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녕管寧은 자가 유안(幼安)이고 북해군(北海) 주허현(朱虛縣) 사람이다. 

주: 《자(傳子)》에 따르면 그는 제나라의 명재상이었던 관중(管仲)의 후예라고 한다. 옛날에 강(姜)씨를 몰아내고 제나라를 차지한 전씨가 관씨를 제거하려고 하자, 일족은 노나라나 초나라로 피했다. 한이 일어나자 관소경(管少卿)이 연령(燕令)으로 임명되면서 주허에 살기 시작했다. 관소경의 후손들은 모두 명예와 지조를 지키며 살았다. 관녕은 관소경의 9세손이라고 한다.

열여섯 살 때 아버지를 잃었는데, 친척들은 그가 고아이고 가난한 것을 불쌍히 여겨 장례비용과 옷을 보냈으나, 모두 사양하여 받지 않고, 있는 재산에 맞추어 장례를 마쳤다. 그는 신장이 8척이고 용모가 수려하였다. 

그는 평원(平原)의 화흠(華歆)같은 현의 병원과 서로 우정을 나누고 함께 다른 봉국으로 유학을 갔으며, 아울러 진중궁(陳仲弓)을 존경하여 잘 모셨다. 천하가 큰 혼란에 휩싸이자, 공손도의 위엄이 있는 명령이 해외까지 전해졌으며, 병원과 평원현(平原)의 왕령(王烈)등이 요동으로 왔다. 공손도는 관역(館驛)으로 달려 나가 그들을 접대했다. 

관녕은 이전에 공손도를 만난 후 산의 계곡에 초가집을 지었다. 그 당시 요동으로 피난 온 사람들은 대부분 군의 남쪽에서 거주하였는데, 관녕은 군의 북쪽에서 거주하며 옮길 의향이 없음을 나타냈다. 나중에 대부분의 피난자들은 점점 그를 따라갔다. 태조가 사공으로 있을 때, 관녕을 불러 관리로 삼으려 했는데, 공손도의 아들 공손강이 태조가 보내온 임명서를 중간에 가로채고는 전해 주지 않았다.

주:《부자(傳子)》에는 요동에서 관녕의 생활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관녕은 공손탁을 만났을 때 경전에 대한 말을 했을 뿐, 세상사에 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하지 않았다. 곧 산으로 들어가 초가집을 짓고 굴을 파서 방으로 만들었다. 난리를 피해 바다를 건넌 사람들도 대부분 관녕이 사는 곳으로 몰려와 불과 10개월이 지나자 제법 큰 마을을 형성했다. 관녕은 그들을 대상으로 《시경》과 《서경》강론하면서 조두(俎豆)3)를 펼쳐 놓고 엄숙하게 의식을 진행하고 예양을 밝혀서 가르치자 배움을 청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공손탁도 그의 현명함을 보고 편안하게 생각했으며, 백성들은 그의 덕에 감화되었다. 병원(邴原)은 성품이 강직하고 격물(格物)4)에 의해 청의(淸議)를 전개했으므로, 공손탁은 내심으로 그를 불편하게 생각했다. 관녕은 그러한 병원에게 이렇게 말했다.


“잠룡(潛龍)은 성덕(成德)을 보이지 않으니, 시의(時宜)에 적절하지 않은 말은 모두 화를 초래하게 된다네.”


조조가 몰래 공손강에게 사람을 보내어 관녕을 서쪽으로 보내라는 명을 내렸다. 공손탁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공손탁이 죽은 후에 공손강이 요동군을 대신 차지하여 바깥으로는 장군태수(將軍太守)라 부르고, 내심으로는 왕이 될 야망을 품었다. 그는 관녕이 요동에 남아서 자신을 돕기를 바랐기 때문에 감히 조조의 명을 발설하지 않았다. 공손강의 관녕에 대한 존경심과 꺼림이 이와 같았다.


