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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서(杜恕)는 자가 무백(務伯)이고, 태화(太和) 연간에 산기황문시랑(散騎黃門侍郎)이 되었다. [1]

[1] 杜氏新書曰(두씨신서에서 말하길,) 恕少與馮翊李豐俱為父任,總角相善。及各成人,豐砥礪名行以要世譽,而恕誕節直意,與豐殊趣。豐竟馳名一時,京師之士多為之游說。而當路者或以豐名過其實,而恕被褐懷玉也。由此為豐所不善。恕亦任其自然,不力行以合時。豐以顯仕朝廷,恕猶居家自若。明帝以恕大臣子,擢拜散騎侍郎,數月,轉補黃門侍郎.

두서는 성실함을 받들고 질박하며, 거짓으로 꾸미지 않았으며, 젊어서는 명성과 명예를 얻지 못했다. 

조정에서 관리가 되어서도 붕당을 맺어 지원을 받지 않고 오로지 한마음으로 공적인 일만 바라보았다. 매번 정사(政事)에서 마땅함과 마땅하지 아니한 것을 만나면, 그는 항상 국가의 법을 끌어다가 바른 논의를 하였으므로, 시중 신비(辛毗) 등이 그를 특별히 중시했다.

당시 공경(公卿) 이하의 관료들이 정치의 이익과 손실에 대해서 활발한 의론을 벌였는데, 두서가 이렇게 말했다.

“옛날의 자사는 여섯 개 조항을 받들어 펼쳤으며, 맑고 고요함을 명예로 삼았으며 당당한 풍모가 알려졌습니다. 오늘날의 자사들에게는 군대를 인솔하지 못하게 하여 민정(民事)에 마음을 쏟도록 해야 합니다.”

오래지 않아 진북장군(鎮北將軍) 여소(呂昭)가 또 기주(冀州)를 이끌게 되자, 두서는 즉시 상소를 올려 말했다. [2]

[2] 世語曰:昭字子展,東平人。長子巽,字長悌,為相國掾,有寵於司馬文王。次子安,字仲悌,與嵇康善,與康俱被誅。次子粹,字季悌,河南尹。粹子預,字景虞,御史中丞。

─ 제왕의 도는 백성을 안정시키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으며, 백성을 안정시키는 방법은 재물을 풍요롭게 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재물을 풍요롭게 한다는 것은 근본(농업)에 힘쓰고 쓰임을 아끼는 것입니다. 

지금 두 도적(二賊: 오와 촉)은 아직 멸망하지 않아 전쟁용 수레가 자주 달려오고 있는데, 이것은 곰이나 호랑이처럼 용맹스런 인물이 힘을 발휘할 시기인 것입니다. 그러나 의관속대(衣冠束帶)를 하는 유생들까지도 허황된 것을 흠모하는 마음으로 가득하고, 논의하는 모습이 가장되고, 손자(孫子)나 오자(吳子)의 병법을 으뜸으로 추앙합니다. 주나 군의 장관들은 모두 한결같이 백성들을 구휼하고 위로하는 방법을 홀시하고, 오히려 군대를 통솔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농업과 양잠에 종사하는 백성들도 전쟁하는 일을 다투어 경쟁하고 있으니, 이는 근본에 힘쓰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국고는 해마다 비어 가는데 제도와 법령은 해마다 확충되고, 백성들의 재력은 해마다 줄어들고 부역은 해마다 늘어나고 있으니, 쓰임새를 절약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위대한 위나라는 비록 열 개 주의 토지를 점유하고 있지만, 계속된 동란으로 피폐되어 이 열 개 주의 호구 수는 지난날 한개 주의 백성들 수만도 못됩니다. 그러나 두 방면(남쪽의 오와 서쪽의 촉)에서는 참람되게도 반역하고, 북방의 오랑캐는 아직 복종하지 않으니, 이 세 곳의 국경 지대에는 전란이 일어나 어려움을 만나게 되고, 하늘(위나라)을 에워싸고 일주할 것입니다. 때문에 위대한 위나라는 현재 한 개 주의 백성을 통치하고 아홉 주(중국 전체)의 지역을 경영하고 있는데, 그 곤란함은 피곤하고 쇠약한 늙은 말을 채찍질하여 길을 가게 하는 것에 비유됩니다. 어찌 말의 기력을 사랑하고 아끼는데 유의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무황제(태조)의 절약과 검약으로 관청의 창고는 충실해졌지만, 여전히 열 개 주에 있는 병사들을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군은 또 스무 개나 됩니다.

지금 형주ㆍ양주ㆍ청주ㆍ서주ㆍ유주ㆍ병주ㆍ옹주ㆍ양주(荊揚青徐幽并雍涼) 등 국경과 인접해 있는 각 주는 모두 군대를 거느리고 있지만, 안으로는 국고를 충실하게 하고, 밖으로는 사방의 적을 제압해 믿고 의지할 만한 곳은 오직 연주ㆍ예주ㆍ서주ㆍ기주(兗豫司冀) 뿐입니다.

