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황제에게는 스물다섯 명의 아들이 있다. 변황후 소생의 위문제 조비, 임성위왕 조창, 진사왕 조식, 소희왕 조웅, 유부인 소생의 풍민왕 조앙, 상상왕 조삭, 환부인의 소생 등애왕 조충, 팽성왕 조거, 연왕 조우, 두부인의 소생의 패목왕 조림, 중산공왕 조연, 진부인의 소생의 제양회왕 조현, 진류공왕 조준, 윤부인 소생의 범양민왕 조구, 왕소의 소생의 조왕 조간, 손희 소생의 임읍상공자 조상, 초왕 조표, 강상공자 조근, 이희 소생의 곡성상공자 조승, 미대 공자 조정, 영상 공자 조경, 주희 소생의 번안공 조균, 유희 소생의 광종상공자 조극, 송희 소생의 동평영왕 조휘, 조희 소생의 악릉왕 조무 이다.

풍민왕앙전

풍민왕 조앙은 자가 자수이다. 약관의 나이에 효렴에 천거되었고, 조조를 따라 남방을 토벌하러 갔다가 장수에게 살해되었다. 조앙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황초 2년(211), 번안공 조균의 아들 조완을 조앙의 아들로 삼아 뒤를 잇게 하여 중도공으로 봉했다. 그해 장자공으로 다시 봉해졌다. 5년(224), 조앙의 시호를 풍도왕으로 추증했다. 

태화 3년 (229)에 조앙의 시호를 민왕으로 바꾸었다. 

가평 6년(254)에 조완이 조앙의 작위를 이어 풍왕으로 임명되었다. 정원, 경원 연간에 식읍이 부단히 증가하여, 이전의 것과 합쳐 2천7백호가 되었다. 조완이 죽자 시호를 공왕이라 하고, 아들 조렴이 왕위를 계승 했다.

상상

상상왕 조삭()은 어려서 죽었다. 

태화 3년(229) 시호가 추증됐다. 

청룡 원년(233) 에 아들 민()왕 조잠()이 왕위를 계승했는데,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다.

청룡 2년 (234), 아들 회()왕 조언()이 왕위를 계승하고 식읍은 2천5백호였다. 

청룡 4년(236), 세상을 떠났다. 아들이 없었으므로, 봉국은 취소되었다. 

정원 2년 (255)에 악릉왕 조무()의 아들인 양도향공 조송()으로 조삭의 뒤를 있게 했다.

등애왕충전

등애왕 조충(曹沖)은 자가 창서(倉舒)이다. 어렸을 때 총명하고 재지가 특출해, 대여섯 살 때에는 지혜와 모략이 미치는 바가 성인의 지혜와 같을 정도였다. 그 당시 손권이 커다란 코끼리를 보내왔는데, 조조는 무게가 알고 싶어 신하들에게 물어보았으나 모두들 그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없었는데, 조충이 말했다.

"코끼리를 큰 배에 올려놓고, 물이 올라온 흔적을 칼로 그어 두고 같은 양의 물체를 배에 올려놓아 재어 보면 무게를 알 수 있을 것 입니다."

조조는 매우 기뻐하며 즉시 시험 삼아 했다.

이때는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일이 많았으므로, 형벌을 적용하는데 있어서 매우 엄하고 가혹했다. 조조의 말안장이 창고에 있었는데, 쥐가 이를 갉아먹자, 창고 관리자는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고 두려워했다. 상의 끝에 손을 뒤로 묶어 자수하려고 했지만, 사면되지 못할까 봐 두려워했다. 조충이 그에게 말했다.

"3일만 기다렸다가 정오에 자수하라."

조충은 칼로 자신의 흩옷을 찢어 쥐가 물어뜯은 것처럼 하고, 거짓으로 실의에 빠진 것처럼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게 했다. 조조가 그 원인을 물으니, 조충이 대답했다. 

"세속에서는 쥐가 옷을 물어뜯으면 옷 주인이 불길하다고 합니다. 지금 저의 흩옷이 쥐에게 물어 뜯겼기 때문에 걱정하며 번뇌하는 것입니다."

조조가 말했다.

"그것은 허튼 소리니 괴로워하지 말거라."

잠시 후, 창고 관리가 쥐가 말안장을 갉아먹었다고 하자. 조조는 웃으며 말했다.

" 내 아이의 옷이 제 곁에 있었는데도 쥐가 물어뜯었는데, 하물며 기둥에 걸려 있는 말안장임에야!"

어떤 사람의 죄인가를 하나도 묻지 않았다. 조충은 어질고 애정이 많고 식견이 넓었으므로, 일을 함에 있어서도 모두 이와 같았다. 무릇 마땅히 죽음의 형벌을 받아야만 하는데 조충이 일을 맡아 처리하였기 때문에 그에 의지하여 생명을 보존한 자가 앞뒤로 수십 명이나 되었다.

魏書曰:沖每見當刑者,輒探睹其冤枉之情而微理之。及勤勞之吏,以過誤觸罪,常為太祖陳說,宜寬宥之。辨察仁愛,與性俱生,容貌姿美,有殊於眾,故特見寵異。臣松之以「容貌姿美」一類之言,而分以為三,亦敘屬之一病也。

건안 12년(208)에 13살인 조충이 병에 걸렸는데, 조조는 친히 그를 위해 기원했다. 그가 죽자 조조는 매우 슬퍼했다. 문제가 조조를 너그럽게 위문했는데, 조조가 말했다.

"그가 죽은 것은 나의 불행이지만, 그는 너희들과 왕위를 다툴 수 없으니, 그것은 너희들의 행운이다." [주]

[주] 손성(孫盛): 춘추(春秋)의 뜻에 의하면 적자를 세울 경우에는 나이의 많음을 고려하지 현명함을 고려하지 않는다. 조충이 비록 살았더라도 적자로 세워질 수는 없는 노릇에, 하물며 죽었으니 왕권 다툼이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인데 그런 말을 하다니? 시경에 "無易由言(말 함부로 하지 마라. 생각 없이 말하지 마라)고 했다. 위무제는 말을 너무 쉽게 한 것이다.

조조는 말을 하면서 얼굴 가득 눈물을 흘렸으며, 또 조충을 위해 견씨의 죽은 딸을 모셔 오게 하여 합장했으며, 그에게 기도위의 인수를 주고 완후거의 아들 조종에게 그의 뒤를 잇도록 명령했다. 

건안 22(217)에 조종에 등후로 삼았다.

황초 1년(221) 조충에게 등애후라는 시호를 주고 또 시호를 공으로 추증했다. [주]

[주] 위략(魏略): 문제는 이렇게 말했다.

