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劉放)은 자가 자기(子夔)이며, 탁군(涿郡) 사람으로서 한나라 광양순왕(廣陽順王)의 아들인 서향후(西鄕侯) 굉(宏)의 후예이다.



전대소錢大昭가 말하길 : 《한서漢書》 왕자후표에 서향후 용容이 광양경왕廣陽頃王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니, 마땅히 ('순順'을) '경頃'으로 고치고 굉宏은 '용容'으로 고쳐야 한다. 또, 유방의 아들이 유굉이며 서향후니, 비록 (유방의 선조 유굉이) 먼 조상이라 하나 (자신의 아들에게) 같은 이름을 쓰지 않는다. 곧 (유방의 조상 유굉은) '용'을 잘못 쓴 것이다.
노필(盧弼)이 살펴보건대 본전의 '아들 굉이 이었다'는 것은 손자孫資의 아들이지, 유방의 아들이 아니다. 전씨(錢氏 ; 전대소)가 글을 제대로 읽지 않은 것이다.


군의 주부(主簿)를 역임했으며, 효렴에 천거되었다. 세상의 큰 혼란을 만났는데, 당시 어양(漁陽)의 왕송(王松)이 유방의 영토를 검거하고 있었으므로 유방은 왕송에게 가서 몸을 의탁했다. 태조가 기주를 차지하였을 때, 유방은 왕송을 설득하였다.

“지난번에 동탁이 반역을 일으키자, 영웅이 모두 일어나 관군을 저지하고 명령을 제멋대로 내리면서 각자 스스로 세력을 넓혀 나가려고 했소. 오직 조공(曹公)만이 위험을 구하고 혼란을 수습하고, 천자를 보좌하고 추대하여 왕명을 받들고 죄있는 자를 벌하여 이르는 곳마다 반드시 이길 수 있었소. 이원(二袁 : 원소, 원술)의 강성함으로써 수비를 맡았더라도, 원술은 회남(淮南)에서 얼음조각처럼 와해되었고, 저항을 말한다면, 원소는 관도의 싸움에서 크게 패하였소. 조공은 승리를 틈타 석권하였고, 장차 하삭(河朔 : 하북지방)을 소탕하려 하는데, 그의 위엄과 형벌은 이미 합치되므로 성패의 대세(大勢)는 알 수 있는 것이오. 따라서 그가 있는 곳에 빨리 도착하는 자는 점차 복을 누리게 되겠지만, 나중에 항복하는 자는 먼저 멸망하게 될 것이오. 이것은 하루가 끝나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이 달려가야 할 시기인 것이오. 옛날에 경포(鯨布)는 남면(南面)의 고귀한 자리를 버리고 검에 의지하여 한나라에 귀의했지만, 이는 천하가 일어나고 망하는 이치를 진실로 알았기 때문에 물러나고 나가는 구분을 살폈던 것이오. 장군께서는 마땅히 조공에게 몸을 던지고 성명(性命)을 의탁하시어 스스로 그와 갚은 교분을 맺으시오.”

왕송은 그렇게 하기로 했다. 때마침 태조가 남피(南陂)에서 원담을 토벌하고 있었으므로 편지를 보내어 왕송을 불러들이려 하자, 왕송은 옹노(雍奴)ㆍ천주(泉州)ㆍ안차(安次)를 바치고 그에게 귀의하였다. 유방은 왕송을 위하여 태조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는데, 그 문장이 매우 화려하였다. 태조는 그를 좋아하였으며, 또 그 말을 들었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결국 유방을 초빙하였다.
건안 10년(205), 유방이 왕송과 함께 태조의 군영에 도착하였다. 태조는 크게 기뻐하며 유방에게 말했다.

“옛날(후한 초기)에 반표(班彪)는 두융(竇融)에 의탁하여 하서(河西 : 두융의 관할 지역)를 광무제에게 바치는 공적을 세웠으니, 지금 그대의 공적은 반표의 그것과 얼마나 서로 비슷하오!”

그리고는 유방을 참사공군사(參司空軍事)에 임명하고, 주부기실(主簿記室)을 역임하게 하였고, 밖으로 내보내서 합양(合陽)과 달후(撻詡) 그리고 찬(贊)의 현령이 되게 하였다.

위나라가 이미 건국되자, 유방은 태원(太原)의 손자(孫資)와 함께 비서랑이 되었다. 이보다 앞서 손자 역시 현령(縣令)과 참승상군사(參丞相軍事)를 역임하였다. 



