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후賈詡의 자는 문화(文和)이며 무위(武威)군 고장(姑臧)현 사람이다. 젊은 시절 사람들이 알아주지 못했으나, 오직 한양(漢陽) 땅의 염충(閻忠)만이 그를 기이하게 여기고 가후에게는 장량(張良)과 진평(陳平)의 기계(奇計)가 있다고 생각했다. 
 
주:《구주춘추(九州春秋)》

중평(中平) 원년, 거기장군(車騎將軍) 황보숭(皇甫嵩)은 황건을 격파하고 천하에 그 위엄을 떨쳤다. 염충은 당시에 신도령(信都令)에서 파직하고 황보숭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대체로 얻기 힘들고 잃기 쉬운 것은 시간이라고 합니다. 시기가 도래했을 때 그것을 놓치지 않고 잡는 것을 기회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옛날 성인은 항상 시기에 순응하여 움직였으며, 지혜로운 사람은 기회가 닥쳤을 때 분발합니다. 지금 장군께서는 얻기 어려운 운수를 만났지만 너무도 쉽게 기회를 상실하고 있으니, 이는 운수를 얻고서도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으며, 기회를 만나서도 분발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야 어찌 큰 이름을 세상에 날리겠습니까?”

황보숭이 물었다.

“무슨 말인가?”

“천도는 무시해도 되지만, 백성들과는 함께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높은 공을 세운 사람은 용렬한 주군의 상을 받지 않습니다. 지금 장군께서는 초봄에 부월(斧鉞)을 받았고, 늦은 겨울에 공을 거두었으며, 병사들은 마치 신처럼 움직이고 있습니다. 모략은 다시 꾸밀 필요도 없이 불과 열 달 동안에 신병이 마치 빗자루로 쓸 듯이 소탕하니 아무리 단단한 성채도 마치 썩은 나무를 자르는 듯 했으며, 적은 눈이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7개의 주를 석권하여 36만 명을 도륙했습니다. 황건의 우두머리를 죽여서 사악한 무리들이 일으킨 우환을 제거했습니다. 봉호를 돌에 새겼으며 황제는 남향을 하여 장군의 덕에 보답을 했습니다. 장군의 위엄은 본조에 떨쳤으며, 풍문을 타고 해외로 나아갔습니다. 이로써 군웅들은 머리를 장군에게로 돌렸으며, 백성들은 뒤꿈치를 세워 바라보고 있습니다. 비록 은의 탕왕(湯王)과 주의 무왕(武王)이 세운 공적도 장군의 높은 공에 미치지 못합니다. 몸소 높은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북면을 하여 용렬한 군주를 섬기고 있으니 장차 어떻게 안전을 도모하시겠습니까?”

“마음속으로 충성심을 잊지 않고 있는데 어떻게 안전하지 못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옛날에 한신(韓信)은 유방(劉邦)의 하찮은 대우에 연연하다가 삼분(三分)의 이점을 버리고 괴통(蒯通)의 충언을 거부하고 머뭇거리다가 절호의 기회를 잃고 결국은 아녀자1)의 손에 죽고 말았습니다. 지금 주상의 세력은 항우나 유방보다 못하고, 장군의 군권은 회음후(淮陰侯) 한신에 비해 막강합니다. 깃발을 휘두르면 풍운이 일고, 소리를 지르면 우레와 같은 기세를 떨칠 수가 있습니다. 웅장한 기세로 떨치고 일어나 위기에 처한 나라를 바로 세운다는 기치를 들고. 그 깃발 아래 몰려오는 사람들에게 관직을 내려주어 후은을 베풀고 무력을 떨친다면 누구도 복종을 할 것입니다.