신은 이전에 주와 군이 병사를 관리하게 되지 오로지 전공(軍功)을 세우는 데만 마음을 쏟고 백성들 일(民事)에는 힘쓰지 않았기 때문에 지휘관을 별도로 두어 병사를 다스리는 일을 다 하도록 해야만 한다고 건의했었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여소(呂昭)를 특별히 사랑하여 다시 기주의 민정과 군사 업무를 맡도록 했습니다. 기주는 호구가 가장 많고 밭도 대부분 개간되었으며, 또 뽕나무와 대추나무가 풍부하므로 국가가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곳이니, 진실로 여소에게 또 군사 일을 맡도록 한 것은 옳지 못합니다. 만일 북방을 진압하여 지켜야만 한다고 생각하신다면, 당연히 전임대장을 두어 그곳을 진압하고 위로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관리를 배치하는 비용을 계산해도 겸임하는 관리와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재능 면에서 논하면 여소(呂昭)와 같은 사람은 비교적 수월하게 찾을 수 있습니다. 만일 조정에 진실로 인재가 부족하다면 문무의 재능을 겸비한 사람은 반드시 이와 같이 많을 수 없습니다. 이로부터 추측하면 국가는 인물에 의거하여 관직을 선발하지, 관직을 위해 인물을 선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관직에 따라 그 인물을 얻는다면 정사는 공평하고 소송은 이치에 따를 것입니다. 정사가 공평하기 때문에 백성들은 부유하고 윤택해지는 것이고, 소송이 이치에 맞기 때문에 감옥이 텅 비어 있는 것입니다. 

폐하께서 제위에 올랐을 무렵, 천하에서 형벌로 인해 재판을 받은 자가 백 수십 명이었는데, 해마다 증가하여 금년에는 5백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백성은 증가하지 않았고 법률도 엄해지지 않았습니다. 이로부터 추측하면, 정치의 교화가 점점 닳아 없어져 가는 것이 아니라 주와 군의 목(牧)과 태수가 적절히 임용되지 못한 명백한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지난해 밭 갈던 소가 죽었는데, 전국을 통틀어 보면 10분의 2가 손해를 입었습니다. 보리는 반도 수확하지 못했고, 가을에 심는 씨앗은 심지도 못했습니다. 만일 두 적이 화를 돌아보지 않고 병사를 내어 우리를 침범한다면 우리가 말을 달려 꼴초를 보내고, 수레로 좁쌀을 운반해도 천리밖에는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이 방면의 계략을 살펴보면 어찌 병사를 강하게 하는 데에만 있습니까? 무용이 있는 병사와 강한 병졸이 많은데 국가가 더욱더 많게 하면 병이 들 것입니다. 무릇 천하는 인간의 몸과 같은데, 인간의 내장이 충실해야만 사지가 비록 병들더라도 끝내는 큰 해로움이 없게 됩니다. 

지금 연주ㆍ예주ㆍ서주ㆍ기주(兗豫司冀) 또한 천하의 내장인 것입니다. 때문에 어리석은 신하는 공손하게 사주의 장관들이 특별히 근본이 되는 농업에 노력하여 사지의 중임을 감당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고립된 의견은 유지하기 어렵고, 폐하의 의향을 어기면 성공하기 어려우며, 많은 사람들의 원망하는 말은 받아들이기 어렵고,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에 신의 건의는 수년 동안 명군(明主)의 살핌을 받지 못했습니다. 무릇 이런 건의를 하는 사람은 대부분 모두 소원하거나 낮은 신분 출신입니다. 소원하고 낮은 출신의 사람의 말은 사실상 받아들여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설령 좋은 계책이 반드시 친애하는 고귀한 사람에게서 나왔더라도 친애하고 고귀한 사람들은 당연히 위의 네 가지 곤란함을 범하면서 충성과 은혜를 구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것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항상 근심하는 것입니다. ─

당시에 또 관리의 근무 평가 제도를 정하여 중앙 및 지방의 여러 관리들을 평가하자는 문제에 대한 대대적인 논의가 있었다. 두서는 그 인물의 능력을 충분히 다 이용하지 않는다면 비록 재능이 있을지라도 이로움이 없고, 몸에 쌓아 놓은 지식이 임무에 합치되지 않으며, 임무는 사회의 필요에 합치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상소를 올렸다.

- 상서(尙書) 요전(堯典)에 ‘공적을 공개적으로 살피고, 세 번 평가하여 쫓겨남과 승진을 행한다[明試以功,三考黜陟]’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진실로 제왕들을 흥성시키는 제도입니다. 그것은 능력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에 마땅한 관직을 담당하게 하고, 공적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에 마땅한 관직을 담당하게 하고, 공적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에 마땅한 봉록을 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비유를 들면, 오획(烏獲 : 전국시대 秦武王에게 임용된 힘이 센 용사)이 천균(千鈞 : 3천 근)의 물건을 들고, 장량(張良 : 한고조의 모사)과 악의(樂毅 : 전국시대 연나라 昭王의 장군)가 천리마를 선택한 것과 같습니다. 