손자별전(資別傳)에서 이르길: 손자(孫資)의 자는 언룡(彦龍)이며, 어려서부터 재능이 있었다. 세 살 때, 양친을 잃어 형수에게 양육됐다. 태학에서 공부하고 경서의 주석을 많이 읽었으며, 같은 군의 왕윤(王允: 후한 말의 재상)의 눈에 띄었다.


조조가 사공이 되었을 때 그를 초빙하려 했으나, 마침 형이 고향 사람에게 피살되어 손에 칼을 쥐고 복수하고 가족들을 이끌고 하동(河東)으로 피하였다. 그러나 친구 가규(賈逵)가 손자에게 말했다.


“그대는 발군의 재주를 가지고 있어 옛 나라(한나라)를 기울여 전복할 만하며, 주장(主將)이 은근히 천리 밖에서 목을 길게 하고 기다리고 있으니, 이는 옛 성현의 삶의 방식을 존중하는 것이오.”


손자는 이 말에 느끼는 바가 있어 나가기로 했다. 도착하여 군의 공조에 임명되었고 하동의 계리(計吏)에 추천되어 허도로 나갔다. 상서령 순욱이 손자를 만나 감탄하며 말했다.


“북방의 주는 전쟁의 상황이 오래되어 그곳의 현명하고 지혜 있는 사람들이 모두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다시 손계군(孫計君)을 만났으니!”


그리고는 상주하여 상서랑으로 삼아 머물게 하려고 했으나 집안의 난리를 핑계 삼아 하동으로 돌아왔다.



문제(文帝 : 조비)가 즉위하자, 유방과 손자는 전임되어 상서성(尙書省) 좌우(左右) 승이 되었다. 몇 개월이 지나 유방은 현령(令)으로 자리를 옮겼다.

황초(黃初) 초기에 비서(秘書)를 바꿔 중서(中書)로 삼았는데, 유방을 중서감(中書監)에 손자를 중서령(中書令)에 임명하고 각자 급사중(給事中)의 작위를 더 주었고, 유방에게 관내후(關內侯)의 작위를 하사하고, 손자에게는 관중후(關中侯)의 작위를 주어 정치의 기밀을 관장하도록 했다.

3년(222)에 유방은 위수정후(魏壽亭侯)라는 작위로 승진되었고, 손자는 관내후(關內侯)의 작위로 승진되었다. 명제(明帝)가 즉위하자 두 사람은 더욱 총애와 신임을 받았으며 동시에 산기상시(散騎常侍)가 더해졌고, 승진되어 유방은 작위가 서향후(西鄕侯)가 되었고 손자는 악양정후(樂陽亭侯)가 되었다.


[손자별전] 왈, 제갈량이 출병하여 남정(南鄭)에 머물 때 의논하는 자들이 대병을 일으켜 토벌해야 한다고 했고 황제의 뜻도 그러했다. 이에 대해 손자(孫資)에게 묻자 손자가 대답했다.


“예전에 무황제(조조)께서 남정의 장로를 정벌할 때 양평의 전투에서 위기를 겪은 후에야 이길 수 있었습니다. 또한 친히 가셔서 하후연군을 구출할 때 여러 차례 말씀하시길, ‘남정은 천옥(天獄-험악한 지형)이고 야곡도는 5백리에 걸친 돌무덤이다’라 하셨으니 이는 그곳의 깊고 험함을 말한 것이며 하후연군이 무사히 빠져나온 것을 기뻐한 것입니다.


또한 무황제께서 용병에 걸출하셨으나 촉한의 역적이 산과 바위틈에 서식하고 동오의 오랑캐들이 강호에 숨어사는 것을 통찰하셨기에 이들을 피하여, 장병들에게 전력을 다하라 질책하지 않고 한때의 분노로 다투지 않았습니다. 이는 실로 이른바 견승이전(見勝而戰-승산이 있을 때 싸운다)하고 지난이퇴(知難而退-어렵다는 것을 알면 물러선다)한 것입니다.


지금 남정으로 진군해서 제갈량을 토벌한다면 길이 험해 정병의 조달과 군량 운반, 남방 4개 주에서 수적에 대한 방비를 위해 무릇 15-6만의 군사가 필요할 것이고, 막상 닥치면 그 외에 또다시 군을 일으켜야 할 것입니다. 천하를 소란스럽게 동요시키면서 막대한 비용을 쓰게 되니 이는 실로 폐하께서 깊이 살피셔야 할 일입니다. (남정을 점거한다 하더라도) 지키는 싸움은 그 노력이 3배가 더 들 것입니다.


