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욱(程昱)의 자는 중덕(仲德)이요, 동군(東郡) 동아(東阿)현 사람이다. 키는 8척 3촌이나 되며, 수염이 아름다웠다. 황건적이 봉기했을 때 (동아)현의 현승(縣丞)인 왕도(王度)가 도리어 이들에게 호응하여 창고를 불태웠다. 현령(縣令, 지방행정 구역으로써 현에는 장관이 있는데, 1만호 이상에는 현령, 그 미만일 때는 현장이라 합니다. 이 현령 혹 현장의 부관(속관)이 현승이며, 그 외에도 현의 군사적 일을 담당하는 현위(縣尉)가 있습니다)은 성을 넘어 달아나고, 관리와 백성들은 노인과 아이를 업고 동쪽 거구산(渠丘山)으로 달아났다. 정욱이 사람이 시켜 왕도를 엿보게 했는데, 왕도 등이 빈 성을 능히 지킬 수 없어 성을 나와 서쪽 5~6리 즈음에 멈춰 주둔했다.


정욱이 현 중의 대성[大姓= 그 지역의 유력하고 세력이 큰 가문 정도의 의미]인 설방(薛房) 등에게 말하길


"지금 왕도 등이 성곽을 얻어 능히 지킬 수 없으니, 그 세력은 알 만합니다. 이들은 재물을 노략질하려고 하는 것에 불과하니, 견고한 갑옷과 예리한 병기로 공수(攻守)의 뜻을 가진 게 아닙니다. 지금 어찌 서로 성으로 돌아와 지키지 않습니까? 또 성은 높고 두꺼우며 미곡이 많아, 만약 돌아가 현령을 찾아 같이 견고히 수비한다면, 왕도는 반드시 오래 지탱할 수 없어 (그들을) 공격하면 격파할 수 있습니다"


라고 했다. 설방 등이 이 말이 맞다고 여겼다.


(그러나) 관리와 백성들이 그 말을 인정하고 따르지 않으면서 말하길


"적들은 서쪽에 있는데, (우리는) 다만 동쪽에 있을 뿐이오"


라고 했다. 정욱이 설방 등에게 말하길


"어리석은 백성들과는 일을 계획할 수 없습니다"


라고 했다. 이에 은밀히 몇몇 기병을 보내 동산(東山 ; 이것이 동아현의 지명인지, 단순히 동쪽 산을 말하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위에 깃발을 들도록 하고, 설방 등에게는 이를 바라보고 적들이 이미 도착했다고 크게 소리치게 한 뒤, 곧장 산을 내려와 성을 달려 들어가니, 관리와 백성들도 달아나면서 그 뒤를 따랐고, 현령을 찾아 마침내 같이 성을 지켰다.


왕도 등이 와서 성을 공격했지만 항복시킬 수 없어 떠나고자 했다. 정욱이 관리와 백성들을 이끌고 성문을 열어 급히 공격하니, 왕도 등은 격파되어 달아났다. 동아현은 이 때문에 보전될 수 있었다.


초평(初平) 연간에 연주(州)자사 유대(劉岱)가 정욱을 불렀으나, 정욱은 응하지 않았다. 이 때 유대는 원소, 공손찬과 화친하고 지냈는데, 원소가 (자신의) 처자를 유대가 있는 곳에 살게 하고, 공손찬 또한 종사(從事) 범방(范方)에게 기병을 거느리고 가서 유대를 돕게 했다.  후에 원소와 공손찬 사이에 틈이 벌여졌다. 공손찬이 원소군을 공격해 격파하고, 이에 사신을 보내 유대에게 얘기하면서 원소의 처자를 보내어 원소와 관계를 끊게 했다. 따로 범방에게는 명령하길


"만약 유대가 원소의 가족을 보내지 않으면, 기병을 거느리고 돌아오라. 내가 원소를 평정하고 난 뒤, 병사를 더해 유대를 공격하겠다."


라고 했다.