기주의 사대부들을 불러 모으고, 7개 주의 무리들을 움직이기 위해 먼저 격문을 띄우고, 나중에 대군을 이끌고 진격을 하여 장하(漳河)를 건너 맹진(孟津)에서 말에게 물을 먹인 다음, 하늘의 그물을 들어 그것을 수도에 씌우고 환관의 무리들이 일으킨 죄악을 징치하여 여러 사람들의 가슴에 쌓인 원한을 물어준다면, 오랜 국가의 위기가 오히려 뒤집어져 장군의 공이 하늘에 걸릴 것입니다. 이렇게 하신다면 아무리 견고한 성도 지킬 수 없을 것이며, 굳이 부르지 않아도 그림자처럼 많은 사람들이 따를 것이고, 어린 아이라도 빈주먹을 휘두르며 온 힘을 다할 것이며. 부녀자들도 헤어진 치마를 입고서라도 명을 따를 것입니다. 하물며 경험을 갖춘 지혜롭고 유능한 사람들은 뒤늦을까봐 바람처럼 몰려와 세를 이룰 것이니, 이보다 더 큰 공이 어디에 있겠으며, 팔방에서 함께 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공업을 이루고 나서 천하의 사람들이 순응을 하게 되면, 상제(上帝)께 불을 피우고 천명을 고하며, 육합(六合)을 가지런히 하고 남면(南面)을 하여 제도를 획정하며, 신기(神器)를 가문으로 옮기고, 망한 한나라의 복조(福祚)를 정치(定置)하십시오. 신기(神機)가 이르러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되었으니 풍운이 일어나는 지금이야말로 가장 좋은 시기입니다. 대개 썩은 나무로는 조각을 하지 못하고, 쇠약해진 세상에서는 보좌를 하기가 어렵습니다. 장군께서는 비록 충성심을 가지고 있지만 이 왕조를 보조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썩은 나무로 조각을 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무너지는 둑을 작은 구슬로 막으려고 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지금 조정에는 권력을 지닌 환관들이 군집하여 그 악의 무리들이 마치 시장처럼 들끓고 있습니다. 주상은 자신의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고 모든 조직은 측근들에게서 나옵니다. 총명함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이러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무슨 일이 더 중요하고 시급한 것인지를 깨닫지 못한다면 아중에 반드시 후회를 하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후회를 해도 그 때는 이미 어쩔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황보숭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염충은 곧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주:《영웅기(英雄記)》양주(凉州)의 도적 왕국(王國) 등이 기병을 하여 함께 염충을 주장으로 모시고 36개의 부를 통괄하게 했으며 거기장군(車騎將軍)이라 불렀다. 그러나 염충은 그것을 개탄하다가 병을 얻어 죽고 말았다.


효렴[孝廉; 관리 천거 요건중 하나]으로 천거되어 낭[郎; 낭이 붙는 관직은 다양한 종류가 있으나, 대체로 숙위, 시종, 중추 실무 등의 직책을 맡는 관직을 일괄적으로 부르기도 합니다]이 되었으나, 병으로 관직으로 버리고 서쪽으로 돌아가다 병현에 이르렀다. 
 
도중에 반란을 일으킨 저족을 만나 동행했던 수십 명이 모두 잡혔다. 가후가 말하길

"나는 단공(段公)의 외손이니, (죽이거든) 너희들은 나를 따로 묻어라. 우리 집에서 필히 후하게 값 치르고 가져갈 것이다"

라 했다. 당시 태위
[太尉; 때에 따라 대사마(大司馬)로 칭해지기도 하는 군정(軍政)에 관한 한 최고의 관직입니다. 그러나 전한 초기 때만 빼고 실권은 없습니다]가 단영이었는데, 예전에 오랫동안 변방의 장수로 있으면서 그 위엄이 서쪽 땅에 떨쳤기에, 그래서 가후가 (그 명성을) 빌어 저족을 겁준 것이다. 저족들이 과연 해치지 않고 함께 맹서를 맺고 그를 보내 주었고, 나머지 동행들은 모두 죽었다. 가후는 실제 단공의 외손이 아니었으나, 임시방편으로 일을 해결한 것이니, 모든 일을 하는 게 이와 같았다.
 
동탁(董卓)이 낙양에 입성해서, 가후를 태위연[太尉  ; 연도 보좌관, 속관의 관직입니다]으로 평진도위(平津都尉)로 삼았다가 토로교위(討虜校尉)로 옮겼다. 동탁이 중랑장(中郞將) 우보(牛輔)에게 섬(陝)현에 주둔하게 했는데 가후는 우보의 군대에 있었다. 
 
동탁이 패망하고 우보 또한 죽자, 여러 사람들이 두려워 하니, 태위인 이각과 곽사, 장제(張濟) 등은 군대를 해산하고 무사히 빠져나가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다. 가후가 말하길 

"듣자하니 장안 내의 의론이 양주(凉州) 사람들을 다 죽이려 한다는데[동탁의 본래 직책이 양주자사였죠. 그래서 동탁의 군대에는 양주출신들이 많습니다], 여러분들이 군대를 버리고 홀로 가시면, 곧 한 명의 정장[亭長; 현 아래 행정단위로 향(鄕)―정(亭)―리(里)가 있는데, 그 정에 배치된 관리가 정장입니다. 주로 치안유지가 주 임무입니다]이 라도 여러분들을 잡을 수 있습니다. 군대를 통솔해 서쪽으로 향해 가는 게 나으니, 가는 곳마다 병사를 거두어 장안을 공격하면 동공(董公=동탁)의 원수를 갚게 되고, 다행히 일을 잘 해결하면 국가를 받들어 천하를 정벌하게 되고, 일이 풀리지 않으면 그 때 달아나는 것도 늦지 않지 않습니다."