비록 육대(六代 : 唐ㆍ虞ㆍ夏ㆍ殷ㆍ周ㆍ漢)를 지났지만 근무를 평가하는 법은 나타나지 않았고, 일곱 명의 성인(七聖 : 堯王ㆍ舜王ㆍ禹王ㆍ湯王ㆍ文王ㆍ武王ㆍ周公)을 통하여 시험한 문(文)은 후세에까지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신은 진실로 이것은 법령이 번다하여 그 상세한 정황을 모두 갖추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속어에 말하기를, ‘세상에는 혼란을 만드는 사람은 있지만 세상을 혼란하게 하는 법령은 없다(世有亂人而無亂法)’고 했습니다. 만일 법령에만 전적으로 의지하여 행했다면 당요(唐虞)와 우순(虞舜)은 후직(后稷)과 상계(商契)의 보좌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고, 은과 주는 이윤과 여망(呂望)의 보필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공적을 평가하는 것에 대해 진언하는 사람이 주대와 한대의 법률과 행정을 서술하고, 경방(京房)의 기본적인 취지를 적은 것은 성적을 평가하는 제도의 요점을 명확히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겸양의 아름다운 풍속을 숭상하고 가지런한 태평 세대를 일으키는 문제에 대해서 신은 최상의 정도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주나 군에서 인물을 살피려고 한다면, 반드시 네 과목(四科 : 秀才ㆍ孝廉ㆍ孝悌ㆍ從政)을 거쳐야 하며, 모두 사적이 있고 효험이 있은 연후에 살펴서 추천하고, 시험 삼아 공부(公府)로 불러서 백성들을 접촉하는 현의 장관으로 임명하고, 공적의 순서에 따라 전임시켜 군수로 임명하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봉록을 증가시키고 작위를 수여합니다. 이것이 성적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가장 시급한 일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그의 몸을 고관이 되게 하고, 그의 말을 채용하는 경우에는 주나 군의 행정을 담당하는 성적을 살피는 법률을 상세히 규정하여 제정하고, 법률이 준비되면 실시하고, 신용을 세우는 상을 제정해야 하며, 반드시 실행되는 형법을 실시해야 합니다. 공경 및 내조하는 관리들은 또 그 직무에 따라서 모두 근무를 평가해야 합니다.

고대의 삼공(三公)은 앉아서 정도(論道)를 논하고, 내직(內職)을 담당하는 대신들은 상하의 말을 받아들여 천자의 결함을 보충하였으며, 천자의 선행은 한 가지도 기록하지 않는 것이 없었고, 과실은 한 가지라도 거론하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하물며 천하는 지극히 크고, 모든 기틀(국가의 정사)은 많은 사람에게 이르며, 실제로 한 사람의 광명만으로 두루 비출 수는 없습니다. 때문에 군주가 맨 꼭대기의 머리가 되고, 신하는 팔다리가 되어서 그것들이 한 신체가 되어 서로 도와 완성시키는 것입니다. 

때문에 옛 사람은 묘당의 재목은 한 나무의 가지일 수 없고, 제왕의 대업 또한 한 명의 모사에서 나온 계략에 의지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로부터 말하면 어찌 대신들이 지키는 관직에 의지하여 천하를 평안히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보통 백성들의 교제에는 신의를 구하고 맹세를 지켜서 물과 불을 밟는 곤란함을 당하지 않으려고 힘쓰고, 또 자신을 이해하는 우정에 감격하여 간담을 나누고, 명성을 위해 목숨을 던지는 절개와 의리를 내세우는 자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속대(束帶)를 하고 조정에 나가 관직이 경(卿)과 상(相)까지 이른 사람이 노력하는 것은 또한 백성의 신의가 아니고, 감격해 하는 것은 자신을 이해하는 우정이 아니며, 목숨을 던져 나온 것이 어찌 명성뿐이겠습니까!

국가의 은총과 봉록을 받고 중요한 임무를 받은 대신들은 명주(明主)를 당요와 우순(唐虞)보다 나은 수준으로 올리기를 원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몸은 또한 후직(后稷)과 상계(商契)처럼 명신의 대열에 놓으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옛 사람은 세상을 다스리려는 마음이 다하지 않음을 근심하지 않고, 자신이 관리가 되려는 뜻이 만족할 수 없음을 걱정하였는데, 이것은 실제로 군주가 그들을 이렇게 만든 것입니다. 당요와 우순과 같은 명군(明君)은 후직(稷)ㆍ상계(契)ㆍ기(夔)ㆍ룡(龍)을 임명하여 일을 맡기고 그들에게 공을 이루기를 요구했으며, 과실로 죄를 짓게 되자 요와 순은 곤(鯀)을 극형에 처하고 네 명의 나쁜 사람을 추방하였습니다. 

지금 대신들은 친히 군주의 성명한 조서를 받들고, 명주(明主)의 눈 아래에서 일을 주고 직책을 제공합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마음을 공적인 일에 두고 있으니, 그들은 상대방의 존귀함과 권세에 굴복하지 않고 체포한 백성들 또한 사사로운 감정으로 아부하지 못합니다. 위험한 말과 행동으로써 조정에서 처신하는 자는 명주라면 자연스럽게 관찰할 수 있습니다. 

