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邴原은 자가 근구(根桕)이며, 북해군(北海郡) 주허현(朱虛縣) 사람이다. 소년 시절 관녕(管寧)과 함께 고결한 품행으로 칭송되었는데, 주부(州府)에서 그를 불렀지만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황건군이 난리를 일으킨 후, 병원은 가솔들을 인솔하여 바다로 들어가 울주산(鬱洲山) 속에서 살았다. 당시 공융은 북해(北海)의 상(相)이었는데, 그는 병원을 유도(有道 : 관리 추천 과목)로 추천했다. 병원은 황건군이 바야흐로 극성해지자 요동으로 피했는데, 같은 군의 유정(劉政)과 그는 용기와 지략 그리고 영웅의 기개가 있었다. 요동태수 공손도(公孫度)는 유정을 두려워하고 미워하여 그를 죽이려고 그의 가족을 모두 체포했는데, 유정은 홀로 탈출하였다. 공손도는 여러 현에 통고했다.

“감히 유정을 숨겨주는 자가 있으면 유정과 똑같은 죄로 다스리겠다.”

유정은 궁지에 몰려 다급해지자 병원에게로 가서 투항했다.

주: 《위씨춘추》에는 두 사람이 만났을 때의 대화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궁한 새가 품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어떻게 내 품안에 숨을 곳인지 알았습니까?”

병원은 유정을 한 달 남짓 숨겨주었는데, 마침 동래의 태사자(太史慈)가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였으므로 병원은 이 기회에 유정을 그에게 부탁했다. 일을 마친 후 병원은 공손도를 찾아가 말했다.


“장군께서 전날 유정을 죽이려고 한 것은 그가 스스로에게 해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유정은 이미 떠났으니 당신의 해로움은 제거된 것이 아닙니까?”

공손도가 말했다.

“그렇소.”

병원은 다시 말했다.

“당신이 유정을 두려워한 것은 그가 지략이 풍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유정은 이미 탈주하였으므로 지략을 사용할 수 없는데, 당신은 어찌하여 유정의 가족들을 붙들어 놓고 있습니까? 저는 그들을 사면시키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다시는 유정과 원한을 맺지 마십시오.”

공손도는 곧 유정의 식구들을 풀어 주었다.

병원은 또 유정의 가족들에게 여비를 보내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병원이 요동에 있을 때, 1년 동안 병원이 사는 곳에 몸을 의탁하는 사람들이 수백 가구나 되었고, 유학하는 선비와 글을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후에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태조는 그를 사공(司空)의 속관(掾)으로 임명했다.

병원의 딸은 일찍 죽었고, 그때 태조의 사랑하는 아들 창서(倉舒 - 조충)도 죽었으므로, 태조가 두 사람을 합장하려고 하자, 병원이 사양하며 말했다.

“합장이란 예법에 맞지 않습니다. 제가 명공에게 저절로 받아들여지고, 명공께서 저를 대접한 까닭은 우리들 모두가 성현의 가르침을 지키고 바꾸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제가 지금 명공의 명령을 따른다면, 이것은 범부(凡夫)들이나 하는 짓이니 공께서는 어찌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태조는 이 일을 중지하고 병월을 승상의 징사(徵事)로 전임시켰다.


獻帝起居注曰:建安十五年,初置徵事二人,原與平原王烈俱以選補。


최염(崔琰)은 동조연(東曹掾)으로 있었는데, 예양(禮讓)의 현신(賢臣)들에 관한 글을 쓰면서 말했다.

“징사(徵事) 병원(邴原)ㆍ의랑(議郎) 장범(張範)은 모두 인덕을 갖추고 있고 선량하고 순수하며, 뜻과 행동이 충직하고 방정하며, 성정이 맑고 고요하고 풍속을 격려하기에 충분하고, 인품과 격식이 곧고 바르므로 일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사람들이 말하듯이 용한봉익(龍翰鳳翼 : 용의 몸과 봉황의 날개, 즉 왕자의 상)이며, 모두 국가의 중요한 보물입니다. 그들을 천거하여 중히 사용하십시오. 어질지 못한 신하는 멀리 가겠습니다.”

병원이 양무(茂)를 대신하여 오관장장사(五官將長史)가 되었을 때, 항상 문을 듣고 자신을 지키고, 공적인 업무가 아니면 나가지 않았다. 태조가 오(吳)나라를 정벌할 때, 병원은 수행하다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주:《원별전(原別傳)》에는 병원에 대한 좀 더 자세한 기록이 있다.

