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요鍾繇는 지금의 하남성 장갈현(長葛縣)의 동쪽인 영천군(穎川郡) 장사(長社) 출신으로 자를 원상(元常)이라 불렀다.


선현행장(先賢行狀)에서 이르길:종호(鍾皓)의 자는 계명(季明)으로,溫良篤慎,博學詩律,教授門生千有餘人,為郡功曹。時太丘長陳寔為西門亭長,皓深獨敬異。寔少皓十七歲,常禮待與同分義。會辟公 府,臨辭,太守問:「誰可代君?」皓曰:「明府欲必得其人,西門亭長可用。」寔曰:「鍾君似不察人為意,不知何獨識我?」皓為司徒掾,公出,道路泥濘,導 從惡其相灑,去公車絕遠。公椎軾言:「司徒今日為獨行耳!」還府向閤,鈴下不扶,令揖掾屬,公奮手不顧。時舉府掾屬皆投劾出,皓為西曹掾,即開府門分布曉 語已出者,曰:「臣下不能得自直於君,若司隸舉繩墨,以公失宰相之禮,又不勝任,諸君終身何所任邪?」掾屬以故皆止。都官果移西曹掾,問空府去意,皓召都 官吏,以見掾屬名示之,乃止。前後九辟三府,遷南鄉、林慮長,不之官。時郡中先輩為海內所歸者,蒼梧太守定陵陳稚叔、故黎陽令潁陰荀淑及皓。少府李膺常宗 此三人,曰:「荀君清識難尚,陳、鍾至德可師。」膺之姑為皓兄之妻,生子覲,與膺年齊,並有令名。覲又好學慕古,有退讓之行。為童幼時,膺祖太尉脩言: 「覲似我家性,國有道不廢,國無道免于刑戮者也。」復以膺妹妻之。覲辟州宰,未嘗屈就。膺謂覲曰:「孟軻以為人無好惡是非之心,非人也。弟於人何太無皂白 邪!」覲嘗以膺之言白皓,皓曰:「元禮,祖公在位,諸父並盛,韓公之甥,故得然耳。國武子好招人過,以為怨本,今豈其時!保身全家,汝道是也。」覲早亡, 膺雖荷功名,位至卿佐,而卒隕身世禍。皓年六十九,終於家。皓二子迪、敷,並以黨錮不仕。繇則迪之孫。


일찍이 집안의 아저씨뻘인 종유(鍾瑜)와 함께 낙양을 반문했을 때 길에서 우연히 관상가를 만났다. 그는 종요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는 귀한 상을 타고 났습니다. 그러나 물을 만나면 위험에 빠질 수도 있으니 조심하도록 하십시오.”

10 리로 채 가지 못했을 때 다리를 만났다. 그 다리를 막 건너려고 할 때 앞서 가던 말이 놀라서 다리 밑을 흐르는 물에 빠져죽었다. 관상가의 말을 유념했던 종유는 조카 종요를 더욱 귀하게 여겨 돈을 풀어 공부에 전념하도록 도와주었다.

효렴으로 천거된 종요는 잇달아 상서랑, 양릉령(陽陵令)을 역임한 후 질병에 걸려 물러났다. [주1]


[주1]《사승의 후한서》

남양 출신인 음수(陰脩)는 영천태수로 있을 때 유능한 인재를 많이 등용했다. 그 가운데 오관연(五官掾) 장중(張仲), 찰공조(察功曹) 종요, 주부(主簿) 순욱(荀彧), 주기연(主記掾) 장례(張禮), 적조연(賊曹掾) 두우(杜佑), 효렴 순유(荀攸), 계리(計吏) 곽도(郭圖) 등은 모두 국가의 동량이 되었다. 질병에서 벗아난 종요는 이어서 삼부(三府)에 부름을 받아 정위정(廷尉正), 황문시랑(黃門侍郞)이 되었다. 당시에 한의 황제는 서경(西京)에 있다가 이각과 곽사의 난을 만났기 때문에 관동지역과 단절되어 있었다. 태조(조조)는 연주목(兗州牧)으로 있던 조조는 사신을 파견하여 글을 올렸다.

또 삼부(三府)에 초빙되었고, 정위정(廷尉正)ㆍ황문시랑(黃門侍郎)으로 임명되었다. 이 당시 한제(漢帝 ; 獻帝)는 장안에 있었는데, 이각(李 )과 곽사(郭 ) 등이 장안성 안에서 난을 일으켰으므로 관동과는 단절되었다. 조조가 연주목으로 임명되어 있을 때, 사신을 파견하여 헌제에서 글을 올리자,


《세어(世語)》사신으로 파견된 사람을 종사 왕필(王必)이라고 했다.


이각과 곽사 등은


"관동(關東)에서 스스로 천자를 세우려 하고 있다. 지금 조조가 사자를 보낸 것은 사명을 다한 것이지만, 그의 본심이 매우 진실된 것은 아니다." 


