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수王脩는 자가 숙치(叔治)이고 북해군(北海郡) 영릉현(營陵縣) 사람으로서 일곱 살 때 어머니를 잃었다. 그의 어머니는 마을의 제삿날에 죽었는데 이듬해, 이웃 마을에서 제사를 지낼 때 왕수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매우 슬퍼했다. 이웃 마을에서는 이것을 듣고 그를 위해서 제사지내는 것을 멈추었다. 20세 때 왕수는 남양(南陽)에서 유학했는데, 장봉(張奉)의 집에서 머물렀다. 장봉은 온 식구가 질병에 걸려 있었으므로 그를 보지도 않았다. 왕수는 친히 그들을 끌어안아 보살폈으며, 그들의 병세가 점점 좋아지자 곧 떠났다.

초평(初平) 연간(190~193)에 북해태수(北海太守) 공융(孔融)이 왕수를 불러 주부(主簿)로 삼아 고밀현(高密縣)의 현령(令)을 대행하게 했다. 고밀현의 손씨(孫氏)라는 사람은 본래 세력과 협기가 있는 사람인데, 자식이나 손님들이 자주 법을 어겼다. 백성들 중에서 약탈하는 자가 있었는데, 도적이 손씨의 집으로 뛰어 들어가면 관리들은 잡을 수 없었다. 왕수는 관리와 백성들을 인솔하여 손씨의 집을 포위했다. 손씨가 집안 사람들을 동원해 저항하며 지키자, 관리와 백성들은 두려워 감히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왕수가 관리와 백성들에게 명령했다.

“감히 공격하지 못하는 자는 적과 똑같은 죄를 짓는 것이다.”

손씨는 이 말을 듣고 두려워 도적을 내주었다. 이로부터 호족들은 복종하게 되었다. 효렴(孝廉)에 천거되었을 때, 왕수는 병원(邴原)에게 양도하려고 했으나, 공융(融)은 그의 의견을 듣지 않았다.

주: 당시에 공융이 왕수에게 말한 내용이 《융집(融集)》에 실려 있다.

“병원이 현명한 사람인 것은 내가 이미 알고 있다. 옛날에 고양씨(高陽氏)에게는 8명의 유능한 아들이 있었지만, 요(堯)는 그들을 모두 등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 순(舜)은 그들을 모두 등용했다. 병원은 자리가 없어도 염려하지 않을 사람이다. 나중까지 현자로 남아도 되지 않겠는가?”

당시 천하에 큰 난리가 일어났으므로 시행되지 못했다. 오래지 않아 군에 반역을 하는 자가 있었다. 왕수는 공융에게 어려움이 닥쳤음을 듣고 밤중에 공융에게로 달려갔다. 도적이 처음 일어났을 때, 공융은 좌우 사람들에게 말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올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왕수뿐일 것이다.”

말이 끝나자마자, 왕수가 도착했다. 공융은 그를 공조(功曹)로 임명했다. 당시 교동(膠東)에는 도적이 많았으므로, 왕수에게 명하여 교동의 현령을 맡도록 했다. 교동 사람 공사로(公沙盧) 일족은 강력하여 스스로 진영(陳營)과 참호를 만들어 놓고, 부역과 조세도 바치지 않았다. 왕수는 임지에 도착한 후, 혼자서 기병 몇 명을 데리고 그 문으로 직접 들어가 공사로의 형제들을 죽였다. 공사씨(公沙氏)는 경악을 하며 감히 경거망동을 하지 못했다. 왕수가 그 나머지 사람들을 위로하니, 이로부터 도적은 줄어들어 없어졌다. 공융에게 어려움이 있으면, 왕수가 비록 집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고 있을지라도, 오지 않은 적이 없었다. 공융은 항상 왕수에 의지하여 어려움을 면했다.

