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張旣)는 자가 덕용(德容)이고, 풍익군(馮翊郡) 고릉현(高陵縣) 사람이다. 열여섯 살 때, 군(郡)의 작은 관리가 되었다.

위략에 이르길: 장기의 집은 대대로 명가가 아니었으나, 그의 용모와 동작에는 기품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뛰어났으므로 군의 서간을 다루는 관청의 관리가 되었고, 이로부터 가세가 다소 넉넉해졌다. 그는 명문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력으로는 승진할 길이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상등품의 칼과 붓과 서판(書版)을 모아 놓았다가 상급 관리들 중에서 이러한 물건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주어 얼굴을 익혔다.

그 후 중요한 직무를 역임하였고, 효렴으로 천거되었지만 부임하지는 않았다. 조조가 사공으로 있을 때 그를 불렀지만 가지 않았으며, 무재로 천거되어 신풍(新豊)의 현령으로 임명되었다. 치적은 삼보(三輔 ; 장안 주변, 수도권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제일이었다.

원상은 여양에서 조조에게 저항하며, 그가 임명한 하동태수 곽원(郭援)과 병주자사 고간 및 흉노 선우를 파견하여 평양(平陽)을 탈취하도록 하였으며, 또 사자를 서방으로 파견하여 관중의 장군들과 손을 잡았다. 

사예교위 종요는 장기를 파견하여 장군 마등 등을 설득하도록 하였다. 장기는 그들에게 싸우는 것과 항복하는 것의 이해관계를 말하였으며, 마등 등은 그의 의견에 따랐다. 마등은 아들 마초에게 1만여 명의 병사를 인솔하여 종요와 함께 고간ㆍ곽원을 격파하도록 보냈는데, 그들을 크게 격파하고 곽원의 머리를 베었다. 고간과 선우는 모두 항복했다. 

그 후 고간은 또 병주를 들어 모반하였다. 하내 사람 장성(張晟)의 무리 1만여 명은 귀의할 곳이 없어서 효산( 山)과 면수(沔水) 사이에서 소란을 피웠는데, 하동의 쉬고(衛固)와 홍농(弘農)의 장염(張琰)이 각기 병사를 일으켜 그들에게 호응했다. 

조조는 장기를 의랑으로 임명하여 종요의 군대 일에 참여하도록 하고, 서쪽으로 가서 마등 등의 장수들을 불러오도록 하였다. 그들은 모두 병사를 인솔하여 함께 장성 등을 공격하여 격파시켰으며, 장염과 위고의 머리를 베었고, 고간은 형주로 달아났다. 조조는 장기를 무시정후(武始亭侯)로 봉하였다. 

조조는 형주를 징벌하려고 했지만, 마등 등이 관중에서 할거하고 있었으므로 또 장기를 보내 마등 등을 설득하여 부하들을 해산시키고 귀향하도록 요구했다. 마등은 이것을 허락하였지만 여전히 이전과 같은 행동을 하였으므로 장기는 사변이 일어날 것을 걱정하였다. 그래서 여러 현에 문서를 보내 식량 등을 준비하도록 하고, 이천 석(二千石 ; 군수)에게 교외까지 나가 맞이하도록 했다. 마등은 부득이 동쪽으로 출발했다. 조조는 상주하여 마등을 위위로 임명하고, 아들 마초를 장군으로 임명하여 그 무리를 인솔하도록 했다. 

후에 마초가 모반을 일으켰을 때, 장기는 조조를 따라 화음(和音)에서 마초를 격파하여 서쪽으로 관우를 평정했다. 장기는 경조윤(京兆尹)으로 임명되었고, 떠돌아다니는 백성들을 불러 위로하고, 다시 현과 읍을 일으켜 세웠으므로 백성들은 그를 흠모했다. 위국(魏國)이 세워진 이후, 장기는 상서가 되었고 지방으로 나가 옹주(雍州)자사가 되었다. 조조는 장기에게 말했다.

"그대의 고향 주로 돌아가시오. 수놓은 옷을 입고 대낮에 간다고 할 수 있소?"