황보밀(皇甫謐)의 《고사전(高士傳)》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관녕이 사는 곳에는 우물이 있어서 마을 사람들이 물을 뜨기 위해 몰려왔다. 남녀가 뒤섞여서 혼잡했으므로 다툼이 자주 일어났다. 그것을 걱정한 관녕은 그릇을 많이 사서 우물가에 두고 사람들이 물을 다 기를 때까지 기다리면서 누가 가져다 둔 것인지를 알지 못하도록 했다. 물을 길러 온 사람이 그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여 물어보고 관녕이 가져다 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사람들은 서로 먼저 물을 뜨라고 사양하면서 다시는 다투지 않았다. 이웃집의 소가 관녕의 밭을 짓밟자, 관녕은 시원한 곳으로 소를 끌고 가서 친히 여물을 먹이고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소의 주인은 큰 죄를 저지른 것처럼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했다.


[[왕렬전]]으로 분할

몇년이 지나 중원 지역이 다소나마 안정되자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은 모두 돌아왔는데, 오직 관녕만은 그곳에서 평생을 보낼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황초(黃初) 4년(223)에 공경들에게 조서를 내려 탁월한 행위를 한 군자를 천거하도록 명했다. 사도(司徒) 화흠(華歆)이 관녕을 천거했다. 문제(文帝)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 관녕을 다시 초빙하자, 그는 마침내 가솔들을 데리고 바닷길을 따라 고향으로 돌아왔다. 공손강(孔孫恭)은 그를 남쪽 교외까지 전송하고 재물을 선물했다. 관녕은 요동으로 가서 공손도(度)ㆍ공손강(康)ㆍ공손공(恭)이 앞뒤로 준 재물을 모두 받아 깊이 간직했다. 이미 서쪽 해안을 건너 원래 군으로 돌아가려고 결정한 관녕은 받은 재물을 모두 밀봉하여 공손공에게 돌려보냈다.


주: 《부자(傳子)》에 따르면, 당시에 공손강도 이미 죽었고, 적자가 없었기 때문에 동생인 공손공이 지배자가 되었다. 공손공은 유약한 사람이었으나, 공손간의 서자인 공손연(公孫淵)은 상당한 능력을 지닌 준재였다. 관녕은 이렇게 말했다.


“적자를 폐하고 서자를 세우면 아랫사람들이 다른 마음을 품는다. 이는 환란이 발생하는 원인이 된다.”


그는 즉시 가족들을 데리고 배를 타고 요동을 떠났다. 관녕은 요동에서 36년 동안 머물렀다가 돌아왔다. 과연 나중에 공손연은 공손공으로부터 권좌를 빼앗고 국가에 반란을 일으켰으며, 남쪽의 손권과 연맹을 체결하여 왕을 참칭했다. 공손강의 차남이자 서자였던 그는 숙부를 내쫓고 그 자리를 빼앗았다. 현실적으로 당자 그를 제어할 수 없었던 위명제는 양열장군(揚烈將軍) 요동태수로 임명했다. 청룡(靑龍) 원년인 AD 233년 손권은 위를 견제하기 위해 공손연과 우호조약을 맺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장미(張彌)와 허안(許晏)을 파견하여 그를 연왕으로 봉했다. 그러나 공손연은 오는 너무 거리가 멀어서 의지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장미와 허안의 목을 잘라 위로 보냈다. 명제는 그를 대사마 낙랑공으로 봉했으나, 불만을 품은 공손연은 AD 237년에 스스로 연왕이 되었다.


이듬해 상국 사마의가 요동을 공격하여 공손연과 그의 아들 공손수를 사로 잠아서 처형했다. 당시에 요동에서 죽은 사람은 1만여명에 이르렀는데, 이는 관녕이 예측했던 숫자였다. 관녕은 고향으로 돌아오는 뱃길에서 위험한 풍랑을 만났다. 많은 배가 전복되었으나 관녕은 태연자약했다. 어둠이 밀려오자 뱃사람들은 어디에 정박해야 할지 몰라서 당황해했다. 마침 멀리서 불빛이 보여 간신히 배를 저어 갔더니 섬이 나타났다. 섬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고 불도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이상하게 생각하며 신이 도왔다고 말했다. 황보밀(皇甫謐)은 그것은 관녕이 선을 쌓았던 보답이라고 했다. 