원담(袁譚)이 청주(青州)에 있을 때, 왕수를 치중종사(治中從事)로 임명하였는데, 별가(別駕) 유헌(劉獻)이 자주 왕수를 헐뜯었다. 후에 유헌이 어떤 일을 범하여 사형을 받았을 때, 왕수가 그를 심리하여 사형을 면하도록 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이 때문에 왕수를 더욱 칭찬하였다. 원소 또한 왕수를 불러 즉묵현(卽墨縣)의 현령을 대행하게 했다. 왕수는 나중에 또 원담의 별가가 되었다. 원소가 죽자, 원담과 원상은 사이가 벌어졌다. 원상이 원담을 공격하여 원담의 군대가 패했다. 왕수는 관리와 백성들을 인솔하여 원담을 구원하러 가니, 원담이 기뻐하며 말했다.

“우리 군대를 보존할 사람은 왕별가(王別駕)뿐이구나.”

원담이 패하자, 유순(劉詢)이 탑음(漯陰)에서 병사를 일으켰으며, 여러 성이 모두 호응하자, 원담은 탄식하며 말했다.

“지금 청주 전체가 모두 배반을 하는 것이 어찌 내가 덕망이 없는 것인가!”

왕수가 말했다.

“동래태수(東萊太守) 관통(管統)은 비록 해안가 멀리 있지만, 이 사람은 배반하지 않고 반드시 올 것입니다.”

10여 일 후, 관통은 과연 그의 처자식을 버리고 원담에게 투항하였다. 이 결과 그의 처자식은 적에게 살해되었고, 원담은 또다시 관통을 악안태수(樂安太守)로 임명했다. 원담이 원상을 다시 공격하려고 하자, 왕수가 그에게 권고했다.

“형제간에 서로 공격하는 것은 패방의 길입니다.”

원담은 불쾌했지만, 이로써 왕수의 고상한 뜻과 절개를 알았다. 나중에 또 왕수에게 물었다.

“당신에게는 어떤 계책이 있소?”

왕수가 대답했다.

“이른바 형제란 왼팔, 오른팔과 같습니다. 비유를 들어 말하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결투를 하려고 하면서 자기 오른팔을 자르고, ‘나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이렇게 하는 자가 이길 수 있겠습니까? 형제를 버리고 가까이하지 않으면, 천하에서 누가 그와 친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의 부하들 중에서 참언하는 소인이 있다면 진실로 중간에서 싸움을 하도록 하여 일시적으로 자신들의 사욕을 구하는 것입니다. 원컨대, 현명한 당신은 귀를 닫아 버리고 그들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 만일 당신이 간사하고 아첨을 떠는 신하 몇 명을 죽일 수 있다면, 형제는 다시 친해져 화목해질 것이고, 그로써 사방을 방어한다면 천하를 마음대로 호령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원담은 왕수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 그래서 원상과 서로 공격하고,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태조가 원상이 있는 기주를 격파시키자, 원담은 또 태조를 배반했다. 태조는 군대를 이끌고 남피(南皮)로 가서 원담을 공격했다. 왕수는 당시 악안에서 식량을 운반하고 있었는데, 원담의 위급함을 듣고 자신이 데리고 다니던 병사 및 여러 종사 등 수십 명을 인솔하여 원담에게로 갔다. 고밀현에 이르러, 원담이 죽었다는 사실을 듣고 말에서 내려 곡을 하며 말했다.

“군주가 없으니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가?”

곧 태조를 만나 원담의 시신을 거두어 안장할 수 있게 해줄 것을 부탁했다. 태조는 왕수의 마음을 살펴보려고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왕수가 또 말했다.

“저는 원씨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는데, 만일 원담의 시신을 거두어서 염(督)한 연후에 찢겨 죽는다 해도 원한이 없을 것입니다.”

