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환袁渙은 자가 요경(曜卿)이고 진군(陳郡)의 부락현(扶樂縣) 사람으로, 부친 원방(袁滂)은 한나라의 사도(司徒)를 지냈다.


원굉(袁宏)의 한기(漢紀)에 따르면, 원방의 자는 공희(公熈)였다. 사람이 소박하고 순수하고 큰 욕심이 없었다. 사람의 단점을 절대로 말 안했다. 당시 권세가 대단했는데, 혹시 다른 사람이 화가 미칠까봐서 조정에서는 항상 워방은 중립적인 의견을 견지했고 그리서 애증(愛憎)이 미치지 않았다.


그 당시 세도가의 자제들은 대부분 법도를 어겼으나, 원환은 청아하고 고요하며 행동을 함에 있어서 반드시 예법에 따랐다. 군(郡)에서 명령을 내려 원환을 공조(功曹)로 삼으니, 군종의 간사한 관리들이 모두 스스로 사직하고 떠나버렸다. 그 후에 공부(公府)에 불려가 우수한 성적으로 추천되어 시어사(侍御史)로 승진했다. 초현(譙)의 현령(令)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유비(劉備)는 예주자사(豫州)가 되자, 원환을 무재(茂才)로 추천했다. 그 후에 장강(長江)과 회하(淮河) 지대에서 환란을 피해 다니다가 원술(袁術)에게 임용되었다. 원술은 매번 자문을 받으러 그를 방문했는데, 원환은 항상 정론(正論)을 폈으므로 원술을 어길 수 없었으며, 원환을 공경하여 감히 예의에 어긋나게 하는 일이 없었다. 오래지 않아 여포가 부릉(阜陵)에서 원술을 공격하자, 원환은 먼저 원술을 따라가려고 했으나, 여포에게 억류되었다. 여포는 처음에는 유비와 친하게 지냈으나, 나중에 틈이 벌어졌다. 여포(呂布)가 원환에게 유비를 꾸짖고 모욕하는 편지를 쓰게 하고자 했으나, 원환은 응하지 않았다. 여포가 두세 차례 그에게 강요했으나, 원환이 허락하지 않자 매우 화가 나서 무기로 위협하며 말했다.

“이 일을 하면 살려주고, 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

원환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웃으면서 그에게 말했다.

“나 원환은 오직 덕망이 있는 사람이라야 다른 사람에게 치욕을 느끼도록 할 수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욕하는 것으로써 치욕을 느끼게 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소. 만일 유비가 정말로 군자라면, 또한 장군의 말에 치욕을 느끼지 않을 것이며, 유비가 정녕 소인이라고 해도 장차 장군의 생각에 대해 보복할 것이니, 이렇게 되면 치욕은 이쪽에 있는 것이지, 그 쪽에 있는 것이 아니오. 하물며 나 원환이 다른 날 유장군(劉將軍)을 섬겼던 것은 마치 오늘 장군을 섬기는 것과 같은 이치요. 만일 내가 하루 아침에 이곳을 떠나 장군을 욕하면 괜찮겠소?”

여포는 이 말을 듣고 부끄러워 그만두었다.

여포가 주살된 후, 원환은 태조(太祖)에게 돌아왔다. [주1]

[주1]《원씨세기(袁氏世紀)》에는 원환이 조조에게 귀순하는 장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여포가 멸망할 때 진군(陳群) 부자도 역시 여포의 군중에 있었다. 조조를 만났을 때 그들은 모두 정중히 배례를 올렸지만 원환은 읍을 했을 뿐 제대로 예를 갖추지 않았다. 조조는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당시에 조조는 여러 관리들에게 각자 수레를 준비하여, 여포의 군중에 있던 물건들 가운데 가지고 싶은 것을 싣고 가게 했다. 많은 사람들은 귀중품을 가득 수레에 실었지만, 원환은 책 수 백 권과 양식만을 자신의 수레에 실었다. 여러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크게 부끄럽게 생각했다. 원환은 가까운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약 내가 군대의 지휘를 맡는다면 군사들에게 행군에 필요한 양식을 풍족하게 챙기라고 명령을 내릴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권한이 내게는 없다. 내가 가장 후회스럽고 한탄스러운 것은 여(厲)라는 이름을 얻게 하는 것이다.’