다만 지금의 병력으로 대장을 나누어 보내 여러 험요지를 지키게 하면 그 위세로도 족히 변경의 도적들을 뒤흔들고 변경을 진정시켜 장병들은 편히 쉬고 백성이 무사할 수 있습니다. 수 년이 지나면 중국은 날로 번성하고 필시 오와 촉 두 오랑캐들은 저절로 피폐해질 것입니다.”


황제가 이 의견을 좇아 토벌할 생각을 거두었다.


그 당시 오나라 사람 팽기(彭綺)가 또 강남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의견을 논의하는 자들은 이것을 이용하여 오를 토벌하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했다. 제(帝)가 손자에게 질문하자 대답하기를,


“파양(鄱陽)에 사는 종족들은 앞뒤로 자주 의병을 일으켰지만 그 무리들은 약하고 지모도 얕아 되돌아서 번번이 흩어졌습니다. 옛날 문황제께서는 일찍이 비밀리에 도적들의 형세를 논평하고 동포(洞浦)에서 만명을 죽이고 배 천여 척을 획득하였는데, 수일 사이에 배를 부리는 사람들이 다시 모여들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강릉이 포위되어 한 달이 지났으나 손권이 1천 몇 백 명을 가지고 동쪽 문을 지키니 그들의 땅이 붕괴하거나 흩어지는 바가 없었습니다. 이는 그들의 법률이 엄하고 상하 사람들이 서로 유대를 갖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이러한 사실로 보건대 팽기가 아직 손권의 뱃속에 들어 있는 커다란 질병이 될 수는 없을지 걱정됩니다.”


팽기는 과연 패하여 멸망했다.


태화(太和) 말년에 오(吳)나라는 장수 주하(周賀)를 바닷길로 보내 요동(遼東) 땅에 이르게 하고 공손연(公孫淵)을 불러 설득하게 했다. 명제는 그 소식을 듣고 중간에서 맞이하여 토벌하려고 생각했는데, 신하들의 의견은 대부분 그렇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단지 손자만이 계책을 결행하자고 했는데, 과감하게 주하를 크게 쳐부수니 손자는 관직이 좌향후(左鄕侯)로 승진하였다.


위씨춘추에서 이르길: 오환교위(烏丸校尉) 전예(田豫)가 서쪽 선비족 설귀니(泄歸尼) 등을 지휘하여 국경을 나가고, 가비능(軻比能)과 지울축건(智鬱築鞬)을 토벌하여 격파하고, 돌아와 마읍(馬邑)의 옛 성에 이르렀으므로, 가비능과 기병 3만 명을 지휘하여 전예를 포위했다. 황제는 그 이야기를 듣고,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으므로, 중서성으로 나가 이 일을 감(監: 유방)과 령(令: 손자)에게 물었다.중서령(中書令) 손자는 대답하기를


“상곡(上谷)태수 염지(閻志)는 염유(閻柔)의 동생인데, 평소부터 신뢰를 얻었습니다. 그에게 명령하여 소칙을 받들어 빨리 가비능을 설득하도록 한다면, 군사를 수고롭게 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포위를 풀도록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했다. 제(帝)는 그것을 따랐는데, 가비능은 과연 전예를 풀어주고 돌아갔다.


유방은 문서와 격문을 쓰는 데 뛰어나, 삼조(三祖 : 무제, 문제, 명제)가 조칙을 내려 항복을 설득하는 것은 대부분 유방에 의해 씌어졌다. 청룡(靑龍) 초기에 손권(孫權)은 제갈양(諸葛亮)과 동맹을 맺어 함께 군대를 일으켜 국경을 침범하고자 하였다. 변방을 지키던 척후병이 손권의 편지를 입수하여 유방이 그 문사를 바꾸고, 왕왕 본문을 바꾸어 새로운 글로 편찬하여 손권이 정동장군(征東將軍) 만총(滿寵)에게 주는 것으로 했다. 편지의 내용은 손권이 위나라에 귀의하려고 하는 것이었으며, 이 편지를 잘 봉합하여 제갈양에게 보여주도록 했다. 제갈양은 편지를 읽어 본 후에 그 편지를 말을 타고 있는 오나라 대장 보즐(步즐) 등에게 주자, 보즐 등은 그 편지를 손권에게 보여주었다. 손권은 제갈양이 스스로를 의심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제갈양에게 깊이 있는 해석과 설명을 했다.

