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규(賈逵)는 자가 양도(梁道)이고, 하동군(河東郡) 양릉현(襄陵縣) 사람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항상 군대를 편성하여 놀았다. 그의 조부 가습(賈習)은 이것을 기이하게 여기고 말했다. 

 

“너는 자라면 반드시 장수가 될 것이다.”


가습은 가규에게 말로 몇 만 자의 병법을 전수했다.


[주] 위략에서 이르길: 가규의 집안은 명가였지만, 어려서 부모를 여의었기 때문에 가세가 궁핍했으며, 겨울에는 항상 바지도 못 입었다. 그의 처형 유부(柳孚)를 찾아가 하룻밤 묵은 후, 다음날 그녀의 바지를 입고 나왔다. 때문에 그 당시 사람들은 그를 통건(通健)이라고 불렀다.


처음으로 군의 관리가 되어 강읍(絳邑)의 장(長)을 대행했다. 곽원이 하동을 공격할 때, 그가 지나친 성과 읍은 모두 함락되었지만, 가규가 성을 굳게 지켰으므로 곽원이 그를 공격하였지만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곧 선우를 불러 양군이 합쳐서 빠르게 공격하였으므로 성은 금방이라도 함락될 것 같았는데, 강읍의 부로(父老)는 곽원과 약속하여 가규를 살해하지 않았다. 강읍의 백성들이 붕괴된 이후에, 곽원은 가규의 이름을 듣고 그를 장군으로 삼으려고 무기로 협박하였지만 가규는 움직이지 않았다. 곽원은 부하들에게 가규를 납치하여 머리를 조아리도록 했는데, 가규가 질책하며 말했다.


“어떻게 국가의 현관이 적을 위해 머리를 조아리겠느냐!”


곽원은 화가 나서 그를 죽이려고 했다. 강읍의 관리와 백성들은 가규를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듣고 모두 성벽에 올라가 외쳤다.


“약속을 어기고 우리의 현명한 군주를 죽인다면 차라리 함께 죽겠소!”


곽원의 부하들은 가규가 절개가 있다고 생각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위해 사면을 요청하여, 마침내 가규는 죽음을 면하게 됐다. [주]


[주] 위략에서 이르길: 곽원은 가규를 포로로 잡았는데, 가규는 굴복하지 않고 곽원에게 말했다. 


“왕부군(王府君 : 하동태수 王邑)이 군을 다스린 지 몇 해가 되었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그것도 모르는가?” 


곽원은 화가 나서 


“빨리 죽여라”


고 했다. 장수들이 그를 에워싸고 호관(壺關)에 가두어 굴 가운데를 막고는, 수레를 위에 덮어놓고 사람들에게 지키도록 했다. 금방이라도 그를 죽일 것만 같았다. 가규는 굴속에서 지키고 있는 자에게 


“여기에는 건전한 사람이 없단 말인가? 바른 인간을 이 굴 속에서 죽게 하려는가?”


라고 했다. 그때 축공도(祝公道)라는 자가 있었는데, 평소에 가규와는 친분이 없었지만, 그 말을 듣고, 그가 정의를 지키고 위험을 제거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밤에 몰래 구출하여 가도록 했는데,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당초, 가규는 피씨현(皮氏縣)을 지나면서 말했다.


“영지를 다툴 경우 먼저 이곳을 점거하는 자가 승리할 것이다.”


곽원이 성을 포위하여 긴급해졌을 때, 가규는 자기가 이 어려움을 벗어나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고, 사람을 은밀히 성 밖으로 보내 인수(印綬)를 하동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말했다.


“빨리 피씨현을 점령하십시오.”


