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고원님 - 고원님 블로그 

 
악진의 자는 문겸(文謙)이고 양평(陽平)군 위국(衛國)현 사람이다. 용모와 체구는 작으나 담력이 뛰어나, 태조를 따라 다니며 장하리[
帳下吏= 군중(軍中)의 보좌관. 출병할 때는 막사(帳) 중에서 주로 있을 때가 많아서 붙여진 명칭입니다]가 되었다. 고향 군으로 돌려보내져 병사를 모집하게 했는데, 천여 명을 모아 돌아오니, 군가사마[軍 假司馬=군가사마가 정식관직 체계에 있지 않습니다. 이때의 관직이나 관명이 그렇듯 임시 관직인 듯합니다. 원래 군사마(軍司馬)란 관직은 한나라 때에 있습니다. 대장군의 군영에 5부(五部)를 두었는데, 그 부마다 2천석 관직인 부교위(部校尉) 1명, 1천석 관직인 군사마 1명을 두었습니다. 교위부를 안둘 때는 그냥 군사마만 두었습니다. 여기서도 군가사마란 아마도 군사마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식 임명이 아니기에 "가(假=임시)"란 명칭을 덧붙여 놓은 듯합니다] 함진도위(陷陳都尉)로 삼았다. 
 
태조를 수행해 복양(濮陽-연주 동군 복양현)에서 여포, 옹구(雍丘-연주 진류군 옹구현)에서 장초(張超), 고(苦-예주 진국 고현)에서 교유(橋蕤)를 공격하는데, 모든 싸움에서 선두에 서서 공을 세워 광창정후(廣昌亭侯)에 봉해졌다. 
 
태조를 수행해 안중(安衆-형주 남양군 안중현)에서 장수(張繡)를 치고, 하비(下邳-서주 하비국 하비현)에서 여포를 포위할 때는 별장(別將)을 격파하고, 사견(射犬-하내군 야왕현 일대)에서 휴고(眭固)를 치고 패(沛-예주 패국 패현)에서 유비를 공격해 이들을 모두 격파하고 토구교위(討寇校尉)에 임명되었다. 
 
황하를 건너 획가(獲 嘉-하내군 획가현)를 공격하고, 돌아와 태조를 수행해 관도(官渡-하남군 중모현 일대)에서 원소를 쳤는데 힘을 다해 싸워 원소의 장수인 순우경(淳于瓊)을 참斬했다. 태조를 수행해 원담, 원상을 여양(黎陽-기주 위군 여양현)에서 공격해 그 대장인 엄경(嚴敬)을 참斬하고 행(行) 유격장군(遊擊將軍)에 임명되었다. 별도로 황건적을 쳐서 깨뜨리고 낙안군(樂安郡-청주 낙안군)을 평정했다.
 
태조를 수행해 업(鄴-기주 위군 업현)을 포위해 평정했다. 태조를 수행해 남피(南皮-기주 발해군 남피현)의 원담을 쳤는데, 선두에 서서 원담의 동문(東門)에 진입했다. 원담이 패한 후 별도로 옹노(雍奴-유주 어양군 옹노현)를 공파(攻破)했다.
 
건안 11년(206년), 태조가 한제(漢帝-한나라 황제)에 표(表)를 올려 악진과 우금, 장료를 칭찬했다, 
 
“이들은 무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계략을 두루 갖추고 있으며 품성에 있어서는 충성심이 한결같아 절의를 지킵니다. 싸움에 임해서는 늘 지휘관(督)으로 군사들을 이끌어 강고한 적을 돌파하고 어떤 견고한 적이라도 함락시키지 못하는 법이 없고 직접 북채를 잡고 북을 울리며 지칠 줄 몰랐습니다. 또한 따로 파견되어 정벌할 때는 군을 통어(統禦)함에 병사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화합하고 영을 받드는데 있어 이를 거스른 일이 없었으며 적을 대적할 때는 과단성 있게 행동하고 어떠한 실수도 없었습니다. 논공기용(論功紀用)하여 응당 이들이 각각 현총(顯寵)되어야 합니다.”
 