라고 하며 그들은 조조가 파견한 사신을 억류하여 거절의 의사를 분명히 했다. 이 때 종요가 이각과 곽사를 찾아가 이렇게 설득했다.

“지금 영웅들이 각지에서 일어나 각자 군명(軍命)을 빙자하여 자기 마음대로 권력을 장악하고 있지만, 오직 조연주(曹兗州)만은 왕실에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그 충성스러움을 거역하신다면, 장래의 원대한 꿈을 실현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이각과 곽사는 종요의 건의를 받아들여 후하게 답변을 대신했다. 이로부터 태조는 드디어 사신을 보내 황제의 명령을 받을 수가 있었다. 태조는 이미 순욱으로부터 여러 차례 종요에 대한 말을 들었고, 또 그가 이각과 곽사를 설득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더욱 진심으로 대할 수가 있었다. 나중에 이각이 천자를 협박하자 종요와 상서랑 한빈(韓斌)은 함께 모략을 꾸몄다. 천자가 장안에서 벗어나기까지는 종요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그 공으로 종요는 어사중승이 되었다가 시중, 상서복야로 승진했으며, 동무정후(東武亭侯)로 봉해졌다.

당시에 관중(關中)에서는 마등(馬騰)과 한수(韓遂)를 비롯한 여러 장수들이 서로 싸우고 있었다. 태조는 산동(山東)에서 벌어진 사태를 수습하기에 바빴다. 태조는 표를 올려 종요를 시중수사례교위(侍中守司隷校尉)로 삼아 부절(符節)을 가지고 관중의 여러 군사들을 감독하게 하여 뒷일을 위임했으며, 특히 하나하나 법률과 제도에 따르지 않아도 좋다는 명령을 내렸다. 장안에 도착한 종요는 글을 써서 마등과 한수를 본거지로 돌아가게 하고, 그들의 아들에게 황제를 모시도록 했다. 아들을 인질로 삼아 화근을 없앤 것이다. 태조가 관도에서 원소와 대치할 때 종요는 2천여필의 말을 보냈다. 태조는 종요에게 다음과 편지를 보냈다.

“상황이 아주 급할 때에 맞추어 말을 보내 주어서 대단히 고맙다. 관중의 오른쪽이 평정되어 사방을 둘러보아도 걱정거리가 업어지게 된다는 그것은 그대의 공이다. 지난 날 소하는 관중을 지키면서 군량미와 군사가 부족하지 않도록 했다. 그대는 소하와 마찬가지 일을 하고 있다.”

그 후에 흉노의 선우가 평양(平陽)에서 소란을 일으키자 종요는 군대를 이끌고 가서 포위를 했지만 격파하지 못했다. 원상(袁尙)이 임명한 하동태수 곽원(郭援)이 많은 군사들을 이끌고 하동에 도착했다. 여러 장수들이 하동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종요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원씨의 세력이 강하기 때문에 곽원이 오자 관중에서 몰래 그들과 내통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모반을 일으키지 않은 것은 우리의 위명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만약 포기하고 물러나 약한 모습을 보이게 되면, 이곳의 백성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적이 되지 않겠는가? 만약 우리가 다시 돌아온다면 그것을 얻을 수가 있겠는가? 이는 싸우기도 전에 미리 패전을 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또 곽원은 성질이 급하고 괴팍하며 무조건 이기면 된다고 생각을 할 것이니, 반드시 우리를 쉽게 볼 것이다. 만약 우리가 물러나 분수(汾水)를 건너 진영을 구축하면 따라서 강을 건너려고 할 것이다. 그들이 미처 강을 건너기 전에 공격하며 크게 깨뜨릴 수가 있다.”

장기(張旣)가 마등에게 곽원을 치자고 하자, [주2] 마등은 아들 마초(馬超)에게 정병을 주어 맞아 싸우게 했다.

[주2]《전략(戰略)》에는 마등을 설득한 사람이 장기가 아니라 부간(傅幹)이라고 하면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원상(袁尙)은 고간(高幹)과 곽원에게 수 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흉노의 선우와 하동으로 침략하려고 할 때, 마등과 한수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화친을 맺으려고 했다. 마등은 몰래 그것을 허락했다. 부간은 이렇게 마등을 설득하며 겁을 주었다.

“옛말에 ‘순리를 따르는 자는 번창하고, 덕을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고 했습니다. 조공은 천자를 받들어 폭도들을 주살하고 있습니다. 법을 밝게 적용하여 나라를 다스리고 있으니, 상하가 모두 명에 잘 목종하고 있습니다. 의(義)를 지키는 자에게는 반드시 상을 주고, 의가 없는 자는 반드시 벌을 내리고 있습니다. 원씨는 왕명을 거역하여, 오랑캐와 함께 중국을 침략했으며, 겉으로는 관대한 척 하지만 질투심이 많고, 인자한 척 하지만 결단력이 부족합니다. 군사력은 강하지만 천하의 인심을 잃고 있으니, 이는 덕을 거스르는 짓입니다. 지금 장군께서는 매사에 도를 지켜왔지만, 전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습니다. 몰래 양쪽을 견주면서 앉아서 승패를 관망하다가는 나중에 승패가 결정된 이후에 반드시 그 책임에 대한 문책을 맏아 가장 먼저 참수될지도 모릅니다.”