조조는 이후로 원환을 더욱 중용하게 되었다.”

원환이 진언했다.

“무기란 상서롭지 못한 도구이므로,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사용해야 합니다. 전쟁을 하려면 도덕에 입각하고, 정벌을 하려면 인의(仁義)에 입각하며, 아울러 그 백성을 어루만져 주고 폐해를 제거해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진실로 그들과 함께 죽을 수 있고, 그들과 더불어 살 수 있습니다. 큰 난리가 난 지 십수 년이 되었으니, 백성들이 안정을 바라는 것은 나무 위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보다 더 심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나운 난동이 가라앉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이겠습니까? 이 점을 생각해 보면 정치가 그 바른 길을 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듣건대, 훌륭한 군주는 세상을 구제하는 데 뛰어나므로 세상이 혼란하면 의로움(義)으로써 그것을 구제하며, 시대가 허위로 차 있으면 소박함을 가지고 그것을 달래 줍니다. 그러나 세상이 다르고 사정이 변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법도와 다른 점이 있으므로,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릇 제도의 결손과 보충은 예나 지금이나 반드시 같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만일 천하를 모두 사랑할 수 있으면 그것을 뒤집어 바른 길로 가게 해야 하며, 비록 무력으로써 동란을 평정하고 도덕으로써 그들을 구제한다고 할지라도 진실로 모든 군주가 쉽게 바꿀 수 없는 원칙입니다. 조공의 뛰어난 식견은 세상 사람을 넘어섰습니다. 과거의 군주가 민심을 얻는 이유가 있었는데, 공은 그것을 근면하게 실천해 나가고 있으며, 현재의 군자가 그의 민심을 잃어버리는 까닭이 있었는데, 공은 이미 그것을 경계하였습니다. 온 세상이 공에게 의지하여 위험과 멸망의 환란을 벗어나게 되었지만, 백성들은 그 의로움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직 공만이 그들을 가르치는 위치에 서게 된다면, 천하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다행스럽겠습니까?”

태조는 그의 건의를 깊이 받아들였으며, 그를 패(沛)의 남북도위(南北都尉)에 임명했다. 그 당시 백성들을 새로 모집하여 둔전을 개설했지만, 백성들은 달갑게 생각하지 않고 대다수가 도망쳤다. 원환이 태조에게 말했다.

“백성들은 예로부터 향토에 안주하고 이주하는 것을 싫어하였는데, 이런 습속(習俗)은 갑자기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뜻에 따라서 행하기는 쉽지만, 그것을 거슬러 행하기는 어렵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들의 의견을 따름이 마땅합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자들을 즉시 받아들이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억지로 강요해서는 안됩니다.”

태조가 그의 의견에 따르자, 백성들은 크게 기뻐하였다. 얼마 후에 태조는 원환을 양국(梁國)의 상(相)으로 승진시켰다. 원환은 매번 모든 현에 칙령을 내려 말했다.

- 홀아비나 과부 중에서 나이가 많은 자들을 잘 보호하고, 효자와 정절을 지킨 부인을 표창하라. 속담에 ‘세상이 잘 다스려지면 예교(禮敎)가 모두 상세하고, 세상이 혼란스러우면 예교가 소략해지고 태만해진다’라고 했는데, 상세하고 간소한 것은 전적으로 사람들이 요량하여 처리하는 데 달려 있다. 지금은 비록 소란스런 시대이므로 예의로써 민중을 교화하기가 어렵지만 우리들이 대처해 나가는 방법은 있을 것이다. -

원환은 정치를 하면서 교화와 훈계를 숭상하고 관대하게 생각한 이후에 실행하였고, 겉으로는 온화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결단력이 있었다. 병으로 관직을 사임했지만, 백성들은 그를 사모하였다.

