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욱荀彧의 자는 문약(文若)이며 영천(潁川)군 영음(潁陰)현 사람이다. 조부는 순숙(荀淑)인데, 자는 계화(季和)로 낭릉(郞陵) 현령을 지냈다. (후)한의 순제(順帝)•환제(桓帝) 때에 명성이 세상이 알려지 게 되었다. 순숙에게는 여덟 아들이 있었는데, 8룡(八龍)이라 불렸다. 순욱의 아버지는 순곤(荀緄)으로 제남상(濟南相이었다. 숙부는 순상(荀爽)인데 사공(司空) 벼슬이었다.

[주] 《속한서(續漢書)》 순숙은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왕창(王暢)괴 이응(李膺)이 스승으로 모셨으며, 낭릉후의 상이 되어 신군(神君)이라는 말을 들었다. 장번(張璠)의 《한기(漢記)》에 다르면 순숙은 박학다식하고 품행이 고결하여 이고(李固), 이응 등과 함께 뜻을 같이하는 좋은 친구로 지냈으며, 이소(李昭)에게 발탁되어 갑자기 관직에 올랐다. 검(儉), 곤(緄), 정(靖), 도(燾), 선(詵), 상(爽), 숙(淑), 부(敷)라는 8명의 아들을 두었다. 순상(荀爽)은 자를 자명(慈明)이라 불렀으며,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12세에 이미 《춘추》와 《논어》에 통달했다. 경전을 읽고 사색을 하는 것을 좋아하여 왕명을 받았어도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십 수 년 동안 학문에 열중했다. 동탁이 집권을 하여 다시 그를 불렀지만 순상은 고향에 은둔하며 지내려고 했다. 그러나 관리가 독촉을 하자 마지 못해 응낙했다. 조정에서는 그를 평원상(平原相)으로 임명했다. 원릉(苑陵)에서 관리로 있다가 광록훈(光祿勛)에 제수되었으며, 알을 보기 시작한지 3일만에 사공으로 올랐다. 순상은 포의(布衣)를 입고 있다가 관직이 오르기 시작하여 불과 95일만에 삼공(三公)의 반열에 올랐다. 순숙이 고향인 서호(西豪)에 살고 있을 때 현령인 원강(苑康)이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고양씨(高陽氏)에게 재능이 뛰어난 아들 8명이 있었다고 했으니 이 마을을 고양이라 불러야겠습니다.”

순정은 자를 숙자(叔慈)라 불렀으며 역시 덕이 아주 높았다. 명성으로는 순상에 버금갔지만 평생을 은거하며 살았다. 황보밀(皇甫謐)의 《고사전(高士傳)》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어떤 사람이 허자장(許子將)에게

“순정과 순상 가운데 누가 더 현명합니까?”

라고 물었더니 자장이

“두 사람은 모두 옥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자명은 겉으로 아름다운 소리가 나지만, 숙자는 속으로 빛이 납니다.”

순욱이 어릴 때 남양의 하옹(何顒)이 순욱을 기이하게 여기며 이렇게 말했다.

"왕을 보좌할 재능을 가지고 있구나!"[주]


[주]《전략》중상시(中常侍) 당형(唐衡) 자신의 딸을 여남(汝南) 사람 부공명(傅公明)에게 시집보내려고 했지만 공명이 승낙을 하지 않자 순욱에게 보내려고 했다. 순욱의 아버지 순곤(荀緄)은 당형의 권세를 생각하여 순욱에게 당형의 딸을 맞이하게 하였다. 사람들은 순욱이 그 사실을 속였다고 합니다.

신 송지가 보건데 《한기》를 살펴보니 당형은 환제(桓帝) 연희(延熹) 7년에 죽었고, 계산을 해보면 당시 순욱의 나이는 2살에 불과하다. 순욱이 결혼을 했던 날짜는 당형이 죽고 나서 한참 지났을 때이다. 권세를 추구하여 순곤이 아들에게 결혼을 하도록 했다고 하는 말은 사실과 다르다. 신이 생각할 때 순곤은 팔룡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명성을 얻었는데 그 명성을 구차스럽게 얻었겠는가. 그러한 그가 장차 권력가로부터 핍박을 받을 것이라는 걱정 때문에 권세를 추구했을 리가 없다. 옛날에 정홀(鄭忽)은 제치기(齊致譏)를 거슬렀으며, 전생(雋生)은 곽견미(霍見美)에게 저항을 했다. 제치기는 정홀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했으며, 곽견미는 오히려 전생의 심모원려를 높이 평가했다. 모두 교분을 나누지 않아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지만 각자 자신의 뜻을 지킬 수가 있었다. 환관들이 권력을 농간할 때에는 그들의 기세가 사해에 가득 했고 좌관(左悺)과 당형은 사람들의 생사가 그들의 입에서 좌우될 정도였다. 그러므로 당시 세상에는 “좌관은 하늘로 돌아가고, 당형이 홀로 권좌에 앉았다.”라는 말이 떠돌았다. 이는 권력이 모두 이 두 사람에게 집중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들에게 순종하면 육친이 모두 안전했지만, 그들에게 거슬리면 큰 화가 미쳤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이 그들에게 달렸으니 치욕을 감수하고서라도 안전을 도모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옛날에 장후(蔣詡)는 왕씨와 혼인을 했지만, 맑고 고고한 지조를 잃지 않았다. 순곤이 이와 같은 혼인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의 명성에 무슨 손상을 끼쳤겠는가?

영한(永漢) 원년(189), 효렴[孝廉 ; 한나라때 '현량 방정(賢良 方正)' 처럼 관직 천거 요건]으 로 천거되어 수궁령(守宮令)에 배수되었다. 동탁의 난 때, 외직으로 나가 보필하는 관리가 되길 구하였다. 항보(亢父) 현령에 제수되었으나, 마침내 관직으로 버리고 돌아와서, (고향의) 부로들에게


"영천은 4면에서 전쟁에 벌어질 수 있는 땅인데, 천하에 변란이 있어 항상 군대의 충돌이 생길 것이니, 마땅히 이곳을 떠나 오래 머무르지 마십시오"


라 했다.

고향 사람들이 많이 땅을 생각해 주저하며 머뭇거리고 있었는데, 기주목(冀州牧)으로 같은 군 사람인 한복(韓馥)이 기병을 보내 맞이하려 하게 되자, 따르는 자가 없으니, 순욱만 그의 종족들을 데리고 기주에 이르렀다. 원소(袁紹)가 이미 한복의 지위를 박탈하였으나, 순욱은 상빈(上賓)의 예로 대우했다. 순욱의 동생 순심(荀諶) 및 같은 군 사람인 신평(辛評)•곽도(郭圖)는 원소에게 임명되었다. 순욱은 원소가 끝내 대사를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 때 태조(조조)가 분무장군(奮武將軍)이 되어 동군(東郡)에 있었는데, 초평(初平) 2년(191) 순욱은 원소를 버리고 태조를 따랐다. 태조가 크게 기뻐하며


"나의 자방(子房)이로다"


라 하며, 사마(司馬)로 삼으니, 이 때 나이가 29세였다.


이 때에, 동탁의 위세가 천하를 능멸하고 있었는데, 태조가 순욱에게 묻자 순욱이


"동탁의 포학이 이미 극심하여 필히 변란으로 끝날 것이니 할만 한 것이 없습니다."


라 했다. 동탁이 이각(李傕) 등을 보 내니 관동(關東)으로 나가 가는 곳마다 노략질하고 영천•진류(陳留)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고향사람 들 중 머물러 있던 자들은 많이 살해되고 노략질 당했다.

다음 해 태조가 연주목(兗州牧)을 맡고, 후에 진동장군(鎭東將軍)이 되었는데, 순욱을 항상 사마로써 종군케 했다.

흥평(興平) 원년(194) 태조가 도겸(陶謙)을 정벌하면서 순욱을 머물러 남은 일을 맡겼다. 장막(張邈)과 진궁(陳宮)이 연주로써 배반하여 몰래 여포를 맞이하게 되었다. 여포가 이르자, 장막이 이에 유익(劉翊)을 시켜 순욱에게 알리길


"여장군은 조사군[曹使君=조조, 사군(使君) 은 한나라 때는 자사(刺史)를 칭하던 별칭이었고, 한나라 이후에는 주군(州郡)의 장관에 대한 존칭었습니다]이 도겸을 치는 것을 도우러 왔으니, 마땅히 빨리 군사와 식량을 주시오"


라 했다. 사람들이 다 의심스러워 했다.