장기는 장로(張魯) 정벌에 참여했는데, 따로 산관(散關)으로부터 들어가 모반한 저족( 族) 사람을 토벌하고, 그들의 보리를 거두어 군량미로 제공했다. 장로가 투항하자, 장기는 조조에게 한중(漢中)의 백성 수만호를 취하여 장안과 삼보를 든든히 하도록 권했다. 

그 후 조홍과 하변에서 오란(吳蘭)을 격파하였고, 또 하후연과 송건(宋建)을 토벌하고, 따로 임조(臨 )와 적도(狄道)를 공격하여 그들을 평정했다. 

이때, 조조는 백성들을 이주시켜 황하 북쪽을 충실히 하려고 하였으므로, 농서( 西)ㆍ천수(天水)ㆍ남안(南安)의 백성들은 서로 두려워하며 동요되었고, 걱정과 불안으로 가득 찼다. 장기는 세 군(郡) 사람들로 장수나 관리가 된 자에게 휴가를 주어 주거지를 수리하고, 수대(水  ; 물방아)를 만들게 하여 민심을 안정시켰다. 조조는 한중의 수비를 철수하였는데, 유비가 북쪽으로 무도(武都)의 저족을 취하여 관중을 압박하게 될까봐 걱정이 되어 장기에게 물었다. 장기가 대답했다.

"저족에게 북쪽으로 나가 곡물이 있는 곳으로 가서 적을 피하도록 하십시오. 먼저 도달한 자에게 총애와 상을 후하게 주시면, 먼저 달려간 자는 이로움을 알 것이고, 뒤에 달려간 자는 반드시 그들을 흠모할 것입니다."

조조는 그의 계책에 따라, 친히 한중으로 가서 군사들을 철수시키고, 장기를 무도로 가게하고 저족 5만여 명의 부락을 이주시켜 부풍(扶風)과 천수(天水)의 경계지역에서 살도록 했다.

삼보결록주에 이르길: 장기가 어린 아이였을 때, 그 군의 공조 유은(
殷)이 그를 관찰하고는 특이하다고 평가하였다. 그가 장기의 집을 방문하여 초대하니, 장기는 공손하게 승낙했다. 유은이 한발 먼저 돌아와 집안 식구들에게 명하여 손님의 식사를 준비하도록 했다. 장기가 도착하자, 유은의 처가 웃으며, 

"당신은 아마도 어그러졌군요. 장덕용(張德容)은 어리석은 아이입니다. 무슨 특별한 손님입니까!" 

라고 했다. 유은은 

"당신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이 아이는 방백(方伯 ; 장관)의 그릇 감이오." 

라고 했다. 

유은과 장기는 패자( 者)와 왕자(王者)의 도에 관해 논했다. 연회를 마치고 아들 유초(?楚)를 그에게 부탁하는 것이었다. 장기는 한참 생각하다가 사양했지만, 유은은 간곡하게 부탁했다. 유은은 옛날부터 고향의 기대를 받았으므로, 장기는 그것을 거역하지 못하고 승낙했다. 

유은은 이전부터 사예교위 호진(胡軫)과 사이가 나빴다. 호진은 무고한 죄를 씌워 유은을 사형에 처했다. 유은이 죽고, 한 달여 만에 호진이 병환을 얻었는데, 

"죄를 받는구나, 죄를 받는구나. 유공조(功曹)가 귀신을 불러왔어" 

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그러고 나서 죽었다. 그 당시 관중에서는 

"살아서는 사람의 가치를 분명하게 알아보는 식견이 있고, 죽어서는 존중하는 정신의 영혼을 갖는다." 

고 했다. 

(유은游殷의) 아들 초(楚)의 자는 중윤(仲允)이다. 포판령(蒲阪令:장기전 주석 중 서영언급 시 나오는 포판의 령=벼슬)이다. 태조(조조)가 관중을 다스릴때, 한흥군 태수자리가 비어 태조가 장기에게 물으니, 유초(游楚)의 재주가 문무를 겸하였음을 칭찬하였다. 이에 한흥태수로 삼았다. 나중에 농서로 되돌아왔다.

위략: 유초(游楚)는 몸이 건장했으며 여러 재상과 태수를 역임했다. 은덕을 써서 백성들을 다스렸고 형벌을 내려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태화 연간에 제갈량이 농우를 습격하자, 백성들이 동요했다. 찬수(天水), 남안(南安) 태수들이 군을 버리고 동쪽으로 도망을 갔는데, 유초 혼자서만 농서에 남아 있었는데,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이렇게 말했다.

