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유荀攸의 자는 공달(公達)이니, 순욱의 조카이다. 조부는 순담(荀曇)이니 광릉(廣陵)태수를 지냈다.

[주 ; 『순씨가전(荀氏家傳)』에 이르길 순담의 자는 원지(元智)이다. (순담의) 형은 순욱(荀昱)인데 자는 백수(伯脩)이다. 장번(張 )의 『한기(漢紀)』에는 순욱과 순담이 모두 준걸로써 특이한 재주가 있다고 하였다. 순욱은 이응(李膺), 왕양(王暢), 두밀(杜密)등과 함께 팔준(八俊)이라 불려졌고, 관직은 패상(沛相)까지 올라갔다. 순유의 아버지는 순이(荀彛)인데 주종사(州從事)를 지냈다. 순이는 순욱에게 종조형제(從祖兄弟; 아버지의 사촌형제)가 된다라 했다.]

순유는 어려서 부모를 잃었다. 순담마저 죽게 되자 그의 옛 관리 장권(張權)이 순담의 무덤을 지키기를 바랬다. 순유의 나이 13살이었는데, 이를 의심스레 여겨 숙부인 순구(荀衢)에게 말하길 저 관리는 안색이 평소와는 다르니, 아마 간특한 일을 저질렀을 것입니다라 했다. 순구가 깨달은 바가 있어 이에 그를 추문(推問)하니, 과연 살인하고 도망한 자였다. 이로 인해서 순유를 기이하게 여겼다.


[주: 《위서》에 따르면, 순유의 나이 7~8세일 때, 순구가 술에 취해 실수로 순유를 다치게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로 순유는 출입을 하거나 놀러나갈 때마다 항상 순구와 부딪치지 않으려고 피해서 다녔다. 순구는 나중에 그 사실을 듣고 조심스러운 아이라고 놀라게 되었다.

《순씨가전(荀氏家傳)》에는 순구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순구의 아들 순기(荀祈)는 자를 백기(伯旗)라 했다. 족부인 순음(荀愔)과 함께 명성이 높았다. 순기는 공융(孔融)과 함께 육형에 대해 토론을 했으며, 순음은 성인의 우열에 관해 토론을 했다. 그 내용은 《융집(融集)》에 있다. 순기는 제음태수(濟陰太守)를 역임했으며, 순음은 나중에 도학방면으로 진출하여 승상좨주(丞相祭酒)가 되었다. ]
 
하진(何進)이 정권을 잡았을 때, 천하의 명사로 순유 등 20여 인을 불렀다. 순유가 도착하자 황문시랑(黃門侍郞)에 배수되었다. 동탁(董卓)의 난 때, 관동의 군대가 봉기하자 동탁은 도읍을 장안으로 옮겼다.
 
순유가 의랑(議郞) 정태(鄭泰)·하옹(何 )·시중(侍中) 충집( 輯)·월기교위(越騎校尉) 오경(伍瓊) 등과 모의하길 동탁은 무도함은 걸주(桀紂)보다 심하여 천하가 모두 그를 원망하고 있소. 비록 강한 군대의 힘을 빌고 있지만, 실제로는 한낱 필부일 뿐이오. 지금 곧바로 그를 찔러 죽이고 백성들에게 잘 말한 연후에 효관( 關)과 함곡관을 점거하고 왕명을 보필하여 천하에 호령한다면, 이것은 곧 제나라 환공이나 진나라 문공같은 거사요라 했다. 일을 행동에 옮기려고 할 때 발각되어, 하옹과 순유를 잡아 옥에 가뒀는데, 하옹은 두렵고 무서워 자살했지만, 순유는 말하고 음식먹는 것이 태연자약하였다. 동탁이 죽게 되자 풀려났다.

