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수王脩는 자가 숙치(叔治)이고 북해군(北海郡) 영릉현(營陵縣) 사람으로서 일곱 살 때 어머니를 잃었다. 그의 어머니는 마을의 제삿날에 죽었는데 이듬해, 이웃 마을에서 제사를 지낼 때 왕수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매우 슬퍼했다. 이웃 마을에서는 이것을 듣고 그를 위해서 제사지내는 것을 멈추었다. 20세 때 왕수는 남양(南陽)에서 유학했는데, 장봉(張奉)의 집에서 머물렀다. 장봉은 온 식구가 질병에 걸려 있었으므로 그를 보지도 않았다. 왕수는 친히 그들을 끌어안아 보살폈으며, 그들의 병세가 점점 좋아지자 곧 떠났다.

초평(初平) 연간(190~193)에 북해태수(北海太守) 공융(孔融)이 왕수를 불러 주부(主簿)로 삼아 고밀현(高密縣)의 현령(令)을 대행하게 했다. 고밀현의 손씨(孫氏)라는 사람은 본래 세력과 협기가 있는 사람인데, 자식이나 손님들이 자주 법을 어겼다. 백성들 중에서 약탈하는 자가 있었는데, 도적이 손씨의 집으로 뛰어 들어가면 관리들은 잡을 수 없었다. 왕수는 관리와 백성들을 인솔하여 손씨의 집을 포위했다. 손씨가 집안 사람들을 동원해 저항하며 지키자, 관리와 백성들은 두려워 감히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왕수가 관리와 백성들에게 명령했다.

“감히 공격하지 못하는 자는 적과 똑같은 죄를 짓는 것이다.”

손씨는 이 말을 듣고 두려워 도적을 내주었다. 이로부터 호족들은 복종하게 되었다. 효렴(孝廉)에 천거되었을 때, 왕수는 병원(邴原)에게 양도하려고 했으나, 공융(融)은 그의 의견을 듣지 않았다.

주: 당시에 공융이 왕수에게 말한 내용이 《융집(融集)》에 실려 있다.

“병원이 현명한 사람인 것은 내가 이미 알고 있다. 옛날에 고양씨(高陽氏)에게는 8명의 유능한 아들이 있었지만, 요(堯)는 그들을 모두 등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 순(舜)은 그들을 모두 등용했다. 병원은 자리가 없어도 염려하지 않을 사람이다. 나중까지 현자로 남아도 되지 않겠는가?”


왕수가 (거듭) 무겁게 사양하니, 공융이 대답했다 :   「掾,清身絜己[1],歷試諸難[2],謀而鮮過,惠訓不倦[3]。  연(掾)이여(왕수를 부르는 거 같은데 이부분은 자신없습니다.), 자신을 맑고 깨끗하게 닦고,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시험을 받으니, 계획을 세움에 과실이 적고, 남을 가르치는 데 게으름이 없구나.  [1] 清身絜己 <안자>  [2] 歷試諸難 <서경 순전>  [3] 謀而鮮過,惠訓不倦 <좌전>  


余嘉乃勳,應乃懿德[4],用升爾于王庭,其可辭乎!」  이에 나는 그 공훈을 아름답게 여기고, 훌륭한 덕에 응하고자 하여, 그대를 조정에 천거한 것이니 어찌 사양할 수 있겠는가!  [4] 余嘉乃勳,應乃懿德 <좌전>


당시 천하에 큰 난리가 일어났으므로 시행되지 못했다. 오래지 않아 군에 반역을 하는 자가 있었다. 왕수는 공융에게 어려움이 닥쳤음을 듣고 밤중에 공융에게로 달려갔다. 도적이 처음 일어났을 때, 공융은 좌우 사람들에게 말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올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왕수뿐일 것이다.”

말이 끝나자마자, 왕수가 도착했다. 공융은 그를 공조(功曹)로 임명했다. 당시 교동(膠東)에는 도적이 많았으므로, 왕수에게 명하여 교동의 현령을 맡도록 했다. 교동 사람 공사로(公沙盧) 일족은 강력하여 스스로 진영(陳營)과 참호를 만들어 놓고, 부역과 조세도 바치지 않았다. 왕수는 임지에 도착한 후, 혼자서 기병 몇 명을 데리고 그 문으로 직접 들어가 공사로의 형제들을 죽였다. 공사씨(公沙氏)는 경악을 하며 감히 경거망동을 하지 못했다. 왕수가 그 나머지 사람들을 위로하니, 이로부터 도적은 줄어들어 없어졌다. 공융에게 어려움이 있으면, 왕수가 비록 집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고 있을지라도, 오지 않은 적이 없었다. 공융은 항상 왕수에 의지하여 어려움을 면했다.