라 하니, 여러 사람들이 그 말을 옳게 여겼다. 이각이 이에 서쪽으로 장안을 공격했다. 이에 관한 말이 『동탁전』에 있다. 
 
주: 신 송지가 보건데《전(傳)》에는 “어진 사람의 말은 그 이점이 너무나 많다”라고 했다. 그러나 어질지 못한 말은 그 이치가 반드시 거꾸로 이다. 무릇 어진 사람의 공덕은 드러나기가 어렵지만, 혼란의 원천은 쉽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행동이 화의 기틀이 되면 재앙이 무려 백 세대에 걸쳐 이어진다. 그 때는 원흉인 동탁이 이미 효수되어 천지가 다시 시작을 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화근을 다시 만들어서 커다란 가시나무가 잔뜩 자라나게 했으니, 전국이 다시 망가지는 애석함이 초래되고, 백성들과 아이들은 고통에 빠지게 되었다. 이는 가후의 몇 마디 말 때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가후의 죄가 어찌 크지 않겠는가? 예로부터 천하가 어지러워진 것 가운데 이보다 큰 것은 없었다.

후에 가후를 좌풍익[左馮翊 ; 장안을 기준으로 그 북부 군(郡)을 좌풍익이라 하고 그 장관도 좌풍익이라 부릅니다. 장안을 포함한 경조윤(京兆尹), 그리고 다른 한쪽의 우부풍(右扶風)을 합쳐 삼보(三輔)라 부릅니다. 지금 경기도지사 정도] 삼고 이각 등은 그의 공을 생각해 제후에 봉하려 했는데, 가후가 말하길 

"이것은 목숨을 구하기 위한 계책일 뿐인데 무슨 공이 있습니까!"

라 하며 완고히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또 상서복야(尙書僕射)로 삼으니 가후가 말하길 

"상서복야는 관리들의 우두머리(師長)로 천하가 바라는 바이며, 제 명성은 무겁지 않아 남을 복종시키지 못합니다. 제가 영리(榮利)에 눈이 어둡게 하시면, 나라와 조정은 어찌 하시려 합니까!"

라 했다. 이에 가후를 상서(尙書)로 고쳐 배수하여 관리의 선발과 임용을 맡게 하자, 많은 것을 바로잡아 제어하니 이각 등이 그를 친근히 하면서도 꺼려했다. 

주: 《헌제기(獻帝記)》 곽사와 번조(樊稠)는 서로를 미워하여 자주 다투었지만, 가후가 도리를 앞세워 책망하자 그의 말을 잘 받아들였다고 한다.

모친의 상을 만나 관직을 떠나자 광록대부(光祿大夫)로 배수했다.
 
이각과 곽사 등이 장안에서 싸웠는데, 이각이 다시 가후에게 요청하여 그를 선의장군(宣義將軍)으로 삼았다. 

주: 《헌제기》: 이각 등과 가후는 천자를 관중에 모셔두고자 상의를 했다. 그러나 가후는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천자를 협박하는 것은 그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하고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각은 듣지 않았다. 장수(張繡)가 가후에게

“이 곳은 오래 머물 곳이 아닌데 그대는 왜 떠나지 않는가?”

라고 물었다. 가후는

“나는 국가의 은혜를 입고 있습니다. 의리상 배신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대는 스스로 떠날 수가 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라고 대답했다.



이각은 당시에 강족(羌族)과 호족(胡族) 수 천 명을 불러 먼저 그들에게 선물로 아름다운 비단을 주고 관리들의 부녀자를 아내로 삼도록 허락한 다음 곽사를 공격하도록 했다. 강족과 호족은 몇 차례나 성문을 살핀 다음 이렇게 말했다.

“천자께서 안에 계십니다. 이 장군이 우리게 관리의 여자들을 주겠다고 했지만 지금 우리가 안전할지 모르겠습니다.”

천자가 그것을 걱정하여 가후에게 대책을 강구하도록 했다. 가후는 몰래 강족과 호족의 중수들을 불러서 음식을 대접한 다음 관작과 물을 주고 물러나도록 했다. 이후로 이각의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이각 등이 화해하고 천자를 내쫓았을 때, 대신을 도와 보호함에 가후의 힘이 있었다. 

