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田疇는 자가 자태(子泰)이고 우북평군(右北平郡) 무종현(無終縣) 사람이다. 독서를 좋아하고 검술에 뛰어났다.

초평(初平) 원년(190)에 의병(義兵)이 궐기하자 동탁(董卓)은 헌제(帝)를 장안(長安)으로 옮기게 했다. 유주목(幽州牧) 유우(劉虞)가 탄식하며 말했다.

“역적 같은 신하가 난을 일으켜 조정은 유랑하게 되었고, 온 세상은 놀랐으며, 천하 사람들 중에 아무도 굳은 의지가 없구나. 나 자신은 한나라 왕실의 유로(遺老)로서 스스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없구나. 지금 사신을 파견하여 화제에 대한 신하의 절개를 보여 주고자 하는데, 어디서 명령을 욕되게 하지 않는 선비를 찾을 수 있으리오?”

모든 사람들의 의견이 일치하여 말했다.

“전주가 비록 나이는 적지만 대부분이 그의 기특함을 칭찬한다.”

당시 전주의 나이는 스물 둘이었다. 유우는 곧 예의를 갖추어 초청하여 서로 만나자 그를 매우 칭찬하고 마침내 종사(從事)에 임명하고 그를 위하여 거기(車騎)를 구비했다. 떠나려고 할 때, 전주가 유우에게 말했다.

“지금, 길은 험준하고 끊어졌고 도적들은 종횡으로 출몰하는데, 만일 자칭하여 관에서 파견되어 명을 받들고 가면, 여러 사람들에게 이름이 알려지게 됩니다. 원컨대 저는 사사롭게 가서 사명을 완수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유우는 그의 말을 따랐다. 전주는 집으로 돌아온 후에 그의 식객과 젊은 사람 중에서 용감한 자와 그를 우러러 사모하여 수행하기를 원하는 사람을 선발하여 스물네 필의 말에 나누어 태우고 모두 앞으로 가게 했다.

[주:《선현행장(先賢行狀)》에 다르면 전주는 풀발에 앞서서 유우를 찾아가 몰래 상의를 하게 되었다. 전주는 유우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주상은 어리고 유약하기 때문에 간신들이 천명을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고 있습니다. 만약 표를 올린다면 기밀이 노출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 공손찬(公孫瓚)은 지금 군사들을 모으고 있으므로 일찍 도모하지 않는다면 나중에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유우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유우는 몸소 나와서 송별연을 베풀어 주면서 그를 떠나보냈다. 길에 오른 후, 전주는 즉시 길을 바꿔 직접 서관(西關 : 居庸關)을 오르고 국경을 넘었으며, 북산(北山 : 陰山山脈)을 따라가다가 삭방(朔方)으로 향했고, 사잇길을 통해 나아가 마침내 장안에 도착하여 황상을 뵙고 사명을 다했다. 황제는 전주를 불러 기도위에 제수하였다. 전주는 천자가 수도(洛陽)를 떠나 안정되지 못하므로 영예와 은총을 누릴 수 없다고 생각하여 굳게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그의 의로움을 높이 샀다. 삼부(三府 : 太尉ㆍ司從ㆍ司空 등 삼공의 役所)에서 한결같이 초빙했지만 모두 나가지 않았다. 천자의 보명(報命)을 받은 후에 말을 달려 유주에 돌아오는데 도착하기도 전에 유우는 이미 공손찬에게 살해되었다. 전주는 돌아오자 유우의 묘를 찾아 제사지내고 장표(章表)를 펼치고 읽으며 눈물을 흘리면서 곡(哭)을 하고 떠났다. 공손찬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노여워하며 포상금을 걸고 전주를 찾아 체포하고는 말했다.


“너는 어찌하여 유우의 묘에 사사로이 곡을 하였으며, 나에게 장보(章報 : 상주문에 대한 답서)를 보내오지 않았는가?”

전주가 대답했다.

“한나라 왕실이 쇠약하여 무너져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데, 오직 유공(劉公 : 유우)만은 충성과 절개를 잃지 않고 있소. 장보에서 한 말은 장군에 대해서 찬미한 것이 없으니, 아마 당신이 들어도 즐거워할 것이 없을 것이오. 그러기에 나는 장군에게 바치지 않았던 것이오. 또한 장군께서 바야흐로 큰 일을 일으켜 하고자 하는 바를 구하려는데, 이미 아무런 죄도 없는 주군(主君 : 유우)을 죽였으며, 또 다시 정의를 지키려는 신하(전주 자신)에게 보복하려고 하니, 진실로 이런 일을 한다면, 연(燕)ㆍ조(趙)의 인물들은 모두 동쪽 바다로 가서 죽음을 택할 것이오. 어찌 차마 장군을 따르려는 자가 있겠소?”