유대가 연일 의논했지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별가(別駕) 왕욱(王彧)이 유대에게 이르길


"정욱은 모책이 있어, 능히 큰 일을 결단할 수 있습니다."


라고 했다. 유대가 이에 정욱을 불러서 보며 계책을 묻자, 정욱이 말하길


"만약 원소의 가까이 있는 구원을 버리고 공손찬의 멀리 있는 원도를 구한다면, 이는 월(越)나라에 사람을 빌려주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는 꼴이 됩니다. 무릇 공손찬은 원소의 적수가 되지 못합니다. 지금 비록 원소군을 무너뜨렸지만, 끝내는 원소에게 사로잡힐 것입니다. 무릇 하루 아침의 권세에 가서, 멀리 내다보는 계책을 생각치 않는다면, 장군 또한 끝내 패망할 것입니다"


라고 했다. 유대가 이 말을 따랐다.


범방은 그 기병들을 거느리고 돌아가는데, 채 도착하지 않아서 공손찬이 원소에게 크게 격파되었다. 유대는 표를 올려 정욱을 기도위로 삼으려 했으나, 정욱은 병을 핑계로 사양했다.


유대가 황건적에게 살해되었다. 태조가 연주에 임했을 때, 정욱을 불렀다. 정욱이 장차 떠나려 하자, 그의 고향사람들이 말하길


"어찌 전후의 일이 이렇게 서로 배치되는가![유대가 불렀을 때는 안갔던 사실과 비교해서 한 말입니다]"


라고 했다. 정욱은 웃으며 응답하지 않았다.


태조가 그와 얘기를 나눠보고 크게 기뻐하며, 정욱에게 수장(壽張) 현령을 맡게 했다. 태조가 서주(徐州)를 정벌하러 가면서, 정욱과 순욱을 시켜 견성(城)에 남아 지키게 했다. 장막 등이 모반하여 여포를 맞이하자, 군현들이 이에 호응했으나, 오직 견성현, 범(范)현, 동아(東阿)현 만은 동요되지 않았다. 여포군에 항복한 자들이 진군이 직접 병사를 이끌고 동아현을 취하려 한다고 말하자, 다시 범의(氾嶷)를 시켜 범현을 공취하게 하니, 관리와 백성들이 모두 두려워했다. 


순욱이 정욱에게 말하길


"지금 연주가 반란을 일으켜서, 우린 오직 이 3성만 가지고 있소. 진궁 등이 중병(重兵)으로 임한다면, 깊이 그들의 마음을 붙들어 두지 못해 세 성은 반드시 동요할 것이오. 당신은 백성들이 우러러보는 자이니, 돌아가 저들을 설득한다면, 거의 괜찮아 질 것이오."


라 했다.
 
정욱이 이에 돌아가는데, 범현을 지날 때 그 현령 근윤(允)을 설득하며 말하길


"듣자하니 여포가 그대의 모친과 동생과 처자를 잡고 있다하니, 효자라면 진실로 마음을 다스릴 수 없을 것이오. 지금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 영웅들이 아울러 일어났지만, 반드시 천명에 의하여 태어난 이(命世)가 있어 능히 천하의 혼란을 종식시킬 수 있는 자를, 지혜로운 자라면 상세히 가려야 하는 법이오. 주인을 얻은 자는 창성(昌盛)하나, 주인을 잃은 자는 패망하오. 진궁이 반역하여 여포를 맞아들이자 온 성들이 모두 호응했으니, 비슷한 일을 저지르게 될 것이오. 그러한즉 당신이 이 상황을 보면 여포란 어떤 인물이겠소! 무릇 여포는 거칠면서 친근함이 적고, 강하지만 무례하니, 필부의 영웅일 뿐이오. 진궁 등이 그 세력 상 합쳐지긴 했어도, 능히 그대를 다스릴 수 없소. 병력이 비록 많다고 하나 종국에는 필히 성공치 못할 것이오. 조사군(曹使君=조조에 대한 경칭)은 불세출의 지략을 가지고 있어, 이는 거의 하늘이 주신 것이오. 그대가 반드시 범현을 굳건히 하고 내가 동아현을 지킨다면, 전단(田單)의 공을 이룰 수 있을 것이오[전국시기에 연(燕) 소왕이 명장 악의를 시켜 제나라를 공격하게 했는데, 제 임금인 민왕은 도망가고 거의 멸망할 지경에까지 이르렀지만, 전단이 즉묵(卽墨)성을 끝까지 고수하여 마침내 연나라를 물리친 고사를 말합니다]. 누가 충성을 거스른 자와 함께 악을 따라가 모자(母子)가 함께 죽게 되겠습니까? 그대는 잘 살펴 생각하시오."