“형인 효렴 조앙(曹昂)이 일찍 죽은 것은 다 자기 운수 복이었다. 만약 창서가 살아 있었더라면 나 또한 천하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황초 3년(222)에 조종의 작위를 올리고, 관군공으로 봉했다. 

황초 4년(223)에 을씨공으로 바꾸어 봉했다. 태화 5년(231) 조충의 시호를 등애왕이라고 했다. 

경초 원년(237)에 조종은 중상방(궁중의 칼이나 기물을 만드는 관청)에서 법으로 금하는 물품을 만들었으므로, 식읍이 3백호 깎이고 작위도 도향후로 내려갔다. 

경초 3년(229), 다시 기씨공으로 임명되었다.

정시 7년(246) 평양공에 봉해졌다. 경초, 정원, 경원 연간에 부단히 식읍을 증가시켜 이전 것과 합쳐 모두 1천9백호가 되었다. 

팽성왕거전

건안16년 (211) 팽성왕 조거가 범양후에 봉해졌다.

22년(217년)에는 완후로 봉해졌다. 황초2년(221) 작위를 승진시켜 공으로 삼았다.

3년(222)에 장릉왕으로 임명되었다가 그해 의양으로 옮겨 봉해졌다. 문제는 남방의 지세가 습하고 또 환태비가 팽성 사람이었으므로, 팽성으로 바꾸어 봉했다. 또 제음으로 옮겨 봉했다 

황초 5년(224)에 문제 조비가 조서를 내렸다.

-- 선대 제왕은 나라를 세우고 시대에 따라 제도를 만들었다. 한고조는 진대에 설치한 군을 증가시키고, 후한 광무제 때에 이르러 천하가 닳아 없어지려 하였으므로 군과 현을 합병하여 줄였다. 지금의 상황은 그 당시와 같지 않으므로 여러 왕을 현왕으로 바꾸어 봉한다. --

조거는 정도현에 바뀌어 봉해졌다.

태화 6년(232) 에 모든 왕을 바꾸어 봉하고, 모든 군을 국으로 봉했으며 조거에게는 다시 팽성을 봉했다. 

경초 원년(237)에 조거는 사사로이 사람을 중상방으로 보내 금지하는 물품을 만들었으므로, 식읍 1천 2백호를 깎였다.

魏書載璽書曰:「制詔彭城王:有司奏,王遣司馬董和,齎珠玉來到京師中尚方,多作禁物,交通工官,出入近署,踰侈非度,慢令違制,繩王以法。朕用憮然,不寧 于心。王以懿親之重,處藩輔之位,典籍日陳於前,勤誦不輟於側。加雅素奉脩,恭肅敬慎,務在蹈道,孜孜不衰,豈忘率意正身,考終厥行哉?若然小疵,或謬于 細人,忽不覺悟,以斯為失耳。書曰:『惟聖罔念作狂,惟狂克念作聖。』古人垂誥,乃至於此,故君子思心無斯須遠道焉。常慮所以累德者而去之,則德明矣;開 心所以為塞者而通之,則心夷矣;慎行所以為尤者而脩之,則行全矣:三者,王之所能備也。今詔有司宥王,削縣二千戶,以彰八柄與奪之法。昔羲、文作易,著休 復之語,仲尼論行,既過能改。王其改行,茂昭斯義,率意無怠。」

경초 3년(239) 삭감되었던 식읍이 다시 회복되었다. 정원 경원 연간에 끊임없이 식읍이 늘어나서 이전 것과 합쳐 총 4천6백호가 되었다.

연왕우전

연왕 조우는 자가 팽조이고, 건안 16년(211)에 도향후에 봉해졌다. 

22년(217년) 에는 노양후로 바뀌어 봉해졌다. 

황초 2년(221)에 작위가 승진되어 공이 되었다. 

3년(222) 하비왕이 되었다. 

5년(224)에 바꾸어서 단보현에 봉해졌다. 

태화 6년(225)에 연왕으로 바뀌어 봉해졌다. 명제는 어린 시절 조우와 함께 성장하였으므로, 그를 매우 사랑했다. 명제가 즉위한 후 그를 총애하고 상을 주는 것이 다른 여러 왕에 비해서 각별했다.

청룡3년(235) 에 명제가 그를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경초 원년(237) 업성으로 돌아왔다.

2년(238) 여름 또 불러서 수도로 갔다.

겨울 12월에 명제는 위독했으므로, 조우를 대장군으로 임명해, 죽고 나서 할 일을 맡겼다. 임명을 받고 나흘간 조우는 마음속으로부터 굳게 사양하였는데, 명제의 뜻도 변하여 조우를 면직시켰다. 

3년(239) 여름에 업성으로 돌아왔다.

경초 정원 경원 연간에 부단히 식읍이 증가되어 이전 것과 합쳐서 5천5백호가 되었다.

상도향공 조환은 조우의 아들로 궁으로 들어가서 왕위를 계승했다.

패목왕림전

건안 16년(211)에 패목왕 조림은 요양후로 봉해졌다. 

22년(217) 에 자리를 옮겨 초국에 봉해졌다. 

황초 2년(221) 작위가 승진되어 공이 되었다.

3년(222) 호왕이 되었다. 

5년(224) 바뀌어 초현왕으로 봉해졌다. 

7년(226) 견성에 봉해졌다. 

태화 6년(232)패로 바뀌어 봉해졌다. 

경초, 정원, 경원 연간(217)에 끊임없이 식읍이 증가되어 이전 것과 합쳐 총 4천7백호가 되었다. 조림이 세상을 떠나자 아들 조위가 뒤를 이었다.

案嵇氏譜:嵇康妻,林子之女也。

중산공왕연전

건안21년(216) 중산공왕 조연이 평향후에 봉해졌다. 어린 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열 살 남짓할 때 문장을 지을 수 있었다. 항상 책을 읽고 있었으므로, 문학과 가까이에서 모시는 사람들은 그가 공부에 힘을 다 쏟아 병에 걸릴 것을 걱정하여 수차례 그만둘 것을 권유하였지만, 그의 천성이 그것을 즐거워하였으므로, 멈출 수가 없었다.

22년(217)에 동향후로 봉해지고 같은 해에 또 찬후로 바뀌어 봉해졌다. 

황초2년(221)에 작위가 승진되어 공으로 임명되었다. 관속들이 모두 그에게 축하하자 조곤이 말했다.

"나는 깊은 궁궐 안에서 태어나서 심고 거두는 어려움을 몰라 교만하고 방탕한 과실을 많이 범할 것이오. 여러 현명한 사람들이 와서 축하하였으니, 응당 나를 도와 과실을 바로 잡아 주시오."