원담(袁譚)이 청주(青州)에 있을 때, 왕수를 치중종사(治中從事)로 임명하였는데, 별가(別駕) 유헌(劉獻)이 자주 왕수를 헐뜯었다. 후에 유헌이 어떤 일을 범하여 사형을 받았을 때, 왕수가 그를 심리하여 사형을 면하도록 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이 때문에 왕수를 더욱 칭찬하였다. 원소 또한 왕수를 불러 즉묵현(卽墨縣)의 현령을 대행하게 했다. 왕수는 나중에 또 원담의 별가가 되었다. 원소가 죽자, 원담과 원상은 사이가 벌어졌다. 원상이 원담을 공격하여 원담의 군대가 패했다. 왕수는 관리와 백성들을 인솔하여 원담을 구원하러 가니, 원담이 기뻐하며 말했다.

“우리 군대를 보존할 사람은 왕별가(王別駕)뿐이구나.”

원담이 패하자, 유순(劉詢)이 탑음(漯陰)에서 병사를 일으켰으며, 여러 성이 모두 호응하자, 원담은 탄식하며 말했다.

“지금 청주 전체가 모두 배반을 하는 것이 어찌 내가 덕망이 없는 것인가!”

왕수가 말했다.

“동래태수(東萊太守) 관통(管統)은 비록 해안가 멀리 있지만, 이 사람은 배반하지 않고 반드시 올 것입니다.”

10여 일 후, 관통은 과연 그의 처자식을 버리고 원담에게 투항하였다. 이 결과 그의 처자식은 적에게 살해되었고, 원담은 또다시 관통을 낙안태수(樂安太守)로 임명했다. 원담이 원상을 다시 공격하려고 하자, 왕수가 그에게 권고했다.

“형제간에 서로 공격하는 것은 패방의 길입니다.”

원담은 불쾌했지만, 이로써 왕수의 고상한 뜻과 절개를 알았다. 나중에 또 왕수에게 물었다.

“당신에게는 어떤 계책이 있소?”

왕수가 대답했다.

“이른바 형제란 왼팔, 오른팔과 같습니다. 비유를 들어 말하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결투를 하려고 하면서 자기 오른팔을 자르고, ‘나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이렇게 하는 자가 이길 수 있겠습니까? 형제를 버리고 가까이하지 않으면, 천하에서 누가 그와 친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의 부하들 중에서 참언하는 소인이 있다면 진실로 중간에서 싸움을 하도록 하여 일시적으로 자신들의 사욕을 구하는 것입니다. 원컨대, 현명한 당신은 귀를 닫아 버리고 그들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 만일 당신이 간사하고 아첨을 떠는 신하 몇 명을 죽일 수 있다면, 형제는 다시 친해져 화목해질 것이고, 그로써 사방을 방어한다면 천하를 마음대로 호령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원담은 왕수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 그래서 원상과 서로 공격하고,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태조가 원상이 있는 기주를 격파시키자, 원담은 또 태조를 배반했다. 태조는 군대를 이끌고 남피(南皮)로 가서 원담을 공격했다. 왕수는 당시 낙안에서 식량을 운반하고 있었는데, 원담의 위급함을 듣고 자신이 데리고 다니던 병사 및 여러 종사 등 수십 명을 인솔하여 원담에게로 갔다. 고밀현에 이르러, 원담이 죽었다는 사실을 듣고 말에서 내려 곡을 하며 말했다.

“군주가 없으니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가?”

곧 태조를 만나 원담의 시신을 거두어 안장할 수 있게 해줄 것을 부탁했다. 태조는 왕수의 마음을 살펴보려고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왕수가 또 말했다.

“저는 원씨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는데, 만일 원담의 시신을 거두어서 염(督)한 연후에 찢겨 죽는다 해도 원한이 없을 것입니다.”

태조는 왕수의 충의를 아름답게 여기고 그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주:《부자(傳子)》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원담을 죽인 조조는 그의 머리를 효수하고 누구든지 원담을 위해 감히 곡을 하는 자가 있으면 처자와 함께 죽일 것이라고 명했다. 왕숙치(왕수)와 전자태(전주)는 서로 상의하여 “사람은 누구나 운명을 타고 났으니 망자를 위해 곡을 하지 않는 것은 의가 아니다. 죽음이 두려워 의를 저버린다면 무슨 명분으로 세상을 살아가겠는가?”라고 다짐했다. 그들은 모두 원담의 머리를 찾아가 곡을 했다. 그것을 본 삼군은 모두 감동을 받았다. 군에서 그 사실을 보고하자 조조는 그들을 의사라 하여 용서해주었다.

//신 송지가 보건데, 《전주전(田疇傳)》에 따르면 전주는 원상의 부름을 받았지 원담의 부름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부자》의 기록은 사실이 아니다.