[주] ‘영접한다’는 말은 천자를 그들이 있는 군영으로 모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각이 가후에게 이 문제를 상의했을 때 가후는 “안 되오. 천자를 위협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소. 라고 말했으나 이각은 듣지 않았다.

[주] 헌제기에서 이르길: 천자가 동쪽으로 향하자 이각은 그들을 추격하여 천자의 군대를 패배시켰다. 사도(司徒) 조온(趙溫), 태상(太常) 왕위(王偉)와 주충(周忠), 사예교위 영소(榮邵) 등은 모두 이각에게 미움을 받았던 신하들이었으므로 이각은 이들을 살해하려고 했다. 이때 가후는 이각에게

“그들은 모두 천자의 대신들이오. 그대는 어찌하여 그들을 해치려 하오?”

라고 하자 이각은 그만두었다.

천자가 (장안을) 나오자 가후는 (자신의 관직의) 인수(印綬)를 돌려 바쳤다. 
 
이 때 장군 단외가 화음(華陰)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가후와는 같은 군 사람이어서, 마침내 (가후가) 이각을 버리고 단외에게 의탁했다. 가후는 본래 이름이 알려져 있어 단외의 군대에서 우러러 받들어 졌다. 단외는 내심 자기 위치를 빼앗길까 두려워했지만 겉으로는 가후를 매우 깊이 받들었는데, 가후가 더욱 스스로 불안해했다.

주: 《전략(典略)》 단외는 화음에 있을 때 농업시설을 수리하고 노략질을 하지 않았다. 천자께서 동쪽으로 돌아갈 때 단외는 천자의 행차를 영접하여 무사히 길을 가도록 했다. 나중에 그는 대홍로(大鴻臚) 광록대부가 되었으며, 건안 14년에 천수를 다하고 죽었다.

장수(張繡)가 남양(南陽)에 있었는데, 가후가 은밀히 장수와 결탁하니 장수가 사람을 보내 가후를 맞이하게 하였다. 가후가 막 떠나려 하자 어떤 이가 가후에게 

"단외가 그대를 후하게 대해줬는데 그대는 어째서 그를 버립니까?"

라 물었다. 가후가 말하기 

"단외의 성품은 의심이 많고 제 뜻을 기피하는 바가 있어, 예는 비록 후하였지만 믿을 수 없고 오래 있으면 (그에게) 도모 당하게 될 것이오. 내가 가면 반드시 기뻐하며, 또 내가 외부의 큰 원군과 결탁하길 바라고 있어 필히 내 처자를 후하게 대할 것이오. 장수는 책모를 담당하는 자(謀主)가 없어 또한 나를 얻기 바라고 있으니, 곧 내 일가와 내 자신이 반드시 모두 보전될 것이오."

라 했다. 가후가 마침내 떠나니, 장수는 자손의 예를 행했고, 단외는 과연 그의 가솔들을 잘 봐주었다.
 
가후가 장수를 설득해 유표(劉表)와 우호관계를 맺게 했다. 

[주 : 『부자(傅子)』에 이르길 가후가 남쪽으로 유표를 뵈니, 유표가 빈객의 예로써 그를 대우했다. 가후가 말하길 유표는 평상시에는 삼공(三公)이 될 재주가 있다. 그러 일의 변화를 살피는데 의심이 많고 결단력이 없으니 무능하다고 할 것이라고 했다] 

태조가 그 즈음 장수를 정벌하다 한번은 아침에 군대를 이끌고 퇴각하자, 장수가 직접 추격하려 했다. 가후가 

"추격하지 마십시오. 추격하면 필히 패배할 것입니다"

라 했다. 장수가 이 말을 따르지 않고 병사를 진격시켜 교전하였는데 크게 패배하여 물러났다. 가후가 장수에게 (군대를) 재촉해

"다시 추격하십시오. 다시 싸우면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라 하자 장수가 거부하며 

"공의 말을 쓰지 않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소. 지금 이미 패하였는데, 어찌 다시 추격하겠소?"

라 했다. 가후가 

"군대의 형세에는 변화가 있기 마련이니, 빨리 추격해 가면 필히 이로움이 있을 것입니다"

라 했다. 장수가 이 말을 믿고, 마침내 흩어진 군졸을 거두어 추격해 가서 크게 싸웠는데, 과연 이기고 돌아왔다. 