마등이 겁을 먹자 부간은 다시 이렇게 말했다.

“지혜로운 사람은 화를 목으로 바꿉니다. 지금 조공과 원씨가 서로 싸우고 있으며, 고간과 곽원이 하동을 제압하고 있습니다. 조공이 비록 온갖 계책을 가지고 있더라고 하동의 위기를 극복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장군께서 진심으로 군사를 이끌고 곽원을 토벌하여 안과 밖이 협응을 한다면 그 기세로 반드시 적을 격파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장군께서 이 한 번의 쾌거로 원씨의 한 쪽 팔을 잘라 하동의 위급함을 해결한다면 조공은 반드시 장군의 공덕을 중시할 것입니다. 장군의 공명은 죽백(竹帛)에 새기지 못할 정도가 될 것입니다. 우로지 장군께서는 심사숙고하여 결정하십시오.”

마등은 부간의 말을 받아들여 마초에게 장병 수 만 명을 이끌고 한수와 함께 출격하여 종요의 군대와 합류했다. 곽원의 군대는 대패하고 말았다.

마원이 적을 가볍게 여겨 분수를 건너려고 하자, 여러 사람들이 말렸지만 듣지 않았다. 곽원의 군사들이 강으로 들어왔을 때 그들을 공격하여 크게 깨뜨리고 곽원의 목을 베는 한 편 선우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이에 관한 일이 〈장기전(張旣傳)〉에 있다.

그 후에 하동 출신 위고(衛固)가 반란을 일으키자, 장성(張晟), 장염(張琰), 고간 등이 힘을 합쳐 침입했다. 종요는 또 다시 장병들을 이끌고 그들을 격파했다. [주3]

[주 3] 《위략(魏略)》 조칙을 내려 왕읍(王邑)을 하동태수로 임명했다. 왕읍은 천하가 아직도 안정이 되지 않았으므로 마음속으로는 원치 않았다. 그러나 하동의 관리들과 백성들이 왕읍을 원하고 있었으므로, 군연(郡掾) 위고와 중랑장 범선(范先) 등이 각자 종요에게 왕읍을 태수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두기(杜畿)를 태수로 바꾼다는 조칙이 내려져 두기가 군의 경계로 들어섰다. 인수(印綬)를 받았던 왕읍은 하북을 지나 허(許)에 이르렀다가 스스로 돌아갔다. 당시에 낙양에서 일을 보고 있던 종요는 그 책임을 지고 글을 올려 스스로를 이렇게 탄핵했다.

“신은 전에 글을 올려 진북장군령하동태수(안양정후鎭北將軍領河東太守安陽亭侯) 왕읍이 관리로서 소임을 잘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규정을 위반했으므로 이는 마땅히 탄핵을 받아야 할 일이며, 사실여부를 검증하여 진실을 밝혀야 합니다. 조서를 받고 곧바로 시정을 하였습니다. 죄가 밝혀졌으므로 관대하게 사면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 신은 고을의 관리들과 백성들이 각자 원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하여 왕읍은 임지로 가야 한다고 글을 올려 두기기 부임을 막았습니다. 지금은 모두 후회를 하면서 함께 두기를 맞이했습니다. 삼가 문서를 살펴보니 신은 어리석은 주제에 과분하게 발탁되어 근시로 충원되었으며, 나라의 기밀을 판단하는 중임을 맡아 한 쪽 모서리를 총괄했습니다.