라 하니, 근윤이 눈물을 흘리며


"어찌 감히 두 마음을 품겠습니까"


라 했다. 
 
이 때 범의(氾嶷)가 이미 현에 와 있었는데, 근윤이 이에 범의를 보고서는 복병을 두었다가 그를 찔러 죽이고 돌아와 병사들을 독려하며 수비했다. 

주:서중(徐衆)의 평가“근윤과 조조는 군신관계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지친인 어머니를 포기하고, 의에 따라서 행동했다. 옛날에 왕릉(王陵)의 모친은 항우에게 잡혀있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고조(유방)가 천하를 얻게 될 것이라고 판단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 아들이 뜻을 지킬 수 있도록 했다. 올바른 결심을 하자면 자신과 관계된 것을 애써 끊어야 할 때도 있다. 그런 연후에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해야 일을 성사시킬 수가 있다. 위공자(衛公子)는 제나라에 출사를 했다가 오래도록 돌아가지 못했으며, 관중이 가족에 대한 애절한 마음을 끊지 않았다면 어찌 주군을 정성스럽게 섬겨서 재상이 되었겠는가? 그렇지만 효자의 문에서 충신을 구하는 것이 천하를 얻고자 하는 사람의 도리이므로, 근윤은 마땅히 자신의 어머니를 먼저 구했어야 한다. 서서(徐庶)의 모친이 조공에게 잡혔을 때 유비는 서서를 조조에게 보냄으로써 천하의 사람들에게 아들의 정을 소중히 여겼다는 말을 들었다. 그렇다면 조조 역시도 근윤을 여포에게 보냈어야 하지 않겠는가?” 

정욱이 또 따로 기병을 보내 창정진(倉亭津)의 나룻길을 끊게 하니, 진궁이 여기에 이르렀으나 건너지 못했다. 정욱이 동아현에 이르르자, 동아현령 조지(棗祗)가 이미 관리와 백성들을 이끌고 독려하여 성에 웅거하여 굳건하게 지키고 있었다. 또 연주 종사(從事) 설제(薛悌)가 정욱과 같이 힘모아 모의하여 마침내 세 성을 완전히 보전하며 태조를 기다렸다. 태조가 돌아와 정욱의 손을 잡으며 그대의 힘이 없었다면 난 돌아갈 곳이 없었을 것이오라 했다. 이에 표를 올려 정욱을 동평(東平) 상(相)으로 삼고, 범현에 주둔토록 했다. 

[ 주 :『위서(魏書)』에 이르길 정욱이 어렸을 때 일찍이 꿈에 태산(泰山)에 올라 두 손으로 해(日)를 받드는 꿈을 꾸었다. 정욱이 혼자서 이를 기이하게 여기다가 순욱에게 말해주었다. 연주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되자 정욱의 공에 힘입어 세 성을 보전하게 되었다. 이에 순욱이 정욱의 꿈을 태조에게 말해주니 태조가 경이 끝내는 내 심복이 되리란 꿈이오라 했다. 정욱의 본래 이름은 '립(立)'이었는데, 태조가 이에 립(立)자 위에 일(日)자를 더하게 하여 이름을 욱(昱)이라 고쳤다.]