(장수가) 가후에게 묻기를 

"내가 정예병사로 퇴각하는 군을 추격할 때 공은 반드시 패할 것이라 하더니, 퇴각하여 패배한 군졸들로 이기고 있는 군대를 치면 공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 했소. 모두 다 공의 말처럼 되었데, 어찌 반대로 했는데 모두 징험(徵驗)이 있었던 거요?"

라 했다. 가후가 말하길 

"이것은 알기 쉬운 것입니다. 장군께서 비록 군대를 잘 부리시나 조공의 적수가 되지는 못합니다. 군대가 비록 이제 막 퇴각하긴 했어도 조공은 필히 직접 후방을 끊고자 했습니다. 추격병이 비록 정예병이긴 해도, 장군이 적수가 되지 못하는 데다 저들의 군사들도 또한 정예이니 그래서 필히 질 것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조공이 장군을 공격함에 실책이 없는데 힘을 다하지 않고 퇴각한 것은 필히 나라에 어떤 변고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장군을 격파하고 나면 반드시 군대를 가벼이 해 빨리 가려 했고, 여러 장수들을 남겨두어 후방을 차단하려 했는데, 그 여러 장수들이 비록 용맹하긴 해도 또한 장군의 적수는 되지 못하였으니 그래서 패잔병을 써도 싸우면 반드시 이겼던 것입니다"

라 하니, 장수가 이에 감복하였다.
 
이 이후, 태조가 관도(官渡)에서 원소와 대치하고 있었는데, 원소가 사람을 보내 장수를 끌어들였고 아울러 가후에게도 원조를 요청하는 글을 보냈다. 장수가 이를 허락하려 했는데, 가후가 장수의 자리 위에 나타나 원소의 사신에게 말하길 

"돌아가서 원본초(袁本初=본초는 원소의 자)에게 말씀 올리되, 형제끼리도 서로 용납하지 못하면서, 천하의 국사(國士)들을 용납할 수 있는가 전하시오"

라 했다. 장수가 놀라 두려워하면서 

"어찌 이렇게까지 말하시오"

라 했다. 
 
은근히 가후에게 말하길 

"이처럼 되었는데, 응당 어느 쪽에 귀부해야 하오?"

라 했다. 가후가 

"조공을 따르는 게 낫습니다."

라 했다. 장수가 말하길 

"원소가 강성한데 조조는 약하고, 또한 (우리는) 조조와 원수가 되었는데, 어째서 따라야 하오?"

라 물으니, 가후가 

"이것이 바로 (조공을) 마땅히 따라야 하는 까닭입니다. 무릇 조공은 천자를 받들어 천하에 호령하니, 그 마땅히 따라야 되는 첫째입니다. 원소는 강성한데 우리는 군사가 적어 그를 따른다 해도 필히 우리를 중히 여기지 않습니다. 조공은 군사가 약한데 우리를 얻게 되면 필히 기뻐할 것이니, 이것이 마땅히 따라야 하는 두 번째입니다. 무릇 패왕(覇王)의 뜻을 가진 자는 진실로 사사로운 원한을 풀어버리고 사해(四海)에 덕을 밝히니, 이것이 마땅히 따라야 하는 세 번째 이유입니다. 원컨대 장군께서는 의심치 마십시오."

라 했다. 장수가 이 말을 따라 군대를 거느리고 태조에게 귀부했다. 

태조가 이를 보고는 기뻐하여, 가후의 손을 잡으며 내 신의를 천하에 중하게 해준 자가 그대요라 했다. 표를 올려 가후를 집금오(執金吾)로 삼고 도정후(都亭侯)에 봉하였다가, 기주목(冀州牧)으로 옮겼다. 기주가 아직 평정되지 않자, 유임시켜 사공군사(司空軍事)에 참여케 했다. 
 
원소가 관도에서 태조를 포위했는데, 태조의 진영에는 군량이 막 다 떨어지니 가후에게 이를 헤쳐 나올 계책을 묻자, 가후가 

"공은 명철함에서 원소를 이기고 용맹에서도 원소를 이기며 사람을 등용하는 데서도 원소를 이기고, 기회를 보아 결단하는 데서도 원소를 이깁니다. 이 4가지 승리조건을 가지고도 반년토록 (적을) 평정하지 못한 것은 단지 만전(萬全)을 기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그 기회를 결단함에 빨리 정해야 합니다."

라 했다. 태조가 옳다고 하고 이에 아울러 병사를 출동시켜 30여리 떨어진 원소의 군영을 포위해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원소군이 크게 궤멸되었고, 하북(河北)은 평정되었다. 태조가 기주목을 맡고, 가후의 벼슬을 옮겨서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삼았다.
 