주:《한기(漢記)》에는 하옹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하옹은 자를 백구(伯求)라 했으며 어려서부터 곽태(郭泰), 가표(賈彪)와 함께 낙양에서 유학을 했다. 하옹이 태학(太學)에서 명성을 날리자 중조(中朝)의 명신 태부 진번(陳蕃)과 사례교위(司隷校尉) 이응 등이 그를 소중하게 여겼다. 당고(黨錮)의 화가 발생했을 때 하옹도 명단에 포함되었지만, 그는 성명을 바꾸고 여남으로 도망쳤다가 그 지역의 호걸들과 깊이 사귀게 되었다. 하옹은 조조의 재능을 알아보았으며, 순욱과 원소도 그를 존경했다. 이들은 모두 도망치던 도중에 우정을 나누었던 사이였다. 이때 천하의 사대부들은 대부분 당고의 화를 입었지만, 하옹은 1년에 서너번씩 낙양으로 가서 원소(袁紹)와 함께 옥에 갇혔거나 곤란을 겪고 있는 사대부들을 풀어줄 계획을 꾸몄다. 당시에 원술(袁術)도 원소와 함께 호걸로 명성을 날렸지만, 하옹은 그를 꾸밈이 많은 사람이라 여겼다. 원술은 이러한 하옹을 원망했다.

또 《한말명사전(漢末名士傳)》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원술은 많은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하옹에게 세 가지 죄가 있다고 말했다.

“왕덕미(王德彌)는 먼저 깨달음을 얻었으며 재능과 덕행이 뛰어난 대선배로서 명성과 덕행이 높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와 수원하게 지냈으니 그것이 첫 번째 죄이다. 허자원(許子遠)는 에로부터 흉악하고 음란한 자로써 성품과 행동이 불순함에도 불구하고 친하게 지냈으니 그것이 두 번째 죄이다. 곽태와 가표는 가난하여 아무런 재산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옹은 살찐 말을 타고 가벼운 웃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니 그것이 세 번째 죄이다.”

도구홍(陶丘洪)은 이렇게 말했다.

“왕덕미는 대현이지만 제(濟)에 있을 때 잘못을 저질렀으며, 허자원은 비록 불순하지만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면 자신의 발을 담그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다. 백구(伯求)는 옳은 일을 거론할 때에는 덕미를 으뜸으로 여기며 어려움을 보고 구해주는 사람으로는 자원을 가장 높게 평가한다. 또 백구는 우위고(虞偉高)를 위해 손에 칼을 들고 복수를 한 적이 있어서 의로운 이름을 사방에 드날렸다. 원수의 집안에서는 거만의 재산을 축적하고 있으며, 훈련이 잘 된 수 백 필의 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백구의 소와 말을 먹이도 주지 못하게 하여 길바닥에 쓰러지게 만들었으므로 그 가슴에 사무친 원한을 풀기 위해 원수에게 칼날을 겨누었던 것이다.”

원술은 오히려 불평을 했다. 나중에 남양 출신인 종승(宗承)과 대궐에서 만났을 때, 원술은 이렇게 화를 냈다.

“하백구는 흉악한 인간이니 내가 죽일 것이오.”

종승은 다음과 같이 원술을 달랬다.

“하백구는 영준(英俊)한 선비요, 족하께서 그를 잘 대우해 준다면 천하에 명성을 얻을 것이오.”

원술은 비로소 자신의 생각을 중지했다. 나중에 당금(黨禁)이 풀리자 사공부(司空府)의 무름을 받았다. 삼부의 하급관리들까지 참석하는 회의가 있을 때마다 하옹은 여러 가지의 대책을 제시했고, 참석자들 대부분이 그의 견해에 미치지 못했다. 나중에 북군중후(北軍中侯)로 관직을 옮겼다가, 동탁에게 발탁되어 장사(長史)가 되었다. 나중에 순욱(荀彧)이 상서령이 되었을 때, 숙부인 사공 순상(荀爽)이 죽자 사람을 시켜서 하옹의 시신을 모시고 순상의 묘 옆에 묻어주었다.

《위서(魏書)》에는 순유가 사람을 보내어 동탁을 설득하여 풀려났다고 한다.