 
태조가 여포와 복양( 陽)에서 싸웠는데 수 차례나 전세가 불리하고 황충(蝗蟲)이 일어나 이에 각자 군대를 이끌고 물러갔다. 이에 원소가 사람을 시켜 태조에게 우호관계를 맺자고 설득하여 태조가 그 가솔들을 업( )성에 옮기도록 만들고자 하였다. 태조가 새삼 연주를 잃은데다 군대의 식량이 다하여, 장차 이를 허용하고자 했다.
 
이 때 정욱이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조조를) 인견(引見)하여 이로 인해 말하길


"저기 듣자하니 장군께서 가솔들을 보내고 원소와 우호관계를 맺고자 한다던데, 실로 이런 일이 있습니까?"


라 하니, 태조가


"그렇소."


라 했다. 

정욱이 헤아려 보건대


"장군께서 일이 닥치자 두려워하신 겁니까, 그렇지 않으면 깊이 생각치 않은 것입니까! 무릇 원소는 연과 조(趙) 땅에 의거하여 천하를 병탄해 차지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 지혜로는 이룰 수 없습니다. 장군께서 자신을 스스로 헤아려 보면 그보다 아래라고 여기십니까? 장군의 용과 범같은 위엄으로 가히 한신이나 팽월(彭越)같은 일을 이룰 수 있지 않습니까! 지금 연주가 비록 쇠잔해 졌지만 아직 세 성과 능히 싸울 있는 전사들이 있어 만명이라도 항복시키지 못합니다. 장군의 신이한 무력으로써 문약(순욱)이나 저 등과 함께 저들을 거두어 기용하신다면, 패왕의 대업을 가히 이룰 수 있습니다. 원컨대 장군께서 다시 생각하십시오."


라 했다. 태조가 이에 그만두었다. 

[주; 『위략(魏略)』에는 다음처럼 정욱이 태조를 설득했다고 실려있다 「옛날 전횡[田橫; 항우와 유방이 천하를 쟁패하는 과정, 즉 초한지에 나오는 제나라 후손입니다. 항우가 진나라를 섬멸하고 난 뒤 제왕에 봉해졌죠]은 제나라의 세족(世族)으로 형제 3명이 번갈아 왕노릇 했는데, 천리나 되는 제나라 땅에 웅거하고, 백만의 병사를 끼고서 제후들과 더불어 남면(南面)하고 고(孤)라 칭했습니다[남 면한다는 것은 왕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신하들과 왕의 자리를 방위상으로 보면 왕이 북쪽에 앉거든요. 그래서 왕의 자리에 있는 것을 남쪽으로 바라본다, 즉 남면한다고 일컫습니다. 반대로 누구의 신하가 되는 것은 북면(北面)한다고 합니다. 고(孤)는 왕이 자신을 칭할 때 쓰는 말입니다] 얼마 뒤 고조(高祖;유방)이 천하를 얻게 되자 전횡은 도리어 항복한 포로신세가 되었습니다. 이 때의 일에 당하여 전횡을 어찌 마음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라 하자 태조가 그렇소. 이것은 진실로 대장부의 지극한 치욕이요라 했다. 정욱이 제 어리석은 견해로는 (공의) 큰 뜻은 알지 못하지만, 장군의 뜻이 전횡만 못하다고 봅니다. 전횡은 제나라의 일개 장수였을 뿐인데 고조의 신하가 되는 수치를 당했습니다. 지금 장군께서 가솔들을 업성으로 보내고자 하시는데, 그러면 장차 북면(北面)하고 원소를 섬기게 됩니다. 무릇 장군의 총명함과 신이한 무력으로는 도리어 수치을 겪지 않고 원소를 아래에 둘 수 있으니, 제 생각으론 장군께선 이를 부끄럽게 여기셔야 합니다.라 했다. 」그 나중에 말이 본전(本傳, 이 『정욱전』을 말함)과 대략 같다.]