공손찬은 그의 답변을 용기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풀어주고 주살하지는 않았으나, 그를 군영의 아래에 가두어 놓고 그의 옛 친구들을 오지 못하게 금하고, 아무도 그와 통하지 않게 했다. 어떤 사람이 공손찬에게 말했다.

“전주는 의로운 인물이거늘, 당신은 예를 갖추어 대하지는 않고, 오히려 또다시 그를 가두었으니, 민심을 잃을까 두렵습니다.”

공손찬은 즉시 전주를 석방하고 보내주었다.
전주는 북쪽으로 돌아간 이후에 모든 종족(宗族)과 그에게 의지하여 따라온 수백 명을 데리고, 땅을 깨끗이 쓸고 맹서하여 말했다.

“주군의 원수를 갚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세상에 서 있을 면목이 없구나!”

마침내 서무산(徐無山)의 깊고 험준한 산속으로 들어가 평탄하고 넓은 곳을 만들어 살 곳을 정하고 몸소 밭을 갈며 부모를 봉양하였다. 백성들이 그에게 귀속하여 몇 년 사이에 5천여 가구나 되었다. 전주는 그들 장노(長老)들에게 말했다.

“여러분들은 나 전주를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고 먼 곳으로부터 와서 서로 의탁했소. 지금은 인구가 많아 이미 도읍을 이루었지만, 서로 한 가지로 통일하지 못하고 있으니, 장기간 안정된 방책이 없게 될까 걱정이오. 원컨대 현명하고 능력있는 사람을 추천하여 우리들의 맹주로 삼읍시다.”

모두 말했다.

“좋습니다.”

그리고는 공동으로 전주를 추천하였다. 전주가 말했다.

“처음 우리들이 이곳으로 왔을 때는 한 순간의 안락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들의 큰 일을 도모하여 원한을 품고 치욕을 씻어야 합니다. 우리의 뜻을 실현시키지 못함을 마음속으로 걱정할 때, 경박한 무리들은 서로 침범하여 치욕스럽게 하고, 한 순간의 쾌락을 즐기며 깊이 도모하고 멀리 생각하는 일이 없게 됩니다. 저에게 어리석은 계책이 서 있는데, 원컨대 여러분들과 함께 이것을 시행하면 가능할 듯한데 어떻습니까?”

모두 대답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주는 살인ㆍ상해ㆍ권리침범ㆍ절도ㆍ분쟁에 관한 법령을 서로 약속하여 제정했다. 심하게 법령을 어긴 자는 사형에 처할 수 있게 하고, 그 이하의 죄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20여 개의 항목이 있었다. 또 시집가고 장가드는 예의에 관한 것도 제정하고, 학교를 세워 학업을 강의하였으며, 그들에게 널리 시행했다. 많은 사람들이 모두 이렇게 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생각하였으며, 길에 떨어진 물건조차도 줍지 않을 지경이었다. 북방지대는 마음을 합쳐 그의 권위와 신뢰에 복종하였다. 오환족과 선비족은 각기 통역과 사신을 파견하여 전주에게 선물을 주고 공물을 바쳤다. 전주는 모두 어루만지고 받았으며, 그들로 하여금 변방지역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했다. 원소가 몇 차례 사절을 파견해 초빙하고자 명령하고, 또 장군의 인(印)을 주어 전주가 통솔하는 사람들을 거두려고 했는데, 전주는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원소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아들 원상(尚)이 또 전주를 불렀으나, 전주는 끝까지 가지 않았다.

전주는 항상 오환족(烏丸)이 과거에 그의 군(郡 : 우북평군)에 있는 다수의 고관(高官)을 살해한 것을 원망하며, 오환을 토벌하려는 뜻이 있었으나 자신의 역량만으로는 어쩔 수 없었다.

건안(建安) 12년(207)에 태조가 북쪽으로 가서 오환을 정벌하였는데, 대군이 도착하기 전에 먼저 관리를 보내 전주를 불렀으며, 또 전예(田豫)에게 태조의 뜻을 전달하도록 명령했다. 전주는 그의 문하 사람들에게 긴급히 여장을 꾸리도록 하였다. 문인이 그에게 물었다.