만일 봉록을 받는 것으로 고명(高明)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두 손을 모아 숙연히 서 있으면서 침묵하는 것을 기지가 있는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그들이 관리가 된 목적은 진실로 책임을 지지 않고 죄를 받지 않는데 있으므로 조당(祖堂)에 서서 자신을 보존하는 것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깨끗한 행동과 겸손한 언사로 조정에 있는 신하들은 또한 명주가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실제로 제 한 몸의 안전을 위해 관직을 지키는 자를 추방하고 관직에서 쫓겨나게 하는 벌을 가하지 않고, 공적인 일에 절의(節義)를 다하여 항상 의심받는다면, 공정한 덕의(德義)는 발양되지 못하고, 개인의 사적인 논의가 풍속을 이루게 될 것이고, 비록 공자가 계책을 도모할지라도 한 사람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을 것이고, 또 더구나 세속에 사는 사람임에랴! 

지금 학자들은 상앙(商鞅)과 한비(韓非)를 스승으로 섬겨 법령과 권술을 숭상하며, 유가의 학설이 오활하고 실용적인 것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다투는데, 이것은 당시 풍속 중에서 가장 심했던 폐단이고, 창업 맹주가 신중히 해야 할 문제입니다.-

후에 관리의 공적에 대한 평가는 결국 시행되지 않았다. [3]

[3] 杜氏新書曰:時李豐為常侍,黃門郎袁侃見轉為吏部郎,荀俁出為東郡太守,三人皆恕之同班友善。

악안(樂安)의 염소(廉昭)는 재능이 뛰어나 발탁되었는데, 문제가 생기는 일에 대해서 글을 올려 말하기를 매우 좋아했다. 두서가 상주문을 올려 간언했다.

- 신이 사사로이 살펴보건대, 상서랑 염소는 상서좌승(尙書左丞) 조번(曹璠)을 탄핵하고, 처벌할 일이 있으면 신고하도록 한 조서를 무시하고 서술하였으니, 그 일을 상세히 조사하여 죄를 판정하고 힐문해야 합니다. 

염소는 또 말하기를, ‘그 일에 연좌하여 죄를 묻는 사람에 대해서는 별도로 상주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상서랑 진교(陳矯)는 스스로 상주하여 감히 징벌을 그치지 못한다고 하고, 또 감히 중벌의 방식으로써 폐하에 대한 공경을 나타내지 못하니, 그 마음이 지극히 간절하고 측은하다고 했습니다. 

신은 속으로 마음 아파했으며 조정을 위하여 그를 안타까워했습니다. 성인은 시대를 선택하지 않고 나타나고, 이전 시대와 똑같은 백성을 통치합니다. 그러나 성인이 태어나면 반드시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은 도의(道義)를 따라 그들을 승진시키고, 예의를 따라 그들을 통솔하였기 때문입니다. 고대의 제왕이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다스릴 수 있었던 까닭은 멀리로는 백성들의 환심을 얻었고, 가까이로는 신하들이 지혜의 힘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지금 조정에 재직하고 있는 신하들이 모두 천하에서 가장 뛰어나서 선발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으면 사람을 임용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들이 천하에서 가장 뛰어나서 선발된 것이 아니라면 또한 관리로 임명될 수 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정치에 관한 일로 마음을 수고롭게 하고, 어떤 때는 친히 등불 아래에서 정무에 힘쓰지만, 모든 일이 순조롭지만은 못하고, 형벌도 나날이 무시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폐하의 수족이 되는 신하들이 일을 분명하게 하지 못한 명확한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그 원인을 소급해 보면, 단지 신하가 충성을 다하지 못한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 주군께서도 능력을 사용하지 못한 데에도 있습니다. 

백리해(百里奚)는 우(愚)에게는 어리석었지만, 진(秦)에게는 지혜로운 자였으며, 예양(豫讓)은 중행씨(中行氏)에게는 적당히 했지만 지백(智伯)에게는 충절을 빛냈는데, 이것은 고인의 명백한 증거인 것입니다. 지금 신하가 한 조정에서 모두 충성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이것은 조정 전체를 비방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일을 찾으면 얻을 수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국고가 충실하지 못하고, 군사들이 쉬지 못하고 있음을 깊이 느끼시고, 사계절에 입는 의복을 끊어 버리고, 폐하의 어부(御府)에서 먹는 곡식을 줄이십시오. 그 일을 폐하의 성스러운 마음으로 솔선하면, 조정에서는 폐하의 성명함을 칭찬할 것입니다. 만일 폐하께서 대신들과 함께 긴밀하게 정사를 듣고 상의하신다면, 어찌 이런 일 때문에 근심하고 걱정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기도위(騎都尉) 왕재(王才)와 총애를 받는 악공(樂公) 맹사(孟思)가 저지르는 불법행위는 수도를 진동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죄상은 작은 관리들에게 고발되었지, 공경과 대신들은 처음에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폐하가 보위에 오른 이래 사예교위(司隸校尉)와 어사중승(御史中丞)이 어찌 나라를 들어 나쁜 일을 지휘하여 조정을 숙연하게 하겠습니까? 

