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소(董昭)는 자가 공인(公仁)이고 제음군(濟陰郡) 정도현(定陶縣) 사람이다. 영도현(廮陶縣)의 장(長)과 백인현(柏人縣)의 현령을 지냈으며, 원소는 그를 참군사(參軍事)로 삼았다. 원소가 계교(界橋) 위에서 공손찬의 군대를 맞아 싸울 때, 원소에게 배속되어 있던 거록태수(鉅鹿太守) 이소(李邵) 및 그 군의 모든 역인(役人)들은 공손찬의 군대가 강함을 알고는 모두 공손찬에게 귀속되고자 하였다. 원소는 이 소식을 듣고 동소로 하여금 거록을 다스리게 하고는 물었다.
 
“어떤 방법으로 통솔할 생각이오?”

동소가 대답했다.

“한 사람의 미미함으로는 많은 음모를 제압할 수 없으므로 그들의 마음을 유도하여 더불어 노래하고 함께 의논하며 그들의 마음을 얻고 나서 기회를 통해 그들을 제어할 뿐입니다. 계획은 일에 닥쳤을 때 있는 것이므로 현재로서는 말할 수 없습니다.”

당시 그 군의 큰 성씨인 손항(孫伉) 등 수십 명이 전적으로 음모의 주도자가 되어 관리와 백성들을 놀라게 하고 선동했다. 동소는 그 군에 이르자 거짓으로 원소의 격문(檄文)을 만들어 군에 알렸다.

- 적의 척후(斥候)인 안평현(安平縣) 장길(張吉)의 진술을 얻었는데, 마땅히 거록을 공략해야 하며 적의 주에서 옛날에 효렴을 지낸 손항 등이 호응했다고 씌어 있었다. 이 격문이 전해지면, 손항을 체포하여 군법에 따라야 한다. 악을 저지른 사람은 단지 그 한 몸에 그칠 뿐 그의 처자식까지 연좌시켜서는 안 된다.

동소는 격문에 근거하여 현령에게 알렸으며, 모두 즉시 참수해 버렸다. 한 군 전체가 놀라고 두려워했으나, 절차에 따라 위안시켜 주니 오래지 않아 모두 평정되고 모여들게 되었다. 일이 모두 원소에게 낱낱이 알려지게 되자, 원소는 잘했다며 칭찬했다. 위군(魏郡)의 태수 율반(栗攀)이 병사에게 살해되자, 원소는 동소에게 위군태수의 일을 맡겼다. 그 당시 군 경계의 치안이 매우 혼란스러워 적의 숫자가 만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동소는 사신을 파견하여 오고 갔으며, 교역과 시장에서 물건을 팔았다. 동소는 그들을 후하게 대해 주었으며, 이것을 빌려 이간시켜 허점을 틈타 토벌하고는 즉시 크게 공격하여 쳐부수었다. 이틀 동안에 승리를 알리는 우격(羽檄)이 세 차례나 도착했다.

동소의 아우 동방(董訪)은 장막(張邈)의 막하에 있었다. 장막과 원소 사이에 틈이 생기자 원소는 참언을 듣고서 동소를 처형하려고 상주했다. 동소는 한 헌제를 뵙기 위해 하내(河內)까지 갔는데, 장양에게 붙들리게 되었다. 장양은 위군태수의 관인과 인수를 돌려주었고, 동소는 다시 기도위(騎都尉)에 제수되었다. 그 당시 태조는 연주(兗州)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사신을 장양에게 파견하여 서쪽 장안에 이르는 길을 잠시만 빌려 주도록 요청했으나, 장양은 듣지 않았다. 동소가 장양에게 말했다.

“원소와 태조가 비록 한 집처럼 되었지만, 그런 형세는 오랫동안 모일 수 없습니다. 태조는 지금은 비록 약하지만, 실제로는 천하의 영웅이므로 당신은 이런 저런 이유를 내세워 그와 교분을 맺어야 합니다. 하물며, 지금은 때마침 인연도 있으니, 마땅히 길을 통하게 하여 천자를 뵙게 하고, 아울러 천자에게 표를 올려 추천해야 합니다. 만일 일이 성사되면, 영원토록 태조와 깊은 정분(情分)이 있게 될 겁니다.”