태조는 왕수의 충의를 아름답게 여기고 그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주:《부자(傳子)》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원담을 죽인 조조는 그의 머리를 효수하고 누구든지 원담을 위해 감히 곡을 하는 자가 있으면 처자와 함께 죽일 것이라고 명했다. 왕숙치(왕수)와 전자태(전주)는 서로 상의하여 “사람은 누구나 운명을 타고 났으니 망자를 위해 곡을 하지 않는 것은 의가 아니다. 죽음이 두려워 의를 저버린다면 무슨 명분으로 세상을 살아가겠는가?”라고 다짐했다. 그들은 모두 원담의 머리를 찾아가 곡을 했다. 그것을 본 삼군은 모두 감동을 받았다. 군에서 그 사실을 보고하자 조조는 그들을 의사라 하여 용서해주었다.

//신 송지가 보건데, 《전주전(田疇傳)》에 따르면 전주는 원상의 부름을 받았지 원담의 부름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부자》의 기록은 사실이 아니다.


후에 태조는 왕수를 독군량관(軍粮官審)으로 임명하고 낙안(樂安)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원담이 격파되자 여러 성이 모두 항복했는데, 오직 관통만이 악안을 지키면서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태조는 왕수에게 명령하여 관통의 머리를 베도록 하였다. 왕수는 관통이 망국의 충신이었으므로, 그의 결박을 풀게 하고 그로 하여금 태조를 만나도록 했다. 태조는 기뻐하며 그를 사면시켰다. 원씨의 정치가 관대했으므로 권세 있는 관직에 있는 자들은 재물을 많이 축적하였다. 태조는 업성을 격파시키고, 심배(審配) 등의 재산을 몰수하여 기록했는데,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남피를 공격하고, 왕수의 가산(家産)을 조사하니, 곡물이 열 섬도 안되고 책만 수백 권이 있었다. 태조는 탄식하며 말했다.


“선비는 그 명성을 망령되게 하지 않는구나.”

곧 예로써 왕수를 사공의 속관으로 임명하고, 사금중랑장(司金中郞將)을 대행하도록 하였으며 위군태수(魏郡太守)로 승진시켰다. 왕수는 임지에 도착하여 그곳 백성들을 다스림에 있어 강한 자를 억누르고 약한 자를 도왔으며, 상벌을 분명하게 하였으므로 백성들은 모두 그를 칭찬했다.

주: 《위략》에는 왕수의 사금중랑장 임명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왕수를 사금중랑장으로 임명하려고 하자 진황(陳黃)은 다음과 같은 다른 의견을 제출했다.

“왕수는 말뚝에 불과할 뿐, 기둥으로서의 자질은 없다고 들었습니다. 시냇물은 거대한 파도의 기세와 다릅니다. 그러므로 그가 관직에 있었던 7년 동안 아무리 살펴보아도 이렇다할 공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받는 것만 좋아하고 스스로 몸을 구부려 보답을 할 줄 모르니, 이는 깊은 밤중에 일어나 앉아서 점심에 먹을 음식을 차리는 것과 같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능력도 없는 자에게 중임을 맡겨서 자신의 직분을 감당하지 못하게 될까 염려됩니다. 삼가 논의에 붙여주시기를 원합니다.”

조조는 이러한 반대를 깊이 염려하여 곧 왕수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

“그대는 자신의 몸과 덕을 깨끗이 하여 본주에 그 명성을 날렸으며, 충성심과 능력으로 업적을 이루어 세상으로부터 아름다운 말을 듣고 있으니, 이름과 실질이 서로 부합되어 그 원대함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다. 고(孤)는 이러한 그대를 아주 깊고 자세히 마음속에 담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선현들의 논의를 살펴보니, 염철지리(鹽鐵之利)를 논한 사람들이 많았으며, 군국을 넉넉히 한 사람들을 등용했다. 전에 고가 처음에 사금(司金)을 설치했을 때에는 그대를 굴복시키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을 뿐 다른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대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전에 알보(遏父)2)를 도정(陶正)으로 삼자 백성들은 그가 만든 도기를 활용했으며, 그의 아들 사만은 진(陳)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근자에 상홍양(桑弘羊)3)은 삼공(三公)의 반열에 올랐다. 이는 그대가 원구(元龜)의 조짐이 먼저 알린 것을 삼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고가 그대를 등용한 본래의 뜻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후로도 조정의 선비들을 등용할 것이지만 매번 선발을 할 때마다 그대를 으뜸으로 삼을 것이다. 원담의 군사(軍師)들 가운데 여러 사람들이 현명한 논의를 했다고 들었지만, 그들이 그대를 능가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고가 장차 일어날 일을 깊이 생각해보니. 군사로서의 직분은 사금보다 한가하지만, 공을 세우기는 유리하니 군사를 중책으로 여길 수밖에 없다. 고의 진실한 마음이 그대에게 전달되어, 그대가 고의 뜻을 살핀다면 의심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얕은 생각으로 좀벌레가 바다를 헤아리고, 뱀을 그리면서 발을 그리는 것처럼 떠들까 염려가 된다. 전후로 여러 가지의 말이 오고가더라도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군으로 하여금 관직에 오랫동안 머물도록 할 것이다.