곽원은 강읍의 백성들을 병합하고 병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려고 했다. 가규는 그가 먼저 피씨현을 점령하게 되는 것이 두려웠으므로, 곧 다른 계책을 이용하여 곽원의 모사 축오(祝奧)를 미혹하게 하였다. 곽원은 이 때문에 이레 동안 머물러 있었다. 군 안에 있는 사람들은 가규의 말을 들었기 때문에 실패하지 않았다.[주]


[주] 손자별전에서 이르길: 손자(孫資)는 하동의 계리(計吏)로 천거되어 허도에 갔는데, 승상의 관부에서 천거하며 말했다. 


“가규는 강읍에 있으면서 관리와 백성들을 독려하며 적 곽원과 전투를 하였소. 힘을 다했으나 패하여 적의 포로가 되었지만, 바른 의지를 세워 얼굴과 말에 있어서 굴복의 모양을 나타내지 않았소. 충의로운 말을 대중에게 들려주고, 절개는 당대에 빛났소. 고대에 머리가 바로 섰던 사람이나 솥에 의거한 자 이상이요. 그 재능은 문무를 겸하고 있으니, 진실로 현재 유용한 사람이오.”


위략 : 곽원을 격파한 후, 가규는 전에 자신을 구출한 사람이 축공도(祝公道)라는 것을 알았다. 축공도(祝公道)는 하남 사람이다. 후에 죄에 연루되어 사형되어야 하였다.
가규가 이를 구원하려 하였으나, 돕지 못했다.(力不能解) 為之改服焉。


후에 가규는 무재로 천거되었고, 면지(면池)의 현령으로 승진했다. 고간이 모반했을 때, 장염은 병사를 일으켜 이에 호응하려고 했다. 가규는 장염의 음모를 모르고 앞으로 가서 장염을 만났다. 가규는 병사들이 변하여 일어나려고 한다는 것을 듣고 돌아가려고 했지만, 붙잡힐 것이 두려워 장염을 위해 계책을 짜내어 마치 그와 같이 모의하는 사람인 것처럼 하였는데, 장염은 그를 믿었다. 당지 면지현의 관청은 여성(蠡城)에 있었는데, 성벽과 연못이 견고하지 못했다. 가규는 장염에게 병사를 구하여 성을 수리했다.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들의 음모를 숨기지 않았기 때문에 가규는 그들을 전부 죽일 수 있었다. 그리고 가규는 성벽을 수리하고 장염에게 저항했다. 장염이 패망한 이후, 가규는 조부를 잃은 것을 이유로 관직에서 떠났다. 후에 사도로 초빙되어 속관이 되었다가 의랑의 신분으로 사예군사에 참가했다. 태조가 마초를 정벌하면서 홍농에 도달했을 때 말했다.


“이곳은 서쪽 길의 요충지이다.”


가규로 하여금 홍농태수를 겸하게 했다. 태조는 가규를 불러 일을 상의하고는 그를 매우 좋아했으며,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


“만일 천하 이천석의 관리들이 모두 가규와 같다면 내가 무슨 걱정이겠소?”


그 후 병사를 파견할 때, 가규는 둔전도위가 도망친 백성을 숨겼다고 의심했다. 도위는 자신이 홍농군에 귀속되지 않았으므로 불손하게 말을 했다. 가규는 화가 나서 그를 잡아 그의 죄를 일일이 나열하고, 다리를 부러뜨렸다. 이 때문에 면직되었다. 그러나 태조는 마음속으로 가규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승상주부(丞相主簿)로 다시 임명했다.[주]


[주] 위략에서 이르길: 조조는 오나라를 정벌하려고 생각했지만, 장마가 계속되었고, 군사들은 대부분 가는 것을 희망하지 않았다. 조조는 이러한 상황을 알았고, 밖에서 간언해 오는 자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조서를 내렸다. 


“지금 나는 전쟁 준비를 명령하였으나, 어찌 할 바를 아직은 모른다. 그러나 간언하는 자가 있다면 사형에 처할 것이다.”


가규는 명령을 받고, 동료 세 명의 주부에게 말했다. 


“지금은 실제로 출전할 수 없는데 명령은 이와 같소. 간언하지 않을 수 없소.” 


