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칙(蘇則)은 자가 문사(文師)이고, 부풍군(扶風郡) 무공현(武功縣) 사람이다. 어린 시절 학식과 품행으로 소문이 나 있었으며, 효렴(孝廉)과 무재(茂才)에 천거되었고, 공부(公府)에 초빙되었지만 모두 초빙하지 않았다. 후에 평민의 신분에서 기용되어 주천태수(酒泉太守)가 되었고, 안정(安定)ㆍ무도(武都)태수로 전임되었는데, 재직하는 곳마다 뛰어난 명성이 있었다. 

태조가 장로(張魯)를 정벌하러 갈 때, 소칙이 다스리는 군을 지나 소칙을 만나보고 매우 좋아하게 되어 군대의 선도가 되도록 했다. 

장로를 무찌르고, 소칙은 하변(下辯)에 있는 저족(氐族)들을 안정시켜 하서(河西) 길을 개통시키고, 아울러 금성태수(金城太守)로 전임되었다. 이때는 동란이 있은 이후였으므로 관리와 백성은 고향을 떠나 흩어지고 굶주림으로 고통스러워했으며 인구는 감소했는데 , 소칙은 그들을 매우 성심성의껏 위로하고 돌보았다. 그는 밖으로는 강족(羌族)과 호족(胡族)을 불러들여 감싸주었으며 소와 양을 얻어 빈궁한 자와 나이든 사람을 봉양했다. 백성들과 식량을 나누어 먹기조차 하니, 열 달 사이에 유민들이 모두 돌아와 수천 가구나 되었다. 

그는 금령(禁令)을 확고히 만들어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즉시 처형하고, 가르침에 따르는 자에게는 반드시 상을 주었다. 친히 백성들에게 경작법을 가르쳐 그 해에는 큰 수확을 거둬들였다. 이 때문에 그에게 돌아와 의탁하는 유민이 나날이 많아졌다. 

이월(李越)이 농서(隴西)를 근거지로 삼아 모반하자, 소칙은 강족과 호족을 인솔하여 이월을 포위했다. 이월은 곧 항복하기를 원했다. 

태조가 붕어하자(崩), 서평(西平)의 국연(麴演)이 반역하여 호강교위(護羌校尉)라고 일컬었다. 소칙은 군대를 통솔하고 그를 토벌하러 갔다. 국연은 두려웠으므로 항복하기를 원했다. 그 공적으로 문제는 소칙에게 호강교위의 관직을 주었으며, 관내후(關內侯) 작위를 내렸다.

[1][위서]에 이와 같이 말한다. 

소칙은 강직하며 악을 증오하고, 항상 급암(한무제 때의 명신입니다. 무위정치를 간언하고 황제를 귀찮게 하는 상소를 많이 해서 미움을 받아서 낙향했습니다. 門前雀羅라는 사자성어의 어원입니다.) 과 같은 인품을 사모했다. 

[위략]에 이와 같이 말한다. 

소칙의 가문은 대대로 명가였으나 흥평연간에 삼보지방이 혼란에 휩싸여 먹고살기 힘들어지자 북쪽으로 난을 피해 도망하였다. 안정에 집을 빌려 살며 부호 사량을 의지했다. 사량의 대우가 불충분하였으므로 소칙은 개탄하며 말했다. 

“천하는 필시 안정될 것이다. 그리 먼 훗날의 일이 아닐 터이다. 반드시 이 군의 태수가 되어 귀환하여 범용한 자들을 몽땅 쓸어버리겠노라” 

이후 풍익의 길무 등과 더불어 군 남쪽 태백산에 은거하며 서적을 자신의 오락거리로 삼아 보내었다. 안정태수가 되자 사량 등은 모두 망명하려 하였으나, 소칙은 그러한 사정을 듣고는 미리 사자를 보내어 해명하고, 예로써 그에게 보답하였다. 

[2] [위명신주]에 기재된 문제의 옹주자사 장개에 대한 하문에 이와 같이 말하고 있다. 