장양은 태조가 상주한 사자를 통과하게 하고 천자에게 상서를 올려 태조를 추천했다. 동소는 태조를 위해 글을 써서 장안의 장수인 이각과 곽사 등에게 보내고, 그들 지위의 높고 낮음에 따라 은근하게 뜻에 이르게 했다. 장양은 또한 사신을 파견하여 태조에게 가게 했다. 태조는 장양에게 개ㆍ말ㆍ금ㆍ비단을 보내 주었으며, 마침내 서방과 왕래하기 시작했다. 천자는 안읍(安邑)에 있었는데, 동소가 하내로부터 가서 황제에게서 조칙을 받고 의랑에 제수되었다.

건안 원년(196)에 태조는 허창에서 황건군을 평정하고 사신을 파견하여 하동(河東)의 천자에게 상주하게 했으나, 때마침 천자는 낙양으로 돌아가 있었고, 한섬(韓暹)ㆍ양봉(楊奉)ㆍ동승(董承) 및 장양은 각자 뜻이 맞지 않아 불화가 있었다. 동소는 양봉의 병마(兵馬)가 가장 강하지만 무리와 외부의 구원이 적다고 생각하고, 태조를 위해 양봉에게 편지를 썼다.

- 저는 장군에 대하여 명망을 듣고 도의(道義)를 사모하여 단지 일편단심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장군께서는 만승(萬乘 : 天子)의 어려움을 구했고, 옛 도읍으로 천자를 돌아가시게 했으니, 천자를 보좌한 공은 세상을 초월하여 필적한 만한 사람이 없으니, 어찌 위대하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지금은 바야흐로 흉악한 무리들이 중국을 혼란스럽게 하고, 사해가 아직 평안하지 않으니, 이때 제위(帝位)라는 큰 자리는 지극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정은 오히려 모든 것이 보좌하는 신하에게 달려 있습니다. 반드시 많은 현명한 사람들이 군왕의 앞길을 깨끗하게 해야 하는데, 이는 진실로 한 개인이 홀로 이룩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과 배, 그리고 사지(四肢)는 실제로는 서로 의지하는 것이므로, 하나라도 갖추어 있지 않으면 결함이 있게 됩니다. 장군께서 마땅히 안(조정)주인이 되시면, 저는 바깥에서 구원하겠습니다. 지금 제게는 양식이 있고, 장군께는 병사가 있으니, 있고 없음이 서로 통하여 충분히 서로를 구제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후로 죽고 사는 것과 헤어지고 만나는 것은 장군과 서로 함께 하는 것입니다.

양봉은 편지를 받고 기뻐하면서, 여러 장수들에게 말했다.

“연주의 모든 군대는 가까이 허창에 있으며, 그들에게는 병사도 있고 식량도 있으니, 국가가 그들을 의지하고 숭상해야 하오.”

마침내 표를 올려 태조를 진동장군(鎭東將軍)으로 삼고, 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아 비정후(費亭侯)가 되게 했으며, 동소를 부절령(符節令)으로 승진시켰다.
태조는 낙양에서 천자를 뵌 이후로 동소를 끌어들여 함께 나란히 앉게 하고 물었다.

“지금 내가 이곳에 왔지만, 무슨 계략을 세워야 합당하오?”

동소가 대답했다.

“장군께서는 의로운 군대를 일으킴으로써 흉포하고 혼란한 자들을 주살하였으며, 조정에 들어가 천자를 뵙고 왕실을 보좌하였으니, 이는 춘추 시대의 오패(五覇)와 같은 공적입니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모든 장수들은 사람도 다르고 의견도 다르므로 반드시 명령에 복종하지도 않습니다. 만일 지금 남아서 천자를 보필하게 되면, 사리와 형세는 순조롭지 않으니, 오로지 천자의 수레를 이동시켜 허창(許昌)으로 행차시키는 것이 묘책일 뿐입니다. 그러나 조정은 유리(流離)되어 있으며 옛 수도로부터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있습니다. 멀고 가깝건 간에 발돋움하여 바라보고 있고, 하루아침에 안정을 찾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천자의 수레를 옮기면, 아마도 민심은 불만이 있을 것입니다. 무릇 평범하지 않은 일을 하면, 곧 평범하지 않은 공적이 있는 것이니, 원컨대 장군께서는 그 이익이 많은 것을 헤아려 주십시오.”

