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문(文 : 문화ㆍ수식을 중요시 하는 경우)과 질(質 : 질박함을 중요시 하는 경우)이 교대로 사용되는 것은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 네 겨절이 교대로 나타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왕이 된 자는 하늘의 법칙을 체득하여 만물을 다스리고, 반드시 세상 풍속의 유폐를 빌려 이것을 구제하여 통하게 해야 됩니다. 질이 숭상된 시대에는 그것으로 하여금 약간 문려하게 하여 예의를 숭상하였고, 사치가 유행했던 시대에는 질박한 고풍으로 그것을 보충했습니다.

지금 백대 제왕의 끝을 잇고 진한 시대의 여파를 계승하면, 세상 풍속은 문려함이 지나치게 됩니다. 때문에 이것을 크게 바꾸려는 백성들의 욕구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지금의 법령에는 공ㆍ열후 이하와 대장군 이상의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능금ㆍ비단ㆍ하얀 면ㆍ금ㆍ은을 사용한 귀중한 옷을 입을 수 있고, 이 이하의 지위에 있는 자는 아래로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잡다한 색으로 만든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비록 신분의 상하에 따라서 각기 차이를 나타내고 있지만, 조신(朝臣)에 대한 제도에서는 제왕과 똑같은 것을 몸에 걸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니, 천지의 색깔인 검정과 노랑으로 채색한 옷을 입는 것이 아래 백성들에게까지 허락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장에서 화려한 색깔의 옷을 팔지 못하게 하고, 상인에게는 귀중한 물품을 팔지 못하게 하며, 장인에게는 조각을 한 공예품을 만들지 못하게 하기를 바라는 것은 또한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근본으로부터 크게 다스려 정비하고, 고대의 법률에 준거하여 문과 질의 마땅함을 확정하며, 그 중에서 원칙에 부합하는 것을 취하여 예제의 법도로 삼아야만 합니다. 황상의 수레와 의복의 꾸밈은 모두 질박함을 제창하여 말세의 풍속인 화려한 물건의 사용을 금하고, 조정을 다스리고 작위를 받은 대신들의 집에는 비단의 꾸밈이라든지, 두 가지 이상의 색으로 만든 옷이나 정교한 세공물을 사용할 수 없도록 해야 합니다. 황상으로부터 아래에까지 소박함의 차이로 신분의 등급을 나타낼 수 있고, 그들 사이의 거리를 지나치게 크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만일 공적이나 덕행이 있는 사람에게 치사를 할 때에는 특별한 은총을 주어 모두 그것을 알게 한 후에 착용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위로부터 아래에 대한 교화는 바람이 풀을 흔들리게 하는 것과 같아야 합니다. 소박한 예교가 조정에서 먼저 흥기한다면 자연스럽게 아랫사람들의 사치스런 마음도 소멸될 것입니다.
"

사마의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 관리를 심사하여 적임자를 선발하자는 의견, 중복되는 관직을 생략하고 복식제도를 개혁하자는 의견은 모두가 썩 좋은 것이오. 예절에 있어 마을에서는 본인의 행적을 품평하고, 조정에서는 각급 관원의 일을 고찰하게 하는 것은 그 기본적인 취지가 당신이 나타낸 바와 같소. 예로부터 지금까지 그 중간의 시대에서 받아 실시한 이상, 어떤 것으로 갑자기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오. 진대에는 자사가 존재하지 않았고, 단지 군수와 장리만이 있었소. 한조에 처음으로 자사가 있었지만, 군에 대하여 단지 여섯 개 항목에 대해 사찰하는 것일 뿐이었소. 그래서 자사의 일을 또 ‘전거(傳車 : 역전의 말수레)’라고 불렀소, 그에 속한 관리가 종사로 불렸던 것이오. 자사에게는 일정한 부서나 관청이 없었으며, 거기에 속한 관리들 또한 정식 관원이라고 할 수 없었소. 그 후 비교적 오랜 시간의 발전을 거쳐서 정식으로 관사가 되었을 뿐이오. 옛날 서한 초기의 가의(賈誼) 역시 복식제도에 대해서 걱정한 적이 있었소. 한나라 문제는 친히 소박한 검정 옷을 입었지만, 위 아래 관리와 백성들로 하여금 그의 뜻대로 옷을 입게 할 수는 없었소. 여기서 당신이 말한 세 가지 일은 더욱 현명하고 능력있는 사람이 나타난 후에야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오. -

하후현이 또 편지를 써서 말했다.