 
순유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다시 공부(公俯)에 불려져서, 고제(高第; 성적이나 고과가 우수한 자)로 천거되어 임성(任城; 연주의 지명) 상(相)으로 승진되었지만, 가지 않았다. 순유는 촉한(蜀漢)이 험준하고 견고하며 백성들은 풍족해하다고 여겨 촉군(蜀郡)태수가 되길 원했지만, 길이 끊겨 가지 못하고 형주에 머물렀다.
 
태조(조조)가 천자를 맞아 허(許)현에 도읍하고서는 순유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길 현재의 천하는 큰 난이 일어나 지모있는 선비라면 노심초사해야 할 때인데, 돌이켜 보면 촉한에도 변란이 일어날 것이 그리 오래지 않을 것이오!라 했다. 이에 순유를 불러 여남태수로 삼고, 조정에 들어와서는 상서(尙書)로 삼았다. 태조는 본래부터 순유의 명성을 듣고 있었는데, 그와 얘기를 나눠보고는 크게 기뻐하여 순욱과 종요(鍾繇)에 말하길 공달(순유의 자)은 범상한 사람이 아니오, 내가 그와 같이 일을 계획할 수 있게 되었으니, 천하에 무엇을 걱정하겠소! 라 하며 군사(軍師)로 삼았다.
 
건안 3년(198)에 순유는 조조가 장수를 정벌하는 데 따라나섰다. 순유가 조조에게 말했다.

“장수와 유표는 서로 의지하여 강력하게 되었는데,
장수가 유격병(遊軍)를 보내 유표에게 식량을 요청하지만 유표는 능히 공급해 줄 수 없어서 그 세력은 필히 갈라서게 될 것입니다. 군대를 늦추어 기다리며 저들을 꾀어내는 게 낫습니다. 만약 급박하게 하면, 그 세력은 반드시 서로를 구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조조는 순유의 건의를 듣지 않고 양성까지 진군하여 장수의 군대와 싸웠다. 장수가 위급해지자, 유표가 과연 그를 구하러 왔다. 조조 군대의 형세는 매우 불리했다. 조조가 순유에게 말했다.

“그대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구려.”

그 뒤 조조는 의외의
복병(奇兵)을 두었다가 다시 싸워 크게 격파했다.

이 해에, 태조가 완(宛)에서부터 여포를 정벌하였다.

[주 : 『위서』에 이르길 의론하던 자들이 유표와 장수를 뒤에 두고, 돌아서 여포를 습격하면 반드시 위험해질 것이라 했다. 순유가 말하길

"유표와 장수는 막 격파되었고, 여포는 용맹한데다 또 원술을 믿고 있어서 만약 그가 회수와 사수 사이를 종횡토록 놔두면 호걸들이 반드시 그에게 호응할 것이니, 지금 그가 처음 모반한 틈을 타 뭇사람들이 하나가 되지 못하였을 때 가서 격파해야 합니다"

리거 하였다. 태조가 옳게 여겼다.  나란히 가다가 여포가 유비를 패배시키고 장패(臧覇) 등이 이에 호응하였다.]


태조의 군은 하비(下 )까지 이르렀는데 여포가 퇴각하여 굳게 지키니, 공격해도 함락시키지 못하고 연이어 싸우다 보니 병사들은 피로해져 태조는 돌아가려 했다. 순유와 곽가가 말했다.

"여포는 용맹하나 지모가 없는데, 지금 세 번 싸워 모두 패배하였으니 그 예기(銳氣)가 쇠퇴하였습니다. 삼군(三軍)에서 장수를 주(主)로 하여 그 쇠미한 곳에 주력하면 군대는 싸울 뜻이 없을 것입니다. 무릇 진궁(陳宮)에겐 지모가 있으나 더디니, 지금 여포의 기세가 다시 회복하지 못했고 진궁의 지략이 아직 확정되지 않은 때에 진군하여 급히 공격하면 여포군을 가히 함락시킬 수 있습니다."


이에 기수(沂水)와 사수(泗水)를 끌어 성쪽으로 물을 대니, 성에서 물이 넘쳐나 여포를 사로잡았다. 조조는 순유의 공을 치하하며 이렇게 말했다.