태조는 이 말을 듣고 말했다.

“천자의 수레를 허창으로 옮기는 것은 본래 나의 뜻이오. 그러나 양봉의 군대가 가까운 양 땅에 있으며, 그의 병력이 정예라고 들었으니, 누(累)가 되지 않겠소?”

동소가 말했다.

“양봉은 도당과 구원병이 매우 적으므로, 아마도 홀로 장군에게 귀의할 것입니다. 장군께서 진동장군(鎮東)과 비정후(費亭)에 봉해진 일이 모두 양봉에 의해서 정해졌습니다. 게다가 문서에 명령을 적어 약속을 한 것은 그가 명공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적당한 시기를 택해 사절을 파견하여 후한 예물로써 답례하면, 그의 생각이 안정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수도에 식량이 없어 천자의 수레를 잠시 노양(魯陽)에 행차시키려 하는데, 노양은 허도와 가까운 것이며, 운송하는 것이 비교적 용이하고, 그것에 이르면 양식이 부족 되는 염려는 없을 것이오.’라고 말씀하십시오. 양봉은 사람됨이 용감하지만 생각이 부족하여 반드시 의심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 것입니다. 쌍방의 사절이 왕래하고 나서 이런 계책을 충분히 확정하십시오. 이렇게 하면 양봉이 어찌 장군에게 누가 되겠습니까?”

태조가 말했다.

“좋소.”

즉시 사절을 보내어 양봉에게 가도록 했다. 태조는 천자의 수레를 허창으로 옮겼다. 양봉은 이로 말미암아 크게 실망하며 한섬 등과 함께 정릉(定陵)에 가서 닥치는 대로 노략질을 했다. 태조는 대응하지 않고, 몰래 가서 양의 진영을 공격하게 하여 항복시키고 주살한 즉 평정되었다. 양봉과 한섬은 병사들을 잃어버려 동쪽으로 달아나 원술에게 투항했다.
건안 3년(198)에 동소는 하남윤(河南尹)으로 승진되었다. 그때 장양은 그의 장수 양추(楊醜)에게 피살되었으며, 장양의 장사(長史)ㆍ설홍(薛洪)과 하내태수(河內太守) 무상(繆尙)은 성을 굳게 지키고 원소의 구원을 기다렸다. 태조는 동소로 하여금 홀로 성안으로 들어가게끔 설홍과 유상을 설득하게 하니, 바로 그날에 무리를 데리고 항복하였다. 따라서 태조는 동소를 기주목(冀州牧)으로 삼았다.

태조가 유비(劉備)에게 명하여 원술을 막게 하자, 동소가 말했다.

“유비는 용감하고 뜻이 크고, 관우와 장비가 그의 우익(右翼)이 되어 있으니, 아마도 유비의 속마음을 논의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태조가 이 말을 듣고 대답했다.

“나는 이미 그에게 허락했소.”

유비는 邳)에 도착하여, 서주자사(徐州刺史) 차주(車冑)를 살해하고 모반을 일으켰다. 따라서 태조는 친히 유비를 정벌하려고 동소를 서주목(徐州牧)에 임명하였다. 원소(袁紹)는 장수 안량(顔良)을 보내어 동군(東郡)을 공략하고, 태조는 동소의 자리를 옮겨 위군태수(魏郡太守)가 되게 하여 대군을 따라 안량을 토벌하게 했다. 안량이 죽고 난 후 태조는 진군하여 업성을 포위했다. 당시 원소는 그의 동족(同族) 원춘경(袁春卿)을 위군태수로 임명하였고, 원춘경은 성안에 있었다. 그의 부친 원원장(袁元長)이 양주(揚州)에 머물고 있어서 태조는 사람을 보내어 원원장을 영접했다. 동소가 편지를 써서 원춘경에게 보냈다.