“옛날 원공(袁公)은 당신을 사모하여 예물과 명령을 다섯 차례나 보내왔지만, 당신은 도의를 견지하고 따르지 않았습니다. 지금 조공의 사자가 겨우 한 번 왔는데, 당신은 오직 태조에게 미치지 못할 것을 걱정하고 있으니, 이는 무엇 때문입니까?”

전주는 웃으면서 그들에게 대답했다.

“이것은 그대들이 알지 못하는 일이오.”

그리고는 사자를 따라가 태조의 군대 앞에 도착했다. 태조는 그를 사공호조(司空戶曹)의 속관으로 임명하고, 친히 접견하며 몇 가지 문제에 관해 물었다. 다음날, 태조가 명령을 내려 말했다.

“전자태(田子泰 : 전주)는 내가 부리는 관리가 되기에는 마땅하지 않은 사람이다.”

즉시 그를 수재(秀才)로 천거하고 수현(蓚縣)의 현령에 임명했지만, 그로 하여금 임지로 가게 하지는 않고 군대를 잠시 무종(無終)에 머물도록 했다. 그 당시는 마침 비가 내리는 여름이었는데, 무종은 해안을 따라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도로가 막혀 통하지 않았다. 적은 또 샛길을 차단하여 지키고 있었으므로, 태조의 대군은 나아갈 수 없었다. 태조는 이것을 걱정하다가 전주에게 물으니, 전주가 말했다.

“이 길은 매년 가을과 여름에는 항상 물이 가득합니다. 얕다고 해도 수레와 말이 통과하지 못하고, 깊다고 해도 배가 운행할 수 없으니, 오랜 시간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옛날 북평군(北平郡)의 군치(郡治)는 평강(平綱)에 있었고, 길은 노룡(盧龍)에서 나와 유성(柳城)에 이르렀습니다.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연간 이래로 이 길이 무너져 내려 끊어진 지 2백 년이 되었는데, 좁고 작은 지름길이 있어 통행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적은 승상의 대군이 무종에서 나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물러날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느슨하게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군대를 조용히 철수시키고 노룡의 입구로부터 백단(白檀)의 험난함을 뛰어넘고 텅빈 곳을 나온다면, 길은 가깝고 편리할 것이고, 그들이 아무런 준비를 하고 있지 않을 때에 갑자기 덮치면, 답돈(蹋頓)의 우두머리를 싸우지 않고도 잡을 수 있습니다.”

태조가 말했다.

“알겠소.”

곧 군사를 인솔하여 돌아가며 물 옆 길가에 세워져 있는 큰 나무에 이렇게 기록했다.

“지금은 여름이라 길이 통하지 않으니, 가을을 기다렸다가 다시 진군 하리라.”

적군의 척후기병(斥候騎兵)은 그것을 보고 정말로 태조 대군이 갔다고 생각했다. 태조는 전주에게 그가 원래 갖고 있던 군사들을 인솔하게 하고, 서무산(徐無山)으로 올라가 노룡(盧龍)으로 나와, 평강(平岡)을 지나서 백낭퇴(白狼堆)에 올랐다. 유성(柳城)으로부터 2백여 리까지 갔을 때, 적군은 비로소 깜짝 놀랐다. 선우(單于)는 스스로 진(陳)에 임했다. 태조는 대군을 인솔하여 그와 접전을 벌였는데, 목을 베거나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으며, 또 도망가는 적을 추격하여 유성에 이르렀다.

태조의 군대는 군영으로 돌아온 후에 공을 논하여 상을 주었는데, 전주를 정후(亭侯)로 봉하고 식읍을 5백 호 주었다.

[《선현행장》에는 조조가 전주의 공을 높이 평가하며 올린 다음과 같은 표가 남아 있다.

“학문은 더욱 아름답고 충성스러운 무용 또한 두드러집니다. 아랫사람에게는 온화하고, 윗사람은 신중하게 섬깁니다. 시대의 도리를 제대로 판단하고 있으며, 나아가고 물러남은 의에 합당하게 처신합니다. 유주가 처음에 소란스러워 호족과 한족이 번갈아 피폐해지고 많은 사람들이 거처를 떠났을 때 사람들은 의지할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전주는 종족들을 이끌고 무종산(無終山)으로 들어가 북쪽으로는 노룡을 지키고 남쪽으로는 요해를 지키며 주변을 말끔히 청소했습니다. 스스로 농사를 지으며 먹을 것을 마련하니 사람들은 모두 그를 따랐고, 함께 생활하며 공동의 자산을 축적했습니다.