- 한문제는 비록 몸소 검은 색의 옷을 입었지만, 바른 법률을 개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조정의 안팎에서 아무도 모르게 예법을 뛰어넘어 의복을 입고, 총애받는 신하들은 끝도 없이 하사품을 받았습니다. 이 점으로부터 보면, 한문제의 검은 색 옷은 자기 스스로의 명성을 세상에 세우려는 것이었지, 독실한 제도를 바꾸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공후(公侯) 당신은 명을 받아 조정을 장악하고 있습니다만 상고의 신하를 따라 위나라 왕실로 하여금 향하게 하고, 지엽을 누르고 근본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만일 당신이 조당에서 새로운 법령을 제정한다면 매우 빠른 속도로 백성들에게 받아들여져 행동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개혁하기에 적절한 시기를 눈앞에 두고, 은근히 하려는 마음을 보류하고 그것을 명령 내리는 날이면, 아래에 있는 자들의 호응 또한 소리나는 곳을 찾아 울려오는 것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여전히 겸허한 태도로 ‘아직 현명하고 능력있는 사람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씀하신다면, 그것은 은의 이윤과 주의 주공단이 은과 주의 법전을 바르게 고치지 못한 것과 같을 것입니다. 저는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

오래지 않아, 하후현은 정서장군(征西將軍)ㆍ가절도독옹양주제군사(假節都督雍涼州諸軍事)가 되었다.


위략(魏略)에서 이르길:하후현이 임명되면서 사마경왕(司馬景王ㅡ 사마사)과 교체되어 사마사가 호군(護軍)으로 임명되었다. 호군은 제장들을 통솔하며 무관을 선발하여 추천하는 일을 주관했다. 무관으로 임명된 사람들 가운데는 뇌물을 바치고 관직을 얻은 사람들이 많았다. 장제(蔣濟)가 호군으로 있을 때 세상에는 이러한 말이 떠돌았다.

"아문(牙門)에서 자리를 얻고 싶으면 말 1천 필을 바쳐야 하며, 백인대장이 되고 싶으면 말 5백 필을 바쳐야 한다."

사마의는 장제와 가까웠으므로 어느 날 그를 불러서 그 사실을 물어 보았다. 장제는 아무런 해명도 하지 못하고, 우스개 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낙양에 있는 시장에서는 1전이 부족해도 살 수 없습니다."

사마의도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하후현이 장제를 대신하여 호군이 되었지만 이러한 인사를 막지 못했다. 사마사가 하후현을 대신해서 호군이 되자 법령을 정비하여 과감히 이러한 폐단을 없앴다.

그는 조상과 함께 일어나 낙곡(駱谷)으로 들어가 촉을 정벌하는 싸움을 진행시켰으므로 당신 사람들이 비웃었다. 조상이 처형된 후, 하후현을 불러 대홍려(大鴻臚)로 임명하였고, 수년 후에 태상으로 승진시켰다. 하후현은 조상과의 관계를 이유로 하여 억눌렸으므로 내심 불만을 품고 있었다. 중서령 이풍(
李豐)은 일찍이 대장군 사마경왕에게 신임받아 후한 대접을 받았지만, 그의 속마음은 오히려 하후현에게 있었다. 그래서 그는 황후의 부친인 광록대후 장집과 결탁하여 하후현에게 정치를 보좌하도록 하려고 했다. 이풍은 이미 조정 안에서 권력을 잡았고, 그의 아들도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였으며, 장집과는 또 똑같이 풍익(馮翊) 출신이었다. 그 때문에 장집은 그를 신임했다. 이풍은 은밀하게 동생인 여주자사 이익(李翼)에게 조정에 들어오기를 명하고, 군대를 이끌고 성으로 들어와 힘을 합쳐 일을 일으킬 생각이었다. 이익은 조정으로 들어가기를 원했지만, 허락을 받지 못했다.