관녕이 돌아온 후에 문제는 조서를 내려 관녕을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임명했지만, 관녕은 완강히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전자》에 따르면 관녕은 천자에게 글을 올려서 병을 핑계로 관직을 사양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은 꿈에 조상이 나타나면 큰 은덕을 받게 된다고 들었습니다. 여상(呂尙)이 꿈에 나타나자, 주문왕은 그 조짐을 믿었습니다. 여상은 신과도 통하는 재능으로 성주(聖主)를 깨닫게 하여 제업을 돕는 인재를 등용하도록 만들었으며, 마침내 큰 공을 세울 수가 있었습니다. 신의 기량은 이미 시들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비록 청담(淸淡)을 탐한다고 했지만, 고작 매미가 껍질을 벗고 나온 정도에 불과합니다. 오랜 병을 몸에 지니고 살다보니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듯이 나날이 쇠약해지고 말았습니다. 폐하께서 야인은 산에서 숨어 살아야 한다는 말을 들으신다면, 이 늙은이가 미미한 목숨이라도 수명을 다하도록 배려해 주십시오.”


관녕이 상주했다는 말을 들은 황제는 친히 그것을 읽었다.


명제(明帝)가 즉위했을 때, 태위(太尉) 화흠(華歆)이 자리를 사양하고 관녕에게 양도하니,

《전자》에는 사공 진군(陳群)이 관녕을 추천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신은 왕은 악을 제거함으로써 선을 드러낸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옛날에 탕왕이 이윤을 발탁하자 어질지 못한 자들이 모두 멀어졌다고 합니다. 신이 엎드려 세상을 살펴보니 북해 출신인 정사(征士) 관녕은 행동으로 세상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고 있으며, 배움으로는 많은 사람들의 스승이 될만합니다. 게다가 맑고 청렴함으로는 혼탁한 깨끗이 할 수가 있으며, 올바름으로는 시대를 바로잡을 수가 있습니다. 전에 비록 그를 부르는 명을 내렸으나 예가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전에 사공 순상(荀爽)은 집안에 있으면서 광록(光祿)에 임명되었으며, 선유(先儒) 정현은 사농(司農)을 제수했습니다. 더욱 예를 갖춘다면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가 오면 서서(西序)를 확장하여 그곳에 앉아서 도를 논하게 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고금의 도가 밝아져서 더욱 큰 교화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 태중대부(太中大夫) 관녕은 마음속에 도덕을 깊이 간직하고 있고, 가슴에는 육예(六藝)를 숨겨 두고 있으며, 맑고도 담백한 점은 고대의 성현에 비길 만하고, 청렴함과 결백함은 지금 시대에서 빛나고 있소. 그는 예전에 한 왕실의 도의가 쇠미하고 어그러짐을 만났기 때문에 바닷길을 따라 세상을 피해 은거했었소. 우리 위대한 위나라가 천명을 받은 후, 그는 자식들을 포대기에 싸고 등에 지고 돌아왔소. 이것은 용이 물에 잠겨 있다가 승천하는 이치이고, 성현이 세상에 쓰여 은둔하지 않는다는 뜻이오. 

그러나 황초 이래 조정에서 여러 차례 초빙을 했지만 매번 질병을 핑계로 하여 사양하고 거절하여 수도에 이르지 않았소. 어찌 조정의 정치가 그 자신의 삶과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고 하여 산림에서 안락하게 살려고 한 번 간 다음에는 돌아올 수 없단 말이오! 무릇 희공(姬公)과 같은 성인으로 말하면, 그는 나이 많고 덕이 높은 사람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면 봉황의 울음소리도 들을 수 없다고 했소. 진(秦)나라 목공(穆公) 같은 현명한 군주로 말하면, 백발노인에게 자문을 구하려고 생각했소. 하물며 짐은 덕이 부족하니, 어찌 여러 대부들에게서 성현의 도를 듣기를 원하지 않을 수 있겠소! 