 
 천자가 허(許)현에 도읍을 정하고, 정욱을 상서(尙書)로 삼았다. 연주가 아직 안집(安集)도지 못하였기에, 다시 정욱을 동중랑장(東中郞將)으로 삼아 제음태수(濟陰太守)를 맡아 연주의 일을 모두 감독하게 했다. 유비를 서주(徐州)를 잃고 태조에게 귀의해 왔다. 

정욱이 태조에게 유비를 죽이라고 설득했지만, 태조가 듣지 않았다. 이 말이 『무제기』에 있다. 

[『무제기』에 실린 이 부분의 기사는 이렇습니다 ; 여포가 유비를 습격하여 하비를 취하였다. 유비가 달아나 왔다. 정욱이 공(=조조)을 설득하며 말하길 유비의 관상을 보니 영웅의 재주가 있고 뭇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얻고 있어, 끝내 남의 밑에 있을 자가 아니니, 빨리 그를 도모하는게 낫습니다라 했다. 공이 말하길 바야흐로 지금 영웅을 거둬들이고 있는 때인데, 한 사람을 죽여 천하의 인심을 잃게 할 수는 없소라 했다] 


후에 유비를 보내 서주에 가서 원술을 기다려 공격하게 하니, 정욱과 곽가(郭嘉)가 태조를 설득하며 공께서 저번에 유비를 도모하지 않은 것은 저희들이 진실로 미칠 바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그에게 병사를 빌려주시며, 반드시 다른 마음을 품을 것입니다라 했다. 

태조가 후회하며 그를 추격했으며 미치지 못했다. 원술이 병으로 죽었을 때, 유비는 서주는 이르러 마침내 차주(車胄)를 살해하고, 병사를 일으켜 태조를 배반했다. 
 
얼마 후 정욱은 진위장군(振威將軍)으로 승진했다. 원소는 여양(黎陽)에 있으면서 장차 남쪽으로 하수를 건너려 했다. 이 때 정욱은 7백 병사를 가지고 견성( 城)을 지키고 있었는데, 태조가 이를 듣고 사람을 시켜 정욱에게 병사 2천을 더 보내주려 한다고 알렸다. 

정욱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말하길


"원소가 10만 병사를 가지고 있는데 그가 향해오는 앞에는 어떤 (막고 있는) 것도 없습니다. 지금 제 병력이 적다는 것을 보고서는 가벼이 여기고 공격하러 오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제게 병력을 더 늘려 늘려준다면 지나면서 어쩔 수 없이 공격할 것이고 공격하면 반드시 이길 것이니, 도리어 양쪽(태조와 자신)에서 그 세력을 손해보는 셈이니 원컨대 공께서는 의심하지 마십시오."


라 했다. 태조가 이 말을 따랐다. 원소가 정욱의 병력이 적다는 것을 듣고 과연 거기로 가지 않았다. 태조가 가후(賈 )에게 일러 말하길


"정욱의 담력(膽力)은 맹분(孟賁)과 하육(夏育)[춘추시대 때 이름난 장사들. 이 둘을 합칭해 '분육(賁育)이'라 해서 힘세고 용감한 장사에 대한 일종의 대명사처럼 자주 쓰입니다]보다 뛰어나오."

정욱이 산택(山澤)에 망명해 있던 자들을 거둬들여 정병(精兵) 수천 명을 얻어, 이에 군사를 이끌고 태조와 여양에서 만나 원담(袁譚)과 원상(袁尙)을 토벌하자, 원상과 원담은 격파되어 패주하였다. 정욱을 분무장군(奮武將軍)에 배수하고, 안국정후(安國亭侯)에 봉하였다.
 
