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기何夔는 자가 숙룡(叔龍)이고 진군(陳郡) 양하현(陽夏縣) 사람이다. 그의 증조부 하희(何熙)는 한무제 때 거기장군(車騎將軍)의 관직까지 승진했다. 



華嶠漢書曰:熙字孟孫,少有大志,不拘小節。身長八尺五寸,體貌魁梧,善為容儀。舉孝廉,為謁者,贊拜殿中,音動左右。和帝(佳)〔偉〕之[주1],歷位司隸校尉、大司農。永初三年,南單于與烏丸俱反,以熙行車騎將軍征之,累有功。烏丸請降,單于復稱臣如舊。會熙暴疾卒。


화교의 한서(華嶠漢書)에 이르길:하희(何熙)의 자는 맹손(孟孫)으로 어려서부터 큰 뜻이 있어 작은 예절에 구애되지 않았다. 신장은 8척 5촌으로 자태와 용모가 건장하였으며 행동이 훌륭했다. 효렴으로 천거되어 알자가 되었는데 대전에서 찬배贊拜(신하가 조현朝見할 때에, 예식을 돕는 사람이 행례行禮의 절차를 말하는 것.)를 하는데 그 음성에 좌우의 사람들이 모두 전율하였고 화제和帝가 이를 장하게 여겼다. 사례교위, 대사농을 역임하였다. 영초 3년(109년) 남선우와 오환이 더불어 반란을 일으켰는데 하희는 거기장군을 대행하여 정벌하였고 누차 공을 세웠다. 오환이 항복을 청하고 선우도 다시 이전 처럼 신하를 칭했는데 그때 하희는 갑자기 병에 걸려 죽었다. 


[주1] 삼국지집해에 이르길 "하작이 교정하여 佳자를 偉자로 바꿨다."



하기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형과 함께 살았으며, 효행과 우애로 칭찬받았다. 그의 신장은 8척 3촌이고, 용모는 근엄하였다.


魏書曰:漢末閹宦用事,夔從父衡為尚書,有直言,由是在黨中,諸父兄皆禁錮。夔歎曰:「天地閉,賢人隱。」故不應宰司之命。


위서에 이르길 : 한나라 말기에 환관들이 권력을 쥐고 흔들었는데 하기의 종부인 하형이 상서로 있으면서 직언을 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당黨 가운에 들어가게 되었고 여러 부형들이 모두 금고당했다. 하기가 탄식하며 말하길 :「천지가 닫히고 현자가 숨는다.」 그러므로 관직에 취임하라는 명에 응하지 않았다.


동한 말, 난리를 피해 회남으로 갔다. 후에 원술이 수춘(壽春)으로 가서 그를 초빙하였으나, 하기는 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원술에게 붙들려 있게 되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원술은 교유(橋莥)와 연합하여 기양(蘄陽)을 포위하고 공격했다. 기양은 태조가 고수하고 있었다. 원술은 하기가 그 군 사람이었으므로 협박하여 기양 사람들을 설득시키려고 했다. 하기가 원술의 모신 이업(李業)에게 말했다.

“옛날(춘추시대) 유하혜(柳下惠)는 나라를 토벌할 계획을 듣고 걱정하는 기색을 나타내고 말하기를, ‘나는 나라를 토벌하는 일은 어진 사람에게 묻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이 말이 어찌하여 나에게 이르렀는가!’라고 했소.”

그리고 하기는 첨산(灊山)으로 숨었다. 원술은 하기가 결국에는 자기를 위해 쓰이지 않을 것임을 알았으므로 계획을 그만 두었다. 원술의 당형 산양태수(山陽太守) 원유(袁遺)의 어머니는 하기의 당고모이다. 이 때문에 하기를 한스러워했을지라도 해를 끼치지는 못했다.
건안 2년(197)에 하기는 고향으로 돌아오려 했는데, 원술이 반드시 추격하리라고 예상하고 오솔길로 몰래 탈출하여, 다음해에 본군으로 돌아왔다. 오래지 않아 태조는 하기를 불러 사공연속(司空掾屬)으로 임명했다. 당시 원술의 군대가 혼란스럽다는 것을 전하는 자가 있어, 태조는 하기에게 물었다.

“그대는 이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하기가 대답했다.

“하늘이 도와주는 자는 하늘에 순응하고, 사람이 도와주는 자는 사람을 믿습니다. 원술은 하늘에 순응하지 않고 사람을 믿은 사실이 없으면 서 하늘과 사람의 도움을 바라고 있는데, 이것은 천하에서 원하는 뜻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무릇 도를 잃은 군주는 친척들조차 배반하는데, 하물며 그의 주위에 있는 사람임에랴! 저의 생각으로 이 일을 보면 난의 발생이란 필연적인 것입니다.”