매번 형제들끼리 놀며 즐거워 할 때 조연은 혼자 경전에 깊숙이 빠져 있었다. 문학과 방보 관리는 서로 상의하여 말했다.

"조서를 받아 공의 언행을 살펴보고 잘못이 있으면, 당연히 상주해야 하고 착한 거동이 있다면 응당 보고해야만 하므로 그의 미덕을 숨길 수는 없소."

그리고는 함께 상주하여 조연의 아름다운 행동을 진술했다. 조연이 소식을 듣고 스스로 매우 놀랍고 두려워하여 문학을 꾸짖어 말하였다.

"몸을 닦고 스스로를 지키는 것은 단지 보통 사람들의 행위에 불가하거늘, 그대들은 그것을 황상에게 보고하였으니, 이것은 나의 잘못을 더 할 수 있을 뿐이오. 더구나 만일 내가 정말로 착한 행동을 했다면, 하필 황상이 듣지 못함을 걱정하여 당신들로 하여금 이처럼 황급히 보고하도록 한 것이니, 이러한 일은 나에게 어떠한 도움도 줄 수 없소."

그가 경계하고 삼가는 것은 이와 같았다.

황초 3년(222)에 북해왕으로 봉해졌다. 같은 해 누런 용이 업성의 서쪽 장수에서 나타났으므로, 조연이 글을 올려 황상의 공덕을 칭송하자. 조칙을 내려 그에게 황금 열 근을 주었고 조서에 이렇게 말했다.

-옛날 주나라 초기 당숙은 왕명을 잘 따른 조공에게 좋은 뼈를 보냈으며, 후한의 동평왕은 기리는 글을 바쳤는데, 이것은 모두 골육 동포가 공덕을 찬미하여 아름다운 친척 관계를 표창 한 것이다. 왕이 경전을 깊이 연구하여 그 진리를 깊이 체득하고 문아하고 밝기에 짐은 그 점을 매우 가상히 여기는 것이다. 왕은 공손함을 지키고 덕을 밝혀 좋은 소식이 끝까지 전해지기를 바란다.

황초 4년(223)에 찬왕으로 바뀌어 봉했다.

황초 6년(226) 복양왕으로 바뀌어 봉했다.

태화 2년(228)에 봉국으로 갔다. 절약을 숭상하여 처와 첩에게 길쌈으로 하도록 하고, 집안일을 익히도록 했다.

태화 5년(232) 겨울에 입조했다.

6년(232)에 중산왕으로 바꾸어 봉해졌다. 이전에 조연이 입조했을 때 수도에 금령을 범했다. 

청룡 원년(233)에 담당 관리가 조연의 죄를 상주하자. 명제가 조서를 내렸다.

-공은 평소 공경스럽고 근신했는데, 우연히 잘못을 범한 것이니, 그대들은 황제 친척에 가까운 법률로써 그의 죄행을 논하도록 하거라.-

담당 관리가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자. 조서를 내려 조연의 식읍 2천7백5십호를 삭감하도록 했다.

魏書載璽書曰:「制詔中山王:有司奏,王乃者來朝,犯交通京師之禁。朕惟親親之恩,用寢吏議。然法者,所與天下共也,不可得廢。今削王縣二,戶七百五十。夫克己復禮,聖人稱仁,朝過夕改,君子與之。王其戒諸,無貳咎悔也。」

청룡 2년(234) 명제는 그의 고심하는 모습을 가상하게 여겨 삭제되었던 현을 회복시켜 주었다. 

청룡 3년(235) 가을에 조연이 병에 걸렸는데, 명제가 조서를 내려 태의를 보내 그의 병세를 진단하도록 했으며, 전중이나 근위병에게 명제가 친히 쓴 조서를 보내왔고, 그에게 진귀한 보물을 보냈고, 또 태비와 패왕 조림을 함께 파견하여, 그의 병세를 살펴보도록 하였다. 조연은 병세가 심각했으므로, 관속에게 명령하여 말했다.

"나는 덕이 없는데도, 황상의 은총을 받았으나, 대명이 다하려 하오. 나는 비록 검소한 것을 좋아하지만, 성조가 이미 장례 제도의 조서를 하달하였으니, 이것은 천하의 법령이요. 내가 죽는 날 시체를 거두어 안치하는 것으로부터 안장에 이르기까지 조서를 받들어 처리하도록 힘을 쓰시오. 옛날 위나라 대부 거원은 복양에 안치되었소. 나는 그의 묘지를 보고 항상 그가 남긴 풍모를 생각하고, 성현의 영혼에 의탁하여 나의 시골을 지키기를 바라오. 나의 묘는 반드시 그의 묘지 옆에 만들어 주시오.

<<예기>>에서는 남자는 여자의 손 안에서 죽지 말아야 한다고 했소. 빨리 천시에 의거하여 동당을 완성하시오."

동당이 완성된 후 그곳의 이름을 뜻을 세우는 집인 수지지당이라고 했다. 조곤은 동당으로 급히 옮겨가 그곳에서 살았다. 세자에게 또 다시 명령했다.

"너는 나이가 어려 법도를 이해하지 못한다. 일찍 군주가 되면 즐거움만 알 뿐, 고통을 알지 못하게 된다. 고통을 알지 못하면, 반드시 교만하고 사치스러워져 과실을 범하게 된다. 대신들을 접할 때는 반드시 예절에 따르거라. 설사 대신이 아니더라도 노인들에게는 당연히 예의로서 답해야 한다. 형을 섬길 때는 존경으로써 하고 동생을 어루만질 때는 자애로서 해야 하며, 형제간에 좋지 못한 행위가 있으면, 응당 무릎을 맞대고 이야기하며 그 점을 충고해야 한다. 충고를 하여도 듣지 않으면 눈물을 흘리어 그에게 이치를 말해 주고, 이치를 말해도 뉘우치지 않으면 어머니께 말하거라.

만일 또 바로잡을 수 없다면, 응당 황상에게 상주문을 올려 식읍을 삭감하여 죄를 받도록 청하거라. 그 몸을 두고 있는 곳에서 은총을 지키다가 큰 화를 만나는 것은 몸을 비천하게 두고 생명을 보존하는 것만 못한 것이다. 이 또한 큰 죄악이며, 그들이 조금 지나치면 과실이 적으니, 응당 그들을 덮어야만 한다.

아! 어린 아들아 몸을 닦고 마음을 기르고 충정으로 성조를 받들어 섬기고 효도와 공경함으로서 태비에게 복종해야 한다. 내실에서는 태비의 명령을 존경해야 하고 궁 밖에서는 왕의 가르침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너는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 이로부터 나의 영혼을 위로하거라."