이에 우금을 호위(虎威)장군, 악진을 절충(折衝)장군, 장료를 탕구(盪寇)장군으로 임명했다.
 
악진은 별도로 고간(高幹)을 정벌했는데, 북쪽 길을 통해 상당(上黨-병주 상당군)으로 들어가 우회해서 배후를 쳤다. 고간 등이 되돌아가 호관(壺關)을 지키자 (악진은) 연달아 싸워 적의 머리를 베었다. 고간이 견수(堅守-굳게 지킴)해 공략하지 못했는데 태조가 친히 정벌하여 호관을 함락했다. 
 
태조는 관승(管承)을 정벌하기 위해 순우(淳于-청주 북해국 순우현)에 주둔하고, 악진을 이전과 함께 보내 공격하게 했다. 관승이 패주해 바다의 섬으로 달아났고 해안지대가 평정되었다.
 
형주가 아직 복속하지 않았으므로 악진을 양적(陽翟-예주 영천군 양적현)에 주둔시켰다. 그 뒤 태조를 수행해 형주를 평정했다. 악진을 남겨 양양(襄陽)에 주둔시켰다. (그 후) 관우, 소비(蘇非) 등을 모두 패주시켰고, 남군(南郡) 일대 산과 계곡에서 거주하던 만이(蠻夷)들이 악진에게로 와서 투항했다. 또한 유비를 쳐서 임저장(臨沮長) 두보(杜普), 정양장(旌陽長) 양대(梁大)를 모두 대파했다. 
 
(※ 문빙전에 보면 강하태수 문빙이 악진과 함께 심구에서 관우를 토벌했다고 하고, 선주전에 보면 유비가 입촉했을 때 유장에게 보낸 서신에서 ‘관우가 청니에서 악진과 서로 대치하고 있다’고 한 걸 보면, 악진이 관우를 패주시킨 것은 212년 무렵의 사건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임저나 정양장을 대파한 껀도 앞뒤 시간 순서로 볼 때 역시 이 무렵의 사건으로 보입니다)
 
그 뒤 태조를 수행해 손권을 정벌했고(212년 겨울의 일) 악진에게 절(節)을 내렸다.(가절假節) 태조가 돌아갈 때 악진과 장료, 이전을 남겨 합비에 주둔시켰다. 
 
식읍 5백 호를 더 늘려주어 예전과 합쳐 모두 1,200호가 되었다. 악진이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으므로 (악진의 식읍 중) 5백 호를 떼어내어 아들 한 명을 열후에 봉했다. 악진은 우장군(右將軍)으로 관위가 올랐다. 
 
건안 23년(218년) 죽었다. 시호를 내려 위후(威侯)라 했다. 아들 악침(樂綝)이 후사를 이었다. 
 
악침은 과단성이 있고 굳세어(果 毅) 부친의 풍도를 갖추고 있었고, 관직이 양주(揚州)자사에 이르렀다. 제갈탄(諸葛誕)이 모반해 악침을 엄습(掩襲)해 죽였다. 조서를 내려 이를 도석(悼惜-죽은 이를 애도함)하고 위위(衛尉)에 추증하고 시호를 내려 민후(湣侯)라 했다. 아들 악조(樂肇)가 후사를 이었다.


평하여 말한다. ― 조조가 이와 같은 위대한 무공을 세웠지만, 당시의 훌륭한 장수중에서는 이 다섯 사람(장료ㆍ악진ㆍ우금ㆍ장합ㆍ서황)이 가장 우수했다. 우금은 가장 강인하고 위엄이 있었지만, 그가 죽을 때까지 지킬 수 없었다. 장합은 변화에 교묘하게 대처하여 이름을 날렸고, 악진은 용감성과 과단성으로 명성을 떨쳤지만, 그들의 사적을 살펴보면 전해들은 것과 부합되지 않는다. 간혹 설명이나 기록이 누락된 곳이 있어서 장료와 서황처럼 상세하게 갖추어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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