태조가 말했다.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을 잃으면 망하게 되오. 그대가 원술에게 임용되지 않았으니, 그곳에 난이 발생하는 것 또한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겠소?”

태조는 성격이 엄했으므로, 연속(掾屬)들은 공무에 관한 일로 왕왕 곤장을 맞기도 했다. 하기는 항상 독약을 가지고 다니며 죽어도 치욕은 받지 않을 것을 맹서하였기 때문에 시종 벌을 받지 않았다.


孫盛曰:夫君使臣以禮,臣事君以忠,是以上下休嘉,道光化洽。公府掾屬,古之造士也,必擢時雋,搜揚英逸,得其人則論道之任隆,非其才則覆餗之患至。苟有疵 釁,刑黜可也。加其捶扑之罰,肅以小懲之戒,豈「導之以德,齊之以禮」之謂與!然士之出處,宜度德投趾;可不之節,必審於所蹈。故高尚之徒,抗心於青雲之 表,豈王侯之所能臣,名器之所羈紲哉!自非此族,委身世塗,否泰榮辱,制之由時,故箕子安於孥戮,柳下夷於三黜,蕭何、周勃亦在縲紲,夫豈不辱,君命故 也。夔知時制,而甘其寵,挾藥要君,以避微恥。詩云「唯此褊心」,何夔其有焉。放之,可也;宥之,非也。


손성이 말하길 : 무릇 임금은 신하를 예禮로 부리고 신하는 임금을 충성으로 섬겨 이로써 상하가 화목하고 성도聖道의 빛이 고루 입혀지게 됩니다. 공부의 연속은 고대의 조사造士로서 반드시 준재를 선발하고 능력있는 사람을 구해 발탁해야 한다. 그런 사람을 얻으면 도를 논하는 직임이 흥성하고 그런 사람을 얻지 못하면 재앙이 이르게 된다. 진실로 흠이 있다면 형벌을 가하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매를 때리는 벌을 가하면서 사소한 일에도 벌을 가하는 경계로 엄숙하게 만든다면 어찌 도道로 인도하고 예禮로 가지런히 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선비의 출처는 응당 덕을 헤아려 몸을 의탁할 곳을 골라야하고 머물고 떠나는 정도는 반드시 자신의 처지를 살펴야 한다. 그러므로 고상한 무리는 마음이 세속을 떠난 은거에 있는데 어찌 왕후가 신하로 삼고 명기名器(물질적인 조건들)에 얽매이겠는가! 이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면 세상에 몸을 위탁하면서 잘풀리고 못풀리고 영예롭고 치욕스러운건 시세에 달려있게 된다. 그러므로 기자箕子는 자손이 살육당하는 처지에 편안하게 처했으며 유하혜는 3번 폄직당했고 소하와 주발도 죄수의 몸이 되었던 것이다. 무릇 어찌 모욕이 아니었겠냐마는 임금의 명령이었기에 받아들인것이다. 하기는 시세의 제약을 잘 알았으면서 그 총애를 달콤하게 여겨 독약을 지니고 다니며 임금을 협박하여 사소한 부끄러움을 피하고자 하였다. 시경에 「좁은 속 때문이다.」라 하였는데 하기가 그에 해당된다. 만약 풀어준다면 괜찮지만 용서해준다면 올바르지 못한것이다.



태조는 하기를 밖으로 보내 성부(城父)의 현령으로 삼았으며,


魏書曰:自劉備叛後,東南多變。太祖以陳群為酇令,夔為城父令,諸縣皆用名士以鎮撫之,其後吏民稍定。


위서에 이르길 : 유비가 반란을 일으킨 후로부터 동남방에서 변고가 많이 일어났다. 태조는 진군을 차현의 현령으로 하기를 성부현의 현령으로 삼았다. 여러 현들에서 모두 명사를 이용해 진무하니 그 이후에 관리와 백성들이 점차 안정되었다.


또 장광태수(長廣太守)로 승진시켰다. 장광군은 산과 바다에 인접해 있는 지역으로 황건적이 끊이지 않았고, 호걸들은 대부분 조정을 배반했는데, 원담은 그대로 관직을 받았다. 장광현 사람 관승(管承)이 3천여 명의 대중을 모아 난폭하게 해를 미쳤다. 논의하는 사람들은 병사를 일으켜 그를 공격하려고 했는데, 하기가 말했다.