나중에 조정에 불려가 간의대부(諫議大夫)와 승상군좨주(丞相軍祭州)가 되었다. 앞뒤로 상을 받은 것이 매우 많았으나, 그것을 전부 나누어 주고 집안에 쌓아 두는 경우가 없었고, 전지(田地)나 가업(家業) 같은 것도 전혀 안중에 없었다. 부족한 것이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서 꿔왔으며, 의혹을 살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으므로, 그 당시 사람들은 그의 청렴함에 감복했다.
[주2]

[주2]《위서》에는 법령에 관한 그의 판단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했다.

곡숙장(穀熟長) 여기(呂岐)는 주연(朱淵)과 원진(爰津)을 유능하게 생각하여 공부를 시켯다가 돌아오자 그들을 불러서 등용하려고 했다. 서로 만난 자리에서 주연의 사우(師友)인 좨주(祭酒)가 관청의 바깥으로 나오자, 원진은 이미 좨주가 결정되었다고 의심했다. 주연 등은 각자 집으로 돌아가 관직을 받지 않았다. 크게 화가 난 여기는 관리와 백성들에게 주연 등을 잡아오게 하여 모두 때려죽였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 일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했다. 원환이 여기를 탄핵하지 말라고 하자, 주부 손휘(孫徽)등이 이렇게 따졌다.

“주연 등의 죄는 죽을 만한 것이 아닙니다. 장리(長吏)가 자기 마음대로 죽인 것은 의에 어긋나지 않습니까? 공자께서는 ‘그릇이나 이름만은 다른 사람에게 빌려줄 수 없다( 唯器與名, 不可以假人)’1)이라고 했습니다. 사우라고 말하는 사람을 죽였으니 이는 형벌과 이름이 서로 어긋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가르침으로 삼을 만한 것이 못됩니다.”

원환은 이렇게 말했다.

“주부가 그렇게 요청하지 않으면 그것이 죄가 된다. 그러나 주연 등이 죽을만한 죄가 아니라는 말은 잘못이다. 대체로 사우라는 이름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있다. 그러므로 군주에게도 사우가 있으며, 사대부에게도 사우가 있다. 군주가 사우에게 관직을 줄 때는 그 신하를 공경하기 위함이다. 죄가 있어서 벌을 줄 경우는 국법을 준수하기 때문이다. 지금 그 죄를 논하지 않고 사우를 죽였다고 하는 것은 곧 잘못된 일이다. 주부가 제자를 스승이라는 이름으로 죽였다고 하여 군주가 신하를 죽인 사실과 같다고 하지만 그것은 다른 일이다. 대체로 성현이 성철(聖哲)이 다스릴 때는 시의에 적절한 행동을 하게 되므로, 반드시 일상적인 기준에 따르지 않고 당시의 상황에 따르게 된다. 요즈음은 세상이 어지러워서 백성들이 윗사람을 함부로 능멸하므로, 비록 군주는 스스로 존중받고 신하는 자신을 낮추는 일에 힘을 써야 하지만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더라도 그러한 경우는 죽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위(魏)나라 건국 초기에 그는 낭중령(郎中令)이 되었고 어사대부(御史大夫)의 사무를 대행하였다. 원환이 태조에게 말했다.

