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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숙(王肅)은 자가 자옹(子雍)이다.22) 열여덟 살 때, 송충(宋忠)으로부터 양웅(揚雄)의 《태현경(太玄經)》을 배웠는데, 다시 이것에 관한 새로운 주석을 하였다.

 

[주] 왕숙과 부친 왕랑은 허정(許靖)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왕숙이 회계(會)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황초 연간에 산기황문시랑(散騎黃門侍郎)으로 임명되었고, 태화 3년(229),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임명되었다.

4년(230), 대사마 조진이 촉을 정벌하려고 하자, 왕숙이 상소를 올렸다.


----- 옛날 책에 ‘천 리 밖에서 군량미를 운송해 오면 사병들에게는 굶주린 기색이 있고, 때에 임하여 마른 풀을 모아 밥을 하면 군사들은 배불리 먹을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평탄한 길에서 행군할 때의 상황을 말한 것입니다. 또 하물며 험한 곳으로 깊숙이 들어가고, 길을 내어 진군하는 경우라면, 그 힘겨움은 반드시 백배가 될 것입니다.


- 지금은 게다가 장마가 졌고, 산과 비탈은 험하며, 병력이 긴급하게 나가지 못한다면 식량은 멀리서로부터 보내오기 어렵습니다. 이런 점들은 행군하는 자가 크게 기피해야 되는 것입니다. 조진이 출발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건만 행군한 것은 자오고(子午谷)의 중간쯤 되고, 길 내는 데에 병사들을 모두 참가시켰다고 들었습니다. 이것은 적병이 오로지 안일함을 얻어서 우리 군대의 수고로움을 기다리는 것으로 병가(兵家)에서는 기피하는 것입니다.


--- 이전 시대의 일을 말하면, 무왕(武王)이 주왕(紂王)을 정벌하고 관소를 열어 또 돌아왔고, 근대의 일을 말하면 무제와 문제가 손권을 정벌하고 양자강을 앞으로 하고 건너지 않았습니다. 어찌 하늘에 순응하여 때를 알고, 임기응변에 통하는 자가 아니겠습니까? 모든 백성들은 성상께서 비와 고달픔을 이유로 하여 정벌을 중지시키고 휴식하도록 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훗날 기회가 있을 때 그 기회를 탐타 그들을 사용할 수 있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이른바 기쁨으로 난을 범할 때는 백성들은 그의 죽음을 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촉 정벌군을 철수시켰다. 왕숙은 또 상소를 올렸다.

----- 지금은 응당 옛날에 있던 예절을 존중하고, 따라서 죽은 대신들을 위해 장례를 지어 애도하고 종묘에 물품을 바쳐야 합니다.

이런 일은 모두 시행되었다. 또 상소하여 정치의 근본에 관해 진술했다.