만일 폐하께서 지금 시대에는 훌륭한 인재가 없고, 조정에는 현명하게 보좌할 사람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신다면, 어떻게 후직과 상계의 자취를 좇기를 바랄 수 있으며, 다음 시대의 빼어난 영웅을 앉아서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현재 현명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자는 모두 높은 관직에 임명되어 많은 봉록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윗사람을 받드는 절의(節義)가 서 있지 못하고, 공에게 향하는 마음이 일관되지 못한 것은 그들에게 직책을 위임함에 있어 전일(專一)하지 못했고, 세속에서 기피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충의로운 신하는 반드시 친애함이 없고, 친애 받는 신하는 의심을 받지 않는 위치에 있으므로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도 자신의 생각을 충분히 서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만일 폐하께서 소원시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비방했다면, 그가 비방한 내용은 사실에 부합되지 않고, 사람들은 반드시 사사로이 증오하는 사람에 대한 보복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설령 그가 다른 사람을 칭찬했다고 하더라도 칭찬한 내용은 사실과 부합되지 않으며, 사람들은 반드시 사사로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좋아함을 나타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폐하의 좌우에 있는 심복이 특별한 방법으로 그들의 증오함과 사랑하는 마음을 진언한다면, 이것은 단지 사람에 관한 비난과 칭찬의 일이고 국가 정사의 손실과 이익에 대한 것으로 또한 모두 관계가 있게 될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현재 조정 신하의 마음을 활짝 열어 주고, 덕이 있는 사람의 절의를 충분하게 나타내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고대 현인의 품위와 일치시키도록 하고, 그들의 사적을 역사책에 기록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지금 폐하께서는 오히려 염소 같은 사람에게 대신들 간의 혼란함을 걱정하도록 하시니, 신은 대신들이 한 몸의 안전을 위해 관직을 지키고, 이해득실만을 관망하고 있는 것이 다음 시대의 교훈이 대상이 될까 봐 두렵습니다!

옛날에 주공(周公)은 그의 맏아들인 노후(魯侯)에게 충고하여 ‘대신들로 하여금 원망을 품도록 하지 말라[無使大臣怨乎不以]'고 했습니다. 주공은 대신들의 현명함과 어리석음을 말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현명하든 현명하지 않던 간에 모두 그 시대에 등용되었음을 밝힌 것입니다. 요는 순의 공적을 칭찬하였고, 그가 네 명의 악한 사람을 쫓아낸 것을 칭찬하였으며, 누가 크고 작은가를 강조하지 않고 죄가 있는 것만을 밝혔습니다. 

지금 조정의 신하들은 스스로 무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폐하께서는 그들을 신임하지 않고 있으며, 그들은 스스로 지혜롭지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폐하께서는 그들에게 묻지도 않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주공이 인물을 사용한 표준과 위대한 순임금이 신하를 내쫓은 원칙을 따르지 않습니까? 

폐하는 시중과 상서에게 명하여 옥좌에 앉아 있을 때는 휘장 속에서 폐하를 받들어 모시게 하고, 행동할 때는 화려한 수레를 따르게 하여서 폐하의 하문에 응하도록 하고 그들이 진술하는 것을 모두 들으시면 여러 신하들의 품행과 능력이 있고 없음을 반드시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여 충성스럽고 능력 있는 자를 승진시키고, 어리석고 열등한 자를 내쫓으시면 누가 감히 결정하지 못하고 보은(報恩)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폐하의 성명함으로써 친히 여러 신하들과 정사를 논의하여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스스로 충성을 다하게 할 수 있고, 사람들이 스스로 폐하가 그들을 신임한다고 생각하고 사람들이 스스로 충성을 다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현명하든 어리석든 능력이 있든 없든 간에 모두 폐하가 사용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조건으로 일을 다스리면 무슨 일이든 처리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기초 위에서 공을 세우는데, 무슨 공이든 이뤄지지 않겠습니까? 매번 전쟁 때마다 폐하의 조서에서는 항상 말하기를, ‘누가 응당 이 일을 걱정해야 하는가? 나 자신이 응당 걱정해야지’라고 말합니다. 

근래에 폐하께서 명령을 내린 조서에서는 또 ’공적인 일을 근심하느라 사적인 이로움을 잊은 사람은 반드시 이와 같을 수 없고, 단지 먼저 공적인 일을 생각한 후에 사적인 이로움을 생각하면 스스로 이 일을 변별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신은 엎드려 폐하의 현명한 소칙을 읽고 아랫사람에 대한 폐하의 정이 이미 명백함을 알게 되었지만, 또한 폐하께서 그 근본을 다스리지 않고 그 끝을 걱정하는 것을 괴이하게 느꼈습니다. 사람의 능력 여부는 한 개인의 본성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비록 신하들일지라도 조정의 신하로서 맡은 일을 다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현명한 군주가 사람을 임명할 때에는 재능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와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있게 하지 않습니다. 적당하지 않은 관리를 선발하여 천거했다고 하여 그 천거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조정을 가득 메운 신하들은 모두 적당하지 않은 사람을 받아들였으니, 이것이 괴이한 일일 뿐입니다. 폐하께서는 이 사람들이 힘을 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을 대신하여 그 직책을 걱정하고, 그들이 능력을 다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그들을 가르쳐 그 일을 처리하도록 하니, 이는 어찌 한낱 주상을 수고롭게 하고 신하를 편안하게 하는 것입니까? 비록 성현이 세상을 다스렸을지라도 끝까지 이런 방식으로 국가를 다스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또 대각(臺閣) 속에서 나온 금령(禁令)의 비밀이 지켜지지 않고, 인사에 관한 의뢰가 끊어지지 않을까 봐 걱정했습니다. 그리고 이른바 상대(商代) 이윤이 빈객의 출입을 영접하는 제도를 만들었다는 것을 듣고 사도를 선발했으나, 다시 흉악한 관리로 바꿔 사도아서(司徒衙暑)의 문을 지키도록 하여, 권위 있는 금령은 그 흉악한 관리로부터 실행되었으므로 사실은 금지하는 기본 뜻은 세우지 못했습니다. 