순욱은 장막이 반란을 일으켰음을 알고, 곧 병사를 이끌고 대비를 했으며, 동군태수 하후돈을 빨리 불러 들였지만, 연주의 여러 성이 모두 여포에게 호응했다. 이때 태조의 모든 군대는 도겸을 공격하고, 남겨서 수비하던 병사는 적었고, 감독하던 장수와 큰 관리들이 장막•진궁 과 많이 통모(通謀)하였다. 하후돈이 도착하자, 그날 밤에 모반하였던 자 수십인을 주살하니, 군대가 이내 평정되었다.

예주자사 곽공(郭貢)이 군사 수만을 이끌고 성 아래에 이르르니, 혹자들은 (곽공)이 여포와 같이 모반을 일으켰다고 말하니, 군사들이 심히 두려워 했다. 곽공이 순욱을 보려 하니 순욱이 가려고 했다. 하후돈 등이 말하길


"그대는 한 주의 중요한 인물로, 가면 반드시 위험하게 될 것이니 가면 안됩니다"


라 했다. 순욱이


"곽공이 장막 등과 본래부터 결탁한 것은 아니며, 지금 빨리 온 것은 그 계책이 반드시 아직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요. 아직 정해지지 않았을 때 그를 설득하면, 풀어져서 쓸 수 없게 되어 중립을 하게 할 수 있으니, 만약 먼저 의심한다면, 저들은 장차 노하여 계책을 완성할 것이오"


라 했다. 곽공이 순욱을 만나보내는데 두려운 뜻이 없고, 견성(甄城)은 쉽게 공격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애, 마침내 병사를 이끌고 가버렸다.

또 정욱(程昱) 등과 계획을 세워, 범(范)현•동아(東阿)현을 설득해, 마침내 3 성을 보전하고 태조를 기다렸다. 태조가 서주에서 돌아와 복양에서 여포를 공격하니, 여포는 동쪽으로 달아났다.

2년(195) 태조가 승씨(乘氏)에 주둔했는데, 큰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 먹을 지경이었다.


도겸이 죽으니, 태조가 마침내 서주를 취하고, 돌아와 이내 여포를 평정하고자 했다. 순욱이 말하길

"옛날 고조[전한 고조 유방]는 관중(關中)을 보전했고, 광무제[光武帝; 후한 건국자]는 하내(河內)에 근거하여, 모두 근본을 깊고 굳건히 하여 천하를 제압하고, 나아가면 족히 적에게 이길 수 있었고, 물러나도 견고히 지킬 수 있었으니, 그래서 비록 곤경이나 패배가 있었어도 끝에는 대업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본래 연주에서 일을 시작하였고, 산동(山東)의 난을 평정하였으니, 백성들이 귀의하여 기뻐하며 감복하지 않은 자 가 없는 것입니다. 또 하수(河水=황하)와 제수(濟水)는 천하의 요충지로 지금 비록 잔멸되어 무너졌으나 오히려 쉽게 스스로 보전할 수 있으니, 이것은 또한 장군의 관중과 하내가 되는 것이니, 먼저 평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지금 이봉(李封)과 설란(薛蘭)을 격파하고, 만약 병사를 나눠 동으로 진궁(陳宮)을 친다면, 진궁은 반드시 감히 서쪽으로 돌아보지 못할 것이니, 그 사이에 병사를 이끌고 익은 보리를 거두워 곡식을 절약하고 저축한다면, 일거에 여포는 격파될 수 있습니다. 여포가 격파되고 그런 연후에 남으로 양주[揚州]와 결탁해 같이 원술(袁術)을 토벌하여, 회수(淮水)와 사수(泗水)에 임하십시오. 만약 여포를 놔두고 동으로 간다면, 많은 병사를 남겨두면 쓸 병사가 부족하고, 적은 병사를 남기면 백성들이 성을 보전하느라 땔나무도 얻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여포가 빈틈을 타서 노략질하고 포악한 짓을 행하면, 백성들의 마음은 더욱 위태로워져 유직 견성, 범현, 위읍(衛邑)만 가히 보전할 수 있고, 나머지는 우리의 소유가 아니게 되니, 이것은 연주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서주를 평정되지 않는다면, 장군께서 마땅히 어디로 돌아가시겠습니까? 또 도겸이 비록 죽는다 해도 서주는 아직 쉽게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들이 지난 해의 패배를 거울 삼아, 두려워 친근히 결의를 맺어 서로 표리(表裏) 관계가 되고 있습니다. 지금 동쪽은 모두 보리를 거두어 성벽을 견고히 하고 들을 비워(堅壁淸野) 장군을 기다리고 있는데, 장군이 공격해도 함락시키지 못하고 초략(抄略)해도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니, 십일이 안되어서 10만의 군사가 싸우지도 못하고 저절로 곤핍해 질 뿐입니다.


이전에 서주를 토벌함에 위엄과 형벌로 실행해서[주] 그 자제들이 부형의 치욕을  생각하여, 사람마다 반드시 스스로 지키며 항복할 마음이 없으니, 가서 격파할 수 있다 해도 아직 우리 소유로 할 수 없습니다. 무릇 일에 있어서 본디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하는 것은 큰 것으로 작은 것을 바꾸고 편안함을 위험으로 바꾸는 것이니, 한 때의 형세를 살펴보면 근본의 굳건하지 않음을 걱정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원컨대 장군께서는 깊이 생각하십시오"


주; 조만전(曹瞞傳)에 이르길 경사(=서울)에서 동탁의 난을 만난 이래로, 백성들이 동쪽으로 흘러 이주해가 팽성(彭城) 사이에 많이 의지하고 있었다. 태조가 오는 것을 만나자, 사수(泗水)에서 남녀 수만 명을 구덩이 파 묻어 죽이니, 강물이 흐르지 않을 지경 이었다. 도겸이 군사를 거느리고 무원(武原)에 주둔하니 태조가 진격할 수 없었다. 군사를 이끌고 사수 남쪽에서부터 취려(取慮), 저릉(雎陵), 하구(夏丘)의 여러 현을 공격하고 모두 도륙(屠戮)했다. 닭과 개도 모두 없어지고, 텅빈 읍에는 다시 지나가는 행인도 없었다.

라 했다. 태조가 이내 그쳤다. 보리를 크게 거두고, 다시 여포의 싸우면, 병사를 나눠 여러 현을 평정하게 했다. 여포는 패주하고, 연주는 마침내 평정되었다.

건안(建安) 원년(196) 태조가 황건을 격파했다. 한 헌제(獻帝)가 하동(河東)에서 낙양(洛陽)으로 돌아왔다. 태조가 (황제를) 받들어 맞아 허(許)에 도읍을 정하는 것을 의논했는데, 혹자가 산동은 아직 평정되지 않았고, 한섬(韓暹)과 양봉(揚奉)이 새로 천자를 데리고 낙양에 도착하고 북으로 장양(張楊)과 연계되어 있어서, 끝내 제압할 수 없다고 했다.

순욱이 태조가 권하길

"옛날 진(晉) 문공(文公)이 주(周) 양왕(楊王)을 맞이하자, 제후들이 그림자처럼 따랐으며, (한) 고조는 동쪽으로 정벌하면서 의제[義帝 ; 진(秦)에 맞서 항우 등이 봉기하면서 옹립한 초 회왕. 나중에 진을 멸망시키고 나서 회왕을 의제로 높이면서 몰래 시해했다]를 위해 소복을 입자 천하의 인심이 귀의했습니다. 천자께서 돌아다니시고 난 이후로, 장군께서 먼저 의병을 주창셨지만, 다만 산동(山東)에 우환과 반란이 있어 능히 멀리 관우(關右=관서)로 달려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장수를 나눠 파견해 위험을 무릅쓰고 사신을 통하게 하면, 비록 (조정) 밖에서 어려움을 막고 있지 만 마음이 왕실에 가 있지 않은게 없으니, 이것은 장군이 천하를 바로잡을려는 본래 뜻입니다. 지금 황제의 어가가 돌아와 있지만, 동경(東京=낙양)은 잡초가 무성합니다. 의로운 선비에겐 근본을 보존하려는 생각이 있고, 백성들은 옛 일에 감읍해 슬픔을 더합니다. 진실로 이 때에 주상을 받들어 백성들의 여망을 따르다면, 이는 큰 순리입니다. 지극히 공정함을 붙잡아 영웅과 준걸들을 귀복시킨다면, 이는 큰 책략입니다. 대의를 끼고 영준을 불러들인다면 이는 큰 덕입니다. 천하에는 비록 반역의 무리가 있지만, 반드시 걱정거리가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한섬•양봉이 어찌 감히 해가 되겠습니까! 만약 이 때 계책을 정하지 못하면, 사방에서 딴 마음들이 생겨나 후에 비록 이를 걱정한다고 해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라 했다.