지금 관녕을 광록훈(光祿勳)으로 임명하겠소. 예(禮)에는 지고한 윤리가 존재하지만, 군주와 신하 사이의 도리는 버릴 수 없는 것이오. 바라건대, 관녕은 반드시 빨리 도착하여 짐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기를 바라오. -

또 청주자사(青州刺史)에게 조서를 내렸다.

- 관녕은 도덕을 품고 있고 충절을 가슴에 안고 바닷가 벽지에 숨어 있소. 짐이 이전에 그를 부르는 조서를 내렸지만, 왕명을 거스르고 오지 않고, 뜻을 머뭇거리고 결정하지 못하고 편안하게 살면서 자신의 행동을 고상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소. 그가 비록 소박한 삶과 은둔 생활을 하는 사람의 정절을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주고부(朱考父 : 공자의 선조)의 겸양하고 복종하는 높은 뜻을 잃는 것이고, 짐이 마음을 비우고 기다리게 하기를 여러 해 동안 하였으니, 그는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단 말이오? 

그는 단지 편안한 생활만을 생각하고 자신의 사사로운 뜻만을 만족시키려 하고 있소. 설사 그가 생각하지 않았더라도 고인들 또한 살아가는 방법을 바꾸어 백성들을 행복하게 하려고 하지 않았겠소! 세월이 흘러가고, 시간은 방금 지나갔으며, 관녕은 멈추지 않고 그의 몸을 씻고 도덕을 맑게 하고 있으니, 무엇을 남기려고 하는 것이겠소? 공자의 말에, ‘나는 이와 같은 사람과 어울리지 않는다면 또 누구와 어울리겠는가!’라는 것이 있소. 

지금 별가 종사 군의 승연(承掾) 등에게 명령하여 조서를 받들어 예를 다하여 관녕에게 보내 짐이 지금 있는 곳으로 오도록 하시오. 그에게 안거(安車 : 노인이나 여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좌석이 달린 편안한 수레)를 수행할 관원과 수레에 깔 방석과 여행 도중에 먹을 식사를 마련해주고 그가 여행길에 오르면 먼저 보고하시오. -

관녕은 조서를 받은 후 스스로를 초망지신(草莽之臣)이라고 부르면서 상서를 올렸다.

- 신은 해안가의 고독하고 미천한 사람으로서 농사일에도 힘쓰지 않고 선비의 대열에도 끼지 못하는데, 봉록과 운명이 너무 두텁습니다. 마침 폐하께서 대통(大統)을 계승하였고, 폐하의 성덕은 고대의 성스러운 천자인 삼황(三皇)에 비견될 수 있고, 교화는 순임금을 뛰어 넘었습니다. 신은 오랫동안 깊은 은혜를 입어, 해가 쌓여 12년이나 되었는데, 폐하의 은혜를 받고 자란 복을 갚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신은 중병이 들어 자리에 누워 있으므로 과감히 행동할 수 없습니다. 달아나서 거스른 신하로서 절의(節義)를 뒤바꿨으므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두려워하며 스스로를 둘 곳이 없음을 깊이 느꼈습니다. 

태화(太和) 원년(233) 11월에 공거사마(公車司馬)의 령(令)이 주군(州君)에 하달되었고, 8월 26일에는 미천한 신을 초빙하려는 폐하의 조서와 하사하신 안거(安車)ㆍ의복과 방석, 그리고 신(臣)을 보내기 위해 차려 주신 온갖 예우를 받았습니다. 폐하께서 주신 영광과 은총이 저에게 이르렀습니다. 폐하께서는 신을 우대하고 임용하려고 여러 차례 오셨으므로, 신은 두렵고 불안해하며 마음을 놓고 아무 생각도 없었습니다. 신은 스스로의 마음을 진술하여 폐하로 하여금 듣도록 하고, 저의 어리석은 마음을 서술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폐하의 명조(明詔)는 매우 촉박하여 신으로 하여금 점점 올릴 장표(章表)를 쓰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지체됨이 오늘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폐하께서 저에게 하늘을 덮고 땅을 실을 만큼의 큰 은혜를 주셨으니 지난번보다도 훨씬 빛나는 것이었습니다. 신은 금년 2월에 폐하께서 태화 3년 12월 신유일(16일)에 내린 조서를 주군에게서 받았습니다. 그 조서에서 다시 안거와 의복을 하사 해주고, 별가(別駕)와 종사(從事)와 군의 공조를 예로써 사신으로 보냈으며, 또 특별히 옥새가 찍힌 조서를 주어 신을 광록훈으로 임명하셨습니다. 또 조서에서는 친히 겸허하신 태도로 주공과 진목공(秦穆公)을 비유로 들어 군주에게는 손해가 되고 신하에게는 이로움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조서를 받은 그날, 신은 혼비백산하여 몸을 던져 죽을 곳을 찾지도 못했습니다. 