- 대개 듣건대, 효도하는 사람은 쌍친(雙親)을 배반하면서까지 명리(名利)를 취하지 않고, 어진 사람은 군주를 잊으면서까지 사사로운 행위를 하지 않으며, 뜻있는 사람은 어지러움을 구하여 행운을 불러들이려 하지 않으며, 지혜 있는 사람은 거짓된 수단을 써서 스스로를 위태롭게 하지 않습니다. 족하(足下)의 부친께서는 작년에 내란을 피하여 일찍이 남방의 백성(百城)까지 갔으니, 골육(骨肉)을 소원히 하는 것이 아니고, 오회(吳會) 지방을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지혜 있는 자는 깊은 식견이 있는데, 그대의 부친이 유독 이렇게 합치됩니다. 

우리 조공께서는 그분께서 높은 뜻을 고수하고 청빈하며 무리를 떠나 반려자가 적은 것을 가엽게 여겼기 때문에 특별히 강동으로 사절을 파견하셨습니다. 존부(尊父)께서는 영접을 받기도 하고 전송을 받기도 하면서 지금 이곳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즉시 족하로 하여금 편안한 곳에 있게 하며, 덕망과 의로움이 있는 군주에 의거하고, 태산(泰山)과 같이 견고한 곳에 기거하도록 하며, 절의(節義)의 상징이 되는 몸은 높은 소나무 사이에 있게 하십시오. 이것은 도의(道義)로써 말한다면, 마치 당신이 있는 곳의 군주를 배신하고 우리들이 있는 이곳으로 향하고 있으며, 당신의 백성들을 버리고 당신의 부친에게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하물며 주의보(邾儀父)가 처음에 노나라의 은공(隱公)과 맹약(盟約)할 때, 노나라 사람들은 그것을 칭찬하였으나, 작위를 기록되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한 즉 왕이 임명하지 않은 것은 작위를 존중하여도 완전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 춘추의 뜻입니다. 하물며 당신이 오늘 몸을 의탁하는 자는 위험하고 혼란스런 나라에 있고, 받는 것은 거짓된 명령뿐인데, 만일 그들과 왕성하게 무리를 만들고 당신의 부친을 보살피지 않는 이상 효(孝)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선조가 살았던 조정을 잊어버리고, 정당하지 않은 간사한 질책에 안주하고 있는 이상 충(忠)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충과 효를 함께 무시하는 것은 지(智)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또 당신은 이전에 조공에게 예를 갖고 초빙되었습니다. 대체로 동족 사람을 가까이 하고 자기를 낳아 준 부모를 소원히 하고, 반란의 거주지를 안이라 하고 왕실을 밖이라 하면, 바르지 못한 봉록을 생각하고 지기를 배반하고, 행복을 멀리하고 위험과 멸망을 가까이하며, 명백한 도의를 버리고 커다란 부끄러움을 받으니, 또한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을 바꾸어, 황제를 받들고 부모를 봉양하며 조공에게 몸을 의탁한다면, 충효의 도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고 명예는 빛날 것입니다. 응당 깊이 생각하여 빨리 좋은 계책을 결단 내리십시오.

업성이 이미 평정되자, 태조는 동소를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삼았다. 나중에 원상(袁尙)이 북방의 오환족(烏丸) 답돈(蹋頓)에게 귀의하자 태조는 그를 정벌하고자 했다. 당시 군량을 운송하기 어려운 것을 걱정하여 평로(平盧)와 천주(泉州) 두 도랑을 파서 바다로부터 통하게 하였는데, 이것도 동소가 건의한 것이다. 태조는 상주하여 동소를 천추정후(千秋亭侯)에 책봉하도록 했으며, 사공군좨주(司空軍祭酒)로 전임시켰다.

나중에 동소가 건의했다.

“마땅히 옛 제도를 고쳐서 다섯 등급의 작위제로를 부활시켜 봉해야 합니다.”

태조가 말했다.

“다섯 등급의 작위 제도를 설치한 사람은 성인이오. 게다가 나처럼 다른 사람의 신하된 자에 의해서 정해질 수는 없으니, 내가 어찌 그 일을 감당하겠소?”