“안자(顔子)나 영무자(寧武子)와 같은 성현이 다시 태어나더라도 순유만큼은 되지 못할 것이다.”

그 해 2월에 원소는 안량을 파견하여 백마를 포위했다. 조조가 유연(劉延)을 구원하여 백마(白馬)로 출병했을 때 종군하여 안량(顔良)을 죽이는 계책을 세웠다. 순유는 아군보다 전력이 막강한 적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성동격서(聲東擊西)의 전법으로 백마의 포위를 풀고자 했다. 이 사실은 《한기(漢記)》에 기록되어 있다. 순유의 견해를 받아들인 조조는 백마를 포기하고 회군을 하는 것처럼 위장했다가 연진(延津)에서 황하를 건너 원소의 후방을 노리는 척했다. 순유는 치중대를 이끌고 황하를 돌아서 서쪽으로 이동했다. 원소가 군사를 나누어 연진으로 출격시키자 조조는 경기병을 파견하여 백마를 습격하고 안량을 죽였다.

조조가 백마를 격파하고 돌아올 때, 치중대를 파견하여 황하를 따라서 서쪽으로 철수시켰다. 원소는 이 소식을 듣고 황하를 건너 추격하 여 마침내 조조와 마주치게 되었다 여러 장수들은 모두 두려워하며 조조에게 치중 수레를 버리고 철수하여 군영을 지키자고 했는데, 순 유가 말했다.

“이것은 적을 사로잡을 수 있는 것이거늘, 어찌 그것을 버릴 수 있습니까?” 

조조는 순유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치중으로 적들을 유인하자 적은 그것을 차지하려고 다투어 진세가 혼란스러웠다. 조조는 즉시 보병과 기병을 출동시켜 크게 쳐부수고 원소 군대의 기병대장 문추를 베었다.


원소와 관도(官渡)에서 대치를 하게 되었다. 군량이 떨어지자 순유는 조조에게 이렇게 건의했다.

“원소의 치중대가 저녁 무렵에 도착할 것입니다. 적장 한순(韓순{荀大}이 두개를 위 아래로 포개놓은 한자)은 날래기는 하지만 적을 가볍게 여깁니다. 그 때 기습을 한다면 깨뜨릴 수가 있습니다.”


신송지가 살피니 한명(韓蓂)은 어떤 판본에는 한맹(韓猛)이라고 되어 있고, 한약(韓若)이라고 되어 있는데 누군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조조가 누구를 보내는 것이 좋겠는가라고 묻자 순유는 서황(徐晃)을 추천했다. 서황은 사환(史渙)과 함께 원소의 치중대를 공격하여 깨뜨렸다.

이 때 허유(許攸)가 귀순하여 원소가 순우경(淳于琼) 등에게 1만명의 군사를 주어 군량미를 운반하도록 했다는 정보를 알려 주었다. 그는 순우경의 부대는 장수는 교만하고 군사들은 나태하기 때문에 공격을 한다면 반드시 깨뜨릴 수가 있다고 했다. 여러 사람들의 허유를 의심했지만 순유와 가후(賈詡)는 조조를 설득했다. 조조는 순유와 조홍에게 수비를 맡기고 순우경을 요격하여 죽였다.

조조는 곧 서황과 사환을 보내 습격하여 달아나게 하고 치중을 불태웠다.

때마침 허유가 항복해 와서, 원소는 순우경 등에게 병사 1만여 명을 이끌고 식량을 운반하는 것을 영접하도록 하였지만, 장수는 교만하고 병사들은 나태하므로 가히 공격하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조조의 모사들은 이 말을 듣고 모두 의심을 품었으나, 오직 순유와 가후만은 조조에게 허유의 계책을 받아들이라고 권했다. 조조는 곧 순유와 조홍을 남겨 본부 진영을 지키게 하였다. 조조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그들을 공격하여 순우경 등을 모두 베어버렸다. 원소의 장수 장합과 고람이 망루를 공격하여 태워버리고 투항하자, 원소는 마침내 군대를 버리고 도주했다. 장합이 항복해 오자, 조홍은 의심하며 과감히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순유는 조홍에게 말했다.