가평(嘉平) 6년(254) 2월에 황제가 마침 궁중의 귀인을 임명하려 했으므로 이풍 등은 황제가 궁전의 헌각(軒閣)까진 나오고, 여러 문에 근위병이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대장군(사마경왕)을 주살하여 하후현과 교체시키고, 장집(緝)을 표기장군(驃騎將軍)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이풍은 비밀리에 황문감(黃門監) 소삭(蘇鑠)ㆍ영녕서령(永寧署令) 악돈(樂敦)ㆍ중황문(中黃門) 항종복사(亢從僕射) 유현(劉賢) 등에게 계획을 알렸다.

“그대들은 궁중에서 많은 불법행위를 범했지만, 대장군은 위엄과 강인함을 갖추고 있는 성격으로써 그대들의 일을 수차례 제기했었소. 장당(張堂 : 가평 원년에 조상과 공모하여 주살당함)의 예를 당신들의 거울로 삼을 수 있을 것이오.”

소삭 등은 모두 허락하고 이풍의 명령을 따랐다.

위서는 말한다.


하후현은 평소에 귀한 사람이었지만 조상(曹爽)이 죽고 난 후에 불만에 찬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중서령 이풍과 하후현와 황후의 부친인 광록대부 장집은 몰래 반란을 꾸몄다. 이풍과 장집은 같은 고향인 풍익 출신으로 가깝게 지냈다. 동완태수(東莞太守) 장소(張召)도 황후의 가문으로 역시 불만을 품고 있다가 모의에 동참했다. 처음에 이풍은 자신이 국가의 기밀을 담당하고 있는 것을 기회로 아들 이도(李韜)를 열후이자 급사중(給事中)이 되도록 하고, 제장공주(齊長公主)와 결혼을 시켜 조정 안팎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었지만 스스로 불안하게 생각했다. 그는 아들 이도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후현은 이미 국내에서 중요한 인물로 알려졌으므로 대임을 맡을 만하며, 나이도 한창이라 오랫동안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조상의 외가로 형제가 되는 친척이었으므로 대장군의 미움을 받고 있다. 내가 하후현의 편지를 받아보니 걱정이 대단했다. 장집(張緝)은 재능이 있지만 딸이 황후가 되어 큰 군의 병마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 각자 자신의 뜻을 얻지 못했으니 너는 그들에게 나의 밀계를 알려주어라.”


당시에 장집은 병이 나서 자리에 누워 있었다. 이풍의 지시를 받은 이도는 병문안을 가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물리치고 이렇게 말했다.


“저는 공주와 결혼하여 부자가 모두 황제를 가까이에서 모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장군이 정권을 잡고나자 항상 그로부터 분명한 신뢰를 받지 못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태상도 역시 마음속으로 깊이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군후께서는 비록 황후의 부친으로 존중받고 있지만, 안위가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모두 저의 집안과 함께 염려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저의 부친께서는 군후와 함께 대장군을 제거하고 싶어 하십니다.”


장집은 한참동안 말이 없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어려움에 빠진 배를 같이 탄 내가 어떻게 도망치겠는가? 이 일은 큰 일이니 빨리 실행하지 않으면 종족들에게도 화가 미칠 것이다.”


이도의 보고를받은 이풍은 황문감(黃門監) 소삭(蘇鑠) 등에게도 몰래 이 사실을 말했다. 그들도 역시 이풍의 계획에 동참하겠다고 맹서했다. 이풍은 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귀인(貴人)을 제수하는 날이다. 여러 병영의 군사들에게 문을 지키게 하라. 폐하께서 헌(軒)에 오르시면 모두 함께 폐하에게 겁을 주어 참석자들을 포위한 다음 대장군을 죽일 것이다. 경들은 그 때 함께 모의했음을 밝히면 된다.”


소삭 등이 말했다.


“폐하께서 따르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상황을 보아 처리하면 된다. 만약 듣지 않으시면 더욱 심하게 몰아치면 된다. 어떻게 따르지 않겠는가?”


