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패(臧覇)는 자를 선고(宣高)라 하며 태산군 화현 사람이다. 아비 장계는 현의 옥연이었는데, 태수가 사사로운 마음으로 사형을 행하는 것이 법률에 어긋난다하여 듣지 않았다. 이에 태수가 노하여 그를 체포하여 관청으로 끌고 갔다. 이때, 장계를 호송한 자들의 수는 백명에 달했다. 장패는 당시 열 여덟이었는데, 식객 수십명을 이끌고 비현 서쪽 산 속에서 매복하였다가 아비를 구출하였는데, 호송하던 자들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이리하여 아비와 함께 동해국에 망명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용맹하다는 평판을 얻었다. 

황건의 난이 일어나자, 장패는 도겸을 따라 적도를 격파하고 기도위의 관직을 받았다. 이후 서주에서 병력을 모으고, 손관, 오돈, 윤례 등과 더불어 군세를 모아, 장패는 총수가 되어 개양에 주둔했다. 태조가 여포를 토벌하려 하자, 장패등은 병사를 이끌고 여포를 지원했다. 여포가 붙잡힌 뒤, 장패는 몸을 숨겼다. 태조는 공모하여 장패를 찾아나서서, 그를 만나자 이를 높이 평가하였고, 장패로 하여금 오돈, 운례, 손관, 손관의 형인 손강 모두 태조의 막하로 들어왔다. 태조는 장패를 낭야국의 상으로 임명하고, 오돈을 이성태수, 윤례를 동완태수, 손관을 부해태수, 손강을 성양태수로 삼고, 청주 및 서주를 나누어 장패에게 위임하였다. 

태조는 연주에서 서흡, 모휘를 부장으로 세웠다. 연주에서 난이 일어났을 때, 서흡과 모휘는 모두 조조에게 반역했다. 이후 연주가 평정되자, 서흡, 모휘는 망명하여 장패에게 몸을 의탁했다. 태조는 유비에게 말하여 장패로 하여금 두 사람의 목을 보내도록 이야기하도록 했다. 

장패는 유비에게 말하기를 

[장패가 이처럼 설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의지하는 자를 버리는 짓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장패는 공(조조)께로부터 목숨을 건져주시는 은혜를 입었으니, 결코 그 명령에 거역하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왕패(왕도 패도를 걷는)의 군주에게는 정의에 따라 말씀을 하셔야 합니다. 장군에게 부탁하건대, 그들을 위해 변명해 주십시오.]라 하였다. 

유비는 장패의 말을 태조에게 고하였으니, 태조는 기뻐하며 장패에게 말했다. 

[이는 옛 성인들이 행하던 바인데, 군(그대)이 잘도 이렇게 말해주었구나! 짐도 그렇게(너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이에 서흡, 모휘를 모두 군수(군의 태수)로 삼았다. 

당시, 태조는 원소와 대치하고 있었는데, 장패가 시시때때로 정병을 이끌고 청주에 돌입하였으므로 태조는 원소와의 대결에 전념할 수 있었으며, 동방의 일은 걱정치 않았다. 태조가 남피에서 원담을 격파하자, 장패등이 모여서 축하의 말을 올렸다. 장패는 이 기회에 자신의 자제 및 부장의 부형가족을 업에 이주케 할 것을 청원했다. 

이에 조조는 

[제군의 충효가 정녕 이렇게 대단한 것이었다니! 과거 소하가 자제를 사관케 하고자 청한 것을 고조께서는 거절치 않으셨다. 경순이 집을 태우고 관을 끌고 따르는 것(이미 자신은 죽은 사람이라는 뜻 같군여)을 광무제가 거절치 않으셨다.(耿純焚室輿櫬以從) 어찌 내가 전범을 거스르겠는가!]라 말하였다. 

동방의 주에 소란이 일자 장패등은 정의를 세워 폭악을 제압하고, 해대지방을 완벽히 평정하였으니, 공적이 실로 막대하여 열후에 봉해졌다. 장패는 도정후가 되어 위로장군의 관위를 더하여 받았다. 또한 우금과 함께 창희를 토벌하고, 하후연과 함께 황건의 잔당 서화 등을 토벌하였으므로 공적에 따라 서주자사에 영전되었다. 패국공 무주(沛國公武周為下邳令)는 하비현령이 되었으나, 장패는 무주를 존경하여 몸소 현령의 관청을 방문하였다. 부종사가 경박하게 굴며 법을 범하였는데, 무주는 그 죄상을 발각하고 곧 체포하여 조사하였다. 장패는 더욱 무주를 높게 평가하게 되었다.

태조를 좇아 손권을 토벌하던 때에 선봉이 되어 재차 소호에 진입하여 거소를 공격, 이를 격파하였다. 장료가 진란을 토벌하던 때에, 장패는 별동대로써 환皖현에 진출하여 오의 장수 한당을 격파하여 손권이 진란을 구원하는 것을 막아냈다. 한당은 병사를 보내어 장패에 대항하였으나, 장패는 이들과 봉룡에서 싸웠고, 한당이 재차 병력을 보내어 협석夾石에서 장패를 영격하였으나, 장패는 더불어 싸워 이를 격파하고 귀환하여 서구에 주둔하였다. 손권은 수만 병력을 배에 태워 서구에 주둔시키고 군세를 나누어 진란을 구원토록하려 했으나, 장패의 군이 서구에 있다는 것을 듣고는 퇴각하였다. 장패는 (오군을 추격하여) 밤을 도와 달려 새벽녘까지 백여리를 가 적을 맞아 전후에서 협격하였다. 적은 황망하여 배에 오르지도 못하였고, 물에 빠져 죽은자가 많았다. 이 때문에 적도들은 진란을 구원치 못하였으니, 장료는 결국 이(진란)를 격파할 수 있었다. 