"태수인 제가 은덕이 없고, 지금 촉나라 병사들이 왔으니, 다른 여러 군의 백성들이 모두 다 촉의 병사들에게 응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번은 부귀해질 수 있는 기회입니다. 저는 국가로부터 군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목숨을 바쳐야 의롭다 할 것입니다. 경들을 바로 태수의 목을 잘라서 적에게 가지고 가십시오."

이러자 모든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며 울며 말했다. 

"마땅히 저희들도 태수님과 생사를 같이 할 것입니다. 다른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류초가 말했다. 

"경들의 생각이 정 그렇다면 제가 계책 하나를 세우겠습니다. 지금 동쪽의 두개의 군은 이미 적의 손에 넘어갔으니, 곧 우리들의 군을 쳐들어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힘을 합쳐 수비해야 하고 만약에 구원 군이 도달한다면 필시 적들은 도망갈 것이니, 이렇게 된다면 우리들은 의로움을 지킬 수 있게 되고, 여러분들도 다 작위와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만약에 구원 군이 오지도 않고 또한 적들의 공격이 드세어진다면 그때 이 태수를 붙잡아 항복해도 될 것입니다."

곧 백성들이 성을 굳건히 지켰다. 곧 남안(南安)의 병사들이 촉병들과 함께 농서를 공격하려 했다. 류초가 적이 도달했다는 소리를 듣자, 곧 장사(長史) 마옹(馬顒)에게 성 앞에 나가 진을 지키게 하고는, 자신은 성루각으로 올라가, 촉나라 장수들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경들이 농(隴)을 차단해서 동쪽에서 병사들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위나라 구원 군이 오지 못하도록?) 할 수 있다면, 공격하지 않아도 한 달 이내에 농서의 관리와 백성들이 스스로 항복할 것이다. 경이 만약 농을 차단할 능력이 없다면 헛되이 스스로를 피폐하게 만들 뿐이다."

하고 말하고는 마옹에게 종을 울리며 북을 치며 진격하게 하였고, 곧 촉의 병사들은 퇴각했다.

10여일 후에 위나라의 구원 군이 도달했고, 제갈량은 패해 도망가고, 남안, 천수 등의 백성들은 제갈량에게 호응한 죄에 연좌되어 주멸되었다. 양군의 군수는 붙잡혀 중형을 받았다. 류초는 오히려 이때의 공으로 열후가 되었고 그의 장사(長史)와 연속(掾屬)들도 다 벼슬을 하사받았다. 황제는 특히 유초의 공을 가상히 여겨, 조정에 특별히 초대했다.

류초는 위인 됨이 키가 작고 왜소했으나 목소리는 컸다. 관리가 된 이래 처음으로 황제를 알현할 기회를 얻었으므로 전각 위로 오르라는 명을 받고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조예가 시중에게 영을 내려 그를 도와 전각 위로 인도하게 했다. 시중이 소리쳐 불렀다

"농서태수는 앞으로 나오라."

궁중의 예의상 류초는 당연히 "예(唯)."하고 대답해야 했으나 그는 그저 큰 소리로 "승낙합니다(諾)."라고 대답했다.

조예가 주변 사람을 돌아보고 웃었다. 조예가 류초의 노고를 위로하고 격려했다. 알현을 마친 유초는 궁중생활이 무척이나 좋아보였으므로 스스로 표를 올려 조정에 남아서 숙위(宿衛)하기를 청원했다. 조예는 그에게 부마도위(駙馬都尉) 직을 주었다.

류초는 놀기를 좋아해 노래와 비파, 아쟁, 퉁소를 잘 연주하는 자들을 모아 매번 행차할 때마다 데리고 다니며 즐겁게 놀았다. 가는 곳마다 윷놀이와 투호를 하는 곳이 있으면 기뻐하며 빠지는 법이 없었다. 몇 년 후 유초는 다시 북지태수(北地太守)로 나갔다가 나이 칠십여 세에 죽었다.