“이 일은 종족의 운명이 걸린 일이니 경들은 비밀을 지켜야 한다. 일이 성공하며 경들은 모두 후상시(侯常侍)로 봉할 것이다.”


이풍은 다시 하후현과 장집에 이 사실을 알렸다. 장집은 아들 장막(張邈)을 시켜서 이풍에게 함께 모의하여 일을 일으키자고 했다.


세어(世語): 이풍이 아들 이도를 시켜서 하후현에게 모의 사실을 알리자, 하후현이 자세하지 못하다고 했다고 한다 [宜詳之耳]. 이도는 더 말을 하지 못했다.

대장군(大將軍)은 이풍의 음모를 듣고, 이풍에게 만나기를 청했다. 이풍은 아무것도 모르고 갔다가 살해되었다. 



세어(世語):


대장군 사마사는 이풍(李豐)이 모의를했다는 말을 듣고 자신의 부하 왕양(王羕)에게 이풍을 불러오라고 시키며 이렇게 말했다.


“이풍이 만약 특별한 준비가 없으면 협박하면 올 것이다. 오지 않는다면 왕양 혼자라도 제압할 수 있다. 만약 모의가 누설된 것을 안다면, 자기 패거리를 데리고 천자를 끼기 위해 장창(長戟)으로 자신을 보호하면서 운룡문(雲龍門)으로 들어 갈 것이다. 천자를 끼고 능운대(凌雲臺)로 올라간다면, 그것은 3천명이 모일 수 있는 곳이다. 북을 울려서 군사들을 모은다면 왕양도 어쩔 수가 없을 것이다.”


대장군은 왕양을 파견하면서 수레로 모셔 오라고 했다. 이풍은 협박당하자 왕양을 따라왔다.


위씨춘추(魏氏春秋):

대장군이 이풍을 질책하자 그는 이미 화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정색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경의 부자는 간악한 마음을 품고 사직을 기울게 하고 있소. 나는 애석하게도 힘이 부족하여 그것을 막지 못했을 뿐이오.”


화가 난 대장군은 용사들에게 칼로 이풍의 허리를 자르게 하고 죽여 버렸다.


위략: [[이풍전]]으로 분리


위씨춘추 : 이풍의 시신은 밤중에 정위(廷尉)에게로 넘겨졌다. 정위 종육(鍾毓)은 관청에서 법대로 처형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것을 받지 않았다. 그는 그 사실을 황제에게 문서로 보고하고 칙령을 받은 후에 비로소 이풍의 시신을 받았다.


그의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황제는 화를 내며 이풍을 죽인 이유를 묻고자 했다. 겁이 난 태후가 황제를 불러들여 설득하자 곧 중지했다. 황제는 사신을 보내 이익을 불러들였다.


《세어》


이익의 후처는 산기상시(散騎常侍) 순이(荀廙)의 누이였다. 그녀는 이익에게 이렇게 말했다.


“중서령이 꾸민 일이 발각되었으니, 소환장이 날아오기 전에 오나라로 도망갑시다. 앉아서 죽을 수가 있겠습니까? 주변에 위험을 같이 할 사람이 있다면, 누구입니까?”


이익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익의 아내는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했다.


“군은 지금 큰 주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생사를 같이 할 사람을 알지 못한다면 가더라도 죽음을 면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익은 이렇게 말했다.


“두 아이가 아직도 어리니 나는 가지 않겠소.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면 나는 죽겠지만 그 아들은 살 것이오.”


과연 그의 말처럼 두 아이는 살아남았다. 이익의 아들 이빈(李斌)은 양준(楊駿)의 생질이었다. 진혜제(晋惠帝) 초에 하남윤(河南尹)을 지냈으나 양준과 함께 죽었다. 그 사실은 진서(晋書)에 있다.


이 일의 처리는 당연히 관청으로 옮겨졌고 하후현(玄)ㆍ장집(緝)ㆍ주삭(鑠)ㆍ악돈(敦)ㆍ유현(賢) 등은 체포되어 정위(廷尉)로 보내졌다.