“관승 등은 태어나면서부터 혼란을 좋아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들은 혼란에 익숙해져 스스로 돌이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덕적인 가르침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선(善)으로 돌아가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지금 병사들을 이용하여 그들을 핍박한다면, 그들은 전멸을 두려워하여 반드시 힘을 합쳐 싸울 것입니다. 그들을 공격하여 뿌리를 뽑는 것도 쉽지 않고, 비록 승리한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관리와 백성들이 다치게 될 것입니다. 서서히 은덕으로 깨우쳐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후회하도록 하는 것만 못합니다. 이렇게 하면 병력을 움직이지 않고도 평정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군의 승으로 있는 황진(黃珍)을 파견하여 그들에게 일이 성공하고 패했을 때의 득실을 설명하게 했는데, 관승 등은 모두 투항을 요청했다. 하기는 관리 성홍(成弘)을 보내 교위로 인솔하도록 하고, 장광현의 승 등은 소와 술을 예물로 갖고 교외로 가서 그들을 영접하였으며, 귀순한 적장을 군으로 데리고 왔다. 모평현(牟平縣)의 도적 종전(從錢)의 무리 또한 수천 명이나 되었는데, 하기는 군의 병사들을 인솔하여 장료와 함께 토벌하여 평정했다. 동모(東牟) 사람 왕영(王營)은 무리 3천여 명으로 창양현(昌陽縣)을 협박하여 난을 일으켰다. 하기는 관리 왕흠(王欽) 등을 보내 계책을 주어 그들을 분산시키도록 했는데, 10개월만에 모두 평정했다.


그때, 태조는 처음으로 새로운 법령을 제정하여 주와 군에 하달하고, 또 조세와 비단을 거둬들이려고 했다. 하기는 군이 처음 세워졌으며, 최근에 출병하였으므로, 갑자기 법령으로 매어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진언했다.

“전란이 있은 이래로 백성들은 기거할 곳을 잃었고, 지금 비록 조금 편안하게 있다고 할지라도 교화되어 복종한 날은 매우 적습니다. 내리신 새로운 법령은 모두 형벌을 명확히 하고 법령을 공포하며, 획일적인 왕도로 다스리는 좋은 법령입니다. 그렇지만 다스리고 있는 여섯 현은 경계가 방금 확정되었고, 게다가 기근도 들었습니다. 만일 일제히 새로 만든 법령을 사용하여 요구한다면, 아마 가르침에 복종하지 않는 자가 있게 될 것입니다. 가르침에 복종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주살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것은 백성을 관찰하여 가르침을 세우고, 시대의 상황에 대응하게 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선왕(先王 : 古代의 明君)은 조세를 구복(九服)으로 분별하여 멀고 가까움을 구별하였으며, 삼전(三典)의 형벌을 제정하여 혼란을 다스려 평정시켰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이 군은 먼 지역, 새로 세운 지역에 맞는 법전에 의거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곳 백성들 사이에서의 작은 사건은 장사들로 하여금 그때마다 마땅하게 처리하도록 하면, 위로는 정법(正法)을 어기지 않고 아래로는 백성의 마음에 따를 수 있습니다. 3년만 다스리면, 백성들은 각자의 생업에 안정할 것이고, 그런 연후에 새로운 법령으로 그들을 획일적으로 구속하면 하지 못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태조는 그의 건의에 따랐고 하기를 중앙으로 불러 승상(承相)의 군사로 참여시켰다. 해적 곽조(郭祖)가 악안(樂安)과 제남(濟南)의 경계지역에서 약탈을 자행하였으므로 주와 군은 그 점에 대해 고심했다. 태조는 하기가 이전에 장광에서 위신이 있었기 때문에 악안태수(樂安太守)로 임명했다. 하기가 임명된 지 수개월이 지나자 여러 성이 모두 평정되었다.
하기는 중앙으로 들어가 승상 동조의 연(掾)이 되었는데 태조에게 진언했다.