그리고 간언하는 초고를 작성하여 세 사람에게 보여주었다. 세 사람은 모두 서명하고 조조에게 이 일에 관해 진술했다. 조조는 화가 나 가규를 체포했다. 옥으로 보내는 일을 담당한 자가 서안을 만들자고 한 사람을 찾아내려고 하자, 가규는 그 자리에서 


“내가 만들었다”


고 하고 그대로 옥으로 달려갔다. 옥졸은 가규가 주부로 있었으므로 특별히 칼을 채우지는 않았다. 가규는 옥졸에게 


“빨리 나에게 칼을 채우시오. 군왕께서는 또 내가 측근에서 근무했으므로, 그대에게 칼 쓰는 것을 느슨하게 해 달라고 구한 것이라고 의심할 것이오. 지금의 나의 모습을 보려고 사람을 보낼 것이오.”


라고 했다. 가규는 칼을 썼다. 과연 조조는 집안사람을 보내 가규의 모양을 보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가규는 악의가 없다. 그 관직에 복귀시키시오”


라고 했다. 당초 가규가 학생으로 있었을 때, 경전의 근본정신을 열람하고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점을 받아들였다. 그는 《춘추좌씨전》을 가장 좋아하였고, 태수가 되어서도 스스로 과제를 정해 읽어 한달에 한 번을 읽었다. 逵前在弘農,與典農校尉爭公事,不得理,乃發憤生癭,後所病稍大,自啟願欲令醫割之。太祖惜逵忠,恐其不活,教「謝主簿,吾聞『十人割癭九人死』」。逵猶行其意,而癭愈大。逵本名衢,後改為逵。


태조(太祖)가 유비(劉備)를 정벌할 때, 먼저 가규를 사곡(斜谷)까지 파견하여 형세를 살피도록 했다. 그는 노상에서 수형도위(水衡都尉)가 죄인 수십 명을 수레에 싣고 오는 것을 만났다. 가규는 군사 상황이 급박하였으므로 죄가 무거운 사람 한 명만 제외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석방했다. 태조는 그것을 칭찬하며,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승진시켰고, 하후상(夏侯尚)과 함께 군사상의 계략을 담당하도록 했다. 태조(太祖)가 낙양(洛陽)에서 붕어했을 때, 가규가 장례의식을 주관했다.[주]


[주] 위략에서 이르길: 그 당시 태자는 업현에 있었고, 조창은 미처 도착하지 않았다. 병사나 백성들은 노역으로 고통스러웠으며, 또 역병이 있었다. 그 때문에 군대 안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관료들은 천하에 변란이 일어났음을 걱정하고, 장례의식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가규는 공개적으로 장례를 치를 것을 건의하였다. 그리고 죽은 자의 뜻을 발표하고, 안팎의 사람들에게 모두 와서 마지막 인사를 하도록 했다. 마지막 인사가 끝나자 각기 평정을 찾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청주 군사가 북을 치고 왔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들을 가로막아야 하며, 따르지 않는 자는 토벌해야 한다고 했다. 가규는 


“지금 위왕의 시신은 관 속에 있고, 후계자가 될 왕은 아직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이 기회에 그들을 위로합시다." 


라고 했다. 그래서 장문의 격문을 만들어 창고에 있는 식량을 지급한다고 알렸다.


그 당시 언릉후(鄢陵侯) 조창(彰)은 월기장군(越騎將軍)의 일을 대행하고 있었는데, 장안(長安)에서 급히 달려와 가규에게 선왕의 옥새가 있는 곳을 물었다. 가규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태자는 업현에 있고, 나라에는 대를 이을 사람이 있습니다. 선왕의 옥새는 군후(君侯)께서 물어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태조의 관을 받들어 업현(還鄴)으로 돌아왔다.