태조가 형주를 정벌하니, 유비는 오나라로 달아났다. 의논하던 사람들이 손권이 반드시 유비를 죽일거라 여기니, 정욱이 이를 헤아려 보고서 말하길


"손권이 이제 막 자리에 오른지라 해내(海內)가 그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조공께선 천하에 적이 없고 이제 막 형주를 점령하셔서, 그 위엄이 강표[江表=장강 이남 지역. 즉 동오]에 떨쳤으니, 손권에게 비록 지모가 있다한들 능히 혼자서 감당할 수 없습니다. 유비에겐 빼어난 명성이 있고, 관우와 장비는 모두 1만 명을 상대할 수 있으니, 손권이 필히 그를 빌어 우리를 막으려고 할 것입니다. 세력을 풀어 나누기는 어렵고, 유비의 도움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으니, 또한 죽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라 했다. 손권이 과연 유비의 군대와 함께 태조를 막았다. 
 
이 이후로 중하[中夏=중원(中原)]가 차츰 평정되니, 태조가 정욱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연주에서 패배하였을 때 그대의 말을 쓰지 않았다면, 내가 어찌 여기까지 올 수 있었으리오라 했다. 친족들이 소와 술을 가지고 큰 연회를 열었는데, 정욱이 말하길 족함을 알면 치욕을 당하지 않으니, 저는 이제 물러나야 할 것입니다라 하여 이내 직접 표를 올리고 병사를 돌려 보내어,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주: 
《위서》“마초를 토벌하러 나선 조조는 정욱을 참군으로 삼아 문제(조비)와 함께 수도를 지키도록 했다. 전은(田銀)과 소백(蘇伯) 등이 황하 일대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장군 가신(賈信)을 파견하여 그들을 토벌하도로 했다. 적 1천여명이 항복을 하겠다고 하자 사람들은 구법에 따라서 조치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욱은 이렇게 말하며 반대했다.

‘항복한 자들을 죽이는 것은 소란스러울 때나 적용합니다. 천하에 호걸들이 구름처럼 일어나 혼란스러워졌으므로, 포위를 한 이후에 항복한 자들을 용서하지 않은 것은 위세를 천하에 떨치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천하는 이미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으므로, 항복을 하고자 하는 도적들이 많아 질 것입니다. 이들을 죽여서 굳이 위세를 떨칠 필요는 없습니다. 이제는 지난 날 항복한 자들을 죽였던 것과 달라야 합니다. 신은 이들을 주살하는 것을 반대합니다. 죽여야 한다면 먼저 물어보고 난 후에야 가능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군사에 관한 일은 모두 정욱이 맡고 있으므로 조조에게 물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정욱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문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전으로 들어간 후 다시 정욱을 불러서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왜 끝까지 주장을 하지 않는가?’

정욱은 이렇게 대답했다.

‘대체로 명을 받아 일을 전담하는 경우는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입니다. 지금 이 도적들은 가신의 수중에 놓여있을 뿐입니다. 하루아침에 무슨 변고가 생길 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노신은 일개 장군으로서의 소임을 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정욱의 깊은 생각에 감탄하면서 조조에게 보고했다. 조조는 투항병들을 죽이지 못하도록 했다. 허도로 돌아 온 조조는 그 사실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정욱을 불러서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군계(軍計)는 비할 바 없이 현명하오. 우리 두 부자지간의 처신도 잘 처리를 하는 구려.’”  

정욱의 성품은 강하고 굳세어 남들과 잘 맞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이 정욱이 모반한다고 고하자, 태조는 그를 더욱 후하게 대우해주었다. 위나라가 건국되자, 위위(衛尉)에 임명되고, 중위(中尉) 형정(邢貞)와 위의(威儀)를 다투었다가 면직되었다. 

문제(조비)가 제위에 오르자, 다시 위위로 삼고 봉작을 올려 안향후(安鄕侯)에 봉하고, 봉읍을 3백호 늘려 이전 것과 함쳐 8백호가 되게 하였다. 작은 아들 정연(程延) 및 손자 정효(程曉)를 열후에 분봉했다. 막 공(公)으로 삼으려 했는데 죽으니, 문제가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거기장군(車騎將軍)을 추증하고 시호를 숙후(肅侯)라 했다.