“전쟁이 일어난 이래로 제도가 처음으로 만들어져 사용하는 사람들이 그 근본을 상세하게 살피지 못했기 때문에 각기 자기와 비슷한 사람을 천거하여 관리로 삼고, 어떤 때는 인재를 천거하는 도덕준칙을 잊기도 합니다. 제가 듣건대 ‘현명함을 조건으로 하여 작위를 준다면 백성들은 그들의 품덕을 닦을 수 있고, 공적을 근거로 하여 봉록의 등급을 정한다면 백성들은 다투어 공업을 세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지금 이후로 기용된 인물은 반드시 먼저 고향 마을에서 관련있는 상황에 대한 사찰을 실시하여 연장자와 연소자의 질서를 서로 뛰어넘는 일이 없도록 해야 되며, 충성스럽고 정직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어 나타내고, 공정하고 독실한 관리에게 보상을 분명히 하면, 현명한 자와 어리석은 자의 구분이 확연해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 추천한 인물에 대해 보증할 수 있으면서 고의로 부실한 자는 법령을 더하고, 담당 관리에게는 별도로 그 책임을 지도록 하십시오. 조정에 있는 신하들 중에서 당시에 가르침을 받아 동료와 함께 관리 선발에 참여하는 자는 또한 각자 자신들의 직책을 책임져야만 합니다. 위로는 이것으로 조정 신하들의 절개를 관찰하고, 아래로는 경쟁의 근원을 끊어서 여러 신하들을 감독하고 백성들을 인도하십시오. 이렇게 하면 천하는 큰 행운을 안게 될 것입니다.”

태조는 하기의 말을 매우 칭찬했다. 위나라가 세워진 후, 하기를 상서복야(尚書僕射)로 임명했다.


魏書曰:時丁儀兄弟方進寵,儀與夔不合。尚書傅巽謂夔曰:「儀不相好已甚,子友毛玠,玠等儀已害之矣。子宜少下之!」夔曰:「為不義適足害其身,焉能害人?且懷姦佞之心,立於明朝,其得久乎!」夔終不屈志,儀後果以凶偽敗。


위서에 이르길 : 당시에 정의 형제가 바야흐로 총애를 받았는데 정의와 하기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상서 부손이 하기에게 말하길 :「정의가 서로 친하게 지내지 않은것이 이미 심한데 그대는 모개와 친합니다. 모개 등은 정의가 이미 해쳤습니다. 그대는 응당 약간 고개를 숙여야 할 것입니다!」 하기가 말하길 :「의롭지 못한 행동을 하면 족히 그 몸을 해칠만한데 어찌 능히 다른사람을 해칠 수 있겠습니까? 또한 간사한 마음을 품고 밝은 조정에 서 있으니 오래 지속될 수 없을겁니다!」 하기는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고 정의는 이후에 과연 흉악함으로 패망하였다.


문제가 태자가 되었을 때, 양무(凉茂)를 태부(太傅)로 삼았고, 하기를 소부(少傅)로 삼았으며, 아울러 이 두 사람이 상서동조와 태자와 함께 제후 관속을 선발하도록 특별히 명령을 내렸다. 양무가 죽은 후, 하기로 하여금 다시 양무를 대신하도록 했다. 매월 초하루, 태부가 궁궐로 들어가 태자를 만났을 때, 태자는 정식 관복을 입고 예의를 다했다. 다른 날에는 회견 의식이 없었다. 하기가 태복(太僕)으로 승진하였을 때, 태자는 그와 이별하려고 재계하고 받들었지만, 하기는 갈 의사가 없었다. 그래서 편지를 써서 그를 초대하였지만, 하기는 국가에는 변하지 않는 제도가 있다고 하며 가지 않았다. 그의 행위는 이처럼 단정했다. 그러나 그는 절약을 숭상하는 사회에서 가장 호화롭고 사치스러웠다. 문제는 황제에 즉위한 후, 그를 성양정후(成陽亭侯)로 봉하고 식읍 3백 호를 주었다. 그는 질병으로 인해 누차에 걸쳐 자리에서 물러나기를 구했다. 문제는 조서를 내려 그에게 대답했다.

- 현자를 예우하고 옛 친구와 친한 것은 제왕의 변하지 않는 일이오. 친근함을 말하면 그대에게는 군왕을 보필하는 공로가 있고, 현명함을 말하면 그대에게는 두텁고 곧은 덕이 있소. 무릇 은덕(隱德)을 실천한 자는 반드시 눈에 보이는 보답을 받게 되오. 지금 그대의 병은 아직 낫지 않았지만, 신명은 나의 말을 들었을 것이오. 그대가 마음을 편안히 하는 것이 나의 뜻을 따르는 것이오.

오래지 않아 하기는 죽었고, 시호를 정후(靖侯)라고 했다. 그의 아들 하증(何曾)이 후사를 이었으며 함희(咸熙) 연간(264~265)에 사도(司徒)가 되었다.