“장합은 원소가 자신의 계책을 쓰지 않아 분노하여 온 것인데 당신은 무엇을 의심하십니까?”

조홍은 곧 그를 거두었다.

건안 7년(202) 종군하여 여양(黎陽)에서 원담(袁譚)과 원상(袁尙)을 토벌했다. 다음해, 태조가 막 유표를 정벌하려 하는데, 원담과 원소가 기주(冀州)를 두고 다투었다. 원담이 신비(辛毗)를 보내 항복을 빌며 구원을 청하니, 태조가 장차 이를 허락하려 하며, 여러 아랫사람들에게 물었다. 많은 여러 아랫사람들은 유표가 강하다고 생각해 먼저 그를 평정하는게 옳고 원담과 원상은 걱정거리가 못된다고 하였다.

 
순유가 말하길


"천하에 막 일이 터지고 있는데 유표는 장강과 한수(漢水) 사이를 앉아서 보전하고 있으니, 사방을 경략할 뜻이 없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씨는 4주의 땅에 웅거하며 갑주를 두른 병사가 10만이며, 원소가 관후(寬厚)함으로 병사를 얻어 그의 두 아들이 화목하면 이뤄놓은 대업을 지킬 수 있게 하였으니, 천하의 대란이 끝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형제들이 나쁜 상태를 만났으니, 이런 형세라면 둘다 보전하지 못합니다. 만약 (한쪽으로) 병합되면 힘으로 전일(專一)하게 되고, 힘을 전일하게 되면 저들을 도모하기 어렵습니다. 저들의 혼란한 틈을 타 취하면, 천하가 평정될 것이니, 이때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라 했다. 태조가 옳다라고 했다. 이에 원담과 화친을 허락하고, 마침내 돌아가 원상을 격파했다. 그 후에 원담이 반란을 일으키니, 종군하여 남피(南皮)에서 원담을 베었다.

기주가 평정되자 태조가 순유를 봉하는 표를 올리길 군사 순유는 처음부터 신을 보좌하여, 정벌하는데 마다 따라가지 않은 곳이 없고, 전후로 적을 이긴 것은 모두 순유의 지모였습니다라 했다. 이에 능수정후(陵樹亭侯)에 봉했다.
 
건안 12년(207) 영을 내려 크게 논공행상을 하게 했는데, 태조가 말하길 충정(忠正)하고 은밀히 모의하고, 내외를 어루만져 편안케 하는 것은 문약(=순욱)이고, 공달(순유)은 그 다음이다 라 했다. 봉읍을 4백호 늘려 이전과 합쳐 7백호가 되게 하고, 승진해 중군사(中軍師)가 되었다. 위나라가 처음 건국될 때, 상서령(尙書令)이 되었다.

[주: 《위서》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유성(柳城)에서 돌아 온 조조는 순유의 집을 지나가다가, 전후로 순유가 얼마나 큰 공을 세웠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천하의 일은 대체로 이미 평정되었으니, 나는 현명한 사대부들과 함께 그 노고를 누리도록 하겠소. 옛날 고조(高祖)는 장량에게 봉읍 3만 호를 스스로 선택하게 했으니, 이제 나 역시 그대가 스스로 봉읍을 선택하도록 하겠소.” ]

 
순유에겐 깊고 은밀한 지모가 있어, 태조가 정벌한 이후부터 항상 군막에서 계책을 짜니 당시 사람들 및 자제들이 그 말한 바를 알지 못했다.

[주:
《위서》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순유의 생질인 신도(辛韜)가 순유에게 기주를 얻을 때 조조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에 대해 물었다. 순유는 이렇게 대답했다.


“좌치(佐治)께서 원담이 항복을 하도록 했으며, 왕사(王師)께서 스스로 그를 평정하러 가셨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느냐?”


그 후로 신도는 물론 친지나 집안 식구들 가운데 누구도 다시는 군국사무에 대한 말을 묻지 않았다.]