이 해, 유방과 손자 두 사람에게는 시중(侍中)과 광록대부(光祿大夫)가 더해졌다.


손자별전에서 이르길: 이 무렵 손권과 제갈양은 극적(劇賊)이라고 칭해졌으며, 군사를 인솔하여 출전하지는 않는 해가 없었다. 제(帝)는 군신들을 모아서 안으로는 침략을 방어하는 책략을 만들고, 밖으로는 병사를 내어 승리할 계획을 세웠는데, 손자가 모두 그것을 관장했다. 그러나 자신이 심복으로 취급되고 있음을 생각하고, 항상 제(帝)에게 공을 양보하며 말했다.


“군중을 일으키고, 큰 사업을 행하는 경우, 신하들과 협력할 수 있습니다. 방침을 나타내시고 광범위한 의견을 구하십시오.”


조정 신하들의 회의가 열리자, 손자는 상주하여 그 시비를 판단할 때에는 그 중 좋은 의견을 선택하여 그것을 추진하여 완성시키고, 끝까지 자신의 덕을 나타내지 않았다. 만일 사람들이 자신에게 책임추궁의 발언이나 감정적인 발언을 할 경우에는 마음을 풀도록 간청하고 참언의 실마리를 막았다.


정동장군 만총(萬寵)과 양주자사 서막(徐邈)같은 자는 참언과 비난을 받았지만, 손자는 제에게 그들의 평소 품행을 진술하여 의심을 품지 않게 했다. 만총과 서막이 그 훈공과 명성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손자의 힘이다. 같은 마을 사람인 사공연(司空掾) 전예(田豫), 양상(梁相: 양국의 상)이었던떤 종염(宗豔)은 모두 손자를 질투하여 공격하였으며, 양풍(楊豐)이 전예 등에게 의탁하고 있을 때, 손자에 대해 갖은 악평을 하여 적대관계는 더욱 심해졌다. 손자는 침묵하고 말하지 않았으므로 마음속에 한을 품게 되었다. 전예 등은 부끄러워하면서 오랜 유감을 풀기 위해 혼인 관계를 맺기를 원했다. 손자가 그에게 말하기를,


“나에게는 원한이 없는데, 무엇을 없애겠소. 이것은 경이 스스로 속박하는 것이고, 경이 스스로 잘 생각한 것뿐이오.”


라고 했다. 그리고 맏아들 손굉(孫宏)을 그의 딸과 결혼시켰다. 높은 지위에 있었지만 전예는 늙고 병들어 집에 있었다. 손자는 그를 매우 특별하게 대우하였으며, 또 그의 아들을 본적의 군으로 불러 효렴으로 삼았다. 한편 양풍(楊豐)의 아들이 후에 상방(尙方)의 관리가 되었는데, 제(帝)가 직책상의 일로 그를 질책하고 그를 법에 따라 처단하려고 하자, 손자가 간청하여 그를 도왔다. 손자가 옛날의 나쁜 일을 생각하지 않음은 이과 같았다.

경초(景初) 2년(238), 요동(遼東)이 평정되었으며, 계획에 참가한 공로로 해서 각자 작위가 승진되어 향리의 현을 식읍으로 받았으며, 유방은 방성후(方城侯)가 되었고 손자는 중도후(中都侯)가 되었다.

이 해, 명제는 병이 위중하여 연왕(燕王) 조우(曹宇)를 대장군(大將軍)으로 삼고, 영군장군(領軍將軍) 하후헌(夏侯獻), 무위장군(武衛將軍) 조상(曹爽), 둔기교위(屯騎校尉) 태조(曹肇), 효기장군(驍騎將軍) 진랑(秦郞)이 함께 정치를 보좌하도록 하고자 했다. 조우는 성품이 공손하고 어질어 성심성의껏 고사하였다. 명제가 유방과 손자를 불러 누워있는 방으로 들어오게 하여 물었다.

“연왕(燕王)이 정말 무엇하려고 하는가?”

유방과 손자가 대답했다.

“연왕은 실제로 자신이 대임(大任)을 맡을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명제가 말했다.

“조상이 조우를 대신할 수 없겠소?”