태조가 마침내 낙양에 이르러 천자를 받들고 허(許)에 도읍했다. 천자가 태조를 대장군(大將軍)에 배수하고 순욱을 시중(侍中)으로 승진시켜서 상서령(尙書令)을 관장했다.

[원문은 進彧爲漢侍中,守尙書令 시중과 상서령 모두 관직의 이름입니다. 그 런데 굳이 한(漢) 시중(侍中)이라 한 것은 다른 군벌이나 군국제 아래서 국(國)이 아닌 한나라 조정의 시중직을 맡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한(漢)을 덧붙여 놓은 듯합니다. 문제는 수상서령(守尙書令)이란 구절입니다. 보통 관직앞에 나오는 '수(守)'는 소위 행수법(行守法)이란 일종의 관직체계와 연결되는데, 이것은 관계(관등)과 관직이 일치하지 않을 때 씁니다. 계고직비(階高職卑)라 해서 관계 는 높은데 그에 해당하는 관직이 자신의 관계보다 낮을 때는 관직명 앞에 행(行)자를 붙이고, 그 반대 의 경우에는 수(守) 자를 붙입니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후한말에 행수법이 시행되지 않을 걸로 알고 있고 시중과 상서령의 정확한 직급을 몰라서 이것을 얼케 이해해야 될는지 좀 의문입니다. 다만 그냥 일반적인 '수(守)'에도 '서리(署理)하다•관장(管掌)하다'의 뜻도 있어서 그런 의미로 해석했습니다] .

항상 중용을 지키며 엄중함을 가졌다.


《전략(典略)》

순욱은 아랫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자신을 낮추었으며, 자리에 앉아서 사람들을 대하지 않았다. 대각(臺閣)에서 정치에 관한 논의를 할 때에는 자신의 사사로운 생각을 드러내지 않았다. 순욱에게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조카가 있었다. 어떤 사람이 순욱에게 이렇게 물었다.

“일을 처리할 때 조카와 상의하지 않고 왜 반드시 의랑과 함께 논의합니까?”

순욱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관직이란 재능이 드러나야 출세를 하는 법이오. 만약 그대의 말처럼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소?”

순욱의 공평하고 공정한 마음은 이와 같았다.

태조가 정벌 때문에 밖에 있으면서, 군국(軍國)의 일을 모두 순욱과 계획했다.

《전략》: 순욱의 사람됨이 아주 훌륭하고 아름다웠다고 했다.

평원예형전(平原禰衡傳), 장형문사전, 부자: [[예형전]]으로 분리

태조가 순욱에게 묻길

"누가 능히 경을 대신해 나를 위해 계모를 짤 수 있겠소?"

라 하니 순욱이

"순유(荀攸)와 종요(鐘繇)입니다."

라 했다. 이에 앞서 순욱이 책모(策謀)를 짜는 선비를 말하면서 희지재(戱志才)를 천거했다. 희지재가 죽자 또 곽가(郭嘉)를 천거했다. 태조는 순욱이 사람을 알아본다 고 여겨서, 여러 (순욱이) 천거해 이른 사람들은 모두 합당한 직위를 가졌지만, 오직 양주(楊洲)자사가 된 엄상(嚴象)과 양주(凉州)자사가 된 위강(韋康)만이 후에 잘못되어 패망했다. [주]
 
[주] 삼보결록에 이르길: 엄상은 경조(京兆) 출신으로 자를 문칙(文則)이라 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대담했으며 지혜가 뛰어났다. 어사중승이 되어 군대를 이끌고 양주로 원술(袁術)을 토벌하러 갔으나 마침 원술이 병으로 사망하자 양주자사로 임명되었다. 건안 5년 손책(孫策)이 보낸 여강태수(廬江太守) 이술(李述)에게 피살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8세였다. 엄상과 동향인이었던 조기(趙岐)는 《삼보결록(三輔決錄)》이라는 책을 지었으나 당시의 사람들이 그 진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숨기고 있다가 엄상에게만은 몰래 보여주었다고 한다.

위강(韋康)도 경조 출신으로 자를 원장(元將)이라 했다. 공융(孔融)은 위강의 아버지 위단(韋端)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전에 원장이 와서 만나보니 깊고 넓은 재능이 여실히 드러나고 고아한 풍도와 강직함을 갖추고 있으니 천하에 보기 드문 인재라 할 만합니다. 또 중장(仲將; 위탄)이 왔을 때 보니 성품이 아름답고 올곧으며 박학하고 총명함에도 불구하고 신실하기까지 하니 가문을 보존할 인재라 할 만합니다. 두 개의 진주와 같으니 근자에 보기 드문 진귀한 인물입니다.”

위단은 양주목(凉州牧)을 따라서 태복(太僕)이 되었으며, 위강은 나중에 양주자사가 되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집안의 영예라고 칭송했다. 나중에 마초(馬超)가 양주를 포위했을 때 굳게 지켰지만 구원군이 도착하지 않아서 마침내 마초에게 피살되었다. 중장의 이름은 탄(誕)이었으며 그에 관한 기록은 《유소전(劉邵傳)》에 남아 있다.

태조가 천자를 영접한 이후로 원소(袁紹)는 내심 불복(不服)할 마음을 품었다. 원소가 이미 하삭(河朔=황하 이북 지역)을 병합하자, 천하가 그 강성함을 두려워했다. 태조는 때마침 동으로 여포를 걱정하고 남으로 장수(張繡)를 막고 있었는데, 장수가 완(宛)성에서 태조군을 패배시켰다.
 
원소가 더욱 교만하져 태조에게 글을 보냈는데 그 말이 패악하고 오만하였다. 태조가 크게 노하여 출입하는 동정(動靜)하는 평소와는 달라 많은 사람들이 모두 장수(張繡)일로 실익(失益)한 것 때문이라 생각했다. 종요가 이를 순욱에게 묻자


"공(公=태조)께선 총명하므로 반드시 지난 날의 허물을 생각하는게 아니라, 아마도 다른 생각이 있을 것이오"


라 했다. 이에 태조를 뵙고 물어보니 태조가 이내 원소의 편지를 순욱에게 보여주며


"이제 장차 저 불의한 자를 토벌하고 하는데, 힘이 상대가 되지 않으니, 어찌해야 겠소?"


라 묻자, 순욱이 말하길

"옛부터 성패(成敗)란 것은 진실로 그 재능(才)에 달린 것이어서 비록 약하더라도 반드시 강해지고, 진실로 그런 사람이 아니라면 비록 강하더라도 쉽게 약해지는 것이니, 유방과 항우의 존망(存亡)에서 족히 살펴볼 수 있습니다.

지금 공과 천하를 다투는 자는 오직 원소뿐입니다. 원소의 모습은 겉으로는 관대하나 안으로는 꺼리고, 남에게 일을 맡겨도 그의 마음을 의심하지만, 공은 명달하고 구애되지 않아 재능으로서만 그 마땅한 바를 맡기니, 이것은 도량에서 이긴 셈입니다. 원소는 지지부단하여 결단이 적어 후에 기회를 잃고 하는데, 공은 대사를 결단하며 임기응변으로 정해진 방법이 없으니, 이것은 모책으로 이긴 것입니다. 원소가 군대를 거느림에 관대하고 느슨하여 법령이 제대로 서지 않으니 비록 사졸들이 많다고 해도, 그 실상은 쓰기 어렵지만, 공은 법령이 이미 분명하고 상벌을 반드시 행하여 사졸들이 비록 적지만, 모두 죽을 때까지 싸우니, 이것은 무력에서 이긴 셈입니다. 원소는 선세(先世)의 자금에 힘입어 조용히 지혜로써 꾸미고, 명예를 거두어 들이기에 그래서 선비들 중 능력은 작지만 묻기 좋아하는 자들이 많이 그에게 귀부하는데, 공은 지극한 인자함으로 남을 대하고, 성실한 마음을 높여 헛된 아름다움을 만들지 않고 몸소 근검함을 행하여, 공이 있는 자들과는 아끼는 바가 없으므로 천하의 충정(忠正)과 실효(實效)가 있는 선비들은 모두 기용되길 원하니, 이것은 덕으로 이긴 것입니다.