신은 새로이 스스로를 반성하고 살폈는데, 신의 덕은 동원공(東園公)과 기리계(錡里季)에 비교되지 못하지만 폐하에게 안거를 받는 영광을 받았고, 두융(竇融) 같은 공은 없지만 옥새가 찍힌 조서로서 관직을 봉하는 은총을 입었습니다. 신은 동자기둥처럼 보잘것없는 사람인데 대들보 같은 중임을 맡겨 주셨으니, 죽음이 드리워진 목숨이 구경(九卿)의 높은 지위를 얻게 된 것과 같으니 신이 주박(朱博)처럼 요사스러움을 고취시켜 화를 일으키게 될까 두렵습니다. 또 신은 나이가 들어 나날이 질병이 심해지는데, 이런 것은 모두 덜함이 없습니다. 수레에 의지하여 경성으로 갈 수 없었던 것은 폐하께서 저에게 맡겨 주신 중대한 책임을 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신은 궁문을 바라보며 흠모하고, 궁정에 마음을 두고 배회하며, 글월을 올려 신의 심정을 서술하여서 폐하께서 가엾게 보살펴 주시기를 간청했습니다. 폐하께서는 임용하려는 은총을 거두시고 신이 산림으로 돌아가 쉬도록 허락해 주시기를 간청하옵니다. 그리하여 늙은 신하의 유골이 큰 길가에 버려지는 일이 없도록 해주시기를 간청하옵니다. -

황초(黃初) 연간(220~226)부터 청룡(青龍) 연간(233~236)에 이르기까지 관녕을 부르는 소명이 몇 차례 내려왔으며, 항상 8월이 되면 쇠고기와 술을 하사했다. 청주자사(青州刺史) 정희(程喜)에게 하문하는 조서가 내려왔다.

- 관녕이 절개를 지키면서 고결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늙고 병들어 쇠약해져 있는가를 가서 잘 살펴보시오. -

정희는 글을 올려 답했다.

- 관녕의 친족인 관공(管貢)이 주(州)의 관리로 있는데, 그는 관녕과 이웃에서 살고 있으므로 항상 그를 보내 관녕에 관한 소식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관공의 말에 의하면 ‘관녕은 항상 검은 색 모자를 쓰고 거친 베로 만든 속옷과 바지를 입고 겉옷은 때에 따라 홑겹 혹은 두 겹으로 된 것을 입으며, 대문을 나설 때는 스스로 지팡이를 잡을 수 있으므로 다른 사람의 부축이 필요없고, 매번 네 계절의 제사가 있을 때면 스스로 힘을 다하려고 애쓰며, 솜으로 된 두건을 쓰고 요동에 있을 때부터 가지고 있던 흰 베로 만든 홑옷을 입고, 친히 제사 음식을 받들어 모시고, 고개를 떨구고 무릎을 꿇고는 제사 의례를 다합니다. 