옛날 한 안제(漢安帝) 때, 소부(少府) 두가(竇嘉)가 죄 없는 정위(廷尉) 곽궁(郭躬)의 형의 아들을 초빙하려고 하자, 여러 신하들이 상주문을 올려 그를 탄핵하는 문장이 분분했습니다. 근래에 사예교위(司隸校尉) 공흠(孔羨)이 성격이 미친 듯 날뛰는 대장군(大將軍)의 동생을 초빙하려고 했을 때, 관련 있는 직책의 관리들은 오히려 말이 없었고, 단지 권력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뜻을 이어 관속(官屬)을 받는 것보다 더 심한 것입니다. 관원을 선발하여 천거하는 것이 실사구시(實事求是)가 아닌 것은 인사상(人事上)의 큰 문제입니다. [4] 두가는 친척의 총애를 받았으며, 곽궁은 사직의 중요한 신하가 아니었지만, 오히려 이와 같이 했습니다. 

[4] 臣松之案大將軍,司馬宣王也。晉書云:「宣王第五弟,名通,為司隸從事。」疑恕所云狂悖者。通子順,封龍陽亭侯。晉初受禪,以不達天命,守節不移,削爵土,徙武威。

오늘날의 상황을 옛 일에 비춰 보면, 눈앞의 혼란스런 상황은 모두 폐하께서 스스로 신하들을 감독하여 반드시 시행할 징벌을 가하지 않고 권력자들에게 영합하는 근원을 단절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윤의 옛날 제도와 흉악한 관리에게 문을 지키도록 한 것은 모두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이 아닌 것입니다. 설사 신이 지금 올린 말씀이 폐하에게 받아들여진다 하더라도, 어찌 간사함이 소멸되지 않는 것을 걱정하며 염소 같은 소인을 양성하겠습니까!

무릇 나쁜 일을 규탄하고 적발하는 것은 본래 충의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소인을 증오하며 이런 임무를 집행하는 자는 도리를 돌아보지 않고, 단지 자기의 승진만을 받아들이기를 구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폐하께서 다시 이 일의 처음과 끝을 살피지 않는다면, 반드시 뭇사람들의 뜻을 위배하고 세상 사람을 적대시하는 소인을 공으로 받들고, 다른 사람을 은밀히 고하는 사람을 충절을 다하는 사람으로 삼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어찌 통달하고 위대한 인재가 있는데도 다시 이런 일을 할 수 없겠습니까? 

실제로 그들은 도리를 돌아보고 시비를 분명히 판별했지만, 이와 같이 하지는 않았을 뿐입니다.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도의를 등지고 이익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게 하는 것은 군주가 가장 싫어하는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또 이와 같이 하는 것에 대해 어떠한 즐거움이 있었습니까? 무엇 때문에 그것이 싹트는 것을 근절시키지 않았습니까? 먼저 군주의 의향에 순응함으로써 용납과 찬미를 구하는 것은 대개 모두 천하에서 가장 천박하고 덕행과 도의가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들의 뜻은 군주의 마음에 적합하게 하는 데 힘쓸 뿐이지 천하를 다스려 백성을 안정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무엇 때문에 대업을 시험 삼아 바꾸어 그들에게 뜻을 표시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견지하고 성스러운 뜻을 어기는 것은 평안한 일이고, 존귀하고 빛나는 관직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영광스런 일이며, 천 가지 봉록을 먹는 것은 넉넉한 대우입니다. 

다른 사람의 신하는 비록 어리석지만 이와 같이 즐겁지 아니함이 없으며, 성스러운 뜻을 범하고 어기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도리에서 핍박당하고 스스로 그렇게 하려고 힘쓴 것입니다. 진실로 폐하께서 마땅히 연민을 느끼시고 그들을 도와 일을 조금 맡기셔야 합니다. 어떻게 염소 등이 다른 사람을 뒤엎는 사사로운 뜻에는 찬동하면서 이와 같은 사람은 홀시하십니까? 지금 밖으로는 호시탐탐 노리는 적이 있고, 안으로는 빈궁한 백성들이 있으니 폐하께서는 국가의 손실과 이익, 정사의 득실을 마땅히 크게 헤아리셔야만 됩니다. 이런 일에 대해서는 한 치의 게으름도 있을 수 없습니다. ─

두서는 조정에서 8년간 관리로 있었으며, 그의 의론은 강직하여 굽히지 않았는데, 모두 이와 유사하였다. 