무릇 네가지 이기는 것으로 천자를 보필하고, 의를 가지고 정벌하면 누가 감히 따르지 않겠습니까? 원소의 강성함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라 했다. 태조가 기뻐했다.
 
순욱이 말했다

"여포를 먼저 취하지 않으면, 하북(河北) 또한 쉽게 도모하지 못합니다."

태조가

"그러나 내가 걱정되는 것은 또 원소가 관중을 침범해 소란스럽게 하고, 강(羌)•호(胡)족에게 난을 일으키게 하며, 남으로 촉한을 유인할까 두려우니, 이것은 나 혼자 연주와 예주로써 천하의 5/6를 대항하는 것이오. 장차 어찌하면 좋소?"

라 하니, 순욱이

"관중의 장수는 십수명이지만, 능히 서로 하나로 하지 못하고, 오직 한수(韓遂)와 마초(馬超)만이 가장 강성합니다. 저들이 산동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것을 보면, 필히 자기 군대를 껴앉고 스스로를 보호할 것입니다. 만약 은덕(恩德)으로 위무하고, 사신을 보내 화해하여 이를 서로 유지하면 비록 오래토록 안정되지 않더라도, 공이 산동을 안정시킬때까지 충분히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종요는 가히 서쪽 일을 맡길 수 있으니, 공께서는 걱정할 바가 없습니다"

라 했다.
 
3년(198) 태조가 이미 장수를 격파하고 동쪽으로는 여포를 사로잡아 서주를 평정하여, 마침내 원소와 서로 항거하게 되었다. 공융(孔融)이 순욱에게 일러 말하길

"원소는 땅이 넓고 병사가 강합니다. 전풍(田豊)•허유(許攸)는 지모의 선비로 그를 위해 계책을 짜고, 심배(審配)•봉기(逢紀)는 충성을 다하는 신하로 자신의 직임을 맡고 있으며, 안량(顔良)과 문추(文醜)는 용맹함이 삼군(三軍)중에 으뜸이라 그 병사를 통솔하고 있으니, 아마 이기기 어려울 것이오!"

라 했다.
 
순욱이 말하길

"원소의 병력은 비록 많은 법령이 정비되어 있지 않소. 전풍은 강하나 윗사람을 범하고, 허유는 탐욕스러워 다스리지 못하오. 심배는 제멋대로 하여 지모가 없고, 봉기는 과감하나 스스로를 판단하니, 이 두 사람을 남아 뒷일을 처리케 한다면, 허유의 가족들이 법을 범하여 반드시 풀려날 수 없을 없이며, 풀려나지 못하면 허유는 반드시 변란을 일으킬 것이오. 안량과 문추는 한갓 필부의 용맹일 뿐이어서, 가히 한번 싸워 사로잡을 수 있소"

라 했다.
 
5년(200) 원소의 연이어 싸웠다. 태조가 관도(官渡)를 보전하고 있자, 원소가 이를 포위하였다. 태조군의 군량이 막 다해가려 하니, 순욱에게 글월을 보내 허도로 돌아가 원소를 유인하고자 하는 방법을 의논했다.

순욱이 말했다.

"지금 군량이 비록 적더라도, 초와 한이 형양(滎陽)과 성고(成皐) 사이에 있던 때만 못합니다. 그 때 유방과 항우는 먼저 물러서려 하지 않았으니, 먼저 물러서는 것은 곧 세력상 굴복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께서는 1/10의 군사로서 땅을 구획지어 지키고 있으며, 그 목을 움켜쥐고 나아가지 못하게 한 지 이미 반년이나 되었습니다. 정황을 보아하니 세력이 고갈되어 필히 장차 변란이 생길 것이니, 이는 빼어난 계책을 쓸 때이므로 놓쳐서는 안됩니다."

라 했다. 태조가 이내 머물렀다.

마침내 날랜 병사로 원소가 따론 주둔한 곳을 습격하여, 그 장수 순우경(淳于瓊) 등을 베어버리니, 원소가 패퇴하여 달아났다. 심배는 허유의 가족이 법을 어겼다 하여 그 처자를 잡아들이자, 허유는 노하여 원소를 배반했다. 안량과 문추는 진영에 임해 머리를 준 꼴이 되었으며, 전품은 간언하다 주살되었으니, 이 모든 것이 순욱이 계책을 세운 바와 같았다.
 
6 년(201) 태조가 동평(東平)군 안민(安民)현에 가 곡식을 받았는데, 군량이 적어 하북과 서로 상대하기에 부족하여, 원소가 최근 격파된 틈을 타서 그 사이 유표를 쳐서 토벌하고자 했다. 순욱이 말했다

"지금 원소는 패배하여 그 군사들의 마음이 떠났으니, 마땅이 그의 곤란함을 타서 마침내 평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연주와 예주를 등지고 멀리 장강과 한수(漢水)에 까지 군사를 이끌고 갔다가, 원소가 그 나머지 무리를 거둬 들여 빈틈을 타 후방에서 나온다면, 공의 일은 성사되지 못할 것입니다."

태조가 다시금 하수(河水=황하) 가에 주둔했다. 원소가 병으로 죽었다. 태조가 하수를 건너 원소의 아들 원담(袁譚)•원상(袁尙)을 공격하였으나, 고간(高幹)과 곽원(郭援)이 하동(河東)지역을 침략하자, 관우(關右=관서지역)가 진동했는데 종요(鐘繇)가 마등 등을 거느리고 이를 격파했다. 이 말이 『종요전』에 있다.
 
8년(203) 태조가 순욱의 전후의 공을 기록해, 표를 올리니 순욱을 봉하여 만세정후(萬歲亭侯)로 삼았다. [주]

[주] 순욱별전의 태조가 올린 표에 이르길:

"신은 뛰어난 공을 가릴 때에는 모략을 기준으로 포상을 결정한다고 들었습니다. 야전에서의 전적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묘당(廟堂)을 넘어서지 못하고, 아무리 많은 전투를 펼쳤더라도 국가를 세운 공로보다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곡부(曲阜)에는 큰 은전을 하사했지만, 영구(營丘)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시중수상서령(侍中守尙書令) 순욱은 덕행을 쌓아왔으며, 어려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과실이 없었습니다. 세상이 어지럽게 되자 그는 오로지 충성심으로 정치에 투신했습니다.

신은 처음 의병을 일으켰을 때부터 사방으로 주유하며 간적들을 정벌하면서 순욱과 한 마음으로 전력을 다했습니다. 순욱은 신의 측근에서 뛰어난 전략을 내놓았으며, 여러 가지의 책략을 제시했습니다. 순욱이 내놓은 방안이 실효를 거두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순욱의 공업으로 신은 여러 차례 어려움에서 벗어났습니다. 그의 재능은 구름을 가르고 해와 달이 빛나는 것과 같았습니다. 폐하께서 허도로 행차하시자, 순욱은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면서 군국기무를 담당했으며, 충직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오로지 폐하께서 평안하시기를 바라며 마치 살얼음을 디디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여러 가지의 일을 치밀하게 연구하며 많은 일을 처리했습니다. 천하기 지금처럼 안정된 것은 순욱의 공입니다. 마땅히 높은 관작을 하사하여 그의 공을 으뜸으로 표창해야 합니다."

그러나 순욱이 야전에서 공을 세우지 못했다고 사양하자 조조의 표는 시행되지 못했다. 조조는 순욱을 불러서 이렇게 말했다.

“그대와 더불어 함께 일을 해오면서 조정을 바로 세울 때, 그대는 함께 페하를 크게 보필했으며, 그대와 함께 수많은 인재들을 추천했고, 그대와 함께 여러 가지의 계책을 세웠으며, 그대와 함께 비밀리에 모략을 꾸민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다. 야전에서 공을 세우지 못했다는 말로 사양을 하지 마시오.”