세어 : 하후현은 정위의 관서로 인도되었으나  결코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위 종육(鍾毓)이 직접 나서서 하후현을 심문하자, 하후현이 정색하며 말하길

"나에게 무슨 말을 하란 말이오? 이제는 영사가 되어 사람을 다그치려 하시오? 그러면 당신이 내 대신 진술서를 작성하시오"

라고 했다. 종육은 하후현이 명사로서 그 높은 절조를 꺾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옥사는 어떻게 해서든지 끝내야 했으므로, 밤에 사실과 서로 부합하도록 진술서를 작성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하후현에게 보여주었더니, 하후현이 그것을 보고 끄덕일 뿐이었다.


종육의 동생 종회(鍾會)는 하후현보다 어렸기 때문에 그와 교제할 기회가 없었다. 그날 종육은 종회를 만나보라고 했으나 하후현은 거절했다.


손성의 잡어(孫盛雜語)에서 이르길: 하후현이 영어(囹圄)에 있을 때 종회는 하후현과 우정을 나눌 기회를 얻으려고 했지만 하후현은 정색하며 말하길,

"종군, 어찌 이럴수 있는가?"

라고 했다.


정위 종육(鍾稑)이 상주했다.

- 이풍 등은 제왕을 협박하고, 재상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는 대역무도한 것입니다. 청컨대 법률에 따라 그들을 판결하도록 하십시오.

그 결과 공경ㆍ조신ㆍ정위 등을 모아 의논하니, 대부분 이렇게 말했다.

“이풍(豐) 등은 각각 특별한 은총을 받았고, 국가의 기밀을 관리하고 종합하였으며, 장집(緝)은 황후의 외척으로 존귀한 신분을 이었고, 하후현(玄)은 선조 이래 대대로 신하였으며, 모두 열후(列)라는 높은 지위에 있었지만 오히려 화를 품고 반역을 도모하여 환관과 연락하여 그들에게 사악한 계획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천위(天威)를 두려워하고 꺼려하여 감히 음모를 드러내지 못하면서도 오히려 황상을 협박하여 자신들의 허위와 사악함을 드러내어 마음대로 행동했으며, 조정의 선량한 신하를 암살하려고 음모하였고 재상을 마음대로 세우려 했으며, 이와 같은 수단으로 황실을 뒤엎고 위나라의 사직을 위태롭게 했습니다. 종육(毓)의 판단은 모두 형법에 부합되니, 종육에게 형의 시행을 명하십시오.”

조서가 내려왔다.

- 제나라의 장공주(長公主 : 명제의 딸이며 이풍의 아들인 李䪗의 처)는 선제가 사랑하는 딸이니, 그녀의 세 아들은 사형에 처하지 말라. -

그 결과 이풍ㆍ하후현ㆍ장집ㆍ악돈ㆍ유현 등은 모두 삼족을 멸하는 처벌을 받았고, 남은 친족은 낙랑군(樂浪郡)으로 쫓겨났다.

위서에서 가로되 : 이풍의 아들은 이도며, 공주와 혼인하였는데, 옥중에서 사사되었다.

하후현은 도량이 크고 세상을 구하려는 뜻을 갖고 있던 인물이었는데, 동쪽 저자에서 참형을 당하면서도 안색을 바꾸지 않았고 행동거지가 아무 일도 없던 듯이 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마흔여섯이었다.


위략(魏略)에서 이르길:서쪽에서 돌아온 하후현은 사람들과 만나지 않고 일체의 화려한 생활을 하지 않았다.


위씨춘추(魏氏春秋)에서 이르길: 미리 겁을 먹은 하후패(夏侯霸)가 촉(蜀)으로 도망칠 때,하후현에게 같이 가자고 했다. 그러나 하후현은


"내가 어찌 구차하게 적의 빈객이 될 수 있겠소."


고 하면서 수도로 돌아왔다.