장갑이을(張甲李乙)은 오히려 그것을 먼저 알고 있을 것이니, 이는 주인의 의도가 제대로 실현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고는 이러한 공연한 소리들이 사실보다 더 커져서 개구리소리처럼 시끄러워질까 염려가 된다. 이러한 일이 잦아지면 제대로 된 소리도 듣지 못할 우려가 있다. 만약 그러한 일이 없더라도 미리 대비는 하는 것이 무슨 해가 되겠는가? 옛날에 선제(宣帝)께서도 소부(少府) 소망지(蕭望之)를 재상으로 임명했다가 그러한 이유로 외직으로 내쳐 풍익(馮翊)의 령(令)으로 삼았다. 정경(正卿)으로 불렀다가 좌천시킨 것이다. 주상은 시중을 시켜 이렇게 말했다.

‘군수로사의 경력은 평원(平原)에 있었던 것 밖에 없으니, 그것을 다시 시험해보고 그대를 삼보(三輔)로 삼겠다. 다른 생각을 하지 말도록 하라.’

고는 선주의 깊은 뜻을 헤아려 이 일에 대비하고자 한다. 이미 그대의 공로는 고의 뜻으로 높아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공의 숙부 문자(文子)와 그대는 함께 승진을 했으니 홀로 그렇게 되었다는 생각은하지 말았으면 한다.”

조조는 얼마 후에 왕수를 위군태수로 임명했다.

위나라가 건립된 후, 왕수는 대사농낭중령(大司農郎中令)으로 임명되었다. 태조가 육형(肉刑 : 신체에 상해를 입히거나 절단시키는 형벌)을 실행하자는 의견을 냈는데, 왕수는 아직 실행할 수 있는 때가 안되었다고 말했다. 태조는 그의 건의를 받아들이고 그를 봉상(奉尙)으로 임명했다. 이후 엄재(嚴才)가 반란을 일으켜 그의 부하 수십 명과 함께 액문(掖門)으로 공격해 왔다. 왕수는 이 소식을 듣고, 거마를 불렀는데 빨리 도착하지 않아, 부하들을 인솔하여 궁문으로 걸어갔다. 태조는 동작대(銅雀臺)에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기 도우려 오는 자는 틀림없이 왕숙치(王叔治)로구나.”

상국(相國) 종요(鍾繇)가 왕수에게 말했다.

“옛날 제도에, 경성(京城)에서 갑자기 변고가 생기더라도 구경(九卿 : 대신ㆍ장관)은 각각 자신의 부서에 있을 수 있소.”

왕수는 말했다.

“국가의 봉록을 먹는데, 어찌 그 어려움을 피하겠습니까? 부서에 있는 것은 비록 옛날 제도일 지라도 군자가 위기를 피하라는 교훈은 아닐 것입니다.”