순욱도 더 이상 사양을 하지 못하고 받아들였다.
 
9년(204) 태조가 업성(城)을 함락시키고, 기주목(冀州牧)을 맡았다. 어떤 자가 태조를 설득하길 마땅히

"옛 제도를 부활해 구주(九州)를 두면, 기주가 담당하는 곳이 광대하여 천하가 복종할 것입니다"

라 했다.

태조가 이 의견을 따르려 하자, 순욱이 말하길

"이 같이 하면, 기주는 응당 하동(河東)•풍익(馮翊)•부풍(扶風)•서하(西河)군과 유주•병주의 땅을 얻게 되어, (땅을) 빼앗긴 자가 많을 것입니다. 전일에 공께서 원상을 격파하고 심배를 사로잡아 천하가 진동하고 놀라서, 사람마다 절로 자신의 토지를 보전하지 못하고 그 병사를 지킬 수 없을까 두려워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땅을 나눠 기주에 속하게 하면, 장차 모두 마음이 동요하게 될 것입니다. 또 사람들이 관우(관서지방)의 여러 장수들에게 폐관지계(閉關之計; 관문을 닫는 계책, 관중지역은 동서남북에 4곳의 험로에 관문이 설치되어 관중이라 부릅니다.)로 설득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사실을 듣는다면, 반드시 차례대로 빼앗기게 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루 아침에 변란이 생겨 비록 잘 지키던 자가 있더라도, 도리어 서로 협박해 그른 일을 저지를 것이니, 즉 원상은 관대했으나 죽었고 원담은 다른 두 마음을 품으며, 유표는 마침내 장강과 한수 사이를 보전하게 될 터이니, 이러면 천하는 십게 도모하지 못합니다. 원컨대 공께서는 급히 병사를 이끌고 먼저 하북을 평정하고, 그런 연후에 옛 수도를 수복하고, 남으로 형주에 임하여 조공이 들어오지 않음을 꾸짖으신다면, 천하가 모두 공의 뜻을 알게 되어, 사람마다 절로 편안해질 것입니다. 천하가 크게 안정되고 난 후에 이에 옛 제도를 의논한다면, 이것이 사직의 장구한 이익입니다"

라 했다. 태조가 마침내 구주의 의논을 그치게 하였다.
 
이 때 순유(荀攸)가 항상 모주(謀主)가 되었다. 순욱의 형인 순연(荀衍)은 감군교위(監軍校尉)로서 업성을 지키며, 하북의 일을 모두 감독하였다. 태조가 원상을 정벌할 때, 고간(高幹)일 은밀히 병사를 보내 업성을 습격할 것을 모의했는데, 순연이 반역을 알아차리고 모두 다 주살하니, 그 공으로 열후에 봉해졌다.

《순씨가전(荀氏家傳)》: 순연(荀衍)은 자를 휴약(休若)이라 했으며 순욱의 3째 형이었다. 순욱의 4째 형인 순심(荀諶)은 자를 우약(友若)이라 했으며 그에 관한 기록은 《원소전(袁紹傳)》에 있다. 진군(陳群)과 공융(孔融)이 여남(汝南)과 영천(穎川)의 인물에 대해 토론을 할 때 진군은 이렇게 말했다.

“순문약, 공달(公達), 휴약, 우약, 중예(仲豫)는 당대에 상대를 할 사람이 없다.”

순연의 아들 순소(荀紹)는 태복이 되었으며, 그의 아들 순융(荀融)은 자를 백아(伯雅)라 했는데 왕필(王弼), 종회(鍾會) 등과 나란히 명성을 날렸다. 순융은 낙양령이 되었으며, 대장군의 군사에 참여했고, 왕필, 종회 등과 함께 《역경》과 《노자》에 대해 토론을 한 것이 세상에 전해진다. 순심의 아들 순굉(荀閎)은 자를 중무(仲茂)라 했으며, 태자문학연(太子文學掾)이 되었다. 당시에 갑을(甲乙)에 관해 의문이 가는 점을 토론했을 때 순굉은 종요(鍾繇), 왕낭(王朗), 원환(袁渙) 등과 견해가 달랐다. 문제는 종요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원환과 왕낭은 국가적인 선비로써 입술과 치아와 같은 사이인데도 순굉은 고집스러워 이러한 스승들과 첨예하게 다투고 있다. 게다가 군후와도 적대시히고 있으니 주면 사람들이 염려하고 있다.”

결국 순연은 황문시랑(黃門侍郞)으로 강등되었다.

순굉의 종손 순휘(荀煇)는 자를 경문(景文)이라 했으며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가 되어 역시 이름을 날렸다. 가충(賈充)과 함께 음률(音律)을 확정했으며, 《역집해(易集解)》라는 저술을 남겼다.

중예(仲豫)는 이름이 열(悅)이었다. 랑릉장(朗陵長: 朗陵의 우두머리?) 순검(荀儉)의 막내 아들이고, 순욱의 종부형이다.

장번(張璠)의 《한기》에는 순열을 청허(淸虛)하고 고요하여 저술을 남기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건안 초에 비서감(秘書監), 시중을 역임했으며, 조칙을 받아 《한서(漢書)》를 토대로 《한기》 30편을 산정(刪定)했다. 그가 편집한 《한기》는 사안의 옳고 그름을 명백하게 정리했으며, 핵심을 잘 짚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태조가 그 딸을 순욱의 장자 순운(荀惲)에게 시집보냈는데, 후에 안양공주(安陽公主)라 칭해졌다. 순욱과 순유는 같이 귀중해졌지만, 모두 겸손하고 검소해, 녹봉은 종족이나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집에 남은 재산이 없었다.
 
12년(207) 다시 순욱의 식읍을 1천호 늘려 (이전과) 합쳐 2천호가 되게 하였다. [주]

[주]《욱별전(彧別傳)》:

전에 원소가 교전(郊甸)을 침범하여 관도(官渡)에서 전쟁이 벌어졌을 때 아군은 군사의 수도 적고 군량미도 떨어졌습니다. 신은 허도로 돌아오고 싶어서 순욱에게 편지를 썼지만, 순욱이 신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순욱은 어떤 점이 우리에게 유리한지를 개진하여 원소를 토벌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여 신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신은 그의 말을 듣고 어리석은 염려를 버리고 드디어 대역죄인을 물리치고 그 무리를 사로잡았습니다. 순욱은 승패의 기틀을 알아내고 능력은 불세출의 전략을 수립했던 것입니다.

원소를 격파하여 패퇴시켰을 때 신도 군량이 다 떨어져서 하북을 더 이상 도모할 수가 없었습니다, 신은 남쪽으로 유표를 토벌하고자 했지만, 순욱은 다시 득실을 분석하여 신을 저지했습니다. 신은 순욱의 설득에 따라서 마음을 바꾸어 드시어 흉족(兇族)을 삼키고 4개의 주를 평정할 수가 있었습니다. 신이 만약 당시에 관도에서 후퇴했다면 원소는 반드시 북을 치며 진격을 했을 것이고, 그렇게 되었더라면 형세도 뒤집어져서 승리를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나중에 만약 남정을 했더라면 연주와 예주를 잃게 되었을 것이며, 남쪽에서도 곤란한 지경에 빠져 본거지를 잃었을 것입니다. 순욱의 이러한 2가지 계책으로 망할 처지에서 생존할 수가 있었으며, 화를 입을 상황에서 오히려 복을 얻었으니 그의 뛰어난 모략과 남다른 공로는 신으로서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전에 선제께서는 지시에 따라서 공을 세운 것을 귀하게 여기셨으며, 자기 마음대로 상을 내리는 것을 박하게 시행하셨습니다. 옛 사람들은 장막에서 계책을 꾸미는 것을 높이 평가했으며, 전장에서 공격을 하여 적을 깨뜨리는 것을 그보다 못하다고 여겼습니다. 존에 상과 녹봉을 받은 것은 순욱의 빼어난 공로를 생각하면 너무도 미약하오니 거듭 그의 공을 가늠하시어 적절하게 식읍을 하사하시기 바랍니다.