동소가 말했다.

“예로부터 다른 사람의 신하된 자가 세상을 바로잡는 데 있어서, 오늘과 같은 공적은 없었습니다. 오늘과 같은 공이 있는데도, 오랫동안 다른 사람의 신하된 자의 위세에 머물러 있은 적은 없었습니다. 지금 명공께서는 덕행이 부족함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습니다만, 명예와 절개를 보존하는데 기꺼이 하여 큰 잘못이 없었으며, 덕망은 이윤(伊尹 : 은나라의 명 재상)과 주공(周公 : 주나라의 명 재상)보다도 더 아름다우니, 이는 지극한 덕이 군주에 다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상(商)나라의 태갑(太甲)이나 주(周)나라의 성왕(成王)과 같은 고대의 성주(聖主) 조차도 반드시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민중을 교화시키는 어려움은 은주(殷周)시대에 비해서도 심합니다. 명공께서는 대신(大臣)의 위세에 처해 있지만, 공적이 크므로 사람들로 하여금 명공께서 큰일을 한다는 점에 대해 의심을 하지 않을 것이니, 진실로 제왕(帝王)이 되는 문제를 신중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명공께서 비록 위세와 덕망을 떨치고, 법제(法制)와 권술(權術)을 밝히셨다고 하더라도, 그 기반을 정하지 않으시고 만세의 자손을 고려하는 것은 지극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기반을 정하는 근본은 토지와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명공께서는 이 두 점에 입각하여 점차 세워 나가야 하며, 번국(蕃國)으로부터 호위 받아야 합니다. 명공의 충성과 절개는 이삭처럼 드러나고 하늘로부터 받은 위엄이 얼굴에 있으니, 후한의 경흡(耿翕)이 광무제에게 침상 곁에서 한 말과, 전국시대의 주영(朱英)이 초나라의 춘갑군(春甲君)에 대해 ‘무망(無妄)’의 논의로써 명공에게 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 아닙니다. 저 동소는 명공의 과분한 은총을 받고 있어서 감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주]

[주]《헌제춘추(獻帝春秋)》에는 동소가 조조의 권력이 한 왕실의 권력을 능가하는 것에 반대를 한 순욱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가 보냈다.

“옛 날에 주공단(周公旦)과 여상(呂尙)은 희씨(姬氏)의 전성기를 열었습니다. 이 두 성인의 대업이란 어린 성왕을 곁에서 보좌한 공을 가리킵니다. 공훈이 그와 같았으므로 높은 작위를 받고 넓은 땅을 받아 거처를 정한 것도 당연합니다. 나중에 전단(田單)은 강한 제의 무리들을 이끌고 약한 연에게 원한을 갚고 70여개의 성을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양왕을 다시 맞이했기 때문에 상은 받고 거기에 더하여 동쪽에 있는 액읍(掖邑)을 봉지로 받았으며, 서쪽에 있는 치상(菑上)을 사냥터로 받았습니다. 옛날의 녹공(祿功)은 이처럼 후했습니다. 지금 조공은 해내가 뒤집어지고 종묘가 불에 탄 상황에서 갑주를 몸에 걸치고 사방을 돌아다니며 정벌을 하느라고 바람으로 머리를 빗질하고 비로 머리를 감으며 갖은 고생으로 지난 30년 동안 여러 흉적들을 베어 버렸습니다. 이는 백성들에게 해악이 되는 것들을 없애고, 한왕실을 다시 존속시켜 유씨가 제사를 받들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지금 (주공단, 여상, 전단과 같은) 지난 날 여러 분들과 비교해도 태산과 작은 흙덩이와 다름이 없는데 어찌 같다고 말씀을 하십니까? 지금 여러 장수들과 공신들을 하나의 현을 차지하는 제후로 봉하고자 하니 이는 천하가 바라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나중에 태조가 마침내 위공(魏公)과 위왕(魏王)의 칭호를 받은 것은 모두 동소가 처음으로 제시한 데서 비롯된다.

관우가 조인(曹仁)을 번성에서 포위하자, 손권은 사자를 파견하여 이런 말을 하였다.