유방과 손자는 조상이 정치를 보좌하는 것을 찬성하면서 또한 태위(太尉) 사마선왕(司馬宣王)를 빨리 불러서 황실의 기강을 세워야 한다고 깊이 있게 진술했다. 명제는 이들의 말을 받아들이고, 즉시 황색의 종이를 유방에게 주어 조칙을 작성하도록 했다. 유방과 손자가 이미 나왔는데, 명제는 생각이 바뀌어 사마선왕으로 하여금 오지 말라는 조칙을 다시 내렸다. 잠시 후에 명제가 유방과 손자를 불러 말했다.

“나 스스로 태위를 부르려 했으나, 태조(曹肇) 등이 오히려 나로 하여금 그를 저지하도록 하니 하마터면 나의 일이 실패할 뻔했소!”

따라서 조칙을 다시 작성하도록 명령하고, 명제는 단독으로 조상을 불러 유방과 손자와 함께 조명(詔命)을 받도록 하였다. 따라서 조우(宇)ㆍ하후현(獻)ㆍ태조(肇)ㆍ진랑(朗) 등을 면직시켰다. 얼마 후에 태위(太尉) 사마선왕이 도착하고, 명제의 침상에 올라가 조명을 받고 난 후에 명제는 붕어했다.


세어에서 이르길: 유방(劉放)과 손자(孫資)가 오랫동안 전기(典機)의 임무를 담당하자, 하후헌(夏侯獻)과 조조(曹肇)는 내심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궁전 안에 계서수(鷄棲樹)라는 나무가 있었는데, 두 사람은


“이것도 오래되었습니다. 이것들도 바꿔버릴 수는 없을까요?”


라고 말하며 유방과 손자를 가리켰다. 유방과 손자는 두려웠으므로 곧 명제(조예)에게 선왕(宣王: 사마의)을 부를 것을 권하였다. 황제는 자필로 조서를 써서 벽사(辟邪)를 시켜 선왕에게 주도록 했다.


선왕은 급(汲)에 있었고, 하후헌(夏侯獻) 등이 먼저 선수를 쳐서 지관(軹關) 서쪽을 통하여 장안으로 돌아올 것을 선왕에게 명했다. 벽사 또한 (황제의 친필 조서를 가지고) 도착했다. 선왕은 사변이 일어났다는 의혹을 갖고, 벽사를 불러 상세하게 심문했다. 그리고 추봉거(追鋒車)를 타고 수도까지 달려왔다. 제는 유방과 손자에게


“누가 태위로 적임자인가?”


라고 물었다. 유방은


“조상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제는


“그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라고 했다. 조상은 측근에 있었는데, 땀만 흘리고 대답하지 못했다. 유방이 그의 발을 밟자,


“신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라를 지키겠습니다.”


라고 했다.


조조의 동생 조찬(曹纂)은 이때 대장군의 사마(司馬)로 있었다. 천자는 더이상 연왕 조우에 뜻을 두지 않았다. 때마침 조우와 함께 조조가 궁 밖으로 나가자 조찬이 형을 보고 놀라 말했다.


“주상이 몹시 불안한 상태인데 어찌하여 두 분이 다함께 밖으로 나오십니까? 마땅히 궁 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미 날이 저물었으므로, 유방과 손자가 칙명을 내려 궁궐을 닫고, 조조 등을 못 들어오게 하고, 연왕 조우를 면직시켰다. 조조가 다음 날 아침 궁문에 이르렀으나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조조는 일이 실패했음을 알았다. 두려운 생각이 든 조조는 제 발로 정위(延尉)를 찾아가 큰일을 처리하는데 잘못이 있었으므로 처벌해 달라고 했다. 하후헌은 아직 궁 안에 머물러 있었다. 그가 조예를 찾아가 사태를 반전시켜 보려 하자 조예가 말했다. 황제는 하후헌에게,


“나는 벌써 사신을 보냈소. 나가시오”


라고 했다. 하후헌은 눈물을 흘리며 물러났고, 그도 역시 면직되었다.