순욱이 다시 정중하게 사양하자 조조는 그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책모에 대한 보답은 두 번 표를 올리는 것으로도 모자란다. 전후 두 차례나 겸손하게 사양을 하니 노련(魯連)선생을 사모하기 때문인가? 이는 성인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라도 드문 일이다. 옛날에 개자추(介子推)가 ‘남의 재물을 빼앗아도 도둑이라 한다(竊人之財, 猶謂之盜).’고 했다. 하물며 그대는 남몰래 모략을 여러 사람들을 평안하게 했으며 그로 인해 내가 빛나게 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지 않은가? 두 번 다 다시 사양을 한다면 이는 겸양도 너무 지나친 일이다.”

조조는 다시 표를 올려 순욱을 삼공(三公)으로 삼으려 했지만 순욱은 순유를 보내 한사코 사양했다. 몇 차례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자 조조는 더 이상 표를 올리지 않았다.

태조가 장차 유표를 토벌하려고 순욱에게 어디로 출정해야 하는지 계책을 물으니 순욱이

"지금 화하(華河=중국, 중원)는 이제 평정되었으니 남쪽에서는 곤란함을 알 것입니다. 완성(宛城)가 엽(葉) 사이로 나와 샛길로 가벼이 진군한다면, 불의의 곳에서 엄습하게 될 것입니다"

라 했다. 태조가 마침내 출정했는데, 유표가 병들어 죽었다. 태조가 순욱의 계책처럼 완성과 섭현 사이를 곧장 내달려 가자, 유표의 아들 유종(劉琮)를 형주를 들어 항복했다.
 
17 년(212) 동소(董昭) 등은 태조의 작위로 국공(國公)으로 올리고 구석을 갖추어 남다른 공훈을 표창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은밀히 순욱에게 자문하였다. 순욱은 태조가 본래 의병을 일으킨 것은 조정을 바로잡고 나라를 편안히 하기 위함이어서, 충정(忠貞)의 진심함을 잡아 물러나 겸양하는 내실을 지켜야 하므로, 군자는 덕을 남을 사랑해야지 이와 같이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했다. 태조가 이로 인해서 마음속으로 평안할 수 없었다. 손권을 정벌할 때, 표를 올려 순욱이 초( )에서 군사를 위로하길 청하여, 이로 인해 문득 순욱을 남겨두고 시중 광록대부(光祿大夫) 지절(持節)로서 승상의 군사에 참여케 했다. 태조의 군대가 유수(濡須)에 이르렀을 때 순욱은 병이 걸려 수춘(壽春)에 남았는데, 걱정하다 죽으니, 이 때 나이가 50이었다. 다음 해 태조는 마침내 위공(魏公)이 되었다.

[주] 『위씨춘추(魏氏春秋)』에 이르길 태조가 순욱에게 음식을 내렸는데, 열어 보니 빈 공기여서, 이에 약을 먹고 죽었다. 함희(咸熙) 2년(265) 순욱에게 태위(太尉)를 추증했다. 시호를 경후(敬侯)라 했다.

《욱별전》에 이르길 순욱은 상서령이 된 이후에 자신이 한 일을 항상 글로 써서 남겨두었다가 죽을 때가 되자 모두 불로 태워 없앴다. 그러므로 그의 기책과 밀모는 알 수가 없게 되었다. 당시는 정벌을 통해 창업을 하느라고 여러 가지 제도를 다시 수립해야 했다. 순욱은 조조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한 적이 있다.

“옛날에 순(舜)은 우(禹), 직(稷), 설(契), 고요(皐陶)에게 일을 나누어주어 각자 여러 가지 업적을 쌓도록 했습니다. 또한 교화와 정벌을 함께 활용했습니다. 한고조께서는 처음에 금혁방은(金革方殷)을 하면서도 백성들을 교화하는 능력을 갖춘 사람을 뽑았습니다. 숙손통(叔孫通)6)에게 군사들에게 예의를 익히도록 한 것이 그 사례입니다. 세조(世祖)께서는 창을 버리시고 예술을 강론하셨으며 도에 대한 논의를 더욱 강화하시자 군자들은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인(仁)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지금 공께서는 밖으로는 무공으로 천하를 평정하고, 안으로는 문학을 크게 일으켰습니다. 무기를 거두어 천하를 화목하게 하고, 대도가 세상에 펼쳐졌으며, 국난이 종식되었습니다. 육예로서 통치를 하니 이는 희단(姬旦)7)이 주(周)의 재상이 되어 한 일보다 더 빨랐습니다. 이미 덕을 세우고 공을 세웠으며, 또 말을 한 것도 세웠으니 실로 중니(仲尼)8)의 저술에 나타난 의의와 같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당대의 제도를 드러내고 후세에 이름을 떨치게 되었으니 어찌 이보다 성실한 일이 있겠습니까? 만약 군사에 대한 일을 끝내고 제도를 만드는 일을 추진함으로써 통치와 교화를 살피려고 하신다면 아직도 하지 못한 일이 많습니다. 마땅히 유학(儒學)에 통달한 인재를 천하에서 널리 모집하고, 그들로 하여금 육경(六經)을 연구하고 강론하게 하며, 전기(傳記)를 간행하고 고금의 학문을 보존하되, 번잡한 것을 없애어 참다운 성인의 학문을 하나로 정립해야 하며, 아울러 예학을 일으켜 점차 교화를 두텁게 하는 일이 왕도와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순욱이 조조와 함께 정치의 도에 대해 토론한 것이 이와 같았으며, 조조도 항상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순욱은 덕행을 두루 갖추었으며, 정도가 아니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명분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겉치레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내외의 영걸과 준재들이 모두 자신의 조종(祖宗)으로 여겼다. 사마의(司馬懿)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책에서 전하는 오랜 일들을 나는 목전에서 나의 눈과 귀로 보고 들었다. 백 수 십년 동안 순령군(荀令君)에 미치는 현재(賢才)는 없었다.”

순욱은 전후로 뛰어난 인재를 여러 사람 추천했다. 그 가운데 고향 사람으로는 순유(荀攸), 종요(鍾繇), 진군(陳群)이 있었으며, 해내에서는 사마의(司馬懿)가 있었다. 또 당대에 이름난 사람으로는 치려(郗慮), 화흠(華歆), 왕낭, 순열(荀悅), 두습(杜襲), 신비(辛毗), 조엄(趙儼)과 같은 사람도 있었다. 이들 가운데 공경의 반열에 오른 사람만 10명이 넘었다. 인재 가운데에는 일반적인 기준에 부합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희지재(戱志才), 곽가(郭嘉) 등은 세속의 법도를 어기기도 했으며, 두기(杜畿)는 오만하고 학문이 얕았지만 모두 뛰어난 지혜와 책략으로 천거되어 각자 이름을 날렸다. 순유도 나중에 위의 상서령이 되어 역시 많은 인재를 추천했다. 조조는 이 두 사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순(二荀)이 논한 사람은 더욱 믿을 만하다. 나는 영원히 그것을 잊지 못할 것이다.”

종요는 안자(顔子)가 없는 상황에서 구덕(九德)을 갖추고 있으면서 허물이 없는 사람이 없었지만, 순욱이야말로 바로 그러한 사람이라고 했다. 어떤 사람이 종요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대는 순욱의 우아하고 중후함을 안자와 비유하면서 자신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 했는데, 무슨 근거로 그러한 말을 하십니까?”

종요는 이렇게 말했다.

“무릇 명군은 신하를 스승으로 여기고, 그 다음으로는 그와 우정을 나눕니다. 태조는 총명하기가 짝이 없을 정도이지만, 큰 일이 있을 때에는 항상 순군에게 먼저 자문을 구합니다. 이는 옛날 사우(師友)의 의리나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들은 명을 받아 행동을 하지만, 순욱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행동을 하더라도 주군의 뜻과 그리 멀지 않습니다.”

《헌제춘추(獻帝春秋)》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동승(董承)이 죽고 나자 복황후(伏皇后)는 아버지 복완(伏完)에게 편지를 보내 사공(司空)9)이 동승을 죽였으니 황제께서 원한을 갚아달라고 한다고 했다. 복완은 그 편지를 순욱에게 보여주었더니 순욱이 그 편지를 보고 증오하면서 오랫동안 감추고 말을 하지 않았다. 복완이 처의 동생인 번진(樊晋)에게 편지를 보여주자 번진은 그 사실을 조조에게 알려주었다. 조조는 몰래 대비를 했다. 순욱은 그 사실이 발각될까 두려워서 스스로 내막을 밝히려고 사람을 업(鄴)으로 파견하여 조조의 딸을 황제의 배필로 삼으라고 권고했다. 조조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조정에는 복황후가 있는데, 내 딸을 어떻게 주상의 배필로 삼겠는가? 나는 미미한 공으로 재상의 지위에 올랐지만, 어찌 또 딸의 힘을 빌려서 권세를 누리겠는가?”

