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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합(張郃)의 자는 준예(俊乂)이고 하간(河間)군 막(鄚)현 사람이다. (※하간군은 기주 소속) 한나라 말, 모병에 응해 황건적을 토벌하고 군사마(軍司馬)가 되었고 한복(韓馥)에 속했다. 한복이 패망하자 병(兵)을 이끌고 원소에 귀부했다. 원소는 장합을 교위(校尉)로 삼고 공손찬과 맞서게 했다. 공손찬을 격파하는데 장합의 공이 많았으므로 영국중랑장(寧國中郎將)으로 올렸다. 
 
태조(太祖-조조)가 관도(官渡)에서 원소와 서로 맞섰을 때(주1) 원소는 장수 순우경(淳于瓊) 등을 보내 군량운반을 지휘하게 하여 오소(烏巢)에 주둔했는데, 태조가 친히 군을 이끌고 가서 급격(急擊-급습)했다. 

(주 1) [한진춘추]에서 이르길 – 장합이 원소를 설득하며 말했다, “공이 비록 연달아 이겼으나 조공과 맞붙지 마십시오. 은밀히 경기(輕騎)를 보내 그 남쪽을 공략해 끊는다면 조공의 군은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 그러나 원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장합이 원소를 설득하며 말했다, “조공(曹公-조조)의 군사가 정예하니 필시 순우경 등을 격파할 것입니다. 순우경 등이 격파되면 장군의 대사가 어그러질 것이니, 마땅히 급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해야 됩니다.” 
 
곽도(郭圖)가 말했다, “장합의 계책은 옳지 않으며 조공의 본영을 들이치는 것만 못합니다. (조공은) 사세상 필시 환군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풀린다’(不救而自解)는 것입니다.” 
 
장합이 말했다, “조공의 둔영이 견고하므로 공격해도 함락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순우경 등이 사로잡힌다면 우리들 또한 모두 포로가 될 것입니다.” 
 
원소는 다만 경기(輕騎-경무장 기병)로 순우경을 구원하게 하고 중병(重兵-대군)으로 태조의 본영을 공격했으나 함락하지 못했다. 과연 태조는 순우경 등을 격파하고 원소군은 궤멸되었다. 
 
곽도가 부끄러워하며 또 장합을 참소하며 말했다, “장합이 군이 패한 것을 기뻐하며 불손(不遜)한 말을 했습니다.” 장합이 이를 두려워하여 태조에 귀부했다. (주2)
 
(주 2) 신송지(松之)가 살펴보건대, 무기(武紀-무제기)와 원소전에서는 원소가 장합, 고랍을 보내 태조의 둔영을 공격했으나 장합 등은 순우경이 격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투항하였고 이에 원소군이 크게 궤멸되었다고 했다. 이는 즉 장합 등이 항복한 것으로 말미암아 그 후 원소군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열전(장합전)에서는 원소군이 먼저 궤멸하고 곽도의 참소를 두려워하여 (장합이) 태조에게 귀부했다고 하니, 서로 엇갈리어 일치하지 않는다.
 
태조는 장합을 얻은 것을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옛날 자서(子胥-오자서)는 일찍 깨닫지 못해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렸으니 어찌 미자(微子)가 은(殷)나라를(은나라 폭군 주(紂)왕)  저버리고 한신(韓信)이 한나라에 귀부한 것만 하겠소?” 장합을 편장군(偏將軍)으로 임명하고 도정후(封都亭)에 봉하고 군사를 주었다.
 
(※ 미자微子는 은나라 말 주왕(紂王)의 폭정에 대해 간언하다 용납되지 못하고 주(周) 무왕(武王)에 귀부한 인물. 새로 투항한 장합을 옛 현인인 미자, 한신에 비유한 것으로, 오자서처럼 몸이 위험에 빠지기 전에 일찍 투항한 것을 치하하는 말)
 
태조를 수행해 업(鄴) 을 공격하고 이를 함락시켰다. 또한 태조를 수행해 발해(渤海-기주 발해군)에서 원담을 공격하고, 별도로 군을 이끌고 옹노(雍奴-유주 어양군 옹노현)를 포위해 대파했다. 태조를 수행해 유성(柳城)을 토벌할 때 장료 등과 함께 군의 선봉이 되었고 공을 세워 평적장군(平狄將軍)으로 올랐다. 별도로 동래(東萊-청주 동래군)를 정벌해 관승(管承)을 쳤고 또한 장료 등과 함께 진란(陳蘭), 매성(梅成) 등을 토벌해 깨뜨렸다. 
 