오래지 않아 그는 관직생활을 하다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들 왕충(王充)의 관직이 동래태수(東萊太守)ㆍ산기상시(散騎常侍)에 이르렀다. 처음에 왕수는 약관의 나이였던 고유(高柔)를 스무 살 때 알아보았으며, 어린 아이였던 왕기(王基)를 기이한 사람으로 취급했다. 결국 두 사람은 모두 높은 데까지 출세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왕수가 사람을 알아본다며 칭찬했다. [주]

주: 왕은(王隱)은 《진서(晋書)》에서 이렇게 말했다.

왕유에게는 이름을 의(儀), 자를 주표(朱表)라 했던 또 다른 아들이 있었다. 그는 높고 맑은 뜻이 있어서 우아하고 올곧은 사람이었다. 사마문왕(司馬文王)5)이 안동장군으로 있을 때 그를 불러서 사마로 삼았다. 동관(東關)의 전투에서 패하자 사마사는 그에게 패전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물었다. 왕의가 장수에게 있다고 대답하자 화가 난 사마의는 책임을 나에게 전가하려고 한다며 그를 죽였다. 왕의의 아들 왕포(王褒)는 자를 위원(偉元)이라 했다. 어려서부터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았다. 신장이 8척 4촌이나 되었으며, 비범한 용모를 갖추고 있었다. 아버지가 천명을 다하지 못한 것을 애통하게 생각한 그는 끝까지 출사를 하지 않았다. 그는 부친의 산소 옆에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면서 교육에 힘썼다. 아침저녁으로 산소 앞에서 절을 하며 슬퍼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왕포는 묘 앞에 한 그루의 측백나무를 심었다. 그가 흘린 눈물 때문에 나무의 색깔이 다른 것과 달랐다. 그는 《시경》에 나오는 “부모를 생각하니 슬프고 또 슬프구나! 나를 기르시느라고 수척해지시다니!6)”라는 구절을 읽을 때는 흐르는 눈물이 끊이지 않아서 옷이 젖을 지경이었다.

집안이 가난하여 몸소 농사를 지었으나 식구들 수를 생각하여 그 이상을 탐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위해서는 양잠을 했다. 여러 학생들이 몰래 왕포를 위해 보리를 베자 그는 그것마저 그만 두었다. 사람들은 그 후로 다시는 그가 농사를 짓는 것을 돕지 않았다. 그의 문인이 본현에서 일을 하게 되자, 왕포를 찾아와 관리에게 부탁하여 구해 달라고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은 배움이 부족하여 나에게 의지했으며, 나는 덕이 없어서 그대들의 그늘에 의지하고 있다네. 관리가 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또 나는 이미 붓을 잡지 않은지가 40년이나 되었다네.”

그가 밥그릇을 들고 아들에게는 소금에 절인 콩을 등에 지고 따라오게 하며 걸어갈 때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1천여명이나 되었다. 안구령(安丘令)은 그것을 보고 옷깃을 여미고 대문까지 나와서 영접했다. 왕포는 곧 흙더미 앞으로 가서 정중히 절을 한 다음 일어서서 이렇게 말했다.

“저의 문생이 현에서 일을 부역을 한다기에 떠나는 길에 작별을 하러 왔습니다.”

그는 문생들과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린 다음 떠나갔다. 안구령은 즉시 여러 문생들을 풀어 주었다. 왕포가 현을 떠나도록 한다면 현으로써 부끄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안구령에는 관언(管彦)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타고난 재능이 있었지만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왕포만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우정을 나누었다. 남녀는 처음부터 서로 다르게 태어났지만, 함께 허락하면 결혼을 한다. 왕포는 자신의 누이와 관언을 맺어주려고 했다. 관언은 나중에 서이교위(西夷校尉)가 되었다. 왕포가 누이를 다시 출가시키려고 하자 관언의 동생 관복(管馥)이 그것이 사실이냐고 물었다. 왕포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뜻이 별로 없어서 바르는 것도 없는 사람이오. 내가 산에 들어와 사는 것은 그 때문이오. 누이와 매제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길흉(吉凶)도 단절되었소. 그대의 형은 부친의 무덤을 황제가 계신 곳에 안치했으므로 낙양 사람이나 다름이 없소. 어찌 내가 처음의 약속대로 내 누이를 출가시키겠다고 하겠소?”