이 해 세상을 떠났다. 패왕 조림에게 명령을 내려 남아서 조연의 장례를 지휘하도록 하고, 대홍려에게 부절을 주어 장례 의식을 감독을 하도록 하고 종정에서 제사지내도록 했다. 장례 의식에 후한 물품을 주었다. 그가 저술한 문장은 총 2만여 자나 되었는데 재능은 진사왕 조식보다는 못하지만 문제는 조식과 좋은 동반자가 되었다. 아들 조부가 왕위를 이었다. 경초 정원 경원 연간에 계속 식읍을 받아 이전의 것과 더불어 총 3천 4백호가 되었다.

제양회왕현전

건안 16년(211) 제양회왕 조현은 서향후로 봉해졌다. 요절했으며, 아들이 없었다.

20년(215) 패왕 조림의 아들 조찬이 조현의 작위와 식읍을 계승하였는데, 요절했고 아들이 없었다. 문제는 또 조란의 동생 조일로 하여금 조현의 뒤를 잇도록 했다.

황초2년(221)에 제양후로 바꿔 봉해졌다.

4년(223) 공으로 작위를 승진시켰다.

태화 4년(230) 조현의 작위를 추증하였고, 시호를 회공이라고 했다.

6년(232)에 또 승진되어 회왕이라고 불렸으며, 조찬의 시호를 서향애후라고 했다. 조일이 죽자. 시호를 도공이라고 했다. 아들 조항이 뒤를 이었다. 경초, 정원, 경원 연간에 계속 식읍이 늘어서 이전 것과 합쳐 모두 1천 9백호가 되었다.

진류공왕준전

진류공왕 조준은 자가 자안이고, 건안 21(216)에 미후로 봉해졌다.

건안22(217) 양읍으로 바뀌어 봉해졌다.

황초 2년 작위가 공으로 승진됐다.

황초 3년 진류왕에 봉해졌다.

황초 5년 (224)에 양읍현으로 봉해졌다.

태화 6년 (225) 또 진류왕으로 임명되었다.

감로 4년(259)에 세상을 떠났는데, 아들 조오가 왕위를 계승했다. 경초 정원 경원 연간에 계속 식읍이 증가하여 이전의 것과 더해 총 4천 1백호가 되었다.

범양민왕구전

범양민왕 조구는 일찍 죽었고 아들이 없었다. 

건안 22(217년) 에 번안공 조균의 아들 조민을 조구의 후사로 삼고 임진후로 봉했다.

황초 3년(222)에 조구의 시호를 범양민공으로 추증했다. 

황초 7년(226) 순양으로 바꾸어 봉했다.

태화 6년(232) 조구의 시호를 범양민왕으로 추증했으며, 조민을 낭야왕으로 임명했다. 경초, 정원, 경원 연간에 계속 식읍을 증가시켜 이전 것과 더하여 총 3천4백호가 되었다. 

조민이 죽자 시호를 원왕이라고 했으며, 아들 조혼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조왕 간전

건안 20년(215) 조왕 조간은 고평정후로 봉해졌다.

건안 22년(217) 에 뇌정후로 바뀌어 봉해졌다. 같은 해 홍농후로 바뀌어 봉해졌다.

황초 2년(221) 작위가 승진되어 연공으로 봉해졌다.

魏略曰:幹一名良。良本陳妾子,良生而陳氏死,太祖令王夫人養之。良年五歲而太祖疾困,遺令語太子曰:「此兒三歲亡母,五歲失父,以累汝也。」太子由是親 待,隆於諸弟。良年小,常呼文帝為阿翁,帝謂良曰:「我,汝兄耳。」文帝又愍其如是,每為流涕。臣松之案:此傳以母貴賤為次,不計兄弟之年,故楚王彪年雖 大,傳在幹後。尋朱建平傳,知彪大幹二十歲。

황초 3년(222) 하간왕으로 봉해졌다.

황초 5년(224) 악서현으로 봉해졌다.

황초 7년(226) 거록으로 바뀌어 봉해졌다.

태화 6년(232) 조왕으로 바뀌어 봉해졌다. 조간의 모친은 조조의 총애를 받았다. 문제가 보위를 잇게 되자. 조간의 모친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문제가 죽음의 문턱에 있을 때 유조를 남겼기 때문에 명제는 항상 조간을 총애했다.

청룡 2년(234) 조간은 빈객과 사사로이 교제하였기 때문에 담당 관리가 상주하였고 명제는 조간에게 옥새를 찍은 조서를 내렸다.

-<<역경>>에서 이르기를, '나라를 세우고 가업을 잇는 사람은 소인을 임용하지 않는다.'고 했고 <<시경>>에는 '대부의 수레는 먼지를 일으켜 자기를 오염시킬 뿐이다.'라고 계도하고 있다. 

태조가 천명을 받아 대업은 연 이래로, 다스려지고 혼란스러운 근원을 깊이 고찰하였고 존망의 관건을 밝혔다. 처음에 제후들을 나누어 봉할 때도 공순하고 진실하고 지극한 말로써 경계하였고, 천하의 단아한 선비들도 그들을 보좌하게 하였으며, 항상 후한의 마원이 남긴 교훈을 칭찬하고 제후들이 빈객과 사귀는 것을 금하는 것을 무거운 법령으로 다스렸으니 빈객과 사귀는 것은 요사스럽고 사악한 죄행과 같은 것이다. 어찌 이런 법률로서 골육지정을 엷게 하겠는가? 이것은 단지 자제들로 하여금 과실로 인해 죄를 저지르지 않게 하고 관민들로 하여금 상해의 한이 없도록 하려고 한 것에 불과하다. 고조가 제위에 오른 후, 천하의 정치에 삼가고 깊이 고찰하여 제후가 입조하는 것을 금하는 법령을 밝혔다.

나는 <<시경>>의 <당체>라는 작품에 마음이 감동하게 되었고, '채숙'의 도의를 칭찬하였으며 또 조서에서 '만일 조서가 있으면 수도로 들어갈 수 있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제왕들에게 조정에 가서 예를 행할 수 있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초와 중산은 모든 빈객과 사귀어 법령을 범하였고, 조종과 대첩은 모두 법령에 복종했다.

최근 동평왕은 또 속관에게 수장현의 관리를 구타하도록 하였는데 담당 관리가 그의 죄상을 상주하였기에 나는 그의 현읍을 삭감하였다. 지금 담당 관리들은 조찬, 왕교 등이 구족이 모이는 시절이라는 것으로써 왕가에 모였는데, 시기에 부합되지 않은 경우에는 모두 금령을 위반한다고 상주했다. 나는 왕이 나이가 어리고 적으며 공손하고 진실 된 마음이 있고 선제의 유명을 받았으므로, 은총과 예우를 더 높여 후대에까지 이어지기를 원하는데 하물며 왕 자신은 어떠하겠는가? 또 사람으로서 어찌 허물이 없겠는가?