순욱이 이렇게 말했다.

“지금 복황후는 자식을 낳지 못했으며, 성정이 흉악하여 항상 그 아버지에게 편지를 써서 흉악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황후를 폐해야 합니다.”

조조는 이렇게 말했다.

“경은 전에 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는가?”

순욱이 놀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전에 이미 공에게 그렇게 말 한 적이 있습니다.”

조조는 화가 나서 이렇게 말했다.

“그것이 아무리 작은 일이라지만 내가 잊을 리가 있겠는가?”

순욱은 다시 깜짝 놀라며 이렇게 말했다.

“자세히 생각해보니 공에게 그러한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전에 공께서 관도에서 원소와 대치하고 있을 때 집안 일로 격정을 많이 하지나 않을까 염려가 되어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조조가 다시 꾸짖듯이 말했다.

“관도에서 일이 끝난 후에는 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는가?”

순욱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사죄를 할 뿐이었다. 조조는 이 일로 순욱에게 한을 품게 되었지만 겉으로 용서하는 척 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몰랐다. 동소가 귀공을 세우자고 건의를 했을 때 순욱은 동의를 하지 않고 조조를 찾아가 자신의 생각을 말하려고 했다. 군사들에게 음식을 보내 위로를 하도록 하라는 조칙이 내려지자 잔치가 끝나기를 기다렸던 순욱은 뒤에 남아서 잠시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조조는 순욱이 봉사(封事)에 관한 일을 말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고 모두 읍을 하고 물러나도록 했다. 순욱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순욱이 수춘(壽春)에서 죽자 수춘을 도망친 어떤 사람이 손권(孫權)을 찾아가 조조가 순욱에게 복황후를 죽이라고 했지만 순욱은 그 말을 따르지 않고 자살했다고 말했다. 손권은 그 사실을 촉(蜀)에 알렸다. 유비(劉備)는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

“늙은 도적이 죽지 않았으니 환란은 아직도 끝이 나지 않았다.”

// 신 송지가 보건데, 《헌제춘추》에는 순욱이 복황후의 일을 고발하려고 업으로 사람을 보냈으며, 태조에게 이미 전에 말한 적이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말이 막히자 관도에서의 일을 에둘러 변명하다가 사죄를 했다고 했으니, 비록 용렬한 사람이라도 그와 같은 짓을 하지 않을 것인데, 하물며 순욱과 같은 현명한 사람이 그런 짓을 했겠는가? 일반 사람들이 갖가지말을 하는 것은 모두 하찮은 식견에서 나온 것에 불과하다. 저와 같은 무리들이 내뱉는 말이란 대체로 군자를 헐뜯는 것에 불과하다. 허망한 말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원위(袁暐)가 가장 심하구나!

순욱의 아들은 순운(荀惲)인데 작위를 이었고, 관직은 호분중랑장(虎賁中郞將)에까지 이르렀다. 처음 문제(文帝=조비)와 평원후(平原侯) 식(植=조식)에게 모두 (누가 왕재로 적합하냐에 대한) 비교론이 있었는데, 문제는 예를 굽혀가며 순욱을 섬겼다. 순욱이 죽게 되자, 순운은 조식과 친하고 하후상(夏侯尙)과 화목치 않으므로, 문제가 순운을 깊이 원망스레 여겼다. 순운이 일찍 죽자, 아들 순감(荀甝)과 순익(荀霬)은 (문제의) 외조카로 총애를 받았다. 순운의 동생 순오(荀俁)는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었고, 순오의 동생 순선(荀詵) 대장군(大將軍) 종사중랑(從事中郞)이 되어 모두 이름을 떨쳤지만 일찍 죽었다.


순씨가전(荀氏家傳): 순운의 자는 장천(長倩)이었으며 순오(荀俁)의 자는 숙청(叔倩)이고, 순선의 자는 만천(曼倩)이다. 순오의 아들은 순우(荀寓) 이고 그의 자는 경백(景伯)이다.

세어: 순우는 배해(裴楷), 왕융(王戎), 두묵(杜默)과 어렸을때 어울렸고, 이들의 이름은 경성에서 유명했다. 진나라에 들어와 지위는 상서(尚書)에 올랐고, 이름이 현저(顯著)히 알려졌다. 그의 아들 순우(荀羽)가 후사를 이었으며 그의 관직도 상서에 이르렀다.

순선의 동생 순의(荀顗)는 함희(咸熙 ; 264~265) 연간에 사공(司空)이 되었다.[주]

《진양추(晋陽秋)》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순의(荀顗)의 자는 경천(景倩)으로 어려서 매부인 진군(陳群)으로부터 특이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양한 학문을 하여 배운 것을 모두 흡수했으며, 자신의 생각을 나타낼 때는 신중하고 치밀했다. 사마선왕(司馬宣王)이 그를 보고 기이한 인재라 하며 이렇게 말했다.

“과연 순령군(荀令君)의 아들이로구나. 근래에 원간(袁侃)을 만났더니 역시 효경(曉卿)의 아들이라 할만했다.”

사마선왕은 그를 발탁하여 산기시랑(散騎侍郞)으로 삼았다. 순의는 진왕조에서 관직에 진출하여 태위까지 올랐으며 임회강공(臨淮康公)으로 봉해졌다. 일찍이 종회를 꾸짖으며 “《역경(易經)》에는 호체(互體)가 없다.”라고 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순의의 아우 순찬(荀粲)은 자를 봉천(奉倩)이라 했다. 하소(何劭)는 순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했다.

순찬은 여러 형들과 함께 유술(儒術)에 관해 토론을 했는데, 순찬만 홀로 도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했다. 그는 항상 자공(子貢)이 공자께서 성(性)과 천도(天道)를 말했다고 하지만, 직접 들지 못했으므로, 비록 육경(六經)에 나오는 말이라도 성인이 남긴 찌꺼기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의 형 순오가 아우를 꾸짖으며 이렇게 말했다.

“《역경(易經)》에는 ‘성인은 상(象)을 바로 세워 그 뜻을 다 드러냈으며, 사(辭)를 엮어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다 드러냈다11).’라고 했다. 그러므로 아무리 미언(微言)이라도 어찌 그것을 들을 필요가 없으며 듣고 보지 못할 수가 있느냐?”

순찬은 이렇게 대답했다.

“대개 미언의 이치는 만물의 모양을 거론하여 설명하지 못합니다. 지금 ‘상을 바로 세워 그 뜻을 다 드러냈다’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그 뜻 외의 것과는 통하지 못한다는 뜻이며, ‘사를 묶어서 하고자 하는 말을 다 드러냈다’고 하지만, 그것은 모든 표상을 다 포함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상(象) 외의 뜻은 표상을 모았다는 말에 불과하므로, 거기에 내포된 모든 개념이 드러난 것은 아닙니다.”

당시에 아무리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도 순찬과 토론을 하여 이기는 경우가 없었다. 그는 또 자신의 아버지 순욱이 종형인 순유에 비해 못하다고 했다. 순욱은 덕을 세워서 그것을 높이기 위해 의례의 법도를 만물에 훈(訓)을 달았지만, 순유는 외형을 다스리지 않고, 신중하고 치밀하여 스스로를 보전할 수가 있었다고 말했다. 순찬이 순유를 칭송하자 여러 형제들은 화를 내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태화(太和) 초에 서울에 온 그는 부하(傅嘏)와 담론을 즐겼다. 부하는 치밀하게 논리를 전개하는 장점이 있었으며, 순찬은 심오하고 현묘한 이론을 펼치는 것을 좋아했다. 이들은 학문적 경향이 달랐지만 갑자기 만나서 토론을 펼치면서 서로를 공격했으므로 의견을 일치를 보기가 어려웠다. 배휘(裵徽)와는 서로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으므로, 두 집안을 오고가는 심부름꾼이 끊이지 않았으며, 마침내 부하와도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하후현(夏侯玄)도 그들과 가깝게 지냈다. 그는 항상 부하와 하후현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들은 세속적인 사람들이므로 공명(功名)을 날리는 측면에서는 나보다 낫겠지만, 지식은 못할 것이네.”