“이제는 천하의 큰 혼란이 제거되었으니, 문신(文臣)과 무신(武臣)을 나란히 등용하는 것이 국가를 오래 지속시키는 방책입니다. 생각해 보건데, 서적을 많이 수집하고 이전 시대의 성인의 가르침을 밝혀서 백성들이 보고 듣는 것을 바꾸어, 온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그 교화풍조에 복속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복종하지 않는 먼 곳의 사람들도 문덕(文德)으로써 불러오도록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태조는 그의 진언이 옳다고 생각했다. 당시에 어떤 사람이 유비가 죽었다고 전해오자, 모든 신하들이 태조에게 축하의 말을 올렸다. 그러나 원환은 일찍이 유비에 의하여 관리로 추천된 적이 있었으므로 혼자만은 축하하지 않았다. 원환이 관직에 임명된 지 몇 년 만에 죽자, 태조는 그의 죽음에 눈물을 줄줄 흘렸으며 그의 집에 곡식 2천 석을 보내주고, 널리 알려 말했다.

“태창(太倉 : 정부의 곡식창고)의 곡물 1천 석을 낭중령(원환)의 집에 주도록 하라.”

또 널리 알렸다.

“궁중에 비축해 놓은 곡물 천 말을 원환의 집에 주도록 하라.”

사정을 알지 못한 사람들은 태조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태조는 다시 교령(敎令)을 내렸다.

“내가 태창의 곡식을 사용한 것은 관청의 법이며, 궁중의 곡식을 이용한 것은 친구간의 우정을 나타냄이다.”

또 태조는 원환이 옛날에 여포의 명령을 거부했던 일을 듣고 원환의 사촌 동생 원민(袁敏)에게 물었다.

“원환은 어느 정도 용감한가?”

원민이 대답했다.

“원환의 외모는 온화하고 부드러우나, 대의(大義)가 걸린 상황에 직면하고, 위난(危難)에 처해서는 맹분(孟賁)과 하육(夏育)과 같은 고대의 용사(勇士)들도 그보다 더 용감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원환의 아들 원간(袁侃)도 맑고 순수하며 조용하고도 소박한 사람으로 아버지의 면모가 있었으며, 군수(郡守)ㆍ상서(尚書)를 역임했다. [주3]

[주3]《원씨세기》에는 원환의 아들 4명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원환에게는 원간, 원우(袁寓), 원오(袁奧), 원준(袁準)이라는 4명의 아들이 있었다. 원간은 자를 공연(公然)이라고 했으며, 논의를 할 때에는 맑고 당당했고 유순하지만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올바른 태도를 지녔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과 원만한 교제를 했다. 나라가 망하고 흥하는 시기에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 함께 일을 하자고 했지만, 그는 항상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당시의 사람들은 그의 그러한 인품을 높이 평가하여 칭송했다. 상서를 지내다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 원우는 자를 선후(宣厚)라 했으며, 치밀한 논리로 무장한 언변을 지녔으며 일의 핵심을 잘 파악했다. 특히 도가의 학설을 좋았지만, 어려서 병이 들어 관직에 진출하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원오는 자를 공영(公榮)이라 했으며, 풍속을 장려하고 항상 이치에 맞는 말만 골라서 했다. 광록훈을 지내고 세상을 떠났다. 원준은 자를 효니(孝尼)라 했으며 충직하고 공정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었다. 아랫사람에게도 묻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뛰어나다는 점을 인정했다. 세상사가 험난해지면 항상 깨끗이 물러났으며 무리를 하여 관직에 진출하려고 생각하지 않았다. 치세에 힘써야 할 10여만자의 저술을 남겼으며, 《역경》, 《주관(周官)》, 《시경》 등에 전(傳)을 남겼다. 또한 오경에 두루 능통하여 성인이 남긴 미언(微言)을 빠짐없이 세상에 전했다. 순작(荀綽)은 《구주기(九州記)》에서 원준을 준재라고 평가했으며, 태시 년간에 급사중을 지냈다고 했다. 진수는 주의 말미에 원시의자순은 대를 이어 명성을 날렸으며 당시에도 부귀를 누렸다고 했다.