문제(文帝)가 왕위에 오른 이후, 업현의 민가 1만 호는 수도권의 지역에 있었으나, 대부분 법을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가규를 업현의 현령으로 임명했다. 한 달 후, 가규는 위군태수(魏郡太守)로 승진했다. [주]


[주] 위략에서 이르길: 위군의 관리들은 가규가 군을 다스리게 되었다는 것을 듣고, 관부를 들어 모두 업현의 문 밖에까지 왔다. 승진하여 임명된 문서가 도착하였으므로, 가규가 문을 나오자, 군의 관리들은 전원 문 앞으로 나가고 수레 옆에서 가규에게 인사했다. 가규는 손을 내저으며 


“관부에 갔을 때도, 어찌 이와 같은 풍경이 있겠는가?”


라고 했다.


대군이 출정했을 때, 또 승상주부좨주(丞相主簿祭酒)로 승진하였다. 가규는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연루되어 죄를 받게 되었는데, 문제가 말했다.


“숙향(叔向)은 공적이 있었으므로 십대 자손까지도 죄를 사면 받았는데 하물며 가규의 공적과 덕행은 그 자신에게 있지 않은가?”


가규는 조비를 따라 여양(黎陽)에 이르렀다. 황하를 건너는 자가 대열을 혼란스럽게 하자, 가규는 즉시 베어 버리고 정돈시켰다. 초현(譙)에 이르렀을 때, 조비는 가규를 예주자사(豫州刺史)로 임명했다. [주]


[주] 위략에서 이르길: 가규가 예주자사가 되었을 때, 나아가 말했다. 


“신은 궁문을 지키며 6년간 드나들었습니다. 왕위에 즉위하자, 궁문이 처음으로 열렸고 신은 밖에 있습니다. 오직 전하에게는 만민을 위하는 계획이 있으니, 하늘과 사람의 기대를 거역하지 마십시오.”


이때 천하는 막 안정되었고, 주와 군은 대부분 기강이 풀어져 있었다. 가규가 말했다.


“주는 본래 어사가 순행하여 각 군을 감찰하였고, 전한 무제 시대의 여섯 조항의 조서에 의거하여 군의 고관이나 이천 석 이하의 관리들을 감찰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보고는 모두 엄격하고 유능하고 용감하여 감독관으로의 재능이 있다고 말하고, 안정되고 관대하며 인자하고 부드러운 덕은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고관들은 법령을 경시하고, 도적들이 공공연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주에서는 알고는 있지만 규명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천하 사람들이 또 어떻게 바른 표준을 얻겠습니까?”


병조종사(兵曹從事)가 이전의 자사로부터 휴가를 받아서, 가규가 도착하고 몇 개월 후에야 돌아왔다. 가규가 이천 석 이하의 관리 중에 아첨과 방종으로 법대로 하지 않는 자를 조사하여 모두 죄를 나열하여 탄핵하고 관직을 박탈하자, 조비가 말했다.


“가규는 진정한 자사로다.”


천하에 포고하여 예주를 표준으로 삼도록 하고, 가규에게 관내후의 작위를 주었다. 예주와 오나라는 접해 있었다. 가규는 공개적으로 적의 상황을 시찰하고, 무기를 수리하여 수비와 전투 준비를 하였으므로 적이 감히 침범하지 못했다. 그는 밖으로는 군대를 정돈하고, 안으로는 군대를 민정을 다스렸으며 언수(鄢水)와 여수(汝水)를 막아 제방을 새로 만들었고, 또 산을 자르고 긴 계곡의물을 막아 소익양피(小弋陽陂)를 만들었으며, 또 물자를 나르는 2백여 리나 되는 운하를 개통했는데, 가후거(賈侯渠)라고 하였다.