案世語所云樹置先後,與本傳不同。資別傳曰:帝詔資曰:「吾年稍長,又歷觀書傳中,皆歎息無所不念。圖萬年後計,莫過使親人廣據職勢,兵任又重。今射聲校尉 缺,久欲得親人,誰可用者?」資曰:「陛下思深慮遠,誠非愚臣所及。書傳所載,皆聖聽所究,向使漢高不知平、勃能安劉氏,孝武不識金、霍付屬以事,殆不可 言!文皇帝始召曹真還時,親詔臣以重慮,及至晏駕,陛下即阼,猶有曹休外內之望,賴遭日月,御勒不傾,使各守分職,纖介不間。以此推之,親臣貴戚,雖當據 勢握兵,宜使輕重素定。若諸侯典兵,力均衡平,寵齊愛等,則不相為服;不相為服,則意有異同。今五營所領見兵,常不過數百,選授校尉,如其輩類,為有疇 匹。至於重大之任,能有所維綱者,宜以聖恩簡擇,如平、勃、金、霍、劉章等一二人,漸殊其威重,使相鎮固,於事為善。」帝曰:「然。如卿言,當為吾遠慮所 圖。今日可參平、勃,侔金、霍,雙劉章者,其誰哉?」資曰:「臣聞知人則哲,惟帝難之。唐虞之聖,凡所進用,明試以功。陳平初事漢祖,絳、灌等謗平有受金 盜嫂之罪。周勃以吹簫引彊,始事高祖,亦未知名也;高祖察其行跡,然後知可付以大事。霍光給事中二十餘年,小心謹慎,乃見親信。日磾夷狄,以至孝質直,特 見擢用,左右尚曰『妄得一胡兒而重貴之』。平、勃雖安漢嗣,其終,勃被反名,平劣自免於呂須之讒。上官桀、桑弘羊與霍光爭權,幾成禍亂。此誠知人之不易, 為臣之難也。又所簡擇,當得陛下所親,當得陛下所信,誠非愚臣之所能識別。」臣松之以為孫、劉于時號為專任,制斷機密,政事無不綜。資、放被託付之問,當 安危所斷,而更依違其對,無有適莫。受人親任,理豈得然?案本傳及諸書並云放、資稱贊曹爽,勸召宣王,魏室之亡,禍基於此。資之別傳,出自其家,欲以是言 掩其大失,然恐負國之玷,終莫能磨也。



제왕(齊王)이 즉위하자, 유방과 손자는 중대한 계획을 결정하는 데 참여하여 식읍이 3백 호 증가되었고, 유방은 이전 것과 합쳐 1천 1백호가 되었고, 손자는 1천 호가 되었다. 이와 별도로 두 사람의 사랑하는 아들 한 명을 정후(亭侯)에 봉하고, 두 번째로 사랑하는 아들은 기도위(騎都尉)에 두었는데, 그 나머지 아들도 모두 낭중(郎中)에 봉했다.

정시(正始) 원년(240), 또다시 유방에게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를, 손자에게 우광록대부(右光祿大夫)를 더해 주었으며 금인(金印)ㆍ자수(紫綬)ㆍ의장(儀仗)을 삼사(三司 : 재상대우)와 같게 했다.

6년(245)에 유방을 표기장군(驃騎將軍)으로, 손자는 위장군(衛將軍)으로 전임시켰지만, 중서성의 감(監)과 영(令)을 담당하는 면에 있어서는 이전과 다름이 없었다.

7년(246), 또 그들 두 사람의 아들을 한 명씩 정후(亭侯)로 봉했다. 이들은 나이가 많아 자리를 물려주고, 단지 매월 삭망(朔望) 이틀만 열후의 신분으로 위제(魏帝)를 뵈었는데, 특진(特進 : 삼공 다음가는 지위)으로 승진되었다.


손자별전에서 이르길: 대장군 조상은 정치를 독점하고, 옛날 제도를 대부분 바꾸려고 했다. 손자는 탄식하며 말했다.


“나는 대대로 은총을 받았으며, 게다가 위탁을 받았다. 지금이라도 현재의 정치를 도와 바로잡을 수 없다면 어찌 봉록을 받을 수 있으리오?”


그리고 병이 났다. 9년(248) 2월, 조서를 내렸다.


‘그대가 정치를 장악한 지 30여 년, 일을 경영하였고 훈공은 선제의 시대에 빛났다. 제위를 통괄하고 있는 것은 그대의 계책에 의지하고 있다. 이 때문에 먼저 은총을 증가시키고, 삼공과 똑같은 대우를 하고, 밖으로는 관리들을 통솔하게 하고, 안으로는 바른 발언을 기대하고 있다. 최근 연로함과 중병을 이유로 하여 인수를 반환했다. 앞뒤로 정중하게 요청하고, 그 말의 의미는 지극히 간절했다. 천자는 자연의 커다란 순서를 갖고 덕을 완성하고, 군자는 바른 사고를 갖고 인을 완성하는데, 말은 일을 중시하고, 그대의 뜻을 무시하겠다. 지금 그대가 고집을 부린다고 들었는데, 그대에게 백만 전을 주고, 광록훈 소부를 겸임하도록 하겠다. 그대가 사지에서 병을 다스리도록 칙서를 내리겠다. 그대는 약을 열심히 써서 정신과 기를 기르도록 하여 영원히 건강을 지키라. 그대의 집에 사인(舍人)과 관마(官馬)를 두어 매일 술과 안주를 더하여 식사를 지급하겠다.’