후에 태조는 왕수를 독군량관(軍粮官審)으로 임명하고 낙안(樂安)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원담이 격파되자 여러 성이 모두 항복했는데, 오직 관통만이 낙안을 지키면서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태조는 왕수에게 명령하여 관통의 머리를 베도록 하였다. 왕수는 관통이 망국의 충신이었으므로, 그의 결박을 풀게 하고 그로 하여금 태조를 만나도록 했다. 태조는 기뻐하며 그를 사면시켰다. 원씨의 정치가 관대했으므로 권세 있는 관직에 있는 자들은 재물을 많이 축적하였다. 태조는 업성을 격파시키고, 심배(審配) 등의 재산을 몰수하여 기록했는데,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남피를 공격하고, 왕수의 가산(家産)을 조사하니, 곡물이 열 섬도 안되고 책만 수백 권이 있었다. 태조는 탄식하며 말했다.


“선비는 그 명성을 망령되게 하지 않는구나.”

곧 예로써 왕수를 사공의 속관으로 임명하고, 사금중랑장(司金中郞將)을 대행하도록 하였으며 위군태수(魏郡太守)로 승진시켰다. 왕수는 임지에 도착하여 그곳 백성들을 다스림에 있어 강한 자를 억누르고 약한 자를 도왔으며, 상벌을 분명하게 하였으므로 백성들은 모두 그를 칭찬했다.

주: 《위략》에는 왕수의 사금중랑장 임명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왕수를 사금중랑장으로 임명하려고 하자 진황(陳黃)은 다음과 같은 다른 의견을 제출했다.

“왕수는 말뚝에 불과할 뿐, 기둥으로서의 자질은 없다고 들었습니다. 시냇물은 거대한 파도의 기세와 다릅니다. 그러므로 그가 관직에 있었던 7년 동안 아무리 살펴보아도 이렇다할 공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받는 것만 좋아하고 스스로 몸을 구부려 보답을 할 줄 모르니, 이는 깊은 밤중에 일어나 앉아서 점심에 먹을 음식을 차리는 것과 같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능력도 없는 자에게 중임을 맡겨서 자신의 직분을 감당하지 못하게 될까 염려됩니다. 삼가 논의에 붙여주시기를 원합니다.”

조조는 이러한 반대를 깊이 염려하여 곧 왕수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

“그대는 자신의 몸과 덕을 깨끗이 하여 본주에 그 명성을 날렸으며, 충성심과 능력으로 업적을 이루어 세상으로부터 아름다운 말을 듣고 있으니, 이름과 실질이 서로 부합되어 그 원대함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다. 고(孤)는 이러한 그대를 아주 깊고 자세히 마음속에 담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선현들의 논의를 살펴보니, 염철지리(鹽鐵之利)를 논한 사람들이 많았으며, 군국을 넉넉히 한 사람들을 등용했다. 전에 고가 처음에 사금(司金)을 설치했을 때에는 그대를 굴복시키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을 뿐 다른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대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전에 알보(遏父)2)를 도정(陶正)으로 삼자 백성들은 그가 만든 도기를 활용했으며, 그의 아들 사만은 진(陳)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근자에 상홍양(桑弘羊)3)은 삼공(三公)의 반열에 올랐다. 이는 그대가 원구(元龜)의 조짐이 먼저 알린 것을 삼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고가 그대를 등용한 본래의 뜻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후로도 조정의 선비들을 등용할 것이지만 매번 선발을 할 때마다 그대를 으뜸으로 삼을 것이다. 원담의 군사(軍師)들 가운데 여러 사람들이 현명한 논의를 했다고 들었지만, 그들이 그대를 능가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고가 장차 일어날 일을 깊이 생각해보니. 군사로서의 직분은 사금보다 한가하지만, 공을 세우기는 유리하니 군사를 중책으로 여길 수밖에 없다. 고의 진실한 마음이 그대에게 전달되어, 그대가 고의 뜻을 살핀다면 의심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얕은 생각으로 좀벌레가 바다를 헤아리고, 뱀을 그리면서 발을 그리는 것처럼 떠들까 염려가 된다. 전후로 여러 가지의 말이 오고가더라도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군으로 하여금 관직에 오랫동안 머물도록 할 것이다.

장갑이을(張甲李乙)은 오히려 그것을 먼저 알고 있을 것이니, 이는 주인의 의도가 제대로 실현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고는 이러한 공연한 소리들이 사실보다 더 커져서 개구리소리처럼 시끄러워질까 염려가 된다. 이러한 일이 잦아지면 제대로 된 소리도 듣지 못할 우려가 있다. 만약 그러한 일이 없더라도 미리 대비는 하는 것이 무슨 해가 되겠는가? 옛날에 선제(宣帝)께서도 소부(少府) 소망지(蕭望之)를 재상으로 임명했다가 그러한 이유로 외직으로 내쳐 풍익(馮翊)의 령(令)으로 삼았다. 정경(正卿)으로 불렀다가 좌천시킨 것이다. 주상은 시중을 시켜 이렇게 말했다.