그는 밖으로 나와서 홍농태수(弘農太守)로 임명되었고 몇 년 후에는 조나라의 상(趙相)으로 전임되었는데, [5] 질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6] 그 후에 집에 있으면서 하동태수(河東太守)로 기용되었으며, 1년쯤 지나 회북도독호군(淮北都督護軍)으로 승진했는데 질병으로 또 물러났다. 

[5] 魏略曰:恕在弘農,寬和有惠愛。及遷,以孟康代恕為弘農。康字公休,安平人。黃初中,以於郭后有外屬,并受九親賜拜,遂轉為散騎侍郎。是時,散騎皆以高才英儒充其選,而康獨緣妃嬙雜在其間,故于時皆共輕之,號為阿九。康既(無)才敏,因在宂官,博讀書傳,後遂有所彈駮,其文義雅而切要,眾人乃更加意。正始中,出為弘農,領典農校尉。康到官,清己奉職,嘉善而矜不能,省息獄訟,緣民所欲,因而利之。郡領吏二百餘人,涉春遣休,常四分遣一。事無宿諾,時出案行,皆豫敕督郵平水,不得令屬官遣人探候,修設曲敬。又不欲煩損吏民,常豫敕吏卒,行各持鐮,所在自刈馬草,不止亭傳,露宿樹下,又所從常不過十餘人。郡帶道路,其諸過賓客,自非公法無所出給;若知舊造之,自出於家。康之始拜,眾人雖知其有志量,以其未嘗宰牧,不保其能也;而康恩澤治能乃爾,吏民稱歌焉。嘉平末,從渤海太守徵入為中書令,後轉為監。

[6] 杜氏新書曰:恕遂去京師,營宜陽一泉塢,因其壘塹之固,小大家焉。明帝崩時,人多為恕言者。

두서는 임지에서 정사의 대략적인 체재를 보존하는데 힘썼으나, 은혜와 애정을 심어 백성들의 환심을 얻은 점에 있어서는 두기에 미치지 못했다. 오래지 않아 그는 어사중승(御史中丞)에 임명되었다. 

두서가 조정에 있을 때, 당시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자주 외부에서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는 또 밖으로 나와 유주자사(幽州刺史)로 임명되었고 건위장군(建威將軍)이 되었으며, 사지절 호오환교위(使持節護烏丸校尉)가 되었다. 

그 당시 정북장군(征北將軍) 정희(程喜)가 괵(屯) 땅에 주둔하고 있었다. 상서(尚書) 원간(袁侃) 등이 두서에게 충고하여 말했다.

“정신백(程申伯: 정희)은 선제(先帝) 때에 청주(青州)자사가 되었는데 여남태수 겸 청주군의 총지휘관이 되어 청주에 있는 전국양(田國讓)과 다투었소. 당신은 지금 그와 장절(杖節)을 갖고 있고, 함께 한 성에 주둔해 있으니, 깊이 생각하여 그를 대접해야만 하오.”

그러나 두서는 원간의 이 말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가 임명된 지 1년이 채 못 되어, 선비족(鮮卑)의 대인(大人) 아들이 관소를 지나지 않고 기병 수십 명을 인솔하여 유주성으로 왔다. 유주에서는 선비족 대인의 아들을 따라온 한 소년을 참수했는데 황제에게 보고서를 써서 알리지도 않았다. 정희는 이것으로 상주하여 두서를 탄핵했다. 조정에서는 정위(廷尉)로 보냈고, 그 죄는 사형에 해당했다.

가평(嘉平) 원년(249)에 그의 부친 두기가 근무하다가 물에 빠져 죽었기 때문에 사면하여 서민이 되게 하고 장무군(章武郡)으로 추방시켰다. [7]

[7] 杜氏新書曰:喜欲恕折節謝己,諷司馬宋權示之以微意。恕答權書曰:「況示委曲。夫法天下事,以善意相待,無不致快也;以不善意相待,無不致嫌隙也。而議者言,凡人天性皆不善,不當待以善意,更墮其調中。僕得此輩,便欲歸蹈滄海乘桴耳,不能自諧在其間也。然以年五十二,不見廢棄,頗亦遭明達君子亮其本心;若不見亮,使人刳心著地,正與數斤肉相似,何足有所明,故終不自解說。程征北功名宿著,在僕前甚多,有人出征北乎!若令下官事無大小,咨而後行,則非上司彈繩之意;若咨而不從,又非上下相順之宜。故推一心,任一意,直而行之耳。殺胡之事,天下謂之是邪,是僕諧也;呼為非邪,僕自受之,無所怨咎。程征北明之亦善,不明之亦善,諸君子自共為其心耳,不在僕言也。」喜於是遂深文劾恕。

두서는 뜻이 크고 기개가 있어서 자기의 생각대로 하였으며, 재난을 방비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므로 결국에는 이런 실패를 초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처음에 두서가 조군(趙郡)에서 수도로 돌아왔을 때, 진류(陳留)의 원무(阮武) 또한 청하태수(清河太守)로부터 부름을 받아 함께 스스로 정위(廷尉)에게로 가서 이름을 적었다. 원무가 두서에게 말했다.