주 : 『위서(魏書)』에 이르길 이 때 정욱의 나이가 80이었다. 세간의 말로는 처음 태조가 식량이 없었을 때, 정욱이 자기가 고향 현을 약탈해 3일치의 양식을 공급했는데, 자못 사람 말린 고기(人脯)가 섞여 있어서, 이 때문에 조정의 신망을 잃어 지위가 공(公)에 이르지 못했다고 한다.


아들 정무(程武)가 뒤를 이었고, 정무가 죽자 그 아들 정극(程克)이 뒤를 이었으며, 극이 죽자 그 아들 정량(程良)이 뒤를 이었다. 가평 원년에 정효(曉)(정욱의 손자)는 황문시랑이 되었다.


세어에서 이르길: 정효()의 자는 계명(季明)으로 여러가지 사물의 사리를 구분할 줄 알았다(通識).


그 당시 교사(감찰관)가 방자하고 횡행하였다. 따라서 정효는 상소를 올렸다.

-<주례(周禮)>에서 말하기를 ‘관직을 설치하고 직분을 나눔으로써 만민의 준칙으로 삼는다.’고 했으며, <춘추전>에서 말하기를 ‘하늘에는 열 개의 태양이 있고, 사람에게는 열 등급이 있다.’고 했습니다.

<<춘추좌씨전>><소공 7년>에 보이는 말인데, 여기서 '십일(十日)'이란 갑(甲)으로부터 시작되어 규(葵)에 이르기 까지의 일수(日數)이고, 십등(十等)이란 왕으로부터 노예에 이르기까지의 등급을 말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현명한 사람 속으로 가지 않고,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은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 속으로 가지 않습니다. 따라서 성인과 철인을 함께 세워 그들의 숭고한 품격과 명성을 수립했던 것입니다. 각자의 공적으로써 분명하게 시험을 치르고 9년 마다 성적을 매겨야 합니다. 각자 그들의 직업에 수양하도록 하여 생각이 자신들의 직책을 벗어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이런 연고로 춘추시대의 난서가 진후를 구제하려고 할 때 그의 자식이 듣지 않았으며, 전한 시대에는 죽은 사람들이 큰 길에서 나뒹굴었으나, 병길은 이유를 묻지는 않았습니다. 위에 있는 자는 직무 이외의 공을 나무라지 않으며, 아래에 있는 자는 권한 밖의 포상에 힘쓰지 않으며, 백성들에게는 동시에 두 가지의 부역이 없으니, 이는 진실로 국가를 다스리는 중요한 길이며, 혼란을 다스리는 근본이 됩니다.

신은 멀리로는 삼대(三代)의 전적(典籍)의 의미를 보았고, 가까이로는 진한(秦漢)의 정적(政迹)을 관찰했습니다. 비록 관직의 명칭은 고쳐지고 바뀌고 직사는 같지 않았지만, 위를 숭상하고 아래를 누르는 것에 이르러서는 분명히 예의가 있었으며 그것에 일치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교사의 관직이 행정에 관여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옛날에 무황제의 대사업의 초창기에는 모든 관직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고, 병사들은 큰 고생을 하였으며, 민심은 불안하였습니다. 따라서 사소한 죄가 있어도 살피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교사를 설치하여 그 일체를 다루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감찰하고 제어하는데 방도가 있었으므로 함부로 방자하게 굴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조웅이 쟁패하던 시대의 권세의 마땅함이지, 제왕의 바른 법도는 아닙니다. 그 이후에 교사관은 점차 중시되고 신임을 받게 되어 다시 질병과 폐단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위로는 궁정과 조정을 살피게 하고, 아래로는 각 부서의 관리들을 통솔하게 합니다. 관리들에게는 한정된 업무가 없고 직책에는 권한이 없게 합니다. 생각하는 대로 감정을 따르게 하고 오직 마음에 만족시킵니다.