이때, 무위(武威)의 안준(顔俊), 장액(張掖)의 화란(和鸞), 주천(酒泉)의 황화(黃華), 서평(西平)의 국연(麴演) 등이 일제히 군을 들어 모반하여 스스로 장군이라고 부르며 서로 공격했다. 안준은 사자를 파견하여 모친과 아들을 조조에게 인질로 보내고 원조를 청했다. 조조가 장기에게 묻자, 장기가 대답했다.

"안준 등은 밖으로는 나라의 권위를 빌리고, 안으로는 오만하고 배반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으므로, 계책이 확정되고 세력이 충족되면 즉시 모반할 뿐입니다. 지금 바야흐로 촉나라를 평정하였으므로 잠시 쌍방을 존재하게 하여 싸우게 하는 것은 전국시대의 변장자(卞莊子)가 호랑이를 찔러 죽였을 때 앉아서 그 시신을 거두는 것과 같습니다."

조조가 말했다.

"좋소."

1년여 후에 화란은 안준을 죽였고, 무위의 왕비(王秘)가 또 화란을 죽였다. 이때 양주(凉州)를 설치하지 않았고, 삼보로부터 서역에 이르기까지 모두 옹주에 예속시켰다. 문제가 왕위에 올라 처음으로 양주를 설치하였을 때, 안정태수 추기(鄒岐)를 자사로 임명했다. 장액의 장진(張進)은 군수를 체포하고 병사를 일으켜 추기에 거부했다. 황화와 국연은 각기 이전 태수를 좇아서 병사를 일으켜 그에 호응했다. 장기는 호강교위(護姜校尉) 소칙(蘇則)의 세력을 키우게 하기 위해 병사들을 나아가게 하였고, 때문에 소칙은 공을 세우게 되었다. 장기는 도향후(都鄕侯)로 승진되어 책봉됐다. 양주의 노수(盧水), 호이(胡伊)의 건기첩(健妓妾)ㆍ치원다(治元多) 등이 모반하자 하서는 크게 혼란스러워졌다. 조비는 이것을 걱정하며 말했다.

"장기가 아니면 양주를 안정시킬 수 없다."

그래서 추기를 소환하여, 장기와 교체시켰다. 조서에서 말했다.

― 옛날에 가복(賈復)이 언( )현의 적을 공격할 것을 청하자, 광무제(光武帝)는 웃으면서 '집금오(가복의 관직)가 언현을 토벌한다면 내가 또 무슨 걱정을 하겠소?' 라고 했다. 그대의 지략은 다른 사람을 뛰어넘으며, 지금이 그것을 발휘할 시기다. 적당한 때가 되어서 일을 해야지, 다시는 먼저 청하지를 말라. ―

조비는 호군(護軍) 하후유(夏侯儒)와 장군 비요(費曜) 등을 파견하여 그의 후속부대가 되도록 했다. 장기는 금성(金城)까지 와서 황화를 건너려고 했는데, 장수들이 이렇게 주장했다.

위략에 이르길: 하후유는 자가 준림(俊林)이며, 하후상의 제자이다. 처음에는 언릉후 조창(曹彰)의 효기사마로 임명되었고, 이어서 정남(征南)장군ㆍ도독형예주(都督荊豫州)가 되었다. 

정시 2년(241), 오나라 장수 주연(朱然)이 번성을 포위하여, 성안에서 지키고 있던 장수 을수(乙修) 등을 구원하는 것이 매우 급박했다. 하후유는 진군하여 등새(鄧塞)에 주둔하였는데, 병력이 적어 감히 나아갈 생각조차 못했지만, 태고가 피리를 불어 따르는 자들을 선도하여 주연으로부터 6, 70리 떨어졌다가 돌아왔다. 을수 등으로 하여금 이것을 보게 하려고 몇 번이고 반복했다. 한 달여 만에 태부가 도착하여 함께 진군하자, 주연 등은 달아났다. 謂儒為怯,或以為曉以少疑眾,得聲救之宜。儒猶以此召還,為太僕。

"병사는 적고 길은 험하므로 깊숙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장기가 말했다.

"길이 비록 험하더라도 정형(井 )처럼 좁지는 않을 것이고, 오랑캐는 까마귀 떼처럼 모여 있고, 전한 초기의 이좌거(李左車)의 계략도 없소. 지금 무위는 위급한 상태이니 신속하게 가는 것이 마땅하오."