----- 실제로 하는 일이 없는 직위를 없애고, 긴급하지 않은 봉록은 감면하여, 이유 없이 밥을 축내는 비용을 제지하고, 한가한 관원을 합병시키십시오. 관원이 되었으면 반드시 직책이 있어야 하고, 직책이 있으면 그 일을 책임져야 하고, 일을 하였으면 반드시 봉록을 받아야 합니다. 봉록은 그들이 밭에서 경작하는 것을 대신하는 것으로 옛날부터 있었던 상식이며, 지금에도 마땅히 시행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관직은 적고 봉록은 많다면 조정의 비용은 적어지고, 관직으로 나가려는 마음만 권장될 것입니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재치와 능력을 펼치고 서로 의지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관직에 오르게 된 내용을 말로 상주하도록 하고, 그들의 공적에 대해 공개적으로 헤아려 보게 하며, 능력이 있는가 없는가 선택하는 것은 군주의 마음속에서 합니다. 이 때문에 우 임금과 순 임금이 관직을 설치하여 직책을 분담할 때 공경들에게 명령하여 각각 맡은 일을 하도록 한 연후에 용(龍)을 납언관(納言官)으로 임명했습니다. 지금의 상서와 똑같은 것으로 군주의 명령을 전달하는 일만 합니다. 하대(夏代)와 은대(殷代)의 이러한 일에 관한 상세함은 얻을 수 없습니다. 단지 《상서》〈감서(甘誓)〉편에서 ‘육사지인(六事之人)’이라고 한 것은 육경(六卿:여섯 명의 관원) 또한 직책의 일을 관장하는 사람이었음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주관(周官)》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완비되었습니다. 5일간 정치를 살피도록 하고, 공경대부들이 함께 조정으로 나가고, 사사(司士)가 그 관위를 구별합니다. 《주례》에 보면 ‘기(記:冬官․考工記)에 안장서 도(道:治國의 방법)을 논하는 자를 왕공(王公)이라 하고, 집행하고 실시하는 자를 사대부(士大夫)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한조 초기에 이르러, 이전시대의 제도에 의거하여 공경은 모두 친히 조정에 참가하여 일을 보고하였습니다. 때문에 한고조는 몸소 도망쳐 버린 주창(周昌)을 추격하고, 무제는 멀리서 표를 받들어 상주한 급암(汲黯)의 의견을 받들 수 있었으며, 한선제(漢宣帝)는 공경들에게 닷새에 한 번씩 조정에 참가하도록 하고, 한성제(漢成帝)는 처음으로 상서(尙書) 다섯 사람을 두었습니다. 이로부터 쇠미해져 조정의 의례는 상실되었습니다. 닷새 만에 정치를 하는 예의는 공경 상서로 하여금 각기 맡은 일에 대한 보고를 받기 위함입니다. 옛날 의례를 폐지했다가 다시 부흥시키고, 제왕의 성스런 사업을 선양시켜 빛낸다면, 진실로 사람들이 말하는 명성은 아름답고 실질은 두터운 것입니다.


청룡 연간에 산양공(山陽公)이 죽었는데, 그는 원래 한의 군주(헌제)였다. 왕숙이 상소를 올렸다.

----- 옛날 당요(唐堯)는 우순(虞舜)에게 제위를 선양하고, 우순은 하우에게 제위를 선양했는데, 모두 삼년상을 끝마친 연후에 천자의 존귀한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 때문에 제호(帝號)는 손실됨이 없고, 군주의 예는 의연히 존재했습니다. 지금 산양공은 천명을 받아 백성들의 바람에 답하고, 나가서는 위대한 위를 선양하고, 물러나서는 빈객의 지위에 있었습니다. 산양공의 위(魏)를 받드는 태도는 신하로서의 충절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위의 산양공에 대한 처우는 각별히 두터웠고, 신하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미 죽었으며, 염( )하는 제도․수레와 시종의 복식은 모두 왕이 된 자와 똑같이 했습니다. 이 때문에 먼 곳이든 가까운 곳이든 간에 위나라의 어짊에 탄복하고, 아름다운 일을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또 한에서는 제황(帝皇)의 칭호를 총괄하여 황제(皇帝)라고 불렀습니다. 제(帝)의 별칭은 있지만 황(皇)의 별칭이 없다면, 황(皇)은 그 중에서도 약간 가볍게 부르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한고조 때, 한 지역 안에 두 명의 왕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한고조의 부친이 생존해 있을 때, 고조는 그를 황(皇)이라고 칭했습니다. 분명히 두 왕의 의혹을 범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물며 지금, 그의 죽음을 추증하는데 황(皇)이라 칭하여 그의 시호를 삼을 수 있겠습니까?


명제는 왕숙의 건의를 따르지 않고 황(皇)으로 칭했으며, 시호를 한효헌황제(漢孝獻皇帝)라고 했다.


孫盛曰:化合神者曰皇,德合天者曰帝。是故三皇創號,五帝次之。然則皇之為稱,妙於帝矣。肅謂為輕,不亦謬乎!臣松之以為上古謂皇皇后帝,次言三、五,先皇 後帝,誠如盛言。然漢氏諸帝,雖尊父為皇,其實則貴而無位,高而無民,比之於帝,得不謂之輕乎!魏因漢禮,名號無改。孝獻之崩,豈得遠考古義?肅之所云, 蓋就漢制而為言耳。謂之為謬,乃是譏漢,非難肅也。


나중에 왕숙은 상시(常侍)의 신분으로 비서감(秘書監)을 맡았고, 숭문관좨주(崇文館祭酒)를 겸임했다.