干寶晉紀曰:曾字穎考。正元中為司隸校尉。時毌丘儉孫女適劉氏,以孕繫廷尉。女母荀,為武衛將軍荀顗所表活,既免,辭詣廷尉,乞為官婢以贖女命。曾使主簿程 咸為議,議曰:「大魏承奏、漢之弊,未及革制。所以追戮已出之女,誠欲殄醜類之族也。若已產育,則成他家之母。於防則不足懲奸亂之源,於情則傷孝子之思, 男不御罪於他族,而女獨嬰戮於二門,非所以哀矜女弱,均法制之大分也。臣以為在室之女,可從父母之刑,既醮之婦,使從夫家之戮。」朝廷從之,乃定律令。


간보의 진기(干寶晉紀)에 이르길:하증(何曾)의 자는 영고(穎考)이다. 정원 연간에 사례교위가 되었다. 당시에 관구검의 손녀가 유씨에게 시집가서 임신한 채로 정위에게 잡히게 되었다. 그녀의 어머니 순씨는 무위장군 순의의 표를 통해 살아났고 이미 사형을 면하자 정위에게 가서 스스로 관비가 되어 딸의 생명을 대속하고 싶다고 청하였다. 하증은 주부 정함으로 하여금 논의하도록 하였다. 논의하는 말에 :


「대위는 진한의 폐단을 이어받아 혁파하는데 이르지 못했습니다. 이미 출가한 딸을 주륙하는 것은 진실로 추류醜類의 일족을 전부 죽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미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다면 곧 다른 집안의 어머니가 됩니다. 방비하는 차원에서는 간란奸亂의 근원을 징벌하기에 부족하고 감정적인 차원에서는 효자의 사모하는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남자는 다른 가족의 잘못으로 죄를 받지 않지만 여자는 홀로 두 가족의 주륙에 연관되니 여자를 애긍哀矜하게 여기는 균등한 법제의 대강이 아닙니다. 신은 이로 인하여 집안에 있는 여자는 부모의 형刑을 따라 받겠지만 이미 출가한 딸은 남편집안을 따라 주륙당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조정에서는 이 의견을 따랐고 마침내 율령을 정했다.


晉 諸公贊曰:曾以高雅稱,加性純孝,位至太宰,封朗陵縣公。年八十餘薨,諡曰元公。子邵嗣。


진제공찬에 이르길 : 하증은 고아한 것으로 칭해졌고 본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으며 지위는 태재에 이르렀고 낭릉현공에 봉해졌다. 80여세의 나이로 죽었고,시호를 원(元)이다. 하들 하소(何邵)가 뒤를 이엇다.


邵字敬祖,才識深博,有經國體儀。位亦至太宰,諡康公。子蕤嗣。 邵庶兄遵,字思祖,有幹能。少經清職,終於太僕。遵子綏,字伯蔚,亦以幹事稱。永嘉中為尚書,為司馬越所殺。


하소(何邵)의 자는 경조(敬祖)로, 재주와 견식이 깊고 넓어 나라를 다스릴 만한 능력과 위의가 있었다. 지위가 역시 태재에 이르렀는데 시호를 강공康公이라 하였다. 아들 하유何蕤가 작위를 이었다. 하소의 서형 하준何遵은 자가 사조思祖로 능력이 있었다. 젊어서는 청요직을 거쳐 태복으로 끝마쳤다. 하준의 아들인 하수何綏는 자가 백위伯蔚로 또한 일을 잘 처리하는 것으로 칭해졌다. 영가 연간에 상서가 되었는데 사마월에게 살해당했다.


傅子稱曾及荀顗曰:「以文王之道事其親者,其 潁昌何侯乎!其荀侯乎!古稱曾、閔,今曰荀、何。內盡其心以事其親,外崇禮讓以接天下。孝子,百世之宗;仁人,天下之令也。有能行仁孝之道者,君子之儀表 矣。」


부자가 하증과 순의를 칭하여 말하길 :「문왕의 도리로 그 부모를 섬긴 사람은 영창 하후인가! 순후인가! 옛날부터 증삼과 민자건을 칭했는데 오늘날에는 순의와 하증이 있다. 안에서는 그 마음을 다해 부모를 섬기고 바깥에서는 예양禮讓을 숭상하여 천하의 사람들을 대접하였다. 효자는 백세의 모범이고 인자한 사람은 천하의 모범이다. 능히 인仁과 효孝의 도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은 군자의 의표儀表(본보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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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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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3
12:55:52 (*.104.2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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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13
10:11:42
(*.52.89.87)
배주의 한문주석 추가 저 하증이라는 사람은 사마소 때 승상까지 오른 자라 진서에 내용이 더 많습니다.