병원은 11세에 아버지를 잃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집안이 가난했다. 인근에 서사(書舍)1)가 있었는데, 병원은 그 옆을 지날 때마다 슬피 울었다. 서사의 선생이 병원에게 물었다.

“동자는 무엇이 그리 슬픈가?”

“고아는 쉽게 상처를 입고, 가난한 사람은 쉽게 자극을 받습니다. 무릇 책이란 반드시 부형이 있어야 갖출 수가 있는데, 첫째는 고아가 아닌 아이들이 부럽고, 둘째는 공부를 하는 것이 부럽습니다. 마음이 슬프니 눈물이 저절로 납니다.”

선생도 병원의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책을 가지고 싶은가?”

“돈이 없습니다.”

“동자에게 뜻이 있다면 내가 학생들과 같이 가르치면 된다네. 돈은 필요가 없어.”

선생은 병원에게 책을 주었다. 겨울을 나는 동안 그는 《효경》과 《논어》를 전부 외웠는데, 다른 학생들이 그를 따라가지 못했다. 성장을 하자 그는 먼 곳으로 유학을 떠나고 싶어서 안구에 사는 손숭(孫崧)을 찾아갔다. 손숭은 자네의 고향에 사는 정(鄭)군을 아느냐고 물었다. 병원이 안다고 대답하자 손숭은 이렇게 말했다.

“정군은 고금의 서적을 두루 섭렵했으며, 견문이 넓어서 상당한 지식을 갖추고 있다네. 그의 학문은 깊고도 넓으니 공부를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그보다 나은 스승이 없다네. 자네가 그를 버리고 천리 밖을 나간다고 하니, 정군이야말로 동가(東家)의 공구(孔丘)라는 말을 전해주고 싶네. 자네는 알지도 못하면서 안다고 하는가?”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쓴 약을 먹고 좋은 침을 맞은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아직은 그곳에 갈 때는 아닌 것 같습니다. 사람에게는 각자의 뜻이 있고, 세상을 헤아리는 것도 다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산에 올라가야 옥을 캐고, 바다에 들어가야 진주를 캔다고 합니다. 어찌 산에 오르는 사람이라고 바다의 깊이를 모르고, 바다에 들어가는 사람이라고 산의 높이를 모르겠습니까? 선생님은 저에게 정군을 동가구라고 말씀하신다면, 저는 서가(西家)의 어리석은 녀석이 되겠군요.”

손숭은 병원에게 사과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연주와 에주의 사대부들 가운데 내가 아는 사람이 많지만, 자네보다 나은 사람은 없는 것 같네. 내 책을 나누세.”

병원은 그의 뜻을 소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사양을 하지 않고 책을 받아서 그와 작별했다. 병원의 원래 생각은 스승을 구해서 가르침을 받고, 뜻이 높은 사람과 교제를 하려는 것이었다. 만약 그와 같은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뜻을 이를 수가 없다면 책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는 곧 책을 집에 두고 길을 떠났다. 병원은 원래 술을 잘 마셨으나, 스스로 길을 떠난 이후로 8~9년 동안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다. 홀로 등짐을 지고 고생을 한 끝에 그는 진류(陳留)에서 한자조(韓子助)를 만나 스승으로 모셨으며. 영천(穎川)에서는 진중궁(陳仲弓)을 선배로 받들었다. 또한 여남(汝南)에서는 범맹박(范孟博)과 친구가 되었으며, 탁군(涿郡)에서는 노자간(盧子幹)과 찬하게 되었다. 이별할 때 친구들은 그에게 술을 주는 대신에 쌀과 고기를 주며 송별했다. 병원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원래 술을 잘 마셨지만, 아무 생각도 없고 업을 이룩하지 못했기 때문에 술을 끊었습니다. 지금 멀리 떠나는 마당에 노자를 주시니 한 잔 마시는 것이야 어떻겠습니까?”

그들은 함께 하루 종일 술을 마셨지만 취하지 않았다. 고향으로 돌아 온 그는 책을 손숭에게 돌려주면서 책에 담긴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나중에 군에서 그를 불러서 공조의 주부가 되었다.