이미 덕으로 정치를 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한 적도 없으며, 형벌을 기준에 맞게 적용하여 위엄을 갖추게 하지도 못했습니다. 왕읍으로 하여금 조서를 위반하게 했으며, 군연(郡掾) 위고는 관리들과 백성들을 선동하여 송사를 일으켜 역과 도로를 메웠으니, 이는 에에 어긋났을 뿐만 아니라 왕명을 경건하게 받들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 비록 후회를 하고 있지만, 아직도 유언비어가 떠돌고 있으니 이는 모두 신 종요가 형벌을 위엄 있게 적용하지 못한 허물입니다. 신은 또 몇 차례나 질병에 걸려 나날이 기력이 약해지고 있음에도, 평소에 하는 일도 없이 무거운 녹봉을 축내고 있으니, 관직과 소임을 페하시고 그 죄를 법의 정의에 따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시중수사례교위동무정후 종요는 다행히 성은을 받아 한 줌도 되지 않는 초라한 재능으로 발탁되어 페하를 가까이에서 모시며 왕명이 제대로 시행되는지를 감독해왔습니다. 조서의 내용을 빨리 파악하여 고을의 장리들이 상황에 따라서 정교(政敎)를 제대로 적용하여 하부기관에서 형벌이 줄어드는지를 알아야 하지만, 오랫동안 질병에 시달려왔기 때문에 여러 직분을 하나도 맡기가 힘들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니 법령도 펼쳐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왕읍은 법령을 어겼기 때문에 당연히 법에 따라 바르게 처리되어야 합니다. 이미 문서를 통해 도리를 잃은 것을 탄핵했으며, 곧 조정으로 소환될 것입니다. 왕명을 어지럽히고 신하들의 사기를 꺾은 죄입니다. 위고는 고을의 관리들과 백성들에게 유언비어를 퍼뜨려 몇 달 동안이나 두기를 거부하도록 했습니다. 비록 지금은 후회를 하고 있지만, 순리와 법의 정의를 어겼습니다. 해내에서 흉악한 짓을 자행하게 된 것은 종요가 감형으로 가볍게 다스린 죄입니다. 또 종요는 오래도록 병을 앓고 있으므로 직분을 다하지 못하고 있으니, 종요가 아니라도 대신들이 자신의 임무를 다할 것입니다. 종요는 법도를 경박하고 오만하게 처리했으며, 조칙과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나라와 더불어 한 마음이 되지 못했으므로 신하된 자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했고,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것이 없어서 크게 불경죄를 저질렀습니다. 또 왕명을 제대로 이어받아 조서를 꾸미지도 못했으니, 조칙을 정중하게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또 폐하의 총명함을 가려서 하부조직을 기만하여 소임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이 수 많은 죄를 들어 삼가 탄핵을 하오니, 신은 법의 수레에 실려 정위에게 나아가 종요의 죄를 묻게 해 주실 것을 요청하오며, 대홍로(大鴻臚)에게 명하시어 작위를 삭탈하게 해 주십시오.

신은 어릴 때부터 심한 빌병을 앓았으므로 여름을 나기도 힘이 듭니다. 목숨도 겨우 숨쉬는 것에 달려 있으니 관직을 감당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 문서도 공조종사 마괄(馬适)과 상의하여 대신 쓰도록 했습니다. 관을 벗고 맨발로 나와 엎드려 신을 죽여지십사하고 간청을 드립니다.

그러나 조칙을 내려 그의 말을 듣지 않겠다고 했다.

위(魏)나라가 처음 건국했을 때 종요는 대리(大理)로 임명되었다가 나중에 상국(相國)이 되었다. 위문제 조비가 동궁에 있을 때 종요에게 오숙부(五熟釜)라는 가마솥을 하사했다. 그 솥에는 이러한 글귀를 새겨놓았다.

“위나라를 밝히고, 한의 울타리가 된다네. 재상으로서 종요를 생각하면 심장을 지키는 등뼈와 같다. 밤낮으로 최선을 다해 일을 하니, 편안히 쉴 곳도 없구나. 모든 관리들의 스승이 되었으니, 본보기로 삼을 사람은 이뿐이로구나!” [주4]

[주4]《위략종요가 상국이 되었을 때 오숙부라는 가마솥을 태자가 주조했다. 솥이 완성되자, 태자는 종요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옛날에는 황삼정(黃三鼎1))이 있었다. 주나라에는 9가지의 보물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음식을 요리하는데 사용되었다. 이 솥에 다섯 가지 곡식을 넣어 끓인다면 어찌 향기로운 냄새가 나지 않겠는가? 대개 이 솥에 음식을 넣어 요리를 하는 것은 하늘에 바치거나 성현에게 봉양을 드려서 덕을 밝히고 복을 기원하기 위함이니 이보다 아름다운 일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대인이 아니고서는 이 솥을 만들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솥이 아니면 덕을 채우지 못한다. 지금 아름다운 솥은 보면 볼수록 아름답도다. 주(周)의 시신(尸臣), 송(宋)의 고보(考父), 위(衛)의 공리(孔悝), 진(晋)의 위과(魏顆) 등 4명의 신하들은 모두 공덕이 뛰어났기 때문에 종과 솥에 그 이름을 새겨 넣었다. 지금 그대는 대위(大魏)를 밝게 빛나도록 하는 일을 맡아 성화(聖化)를 두드러지게 하고 있도다. 덕이 사방에 가득하고 더옥 번성하게 될 것이다. 태상(太常)의 이름을 이 솥에 새기는 것은 종묘에 오래도록 보관하여 후세에 전해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이름을 새기고 솥의 입구를 막아 모든 사람들이 그 아름다움을 찬양하도록 할 것이다. 영원히 그대의 이름이 남을 것이다.”