태조가 매양 칭찬하며 말하길 공달은 겉으로는 어리석으나 안으로는 지혜롭고 겉으로는 겁이 많으나 안으로는 용감하며 겉으로는 약하나 안으로는 강하며, 잘하는 것을 자랑하지 않고 노고를 뽐내는게 없으니, 그 지혜는 미칠 수 있어도 그 어리석은 체 하는 것은 미칠 수 없으니, 비록 안자(顔子=안회)나 영무자( 武子)도 그보다 뛰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거의 『논어』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해 순유를 칭찬한 말입니다. 『논어 공야장(公冶長)』편에 이에 관한 자세한 구절이 나옵니다]

 
순유가 일찍이 병이 들자 세자가 문병을 혼자 당 아래서 절하였니, 그 존경을 보임이 이렇게 남달랐다. 순유는 종요와 친했는데, 종요가 말하길 나는 매번 행한 일이 있으면, 혼자서 바꿀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공달에게 물으면 번번이 다시 남의 생각을 뛰어 넘곤 했다라 했다. 공달이 앞뒤로 빼어난 책략 12가지를 짰는데, 오직 종요만이 이를 알았다. 종요가 이를 찬집(撰集)하였으나 완성하기 전에 죽었기에, 세상에 모두 다 전해지지 못했다.

[주: //신 송지가 살피건대, 순유가 죽고 나서 16년 있다가 종요가 죽었습니다. 순유의 기책을 편찬하는 것이 무슨 어려움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나이 80이 되어서도 아직 만들지 못했다고 하므로, 마침내 순유가 정벌에 종군했을 때의 계책을 세상에 전하지 못했게 되었으니, 애석할 따름입니다!]

순유는 58세에 죽었으며, 순욱이 죽은 지 6년 후였다. 조조는 그의 죽음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나와 순공달은 무려 20여년 동안 사방을 돌아다니면서도 어긋났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순공달은 진짜 현인이다. 소위 온(溫), 량(良), 공(恭), 검(儉), 양(讓)을 터득한 사람이다. 공자께서 안평중(晏平仲)은 사람들과 교제를 잘 했으므로 오래도록 존경을 받았다고 했다. 순공달이야말로 그와 같은 사람이었다.”

[
주: 《전자(傳子)》어떤 사람이 요즈음 대현군자에 대해 묻자 이렇게 말했다.

“순령군(荀令君)의 인(仁)과 순군사(荀軍師)5)의 지혜는 요즈음 대현군자라 할 만하다. 순령군은 인으로써 덕을 세웠고, 밝음으로써 인재를 천거했으며, 행동을 할 때에는 다른 사람들의 비난을 받지 않았다. 맹자가 5백년이 되어야 왕노릇을 할 사람이 나오니 그 사이에는 반드시 천명을 세상에 펼치는 사람이 있다고 했으니 이는 순령군을 두고 한 말이나 다름이 없다. 태조께서는 순령군은 선을 추구했으며 아름답지 않았던 적이 없다. 순군사는 악을 없애려고 했으며 그렇게 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했다.”  ]

보충: 위씨춘추에서 말하길 순유(荀攸)의 자는 공달(公達)이며 상서령이다. 태조(조조)의 정벌에  따라다니며 항상 장막(帷幄)안에서 계책을 꾀어냈기 때문에 그 집안의 자제들 까지도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를 못했다.

태조가 항상 말하길


“공달(순유)은 겉으로는 어리석어 보이나 안으로는 지혜롭고, 겉으로는 겁쟁이 같지만 안으로는 용맹하며, 겉으론 약하나 안으론 강하고, 잘한것을 자랑하지 않으며 공로를 과장함이 없고, 그 지혜로움은 따를 수 있으나 우직함을 따를 수 없는 것은 안연과 녕무자도 순유를 능가할순 없다”

문제가 동궁에 있을 때 태조가 말하길


“ 순공달은 모든 사람의 사표(師表_ 학식(學識)과 덕행(德行)이 높아, 세상(世上) 사람의 표적(標的)이 될 만한 사람)이다. 예를 다하여 공경하라.”