원소 부자가 위력으로 삭방(朔方)에 압력을 가하고, 멀리 오환과 결탁하여 수미(首尾)를 이루며 몇 차례나 전주를 불렀지만,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신이 황명을 받들어 여러 현을 평정할 때 전주는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스스로 달려와 오랑캐를 토벌하는 진영에 참여했습니다. 이는 광무제가 세운 연책(燕策)이나 설공(薛公)이 회남(淮南)의 전략을 세운 것과 같습니다. 또 부곡(部曲)으로 하여금 신의 문서를 들고 가서 오랑캐의 무리를 유인하자 한족의 백성들이 따라서 도망쳐왔습니다. 오환은 그 소식을 듣고 도망쳤습니다. 왕려(王旅)4)는 요새를 나갔을 때 900여리에 이르는 산길을 가야 했습니다. 전주가 군사 500명을 인솔하여 산골짜기로 난 길을 인도했기 때문에 오환족을 물리칠 수가 있었습니다. 전주는 문무를 겸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절의가 아름다운 사람이므로 폐하로부터 은총과 상을 받을 자격이 있으니, 정기(旌旗)를 세워 그 아름다움이 빛나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


전주는 스스로 처음에는 공손찬에게 죄를 지어 고향에서 살기가 어려웠으므로 사람들을 인솔하여 서무산 속으로 달아났지만 뜻을 세우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이용하게 되었으니 본래의 뜻한 바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강력히 사양했다. 태조는 그의 진심을 알고 억지로 상을 받게 하지 않았다.


魏書載太祖令曰:「昔伯成棄國,夏后不奪,將欲使高尚之士,優賢之主,不止於一世也。其聽疇所執。」(주1)    


위서에 태조의 명령을 기록하여 이르길 : 「옛날의 백성(伯成)이 봉국을 버려도 하후(夏后:禹)가 (뜻을) 빼앗지 않았으니 장차 고상한 선비와 현자를 우대하는 군주가 한 세대에 그치지 않게 하고자 함이었다. 전주가 고집하는 바를 들어주라.」   


(주1) 이 고사는 장자 천지(天地)편에 보인다.


요동에서 원상의 머리를 베어 보내 왔는데, 태조가 명령을 내렸다.

“삼군(三軍) 중에서 감히 그에게 곡(哭)을 하는 자가 있으면 참수하리라.”

전주는 일찍이 자신이 원상의 부름을 받은 적이 있었으므로 앞으로 나가 원상을 조의하고 제사를 지냈는데, 태조는 이 사실을 알고도 연유를 묻지 않았다.

[신 송지(松之)가 보건데, 전주가 원소 부자의 명에 불응한 옳은 일은 아니었다. 그가 위조(魏祖)를 위해 노룡의 대책을 세웠기 때문에 원상이 도망쳤다가 요동에서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이는 모두 전주 때문이었다. 이미 그를 적으로 돌려놓고 다시 그 머리를 찾아가 조문을 한 것은 도대체 무슨 일인가? 일찍이 원상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면 의는 그를 위해 지켜야 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을 위해 계모를 세우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 지극한 의가 아니겠는가? 전주가 조조의 천거를 사양했다는 것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진퇴를 제대로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왕수(王修)가 원담을 위해 곡을 한 것과 비교하면 겉모습은 같았지만 진심이 달랐다고 생각된다” ]

전주는 그의 가족과 친족 3백여 명을 업성에서 거주하도록 했다. 태조가 전주에게 수레ㆍ말ㆍ곡식ㆍ비단을 내렸으나, 전주는 전부 일가친척과 옛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태조를 따라 형주를 정벌하고 돌아왔다. 태조는 전주의 옛날의 공훈이 특별히 귀하다고 생각하고는 이전에 전주가 사양한 것을 원망하며 말했다.


“이것은 한 개인의 뜻을 완성하는 것이지만, 나라의 왕법(王法)과 대제(大制)를 무시하는 것이오.”

그리고 또 이전의 작호로써 전주를 봉했다.

[《선현행장》에 다음과 같이 남아 있다.