법률은 붓 끝에서 만들어지고 법문과 칙령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재판은 문하에서 이루어 지고, 다시 심문하는 것은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 관속을 선택할 경우에는 깊고 신중한 것을 크다고 판단하고, 급히 말하는 것을 능력이 있다고 판단하며, 도리에 따르는 것을 비겁하고 약한 것이라고 합니다. 밖은 천자의 권위에 의탁하여 성세한다고 생각하고, 안은 나쁜 사람들을 모아놓고 심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신은 그들과 세력을 다투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참고 말하지 않고, 신분이 낮은 사람은 그들의 날카로움을 두려워하여 마음속에만 맺어 놓고 고발하지 못합니다. 윤모가 공공연하게 눈앞에서 그 사악함을 발휘하게까지 못합니다. 윤모가 공공연하게 눈앞에서 그 사악함을 발휘하게까지 되었습니다. 죄악이 두드러지고 있음을 길가는 사람이 모두 알고 있고, 악한 일을 한 지 몇 해가 되었어도 위에서는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례>의 관직을 설치한 의도가 아니고, 또 <춘추>에서 열 등급을 정한 의도가 아닙니다. 지금 밖에는 공경,장교가 모든 관청을 통솔하고, 안에서는 시중,상서가 천하의 정치를 담당하고 있으며, 사예교위가 수도의 수레를 감독하고, 어사중승이 궁전을 감독하며 바로잡고 있느데, 모두 현명하고 재능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그 직무를 담당하도록 하고, 법문과 칙령을 명백하게 나타내어 그 위반하는 것을 다스리게 했습니다.

만일 이런 현명한 사람들을 충분히 신임하지 않는다면 교사(校事)의 작은 관리는 더욱 더 신뢰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이런 현명한 사람들이 각기 충절을 다하려고 생각한다면, 교사가 마음을 작게 하더라도 그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다시 국가의 인재를 선발하여 교사로 삼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어사중승,사예교위광 중복되는 관직이 하나 증가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옛날 방식대로 선발한다면, 윤모의 악한 일이 지금 다시 일어나게 될 것이비낟. 이리저리 생가해봐도 그것을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옛날 상홍양은 한을 위해 이익을 추구하였지만, 복식은 상홍양을 쪄 죽여서 하늘이 비를 내릴 수 있게 하지고 주장했습니다.

만일 정치의 득실이 반드시 천지를 움직이게 한다면, 신은 아마 수해와 한발의 재난은 교사가 원인이 아니라고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조공공이 군자를 멀리하고 소인을 가까이 하였으므로 <국풍(國風)>은 그에 대해 풍자하여 의탁했고, 위헌공이 대신을 무시하고 작은 신하와 도모하였으므로 정강은 그것을 죄라고 했습니다. 설사 교사의 관직이 국가에 이익이 된다고 하더라고, 예의와 도의로써 그것을 말하여, 대신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더구나 간사함을 폭로했지만, 또 폐지하지 않는데, 그것은 정치적 결함을 시정하지 않은 것이고, 미혹되었으나 돌이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교사의 관직은 폐지되었다. 정효는 여남태수로 승진하였는데, 40여 세에 죽었다.



정효열전(曉別傳)에서 이르길: 정효는 문장을 많이 써 놓았으나 거의 망실되어 지금 남아 있는 것은 10분의 1도 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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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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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4
00:42:48 (*.52.89.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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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09
16:20:25
(*.104.141.18)
주석이 세어의 것 하나빼고 다 있더군요. 내용이 간단해서 제가 그냥 번역했습니다.

코렐솔라

2013.12.31
16:30:28
(*.166.245.152)
오등작 관련 설명 제외하고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로 수정했습니다.

venne

2014.04.16
22:42:23
(*.186.21.9)
유비는 서주는 이르러 마침내 차주(車胄)를 살해하고. 서주는 -> 서주에

수정요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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