황초 연간에 가규는 장수들과 함께 오나라를 정벌하였고, 동포(洞浦)에서 여범(呂範)을 격파하였으므로 양리정후(陽里亭侯)로 승진되어 봉해졌고, 건위(建威)장군의 칭호가 더해졌다. 명제가 즉위한 후, 식읍 2백 호를 받아 이전 것과 합쳐 4백 호가 되었다. 그때, 손권은 동관에 있었는데, 그곳은 예주 남쪽에 해당되며, 장강으로부터 4백여 리 떨어져 있었다. 매번 병사를 내어 침입할 때는 서쪽으로는 강하(江夏)로부터, 동쪽으로는 노강(盧江)으로부터 했다. 국가가 오나라를 정벌할 때도 회수(淮水)와 면수(沔水)로부터 했다. 이때 예주의 군대는 항읍(項邑)에 있었고, 여남(汝南)과 익양(弋陽)의 여러 군(郡)은 국경을 수비하고 있었다. 손권은 북방으로는 근심이 없었으므로 동서로 긴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군을 합쳐 구원하였기 때문에 평상시 실패가 적었다. 가규는 강변까지 직접 가는 도로를 개통해야만 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만일 손권이 스스로 지킨다면 동서 두 방면에서 구원을 보내지 않을 것이고, 동서 두 방면에서 구원을 보내지 않는다면 동관은 함락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가규는 군대로 하여금 요구(療口)로 옮겨 주둔하도록 하고, 동관(조와 오나라)을 공격하여 취할 계획을 준술 하였는데, 조예는 그의 말이 옳다고 보았다.


오나라 장군 장영(張嬰)과 왕숭(王崇)이 병력을 이끌고 투항했다.


태화2년(228)에 조예는 가규로 하여금 전장군(前將軍) 만총(滿寵), 동완태수(東莞太守) 호질(胡質) 등 사군(四軍)을 통솔하여 서양(西陽)으로부터 곧장 동관으로 향하도록 하고, 조휴는 완현(啘縣)으로부터 사마선왕은 강릉(江陵)으로부터 진군하도록 했다. 가규가 오장산(五將山)에 도착했을 때, 조휴는 적 중에서 항복을 원하는 자가 있다고 상주하고 적지 깊숙이 들어가 그것에 호응하기를 구하였다. 사마선왕은 군을 주둔시키고, 가규는 동쪽으로 향하여 조휴와 합쳐 진군하도록 조서를 내렸다. 가규는 적이 관동을 수비하고 있지 않았으므로 반드시 완현에서 군사를 집결시키고 있을 것이고, 조휴가 깊숙이 들어가 적과 싸운다면 반드시 패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장수들을 바다와 육지로 나란히 진군하도록 하였다. 2백 리를 행군하였을 때 오나라 병사를 사로잡았는데, 조휴는 전투에서 패하고, 손권은 병사를 파견하여 협석(夾石)을 끊었다고 말했다. 장수들은 나갈 바를 몰랐으며, 어떤 이는 후속 부대를 기다리자고 했다. 가규가 말했다.


“조휴의 군대는 밖에서 패배하였고, 수도로 가는 길은 끊겼소. 나아가도 싸울 수 없소. 편안함과 위험함의 관건은 하루가 다 가기 전에 결정되오. 적은 우리의 후속 군사가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이오. 지금 급히 진군하여 뜻하지 않게 나가는 것, 이것이 이른바 먼저 선수를 쳐서 마음을 빼앗는 것이오. 적은 우리 병사를 보고 반드시 달아날 것이요. 만일 후속 군대를 기다린다면, 적은 이내 험난한 곳을 끊었을 것인데 병력이 비록 많더라도 어떤 이익이 있겠소.”


그래서 보통보다 두 배의 속도로 군사를 나아가게 하고, 깃발과 북을 많이 설치하여 의병(疑兵)으로 삼았다. 적은 가규의 군사를 보고 퇴각하였다. 가규는 협석을 점거하고 병사와 식량을 조휴에게 제공하였으므로 조휴의 군대는 곧 떨쳐 일어났다. 당초 가규는 조휴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황초 연간, 문제가 가규에게 부절을 주려고 하자, 조휴가 말했다.