조상(曹爽)이 주살된 후에 다시 손자를 시중(侍中)으로 삼았으며, 중서령(中書令)의 관직을 담당하게 했다.

가평(嘉平) 2년(250)에 유방이 세상을 떠났으며, 경후(敬侯)라는 시호가 주어졌다. 아들 유정(劉正)이 뒤를 이었다.


臣松之案頭責子羽曰:士卿劉許字文生,正之弟也。與張華六人,並稱文辭可觀,意思詳序。晉惠帝世,許為越騎校尉。


손자는 오래지 않아 자리를 물러나 집으로 돌아갔는데, 집에서 표기장군(驃騎將軍)에 제수되었고 시중(侍中)으로 전임되었으며 특진(特進)에 들어서는 등 이전과 다름이 없었다.

가평 3년(251)에 손자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시호를 정후(貞侯)라고 하였으며, 아들 손굉(孫宏)이 뒤를 이었다.

유방의 재능과 계책은 손자보다 우수했으나, 자신의 수양에 있어서는 손자보다 못했다. 유방과 손자는 이미 군왕과 주상(主上)을 받드는 데 뛰어났고, 또 일찍이 이렇다 할 만한 말의 실수나 이득도 없었다. 단지 이 두 사람은 신비(辛毗)를 누르고 왕사(王思)를 도왔으므로 세상 사람의 조소를 받았다. 그러나 때로는 신하들의 간언과 논쟁의 틈바구니에서 그들이 바른 것을 곁에서 도와주었으며, 아울러 국사(國事)의 손해와 이익을 몰래 진술하였으며, 아첨하는 말로 조주를 인도하는데 진력하지 않았다. 함희 연간에 이르러, 다섯 등급의 작위 제도를 설치하자고 건의하였을 때, 유방과 손자는 이전 왕조에서 두드러진 공적을 세웠으므로 유정은 방성자(方城子)에 봉해졌고, 손굉은 이석자(離石子)가 되었다.


案孫氏譜: 손굉(孫宏)은 남양(南陽)태수가 되었다. 손굉의 아들은 손초(孫楚)인데, 자는 자형(子荊)이다.


晉陽秋曰: 손초(孫楚)의 동향인 왕제(王濟)는 대귀족의 자제인데, 출신 주의 대중정(大中正: 인물을 천거하는 관리)이 되어 손초의 인품에 대해 판단을 구했을 때 왕제는,


“이 사람은 그대들이 평가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라고 하고, 친히 그에 대해 비평을 써서,


“천재이며 영웅답고, 박식하고 밝아 남보다 뛰어나다”


라고 했다.


손초는 토로호군(討虜護軍), 풍익(馮翊)태수까지 관직이 승진했다. 손초의 아들 손순(孫洵)은 영천(潁川)태수가 되었는고, 손순의 아들인 손성(孫盛)은 자를 안국(安國)이라 하고, 급사중(給事中), 비서감(祕書監)이 되었다.


손성의 아버지 동생인 손탁(孫綽)은 자가 흥공(興公)이고, 정위정(廷尉正)이 되었다.손초부터 손성,손탁 모두 모두 문학을 좋아했고 盛又善言名理,諸所論著,並傳於世。



- 평하여 말한다.

정욱(程昱)ㆍ곽가(郭嘉)ㆍ동소(董昭)ㆍ유엽(劉曄)ㆍ장제(蔣濟)는 재능과 책략, 모략 등에 있어서 세상의 기사(奇士)이다. 이들은 비록 청아하게 덕행을 수행함에 있어서는 순유(荀攸)와 다른 면이 있었지만, 계책을 짜고 도모하는 것은 오히려 순유와 같은 범주이다. 유방(劉放)은 문사가 유려하였고, 손자(孫資)는 근면하고 삼가 두 사람 모두 제왕의 중요한 정책을 관장했다. 권세가 그 당시 유명했으나, 아정하고 청량함은 부족하였고, 조롱과 야유의 평가가 이들의 실제 모습을 매번 능가하였다.