이 조서를 내려 담당 관리에게 왕의 과실을 용서하도록 하겠다. 고인의 말에 '네가 보지 못하는 것을 경계하고, 네가 듣지 못하는 일을 두려워하라. 이러한 일은 숨겨진 행위 속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세세한 것 속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때문에 군자는 혼자 있을 때의 행동을 준수하고, 선제의 유명을 존중하며 지키도록 노력하고, 조심하고 공경스럽게 왕위를 지켜 나의 마음을 밝혀 주기 바란다. --

경초, 정원, 원년 연간에 부단히 식읍을 증가시켜 이전 것과 더해 총 5천호가 되었다.

임읍상공자상전

임읍의 상공자 조상은 요절했다. 태화 5년(231) 봉국과 시호를 추증했지만 후사가 없었다.

초왕표전

초왕 조표는 자가 주호이며, 건안 21년(216)에 수춘후에 봉해졌다. 

황초 2년(221)에 작위가 승진되어 여양공으로 봉해졌다. 황초 3년 익양왕으로 봉해졌다. 같은 해, 오왕으로 바뀌어 봉해졌다. 

황초 5년에 수춘현으로 봉해졌다. 

황초 7년에 백마현으로 봉해졌다. 

태화 5년에 겨울에 수도로 입조했다.

태화 6년 초왕으로 봉해졌다.

청룡 원년 당초, 조표가 수도로 입조하여 금령을 범했는데 담당 관리가 상주하여 3개의 현 모두 1천 5백호를 박탈하라는 조서가 있었다. 

청룡 2년(234)에 대사면이 있었으므로, 박탈당한 현읍을 회복시켰다.

경초3년(249)에 연주자사 영호우가 태위 왕릉과 공모하여 조표를 맞아 수도를 허창으로 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에 관한 일은 <왕릉전>에 실려 있다. 제왕은 사부와 시어사를 파견하여 초나라로 가서 이 일을 조사하여 이일에 연루된 자들을 체포하도록 했다. 정위가 조표를 불러 죄를 다스리기를 요청했다. 그래서 한연왕 유단의 선례에 따라서 정위를 겸임하고 있는 대홍려에게 절을 주어 파견하여, 조표에게 옥새를 찍은 조서를 주어 엄격하게 질책하고 스스로 죄를 다스리도록 하였다.

그래서 조표는 자살했다.

孔衍漢魏春秋載璽書曰:「夫先王行賞不遺仇讎,用戮不違親戚,至公之義也。故周公流涕而決二叔之罪,孝武傷懷而斷昭平之獄,古今常典也。惟王,國之至親,作 藩于外,不能祗奉王度,表率宗室,而謀於姦邪,乃與太尉王淩、兗州刺史令狐愚構通逆謀,圖危社稷,有悖忒之心,無忠孝之意。宗廟有靈,王其何面目以見先 帝?朕深痛王自陷罪辜,既得王情,深用憮然。有司奏王當就大理,朕惟公族甸師之義,不忍肆王市朝,故遣使者賜書。王自作孽,匪由於他,燕剌之事,宜足以 觀。王其自圖之!」

왕비와 그의 아들들은 모두 면직되어 평민이 되어서 평원군으로 옮겼다.

조표의 관속 이하와 감국의 알자는 조표가 모반하려는 일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보좌하여 선도하려는 뜻은 없었으므로, 모두 처형되었다. 봉국을 몰수하여 회남군으로 했다.

정원 원년에 조서를 내렸다.

--- 고인이 된 초왕 조표는 국가를 배반하고 사악함에 의지하였기 때문에 몸은 죽고 봉국은 몰수되었다. 비록 스스로 멸망을 자초했지만 불쌍하게 여기고 있다. 오점을 포용하고 결점을 가리는 것은 친족에게 친하는 방법이다. 조표의 세자 조가를 상산진정왕으로 봉하거라. --

경원 원년 (260) 식읍이 증가되어, 이전 것과 합쳐 모두 2천 5백호가 되었다. [주] 

[주] 신 송지가 보건데 조가(曹嘉)는 진나라 시대에 고읍공(高邑公)으로 봉해지고, 원강(291-299)연간에 석숭(石崇)---석포(石苞)의 아들---과 같이 국자박사(國子博士)가 되었다. 조가는 나중에 동완태수(東莞太守)가 되었고, 석숭은 정노장군(征虜將軍)이 되어, 청주와 서주(青徐)의 군사(軍事)를 감독하며, 하비(下邳)에 주둔했다.

조가는 석숭과 시를 주고받았다.
嘉 以詩遺崇曰:「文武應時用,兼才在明哲。嗟嗟我石生,為國之俊傑。入侍於皇闥,出則登九列。威檢肅青、徐,風發宜吳裔。疇昔謬同位,情至過魯、衛。分離踰 十載,思遠心增結。願子鑒斯誠,寒暑不踰契。」崇答曰:「昔常接羽儀,俱游青雲中,敦道訓冑子,儒化渙以融,同聲無異響,故使恩愛隆。豈惟敦初好,款分在 令終。孔不陋九夷,老氏適西戎。逍遙滄海隅,可以保王躬。世事非所務,周公不足夢。玄寂令神王,是以守至沖。」

왕은(王隱)의 진서(晉書)에는 이부랑(吏部郎) 이중계(李重啟)게 한말이 실려 있다. 王隱晉書載吏部郎李重啟云:「魏氏宗室屈滯,每聖恩所存。東莞太守曹嘉,才幹學義,不及志、翕,而良素脩潔,性業踰之;又已歷二郡。臣以為優先代之後,可以嘉為員外散騎侍郎。

강상공자근전

태화 5년(231) 강상공자 조근은 요절했다. 봉국과 시호를 추증했는데 후사가 없었다.

곡성상공자승전

태화 5년(231)곡성상공자 조승은 요절했는데, 봉국과 시호를 추증했으나 후사가 없었다.

미대공자정전

미대공자 조정은 당숙부 낭중 조소의 뒤를 이었다. 

건안22년(217) 미후로 봉해졌다. 건안23년(218) 세상을 떠났는데 아들이 없었다. 

황초 2년(221) 에 작위를 추증하고 시호를 대공이라고 했다. 팽성왕 조거의 아들 조범을 조정의 후사로 받아들였다. 

황초 3년(222) 평씨후로 봉해졌다.