경초 연간, 궁실을 성대하게 지었으므로 백성들은 농업에 종사할 수 없었으며, 약속한 기간은 정해지지 않고, 형벌과 사형이 대대적으로 시행되었다. 왕숙이 상소를 올렸다.


----- 위대한 위나라는 여러 제왕의 멸망을 이었으므로 백성들은 얼마 없고, 전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진실로 백성을 쉬게 하여 먼 곳에도 가까운 곳에도 조용하고 안정된 환경을 제공해야만 됩니다. 식량을 축적하고 피곤한 백성을 쉬도록 힘쓰는 것은 부역을 줄이고 농사를 열심히 짓도록 하는 데에 있습니다. 지금 궁실은 완성되지 않았고, 이와 관련된 일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성인 남자는 노역으로 지쳐 있고, 농민은 밭을 떠나게 되어 곡물을 심는 자가 적은데 곡물을 먹는 자는 많으며, 묵은 쌀이 이미 다 먹었으나 새 쌀은 잇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자의 큰 근심인데, 좋은 계책을 미리 준비하지 못했습니까? 지금 일을 하는 사람은 3~4만 명쯤 됩니다. 구룡전(九龍殿:崇華殿이라고도 함)은 옥체를 편안히 있게 할 수 있고, 그 안에는 여섯 명의 후궁을 둘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현양궁(顯陽宮)의 어전 또한 곧 준공될 것입니다. 오직 태극전(泰極殿) 앞은 아직 많은 공정이 남아 있습니다. 바야흐로 극심한 추위가 닥쳐 올 텐데 노역자들 중에 간혹 열병(熱病)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진실로 폐하께서 덕스러운 소리를 하시고, 영명한 조서를 내려 노역하는 사람들의 피로를 깊이 어루만지고, 백성들의 넉넉하지 못함을 매우 불쌍히 여기기를 원합니다.


--- 평상시 녹봉을 먹는 신분의 사람을 취하고, 긴급한 일을 담당하지 않은 자를 임용하며, 성년의 남자를 선발하여 1만 명을 남겨 1년 후에 그들과 교체하도록 하고 모두에게 교대하여 휴식할 날이 있음을 알게 하면, 일을 하면서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을 것이고, 수고로워도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 계산에 의하면 1년에 365명이 되므로, 수적 또한 적지 않습니다. 1년간 노역을 한 자는 3년간의 휴식을 인정합니다. 그 나머지 백성들은 나누어 파견하여 모두 집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도록 하는 것이 빈궁함이 없게 하는 방법입니다. 창고에는 곡물이 가득하고, 백성들에게는 여력이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으로 공을 일으키면 무슨 공이 세워지지 않겠습니까? 이것으로 교화를 행하면 어찌 교화가 실행되지 않겠습니까?


--- 대체로 백성들에 대한 신의는 국가의 큰 보물입니다. 공자가 말하기를, ‘옛날부터 모두 죽음이 있었고, 백성들은 신의가 없다면 설 수 없다 --- 《논어》〈안연(顔淵)〉’고 했습니다. 작은 진(晉)나라의 미소한 중이(重耳:문공)는 그 백성들을 사용하려고 먼저 신의를 보였습니다. 이 때문에 원(原)이 비록 투항하려고 했지만 신의를 고려하여 돌아가게 하였으므로 한 번 싸움으로 대업을 이을 수 있었습니다. 이 일은 오늘에도 칭송되고 있습니다.


--- 이전에 폐하의 수레는 낙양으로 행차하여서 백성들을 징발하여 진영을 만들었습니다. 담당관리는 진영이 완성되자 해산하라고 명하였는데, 완성된 후에는 또 그 노력을 이용하려고 때때로 보내지 않기도 했습니다. 담당 관리는 진영만을 알고 눈앞의 이익만을 구하고, 국가의 기본은 돌아보지 않은 것입니다.


---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지금 이후부터 설령 또 백성을 사용하게 되더라도 그 명령을 명확히 하여 반드시 기한을 지키도록 해야만 합니다. 만일 다음에 일이 있을 때에는 전녕 다시 바꾸어 징발하여 백성들에게 신의를 잃지 말도록 해야만 합니다.