“관상을 보니, 그대의 재기와 품성은 공정한 도를 따를 수 있지만 그것을 지키는 데에 엄격하지 못하고, 그릇과 능력은 대관(大官)의 자리에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을 구하는 방법이 순조롭다고 할 수 없으며, 재능과 학식은 고금의 일을 서술할 수 있지만 뜻이 일관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재능은 있지만 사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신은 한가하니, 깊이 생각하면 한 집안(一家)의 말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두서는 장무군(章武郡)으로 물러나 곧 체론(體論) 8편을 편찬했으며, 또 흥성론(興性論) 1편을 지었는데, 이런 것들은 모두 스스로 동기를 해설하고 지은 것이다. [8]

[8] 杜氏新書曰:以為人倫之大綱,莫重於君臣;立身之基本,莫大於言行;安上理民,莫精於政法;勝殘去殺,莫善於用兵。夫禮也者,萬物之體也,萬物皆得其體,無有不善,故謂之體論。

가평 4년(252)에 두서는 좌천된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감로 2년(257), 하동군(河東郡)의 악상(樂詳)은 나이가 90여 세인데도 글을 올려 두기가 남긴 공적을 기려 조정에서는 감동했다. 그래서 두서의 아들 두예(杜預)를 풍락정후(豐樂亭侯)로 봉하고, 식읍 1백 호를 주었다. [9]

[9] 魏略曰:樂詳字文載。少好學,建安初,詳聞公車司馬令南郡謝該善左氏傳,乃從南陽步〔涉〕詣〔許,從〕該問疑難諸要,今左氏樂氏問七十二事,詳所撰也。所問既了而歸鄉里,時杜畿為太守,亦甚好學,署詳文學祭酒,使教後進,於是河東學業大興。至黃初中,徵拜博士。于時太學初立,有博士十餘人,學多褊狹,又不熟悉,略不親教,備員而已。惟詳五業並授,其或難解,質而不解,詳無慍色,以杖畫地,牽譬引類,至忘寢食,以是獨擅名於遠近。詳學既精悉,又善推步三五,別受詔與太史典定律曆。太和中,轉拜騎都尉。詳學優能少,故歷三世,竟不出為宰守。至正始中,以年老罷歸於舍,本國宗族歸之,門徒數千人。

두서의 주의(奏議)ㆍ논박(論駮)은 모두 본받을 만한데, 그 시대에 있었던 절실하게 중대한 일만을 엮어 이 편에 기록했다. [10]

[10] 杜氏新書曰:恕弟理,字務仲。少而機察精要,畿奇之,故名之曰理。年二十一而卒。弟寬,字務叔。清虛玄靜,敏而好古。以名臣門戶,少長京師,而篤志博學,絕於世務,其意欲探賾索隱,由此顯名,當塗之士多交焉。舉孝廉,除郎中。年四十二而卒。經傳之義,多所論駮,皆草創未就,惟刪集禮記及春秋左氏傳解,今存于世。預字元凱,司馬宣王女婿。王隱晉書稱預智謀淵博,明於理亂,常稱「德者非所以企及,立功立言,所庶幾也」。大觀群典,謂公羊、穀梁,詭辨之言。又非先儒說左氏未究丘明意,而橫以二傳亂之。乃錯綜微言,著春秋左氏經傳集解,又參考眾家,謂之釋例,又作盟會圖、春秋長曆,備成一家之學,至老乃成。尚書郎摯虞甚重之,曰:「左丘明本為春秋作傳,而左傳遂自孤行;釋例本為傳設,而所發明何但左傳,故亦孤行。」預有大功名於晉室,位至征南大將軍,開府,封當陽侯,食邑八千戶。子錫,字世嘏,尚書左丞。晉諸公贊曰:嘏有器局。預從兄斌,字世將,亦有才望,為黃門郎,為趙王倫所枉殺。嘏子乂,字洪治。少有令名,為丹陽丞,早卒。阮武者,亦拓落大才也。案阮氏譜:武父諶,字士信,徵辟無所就,造三禮圖傳於世。杜氏新書曰:武字文業,闊達博通,淵雅之士。位止清河太守。武弟炳,字叔文,河南尹。精意醫術,撰藥方一部。炳子坦,字弘舒,晉太子少傅,平東將軍。坦弟柯,字士度。荀綽兗州記曰:坦出紹伯父,亡,次兄當襲爵,父愛柯,言名傳之,遂承封。時幼小,不能讓,及長悔恨,遂幅巾而居,後雖出身,未嘗釋也。性純篤閑雅,好禮無違,存心經誥,博學洽聞。選為濮陽王文學,遷領軍長史,喪官。王衍時為領軍,哭之甚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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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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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개구리

2013.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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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이 빠져있어서 미번역분이지만 일단 옮겨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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