//신 배송지가 보건데 《한서 교사지(郊祀志)》에 따르면 효선제(孝宣帝) 시대에 아름다운 솥을 얻었을 때, 경조윤(京兆尹) 장창(張敞)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솥에 새긴 글을 보니 ‘왕께서 시신(尸臣)2)에게 명하여 이 솥을 순읍(栒3)邑)에서 관리하도록 했다. 또한 난기(鸞旗)4)와 보불(黼黻)5)과 조과(雕戈)6)를 하사하노라. 시신이 그것을 받들어 머리를 땅바닥에 조아리며 감히 천자의 위대하고 아름다운 명을 사방에 드날리겠나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주시대에 처음으로 신하에게 하사한 것입니다. 대신의 자손은 선대의 공을 거기에 새겨 궁묘에 보관했습니다.”

고보의 명(銘)은 《좌씨전》에 있고, 공리의 명은 《예기》에 있습니다만, 자세한 사적은 실려 있지 않습니다. 《국어》에는 이러한 기록이 있다..

“옛날에 극로(克潞)로 출병을 했을 때, 위과는 진(秦)의 군사를 보씨(輔氏)까지 추격했다가 두(杜)에서 멈추고 돌아왔습니다. 그 공을 경종(景鍾)에 새겨 넣었는데 이는 지금까지 유레가 없던 일이다. 그 자손들이 흥성하지 않을 수가 없다.”

태자가 말한 사명자(四銘者)는 이를 가리킨다.

//《위략(魏略)》후에 태조께서 한중(漢中)으로 출병을 했을 때, 태자는 맹진(盟津)에 있다가 종요가 옥결(玉玦)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것을 가지고 싶었지만 드러내놓고 말을 하지 못해 임치후 조식을 시켜 자신의 뜻을 전하도록 했다. 종요가 그것을 보냈다. 태자는 종요에게 이러한 편지를 썼다.

“대개 옥은 군자와 비유하여 시인들이 그 아름다움을 노래했습니다. 진(晋)의 수극(垂棘), 노(魯)의 여번(璵璠), 송(宋)의 결록(結綠), 초(楚)의 화박(和璞)은 그 값어치가 만금도 넘으며, 도성과 바꿀 만하다고 할 정도로 옛날부터 명성이 자자합니다. 그러므로 수극이 진나라에서 나오자 우(虞)나라와 괵(虢)나라가 진의 수중으로 떨어졌으며, 화벽(和璧)이 진으로 들어가자 인상여(藺相如)가 목숨을 걸고 막았습니다. 옥에 관한 글을 몰래 살펴보니, 아름다운 옥의 흰색은 비계를 자른 것과 같고, 검은 것은 옻을 칠한 것과 같으며, 빨간 것은 닭의 벼슬과 같고, 노란 것은 밤을 삶은 것과 같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말을 지나치면서 들었지만 그 모양을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비록 덕으로는 군자가 되지 못하고, 시인으로서의 의도 없지만, 높은 산과 아름다운 경치가 있다면 저도 찾아가 즐기기는 합니다. 그러나 4가지 모물은 너무도 먼 옛날에 있었고, 진나라와 한나라 때에도 좋은 것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는 못했습니다. 지난 날 그것을 구하려고 애를 썼지만, 아직까지도 진품을 만나지 못했으니, 내 바람이 이루어지지 못해 안타깝기 짝이 없었습니다.

근자에 남양의 종혜숙(宗惠叔)을 만났더니, 군후께서 전에 아름다운 옥결을 가지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놀라고 기뻐서 웃으며 손뼉을 쳤습니다. 즉시 스스로 글을 쓰고 싶었지만, 제대로 전달이 되지 못할까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우 건에게 말하여 순중무(荀仲茂)를 통해 하찮은 말을 전했습니다. 저의 말을 소홀히 여기지 않으시고, 후하게 받아주셔서 업(鄴)으로 이미 도착했습니다. 보결이 도착하자마자 맨발로 달려가 상자의 뚜껑을 열어보니, 찬란한 빛이 눈에 가득 들어왔습니다. 다급하여 격식도 갖추지 않고 세상에 보기 드문 보물을 보니, 한 사람을 시켜 번거롭게 할 일이 아니었으며, 성 하나와 바꾸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옛날에 진소왕이 장대(章臺)에서 화씨벽(和氏璧)을 보았을 때, 인상여가 속임수를 써서 도로 찾았다는 말이 헛말이 아니었습니다. 훌륭한 선물을 맏고 나니 제 자신이 더욱 뻔뻔스럽게 느껴져 감히 받을 수가 있을까 염려가 됩니다.”

태자의 편지를 받은 종요도 다음과 같이 답장을 썼다.

“지난 날 욕된 일이 있었음에도 근자에 다시 임명되었을 때 옥결도 함께 받았습니다. 상방기로(尙方耆老)7)가 옛 물건은 조금 압니다. 좋은 물건일수록 자기 자리를 찾아가야 합니다. 집사로서 이러한 보물을 가지고 있으면 제 빛을 내지 못합니다. 미리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다행히 돌려서 말씀을 해주셨으니 기쁘기 짝이 없었습니다. 옛날의 화씨벽은 충성심을 더욱 두텁게 했지만, 종요가 명을 받고 보니 부끄러운 마음이 들 뿐입니다.”