이전에 원환의 사촌 동생 원패(袁覇)는 공정하고 엄격하며 공적과 재능이 있었으므로 위나라 초기에 대사농(大司農)이 되었고, 같은 군(郡)의 하기(何夔)와 나란히 명성을 알렸다. 그리고 원패의 아들 원량(袁亮)과 하기의 아들 하증(何曾)ㆍ원간 또한 일제히 세상에 이름이 있었고 서로간에 우의가 좋았다. 원량은 마음이 곧고 굳건하고 학식과 품행이 있었으며, 하안(何晏)과 등양(鄧颺) 등의 인물됨을 싫어하여 글을 지어 그들을 가혹하게 비판했다. 관직은 하남윤(河南尹)과 상서(尙書)까지 이르렀다.


진제공찬에서 말하길: 원량(袁亮)의 아들은 원찬(袁粲)으로, 자는 의조(儀祖)이다. 문학(文學)이 박식(博識)하여, 여러 유관(儒官)을 거쳐 상서(尚書)에 이르렀다.

원패의 동생 원휘(袁徽)는 평소 유학에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천하의 동란을 만나 교주(交州)로 피난하였고, 사도로 초빙되었지만 나가지는 않았다.


袁宏漢紀曰:初,天下將亂,渙慨然歎曰:「漢室陵遲,亂無日矣。苟天下擾攘, 逃將安之?若天未喪道,民以義存,唯彊而有禮,可以庇身乎!」徽曰:「古人有言:『知機其神乎』!見機而作,君子所以元吉也。天理盛衰,漢其亡矣!夫有大功必有大事,此又君子之所深識,退藏於密者也。且兵革既興,外患必眾,徽將遠跡山海,以求免身。」及亂作,各行其志。    


원굉의 한기에 이르길 : 당초에 천하가 어지러워지려할 때 원환이 개연히 탄식하며 말하길 「한실이 쇠퇴하고 난리가 곧 들이닥칠 텐데 진실로 천하가 어지러워지면 어디에 도망쳐 몸을 안전하게 해야 하는가? 만약 하늘이 도리를 잃지 않았다면 백성들이 의로움을 보존하였을 것이니 오직 강토 안이 예법이 있어 가히 몸을 보호할 수 있겠구나 !」 원휘가 말하길 「옛 사람의 말에 이르길 『때를 아는 것이 신묘하다!』고 하였는데 때를 보아 일을 하는 것이 군자가 크게 길한 이유이다. 하늘의 도리에는 성함과 쇠함이 있으니 한조가 장차 멸망하겠구나! 무릇 큰 공이 있으려면 반드시 큰 재앙이 있으니 이가 바로 군자가 깊이 알아 물러나 사람들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숨는 이유이다. 또한 군대가 이미 일어났으니 외환이 반드시 많아질 터인데 휘(원휘 본인)는 장차 멀리 산해로 떠나 이로써 신체가 재앙을 당할 것을 면하고자 한다. 」난리가 일어남에 이르러 각자가 자기의 뜻을 따라 행하였다.


원휘의 동생 원민(袁敏)은 무예에 뛰어났고 물을 다스리는 것을 잘하여 관직이 하제알자(河堤謁者)에 이르게 되었다.

분류 :
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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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3
12:33:00 (*.104.2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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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6.29
23:57:04
(*.52.89.87)
맨위의 주석 하나 추가했습니다.

코렐솔라

2013.07.15
13:06:21
(*.0.203.172)
배주 추가했습니다.

구라뱅뱅

2013.08.12
11:37:26
(*.49.168.253)
晉諸公贊曰:亮子粲,字儀祖,文學博識,累為儒官,至尚書
진제공찬에서 말하길 : 원량(袁亮)의 아들은 원찬(袁粲)으로, 자는 의조(儀祖)이다. 문학(文學)이 박식(博識)하여, 여러 유관(儒官)을 거쳐 상서(尚書)에 이르렀다.

코렐솔라

2016.09.23
12:12:13
(*.211.96.231)
원휘의 숨겠다는 말의 번역은 dragonrz님의 번역입니다. 이걸로 원환전의 모든 주석이 번역 완료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http://rexhistoria.net/158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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