‘군수로사의 경력은 평원(平原)에 있었던 것 밖에 없으니, 그것을 다시 시험해보고 그대를 삼보(三輔)로 삼겠다. 다른 생각을 하지 말도록 하라.’

고는 선주의 깊은 뜻을 헤아려 이 일에 대비하고자 한다. 이미 그대의 공로는 고의 뜻으로 높아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공의 숙부 문자(文子)와 그대는 함께 승진을 했으니 홀로 그렇게 되었다는 생각은하지 말았으면 한다.”

조조는 얼마 후에 왕수를 위군태수로 임명했다.

위나라가 건립된 후, 왕수는 대사농낭중령(大司農郎中令)으로 임명되었다. 태조가 육형(肉刑 : 신체에 상해를 입히거나 절단시키는 형벌)을 실행하자는 의견을 냈는데, 왕수는 아직 실행할 수 있는 때가 안되었다고 말했다. 태조는 그의 건의를 받아들이고 그를 봉상(奉尙)으로 임명했다. 이후 엄재(嚴才)가 반란을 일으켜 그의 부하 수십 명과 함께 액문(掖門)으로 공격해 왔다. 왕수는 이 소식을 듣고, 거마를 불렀는데 빨리 도착하지 않아, 부하들을 인솔하여 궁문으로 걸어갔다. 태조는 동작대(銅雀臺)에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기 도우려 오는 자는 틀림없이 왕숙치(王叔治)로구나.”

상국(相國) 종요(鍾繇)가 왕수에게 말했다.

“옛날 제도에, 경성(京城)에서 갑자기 변고가 생기더라도 구경(九卿 : 대신ㆍ장관)은 각각 자신의 부서에 있을 수 있소.”

왕수는 말했다.

“국가의 봉록을 먹는데, 어찌 그 어려움을 피하겠습니까? 부서에 있는 것은 비록 옛날 제도일 지라도 군자가 위기를 피하라는 교훈은 아닐 것입니다.”

오래지 않아 그는 관직생활을 하다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들 왕충(王充)의 관직이 동래태수(東萊太守)ㆍ산기상시(散騎常侍)에 이르렀다. 처음에 왕수는 약관의 나이였던 고유(高柔)를 스무 살 때 알아보았으며, 어린 아이였던 왕기(王基)를 기이한 사람으로 취급했다. 결국 두 사람은 모두 높은 데까지 출세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왕수가 사람을 알아본다며 칭찬했다.


[주] [[왕포전]]으로 분할


《위략 순고전(純固傳)》에는 지습(脂習), 왕수, 방육(龐淯), 문빙(文聘), 성공영(成公英), 곽헌(郭憲), 단고(單固) 등 7명의 전기가 있다. 그 가운데 왕수, 방육, 문빙 등 3명은 각자의 전기가 있고. 성공영은 《장기전(張旣傳)》에 별도로 나오며, 단고는 《왕릉전(王淩傳)》에 있으니 나머지 두 사람인 지습과 곽헌을 왕수전(修傳) 뒤에 싣는다.


[[지습전]]으로 분할

[[곽헌전]]으로 분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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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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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댓글

코렐솔라

2013.07.15
13:58:13
(*.0.203.172)
배주 모두 있음을 확인. 곽헌 앞에 위략에서 이르기를 지움(위에서 설명하고 있기에 그 앞에는 없으므로)

코렐솔라

2020.04.21
11:06:39
(*.112.38.50)
공융이 왕융에게 말한 부분 후반부는 기존에 번역이 안 되어있어 독우님의 번역을 따릅니다. 위의 댓글이 무색하군요 ㅋㅋhttp://rexhistoria.net/170029

코렐솔라

2021.09.07
13:39:08
(*.219.68.249)
樂安 낙안으로 발음 수정했습니다. (기존 악안)

코렐솔라

2021.09.17
13:18:52
(*.219.68.249)
다시 보는 중인데 낙안에 있다가 원담이 있는 남피(낙안 북쪽)로 간다면서 도달한 곳은 고밀(낙안 남동쪽)이군요. 수십기면 세력 규합도 아닌거 같고 이거 사실 도망치려는거 아닌가열 -_-;;;

코렐솔라

2021.09.27
17:23:00
(*.219.68.249)
두습->지습

왕유에게는 이름을
->
왕수에게는 이름을

코렐솔라

2021.09.27
18:06:42
(*.219.68.249)
餘習、憲二人列于脩傳後也
있다. 나머지 두 사람인 지습과 곽헌은 수《전(修傳)》의 뒤에 나온다.
->
있으니 나머지 두 사람인 지습과 곽헌을 왕수전(修傳) 뒤에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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