“저는 군대를 서쪽 위로 보내어 몰래 관우를 습격하려고 합니다. 강릉(江陵)과 공안(公安)의 요충지는 겹겹이 이어져 있으므로, 관우는 두 성을 잃게 되면 반드시 멀리 달아나게 될 것이고, 번성의 귀군(貴軍)의 포위는 구원하지 않아도 스스로 해결될 것입니다. 이 일은 비밀을 구하니 장군께서는 누설하여 관우가 방비를 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태조가 이 말을 듣고 모든 신하들에게 물어보니, 신하들은 한결같이 그것을 비밀에 부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그러나 동소는 말했다.

“군사(軍事)는 임기응변을 숭상하므로 일을 처리함에 있어 합리적이고 마땅함을 기약해야 합니다. 마땅히 손권에게는 비밀로써 호응하면서 속으로는 그것을 누설해야 합니다. 관우가 손권이 서쪽으로 온다는 것을 듣고 군사를 돌려 스스로를 보호하게 된다면, 번성의 포위는 속히 제거 될 것이므로, 우리 군은 곧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오나라와 촉나라 두 적이 서로 대치하게 하여 앉아서 피폐함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만일 비밀로 하고 누설하지 않으면 손권으로 하여금 뜻을 얻게 하는 것이 되니, 계책 중에서 상책(上策)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포위망 속에 있는 장수와 관리들은 구원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매일 같이 곡식의 양을 계산하면서 두려워할 것이며, 만일 다른 뜻을 품기라도 하면, 위험스럽게 되는 것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이 일은 누설하는 것이 이롭습니다. 게다가 관우는 사람됨이 비교적 정직하여, 스스로 두 성을 믿고 굳게 지킬 것이며, 재빨리 퇴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태조가 말했다.

“좋소.”

즉시 칙령을 내려 번성을 구할 장수 서황(徐皇)에게 손권의 서신을 포위된 번성과 관우가 주둔해 있는 가운데로 쏘게 하였다. 포위된 조군(曹軍)은 이 소식을 듣고는 사기가 백배가 되었다. 관우는 과연 마음속으로 주저주저하면서 퇴각하지 않았다. 손권의 군대가 도착하여 그 두 성을 취해 버리자, 관우는 곧 산산이 무너졌다.

문제(조비)가 위왕에 즉위하자, 동소를 장작대장(將作大匠)에 임명하였다. 조비가 천자의 자리에 올랐을 때, 대홍려(大鴻臚)로 옮겼으며, 우향후(右鄕侯)에 승진되어 봉해졌다.

황초 2년(221)에는 식읍을 8백 호 분할 받았으며, 동소의 동생 동방(董訪)에게 관내후의 작위가 봉해졌고 동소는 시중으로 옮기게 됐다.

황초 3년(222)에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조휴(曹休)가 장강에 이르러 군대를 동포구(洞逋口)에 주둔시키고 스스로 표를 올려 말했다.

- 신은 원하건대, 정예 군사를 이끌고 강남으로 힘차게 달려가 적으로부터 물자를 빼앗으면 일은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은 신(臣)이 없다면 반드시 염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문제(조비)는 조휴가 즉시 강을 건널까 두려워하여 역마(驛馬)를 보내어 조칙을 내려 그만두게 했다. 그 당시 동소는 문제의 곁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는데, 이 일로 해서 말했다.

“제가 보건대, 폐하께서 근심하는 기색이 있는 것이 단지 조휴가 강을 건너려는 것 때문입니까? 지금 강을 건너는 것은 인정(人情)으로 보아도 어려운 것입니다. 조휴가 이런 뜻을 가지고 있으나 형국은 단독으로 할 수 없으며, 마땅히 여러 장수들을 데리고 가야 합니다. 장패 등은 이미 풍부하고 고귀하므로 건너게 해도 다시 다른 희망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만, 그들은 천수(天壽)를 마치고, 봉록과 관직을 고수하려고만 할 뿐인데, 어찌 위험을 틈타 스스로를 사지(死地)에 던짐으로써 불행을 맞이하려 하겠습니까? 만일 장패 등이 나가지 않으려 하면, 조휴의 뜻은 스스로 무너질 것입니다. 신은 폐하께서 그들에게 강을 건너게 하는 조칙을 내리셔도 그들이 반드시 주저하면서 즉시 명에 따르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이 후부터 며칠이 지나지 않아 폭풍이 적의 배에 불어 닥쳐 모두 조휴 등의 군영 곁으로 흘러왔다. 조군(曹軍)은 머리를 베어 버리고 살아 있는 자들은 사로잡았으므로 적군은 산산이 붕괴되었다. 문제는 군사들에게 조서를 내려 급히 가을 건너게 했다. 군대가 이때 아직 강을 건너 나아가지 않았는데, 적군의 구원병과 배가 도착했다.