태조를 수행해 위남(渭南-위수 남쪽)에서 마초, 한수 등을 격파하고 안정(安定-양주 안정군)을 포위해 양추(楊秋)의 항복을 받았다. 하후연과 함께 부적(鄜賊-부현의 도적. 부鄜는 장안 북쪽) 양흥(梁興)과 무도(武都-양주 무도군) 저(氐)족을 쳤다. 또다시 마초를 격파하고 송건(宋建)을 평정했다. 
 
태조가 장로(張魯)를 정벌할 때, 먼저 장합을 보내 제군(諸軍)을 이끌고 흥화(興和)의 저왕(氐王-저족 왕) 두무(竇茂)를 치게 했다. 태조는 산관(散關)을 지나 한중으로 들어가면서 또 다시 먼저 장합을 보내 보졸 5천을 이끌고 선두에서 길을 뚫도록 했다. 양평(陽平)에 도착했는데 장로가 항복하자 태조는 돌아왔고, 장합과 하후연을 남겨 한중을 수비하며 유비에 맞서도록 했다. 
 
장합은 따로 제군을 이끌고 파동(巴 東), 파서(巴西)의 2군을 항복시키고, 그 백성들을 한중으로 옮겼다. 탕거(宕渠-익주 파군 탕거현)로 진군하여 유비의 장수인 장비(張飛)와 겨루었고, 군을 물려 남정(南鄭-익주 한중군 남정현)으로 돌아왔다. 탕구장군(盪寇將軍)에 임명되었다. 
 
유비가 양평(陽平)에 주둔하자 장합은 광석(廣石)에 주둔했다. 유비가 정졸(精卒-정예병) 1만 여명을 10부(部)로 나누고 밤중에 장합을 급공(急攻-급습)했다. 장합은 친병(親兵)을 이끌고 박전(搏戰-치열하게 맞서 싸움)했고 유비는 이길 수 없었다. 그 뒤 유비가 주마곡(走馬谷)에서 도시 주변을 불태웠다. 하후연이 불을 끄러 다른 길로 왔다 유비와 서로 만났다. 단병(短兵-칼, 창과 같은 짧은 무기)으로 서로 칼을 맞부딪치며 교전하다 마침내 하후연이 죽었고 장합은 양평(陽平)으로 돌아왔다. (주3) 

(주3) [위략]에서 이르길 – 비록 하후연이 도독(都督)이었으나 유비는 장합을 (두려워해) 꺼린 반면 하후연은 경시했다. 이에 하후연이 죽자 유비가 말했다, “응당 우두머리를 잡아야지, 이 자를 잡아서 무엇하겠는가!”
 
당시 원수(元 帥-총대장)를 잃었으므로 유비가 이를 틈탈까 두려워하며 삼군이 모두 실색(失色-놀라서 얼굴빛이 변함)했다. 이에 하후연의 사마(司馬)인 곽회(郭淮)가 군중에 영을 내렸다, “장(張) 장군은 국가의 명장(名將)으로 유비가 (두려워해) 꺼리는 분이다. 지금의 긴급한 사태는 장 장군이 아니면 누구도 안정시킬 수 없다” 이에 장합을 추천해 군주(軍主-군의 우두머리)로 삼았다. 
 