몇년 후에 좌서조연(坐西曹掾) 위풍(魏諷)이 반란을 일으키자 봉작을 잃고 집으로 돌아갔다. [주5]


[주5]위략에서 이르길: 손권이 신하의 예를 갖추고 관우의 머리를 베어 보냈을 때, 조조가 편지를 써서 종요에게 알렸다. 종요는 답장에,


“신과 같은 군의 출신인 사공 순상(荀爽)은 ‘인간은 감정을 중시한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가 혼자 어찌 사랑할 수 있고, 자기를 미워하는 자가 혼자 어찌 미워할 수 있을까!’라고 했습니다. 손권에 대해 생각해 보니 실제로 아리땁습니다.”


라고 했다. 조조는 또 편지를 보내 말했다.


“편지를 받고 남방(오)을 좋아함을 알았소. 순상의 청담(淸談)함과 손권의 아첨에 이르러 편지를 쥐고 놓을 수가 없었소. 만일 손권이 다시 교활하다면 여남의 허소가 매월 말일에 행하는 인물평으로 마땅히 기를 꺾어야 하겠소. 손권이 위와 촉나라 사이를 주유하며 순상과 허소에게 고개 숙이고 우러른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오.”


문제가 왕위에 오른 후에 다시 대리(大理)가 되었다가, 황제로 즉위했을 때 정위(廷尉)로 임명되었으며, 숭고향후(崇高鄕侯)로 봉해졌다. 나중에 태위로 승진했으며, 평양향후로 봉해졌다. 당시에 그는 사도 화흠(華歆), 사공 왕랑(王朗)과 함께 선대의 명신으로 각광받았다. 조회를 마친 문제는 좌우의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들 삼공은 당대의 위대한 인물들이다. 후세에 또 이와 같은 인물들이 이어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위명제(魏明帝) 조예(曹睿)가 즉위하자 정릉후(定陵侯)로 봉해졌으며, 식읍 5백호가 더해져서 전에 받은 것과 합쳐 모두 1,800호가 되었고, 태부(太傅)로 승진했다. 종요는 무릎에 관절염을 앓았기 때문에, 황제를 배알할 때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불편했다. 당시에 화흠도 나이가 많아 여러 가지의 질병에 시달렸기 때문에, 조회를 하러 올 때마다 가마나 수레를 이용했으며, 대전에 오를 때는 호분(虎賁)이 부축을 해야 했다. 삼공이 모두 질병을 앓게 되자 드디어 지난 일과 관련된 이야기가 퍼졌다. [주6]

[주6]  《육씨(陸氏)의 이림(異林)》

종요는 몇 달 동안 조회에 참석을 하지 못할 정도로 성품과 건강이 좋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묻자 종요는 이렇게 대답했다.

“항상 대단히 아름다운 여자가 찾아옵니다.”

질문을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반드시 귀신일 것입니다. 죽여야 합니다.”

나중에 여자가 왔지만 들어오지 않고 문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종요가 왜 그러느냐고 묻자 여자는 공이 나를 죽이려고 한다고 대답했다. 종요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은근히 그 여자를 불러들였다. 여자가 들어오자 종요는 아무래도 이상한 생각을 참을 수가 없어서 숨겨두었던 도끼로 여자의 허벅지를 내리쳤다. 여자가 놀라서 뛰어나가자 핏자국이 길을 따라 이어져 있었다. 다음 날 사람을 시켜서 그 흔적을 따라가 보았더니 커다란 무덤이 있었고, 그 안에 있는 관에는 살아있는 것과 같은 여자가 누워있었다. 흰색 장삼을 들추고 보았더니 왼쪽 허벅지에 상처가 있었으며, 조끼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이 이야기는 숙부인 청하태수에게서 들었다. 청하태수는 육운(陸雲)이다.

건국 초에 태조께서 명령을 내려 사형을 궁형으로 바꾸는 논의를 하라고 했다. 종요는


“옛날의 육형(肉刑)은 성인도 시행한 적이 있습니다. 마땅히 다시 시행하여 사형을 대신하는 것이 좋습니다.”


라고 말했다. 토론에 참가한 사람들은 백성들이 그리 기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반대하여 잠잠해졌다. 문제께서는 여러 신하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대리가 육형을 다시 부활시키자고 한 것은 성왕의 법이기 때문이오, 공경들이 함께 의논을 하는 것이 좋겠소.”


라고 말했다. 토론이 끝나지 않았을 때 군사적인 일이 생겨 다시 잠잠해졌다. 태화(太和) 년간에 종요는 이러한 상소를 올렸다.