“수령(蓚令) 전주는 지조가 높은 사람이다. 주리에 있을 때 오랑캐와 하족(夏族)이 교란을 일으키자 스스로 깊은 산으로 들어가 지극한 정성으로 자신을 연마하고 연구를 하여 먹을 것을 장만했다. 백성들이 그러한 그를 따르자 큰 마을로 성장할 정도였다. 원소가 강성할 때 그에게 명을 내려 불렀지만 굴복하지 않았다. 원통해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뜻을 지키면서 참된 주인을 찾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조칙을 받들어 하북을 평정하자, 드디어 자신이 살고 있던 깊은 골짜기의 마을을 들어 나에게 복속했다. 내가 오랑캐를 평정하고자 했을 때에는 정중한 예를 갖추어 그를 초청했다. 전주는 곧 관직을 맡아서 오랑캐들을 공격할 수 있는 지름길을 가르쳐주고, 산속에 살던 백성들과 함께 일시에 귀화하여 색도(塞道)를 찾아 우리를 인도했다. 전주가 인도했던 길은 가깝고 편리하여 오랑캐들도 미처 깨닫지 못했다. 백랑에서 답돈을 참하고, 유성까지 그들을 내몰았던 것은 모두 전주의 힘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군대를 이끌고 요새로 들어와 그의 공을 기리고자 정후(亭侯)로 봉하고 식읍 500호를 내려달라는 표를 올렸으나, 전주는 한사코 몇 번이나 사양했다. 3년이 지나도록 그에게 상과 작위를 내리지 못했으니, 이는 한 사람의 고상은 뜻은 이루었을지 몰라도 왕법에 크게 위배될뿐더러 잃는 것이 많을 수밖에 없다. 마땅히 표를 올려 그를 제후로 봉해야했으나 오래도록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나의 잘못이다.” ]

전주는 상서를 올려 자신의 사양이 진심임을 죽음으로 맹세할 수 있다고 했다. 태조는 듣지 않고, 그를 불러와 강제로 임명하려고 한 것이 네 차례나 되었으나, 전주는 끝내 받지 않았다. 법을 집행하는 곳의 관리는 전주를 탄핵하여, 그는 본성이 교활하고 도를 어기며 작은 절개를 내세우고 있으니, 응당 그의 관직을 박탈하고 형벌로 처벌해야 된다고 했다. 태조는 이 건의를 매우 신중하게 생각하며, 오랜 시간을 끌었다. 마지막으로 이 문제를 세자와 대신들과 폭넓게 상의하였는데, 세자는 전주의 행위가 자문(子文)이 관직과 녹을 사양한 것이나, 신서(申胥)가 포상을 피해 달아난 것과 같으니 그의 생각을 존중하여 사사로운 뜻을 억지로 빼앗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상서령(尙書令) 순욱(荀彧)과 사예교위(司隸校尉) 종요(鍾繇) 또한 전주 본인의 뜻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위서》에는 세자가 건의한 다음과 같은 말이 실려 있다.

“옛날에 위오(薳敖)는 출사를 했지만 녹(祿)을 피했기 때문에 전(傳)에 그 아름다움이 실려 있게 되었습니다. 흐린 세상에서는 탐욕스러운 인간들이 횡행하지만 현명한 사람은 녹봉만 축내며 자신의 직분을 다하지 않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람은 얻을 수 있어도 적게 가지고, 얻을 수 없는 것은 포기합니다. 전주라는 사람은 그에 가깝습니다. 관직을 취소하고 형벌을 가하여 법에 따라서 처리하는 것은 지나칩니다.”

《위략》에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실려 있다.

“옛날에 백이와 숙제는 관직을 버리고 무왕을 꾸짖었기 때문에, 공자는 그들을 가리켜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다(求仁得仁)8).’고 했다. 전주가 지키고자 한 것은 비록 도(道)에는 합당하지 않았지만, 맑고 높은 기개는 지켰다.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전주의 뜻과 같았다면, 이는 곧 묵적(墨翟)이 겸애(兼愛)를 숭상한 것과 같은 일이며, 노담(老聃)이 백성들에게 결승(結繩)의 도를 가르친 것과 같다. 비록 외부의 논의가 옳았다고 하지만 다시 사례(司隷)에 명하여 그것을 결정하도록 한 것이다.”

《위략》에는 순욱과 종요의 다음과 같은 의견이 실려 있다.

순욱은 이렇게 말했다.

“군자의 도는 혹은 세상으로 진출하고 혹은 머물러 쉬는 데 있으나, 그것을 적당한 때에 맞출 뿐입니다. 그러므로 필부는 뜻을 고집스럽게 지키기만 하고, 성인은 각자의 할 일을 이루고자 노력합니다.”