장패는 태조를 좇아 손권을 유수구에서 정벌할 때, 장료와 더불어 선봉이 되었으나, 도중에 큰 비를 만났는데, 손권의 대군이 먼저 도착하고 수위가 높아져 적의 배가 점차 전진해왔으므로 장사는 모두 불안에 떨었다. 장료는 철퇴할까 생각하였는데, 장패가 이를 막으며 말하였다. 

[공께서는 유리함과불리함을 따지는 일에 밝으십니다. 우리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실 것 같습니까?] 

다음 날, 과연 철퇴 명령이 내렸다. 장료는 귀환하자 (장패의 말을)태조에게 전하였다. 태조는 이에 감동하며 장패에게 양위장군의 관직을 내리고 가절로 삼았다. 이후 손권이 항복을 간청하였으므로, 태조는 귀환하여 장패와 하후돈 등에게 수비를 맡겨 거소에 주둔케 했다. 

문제가 왕위를 잇자 진동장군으로 승진하였고, 작위는 무안향후에 올랐으며 도독청주제군사가 되었다. 문제가 제위에 오르자, 그를 다시금 개양후로 올리고, 낭성후로 전봉하였다. 조휴와 더불어 오의 적도들을 격퇴하고 여범을 동보에서 격파, 중앙에 불러들여져 집금오가 되었고, 특진의 위를 받게 되었다. 군사 문제가 일어나면 황제는 늘 그에게 질문하였다.[1] 

[1] [위략]에 이른다. 장패는 별명을 노구奴寇라 하였다. 손관은 스스로 영자嬰子라 칭하였고, 오돈은 암노黯奴라 하였으며, 윤례는 노아盧兒라 자칭했다. 건안24년, 장패는 별동대를 파견하여 낙양에 주둔케하였다. 마침 태조가 붕어한 때, 장패에 속한 부대와 청주병대는 천하가 어지러워지리라 여겨, 모두 북을 울리며, 멋대로 돌아가버렸다. 문제가 즉위하자 조휴를 청주, 서주의 도독으로 삼았다. 장패는 조휴에게 고하였다. [국가(천자)는 아직 장패의 의견을 듣고자 하지 않으십니다. 혹여 장패에게 보기 일만이 있다면, 반드시 강표를 함락해 보이겠습니다.]라 하였다. 조휴가 이를 황제에게 고하였으나, 황제는 장패의 부대가 이전에 멋대로 물러간 일을 의심하였고, 현재의 장패의 의기가 웅장함도 의심하였다. 결국 동방에 순행하여 장패가 그를 맞이한 것을 기화로 하여 그의 군병을 몰수하였다.

명제가 즉위하자 식읍 500호를 가증하여 전 후 합쳐서 3500호가 되었다. 세상을 뜨니, 시호를 위후라 하였다. 아들 장애가 뒤를 이었다.[2] 

[2][위서]에 이른다. 장애는 젊은시절부터 재능과 이론에 밝음으로 칭찬받아, 황문랑이 되어고, 군 태수직을 역임하였다.

장애는 청주자사, 소부의 직에 까지 올랐다. 장애가 죽자 시호를 공후라 하였다. 그 아들 장권이 뒤를 이었다. 장패의 전후의 공적을 참작하여 아들 셋을 열후에 봉하고, 한 사람에게는 관내후의 작위를 내렸다.[3] 

[3]장패의 아들 장순은 자를 태백이라 하며, 진의 산기상시에 올랐던 일이 [무제백관명]에 보인다. 이 [백관명]은 누가 지은 것인지 알 수 없다. (인물) 각기 제목이 달려있는데, 장순을 [재기가 곧게 뻗었으며, 견식은 시의에 적절히 대응한다.]고 적고 있다.

그래서 손관(孫觀) 역시 청주자사(青州刺史)가 되었고, 절(節)을 받았다. 태조를 따라가 손권을 토벌했는데, 전투하는 도중에 부상을 입어서 사망했다. 그의 아들 손육(孫毓)이 뒤를 계승했고, 역시 청주자사(青州刺史)까지 되었다.[4]

[4] [위서]에 이른다. 손관孫觀의 자는 중대(仲臺)라 하며 태산(군) 사람이다. 장패와 더불어 거병하여 황건을 격파하여 기도위에 임명되었다. 태조는 여포를 격파한 때, 장패를 시켜 손관형제를 불러들여 그들을 모두 두텁게 대하였다. 장패와 더불어 전투에 나서서 손관은 늘상 선봉을 맡았다. 청주, 서주의 도적 무리를 정벌하였다. 공적은 장패에 뒤이었으니, 이로써 여도정후로 봉해졌다. 손강도 또한 공적을 세워 열후에 봉해졌다. 태조와 더불어 남비에 집결하여 자제를 업에 이주시켰다. 손관은 편장군에 임명되었고, 청주자사로 승진하였다. 태조에 종군하여 유수구에서 손권을 정벌, 가절이 되었다. 손권을 공격하던 때에 눈먼화살에 맞아 왼쪽 다리에 상처를 입었는데, 전투에 온힘을 기울이느라 상처를 돌보지 않았다. 태조는 그에게 [장군의 상처는 중상인데, 용맹한 기력은 점점 높아지는구나.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몸을 살펴야 하지 않겠는가?]라 하였다. 진위장군에 영전되었으나 상처가 깊어 그대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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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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