dragonrz

2019.11.12
23:28:20
(*.67.125.237)
少有大志,不拘小節。身長八尺五寸,體貌魁梧,善為容儀。舉孝廉,為謁者,贊拜殿中,音動左右。和帝(佳)〔偉〕之[주1],歷位司隸校尉、大司農。永初三年,南單于與烏丸俱反,以熙行車騎將軍征之,累有功。烏丸請降,單于復稱臣如舊。會熙暴疾卒。

어려서부터 큰 뜻이 있어 작은 예절에 구애되지 않았다. 신장은 8척 5촌으로 자태와 용모가 건장하였으며 행동이 훌륭했다. 효렴으로 천거되어 알자가 되었는데 대전에서 찬배贊拜(신하가 조현朝見할 때에, 예식을 돕는 사람이 행례行禮의 절차를 말하는 것.)를 하는데 그 음성에 좌우의 사람들이 모두 전율하였고 화제和帝가 이를 장하게 여겼다. 사례교위, 대사농을 역임하였다. 영초 3년(109년) 남선우와 오환이 더불어 반란을 일으켰는데 하희는 거기장군을 대행하여 정벌하였고 누차 공을 세웠다. 오환이 항복을 청하고 선우도 다시 이전 처럼 신하를 칭했는데 그때 하희는 갑자기 병에 걸려 죽었다.

[주1] 삼국지집해에 이르길 "하작이 교정하여 佳자를 偉자로 바꿨다."

dragonrz

2019.11.12
23:31:28
(*.67.125.237)
魏書曰:漢末閹宦用事,夔從父衡為尚書,有直言,由是在黨中,諸父兄皆禁錮。夔歎曰:「天地閉,賢人隱。」故不應宰司之命。

위서에 이르길 : 한나라 말기에 환관들이 권력을 쥐고 흔들었는데 하기의 종부인 하형이 상서로 있으면서 직언을 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당黨 가운에 들어가게 되었고 여러 부형들이 모두 금고당했다. 하기가 탄식하며 말하길 :「천지가 닫히고 현자가 숨는다.」 그러므로 관직에 취임하라는 명에 응하지 않았다.

dragonrz

2019.11.13
00:01:40
(*.67.125.237)
孫盛曰:夫君使臣以禮,臣事君以忠,是以上下休嘉,道光化洽。公府掾屬,古之造士也,必擢時雋,搜揚英逸,得其人則論道之任隆,非其才則覆餗之患至。苟有疵 釁,刑黜可也。加其捶扑之罰,肅以小懲之戒,豈「導之以德,齊之以禮」之謂與!然士之出處,宜度德投趾;可不之節,必審於所蹈。故高尚之徒,抗心於青雲之 表,豈王侯之所能臣,名器之所羈紲哉!自非此族,委身世塗,否泰榮辱,制之由時,故箕子安於孥戮,柳下夷於三黜,蕭何、周勃亦在縲紲,夫豈不辱,君命故也。夔知時制,而甘其寵,挾藥要君,以避微恥。詩云「唯此褊心」,何夔其有焉。放之,可也;宥之,非也。

손성이 말하길 : 무릇 임금은 신하를 예禮로 부리고 신하는 임금을 충성으로 섬겨 이로써 상하가 화목하고 성도聖道의 빛이 고루 입혀지게 됩니다. 공부의 연속은 고대의 조사造士로서 반드시 준재를 선발하고 능력있는 사람을 구해 발탁해야 한다. 그런 사람을 얻으면 도를 논하는 직임이 흥성하고 그런 사람을 얻지 못하면 재앙이 이르게 된다. 진실로 흠이 있다면 형벌을 가하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매를 때리는 벌을 가하면서 사소한 일에도 벌을 가하는 경계로 엄숙하게 만든다면 어찌 도道로 인도하고 예禮로 가지런히 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선비의 출처는 응당 덕을 헤아려 몸을 의탁할 곳을 골라야하고 머물고 떠나는 정도는 반드시 자신의 처지를 살펴야 한다. 그러므로 고상한 무리는 마음이 세속을 떠난 은거에 있는데 어찌 왕후가 신하로 삼고 명기名器(물질적인 조건들)에 얽매이겠는가! 이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면 세상에 몸을 위탁하면서 잘풀리고 못풀리고 영예롭고 치욕스러운건 시세에 달려있게 된다. 그러므로 기자箕子는 자손이 살육당하는 처지에 편안하게 처했으며 유하혜는 3번 폄직당했고 소하와 주발도 죄수의 몸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것을 모욕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은 임금의 명령이었기 때문이다. 하기는 시세의 제약을 잘 알았으면서 그 총애를 달콤하게 여겨 독약을 지니고 다니며 임금을 협박하여 사소한 부끄러움을 피하고자 하였다. 시경에 「좁은 속 때문이다.」라 하였는데 하기가 그에 해당된다. 만약 풀어준다면 괜찮지만 용서해준다면 올바르지 못한것이다.