“가규는 성품이 강인하여 평소 장수들을 경시하므로 감독하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그래서 멈추었다. 조휴가 협석에서 패했을 때, 가규가 없었더라면 조휴의 군대는 구조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주]


[주] 위략에서 이르길: 조휴는 가규의 진군이 늦어지는 것을 원망하여 가규를 질책하고 예주자사(가규)에게 버리고 온 무기를 주워오도록 명했다. 가규는 마음을 바르게 하고 조휴에게 말했다.


 “본래 국가를 위해 예주자사가 되었습니다. 버리고 온 무기를 주워오는 것은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군대를 인솔하여 귀환했다. 가규와 조휴가 서로 상주했고, 조정에서는 가규가 옳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조휴가 황족으로 중책을 맡고 있음을 고려하여 둘 다 틀린 것이 없다고 했다.



魏書云:休猶挾前意,欲以後期罪逵,逵終無言,時人益以此多逵。


習鑿齒曰:夫賢人者,外身虛己,內以下物,嫌忌之名,何由而生乎?有嫌忌之名者,必與物為 對,存勝負於己身者也。若以其私憾敗國殄民,彼雖傾覆,於我何利?我苟無利,乘之曷為?以是稱說,臧獲之心耳。今忍其私忿而急彼之憂,冒難犯危而免之於 害,使功顯於明君,惠施於百姓,身登於君子之塗,義愧於敵人之心,雖豺虎猶將不覺所復,而況於曹休乎?然則濟彼之危,所以成我之勝,不計宿憾,所以服彼之 心,公義既成,私利亦弘,可謂善爭矣。在於未能忘勝之流,不由於此而能濟勝者,未之有也。


때마침 가규는 병이 위독하였으므로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


“나는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어도 손권을 베지 못해 지하에 있는 선제를 만나는 것이 한스럽소. 장례식은 새로 만드는 것이 일체 없도록 하시오.”


가규가 세상을 떠나자, 시호를 숙후(潚侯)라고 했다.


위서(魏書)에서 이르길:이때 가규의 나이 55세였다.


그의 아들 가충(賈充)이 뒤를 이었다. 예주의 관리와 백성들은 그를 추모하였고, 그를 위해 석비를 세우고 사당을 세웠다. 청룡(青龍)연간에 조예가 동쪽을 정벌할 때, 수레를 타고 가규의 사당으로 들어와 조서를 내렸다.


- 어제 향현을 지나다가 가규의 석비와 석상을 보고 그를 그리는 마음이 비통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명성이 세워질 수 없음을 걱정하지, 장수할 수 없음을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가규는 생전에 충성을 하였고 공훈이 있었고, 죽은 후에는 사람들에게 추모되고 있다.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천하에 널리 알려 장래 사람들에게 장려하도록 하라. [주]


[주] 위략에서 이르길: 감로 2년(257), 임금의 수레가 동쪽으로 정벌 나가 항(項)현에 주둔했는데, 가규의 사당 아래로 들어가 다시 조서를 내렸다. 


‘가규는 죽었지만 그의 애정은 남아 있으니 대대로 제사를 지내라. 그의 장렬한 풍격을 듣고 짐은 글을 매우 좋아하게 되었다. 옛날 선제(先帝)가 동쪽으로 정벌하러 갔을 때도 또 이곳에 이르러 친히 덕음(德音)을 말하고 가규의 아름다움을 칭찬했다. 배회하는 짐의 마음은 더욱 슬프다. 무릇 현인에게 예의를 다하는 것에는, 어떤 때는 그의 분묘를 깨끗이 청소하고, 어떤 때는 그 마을 문을 꾸미기도 하여 경의를 다한다. 사당을 청소하고, 구멍이 나서 새는 곳이 있다면 보수하라.’