--- 무릇 폐하께서 때에 이르러 집행하려고 하는 형벌은 모두 죄가 있는 관리나 사형에 해당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천하 사람들은 상세한 상황을 모르면서 창졸지간에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원컨대 폐하께서는 그들 관리들에게 명령하여 그들의 죄행을 폭로하도록 하십시오. 다같이 그를 죽게 했지만, 조정을 오염시키고 먼 곳이든 가까운 곳이든 의심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사람의 목숨은 가장 중요하고 사는 것을 죽음으로 바꾸는 것은 어려우며, 숨이 끊어지면 계속 살 수 없습니다. 때문에 성현은 그것을 매우 중시했습니다. 맹가(孟軻)는 ‘어진 사람은 천하를 얻기 위하여 무고한 한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 《맹자》〈공손추상(公孫丑上)〉’고 했습니다. 한나라 때 천자의 행행(行幸)을 범하여 한문제가 타는 수레의 말을 놀라게 한 자가 있었는데, 정위 장석지(張釋之)는 벌금을 내도록 상주했습니다. 문제는 그 판결이 너무 가볍다고 했지만, 장석지는 ‘그 당시 황상께서는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지금 그를 정위로 보내셨고, 정위는 천하를 평등하게 판결해야 합니다. 만일 기움이 있다면 천하의 법을 사용함에 있어서 모두 가볍지 않으면 무거울 것이니, 백성들은 어느 곳에 손과 발을 놓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 신의 생각으로는 장석지의 이 말은 그 본의를 크게 잃었고, 충신이 응당 진술해아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위는 천자의 관리입니다. 공평함을 잃을 수 없으면서, 천자의 신상에 관해 말하면서 오히려 의혹과 오류를 있게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자기를 위하는 행위를 중시하고 군주를 위하는 행위를 경시한 것으로, 매우 충성스럽지 못한 것입니다. 주공이 말하기를, ‘천자는 농담을 하지 않는다. 말을 하면 사관은 기록해야 하고, 악공은 읊어야 하며, 선비는 칭송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말에는 농담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인데, 하물며, 법률행위야 어떻겠습니까? 그러므로 장석지의 말은 살피지 않을 수 없고, 주공의 충고는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왕숙은 또 진술했다.


----- 여러 새와 짐승들은 사용하는 물건이 없지만, 꼴․곡식․인부는 비용이 드는데, 모두 면제할 수 있습니다.


명제는 일찍이 왕숙에게 질문했다.


“한환제(漢桓帝) 때, 백마현(白馬縣)의 현령 이운(李雲)은 글을 올려 말하기를, ‘제(帝)는 체(諦)입니다. 이것은 제(帝)가 분명하게 판단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라고 했는데, 그 당시 어떻게 사형되지 않았소?”


왕숙이 대답했다.


“단지 말을 함에 있어 역순(逆順)의 절(節)을 잃었을 뿐, 원래 그 본의는 모두 충심을 다하려 한 것이며, 생각은 국가에 보답하려는 데에 있었습니다. 더구나 제왕의 권위는 격렬한 천둥을 넘었으므로 필부 한 명을 죽이는 것은 개미를 죽이는 것과 다른 구분이 없습니다. 그러나 관대하게 그를 살려주어 신하의 격한 충언을 수용하였음을 나타내고, 천하 사람들에게 덕을 확대시킬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신의 생각으로는 이운을 죽이는 것이 반드시 옳은 것만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명제가 또 질문했다.


“사마천은 궁형을 받았기 때문에 내심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사기(史記)》를 지어 효무제(孝武帝)를 비난하고 헐뜯어 사람들로 하여금 분하여 이를 갈도록 했소.”


왕숙이 대답했다.


“사마천은 사실을 기록하면서 허위로 누구를 찬미하지 않았고, 누구의 잘못을 은폐시키지도 않았습니다. 유향(劉向)과 양웅(揚雄)은 사마천이 서술한 것에 탄복하여 훌륭한 사관의 재능이 있으므로 역사 사실을 잘 기록했다고 했습니다. 한무제는 그가 《사기》를 저술했다는 것을 듣고 효경제와 자신의 본기(本紀)를 얻어 열람했습니다. 그 결과 매우 노하여 이 두 편을 삭제해 버렸습니다. 지금 이 두 편의 본기는 목록만 있을 뿐 내용은 없습니다. 후에 이릉(李陵)의 사건을 만나 사마천은 잠실(蠶室:궁형 시술실)로 보내졌습니다. 여기서 잘못을 숨기려고 한 것은 한무제에게 있지, 사마천에게는 없습니다.”