“대위(大魏)는 천명을 받아 우(虞)와 하(夏)의 뒤를 이었습니다. 효문제께서는 고대의 법도와 합치되 않는 법을 개혁하셨습니다. 선제께서는 성인의 덕을 갖추셔서, 하늘의 뜻에 따라 묘전(廟典)의 업과 하나로 관통하셨습니다. 이로서 세(世)를 이어 밝은 조칙을 발표하시니, 고대의 형법을 부활하여 일대의 법으로 삼고자하셨기 때문입니다. 다만 군사에 관한 일이 발생하여 그 시행을 미루었을 뿐입니다. 폐하께서는 이조(二朝)8)께서 남기신 뜻에 따라, 발뒤꿈치를 자르는 형벌을 안타깝게 여기시어 악형이라 생각하시고 금지시켰습니다. 또한 무고로 인해 사형에 처해지는 경우가 없도록 율령을 밝게 하라 명하시니 여러 신하들이 함께 그 문제를 토론에 붙였습니다. 본래 오른쪽 발을 자르려고 나갔다가 사형을 시키고 들어오는 것처럼, 이 형벌이 다시 시행될 것입니다.

《서경》에는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황제께서 백성들에게 진심으로 물으시니, 홀아비와 과부가 묘족(苗族)에 대한 말을 했다.’

이는 요(堯)가 치우를 없애고, 묘족에게 형벌을 내릴 때 먼저 백성들에게 물어서 그들의 생각이 어떤지를 알아보았다는 뜻입니다. 만약 지금이 옥사를 가려야할 때라면, 삼괴(三槐)9), 구극(九棘)10), 군리(群吏), 만민(萬民)에게 그것이 효경제(孝景帝)의 법령과 같은지를 물어 보시고, 기시(棄市)되어야 할 사람을 오른발을 자르는 형벌로 대치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면 허락하십시오, 얼굴에 먹물을 들이는 경(黥), 코를 자르는 의(劓), 왼발을 자르는 좌지(左趾), 궁형(宮刑)과 같은 육형은 효문제(孝文帝) 시대에 머리카락을 깎는 곤형(髡刑)과 매를 때리는 태형(笞刑)으로 바꾸었습니다. 범법행위를 자주 저지르는 자로서 나이가 20세에서 45세 사이에 있는 경우는 발이 잘리더라도 자식을 낳아서 기를 수는 있습니다. 지금 천하의 인구는 효문제시대보다 적습니다. 계산을 해 보면 1년에 3천명이 이러한 형벌을 받고 있습니다. 장창(張蒼)11)은 육형을 없애자 일년에 약 1만 명이 죽었습니다. 신이 바라는 대로 육형을 다시 부활시키면 년간 3천명은 목숨을 건지게 됩니다.

자공(子貢)이 백성들을 구제하는 것을 인(仁)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묻자 공자께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떤 일을 인이라고 하겠느냐?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반드시 성인일 것이다. 요나 순도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대체로 인이란 자신이 공을 세우고자 하는 일이 있으면 다른 사람을 내세우고, 자신이 이르고자 하는 목표가 있으면 다른 사람이 이루도록 한다. 가까운 곳에서 얻은 것을 통해 깨달을 수가 있다면, 그것으로 인을 실천하는 방법을 알 수가 있다.12)”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이 멀리 있는가? 내가 인을 행하고자 하면 그것이 곧 인이다.”

진실한 마음으로 그것을 실천한다면 백성들을 오래도록 구제할 수가 있습니다.”


종요의 건의를 들은 황제는 이러한 조칙을 내렸다.

“태부는 뛰어난 학문과 높은 재능을 지녔으며, 항상 정치에 마음을 두고 있다. 또 형벌에 대한 이치도 대단히 심오하고 원대하다. 이 큰 일은 공경 여러분들께서 함께 토론하는 것이 좋겠다.”

사도 왕랑이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종요는 사형에 관한 조항을 가볍게 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되면 월형(刖刑)13)이 늘어나게 되니, 이는 불구자를 일으켜서 내시로 삼고, 시체를 살려서 사람으로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신의 어리석은 생각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대체로 오형(五刑)14)은 과율(科律)에 기록된 것입니다. 사형을 감하는 것을 일등의 법으로 삼게 되면서 죽이지 않고 감형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시행되었습니다만, 도끼 모양을 한 형구로 육형을 가한 후에 죄에 따라서 처벌을 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전시대에 어진 사람은 육형의 참혹함을 차마 보지 못해 폐지하고 사용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용을 하지 않게 된 지는 이미 수 백 년이나 지났습니다. 지금 다시 시행을 하게 되면, 많은 백성들의 눈에 감형에 대한 조항이 오히려 제대로 인식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육형에 대한 소문은 이미 도적들에게나 널리 퍼져 있는 것이지, 옛날 사람들로부터 초래된 것은 아닙니다. 지금 종요가 사죄를 감해주고자 하는 것은 사형을 감하여 머리카락을 깎는 곤형(髡刑)이나 발을 바르는 월형으로 대신하자는 주장입니다. 죄를 감해주자는 의견을 싫어하는 이유는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범죄가 증가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토론에 참가한 많은 사람들이 왕랑의 의견에 동조했다. 황제는 오와 축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다고 하여 다시 불문에 붙였다.