장합이 나서서 군사들을 통솔하고 진영을 안돈하고 제장들이 모두 장합의 절도(節 度-지휘, 명령)를 받게 되자 군심이 안정되었다. 태조는 장안에서 사자를 보내 장합에게 절을 내렸다(假節) 그리고 태조가 친히 한중에 도착하자 유비는 높은 산을 지키며 감히 나와 싸우지 못했다. 이에 태조는 한중의 제군(諸軍)을 이끌고 나왔고 장합은 진창(陳倉-우부풍 진창현)으로 물러나 주둔했다.
 
문제(文帝-위문제 조비)가 왕위에 오르자(220년) 장합을 좌장군(左將軍)으로 임명하고 도향후(都鄕侯)로 올려 봉했다. 
 
문제가 제위에 오르자 막후(鄚侯) 로 올려 봉했다. 조서를 내려 조진과 함께 안정(安定)의 노수호(盧水胡-胡의 일파)와 동강(東羌-강족의 일파)을 토벌하게 했다. 장합과 조진에 명해 궁으로 와서 조알하게 하고 남쪽으로 보내 하후상(夏侯尙)과 함께 강릉(江陵-형주 남군 강릉현)을 공격하게 했다. 장합은 별도로 제군을 지휘해 장강을 건너며 섬 위의 둔오(屯塢-방어진지)들을 점령했다.
 
명제(明帝-위명제 조예)가 즉위하자(226년) 남쪽으로 보내 형주(荊州)에 주둔하게 했다. 사마선왕(司馬宣王-사마의)과 함께 손권의 별장(別將)인 유아 등을 공격(劉阿)했는데, 기구(祁口)에까지 추격하여 교전해 이를 격파했다. 
 
제갈량(諸 葛亮)이 기산(祁山)으로 출병하자(228년의 일) 장합에 특진(特進)의 지위를 더하고 제군을 이끌게 해 파견했고, 제갈량의 장수인 마속(馬謖)과 가정(街亭)에서 맞붙었다. 마속은 험한 남산에 의지했고, 내려와 성을 점거하지 않았다. 장합은 그 급도(汲道-용수로)를 끊고 들이쳐 마속을 대파했다. 남안(南安), 천수(天水), 안정군(安定郡)이 모반해 제갈량에 호응했었는데, 장합이 이를 모두 깨뜨리고 평정했다. 
 
조서를 내렸다, “적(賊) 제갈량이 파촉(巴蜀)의 무리를 이끌고 나왔다 효호지사(虓虎之師-포효하는 범과 같은 군대)를 만났도다. 장군이 갑옷을 입고 무기를 잡고, 향하는 곳마다 적을 쳐부수어 평정하니(所向克定) 짐이 이를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식읍을 1,000호 늘려 예전과 합해 모두 4,300호가 되게 하라.”
 
사마선왕이 형주에서 수군을 조련해 면수(沔 水=한수)를 따라 장강으로 들어가 오(吳)를 토벌하려 했다. 장합에게 조서를 내려 관중(關中)의 제군을 이끌고 (사마선왕에게로) 가서 절도(節度)를 받도록 했다. 형주에 도착했는데 때마침 겨울이라 물이 얕았으므로 큰 배가 다닐 수 없었다. 이에 방성(方城-남양군 엽葉현 근처)으로 돌아가 주둔했다. 
 
제갈량이 다시 출병해 진창(陳 倉)을 급공(急攻-급습)하자, 명제는 역마(驛馬)를 내어 장합을 경도(京都-수도)로 오게 했다. 명제는 친히 하남성(河南城)으로 행차해 주연을 베풀며 장합을 전송했다. 남북군사(南北軍士) [남군(南軍)은 수도경비 병력, 북군(北軍)은 궁성경비 병력] 3만을 보내고, 무위(武衛), [武衛=보통 좌•우로 나누는데, 하나의 단위부대, 즉 영(營)입니다. 보통 경비나 치안 등이 주 임무입니다] 호분(虎賁)을 [虎賁=호분중랑장과 그 휘하의 1천명을 군대를 말하는데, 주 임무가 숙위입니다]  나누어 보내 장합을 호위하도록 했다. 명제가 장합에게 물었다, “장군이 더디게 도착하면 제갈량이 이미 진창을 차지해 버리진 않았겠소?” 장합은 제갈량이 현군(縣軍-외떨어진 군사)으로 군량이 부족해 오랫동안 공격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이렇게 대답했다, “신이 도착하기도 전에 제갈량은 이미 달아났을 것입니다. 손가락을 꼽아 계산해볼 때 제갈량의 군량은 10일 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장합이 새벽과 밤을 가리지 않고 진격해 남정(南鄭)에 도착하자 제갈량이 퇴각했다. 조서를 내려 장합을 경도로 돌아오게 하고 정서거기장군(征西車騎將軍)에 임명했다.
 