종요는 이렇게 말했다.

“원사(原思)9)는 속전(贖錢)을 사양했으며, 공자는 주지 않았고, 자로(子路)는 소를 거절했으니 이를 두고 선(善)이라 하지는 않습니다. 비록 청이 많아져야 탁도 자극을 받게 된다고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전주는 비록 대의에 합치되지는 않았지만, 사양을 하는 풍조를 일으킨 점에서는 덕이 되므로 세자의 의견대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 신 송지가 보건데 《여씨춘추(呂氏春秋)》를 살펴보니, 이러한 말이 있었다. 노나라에는 신하가 제후에게 첩을 바치거나 관청에 돈을 내고 죄를 면하는 법이 있었다. 자공은 속인(贖人)에게 돈을 받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공자가 그 말을 듣더니 ‘사(賜)가 실수를 했구나. 지금부터 노나라 사람은 돈을 내고 죄를 면할 길이 없겠구나!’라고 말했다. 자로는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 주었다. 그 사람이 감사한 마음으로 소를 바쳤다. 자로는 그것을 받았다. 공자는 ‘노나라 사람들은 반드시 물에 빠진 사람을 보면 구하겠구나!’라고 말했다. 이 말은 종요가 인용한 것과 다르다. 종요가 일을 잘못 생각했는지 아니면 다른 출전이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

태조는 조정 신하들의 생각을 듣고 전주를 제후로 봉하려고 했다. 전주는 평소 하후돈(夏侯惇)과 친했으므로, 태조는 하후돈에게 말했다.


“그대가 먼저 가서 우정으로 그를 설득하오. 이것은 모두 그대의 뜻이라고 말하고, 나의 뜻이라고 말하지는 마시오.”

하후돈은 전주의 숙소로 가서 태조보다 먼저 권하는 것처럼 했다. 전주는 하후돈이 찾아온 뜻을 알고 그와 얘기하지 않았다. 하후돈은 떠날 때, 전주의 등을 치며 말했다.

“전군(田君), 주군의 뜻이 이토록 간절하니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는 없겠소?”

전주는 대답했다.

“무슨 말이 이처럼 지나치오! 나 전주는 의로움을 등지고 산속으로 도망쳤던 사람이건만 승상의 대은을 입어 삶을 보존하는 것만도 천만 다행이오. 어찌 노룡(盧龍)의 성채를 팔아 조정의 포상과 봉록과 바꿀 수 있겠소? 설령 국가가 나 전주에게 사사로운 마음을 갖는다고 해도, 내가 어찌 마음으로 부끄럽지 않겠소? 장군은 나 전주의 사람됨을 잘 알면서 오히려 이렇게 재차 말하고 있소. 만일 반드시 부득이 받아들여야 한다면, 나는 당신 앞에서 머리를 잘려 죽기를 원하오.”

전주는 말을 끝내지도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하후돈은 이런 사정을 모두 태조에게 보고했다. 태조는 전주의 뜻을 끝내 굽힐 수 없음을 알고 깊게 탄식하며 그를 의랑(議郞)으로 임명했다. 전주는 나이 마흔여섯에 세상을 떠났으며, 아들 또한 일찍 세상을 떠났다. 문제(文帝)는 즉위한 후, 전주의 도덕심과 절의를 매우 고상하다고 느끼고 전주의 종손(從孫 : 형이나 아우의 손자)인 전속(田續)을 관내후(關內侯)로 임명하여 전주를 잇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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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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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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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15
13:55:54
(*.0.203.172)
배주 추가

코렐솔라

2015.12.30
18:40:19
(*.46.94.101)
전주가 고집하는 것을 들어주라는 위서의 내용은 dragonrz님의 번역입니다. 이걸로 전주전의 모든 부분이 번역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http://blog.naver.com/dragonrz/220581338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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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 위서 국연전 [9] 견초 2013-05-03 3636
198 위서 양무전 [2] 견초 2013-05-03 3305
197 위서 장범전 [2] 견초 2013-05-03 3427
196 위서 원환전 [4] 견초 2013-05-03 4082
195 위서 가후전 [1] 견초 2013-05-03 15897
194 위서 순유전 [2] 견초 2013-05-03 8626
193 위서 순욱전 [4] 견초 2013-05-03 14110
192 위서 하후현전 [3] 재원 2013-05-03 5675
191 위서 하후상전 재원 2013-05-03 47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