관녕은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어 어머니의 모습을 모르므로, 제사지낼 때에는 언제나 특별히 술잔을 붓는 것을 여러 번 더하고 눈물을 줄줄 흘립니다. 또 그의 집이 냇물에서 7, 80보쯤 떨어져 있으므로 여름에는 항상 그 물가로 가서 수족을 씻고, 채마밭을 돌보기도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신은 관녕이 앞뒤로 사양한 뜻을 살펴보았는데, 그는 자신 혼자서 은일(隱逸)한 환경에서 자라서 관직에는 익숙하지 않으며, 게다가 나이가 많고 지력이 쇠하므로 관리가 되기에 마땅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느긋하게 미루고, 항상 겸양하며 사퇴를 한 것입니다. 이것은 관녕이 자신의 만년의 심지와 행위를 보존하려 한 것이지, 고상함을 지키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

고사전高士傳에 이르길 : 관녕이 바다를 넘어갔을 때부터 돌아오기에 이르기까지 항상 오로지 목탑(木榻)에 앉아 있었으니 50여년 동안 머물러 일찍이 다리를 쭉 변 적이 없어, 그 탑榻 위가 무릎이 닿는 곳마다 모두 닳아 뚫어졌다.

*自注
* 自越海及歸 : 요동에 있었던 것을 말하는 것.
* 常坐一木榻 : 목탑은 나무로 만들어진 책상이나 걸상 따위를 말함. 그가 요동에 있는 동안 글을 열심히 읽었다는 것을 뜻함. 一은 같다로 볼 수 있으며(같다로 볼 경우, 항상 같은 목탑에 앉아있었다), 여기서는 "한 가지로", "전일토록"으로 보고 "오로지"라고 번역함.
* 未嘗箕股 : 箕股이란 다리를 키箕 모양처럼 쭉 펴는 행위를 말함.
* 其榻上當膝處皆穿 : 여기서 榻을 책상이나 걸상 혹은 평상 등으로 해석할 수 있으나 말뭉치를 살려 그냥 탑榻이라고 해두었음.

정시 2년(241)에 태복(太僕) 도구일(陶丘一), 영령궁(永寧宮)의 위위(衛尉)로 있는 맹관(孟觀), 시중(侍中) 손옹(孫邕), 중서시군(中書侍郡) 왕기(王基)는 관녕을 추천하며 서술했다.

----------- 신들이 듣건대, 용이나 봉황은 그 빛나는 몸을 숨기고 있다가 덕이 있는 사람이 출현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돌아오고, 총명하고 도리에 밝은 현인은 숨어서 적합한 때를 기다렸다가 행동합니다. 때문에 봉황이 기산(岐山)에서 울어 주 왕조의 도가 흥성하였고, 상산(商山)의 사호(四皓)가 늙은 신하를 보좌하여 한 왕조의 제위의 운명이 평안하게 되었습니다. 

신들이 보건대, 태중대부 관녕은 하늘과 땅의 중화에 순응하여 구덕(九德)의 순정함과 단일함을 총괄하고 있습니다. 그의 소박한 인품을 미려한 꽃무늬를 함유하고 있고, 차가운 얼음을 알고 있는 듯한 정절과 엷은 연못같은 맑은 성정이 있으며, 그의 마음은 현허(玄虛)하고 담박하여 묘도(妙道)와 함께 소요하는 것을 숭상하고 있습니다. 그는 황제(黃帝)와 노자(老子)의 경전으로 스스로 마음을 즐겁게 하고, 육예의 전적을 유람하는 것이 그의 평소 뜻입니다. 

그의 학업은 일찍이 당(堂)에 올라 방(室)으로 들어가서 유도(儒道)의 정미한 뜻과 심오함을 철저히 통찰하였고, 그의 가슴속에는 고금(古今)의 온갖 책략을 다 감추고 있으며 도덕의 기틀과 핵심을 포용하고 있습니다. 중평(中平) 연간에 황건군이 일어나자, 중국은 뒤엎어지는 소용돌이에 쌓였고, 왕실의 기강은 황폐해지고 쇠약해져 있었습니다. 관녕은 그 당시의 난을 피하기 위해 뗏목을 타고 바다를 건너 요동에서 30여 년간 몸을 의탁하여 살았습니다. 