“형수는 제나라 사람이니 임치(臨淄)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찌 아버지의 묘소를 하남에 두고, 아내를 따라서 제로 가겠는가? 내 뜻이 이와 같으니 어떻게 결혼을 시키겠는가?”

결국은 결혼을 시키지 않았다.


병원(邴原)의 후손 가운데 병춘(邴春)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지조를 세워 가난하게 살면서, 책을 짊어지고 사방을 떠돌며 공부를 했기 때문에 집에 머물지 못했다. 고향 사람들은 그러한 그의 모습을 보고 선조의 대를 이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왕포는 그의 성품이 음험하고 호협하며 명성을 쫓아다니는 사람이로 여겼기 때문에 결국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나중에 병춘은 과연 아무런 학문적 성과를 이룩하지 못하고 멈 지방으로 떠돌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서 간신히 고향으로 돌아왔다. 왕포는 항상 사람의 행동을 중시했으며, 그러한 사람은 선도(善道)로 귀의한다고 말했다. 그는 능력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자신의 책임도 없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러한 생각을 모두가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낙양이 무너지고 도적이 사방에서 벌 떼처럼 일어나자, 왕포는 종족들을 데리고 장강을 건너 강동으로 옮겼지만 아버지의 산소를 잊지 않았다. 도적들이 더욱 활개를 치자 그는 남쪽으로 내려가 태산군(泰山郡)에 이르렀다. 왕포는 고향을 생각하다가 그것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도적들로부터 해를 입었다.


《진한춘추》에 따르면, 왕포는 제남 출신으로 자를 연세(延世)라 했던 유조(劉兆)와 함께 관직에 진출하여 이름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다. 왕포는 아버지가 사마사로부터 억울하게 죽게 되자 어떠한 초빙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절대로 서쪽을 향해 앉지도 않았다. 진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위략 순고전(純固傳)》에는 지습(脂習), 왕수, 방육(龐淯), 문빙(文聘), 성공영(成公英), 곽헌(郭憲), 단고(單固) 등 7명의 전기가 있다. 그 가운데 왕수, 방육, 문빙 등 3명은 각자의 전기가 있고. 성공영은 《장기전(張旣傳)》에 별도로 나오며, 단고는 《왕릉전(王淩傳)》에 있다. 나머지 두 사람인 지습과 곽헌은 수《전(修傳)》의 뒤에 나온다.


지습은 경조인(京兆人)으로 자를 원승(元升)이라 했다. 중평(中平) 년간에 군에서 출사하여 공부(公府)의 부름을 받았으며, 고제(高第)로 추천되어 태의령(太醫令)으로 제수되었다. 천자가 서쪽으로 갔을 때나 동쪽으로 허도에 왔을 때에도 그는 항상 천자의 곁에 있었다. 그는 소부(少府) 공융과 친했다. 조조가 사공이 되어 나날이 위세가 높아졌지만, 공융은 지난날의 뜻을 생각하고 조조에게 자기 마음대로 글을 보냈다. 지습은 항상 그러한 공융을 책망하면서 그가 조조를 대하는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고 말했으니 공융은 듣지 않았다. 공융이 죽을 위기에 놓이자 당시에 공융과 먼저부터 친하게 지냈던 백관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감히 그를 구하기 위해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지습은 홀로 공융을 찾아가 위로하고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

“문거(文擧)! 경이 나를 버리고 죽는다면 나는 누구와 또 말을 해야 하는가?”

그 는 슬피 울면서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다. 조조는 그 소식을 듣고 두습을 잡아들여 법대로 처리하고자 했으나, 그러한 내막을 자세히 알고 나서는 동토교(東土橋) 아래로 옮겨서 살게 했다. 두습은 나중에 조조를 만나서 전의 잘못을 사죄했다. 조조는 그의 자를 부르며 이렇게 말했다.