황초 4년(223)성무로 바뀌어 봉해졌다. 

태화3년(229)작위를 공으로 승진시켰다. 

청룡 3년(235) 세상을 떠났고 시호를 도공이라고 했다 후사가 없었다.

청룡 4년(236)에 조서를 내려 조범의 동생 동안향공 조천을 미공으로 삼아 조정의 뒤를 잇도록 했다. 

정원, 경원 연간에 계속 그의 식읍이 증가하여 이전 것과 합쳐 총 1천 8백호가 되었다.

영상공자경전

공자 조경은 요절했다. 태화 5년 봉국과 시호를 추증했는데 후사가 없었다. 

번안공균전

번안공 조균은 숙부 괵공공?조빈의 뒤를 이었다. 

건안 22년(217) 번후로 봉해졌다.

건안 24년(219) 세상을 떠났다. 아들 조범이 작위를 계승했다. 

황초 2년(221) 조균의 작위를 공으로 추증했으며 시호를 안공이라고 했다. 

황초 3년(222) 조항을 공으로 봉했다. 황초4년(223)둔류공으로 고쳐 봉했다. 경초 원년에 세상을 떠났고 시호를 정공이라고 했다. 아들 조심이 뒤를 이었다. 경초 정원 연간에 계속 식읍을 증가시켜서 이전 것과 더해 총 1천9백호가 되었다.

광종상공자극전

광종상공자 조극은 요절했다. 태화5년, 봉국과 시호를 추증했는데, 후사가 없었다.

동평영왕휘전

동평의 영왕 조휘는 숙부 낭릉의 애후 조옥의 뒤를 이었다.

건안 22년(217)역성후에 봉해졌다.

황초 2년(221) 작위를 공으로 승진시켰다.

황초 3년(222) 노강왕에 봉해졌다.

황초 4년(223) 수장왕에 바뀌어 봉해졌다.

황초 5년(224) 수장현에 봉해졌다.

황초 6년(225) 동평에 봉해졌다.

청룡 2년(234)에 조휘는 관속으로 하여금 수장현의 관리를 때리게 하였으므로, 담당 관리에 의해 상주되었다. 그의 식읍 한 현 5백 호를 몰수한다는 조서를 내렸다. 같은 해 몰수당했던 현읍을 회복시켜 주었다.

정시3년(242)에 세상을 떠났고, 아들 조흡이 왕위를 계승했다. 경초, 정원, 경원 연간에 계속 식읍을 증가시켜 이전 것과 더해 모두 3천 4백호가 되었다. [주] 

[주] 신송지가 살펴보니: 조흡은 진나라때에 음구공(廩丘公)이 되었고, 경성공(鄄城公) 조지(曹志)---조식(曹植)의 아들---에 이은 명성을 얻었다. 

태시2년(266)에 아들 조곤(曹琨)을 입조시켰다. 진나라 황제는 그에게 기도위로 봉하고, 옷과 돈을 내려 주었다. 詔曰:「翕秉德履道,魏宗之良。今琨遠至,其假世子印綬,加騎都尉,賜服一具,錢十萬,隨才敘用。」 조흡은 해한식산방(解寒食散方)이라는 책도 썼다. 황보밀(皇甫謐)이과 함께 썼던 책과 함께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악릉왕무전

건안 22년(217) 악릉왕 조무가 만세정후에 봉해졌다.

건안 23년(210) 평여후에 봉해졌다.

황초 3년(222) 작위가 승진되어 승씨공으로 봉해졌다.

황초 7년(226) 중구공으로 고쳐 봉해졌다. 조무는 타고난 성품이 오만하고 포악했으므로 어렸을 때 조조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 문제 때에 이르러서는 또 혼자만 왕으로 봉해지지 않았다. 

태화 원년(227) 요성공으로 봉해지고, 같은 해 왕으로 봉해졌는데 조서가 이러했다.

--옛날에 상의 잔혹함은 극도에 이르렀지만, 위대한 순임금은 그를 유비에서 후로 봉하였고 가까이 한 왕조의 화남왕, 부릉왕은 모두 난신역자였지만, 어떤 때는 그 본인에게 봉국을 회복시켜 주고, 어떤 때는 아들에게 봉토를 하사했다. 우임금과 순임금은 상고시대에 건립했고, 한문제, 한명제, 한장제는 이전 시대에 이미 실행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친척을 가까이 하는 깊은 정이다. 

요성공 조무는 어렸을 때 예교를 배우지 않았고 성장해서는 착한 도를 추구하지 않았다. 선제는 고대에 제후를 봉할 경우에는 모두 현인을 임명하려고 했기 때문에 주 왕조 희성 중에도 후로 봉하지 못한 자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조무 혼자만 왕으로 봉하지 않은 것이다. 태황태후는 여러 차례 이것을 말하려고 했었다. 조무가 최근에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며 뜻을 세워 착하 일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들었다. 군자는 다른 사람의 전진을 칭찬하고 지난날의 허물은 헐뜯지 않는다. 지금 조무를 요성왕으로 봉하여 태황태후의 자손에 관한 걱정을 위로하리라.--

태화 6년(232)곡양왕으로 고쳐서 봉했다.

정사 3년(242)에 동평의 영왕이 세상을 떠났는데, 조무는 애통했으나 소리 내어 울면서 애도 의식을 거행할 수 없었으므로, 거처의 출입을 지난날과 마찬가지로 했다. 담당 관리가 그의 국토를 몰수하도록 상주했는데, 명제는 조서를 내려 한 현 5백 호를 몰수하기로 했다. 

정사 5년(244)악릉공으로 봉하였고 조무가 거두어들인 조세는 적은데 자제는 많았으므로, 조서를 내려 몰수당했던 식읍을 회복시켜 주었다. 그와 동시에 식읍 7백호를 더 주었다. 가평, 정원, 경원 연간 끊임없이 식읍을 증가시켜 이전 것과 합쳐 총 5천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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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문제 조비에게는 아홉 명의 아들이 있다. 견씨황후 소생의 명제 조예와 이귀인 소생의 찬애왕 조협, 반숙원 소생의 북해도왕 조유, 주숙원 소생의 동무양회왕 조감, 구소의 소생의 동해정왕 조림, 서희 소생의 원성애왕 조예, 소희 소생의 한단회왕 조옹, 장희 소생의 청하도왕 조공, 송희 소생의 광평애왕 조엄이다. 

찬애왕협전

찬애왕 조협은 요절했다. 

태화 5년(231)에 봉국과 시호를 추증했고, 경상공이라고 불렀다.

청룡 2년(234)에 또 시호를 추증했다.

쳥룡 3년(235) 아들 상왕 조심이 왕위를 계승했다.