정시 원년(240)에 왕숙은 지방에서 나와 광평(廣平)태수가 되었다. 공적인 일로 불려 돌아와 의랑에 임명되었다. 오래지 않아 시중이 되었고, 태상으로 승진했다.

당시 대장군 조상이 권력을 장악하고, 하안(何晏)과 등양(鄧颺) 등을 임명했다. 왕숙은 태위 장제(蔣濟)․사농(司農) 환범(桓範)과 당시의 정치 문제를 논의하였는데, 왕숙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이들은 홍공과 석현(石縣:한원제 때 총애를 받던 신하)의 무리들이니, 또 칭찬하여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조상은 이 말을 듣고, 하안 등에게 충고했다.


“모두 신중하시오! 공경은 이미 제군(諸君)을 이전 세대의 악한 사람들과 비교하고 있소.”


왕숙은 종묘제사에 관련하여 면직되었다. 후에 광록훈(光祿勳)이 되었다. 그때 길이가 1척쯤 되는 물고기 두 마리가 무기창고 지붕 위에 나타났는데, 담당관리는 길한 징조라고 생각했으나 왕숙이 말했다.


“물고기는 연못에서 사는데 지붕 위에 있습니다. 껍질이나 비닐이 있는 생물이 그 서식처를 잃은 것입니다. 변방의 장수가 아마 갑옷을 버리는 변고가 있을 것입니다.”


그 후 과연 동관(東關)의 패전(敗戰)이 있었다. 왕숙은 하남윤(河南尹)으로 전임되었다.


가평 6년(254), 왕숙은 지절(持節) 겸 태상(太常)으로 천자의 수레를 받들고 원성(元城)에서 고귀향공(高貴郷公)을 맞이했다. 이 해, 흰 기운이 하늘을 가로질렀다. 대장군 사마경왕은 왕숙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왕숙이 대답했다.

“이것은 치우(蚩尤:고대의 영웅)의 깃발입니다. 동남쪽에 동란이 있습니까? 당신이 만일 자신의 몸을 닦아 백성들을 안정시키려고 한다면, 천하의 안정을 원하는 사람들은 덕으로 돌아올 것이고, 동란을 모의하는 자들은 먼저 멸망할 것입니다.”


다음해 봄, 진동장군 관구검과 양주자사 문흠(文欽)이 모반하였다. 경왕(景王)이 왕숙에게 말했다.


“곽광(霍光:전한의 재상)은 하후승(夏侯勝)의 말에 감동되어 처음으로 유학하는 선비들을 중시하였는데, 실제로 큰 원인이 있습니다. 국가를 안정시키고 주상을 편안히 하는 방법은 어디에 있습니까?”


왕숙이 말했다.


“옛날 관우(關羽)는 형주의 병력을 이끌고 한강(漢江)의 연민에서 [漢濵] 우금을 항복시켰습니다. 그래서 그는 북쪽으로 향하여 천하를 쟁탈할 뜻을 가졌습니다. 후에 손권이 습격하여 그의 장수와 병사와 가족들을 취하였으므로, 관우의 병사는 하루아침에 와해되었습니다. 지금 회남의 장병(將兵:관구검과 문흠의 부하)의 부모와 처자는 모두 내지(內地)의 각 주에 있습니다. 긴급히 출발시켜 방비하여 보호하고, 그들로 하여금 전진을 하지 못하도록 하면, 반드시 관우와 같이 붕괴되는 형세가 나타날 것입니다.”


경왕은 그의 건의에 따라 관구검과 문흠을 격파시켰다. 후에 왕숙은 중령군으로 승진했으며, 산기상시의 관직을 더하였으며, 식읍을 3백 호 늘려 이전 것과 합쳐 2천2백 호가 되었다.