그러자 부하가 이렇게 책망했다.

“공명을 크게 이룰 수 있으면 그것이 곧 지식이라네. 천하에 어찌 근본이 부족하면서도 남아있는 것이 있겠는가?”

순찬은 이렇게 말했다.

“공명이란 뜻과 기량에 따른 것이라네. 그러므로 뜻과 기량은 그 자체가 하나의 물건에 불과하지만, 지식은 그 하나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네. 나는 그대들이 부귀한 존재가 되도록 할 수가 있지만, 그대들은 반드시 그렇게 하지는 못할 것이네.”

순찬은 항상 부인이란 재능과 지혜를 갖출 필요가 없으며 아름답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표기장군 조홍(曹洪)의 딸은 대단한 미인이었다. 순찬은 그녀에게 장가를 들어서 아름다운 옷과 장막 안에서 즐겁게 부부생활을 영위했다. 몇 년이 지난 후에 아내가 죽자, 아직도 장례를 치르기 전에 부하가 조문을 갔더니 순찬은 곡을 하지는 않았지만 심신이 많이 상해있었다. 부하는 순찬에게 이렇게 물었다.

“부인이 재색을 함께 갖추기는 어렵다네. 자네가 장가를 간 것은 재능은 제쳐두고 색을 밝혔기 때문이네. 다시 만나면 되는 일인데, 지금 무엇이 그리도 슬픈가?”

순찬은 이렇게 말했다.

“아름다운 사람은 다시 만나기 어렵다네. 세상을 떠난 사람을 생각해보면, 경국지색(傾國之色)을 다시 만날 수가 없는데 쉽게 만난다고 말할 수가 있는가?”

순찬은 애석해하고 슬퍼하며 몇 년을 보내다가 불과 29세에 세상을 떠났다. 순찬은 특이한 사람이었으므로 보통 사람들과 어울리지는 못했지만 그와 사귀는 사람들은 모두 당대의 준걸이었다. 그가 죽었을 때 장례식에는 10여명이 갔지만, 모두 동시대에 명성을 날리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곡을 하며 슬퍼하자 길을 가던 사람들도 모두 슬퍼했다.

순운(惲)의 아들 순감(甝)이 후사를 이어 산기상시(散騎常侍)가 되었고, 작위가 올라 광양향후(廣陽鄕侯)에 봉해졌지만, 나이 30살에 죽었다. 아들 순군(荀頵)이 후사를 이었다.


《순씨가전》

순군의 자는 온백(溫伯)이었으며, 우림우감(羽林右監)이 되었으나 일찍 죽었다. 순군의 아들 순숭(荀崧)은 자를 경유(景猷)라 했다. 《진양추》에 다르면 순숭은 어려서부터 지조가 있었으며 문학을 특히 좋아했다. 또한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여 가족들과 화목하게 지냈다. 조정에 나아갔을 때에는 겸손하게 사람들을 대했으며 성실히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 관직은 좌우광록대부를 역임했으며,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에 이르렀다.

순숭의 아들 순선(荀羨)은 자를 영칙(令則)이라 했으며 빼어난 미남으로 재능이 뛰어났다. 공주를 모시다가 어린 나이에 관직에 진출했다. 28세에 북중랑장이 되었으며 서주와 연주 2개 주의 자시를 역임했다. 또한 지절을 가지고 서주, 연주, 청주 등 3개 주의 군사에 관한 일을 감독했다. 재임한 지 10년이 되어 병을 얻어 관직에서 물러나 집으로 돌아갔다가 죽었다. 나중에 표기장군으로 추증되었다. 순선의 손자 순백자(荀伯子)는 어사중승을 지냈다.

순익은 관직이 중령군(中領軍)에 이르렀는데, 그가 죽자 시호를 정후(貞侯)라 하고 표기장군(驃騎將軍)으로 추증했다. (순익의) 아들 순개(荀愷)가 후사를 이었다. 순익의 아내는 사마경왕(司馬景王)가 사마문왕(司馬文王)의 여동생으로 두 왕 모두와 친했다. 함희 연간에 5등작을 세웠는데, 순익은 전조(前朝)의 뛰어난 공훈으로 순의를 남돈자(南頓子)로 고쳐 봉했다.



순씨가전(荀氏家傳): 순개(荀愷)가 순개는 진무제 시대에 시중이 되었다.

『우보(于寶)의 진기(晋記)』에 이르길 진무제는 시중 순의와 화교(和嶠)에게 동궁으로 가서 태자를 관찰하라고 하였다.  순의는 태자가 덕과 지식이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고 말했으며, 화교는 성인의 기질을 처음처럼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손성(孫盛)은 무제가 태자를 관찰하라고 보낸 사람을 순욱(荀勖)이라고 했으며 다른 말은 《진기》와 같다.

// 신 송지가 보건에 화교가 시중이 된 것은 순의가 죽고 오래 지났을 때였다. 순욱(荀勖:?~289)은 관직이 아대사(亞臺司)였으므로, 화교와 같은 반열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시중이라는 관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당시의 관직체계를 감안하면 이때 순의를 말하는 것은 순욱을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순개(荀愷)는 이때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으로 승진했고 순개의 형 순담(荀憺)은 소부(少府)를 지냈으며, 아우인 순리(荀悝)는 호군장군(護軍將軍)을 지냈고, 죽은 후에 거기대장군으로 추증되었다.

《삼국지연의》 115회에는 순욱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촉장(蜀將) 강유(姜維)가 답중(畓中)에 둔전을 개척하자 사마소(司馬昭)는 강유를 뱃속의 우환이라 생각했다. 가충(賈充)은 자객을 모내 몰래 죽이자고 했지만, 순욱은 촉주(蜀主) 유선(劉禪)이 주색에 빠져있고 환관 황호(黃皓)가 권력을 전횡하고 있으니 정규군을 파견하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순욱은 종회(鍾會)와 등애(鄧艾)를 추천하여 촉을 공격하도록 했다.

《세설(世說)》에는 순오의 아들 순우(荀寓)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순우는 자를 경백(景伯)이라 했으며, 어렸을 때부터 배해(裵楷), 왕융(王戎), 두묵(杜黙) 등과 함께 서울에서 이름을 날렸다. 진왕조에 벼슬을 하여 관직이 상서에 이르렀으며 대단한 명성을 날렸다. 순우의 아들 순우(荀羽)가 후사를 이었으며 그의 관직도 상서에 이르렀다.순운의 아들 순감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산기상시(散騎常侍)가 되었으며, 광양향후(廣陽鄕侯)라는 작위를 받았지만 30세에 죽고 말았다. 아들 순군(荀頵)이 후사를 이었다. 순익의 관직은 중령군(中領軍)에 이르렀으며, 죽고 난 후에 정후(貞侯)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산기상시로 추증되었다. 아들 순개(荀愷)가 그 뒤를 이었다. 순개는 진무제 시대에 시중이 되었다. 《삼국지연의》에는 위의 경원(景元) 4년인 AD263년에 종회를 따라서 촉을 원정했다고 한다. 위군이 남정(南鄭)을 공격할 때 관문의 다리가 무너져 말이 흙더미에 빠지자 종회는 걸어서 진군했다. 마침 촉장 노손(盧遜)이 추격하여 종회를 죽이려고 하자 순개가 활을 쏘아 노손을 쓰러뜨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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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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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5.03
12:16:41
(*.104.28.55)

본문에 진짜로 하나도 대화구분이 안 되어 있었네요;;;;; 그리고 앞에 문단마다 띄어쓰기도 안 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니 혹시 확인하고 수정해주세요.

코렐솔라

2013.07.19
18:31:52
(*.52.89.87)
주석이 완전히 엄망으로 붙어있고 빠진 것이 있기에 추가했습니다.

코렐솔라

2013.10.23
14:24:17
(*.166.245.168)
밑줄 에러 발생해서 html 다 없애버리고 다시 넣었습니다

venne

2014.04.16
21:43:44
(*.186.21.9)
자실 -> 자살

오타 수정요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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