문제가 완성(宛城)에 행차하였을 때,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 하후상(夏侯尙) 등이 강릉(江陵)을 공격하고 있었는데 함락할 수 없었다. 그 당시 강물은 얕고 좁았는데, 하후상은 배를 이용하여 보병과 기병을 강 속의 삼각주에 들여보내 주둔시키려 하였고, 부교(浮橋)를 만들어 남북으로 왕래하게 하고자 했다. 논의하는 자들 대부분이 이렇게 하면 성은 반드시 공략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소는 상소를 올려 말했다.

- 무황제(태조)께서는 지혜와 용기가 보통 사람을 뛰어넘었으나, 용병할 때에는 항상 적을 두려워하고, 감히 이처럼 적을 가볍게 보지 않았습니다. 무릇 용병함에 있어서 진격을 좋아하고 후퇴를 싫어하는 것은 항상 당연한 이치입니다. 평평한 땅에는 험난한 것이 없지만, 용병에는 어려움과 곤란이 따르게 됩니다. 설령 마땅히 깊이 들어갔다 해도, 돌아오는 길은 비교적 편리해야 합니다. 병가(兵家)에서는 전진도 있고 후퇴도 있으니, 이는 자기 뜻대로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 군대가 삼각주에 주둔하는 것은 주위가 모두 물로 둘러싸여 있으므로 가장 깊은 곳에 들어가는 것이고, 부교로써 건너려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며, 한 길로 가려는 것은 지극히 협소한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병사에서 기피하는 바이거늘, 지금 오히려 이 일을 하려고 합니다. 만일 적군이 부교를 빈번하게 공격하고, 한 번 싸웠는데 잘못하여 누실(漏失)이 생기게 되면, 삼각주에 있는 정예 병사들은 위나라의 소유가 아니고 장차 태도를 바꾸고 오나라 군대가 될 것입니다. 신은 사사로이 이 점을 근심하여 잠자는 것과 먹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는데, 논의하는 자들은 기뻐하면서 걱정할 생각조차 하지 않으니 어찌 미혹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강물이 불어나고 있는데 하루아침에 폭발적으로 불어나면, 어떤 방법으로 제어할 수 있겠습니까? 나아가서 적군을 쳐부술 수 없다면 오히려 스스로를 안전하게 해야 합니다. 어찌하여 위험을 틈타면서 두렵다고 생각하지 아니합니까? 일이 위급해지려고 하니 폐하께서는 이 점을 통찰하십시오! - 

문제는 동소의 말에 깨달은 바가 있어 즉시 하후상 등에게 조칙을 내려 삼각주에 급히 빠져 나오게 했다. 때마침 적병들은 두 갈래로 앞으로 전진해 오는데, 관병(官兵)이 길 하나로부터 퇴각하여 나오는 것은 한꺼번에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장군 석건(石建)과 고천(高遷)만이 가까스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군대가 빠져 나온 지 열흘이 되었는데, 강물이 갑자기 불어나자, 문제가 말했다.

“그대가 이 일을 논하였는데, 어찌 그다지도 옳은가! 설령 장량(張良)과 진평(陳平)으로 하여금 이 일을 감당하게 했더라도 어찌 다시 더 할 수 있으리오.”