마침내 황를 건넜다. 적 70여 기병은 전읍( 陰) 입구에서 위나라 군사에 저항하였는데, 장기는 전음을 지나 선전하였고, 몰래 차차(且次)로부터 나와 무위에 도착했다. 오랑캐는 그가 신기하다고 생각하고 현미(顯美)로 돌아왔다. 장기가 무위를 점령한 후, 비요(費曜)는 도착했지만 하후유 등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장기는 장수와 병사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상을 내리고, 진군하여 오랑캐를 공격하려고 했다. 장수들이 모두 말했다.

"사병들은 피곤하고 적군은 기세가 왕성하므로 그들과 싸워 승리하기는 어렵습니다."

장기가 말했다.

"지금 군중에는 준비한 양식이 없으므로 적을 이용하여 보급을 받아야만 하오. 만일 적이 우리 병사들이 집결해 있는 것을 보고 깊은 산으로 물러나 의탁한다면, 추격하면 길이 험하여 궁지에 몰리거나 굶주리게 될 것이고, 병사들을 돌리면 산을 나와 노략질을 하게 될 것이오. 이와 같이 되면, 병사들을 쉬게 할 수 없으니, 이른바 '하루 적을 간과하면 근심은 몇 대에 있다' 는 것이 이 말이오."

그래서 현미까지 진군하였다. 오랑캐 기병 수천 명은 거센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놓아 진영을 불태우려고 하였으므로, 장수와 병사들은 모두 두려워했다. 장기는 밤에 정예 병사 삼천 명을 매복시켜 복병으로 삼고, 참군(參軍) 성공영(成公英)⑿에게 천여 명의 기병을 인솔하여 도전하도록 하고 퇴각하는 것처럼 하도록 명령했다. 

오랑캐는 과연 다투어 기병을 추격하였고, 이때 복병을 보내 그들의 뒤를 끊도록 하여 앞뒤에서 일제히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이겼다. 죽거나 포로가 된 오랑캐의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위략> [성공영전으로 분할됨], [염행전 으로 분할됨]


조비는 매우 기뻐하며 조서를 내렸다.


― 그대는 황하를 넘고 험한 곳을 지나 피로한 병사들로 편안하게 있던 오랑캐를 공격했고, 적은 병사로 많은 적을 이겼으니, 공로는 남중(南仲)을 넘고, 노고는 윤길보(尹吉甫)를 넘었소. 이 공훈은 오랑캐를 격파시킨 것뿐만 아니라 또 하우(河右)를 오랫동안 안녕 되게 한 것이고, 나로 하여금 장기간 서쪽을 돌아보는 걱정이 없도록 한 것이오. ―

장기는 승진되어 서향후(西鄕侯)로 봉해지고, 식읍 2백 호를 받아 이전 것과 합쳐 4백 호가 되었다.

주천의 소형(蘇衡)이 모반하여 강족(羌族)의 호족 인대(隣戴) 및 정령(丁令)의 오랑캐 만여 기병과 함께 국경지대의 현을 공격했다. 장기는 하후유(夏侯儒)와 그들을 격파하고, 소형과 인대 등은 모두 투항했다. 그래서 장기는 상소를 올려 하후유와 함께 좌성(左成)을 수리하고 요새를 구축하고, 봉화대와 군량물자를 쌓아둘 곳을 설치하여 오랑캐의 침입에 방비할 것을 청했다. 서강족(西羌族)은 두려워하며 2만여 명의 백성들을 인솔하여 투항했다. 그 후 서평(西平)의 국광(麴光) 등이 그 군수를 살해했으므로, 장수들은 그를 공격하려고 했는데, 장기가 말했다.