건(乾)의 괘가 구(垢)의 괘로 옮겨가는 상태가 되자 그림자를 숨기고 빛을 감추었습니다. 그는 은둔생활을 즐거워하며 호연지기를 배양하고, 그의 가슴속에는 유가와 묵가의 학설을 깊숙이 감추어 두었습니다. 그의 교화는 은근히 알려졌으며, 세상 풍속과 백성들의 정서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 

황초 4년(223), 고조(高祖) 문황제(文皇帝)는 여러 신하들에게 자문을 구하여 재야에 있는 재덕을 갖춘 인물을 구하려고 했는데, 옛날에 사도를 지낸 화흠은 관녕을 천거하여 그 사람을 선발하게 했습니다. 관용 수레를 보내 특별히 초빙하여 관녕은 부름을 받은 후 먼 변방의 바닷가로부터 날개를 떨쳐 먼 곳으로부터 날아 들어오도록 하였습니다. 가는 도중에 액운을 만나 질병에 걸림으로써 조정에 들어올 수 없게 되었고, 그래서 고조께서는 그를 태중대부로 임명했던 것입니다. 

열조(烈祖) 명황제(明黃帝)께서는 즉위하신 후, 그의 도덕을 기리고 찬미하며 또다시 광록훈으로 임명했습니다만, 관녕은 중병으로 자리에 누워 있었으므로 길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지금 관녕은 중병으로 자리에 누워 있었으므로 길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지금 관녕은 지병이 이미 나았으며, 나이는 80세이지만 정신만은 쇠약하거나 피곤함이 없습니다. 그는 담 둘레에 사립문을 달고 궁벽한 시골에서 편안히 쉬면서 죽을 먹어 입에 풀칠하며, 이틀 것을 하루에 먹고 온종일 시경과 서경을 노래하며 안빈낙도의 고상한 정취가 조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는 비록 곤궁하지만 통할 수 있었으므로, 어떤 위급한 상황을 만나더라도 반드시 편안할 수 있으며 어떤 위험을 겪더라도 자신의 절조를 바꾸지 않을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의 금 같은 명성과 옥 같은 색조는 시간이 오래될수록 더욱 빛날 것입니다. 신 등이 그를 처음부터 끝까지 고찰해 보니 정말로 하늘에서 복을 내려 준 것 같습니다. 그는 위대한 위나라를 칭찬하고 명군을 도와 창성과 화해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현재 조정의 삼공(三公)의 직위가 아직 비어 있으므로 신하들은 그 관직을 그에게 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과거 은고종(殷高宗) 무정(武丁)께서는 꿈에서 본 부열(傅說)의 얼굴을 그려 놓고 사방으로 그를 찾아다니셨고, 주문왕도 거북이로 점을 쳐서 계시하고 우수한 보좌를 받았습니다. 하물며 관녕은 이전 왕조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추천받았으며, 그의 명성과 덕망은 매우 빛났지만 오래도록 은둔하였으므로 시기에 임해서 초빙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선제의 밝은 가르침을 받들어 존중하고 선제께서 남기신 뜻을 계승하여 완성시킬 방법이 없었을 것입니다. 

폐하께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선제의 대업을 계승하여 신하와 백성들은 폐하의 성명(聖明)을 존경하고 이미 날마다 함께하고 있으니, 주성왕(周成王)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폐하의 말씀은 언제나 도덕에 부합되고 거동을 하실 때는 언제나 사부(師傅)에게 자문하고 있습니다. 만일 폐하께서 문제와 명제에게서 현인을 부른 것을 이어받을 수 있다면, 빼어난 인재를 손님 맞는 예로써 대우하고, 그리고 광휘 있는 덕을 베푸시면 성대한 교화는 선제와 비견될 수 있을 것입니다. 

관녕은 심지가 맑고 순수하며 고상하고, 성정이 담백합니다. 그의 행적은 이전 현인의 궤도와 유사하고, 탁월한 품행은 사해 안에서 둘째가는 사람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전의 왕조 시대에 옥과 비단을 보내 초빙한 신공(申公)ㆍ매승(枚乘)ㆍ주당(周黨)ㆍ번영(樊榮)의 무리를 차례대로 보면서 그들의 연원을 예측하고, 그들의 품행의 맑고 탁함을 관찰하여도 관녕처럼 풍속을 면려하여 이와 같이 독특하게 행동할 수는 없었습니다. 실제로 비단과 옥을 준비하여 완벽한 예의로써 그를 초빙해야만 합니다. 