당시에 노국(魯國)에는 세 사람이 교육을 펼치고 있었다. 공융은 군에서 공경(公卿)이 될만한 인재를 뽑아서 가르쳤으며, 정현(鄭玄)은 ‘연(掾)’이 될만한 인재를 뽑아서 가르쳤고, 팽구(彭璆)는 ‘리(吏)’가 될만한 인재를 뽑아서 가르쳤다. 병원은 ‘좌(佐)’에 해당하는 인물로 평가되었다. 공융은 어떤 한 사람을 유난히 아껴서 항상 대단히 감탄을 했다. 나중에 공융의 화를 돋우는 바람에 죽이려고 하자 관리들이 모두 간청했다. 그 사람도 역시 ‘좌’에 해당했던 사람이었으나, 피가 날 정도로 머리를 찧으며 사죄를 했음에도 공융의 마음을 풀지 못했다. 유독 병원만은 그를 위해 청을 하지 않았다. 공융은 병원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은 모두 청원을 하는데 그대는 왜 하지 않는가?”

“그에 대한 명부(明府)의 마음은 원래 그리 박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연말에는 그를 천거하는 말씀을 하시면서, ‘나에게는 아들이 하나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명부께서는 그를 사랑하셔서 마치 아들처럼 여기시다가, 미워하시니 죽을 위기에 놓였습니다. 어리석은 저는 명부께서 그를 사랑하셨는지 아니면 미워하셨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어떤 학생은 나의 문중으로 들어와 내가 형제처럼 대하다가 발탁하여 등용했다. 모(某)는 지금 홀로 은혜를 입고 있다. 대체로 옳은 사람은 더 나아가게 하고, 나쁜 사람은 죽이는 것이 참된 군자의 도(君道)이다. 전에 응중원(應仲遠)은 태산군수로 있을 때 어떤 사람을 효렴(孝廉)으로 천거했다가 불과 열흘 만에 죽였다. 대체로 군자의 애정이라도 두텁고 얇음이 항상 같지는 않다!”

“응중원이 효렴으로 천거했다가 죽인 것이 의로운 일입니까? 대체로 효렴은 국가의 준재를 선발하는 제도입니다. 천거를 했다면 죽이는 것은 잘못된 일이며, 죽여야 할 사람이었다면 천거를 한 것이 잘못된 일입니다. 《시경》에는 ‘그가 나의 아들이 되었으니, 근친혼을 시킬 수는 없다3)’고 했습니다. 《논어》에는 ‘사랑하면 그를 살리려고 하며, 미워하면 그를 죽이려고 한다. 이미 살리려고 해놓고, 또 다시 죽이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미혹(迷惑)이다.’라고 했습니다. 응중원의 미혹함이 이토록 심한데 명부께서는 어찌 그를 닮으려고 하십니까?”

공융은 크게 웃으면서 내가 농담을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병원은 다시 말을 이었다.

“군자의 말은 몸에서 나오지만 백성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므로 언행은 군자의 지도리와 같습니다. 어찌 사람을 죽이려고 해놓고 농담이었다고 하십니까?”

공융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시에 한의 조정은 통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기울었기 때문에 뇌물이 횡행했다. 병원은 그러한 현실이 싫어서 가족들을 데리고 울주(鬱洲)의 산속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군민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를 따라 나서자 공융은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성 (性)을 닦고 정절을 보존하며, 청허(淸虛)함으로 고상한 덕을 지키고, 위험한 곳으로 들어가지 않다면 오래도록 낙토(樂土)에서 살 수가 있을 것이다. 왕실은 여러 가지 어려움이 닥쳐 지금 호경(鎬京)4)으로 옮겨갔다. 성조(聖朝)는 수고롭게도 겸손하게 재능과 의를 갖춘 인재를 찾아 자문을 구하려 하고 있다. 나는 안정을 구하기 위해 조정으로 가서 책명을 받고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나라가 장차 무너진다면 자신의 안위를 잊고 나라를 걱정해야 하며5), 집안이 망하게 되니 제영(緹縈)6)은 맨발로 뛰어나갔다. 평범한 아녀자도 의를 그렇게 지켰다. 근구(根矩)를 생각하니 인(仁)을 다하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아닌가? 물에 빠진 사람이 있으면 손을 내밀고, 어려움으로부터 백성을 구해야하지 않겠는가? 편안한 곳에서 쉬더라도 나를 돌아보지 않는 것이 군자의 도리라 하니 그와 같이 하지 않겠는가? 근구! 근구! 오지 않겠는가!”