"오직 국광 등만이 모반을 일으켰으므로 그 군의 백성들이 반드시 모두 동조한 것은 아니요. 만일 군사로 그들에 대응한다면, 관원과 백성, 북쪽 오랑캐와 남쪽 오랑캐들은 반드시 국가가 옳고 그름을 밝히지 못한다고 말하고,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피차 서로 돕도록 할 것이오. 이것은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오. 국광 등은 북쪽 오랑캐와 남쪽 오랑캐를 이용해 구원하려고 할 것이오. 지금 먼저 북쪽 오랑캐와 남쪽 오랑캐로 하여금 습격하도록 하고, 그들에게 높은 상금을 걸어 모집하고, 포로나 노획한 물건은 모두 그들에게 보내시오. 밖으로는 그들의 세력을 상하게 하고, 안으로는 그들의 관계를 끊어놓으면, 반드시 싸우지 않고 평정할 수 있소."

그래서 격문을 하달하여 각 북쪽 오랑캐 부락을 설득했고, 국광 등과 연루된 사람을 사면하고, 적의 장수를 죽여 머리를 보내는 자에게는 반드시 영토와 상을 주도록 했다. 그래서 국광 부하들은 국광의 머리를 베어 보냈다. 그 나머지는 모두 과거처럼 안정되었다.

장기는 두 주(옹주ㆍ양주)를 10여 년간 통치했는데, 그의 정치와 은혜는 높이 평가받았다. 그가 예의로써 초빙한 부풍(扶風)의 방연(龐延), 천수(天水)의 양부(楊阜), 안정(安定)의 호준(胡遵), 주천(酒泉)의 방육(龐 ), 돈황(燉煌)의 장공(張恭)ㆍ주생열(周生烈) 등은 최후에 모두 명성과 지위가 있었다.

위략에서 이르길: 처음 장기가 군의 작은 관리로 있었을 때, 공조(功曹) 서영(徐英)이 몸소 장기를 서른 번이나 채찍질한 적이 있었다. 서영은 자가 백제(伯濟)이고, 풍익(馮翊)에서 유명한 성씨로서, 건안 초 포판(蒲阪)의 령이 되었다. 서영은 강인하고 차가운 성격으로 자신이 장기보다 낫고 향리에서의 명성과 품행 또한 앞선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이전에 장기에게 치욕을 주었던 일로부터 장기가 고귀한 성품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장기에게 청원할 수는 없었다. 장기는 뜻을 얻었지만 옛날 일을 돌아보지 않고 서영과 친 하려고 했다. 일찍이 술기운을 빌려 서영과 친 하려고 했지만, 서영이 그의 기대를 저버리고 받지 않았다. 서영은 이로부터 다시는 기용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장기가 옛날의 원망하는 마음을 갖고 있지 않으며, 서영 역시 굴복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황초 4년(223)에 세상을 떠났다. 조서를 내렸다.

― 옛날 순환자(荀桓子)가 적토에서 공훈을 세웠을 때 진후(晉侯)는 천 호를 상으로 주었고, 풍이(馮異)가 한나라 조정을 위해 힘을 다했을 때 광무제는 그의 두 아들을 봉했다. 원래 양주자사 장기는 백성들을 포용하여 민중들을 양육할 수 있었으며, 북쪽 오랑캐들로 하여금 본토로 돌아가게 하였으니, 국가의 훌륭한 신하라고 할 수 있다. 불행히 세상을 떠나 짐은 매우 슬프게 생각한다. 그의 작은 아들 장옹귀(張翁歸)에게 관내후의 작위를 수여하겠다. ―

명제가 즉위하자, 시호를 숙후(肅侯)라고 추증했다. 아들 장집(張緝)이 뒤를 이었다. 장집은 중서랑에서 다소 승진하여 동완(東莞)태수가 되었다. 가평 연간, 그의 딸이 황후가 되었으므로 조예는 그를 불러 광록대부로 임명하였고, 특진(特進 ; 삼공 다음의 지위)이 되었고, 처 향(向)은 안성향군(安城鄕君)으로 봉해졌다. 후에 장집은 중서령 이풍(李豊)과 함께 모반하였다가 살해되었다. 이것은 〈하후현전(夏侯玄傳)〉에 기록되어 있다.