태부(사마의)가 죽고 나자 허윤(許允)하후현에게 말하길

"그대는 더 이상 근심할 것이 없게 되었소"

라고 하자, 하후현이 탄식하며 말하길

"사종(허윤), 당신은 어찌하여 세상일을 보지 못하시오? 그 사람(사마의)는 그래도 나를 친한 집안의 젊은이로 대우해주었지만, 자원(사마사), 자상(사마소)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오"

하후현은 <악의樂毅>, <장량張良>, <본무육형론本無肉刑論>과 같은 저서를 남겼다. 그가 남긴 책은 상당히 명작으로 모두 후세에 전한다. 하후현이 체포되자 위장군(衛將軍) 사마문왕(司馬文王 사마소)은 눈물을 흘리며 구형해 줄 것을 간청했지만 대장군(大將軍 사마사)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은 조사공(趙司空)의 장례식 때의 일을 잊었는가?"


이전에,사공(司空) 조엄(趙儼)이 죽었을 때,대장군 형제는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수 백 명의 문상객들은 나중에 하후현이 도착하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이 일로 대장군 형제는 하후현을 미워했다.


신송지가 살피니:조상(曹爽)은 정시(正始) 5년에 촉을 정벌하러 갔습니다. 당시에 하후현은 그 후에도 10년 동안이나 관중의 도독으로 있었습니다. 하후상은 조상이 죽자마자 낙양으로 돌아왔습니다. <소제기少帝紀>에 따르면 사공 조엄은 정시 6년에 죽었으므로 하후현이 조엄의 장례식에 갔을 리가 없습니다. 하후현이 당시에 조정으로 들어왔다는 기록은 기(紀)나 전(傳)에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록은 사실이 아닙니다.

정원(正元) 연간에 계속 공신의 집을 잇게 하고, 하후상(尚)의 종손 하후본(夏侯本)을 창릉정후(昌陵亭侯)로 봉하고, 식읍 3백 호를 주어 하후상의 뒤를 잇도록 했다. 처음에 중령군(中領軍) 고양(高陽) 사람 허윤(許允)은 이풍과 하후현과 친하게 지냈다. 일의 변화가 있기 전, 일척의 길이로 조서를 거짓으로 만든 이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하후현(玄)을 대장군(大將軍)에, 허윤(允)을 태위(太尉)에 임명하여 두 사람이 똑같이 상서(尚書)의 일을 관리하도록 하라는 말이 씌어 있었다. 어떤 사람이 날이 밝기 전에 말을 타고 찾아가, 이 소칙을 허윤의 집 문지기에게 주며 말했다.

“조서가 있다.”

그 리고 즉시 말을 달려갔다. 허윤은 곧 바로 이 투서를 불에 넣어 태워버리고, 사마경왕에게 보여주지도 않았다. 후에 이풍 등의 사건이 발각되고, 허윤은 진북장군이 되어 가절을 받고 하북의 모든 군사를 감독하는 직책에 임명되었지만, 출발하기 전에 국고를 낭비했다는 죄명으로 체포되어 정위(廷尉)로 넘겨졌다. 낙랑군(樂浪)으로 유배되어, 세상을 떠났다.

위략, 위씨춘추(魏氏春秋), 상인서(相印書), 세어, 부창(傅暢)의 《진제공찬(晋諸公贊)》: 허윤전으로 분리

청하(清河)의 왕경(王經)은 또한 허윤과 함께 기주(冀州)의 명사로 일컬어졌다. 감로(甘露) 연간에 상서(尚書)가 되었고, 고귀향공(高貴鄉公 : 조모)의 일에 연루되어 주살당했다. 처음 왕경이 군수(郡守)가 되었을 때, 왕경의 어머니가 말했다.

“너는 전인(田人)의 아들로서 지금 2천 석을 받는 군수의 자리에 임명되었다. 재물이 지나치게 많으면 좋지 않으니, 너는 여기서 멈출 수 있어야 한다.”

왕경은 어머니의 권고를 따를 수 없었고, 후에 또 두 주의 자사와 사예교위(司隸校尉)를 역임하였는데, 결국에는 패망하고 말았다.

세어에 따르면


왕경(王經)의 자는 언위(彦偉) 또는 언위(彦緯)였으며 처음에는 강하태수(江夏太守)가 되었다.