병원은 마침내 요동에 도착했다. 요동에는 호랑이가 많아서 병원이 사는 마을에도 호환이 잦았다. 병원은 여행을 하는 도중에 남은 돈이 있으면 나뭇가지에 묶어두었으므로 사람들이 찾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자 나뭇가지에 묶어둔 돈이 자꾸 불어났다. 누가 그 연고를 물으면 대답하는 사람이 신비한 나무라고 했다. 병원은 지나친 제사를 싫어했으므로 곧 그렇지 않다고 해명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 돈을 거두어 제사에 바쳤다. 나중에 병원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삼산(三山)에 머문 적이 있었다. 공융은 편지를 보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회(隨會)7)는 진(秦)에 있고, 가계(賈季)8)는 적(翟)에 있으니, 우러러 자문을 구하려다 넘어질 것 같아서 나날이 탄식만 더한다네. 도착한다는 것을 알았을 무렵에는 삼산 가까이에 있을 것이네. 《시경》에서는 ‘호(鎬)에서 돌아오니, 나의 행차는 영원하다네.9)’라고 했지 않았는가? 지금 오관연(五官掾)을 보내어 배를 젓는 사공처럼 그대를 받들도록 했으니, 어려움이 있거나 할 일이 있으면 그들에게 부탁하도록 하시오. 환란의 원인이 아직도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에, 무력에 의지하여 승리를 얻으려고 하는 영웅들이 마치 장기판에서 영웅을 다투듯이 하고 있다네.”

병원은 마침내 다시 돌아왔다. 10년 동안이나 사방을 떠돌다가 돌아 온 것이다. 남쪽으로 행보를 시작한지 몇 일이 지나서야 공손탁은 그가 큰 인물임을 깨달았다. 그는 병원을 다시 따라가 붙잡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이렇게 말했다.

“병군은 구름 속에 노니는 백학과 같다. 메추라기를 잡는 그물로 그를 잡을 수는 없다. 또 내가 그를 보내놓고 나서 다시 얻고자 할 수는 없다.”

병원은 드디어 위험에서 벗어났다.

고향으로 돌아 온 병원은 예악(禮樂)을 가르치고, 시서(詩書)를 읊었다. 수 백 명의 학생들이 몰려왔으며, 상당한 경지에 이른 사람도 수 십 명이나 되었다. 당시에 정현은 박학다식한 학자로서 전적에 주해를 붙였기 때문에 유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많은 사대부들로부터 추앙받고 있었다. 병원 역시 고원청백(高遠淸白)하고 이지담박(頤志淡泊)한 인물로서, 말이나 행동을 특별히 가려서 하지 않았으나 영걸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당시에 해내(海內)에서는 청의(淸議)가 유행했는데, 청주(靑州)에는 병원과 정현의 학문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위태조 조조가 사공(司空)으로 있을 때 병원을 동합좨주(東閤祭酒)로 초빙했다. 조조는 북벌을 단행하여 3개 군의 선우(單于)를 공격한 후에 창국(昌國)10)으로 돌아와 연(燕)의 사대부들을 만났다. 잔치가 열렸을 때 조조는 이렇게 말했다.

“고가 지난날 업(鄴)을 차지했을 때 여러분들이 언젠가는 나를 찾아 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에서야 모두 왔소이다. 오지 않은 사람은 병좨주 한 사람 뿐이군요.”

말을 끝낸 지 얼마 후에 병원이 도착했다. 대문에서 병원이 뵙기를 청하는 소리가 들리자 조조는 깜짝 놀라며 크게 기뻐했다. 그는 신발을 손에 쥔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 마중을 나가며 병원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현자는 도대체 헤아릴 수가 없소이다. 고는 그대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멀리에서 자신을 굽혀서 오셨으니, 마음을 비우고 만나야 하겠소이다.”

병원이 조조를 만나고 난 후에 돌아갈 때 군중의 사대부들 가운데 병원을 따라나서는 사람이 수 백 명이나 되었다. 조조가 그것을 괴이하게 생각하여 옆에 있던 사람들에게 그 연유를 물어보자, 마침 순욱(荀彧)이 조조의 곁에 앉아 있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병원에게 물어보아야만 알 것입니다.”