태조가 형주를 정벌하고 강동을 따라 내려가고자 했다. 가후가 간언하길 

"명공(明公)께서 예전에는 원씨를 격파하였고, 지금은 한남(漢南; 한수(漢水) 이남=형주지역)을 거두어서, 그 위명(威名)은 멀리까지 드러냈고, 군세(軍勢) 또한 큽니다. 만약 옛날 초나라 지역[장강 중류지역, 곧 형주를 말하는 겁니다]의 풍요로움을 타서, 관리와 군사들을 먹이고 백성들을 어루만져 편안케 하여 토지에 편안히 정착해 제 생업을 누리게 하면, 군대를 수고롭게 하지 않고도, 강동(江東)은 머리를 조아리며 복종할 것입니다." 

했다. 태조가 이 말을 따르지 않다가, 군대에 마침내 이로움이 없었다.

주: 신 송지가 보건데 가후의 이번 모략은 당시의 상황에 적합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한수(韓遂)와 마초(馬超)가 관우(關右) 지역을 승냥이처럼 노리고 있었으므로, 위무제는 영도(郢都)에 편안히 앉아있지 못하고 오회(吳會)의 동향을 위협으로 생각하고 있었을 것임이 분명했다. 형주는 손권과 유비가 필연적으로 싸워야 할 곳이었다. 형주 사람들은 유비의 영웅다운 자태에 복종하고 있었으며, 손권의 무력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 이미 오래 되었기 때문에 조씨의 여러 장수들은 그러한 상황을 타개할 능력이 없었다. 조인(曹仁)은 강릉(江陵)을 수비하다가 패하여 퇴로가 차단된 상태였으니, 어떻게 사람들을 편안하게 위로할 수가 있었으며, 어느 시기에 강동 사람들이 항복하겠는가? 조조의 생각은 장차 새로 장강과 한수 일대를 새로 장악하여 양주와 월을 떨게 만들고, 유표가 수전의 도구로 삼았던 것을 손에 넣어 형초(荊楚)의 노를 빌리려고 했던 것이다. 실로 적을 쓸어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며, 국가의 테두리를 확정짓는 큰 기회가 아니었던가? 이러한 승세를 타지 않고 오(吳)를 얻는다면 장차 이보다 더 안전한 다른 기회가 있었겠는가? 적벽대전의 패전은 대체로 운수가 사나웠기 때문이었다. 실재로 전염병이 창궐하여 예리한 기세가 꺾였고, 때마침 남풍이 불어와 불길을 더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하늘이 이와 같이 했는데, 사람이 아무리 노력을 한들 성공을 했겠는가? 그러므로 위무제가 동쪽으로 내려간 것은 계산을 잘못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가후가 이와 같은 계책을 낸 것은 마땅치 않았다. 위무제가 나중에 장로(張魯)를 평정했을 때, 촉나라에서는 하루에도 열 번 씩 두려움에 떨었다. 유비가 아무리 그것을 막으려고 했지만, 제지할 수 없었다. 유엽(劉曄)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석권의 기회를 놓친 것도 실로 중대한 착오였으며, 아무리 후회를 해도 이보다 더한 경우는 없었을 것이다. 이번의 일도 그와 같은 경우였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유엽의 계책은 옳았기 때문에, 가후의 말을 더욱 옳지 않다고 여겼다.”

 
태조가 후에 한수(韓遂)·마초(馬超)와 위수(渭水) 남쪽에서 싸웠는데, 마초 등이 땅을 갈라 화해를 하려고 하면서 아울러 인질을 요구하였다. 가후가 이를 괜찮다고 여기니 거짓으로 허락했다. 또 가후에게 계책을 물어보자 가후가 

"이간질시키면 끝입니다."

라 하니, 태조가 

"(한수와 마초의 동맹을) 풀어 버리겠소."

라 했다. 단 한 번에 가후의 책모를 썼다. 이 말이 『무제기』에 있다. 마침내 한수와 마초를 격파했으니, 본래 가후의 책모였다.
 

이 때 문제(文帝=조비)가 오관장(五官將)이 되었고, 임치후(臨 侯) 조식(曹植=조비의 동생)은 재주와 이름이 한창 융성하여, 각자 추종하는 무리(黨與)가 있었고, 후계자의 자리를 빼앗으려는 의론이 있었다. 문제가 사람을 시켜 가후에게 자신을 굳건히 지키는 방법을 묻자 가후가 

"원컨대 장군께서는 덕과 도량을 널리 존숭하시고, 몸소 선비의 본업을 지니시고,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하시어, 자식 된 도리를 어기지 마십시오. 이와 같이 하시면 됩니다."