위략에서 이르길: 장집(張緝)은 자를 경중(敬中)이라 하며, 태화 연간에 온현(溫縣)의 현령이 되었고, 정치적 재능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마침 제갈양이 한중으로 출동하여, 장집은 시기적절한 의견을 냈다. 조서를 내려 중서령 손자(孫資)에게 판단을 구하자, 계략이 풍부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를 불러 기도위로 임명하여 촉 정벌군에 참가하도록 했다. 싸움이 끝나 중앙으로 들어와 상서랑이 되었는데, 직무에 성실했으므로 명제의 눈에 띄었다. 명제는 장집의 재능이면 다방면으로 임용될 수 있다고 판단하고, 관상을 보는 사람을 불러 그의 관상을 보도록 했다. 관상보는 이는 

"이천 석에 불과합니다." 

라고 했다. 명제는 

"재능이 이와 같은데 어찌 관직이 이천 석에 그치겠는가?" 

라고 했다. 동완(東莞)에서 재임하던 중에는 수천 명의 병사를 통솔했다. 장집의 성격은 재물에는 인색했지만 권세에는 힘썼는데, 하루아침에 딸이 황후로 불려 군을 떠나게 되자, 실무로부터 떨어져 있어야 하는 관례에 따라 군 태수의 자리를 떠나 사저로 돌아가 걱정을 했다. 자주 국가를 위해 오와 촉의 공격상황을 진술했다. 또 어떤 때는 사마사의 질문에 답하고, 오나라의 제갈각(諸葛恪)은 변방지역에서 승리를 얻지만 곧 살해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사마사가 그 이유를 묻자, 장집은 

"위광은 그 군주를 떨치고, 공적은 한 나라를 덮고 있습니다. 죽지 않고는 할 수 없습니다." 

라고 했다. 제갈각이 합비에서 돌아오자 오나라는 과연 그를 죽였다. 大將軍聞恪死,謂眾人曰:「諸葛恪多輩耳!近張敬仲縣論恪,以為必見殺,今果然如此。敬仲之智為勝恪也。」緝與李豐通家,又居相側近。豐時取急出,子藐往見之,有所咨道。豐被收,事與緝連,遂收送廷尉,賜死獄中,其諸子皆并誅。緝孫殷,晉永興中為梁州刺史,見晉書。
분류 :
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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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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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22
17:56:40
(*.104.141.18)
덜 번역된 주석을 붙이고 몇 가지 수정. 모두 배주 올림

구라뱅뱅

2013.07.26
17:51:47
(*.49.168.253)
"살아서는 사람의 가치를 분명하게 알아보는 식견이 있고, 죽어서는 존중하는 정신의 영혼을 갖는다." 고 했다.
###### 이곳에 위치 ##########
(다음 위략 주석 번역하신 분 출처: 게으른 사냥꾼님의 이글루입니다)
위략: 유초(游楚)는

子楚字仲允,為蒲阪令。太祖定關中時,漢興郡缺,太祖以問既,既稱楚才兼文武,遂以為 漢興太守。後轉隴西。 누락된 듯요.

코렐솔라

2013.07.26
18:00:56
(*.52.89.88)
아, 감사합니다. 대충 가져다 맞추는거라 틀린게 많군요. 저 앞에 아들 유초는 뒤에 내용이 다 사라진 것이군요

구라뱅뱅

2013.07.26
18:01:12
(*.49.168.253)
子楚字仲允,為蒲阪令。太祖定關中時,漢興郡缺,太祖以問既,既稱楚才兼文武,遂以為 漢興太守。後轉隴西。
(유은游殷의) 아들 초(楚)의 자는 중윤(仲允)이다. 포판령(蒲阪令:장기전 주석 중 서영언급 시 나오는 포판의 령=벼슬)이다. 태조(조조)가 관중을 다스릴때, 한흥군 태수자리가 비어 태조가 장기에게 물으니, 유초(游楚)의 재주가 문무를 겸하였음을 칭찬하였다. 이에 한흥태수로 삼았다. 나중에 농서로 되돌아왔다.

코렐솔라

2013.07.26
18:02:59
(*.52.89.88)
앗, 아들이 빠져 있으니 게으른 사냥꾼님 번역에서 구라뱅뱅님 번역으로 바꾸겠습니다.

코렐솔라

2013.07.26
18:02:18
(*.52.89.88)
주석은 http://snakeoil.egloos.com/268994 이곳출처입니다. 서로 트레이드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출처는 적어야죠

푸른미르

2015.01.13
20:44:28
(*.111.13.81)
하후유는 하후상의 제자로 되어있는데 종제가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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