분류 :
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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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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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08
23:32:58
(*.52.89.87)
주석추가 완료 알토란 삼국지로부터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장기튀김

2013.11.15
23:33:58
(*.147.123.78)
'왕송에게 가서 몸을 의탁했다' 이후로 다음 문장이 누락되어 있습니다.

太祖克冀州,放說松曰:
태조가 기주를 차지하였을 때, 유방은 왕송을 설득하였다.

코렐솔라

2013.11.15
23:36:48
(*.166.245.168)
반영했습니다. 감사합니다 ㅜㅠ

이런 오류가 있는 것을 볼 때 한문 국역 병기를 해야할텐데 기술적 구현이 생각보다 늦는군요. 그냥 일괄 교체 해야될려나;;;

장기튀김

2013.11.15
23:46:24
(*.147.123.78)
「서향후(西鄕侯) 굉(宏)의 후예이다.」 구절에 붙은 집해를 추가 부탁드립니다. 꽤 중요한 기록입니다.

전대소錢大昭가 말하길 : 《한서漢書》 왕자후표에 서향후 용容이 광양경왕廣陽頃王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니, 마땅히 ('순順'을) '경頃'으로 고치고 굉宏은 '용容'으로 고쳐야 한다. 또, 유방의 아들이 유굉이며 서향후니, 비록 (유방의 선조 유굉이) 먼 조상이라 하나 (자신의 아들에게) 같은 이름을 쓰지 않는다. 곧 (유방의 조상 유굉은) '용'을 잘못 쓴 것이다.
○연필○然弼(←인쇄된 글씨가 뭉개져 있어서 못 알아보겠습니다... -_-;;;)이 살펴보니, 본전의 '아들 굉이 이었다'는 것은 손자孫資의 아들이지, 유방의 아들이 아니다. 전씨(錢氏 ; 전대소)가 글을 제대로 읽지 않은 것이다.

============================

진수는 이래서 멱살을 잡아야 하지요 -_-;;;

코렐솔라

2013.11.16
00:28:27
(*.52.91.73)
으익 ㅋㅋ 감사합니다. 파란 글씨로 쓰도록 하죠. 유방을 패드립하는 인간으로 만든 진수의 위엄!

그리고 마지막 부분을 예전에 받은 집해 부분을 보니

“容”字之误显然。◎弼按,本传“子宏嗣”者 이렇게 되어있는 것으로 봐서 弼按이 이름이고 연은 뒷문장의 일부분 아닌가요?

코렐솔라

2013.11.16
00:33:46
(*.52.91.73)
아 그냥 弼 이군요. 뒷부분까지 이름이라고 하는 헛소리를;;;; 얘 노필 아닌가요?

장기튀김

2013.11.16
01:36:21
(*.147.123.78)
오오, 텍스트본의 위엄... -_-;; 뭉개진 부분은 역시 '顯'이었군요. 그렇다면, 해석은 이렇게 됩니다.

'분명히 '용'의 잘못이다. 노필(盧弼)이 살펴보건대, …'

코렐솔라

2013.11.16
01:38:54
(*.52.91.73)
넵, 수정했습니다.

코렐솔라

2013.11.16
00:30:33
(*.52.91.73)
그런데 이곳도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곳도 그렇고 다들 손자의 아들 손굉이라고 하니 진수가 유방을 패드립하는 인간으로 만든 것은 아니고 그냥 조상 이름을 바꾼 것에 불과하군요. 마치 이번 하후돈 조조 조상 결과때 조"삼"을 보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하하;;

장기튀김

2013.11.16
01:37:15
(*.147.123.78)
진수의 잘못은

1. 시호를 엉뚱하게 썼다
2. 그 아들내미도 엉뚱하게 썼다

입니다. 유방의 아들 유굉 운운은 전대소가 잘못한 게 맞고요. ㅎㅎ

ㄷㅇㄷ

2014.05.08
17:48:54
(*.117.186.239)
실례지만 한가지 여쭤봅니다. 曹肇조조가 태조라고 표기되어 있는 부분들이 있는데, 잘못 표기된 것 같습니다. 왠지 曹操조조를 태조로 일괄바꾸기 하다가 아닌 것까지 바뀐것 아닌가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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