함희 연간, 가충이 중호군(中護軍)을 담당했다. [주]


[주] 진제공찬(晉諸公贊): 가충은 자가 공여(公閭)이며, 감로 연간에 대장군장사(大將軍長史)가 되었다. 고귀향공(조위의 마지막 황제)이 난을 일으켰을 때, 사마소는 가충에게 의지하여 난을 피했다. 진 왕실에서는 최고의 공적을 세운 신하였으며, 관직은 태재(太宰)에까지 올랐고, 노공(魯公)으로 봉해졌다. 시호는 무공(武公)이다.


위략의 열전에는 가규, 이부(李孚), 양패(楊沛) 등이 1권으로 되어있는데, 여기서도 이부, 양패 두 명을 가규 이후에 계속한다.


[이부전]으로 분할


[양패전]으로 분할



- 평하여 말한다.


한말(漢) 이래로부터 자사(刺史)가 각 군(郡)을 통솔하였고 원래 있던 권한 이외에 조세를 징수하고 정치를 폈으므로 이전 시대에 감독만 한 것과는 다르다. 태조(太祖)는 국가의 기초를 창립했을 때부터 위(魏)나라의 대업이 완성될 때까지, 모두 아름다운 이름이 전했거나 명실상부한 사람들에게 의지했다. 그들은 모두 대업의 기틀에 정통하였고, 위업과 은혜를 겸하고 있었다. 때문에 만 리 사방을 엄숙하게 가지런하게 할 수 있었으며, 후세까지 일컬어 졌던 것이다.



(위의 모든 배송지주 번역해 주신 분, 출처: 게으른 사냥꾼님의 이글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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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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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22
18:13:44
(*.104.141.18)
배주 추가했습니다.

구라뱅뱅

2013.07.26
14:45:17
(*.49.168.253)
魏略曰:郭援破後,逵乃知前出己者為祝公道。公道,河南人也。後坐他事,當伏法。逵救之,力不能解,為之改服焉。

위략 : 곽원을 격파한 후, 가규는 전에 자신을 구출한 사람이 축공도(祝公道)라는 것을 알았다. 축공도(祝公道)는 하남 사람이다. 후에 죄에 연루되어 사형되어야 하였다.
가규가 이를 구원하려 하였으나, 돕지 못했다.(力不能解) 為之改服焉。

마지막 아홉자가 매끄럽게 풀리지 않네요. 改服 은 가규가 관직에 나아감을 말하는 것 같은데, 나중에 다른분이 손봐주실 듯요.

재원

2013.07.26
14:51:36
(*.67.12.154)
감사합니다. 추가하였습니다.

코렐솔라

2013.07.26
15:40:35
(*.52.89.88)
헐, 위략용협전의 사총사 중에 유일하게 불우한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군요 ㅜㅠ

유수

2014.11.19
19:25:39
(*.245.104.77)
원문대로는 완현啘縣이지만 선제기 기록과 조휴의 목표지역과 교전지역상 가규전에서 말하는 완현은 환현皖縣이니 가규전 보시는 분들은 참고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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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 위서 우금전 [1] 재원 2013-05-04 7430
244 위서 악진전 재원 2013-05-04 7541
243 위서 장료전 [1] 재원 2013-05-04 12877
242 위서 창자전 [3] 견초 2013-05-04 4250
241 위서 정혼전 [2] 견초 2013-05-04 30233
240 위서 두서전 [1] 재원 2013-05-04 4188
239 위서 두기전(백후) [1] 견초 2013-05-04 4594
238 위서 소칙전 [1] 견초 2013-05-04 4030
237 위서 임준전 [4] 견초 2013-05-04 3993
236 위서 <배송지주>양패전 재원 2013-05-04 3619
235 위서 <배송지주>이부전 재원 2013-05-04 3526
» 위서 가규전 [5] 견초 2013-05-04 6676
233 위서 온회전 [2] 견초 2013-05-04 4188
232 위서 <배송지주>염행전 재원 2013-05-04 4851
231 위서 <배송지주>성공영전 재원 2013-05-04 3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