경초 3년(239) 식읍을 5백호 증가시켜, 이전의 것과 합쳐 총 3천호가 되었다.

정시 9년(248)에 세상을 떠났는데 아들이 없었으므로 봉국을 몰수당했다.

북해도왕유전

북해도왕 조유는 황초 7년, 명제가 즉위했을 때 양평현의 왕으로 세워졌다. 

태화 6년(232) 북해도왕에 봉해졌다.

청룡 원년(233) 세상을 떠났다.

청룡 2년(234) 낭야왕의 아들 조찬을 조유를 계승할 아들로 삼아 창량공으로 봉했다.

경초 2년(238)에 요안왕으로 임명되었다.

정시 7년(246)에 문안으로 봉해졌다. 정원, 경원 연간에 계속 식읍이 증가되어 이전의 것과 합쳐 총 3천 5백호가 되었다.

동무양회왕감전

황초 6년(225)에 동무양회왕 조감이 왕으로 세워졌으나 그 해에 죽었다.

청룡 3년(235) 시호를 받았으나 아들이 없었으므로 봉국을 몰수당했다. 

동해정왕림전

황초 3년(222)에 동해정왕 조림이 하동왕으로 세워졌다.

황초 6년(225) 관도현으로 봉해졌다. 명제가 즉위한 후, 선제의 유지에 따라 조림을 매우 총애하는 것이 다른 왕들과는 달랐다. 그러나 조림은 성격이 조잡하고 포악하여 궁궐 안의 사람들과 그의 비첩들은 대부분 그에게 잔혹한 학대를 받았다.

태화 6년(232)동해정왕으로 봉해졌다.

가평 원년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조계가 왕위를 계승했다. 경초, 정원, 경원 연간에 계속 식읍이 증가되어 이전 것과 합쳐 총 6천2백호가 되었다. 고귀향공 조모는 조림의 아들로 조정으로 들어가 작위를 계승했다.

원성애왕예전

황초 2년(221)에 원성애왕 조예가 태공으로 봉해졌다. 경조군을 봉국으로 삼았다. 

황초 3년(222)에 경조왕으로 봉해졌다.

황초 6년(225) 원성애왕으로 봉해졌다.

태화 3년(229)에 죽었다.

태화 5년(231)임성왕 조개의 아들 조제에게 조례의 뒤를 잇도록 했다.

태화 6년(232)에 초왕으로 봉해졌다. 경초, 정원, 경원 연간에 끊임없이 증가되어 이전 것과 합쳐 총 4천5백호가 되었다.

한단회왕옹전

황초 2년(221) 한단회왕 조옹은 회남공으로 봉해지고 구강군을 봉군으로 삼았다.

황초 3년 회남왕으로 승진되었다.

황초 4년 진왕으로 봉해졌다.

황초 6년 한단회왕으로 봉해졌다.

태화 3년에 죽었다.

태화 5년 임성왕 조개의 아들 조온에게 조옹의 뒤를 계승하도록 했다. 

태화 6년에 노양왕으로 봉해졌다. 

경초,정원,경원 연간에 계속 식읍이 증가하여 이전 것과 합쳐 총 4천4백호가 되었다.

청하도왕공전

황초 3년에 청하도왕 조공은 왕으로 봉해졌다.

황초 4년 죽었으나 아들이 없었으므로 봉국을 몰수당했다.

광평애왕엄전

황초 3년에 조엄은 광평애왕으로 봉해졌다.

황초 4년에 죽었으나 아들이 없었으므로 봉국을 몰수당했다.

※ 평하여 말한다.-- 위씨의 왕공들은 국토를 지배하는 명목을 부여받았을 뿐 사직의 일은 없었으며, 여러 가지를 금지하고 가로막아 그들과 외부 세계와의 관계를 단절시켰으므로, 왕궁은 감옥과 같았다. 작위와 시호도 고정되어 있지 못하고, 대국과 소국이 해마다 바뀌어 골육의 정이 얇아졌으니, <<시경>>의 <당체>편에서 말한 도의는 사라졌으며 법령을 제정한 병폐는 결국 이 지경에 이르렀다.

袁子曰:魏興,承大亂之後,民人損減,不可則以古始。於是封建侯王,皆使寄地,空名而無其實。

원자에 이르길 : 위나라가 흥기한 것은 큰 변란이 있고난 이후라 백성들이 감소하여 고대의 제도를 본받을 수 없었다. 이에 왕후를 임명하여 모두 그 봉지로 가라고는 했지만 텅빈 이름일 뿐 그 실질이 없었다.

王國使有老兵百餘人,以衛其國。雖有王侯之號,而乃儕為匹 夫。縣隔千里之外,無朝聘之儀,鄰國無會同之制。

왕국에 노병 100여 명이 있게 하여 이로써 그 나라를 보위하게 하였다. 비록 왕후의 칭호가 있다하나 마침내 필부와 나란히 하는 것 이었다. 1000리 밖에 떨어져 있어 조빙의 의례가 없고 가까운 나라 사이에도 만나서 회맹하는 제도가 없었다.

諸侯游獵不得過三十里,又為設防輔監國之官以伺察之。王侯皆思為布衣而不能得。既違宗國藩屏之義,又虧親 戚骨肉之恩。

제후가 유렵을 할 때 봉국에서 30리를 초과 할 수 없었고 또한 통치를 보좌하고 감독하는 관리를 설치하여 감시하도록 하였다. 왕후가 모두 포의의 신분이 되는 걸 생각하였으나 얻을 수 없었다. 이미 종국번병의 뜻을 잃고 또다시 친척골육의 은혜를 일그러트린 것이다.

魏氏春秋載宗室曹冏上書曰:「臣聞古之王者,必建同姓以明親親,必樹異姓以明賢賢。故傳曰『庸勳親親,昵近尊賢』;書曰『克明俊德,以親九 族』;詩云『懷德維寧,宗子維城』。

위씨춘추에 종실 조경(
曹冏)의 상서를 실어 이르길 : 「신이 듣기로 고대의 왕은 반드시 동성을 세워 친한 사람을 친하게 대함을 밝히고 반드시 이성을 세워 현명한 사람을 현명하게 대함을 밝혔습니다. 그러므로 전에 이르길 『공훈이 있는 자를 등용하고 친속을 친애하며, 근린을 가까이하고 현자를 존경한다.』고 하였고 서에 이르길 『능히 큰 덕을 밝히셔서 구족을 친하게 한다.』고 하였고 시에 이르길 『덕으로 다스리니 국가가 안녕하고 종자는 나라의 성곽이네.』라 하였습니다.