袁宏曰:夫民心樂全而不能常全,蓋利用之物懸於外,而嗜慾之情動於內也。於是有進取貪競之行,希求放肆之事。進取不已,不能充其嗜慾,則苟且僥倖之所生也; 希求無厭,無以愜其慾,則姦偽忿怒之所興也。先王知其如此,而欲救其弊,或先德化以陶其心;其心不化,然後加以刑辟。書曰:「百姓不親,五品不遜。汝作司 徒而敬敷五教。蠻夷猾夏,寇賊姦宄。汝作士,五刑有服。」然則德、刑之設,參而用之者也。三代相因,其義詳焉。周禮:「使墨者守門,劓者守關,宮者守內, 刖者守囿。」此肉刑之制可得而論者也。荀卿亦云,殺人者死,傷人者刑,百王之所同,未有知其所由來者也。夫殺人者死,而相殺者不已,是大辟可以懲未殺,不 能使天下無殺也。傷人者刑,而害物者不息,是黥、劓可以懼未刑,不能使天下無刑也。故將欲止之,莫若先以德化。夫罪過彰著,然後入于刑辟,是將殺人者不必 死,欲傷人者不必刑。縱而弗化,則陷於刑辟。故刑之所制,在於不可移之地。禮教則不然,明其善惡,所以潛勸其情,消之於未殺也;示之恥辱,所以內愧其心, 治之於未傷也。故過微而不至於著,罪薄而不及於刑。終入罪辟者,非教化之所得也,故雖殘一物之生,刑一人之體,是除天下之害,夫何傷哉!率斯道也,風化可 以漸淳,刑罰可以漸少,其理然也。苟不能化其心,而專任刑罰,民失義方,動罹刑網,求世休和,焉可得哉?周之成、康,豈按三千之文而致刑錯之美乎?蓋德化 漸漬,致斯有由也。漢初懲酷刑之弊,務寬厚之論,公卿大夫,相與恥言人過。文帝登朝,加以玄默。張武受賂,賜金以愧其心;吳王不朝,崇禮以訓其失。是以吏 民樂業,風流篤厚,斷獄四百,幾致刑措,豈非德刑兼用已然之效哉?世之欲言刑罰之用,不先德教之益,失之遠矣。今大辟之罪,與古同制。免死已下,不過五 歲,既釋鉗鎖,復得齒于人倫。是以民無恥惡,數為姦盜,故刑徒多而亂不治也。苟教之所去,罰當其罪,一離刀鋸,沒身不齒,鄰里且猶恥之,而況于鄉黨乎?而 況朝廷乎?如此,則夙沙、趙高之儔,無施其惡矣。古者察其言,觀其行,而善惡彰焉。然則君子之去刑辟,固已遠矣。過誤不幸,則八議之所宥也。若夫卞和、史 遷之冤,淫刑之所及也。苟失其道,或不免於大辟,而況肉刑哉!漢書:「斬右趾及殺人先自言告,吏坐受賕,守官物而即盜之,皆棄巿。」此班固所謂當生而令死 者也。今不忍刻截之慘,而安剿絕之悲,此最治體之所先,有國所宜改者也。



태화(太和) 4년(230) 종요가 죽었다. 황제는 소복을 입고 조문을 했으며, 시호를 성후(成侯)로 정했다. [주7]


[주7] 위서에서 이르길: 담당 관리가 시호를 논의하는데, 종요는 옛날 정위에 있을 때 재판을 처리하고 명확한 판단을 나타내어 백성들에게 원망을 품게 하지 않은 것은 한나라에서 우정국(于定國)과 장석지(張釋之)의 지위에 상당하다고 생각했다. 조서에 ‘태부는 공이 높고 성하여서 관직이 사부(師傅:천자의 스승)였다. 행위를 논하고 시호를 줄 때에는 항상 이것에 근거하고, 정위 우(于)와 장(張)의 덕을 겸하여 서술했다’고 하며 시호를 성후라고 했다.


아들 육(毓)이 후사를 이었다. 문제는 육에게 봉지를 나누게 하고, 종요의 동생 연(演)과 아들 훈(勛)에게 주었으며, 손자 예(豫)는 열후에 봉했다.

[[종육전]]으로 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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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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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22
12:18:00
(*.104.141.18)
주석 반영과 출처 없는 위풍을 다른 곳으로 보냄

코렐솔라

2013.08.03
13:58:01
(*.52.91.73)
이런, 태화 4년이 231년이라 되있었네요. 230으로 수정합니다.

venne

2014.04.25
12:42:40
(*.203.36.95)
마원이 적을 가볍게 여겨 분수를 건너려고 하자

마원을 곽원으로 수정요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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