순유가 병에 걸리자 세자는 문병을 가서 침상 아래 혼자 배례(拜禮)하였으니, 그를 높임이 이와 같았다.

순유가 상서령이 되었을때, 태조가 그 이름을 듣고 순유와 함께 이야기하니, 크게 기뻐하였다.

종요가 말하길 (순유와 종요는 친했음) “공달은 비상한 인물이며, 내가 그와 함께 업무를 계획하면 천하의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

장자 순집(荀緝)은 순유의 풍모가 있었으나 일찍 죽었다. 차자(次子) 순적(荀適)이 뒤를 이었으나 아들이 없어 대가 끊어졌다. 황초(黃初) 연간에 순유의 손자 순표(荀彪)를 봉해 능수정후로 삼고 봉읍을 3백호 하였다가, 후에 옮겨 구양정후(丘陽亭侯)에 봉했다. 정시(正始) 연간에 순유의 시호를 추증해 경후(敬侯)라 했다.

분류 :
위서
조회 수 :
8625
등록일 :
2013.05.03
12:20:06 (*.104.28.55)
엮인글 :
http://rexhistoria.net/history_sam/2017/f8f/trackback
게시글 주소 :
http://rexhistoria.net/2017

코렐솔라

2013.07.21
09:17:58
(*.52.89.87)
몇 가지 주석 추가하고 한 자기 주석은 교체했습니다.

코렐솔라

2013.08.04
02:08:03
(*.131.108.250)
신 송지(松之)가 보건데 종요는 순유가 죽고 나서 16년 후에 죽었다. 그러므로 순유의 기책을 편찬하는 것이 어떻게 어려웠겠는가? 오히려 80의 나이에도 그것을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순유가 종군했을 때 펼친 기책이 전하지 못했으니 그것이 애석하다.

를 http://rexhistoria.net/index.php?mid=community_three&document_srl=21327&comment_srl=21554&rnd=21564#comment_21564

이것에 따라

신 송지가 살피건대, 순유가 죽고 나서 16년 있다가 종요가 죽었습니다. 순유의 기책을 편찬하는 것이 무슨 어려움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나이 80이 되어서도 아직 만들지 못했다고 하므로, 마침내 순유가 정벌에 종군했을 때의 계책을 세상에 전하지 못했게 되었으니, 애석할 따름입니다!

이걸로 바꾸겠습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촉서 촉서 목차 링크 재원 2013-07-08 153507
공지 위서 위서 목차 링크 [1] 재원 2013-06-29 158318
공지 오서 오서 목차 링크 [3] 재원 2013-06-28 113504
210 위서 최염전 [4] 견초 2013-05-03 5466
209 위서 <배송지주>한빈전 [1] 재원 2013-05-03 4502
208 위서 <배송지주>초선전 [1] 재원 2013-05-03 5055
207 위서 <배송지주>호루전 [1] 견초 2013-05-03 3322
206 위서 호소전 [4] 재원 2013-05-03 3726
205 위서 장전전 [1] 재원 2013-05-03 3393
204 위서 <배송지주>왕렬전 [1] 재원 2013-05-03 3208
203 위서 관녕전 [2] 견초 2013-05-03 3876
202 위서 병원전 [1] 견초 2013-05-03 3694
201 위서 왕수전 [1] 견초 2013-05-03 3823
200 위서 전주전 [2] 견초 2013-05-03 4935
199 위서 국연전 [9] 견초 2013-05-03 3636
198 위서 양무전 [2] 견초 2013-05-03 3304
197 위서 장범전 [2] 견초 2013-05-03 3427
196 위서 원환전 [4] 견초 2013-05-03 4082
195 위서 가후전 [1] 견초 2013-05-03 15897
» 위서 순유전 [2] 견초 2013-05-03 8625
193 위서 순욱전 [4] 견초 2013-05-03 14110
192 위서 하후현전 [3] 재원 2013-05-03 5675
191 위서 하후상전 재원 2013-05-03 47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