dragonrz

2019.11.13
00:48:17
(*.67.125.237)
잘못 생각한 부분이 있는데 댓글 수정시간이 지나서 대댓글로 정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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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성이 말하길 : 무릇 임금은 신하를 예禮로 부리고 신하는 임금을 충성으로 섬겨 이로써 상하가 화목하고 성도聖道의 빛이 고루 입혀지게 됩니다. 공부의 연속은 고대의 조사造士로서 반드시 준재를 선발하고 능력있는 사람을 구해 발탁해야 한다. 그런 사람을 얻으면 도를 논하는 직임이 흥성하고 그런 사람을 얻지 못하면 재앙이 이르게 된다. 진실로 흠이 있다면 형벌을 가하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매를 때리는 벌을 가하면서 사소한 일에도 벌을 가하는 경계로 엄숙하게 만든다면 어찌 도道로 인도하고 예禮로 가지런히 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선비의 출처는 응당 덕을 헤아려 몸을 의탁할 곳을 골라야하고 머물고 떠나는 정도는 반드시 자신의 처지를 살펴야 한다. 그러므로 고상한 무리는 마음이 세속을 떠난 은거에 있는데 어찌 왕후가 신하로 삼고 명기名器(물질적인 조건들)에 얽매이겠는가! 이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면 세상에 몸을 위탁하면서 잘풀리고 못풀리고 영예롭고 치욕스러운건 시세에 달려있게 된다. 그러므로 기자箕子는 자손이 살육당하는 처지에 편안하게 처했으며 유하혜는 3번 폄직당했고 소하와 주발도 죄수의 몸이 되었던 것이다. 무릇 어찌 모욕이 아니었겠냐마는 임금의 명령이었기에 받아들인것이다. 하기는 시세의 제약을 잘 알았으면서 그 총애를 달콤하게 여겨 독약을 지니고 다니며 임금을 협박하여 사소한 부끄러움을 피하고자 하였다. 시경에 「좁은 속 때문이다.」라 하였는데 하기가 그에 해당된다. 만약 풀어준다면 괜찮지만 용서해준다면 올바르지 못한것이다.

dragonrz

2019.11.13
00:06:16
(*.67.125.237)
魏書曰:自劉備叛後,東南多變。太祖以陳群為酇令,夔為城父令,諸縣皆用名士以鎮撫之,其後吏民稍定。

위서에 이르길 : 유비가 반란을 일으킨 후로부터 동남방에서 변고가 많이 일어났다. 태조는 진군을 차현의 현령으로 하기를 성부현의 현령으로 삼았다. 여러 현들에서 모두 명사를 이용해 진무하니 그 이후에 관리와 백성들이 점차 안정되었다.

dragonrz

2019.11.13
00:14:00
(*.67.125.237)
魏書曰:時丁儀兄弟方進寵,儀與夔不合。尚書傅巽謂夔曰:「儀不相好已甚,子友毛玠,玠等儀已害之矣。子宜少下之!」夔曰:「為不義適足害其身,焉能害人?且懷姦佞之心,立於明朝,其得久乎!」夔終不屈志,儀後果以凶偽敗。

위서에 이르길 : 당시에 정의 형제가 바야흐로 총애를 받았는데 정의와 하기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상서 부손이 하기에게 말하길 :「정의가 서로 친하게 지내지 않은것이 이미 심한데 그대는 모개와 친합니다. 모개 등은 정의가 이미 해쳤습니다. 그대는 응당 약간 고개를 숙여야 할 것입니다!」 하기가 말하길 :「의롭지 못한 행동을 하면 족히 그 몸을 해칠만한데 어찌 능히 다른사람을 해칠 수 있겠습니까? 또한 간사한 마음을 품고 밝은 조정에 서 있으니 오래 지속될 수 없을겁니다!」 하기는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고 정의는 이후에 과연 흉악함으로 패망하였다.