“원승! 경이야말로 슬픔을 아는 사람이구나!”

조조는 그가 살고 있는 곳을 물어보고 새로 집을 지어 이사를 하게 한 다음 곡식 1백곡을 하사했다. 황초(黃初) 원년에 그를 다시 불러서 등용하려고 했으나 이미 나이가 너무 많다는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그가 친구들과 두터운 우정을 나누었으며, 난포(欒布)7)의 절개가 있다고 하여 중산대부(中散大夫)로 임명했다. 집으로 돌아 온 그는 80세에 세상을 떠났다.

곽헌郭憲의 자는 유간(幼簡).이며, 서평 사람으로, (서평)군의 이름난 씨족이었다. 건안 연간 군의 공조가 되었고, 주에서 징벽하였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인후하고 독실하여 온 군이 그에게 귀의하였다. (건안) 17년에 이르러, 한약이 군대를 잃고 강중을 따라 돌아와서, 곽헌에게 의지했다. 사람들이 대부분 한약을 취하여 공을 세우고자 했으나, 곽헌은 노하여 그들을 책하길


"사람이 곤궁해서 내게 왔는데, 어찌 그를 위험하게 하겠느냐?"


그리고선 한수를 옹호하고 두텁게 대우했다. 그 후 한약이 병들어 죽자, 전락, 양규 등이 한약의 머리를 취하여 (조공에게) 보냈다. 양규 등은 (한약의 머리를 잘라 공을 세운) 명단에 곽헌의 이름을 넣고 싶어했으나, 곽헌은 그 안에 이름이 실리는 걸 거부하며 말하길


"나는 오히려 (그가) 살아있을 때에도 그를 도모하지 않았는데, 어찌 죽은 사람을 취하여 공을 바라겠는가?"


이에 양규 등은 그만두었다. 이때 태조는 바야흐로 한중을 공격하려 하고 있었고, 무도에 있었는데, 양규 등이 보낸 한약의 머리가 도착했다. 태조는 일찌기 곽헌의 이름을 듣고 있었는데, 명단을 보니, 그 안에 없는 것이 괴이하여, 양규 등에게 물었고, 양규는 모든 사정을 말했다. 태조는 그의 의로운 뜻에 감탄하며, 함께 표를 올려 양규 등과 나란히 관내후의 작위를 하사했고, 이로 인해 농우에 그의 명성이 진동했다.


황초 원년 병으로 죽었다.


정시 초, 국가가 그의 일을 가상히 여겨, 다시 그 아들에게 관내후의 작위를 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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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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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15
13:5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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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주 모두 있음을 확인. 곽헌 앞에 위략에서 이르기를 지움(위에서 설명하고 있기에 그 앞에는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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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위서 <배송지주>초선전 [1] 재원 2013-05-03 5056
207 위서 <배송지주>호루전 [1] 견초 2013-05-03 3334
206 위서 호소전 [4] 재원 2013-05-03 3735
205 위서 장전전 [1] 재원 2013-05-03 3399
204 위서 <배송지주>왕렬전 [1] 재원 2013-05-03 3209
203 위서 관녕전 [2] 견초 2013-05-03 3878
202 위서 병원전 [1] 견초 2013-05-03 3698
» 위서 왕수전 [1] 견초 2013-05-03 3823
200 위서 전주전 [2] 견초 2013-05-03 4941
199 위서 국연전 [9] 견초 2013-05-03 3644
198 위서 양무전 [2] 견초 2013-05-03 3305
197 위서 장범전 [2] 견초 2013-05-03 3431
196 위서 원환전 [4] 견초 2013-05-03 4086
195 위서 가후전 [1] 견초 2013-05-03 15902
194 위서 순유전 [2] 견초 2013-05-03 8630
193 위서 순욱전 [4] 견초 2013-05-03 14136
192 위서 하후현전 [3] 재원 2013-05-03 5688
191 위서 하후상전 재원 2013-05-03 47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