라 했다. 문제가 이 말을 따라 스스로 깊이 수양했다. 
 
태조가 또 한 번은 주위를 물리치고 가후에게 물었는데, 가후는 묵묵히 대답하지 않았다. 태조가 

"경과 같이 얘기를 나누려 했는데 대답이 없으니 어찌된 일이오?"

라 하니, 가후가 

"적통(嫡統)을 계승하는데 생각한 바가 있어서, 곧장 대답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라 했다. 태조가 무슨 생각이오? 라 묻자, 가후가 

"원본초(袁本超)와 유경승(劉景升=유표) 부자를 생각했습니다."

라 했다. 태조가 크게 웃으며, 이에 마침내 태자를 정했다. 
 
가후는 스스로 태조의 옛 신하가 아니라 하여, 책모가 깊고도 길었으나 시기와 의심을 받을까 두려워해, 문을 닫고 스스로를 지키며, 물러나서는 사사로이 통교하지 않고, 자식들이 시집 장가드는데 고위직의 집안과는 사돈을 맺지 않으니, 천하에서 지모와 계획을 의론하는 것이 그에게 돌아갔다.
 
문제가 즉위하자, 가후를 태위(太尉)로 삼았다.

주 : 『위략(魏略)』에 이르길 문제가 가후가 태조에게 대답한 것(장자를 후계자로 세워야 한다는 것)을 얻었기에, 즉위하자 제일 먼저 상사(上司=태위)로 올려준 것이라고 했다.

주: 《순욱별전(荀勗別傳)》진나라에서 사도(司徒)가 궐석이 되자 진무제가 순욱에게 어떤 사람이 좋겠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순욱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삼공은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자질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 등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전에 위문제가 가후를 삼공으로 삼자, 손권이 비웃었다고 합니다.”


작위를 올려 위(魏) 수향후(壽鄕侯)로 하고[아 직 위 문제가 한 헌제에게서 제위를 찬탈하기 전, 즉 아직 한나라 황제가 있고 문제는 위나라 왕으로 있던 시기이며, 또 가후가 받은 봉작이 한나라에서 받은 작위가 아니라 위나라에서 받은 작위라는 뜻으로, '위 수향후'라고 한 것입니다.] 식읍 3백호를 늘려 이전과 합쳐 8백호로 하였다. 또 식읍 2백호를 나눠 어리 아들 가방(賈訪)을 열후로 봉했다. 장자인 가목(賈穆)은 부마도위[駙馬都尉=황제의 사위]로 삼았다. 
 
문제가 가후에게 묻기를 

"내가 명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정벌해 천하를 통일하고 싶은데, 오와 촉 중에 어느 쪽을 먼저 해야 하오?"

라 하니, 가후가 

"공격해 취하는 자는 병권(兵權)을 우선하지만, 근본을 세우는 자는 덕화(德化)를 숭상합니다. 폐하께서 때에 응하시어 선양(禪讓)을 받으셨으니 온 천하에 임하여 어루만지시며, 만약 문덕(文德)으로 편안케 하시고 그 변화를 기다리신다면 평정하기에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오와 촉은 비록 작은 소국(小國)이지만 험준한 산과 물에 의지하여 있는데다, 유비에는 웅대한 재주가 있고 제갈량은 나라를 잘 다스리며, 손권은 허실(虛實)을 알아보며 육손은 병세(兵勢)를 잘 보니, 험준한 곳에 웅거하여 요해지를 지키고 강과 호수에 배를 띄워 두고 있으니, 모두 도모하기 어렵습니다. 용병(用兵)의 도에는 뛰어난 점을 먼저하고 싸우는 것을 뒤로 하며, 적을 헤아리고 장수를 논하는 것이니, 그래야 모두 남겨지는 계책이 없습니다. 신이 여러 신하들을 헤아려 보건대 유비와 손권에 대적할 자가 없고, 비록 하늘의 위엄을 임한다 해도 만반으로 준비한 형세를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옛날 요임금께서 간척무(干戚舞) 추자 묘(苗)족의 복종이 있었으니[간척무는 방패와 창을 들고 추는 춤인데, 무(武)를 상징하는 춤입니다], 신은 지금은 마땅히 문(文)을 먼저하고 무(武)를 뒤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라 했다. 문제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후에 강릉(江陵)의 전역(戰役)을 일으키니, 군사들이 많이 죽었다.
 