장합은 변수(變 數)를 식별해 영진(營陳)을 적절한 곳에 잘 설치하고, 전세(戰勢)와 지형(地形)을 잘 가늠해 그의 계책을 따라갈 사람이 없었으므로 제갈량을 비롯해 모든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해) 꺼렸다. 장합이 비록 무장(武將)이었으나 유사(儒士-유생, 선비)들을 경애하고 좋아해, 일찍이 같은 고향 출신의 비담(卑湛)이 경학에 밝고 행실이 훌륭하다 하여 추천한 적이 있다. 
 
이에 조서를 내렸다, “옛날 제준(祭遵-후한 광무제 때의 명장)은 장수가 되었을 때 오경대부(五經大夫)를 설치하자고 상주했고, 군중에 있으면서도 여러 유생들과 아악을 연주하고 투호(投壺)를 즐겼는데, 지금 장군은 밖으로 융려(戎旅-군대)를 통솔하면서도 안으로는 국조(國朝-조정)을 존중하는구나. 짐이 장군의 뜻을 가상히 여겨 비담을 발탁해 박사(博士)로 임명한다.”
 
제갈량이 다시 기산(祁 山)으로 출병하자(231년의 일) 장합에게 조서를 내려 제장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가게 해 약양(略陽-천수군 약양현)에 도착했다. 제갈량이 물러나 기산을 지키자 장합이 추격해 목문(木門-천수군 서현 근처)에 이르렀는데, 제갈량군과 교전하다 날아온 화살에 오른쪽 무릎을 맞고 죽었다. (주4) 
 
(주 4) [위략]에서 이르길 – 제갈량군이 퇴각하자 사마선왕이 장합에게 이를 추격토록 했다. 장합이 말했다, “군법(軍法-병법)에서 성을 포위할 때는 반드시 출로를 열어두고, 퇴각하는 군사는 쫓지 말라 했습니다.” 선왕이 이를 들어주지 않아 장합은 부득이하게 진군했다. 촉군이 고지에 올라 숨어 엎드려 궁노(弓弩)를 난사하자 화살이 장합의 넓적다리에 적중했다. 

원희지(袁希之)의 한표전(漢表傳)에 말하기를, 승상(丞相) 제갈량(諸葛亮)이 출군하여 기련산(祁連山)을 포위하였는데 (이때) 비로소 목우(木牛)로 군량(軍糧)을 운반하였다. 위나라 사마선왕(司馬宣王)과 장합(張郃)이 기련산(祁連山)을 구하러 나왔다. 여름 6월, 제갈량은 군량이 다하니 군대를 물려 청봉(靑封) 목문(木門)에 이르렀는데 장합이 추격하여 왔다. 제갈량은 군대를 주둔시키고, 나무껍질을 깎아내고는 크게 글을 써서 말하기를 “장합은 이 나무 아래에서 죽는다.” 하였다. 미리 병사들에게 군령(軍令)을 내려 좁은 길에 수천의 강노(强弩)를 준비케 하였다. 장합이 과연 모습을 드러내자 천개의 노(弩)를 동시에 발사하여 장합을 쏘니 죽었다.
 
시호를 내려 장후(壯侯)라 했다. 아들 장웅(張雄)이 후사를 이었다. 장합이 앞뒤로 정벌전에 공을 세웠으므로 명제는 장합의 봉호를 떼어내어 장합의 아들 4명을 열후에 봉했다. 어린 아들(小子)에게는 관내후의 작위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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