[시험 삼아 금성태수를 맡겼던 소칙은, 이미 민중을 안정시키고 오랑캐를 평정하여 공적을 올렸다. 듣기로는 수레를 내어 서진하여 황중을 평정하고 황하서안에 힘과 세를 결집하였다고 한다. 나는 이를 높이 평가한다. 소칙의 공적으로 보면 관위와 영지를 가증해야하지 않겠는가? 작위를 내리는 것은 중대한 사항이므로 경에게 묻는다. 은밀히 의견을 내고, 결코 누설치 말라.]

장개는 답하여 말했다. 

[금성군은 과거 한수에게 살육, 약탈당하여 민중은 죽거나 유랑하였으며, 어떤 자는 융적의 땅에 숨고, 어떤 자는 혼란 때문에 목숨을 잃었으니, 호수는 오백에도 달하지 않습니다. 소칙이 직무에 취임하자 안으로는 피해자를 위무하고, 밖으로는 이산자를 규합하여 지금 호수는 천여 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또한 양소의 여러 종족의 강족은 과거 한수와 함께 악행을 일삼았으나 한수가 격파된 이후는 요새를 넘어갔습니다.(중토에서 물러났습니다.) 소칙은 그들을 불러들여 삼천여의 집락을 군에 귀화시켜 모두 위신, 은혜로써 거두고, 관가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서평의 국연 등이 사악한 계획을 부르짖자, 소칙은 곧 군을 내어 그 항령(일문 번역에서는 요충지로 번역 네이버에서는 큰 목. 두목 등에 사용된다고 나와 있음)에 임하였으니, 국연은 곧 인질을 보내어 명령에 귀복하고, 적도의 보급로를 끊었습니다. 소칙은 일찍이 민중을 위무한 공적이 있음은 물론이고, 또한 융적을 잘 다루었고, 충성을 다하여 절의를 보였습니다. 

성명한 군주의 치세에 이르러서는 공적은 필히 기록해야한다고 합니다. 소칙에게 작위, 영지를 가증하는 것은 실로 신하에게 충성을 권면하는 데에 충분한 일로, 풍속을 권면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후에 국연이 또 인접한 군(郡)과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장액군(張掖郡)의 장진(張進)은 태수(太守) 두통(杜通)을 억류하고, 주천군(酒泉郡)의 황화(黃華)는 태수 신기(辛機)의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장진과 황화는 모두 스스로를 태수라고 일컬었으며, 국연에게 호응했다. 또 무위군(武威郡)의 세 오랑캐가 동시에 도적질하고 노략질하자 길은 단절되었다. 무위태수(武威太守) 관구흥(毌丘興)이 소칙에게 위급함을 알려왔다. 

그때, 옹주(雍州)와 양주(涼州)의 여러 호족들은 모두 강족과 호족 사람들을 체포하여 달려가 장진 등을 따랐으므로, 금성군의 백성들은 모두 장진에게 대적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또 장군 학소(郝昭)와 위평(魏平)은 이보다 앞서 금성에 주둔하여 수비를 하고 있었지만, 또한 조서를 받았으므로 서쪽으로 건너갈 수 없었다.

그래서 소칙은 군중(郡中)의 고관과 적소 등을 만나고 강족의 우두머리들과 상의하며 말했다.

“지금 적군은 비록 강성하지만, 모두 최근에 모인지 얼마 안 되므로 협박당하여 따르는 자도 있을 것이고, 반드시 마음을 하나로 하고 있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 사이의 원망하는 틈을 잡아 공격한다면, 그들 중에서 착한 사람과 사악한 사람은 반드시 나뉘게 될 것이고, 떨어져 나온 사람들이 우리 군대로 돌아온다면 우리는 증가하게 될 것이고, 그들은 손실을 입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군대는 숫자가 증가하는 실리를 얻을 수 있으며, 용기가 배로 증가하는 형세를 얻게 됩니다. 이러한 군대를 이끌고 나가 그들을 토벌하여 격파시키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만일 대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린다면, 오랜 시일을 소비하는 지구전이 되고, 착한 사람들이 귀순할 곳이 없으므로 반드시 악한 사람들과 협력하게 될 것입니다. 착한 사람과 사악한 사람이 이미 결합되었는데, 양쪽을 급히 떼어 놓는 것은 형편상 곤란합니다. 비록 지금은 조서에 의한 명령이 있지만, 그것을 위반하여 시기적절하게 방책을 강구하는 것은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학소 등은 소칙의 견해를 따라 군대를 출동시켜 무위군(武威郡)을 구하고, 그들 세 오랑캐를 항복시켰으며, 관구흥과 더불어 장액에 있는 장진을 공격했다. 국연은 이 소식을 듣고 보병과 기병 3천 명을 이끌고 소칙을 맞았다. 말로는 군을 도우러 왔다고 했지만, 사실은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 