코렐솔라

2019.11.13
01:03:16
(*.74.127.55)
감사합니다. 모두 반영했습니다. 정의 형제가 모개를 해쳤다니 ㄷㄷ 이 내용이 사실이면 모개전에 있는 참소한 누군가는 정의였을 가능성이 있겠군요 ㄷㄷㄷㄷ

dragonrz

2019.11.13
01:12:04
(*.67.125.237)
正元中為司隸校尉。時毌丘儉孫女適劉氏,以孕繫廷尉。女母荀,為武衛將軍荀顗所表活,既免,辭詣廷尉,乞為官婢以贖女命。曾使主簿程咸為議,議曰:「大魏承奏、漢之弊,未及革制。所以追戮已出之女,誠欲殄醜類之族也。若已產育,則成他家之母。於防則不足懲奸亂之源,於情則傷孝子之思,男不御罪於他族,而女獨嬰戮於二門,非所以哀矜女弱,均法制之大分也。臣以為在室之女,可從父母之刑,既醮之婦,使從夫家之戮。」朝廷從之,乃定律令

정원 연간에 사례교위가 되었다. 당시에 관구검의 손녀가 유씨에게 시집가서 임신한 채로 정위에게 잡히게 되었다. 그녀의 어머니 순씨는 무위장군 순의의 표를 통해 살아났고 이미 사형을 면하자 정위에게 가서 스스로 관비가 되어 딸의 생명을 대속하고 싶다고 청하였다. 하증은 주부 정함으로 하여금 논의하도록 하였다. 논의하는 말에 :「대위는 진한의 폐단을 이어받아 혁파하는데 이르지 못했습니다. 이미 출가한 딸을 주륙하는 것은 진실로 추류醜類의 일족을 전부 죽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미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다면 곧 다른 집안의 어머니가 됩니다. 방비하는 차원에서는 간란奸亂의 근원을 징벌하기에 부족하고 감정적인 차원에서는 효자의 사모하는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남자는 다른 가족의 잘못으로 죄를 받지 않지만 여자는 홀로 두 가족의 주륙에 연관되니 여자를 애긍哀矜하게 여기는 균등한 법제의 대강이 아닙니다. 신은 이로 인하여 집안에 있는 여자는 부모의 형刑을 따라 받겠지만 이미 출가한 딸은 남편집안을 따라 주륙당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조정에서는 이 의견을 따랐고 마침내 율령을 정했다.

晉諸公贊曰:曾以高雅稱,加性純孝,位至太宰,封朗陵縣公。

진제공찬에 이르길 : 하증은 고아한 것으로 칭해졌고 본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으며 지위는 태재에 이르렀고 낭릉현공에 봉해졌다.

dragonrz

2019.11.13
01:21:21
(*.67.125.237)
才識深博,有經國體儀。位亦至太宰,諡康公。子蕤嗣。邵庶兄遵,字思祖,有幹能。少經清職,終於太僕。遵子綏,字伯蔚,亦以幹事稱。永嘉中為尚書,為司馬越所殺。

재주와 견식이 깊고 넓어 나라를 다스릴 만한 능력과 위의가 있었다. 지위가 역시 태재에 이르렀는데 시호를 강공康公이라 하였다. 아들 하유何蕤가 작위를 이었다. 하소의 서형 하준何遵은 자가 사조思祖로 능력이 있었다. 젊어서는 청요직을 거쳐 태복으로 끝마쳤다. 하준의 아들인 하수何綏는 자가 백위伯蔚로 또한 일을 잘 처리하는 것으로 칭해졌다. 영가 연간에 상서가 되었는데 사마월에게 살해당했다.

傅子稱曾及荀顗曰:「以文王之道事其親者,其潁昌何侯乎!其荀侯乎!古稱曾、閔,今曰荀、何。內盡其心以事其親,外崇禮讓以接天下。孝子,百世之宗;仁人,天下之令也。有能行仁孝之道者,君子之儀表 矣。」

부자가 하증과 순의를 칭하여 말하길 :「문왕의 도리로 그 부모를 섬긴 사람은 영창 하후인가! 순후인가! 옛날부터 증삼과 민자건을 칭했는데 오늘날에는 순의와 하증이 있다. 안에서는 그 마음을 다해 부모를 섬기고 바깥에서는 예양禮讓을 숭상하여 천하의 사람들을 대접하였다. 효자는 백세의 모범이고 인자한 사람은 천하의 모범이다. 능히 인仁과 효孝의 도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은 군자의 의표儀表(본보기)이다.」

코렐솔라

2019.11.13
01:35:04
(*.74.127.55)
감사합니다. 모두 반영했습니다. 이걸로 하기전도 모든 주석이 번역됐군요. 예전엔 잘 몰랐는데 관심을 가지고 보니 확실히 팔왕의 난 시대에 얽힌 사람들이 많긴 많군요 ㅎㅎ 결혼한 여자는 남편쪽 잘못으로만 벌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다른 삼국지 인물에서도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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