가후가 나이 77세에 죽으니 시호를 숙후(肅侯)하 했다. 아들 가목(賈穆)이 뒤를 이으니, 지위는 군수를 지냈다. 가목이 죽자 그의 아들 가모(賈模)가 뒤를 이었다.

주:《세어(世語)》가모는 진(晋)의 혜제(惠帝) 때 산기상시(散騎常侍)와 호군장군(護軍將軍)이 되었다. 가모의 아들 가윤(賈胤)과 가감(賈龕), 종제인 가필(賈疋)은 모두 진에서 높은 관직에 올랐다.


평하여 말한다. ― 순욱은 인품이 청아하고 수려하며, 학식이 통달하고 아정하여 왕을 보필할 수 있는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기민하게 헤아리고 먼저 식별하는 능력은 있었으나 그의 뜻을 충분히 살리지는 못했다.

[주] 세상의 논자들은 순욱이 위씨魏氏를 보좌하며, 한漢의 제위를 기울어지게 해, 군신의 지위가 바뀐 것은 실로 순욱의 책임이라며 많이 비웃었습니다. 비록 만년에 다른 의견을 세우나, 운수가 바뀌는 것을 구하지 못하여, 공은 이미 의義를 거슬러서, 식견 또한 이를 괴로워했습니다. 진씨陳氏의 이러한 평은, 대략 또한 세상의 식견과 같습니다. 신 배송지가 이러한 견해가 비롯됨을 생각해보니, 참으로 그의 원대함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순욱이 어찌 위무魏武제의 의지와 기개를 알지 못했고, 쇠한 한의 곧은 신하가 아니었겠습니까? 진실로 당시에 왕도가 이미 쇠해져, 재앙이 이미 이르러 호걸들은 범과 같이 노려보고 사람들은 다른 마음을 품어, 난리를 평정할 자질, 장순仗順할 책략은 있지 않아, 한실漢室의 멸망은 급작스러웠고 백성의 무리는 병들었습니다. 대저 당대의 영재를 도와, 어지러운 천하를 바로잡고 운수를 지켜내길 원했는데, 이 사람이 함께 하지 않았으면 누가 함께 했겠습니까? 그러므로 위급한 병을 경륜해, 몸과 목을 구하는 것과 같아, 낭떠러지 가운데에서 자발적으로 움직여 크게 형통함에 이르러서, 세상 사람들이 항해가 계속됨을 만났고, 유劉씨의 종묘는 24년의 제위까지 미쳤는데, 어찌 순생荀生의 본래 계획이 아니며, 어질고 너그러움이 멀어진 것이겠습니까? 패업이 이미 성함에 이르러 한을 멸망시키는 행적이 나타나니, 연후에 명망을 망치며 충절을 위해 목숨을 버려서, 본래의 뜻을 펴 그 해에 대정大正을 갖추었고, 성심을 백대에 드러내, 책임은 중하고 길은 머나, 품은 뜻과 행실이 바르게 섰다고 이를 수 있습니다. 이를 두고 채우지 못했다고 이름은, 거의 무고하는 것입니다!  


순유와 가후는 거의 잘못된 계획을 세우는 적이 없었다. 이 두 사람은 권모에 빈틈이 없었고, 변화에 따르는 융통성이 있었으니, 장량과 진평에 버금간다고 할 수 있다![주]

[주] 신송지: 사실 열전이라고 하는 체재는 비슷한 인물을 서로 다르게 하는 것인데, 장량과 진평을 같은 대열로 놓은 것은 다소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 왜냐하면 전자는 청운지사(靑雲之士)이니 진실로 진평과는 다른 범주에 속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나라의 모신(謀臣)은 이 두 사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진수가 이 두 사람을 같은 대열에 둔 것은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 이와 비슷한 취지에서 가후를 정욱(程昱)과 《곽가전(郭嘉傳)》〈위서(魏書)〉 14권에 편입하지 않고 이순(二荀)과 병렬시킨 것 또한 그 분류방법이 잘못된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순유와 가후의 사람됨은 야광(夜光)과 증촉(蒸燭)의 차이인 것이다. 이것들이 비추는 것은 같지만 질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진수가 순유와 가후를 평가하면서 같은 대열에 둔 것은 구별의 마땅함을 바라보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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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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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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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22
11:32:46
(*.104.141.18)
세어가 세설신어로 되어 있길래 수정하고(…) 다른 곳이 출처로 되어 있던 것을 수정했습니다. 모든 주석이 다 있는 것 같군요.

세상의 논자 부분은 뒷부분이 짤려있어서 처사군님 번역으로 교체합니다. http://blog.naver.com/kyspert/220058731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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