“저 사람은 명분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사대부의 마음까지 기울게 하는가?”

“저 사람은 당대의 이인이자 사대부들의 자존심입니다. 공께서는 예를 다하여 대접해야 합니다.”

“정말 나의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이다.”

이후로 조조는 병원을 더욱 정중하게 대했다.

병원은 군대와 관련된 관직을 맡았지만, 항상 질병을 이유로 마을에 있으면서 결국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으며, 사람을 만나는 일도 드물었다. 하내(河內) 출신인 장범(張范)은 명공의 아들로서 뜻과 행동이 병원과 잘 맞았기 때문에 서로 존경하는 사이였다. 조조는 장범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병원은 명성과 덕이 높고도 크며, 뜻이 맑아서 세상과 멀리 떨어진 사람이다. 산처럼 높은 사람이라서 내가 등용할 수가 없다. 장자파(張子頗)는 그것을 배우고 싶어 하지만, 나는 그 길을 따라가지 않으면 부유하게 살 수가 있지만, 그 길을 쫓아가다가는 가난하게 살까 염려가 된다.”


위태자 조비(曹丕)가 오관중랑장으로 있을 때, 천하의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고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러나 병원은 홀로 도를 지키며 한결같았으며 공무가 아니면 일체의 망령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조조가 몰래 사람을 시켜서 조용히 그에 대해 물어보니 병원은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국가가 위태로우면 총재(冢宰)11)를 섬기지 않고, 군주가 늙으면 세자를 받들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이것이 법전에 나오는 제도입니다.”

조조는 곧 오관장사(五官長史)를 바꾸고 이렇게 명했다.

“자약(子弱)은 재능이 없으니 바로잡는 것이 어려울까 염려된다. 탐욕을 앞세워 다투어 자신의 몸을 함부로 구부리니 이러한 풍조가 유행될지도 모른다. 이(利)를 추구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하지만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태자가 연에서 모임을 개최했을 때 수 십 명의 빈객이 모였다. 태자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아버지와 군주가 동시에 심한 병에 걸렸는데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알약이 하나만 있다면 먼저 누구에게 바칠 것인가?”

사람들은 의견이 분분하여 어떤 사람은 군주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아버지라고 했다. 병원은 가만히 앉아서 아무런 의견도 내놓지 않았다. 태자가 병원에게 물어보자 병원은 한마디로 잘라서 아버지라고 대답했다. 태자도 역시 그 말에 반박을 하지 못했다.


이후 대홍려(大鴻臚)로 있었던 거록(鉅鹿)의 장태(張泰)[주1]와 하남윤(河南尹)으로 있었던 부풍(扶風)의 방적(龐迪)이 청빈함으로 칭찬받았다. 영녕(永寧 : 곽태후를 지칭)의 태복(太僕)이었던 동군(東郡) 사람 장각(張閣)[주2]도 간소함과 질박함으로 유명했다.

[주1] 순작(荀綽)의 《기주기(冀州記)》에는 장태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거록 출신인 장비(張貔)는 자를 소호(邵虎)라 했다. 그의 조부인 장태는 자를 백양이라 했으며, 위(魏)에서 명성을 얻었다. 아버지 장막(張邈)은 자를 숙료(叔遼)라 했으며 요동태수를 역임했다. 그가 지은 《자연호학론(自然好學論)》은 《혜강집(嵇康集)》에 그 이름이 나온다. 사람됨이 넓고 깊어서 원대한 지식체계를 갖추었으며, 작은 일에 연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실체를 누구도 가늠하지 못했다. 2개의 관직을 역임하고 원강(元康) 초에 성양태수(城陽太守)가 되었으나 임지로 가지 못하고 죽었다.

[주2]두서(杜恕)의 《가계(家戒)》에는 장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장자대(張子臺)는 겉으로는 소박하고 비루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천지간에 무엇이 가장 아름답고 무엇이 가장 좋은지를 알려고 하지 않았으나, 음양합덕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노력하는 마음은 충만했다.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보든지 그는 스스로 부귀를 쫓으려고 하지 않았으니, 우환거리가 어떻게 그를 쫓아오겠는가? 세상에 자대처럼 높은 이상을 지닌 사람들은 모두 그를 흉내 냈지만, 본체가 그와 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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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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