대장군 조상(曹爽)이 비단 20필을 주면서 오나라의 시장에 내다 팔라고 하자, 왕경은 첨부된 편지를 열어보지도 않고, 관직을 버리고 돌아왔다. 어머니가 어떻게 된 일인지 묻자 그는 사실대로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즉시 병마를 이끄는 자가 마음대로 전선을 이탈했다고 하며 관리에게 고발하여 50대나 되는 매를 맞도록 했다. 조상이 그 말을 듣고 다시 죄를 묻지 않았다.


왕경은 사례교위로 있을 때 하내(河內) 출신인 상웅(向雄)을 도관종사(都官從事)로 불렀다.


260년 조모황제가 살해될 때, 왕업(王業)이 황제를 배신하고 사마소에게 갈때, 왕경은 왕업을 따르지 않았고, 결국에 난을 만났다. 왕경에 동시(東市)에서 참형되자 상웅은 크게 통곡을 했다. 당시에 사람들은 모두 그의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형벌은 왕경의 어머니에게도 미쳤다. 옹주(雍州)의 옛 관리 황보안(皇甫晏)가 가산을 털어서 장례식을 올려주었다.


《한진춘추(漢晋春秋)》:

왕경이 체포되자 왕경은 그 사실을 어머니에게 알렸다. 왕경의 어머니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죽지 않는 사람도 있느냐? 예전에 내가 너에게 (군수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했는데 그때) 결국에 설득을 못 시킨 것은, 니가 죽어도 좋을 만한 좋은 기회를 얻지 못할까봐 걱정해서 그랬던 것이다. 지금 내 아들은 죽을 기회를 만났고, 나도 이것을 보고 죽으니, 내가 무슨 한이 더 있겠느냐?"


진무제(晋武帝)는 태시(太始) 원년에 다음과 같은 조칙을 내렸다.


“상서 왕경은 빌고 법을 어겼지만 자신의 뜻을 지킨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의 집안이 없어졌으니 민망하기가 짝이 없도다. 왕경의 손자를 낭중으로 임명하라.”

허윤의 친구이며 같은 군 사람인 최찬(崔贊) 또한 일찍이 세상에서 관운이 너무 성하면 패망을 초래하게 된다고 허윤에게 권고하였다.


순작(荀綽)의 기주기(冀州記)에 이르길최찬(崔贊)의 아들은 최홍(洪)으로, 자는 양백(良伯)이며,맑고 충직하여 함부로 아무에게나 몸을 굽히지 않았다. 진에서 이부상서와 대사농을 역임했다.


- 평하여 말한다.

하후(夏侯)와 조씨(曹氏)는 대대로 인척관계가 되었으므로, 하후돈(惇)과 하후연(淵)ㆍ조인(仁)ㆍ조홍(洪)ㆍ조휴(休)ㆍ조상(尚)ㆍ조진(真) 등은 폐부와 같은 친구로 그 당시에 고귀한 관직에 있었으며, 군주의 곁에서 공헌을 세워 모두 공로가 있었다. 조상은 덕이 적은데도 관직이 높아 이성을 잃고 탐닉하였으니, 이러한 것은 진실로 대역(大易)에 명시된 대로 도가(道家)가 기피하는 바이다. 하후현(玄)은 엄격하고 도량이 있어 세간에 이름이 알려졌고 조상과 조정의 안팎으로 깊숙하게 연결되어 영광스러운 자리가 이와 같았으나, 일찍이 그가 조상의 잘못을 바로잡거나 훌륭한 인재를 불러 받아들였다는 것은 들어보지 못했다. 이 점을 들어 판단해 본다면, 어찌 백운의 최후를 면할 수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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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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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18
16:21:39
(*.104.141.18)
출처를 알 수 없는 주석들 천지. 일단 정리 시도해보겠습니다.

코렐솔라

2013.07.19
23:04:38
(*.52.89.88)
우,. 정리 힘들었습니다.

코렐솔라

2013.07.19
23:25:08
(*.52.89.88)
어째 저째 모든 주석 다 번역할 수는 있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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