황초 5년(224), 동소는 옮겨서 성도향후(成都鄕侯)로 봉해졌고, 태상(太常)에 제수되었다. 이 해, 광록대부와 급시중으로 옮겼다. 문제를 따라 동쪽 정벌에 나섰다가 7년(226)에 돌아와 태복(太僕)에 제수되었다. 명제가 즉위하자 승진되어 악평후(樂平侯)라는 작위를 받았고 식읍 1천 호를 받았으며 위위(衛尉)로 자리를 옮겼다. 식읍 중에서 1백 호를 자식 한 명에게 나누어 주고 관내후에 책봉했다.

태화(太和) 4년(230)에 사도(司徒)의 일을 대행하였고, 태화 6년(232)에 사도에 제수되었다. 동소는 상소하여 말류(末流)의 폐해에 대해 말했다.

- 무릇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은 돈후하고 소박하고 충성스럽고 신의 있는 선비를 숭상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음이 없으며, 거짓되고 진실 되지 못한 사람을 가장 싫어하는 것은 그들이 예교를 훼손시키고 통치를 혼란스럽게 하고 풍속을 어그러지게 하고 교화를 손상시키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 중에서 가까이로는 위풍(魏諷)이 건안 말기에 처형되었으며, 조위(曹偉)가 황초의 초기에 참혹하게 처형 되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건대, 앞뒤로 전해 내려온 성현의 조칙들은 겉을 꾸미고 내용이 없는 것을 매우 증오하였으며, 사악한 도당을 산산이 부수려고 하였으니 항상 이 점에 대해 이(齒)를 갈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법을 집행하는 관리들은 모두 그 권세를 두려워하여 그들의 죄과(罪過)를 지적해 끄집어내지 못하였으므로 풍속을 훼손시키고 무너뜨리고 음욕(淫慾)에 스며들게 하는 것이 점점 심해졌던 것입니다. 

신이 사사로이 살펴보건대, 지금 젊은 사람들은 다시 학문을 근본으로 삼으려 하지 않고, 태도를 바꾸어 서로 교유하는 것을 전업으로 삼으려 하고 있습니다. 국가의 인물을 추천함에 있어서도 효도ㆍ공손함ㆍ청렴ㆍ수양을 우선하지 않고, 권세에 따라 놀고 이익이나 추구하는 사람을 우선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도당을 만들고 무리를 연합하여 서로 칭찬하고 감탄하면서 훼방하고 비난으로써 형벌과 살육을 삼고 우리들이 하는 일을 찬미하여 작위와 상으로 삼으며, 자신에게 아부하는 자에게는 그를 찬미하는 말을 가득히 하며, 자신에게 아부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하자와 틈을 만듭니다. 그들은 서로 ‘지금 세상에서 헤아리지 못하는 것을 무엇 때문에 걱정하는가? 단지 사람의 도리를 구하는 것을 성실하게 하지 않고, 그것을 펼치는 것이 넓지 않을 뿐이다. 또 그가 알지 못하는 것을 무엇 때문에 걱정하는가. 단지 마땅히 그것을 삼키되 약(藥)으로써 삼고 부드럽게 조정하면 될 뿐인데’라고 말합니다. 

또한 들리는 바에 의하면, 어떤 사람은 그의 노비와 식객을 ‘재직가인(在職家人)’이라고 부르며 함부로 나가고 들어오며, 금당(禁堂)이나 깊숙한 곳까지 왕래하며, 서찰이나 상소문(上疏文)으로 교류하여 통하고, 서로 방문하여 안부를 묻습니다. 이와 같은 모든 일은 모두 법에서 다루지 않는 바이며, 형벌로서도 사면할 수 없는 바이니, 비록 그 해에 위풍(魏諷)과 조위(曹偉)의 죄과를 저질렀을지라도 그들에게는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 

명제는 적절한 조칙을 내렸고, 말류의 우두머리인 제갈탄(諸葛誕)과 등양(鄧颺) 등을 배척하여 피면시켰다. 동소는 나이 여든 한 살에 세상을 떠났으며 시호를 정후(定侯)라 하였고, 아들 동위(董胃)가 뒤를 이었다. 동위는 군수와 구경(九卿)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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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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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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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09
16:27:20
(*.104.141.18)
주석의 위치가 약간 다른 것을 빼면 모든 것이 다 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백은 재원님이 작업하시기로 했으니 금방 고쳐지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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