소칙은 국연을 유인하여 회견하자고 하여, 그 기회에 그를 죽이고 밖으로 나가 이 소식을 그의 군대에 알리자, 국연의 무리들은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 소칙은 여러 군사들과 함께 장액군(張掖郡)을 포위하여 격파시켰고, 장진과 그의 지지자들을 참수하자, 무리들은 모두 항복하였다. 국연의 군대가 패하자 황화는 두려워 그가 잡아 두었던 사람을 석방시키고 항복하기를 원했다. 결국 하서는 평정되었고 소칙은 금성으로 돌아왔다. 조정에서는 그를 도정후(都亭侯)로 봉하고 식읍 3백 호를 하사했다.

오래지 않아 소칙을 중앙으로 불러 시중(侍中)으로 임명하니 동소(董昭)와 동료가 되었다. 일찍이 동소가 소칙의 무릎을 베고 자려고 하자, 소칙은 그를 밀어내면서 말했다.

“나 소칙의 무릎은 아첨하는 사람의 베개가 아니오.”

이 이전에 소칙과 임치후(臨菑侯) 조식(曹植)은 위씨(魏氏)가 한(漢)을 대신하려고 한다는 것을 듣고, 모두 상복을 꺼내고 슬퍼하며 소리 내어 울었다. 문제(문제)는 조식이 그렇게 한 것을 들었지만, 소칙 또한 이와 같이 했는지는 듣지를 못했다. 문제가 낙양에 머무르고 있을 때, 여러 신하들에게 조용히 말했다.

“나는 하늘의 명에 응하여 황제가 되었는데, 이 일을 듣고 큰 소리로 우는 자가 있다고 들었으니, 무슨 까닭이오?”

소칙이 자신이 질문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수염을 곧바로 세우고 바른 논리로 대답하려고 했다. 시중(侍中) 부손(傅巽)은 황망히 제지하며 말했다.

“그대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3]

[3] [위략]에 이와 같이 이른다. 옛 방식에 따르면 시중이 황제의 기거를 직접 돌보았으므로 속세에서는 시중을 [집호자執虎子-변기잡이]라 불렸다. 소칙과 같은 군 출신의 길무는 당시 현령을 역임하였으나, 이후 한직으로 좌천되었다. 길무는 소칙을 만났을 때 그를 조소하며 말했다. 

[출사를 하더라도 집호자 따위 일은 말도 안 된다.] 

소칙은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대처럼 녹거(작은 수레)를 모는 고생은 익숙지 않으니 말일세.] 

이전 소칙이 금성에 있을 때, 한제가 양위하였음을 듣고 (한제가) 붕어하였을 것이라 여겼다. 이에 복상하였으나, 후에 건재함을 듣고 자신의 행동을 불민히 여겨 마음으로부터 입을 다물어 버렸다. 임치후 조식은 선제(조조)의 환심을 잃은 것을 슬퍼하여 역시 격렬히 한탄하며 곡했다. 이후 문제가 유람을 나왔다가 임치후를 떠올리며 분하게 여겨 좌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사람의 마음은 제각각인 터이다. 내가 대위를 잇게 되었던 때, 천하에 곡하는 자가 있었다.]