그에게 부족할 수 있는 지팡이를 주어 동교(東郊)의 학교에 초빙하여 경서를 펴서 진술하도록 하여 그와 함께 앉아 경전의 이치를 논하고, 그로 하여금 위로는 제위(帝位)의 운행을 바르게 하고 정치의 근간을 조화롭게 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도와 사람이 지켜야 할 불변의 법칙을 질서 있게 하여, 커다란 교화를 빛나게 하면 반드시 이익을 줄 것입니다. 

만일 관녕이 반석이 아니라고 고집하면서 기산(箕山 : 허유의 은둔지)에 은둔하며 뜻을 지키고, 홍애(洪崖 : 고대의 선인)의 자취를 흠모하고, 단보(單父)와 허유(許攸)의 자취를 더하려고 한다면, 이 또한 위나라의 성스러운 조정이 요순의 시대와 부합되어 현자를 우대하고 성과가 있는 자를 기용하여 명성을 천 년 이후까지 남기는 것입니다.(주) 비록 관리로 나가는 것과 재야에 있는 것이 다른 길이고, 숙이는 것과 우러르는 것은 자세가 다를지라도, 정치를 흥하게 하고 풍속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

今文尚書曰「優賢揚歷」,謂揚其所歷試。左思魏都賦曰:「優賢著于揚歷」也。

그래서 특별히 편안한 노인용 수레를 마련하고 비단과 옥을 실어 관녕을 초빙하게 했다. 그러나 마침 관녕이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조정에서는 관녕의 아들 관막(管邈)을 낭중(郎中)으로 임명했는데, 그는 후에 박사(博士)가 되었다. 처음에 관녕의 처가 먼저 죽자, 오래 사귄 친구들이 다시 재혼할 것을 권했다. 관녕이 말하길,

“나는 매번 증자(曾子 : 공자의 제자, 曾參)와 왕준(王駿 : 전한 成帝때 어사대부까지 올랐던 名臣)의 말을 생각하고 마음으로 항상 그들을 좋아했는데, 어떻게 내가 똑같은 일을 만나고 나서 나의 본심을 어길 수 있겠는가?”

주:《부자(傳子)》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관녕은 세상이 무너지고 어지러워지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성씨를 바꾸는 현상을 보고 각 성씨의 근원과 세보를 적은 《씨성론(氏姓論)》을 지었다. 성인의 제도가 어긋나고 예가 무너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분량이 너무 많아서 모두 여기에 실을 수는 없다. 그 내용은 혼인과 친구 관계 중심으로 정리되어 있으며, 어떤 곳에 사는 사람이 지독하게 가난한지, 또 누가 많은 재산을 축적해 두었는지를 기록하여 어려움이 있을 때 그것을 보고 서로를 보살피도록 했다. 또 자식들에게 그것을 주면서 효도를 가르치고, 형제들에게는 우애를 설명하도록 했으며, 신하들에게는 충성심을 일러주도록 했다. 또 행동거지는 공손해야 하며, 말은 순리적이어야 하므로, 그의 행동을 관찰하여 조상에게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사람됨이 부드럽고 온순하면 선으로 이끌기가 쉽기 때문에, 당장은 어렵더라도 조금씩 노력하면 누구나 교화를 시킬 수가 있다고 했다. 관녕이 죽자 천하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알고 있었던 사람이나, 몰랐던 사람을 막론하고 모두가 슬퍼했다. 그가 자신의 덕으로 세상을 순화시킨 공이 이와 같았으니, 지극하지 않았다고 누가 말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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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수의 평> 관녕(管寧)은 다정하고 고상하며, 확실하게 절개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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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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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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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9.12
17:4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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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전의 목탑에 앉아있던 관녕은 사마휘님의 번역입니다. 번역 감사합니다. http://rexhistoria.net/community_freesam/52166#comment_5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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