감로 원년(256)에 세상을 떠났는데, 문하생들 중 상복을 입은 사람이 백 명이나 되었다. 위장군(衛將軍)으로 추증하고, 시호를 경후(景侯)라고 했다. 그의 아들 왕운(王惲)이 후사를 이었다. 왕운이 죽자 아들이 없었으므로 봉국은 단절되었다.


경원 4년(263)에 왕숙의 아들 왕순(王恂)을 난릉후(蘭陵侯)로 봉하고, 함희(咸熙) 연간에 처음으로 다섯 등급의 작위 제도를 세웠다. 왕숙이 이전 조대에 탁월한 공훈을 세웠기 때문에 왕순을 영자(永子:永縣의 子爵)로 고쳐 봉했다.


[주] 세어에서 이르길: 왕순(王恂)은 자가 양부(良夫)이며 넓은 식견을 갖추고 있었으며 충성스럽고 바른 신하였다. 하남윤과 시중을 역임했는데, 재임하는 시절에 평판이 높았다. 마음속에는 항상 공평함을 지켜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는 절개가 있었다. 격현(鬲縣)의 령 원의(袁毅)가 준마를 보냈지만, 그의 탐욕을 알았던 까닭에 받지 않았다. 원의는 결국 뇌물수수로 자리를 물러났다. 두 개의 대학을 세우고 오경을 존중한 것도 왕순의 건의에서 비롯되었다. 나이 마흔 살 남짓했을 때 세상을 떠났는데, 거기장군으로 추증되었다. 肅女適司馬文王,即文明皇后,生晉武帝、齊獻王攸。


晉諸公贊曰:恂兄弟八人。其達者,虔字恭祖,以功幹見稱,位至尚書。弟愷,字君夫,少有才力而無行檢,與衛尉石崇友善,俱以豪侈競於世,終於後將軍。虔子康、隆,仕亦宦達,為後世所重。


처음에 왕숙은 가규와 마융의 학문을 좋아하고 정현의 학문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학설의 차이를 채집하여 《상서》․《시경》․《논어》․《주례》․《예기》․《의례(儀禮)》․《좌씨전(左氏傳)》에 주해(注解)를 했고, 부친 왕랑이 지은 《역전(易傳)》을 선택하여 바르게 정리하여 모두 학관에 진열했다.

그가 논박한 조정의 제도․전제(典制)․종묘․상기(喪紀)․경중(輕重) 등도 총 백여 편이 있다.


당시 악안(樂安)의 손숙연(孫叔然)(주)이 정현의 문하에서 학문을 받았는데, 사람들은 동주(東州)의 큰 유학자라고 했다.


臣松之案叔然與晉武帝同名,故稱其字。


조정에서는 그를 불러 비서감으로 임명했지만 나가지 않았다. 왕숙이 《성증론(聖證論)》을 편찬하여 정현의 단점을 풍자했을 때, 손숙연은 그것을 반박하여 정현을 변호했다. 손숙연은 또 《주역》․《춘추례》․《모시》․《예기》․《춘추삼전》․《국어》․《이아》의 모든 주석을 달았으며, 또 주석서 10여 편을 지었다. 위나라 초, 은인지사 돈황(燉煌)의 주생열(周生烈),


臣松之案此人姓周生,名烈。何晏論語集解有烈義例,餘所著述,見晉武帝中經簿。


명제 시대의 대사농 홍농의 동우(董遇) 등 또한 경전에 주석을 달아 자못 세상에 전해졌다.


『위략(魏略)』에 따르면, [[유종전]]으로 분할


*평하여 말한다. ----- 종요는 도리에 두루 통하고 사법(司法)의 재주가 있었고, 화흠은 청아하고 순수하고 덕성을 갖추었으며, 왕랑은 문학적 재질과 학식이 풍부하였다. 이 세 사람은 진실로 모두 한 시대의 뛰어난 인물들이다. 위씨가 나라를 세웠을 때 이들이 처음으로 삼공의 지위에 올랐으니, 진실로 흥성하였다. 왕숙은 성실하고 박학하며 사리를 분석할 수 있었다. 


劉寔以為肅方於事上而好下佞己,此一反也。性嗜榮貴而不求苟合,此二反也。吝惜財物而治身不穢,此三反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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