이 때, 시종하던 신하들은 황제의 발언에는 이유가 있을 것(임치후에 관한) 이라 여겼으나, 소칙은 자신의 일이라 생각하고 말에서 내려 진사(사죄)하려 하였다. 시중 부손이 그에게 눈짓을 하였으므로 겨우 그 사정을 이해했다. 

// 손성이 말한다. 무릇 선비란 자는 비난할만한 자는 거두지 않고, 이미 거둔 자에게는 비난하지 않는다 하니, 출처진퇴를 장난처럼 할 수 있겠는가! 소칙은 이미 신 왕조에 이름을 같이 하였고, 다른 대를 섬겼으니 (한조와 위조를 말하는 듯) 이에 두 마음을 품었다는 말에 화를 내고, 엄한 말로 다투려 하였으니, 고아한 군자의 거취의 분별이라 할 수 있겠는가? [시경]에 이르기를 [선비된 자가 분별이 없고, 그 행함을 두 번, 세 번 바꾼다(시경 맹편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남자란 믿을 수 없으니, 그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士也罔極,二三其德]) 고 한다. 선비(사내로 해석해야 옳음)가 그 행로를 두 세 차례 바꾸는 것만으로 처를 잃게 된다. 신하된 자는 어떠하겠는가? 

그래서 소칙은 대답하는 것을 즉시 멈추었다. 문제가 소칙에게 질문했다.

“이전에 주천(酒泉)과 장액(張掖)을 격파시킨 이후로 서역(西域)에서 사자가 내조하고, 돈황(燉煌)에서는 직경이 1촌이나 되는 큰 진주를 헌상했는데, 다시 교역하면 이익을 구할 수 있지 않겠소?”

소칙이 대답했다.

“만일 폐하께서 교화(敎化)로 중국(中國)을 다스릴 수 있고, 덕을 사막(沙漠)까지 퍼지게 한다면 이익을 구하지 않으셔도 자연스럽게 올 것입니다. 구하여 얻는다면 진귀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묵묵히 있었다. 후에 소칙이 문제를 수행하여 사냥을 나갔을 때, 나무 울타리가 공고하지 못하여 사름이 달아나자 문제는 매우 노여워하며 교의(交椅 : 다리가 교차되어 접을 수 있게 된 의자)에 앉아 칼을 뽑아서 감독하는 관리들을 전부 잡아들여 죽이려고 했다. 소칙이 머리를 조아리고 말했다.

“신이 듣건대, 옛날의 성스러운 왕은 금수(禽獸)로 인해서 사람을 해치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당요(唐堯)의 교화를 융성하게 하려고 하시면서, 오히려 사냥놀이를 하면서 이처럼 많은 관리들을 죽이려고 하시니, 우둔한 신하로서는 생각할 수 조차 없는 일입니다. 저는 감히 죽음을 각오하고 사면할 것을 청합니다.”

문제가 말했다.

“그대는 충직한 신하로다.”

그리고 모두 사면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위문제는 소칙을 꺼려하게 되었다.

황초 4년(223)에 소칙은 동평상(東平相)으로 좌천되었다. 임지에 도착하기 전에 길에서 병이 나 세상을 떠났는데, 시호를 강후(剛侯)라고 했다. 소칙의 아들 소이(蘇怡)가 작위를 계승했다. 소이가 죽었지만 아들이 없었으므로 동생 소유(蘇愉)가 작위와 봉토를 계승했다. 소유는 함희(咸熙) 연간에 상서(尚書)가 되었다.[4]

[4]소유(蘇愉)의 자는 휴여(休豫)라 하며 태상, 광록대부 직을 역임하였음이 [진백관명]에 보인다. [산수계사]는 소유가 충성심이 두텁고 지혜와 의지가 있다고 칭찬하고 있다.

//신 송지가 살펴보니 소유의 아들 소소()는 자를 세사(世嗣)라 하고, 오왕의 스승이 되었다. 석숭의 처는 소소의 조카딸이다. 소소의 시문이 [금곡집]에 기재되어 있다. 소소의 동생 소신()은 좌위장군직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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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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