由是觀之,非賢無與興功,非親無與輔治。夫親親之道,專用則其漸也微弱;賢賢之道,偏任則其弊也劫奪。先聖知其然也, 故博求親疏而並用之;近則有宗盟藩衛之固,遠則有仁賢輔弼之助,盛則有與共其治,衰則有與守其土,安則有與享其福,危則有與同其禍。

이로부터 보건대 현자가 없으면 공업을 일으킬 수 없고 친속이 없으니 보좌 받아 나라를 통치 할 수 없습니다. 무릇 친한 사람을 친하게 대하는 도리를 오롯이 사용하면 곧 점차 (조정이) 미약해지고 현명한 사람을 현명하게 대하는 도리를 지나치게 사용하면 곧 그 폐단으로 (대신이 정권을) 겁탈하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선대의 성군은 그 이유를 알았기에 널리 친속과 소원한 사람들을 구하여 더불어 써서 가까이에는 종족의 연맹이 있어 나라를 지키는 견고함이 있었고 멀리는 현인들의 보필의 조력이 있어 성대하면 더불어 다스렸고 쇠하면 더불어 그 땅을 지켰으니 안락하면 더불어 그 복을 누리고 위태로우면 더불어 그 화를 감당하였습니다.

夫然,故能有其國家, 保其社稷,歷紀長久,本枝百世也。今魏尊尊之法雖明,親親之道未備。詩不云乎,『鶺鴒在原,兄弟急難』。以斯言之,明兄弟相救於喪亂之際,同心於憂禍之 間,雖有鬩牆之忿,不忘禦侮之事。

무릇 이렇게 하였기에 능히 국가를 소유하고 사직을 보전하며 긴 시간동안 세세토록 전해져올 수 있었습니다. 지금 위나라가 현명한 사람을 존경하는 법도가 비록 밝지만 친속을 친하게 대하는 도리에 미비한 점이 있습니다. 시에서 말하지 않았습니까? 『할미새가 들판에 있는데 형제에게 급박한 어려움이 있네.』라고. 이로써 말하건대 형제가 상란의 시기에 서로를 구하고 우화지간에 마음을 같이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비록 싸울 때도 있겠지만 모욕을 방어하는 일을 잊지는 않습니다.

何則?憂患同也。今則不然,或任而不重,或釋而不任,一旦疆埸稱警,關門反拒,股肱不扶,胸心無衛。臣竊惟此,寢不安 席,思獻丹誠,貢策朱闕。謹撰合所聞,敘論成敗。

왜 그런 것입니까? 이해가 동일하게 때문입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는데 혹은 임명하되 중용하지 않고 혹은 풀어놓고 임용하지 않으니 하루아침에 강역에 급변이 생기면 문을 닫아걸고 반항하니 고굉이 부축해주지 않으면 심복은 지켜줄 사람이 없게 됩니다. 신은 이로 인해 잘때도 편안치 않아 생각하여 진실한 마음을 바쳐 계책을 조정에 바칩니다. 삼가 들은바를 합쳐 (국가의) 성패를 논하고자 합니다.

論曰:昔夏、殷、周歷世數十,而秦二世而亡。何則?三代之君,與天下共其民,故天下同其憂。秦王獨制其 民,故傾危而莫救。夫與民共其樂者,人必憂其憂;與民同其安者,人必拯其危。先王知獨治之不能久也,故與人共治之;知獨守之不能固也,故與人共守之。兼親 疏而兩用,參同異而並建。

논문에 이르길 : 옛날 하, 은, 주나라는 수 십세대를 이어왔는데 진나라는 2세대 만에 멸망하였습니다. 왜 그런것입니까? 3대의 임금은 천하와 더불어 백성들을 다스렸기 때문에 천하도 그 걱정을 같이 한 것입니다. 진나라 왕은 홀로 그 백성을 다스리니 위급한 시기가 닥쳐도 아무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부릇 백성들과 더불어 즐거움을 같이하는 사람은 백성들도 반드시 그 근심을 같이 걱정해줄 것이고 백성과 더불어 안락함을 같이하는 사람은 백성들도 그 위난을 구해줄 것입니다. 선왕은 홀로 다스리는 것을 오래할 수 없음을 알아 사람들과 더불어 통치했고 홀로 지키는 것이 견고할 수 없음을 알아 사람들과 더불어 지킨 것입니다. 친속과 소원한 사람을 모두 사용하고 동성과 이성을 섞어 더불어 세웠습니다.

是以輕重足以相鎮,親疏足以相衛,并兼路塞,逆節不生。及其衰也,桓、文帥禮;苞茅不貢,齊師伐楚;宋不城周,晉戮其宰。王綱弛 而復張,諸侯傲而復肅。二霸之後,浸以陵遲。

이로써 경중이 족히 서로 진압할 수 있고 친소가 족히 서로 지킬 수 있으며 견병의 길이 막히고 반란이 발생하지 않게 됩니다. 그 쇠미한 시기에 이르러 제환공과 진문공이 주례를 지켜 포모를 공납으로 올리지 않자 제나라의 군대가 초나라를 정벌하였고 송나라가 주나라에 성을 주지 않자 진나라에서 그 재상을 죽였습니다. 주나라 왕의 기강이 해이해졌다가 다시 긴장해졌으니 제후들이 오만했다가 다시 공경스러워졌습니다. 두 명의 패자 이후에 (주나라는) 점차 쇠퇴해갔습니다.

吳、楚憑江,負固方城,雖心希九鼎,而畏迫宗姬,姦情散於胸懷,逆謀消於唇吻;斯豈非信重親戚,任用賢能,枝 葉碩茂,本根賴之與?

오나라와 초나라는 장강과 견고한 성곽에 의지하고 있어 비록 구정을 바라는 마음이 있다고는 하나 희씨 종족을 두려워하여 간사한 감정이 마음속에서 흩어지고 역모가 입술에서 사그라 들었습니다. 이것은 어찌 친척을 믿어 중요하고 현능한 사람을 임용해 근본에 힘입어 지엽이 번성한 게 아니겠습니까?

自此之後,轉相攻伐;吳并於越,晉分為三,魯滅於楚,鄭兼於韓。暨于戰國,諸姬微矣,惟燕、衛獨存,然皆弱小,西迫彊秦,南畏齊、 楚,憂懼滅亡,匪遑相恤。

이후부터 서로 공벌하여 오나라는 월나라에 병합되고 진나라는 세 나라로 갈렸으며 노나라는 초나라에게 멸망당하고 정나라는 한나라에게 겸병됐습니다. 전국시대에 여러 희씨 종족이 쇠미하여 유독 연나라와 위나라만이 존속했는데 모두 약소하여 서쪽으로는 강한 진나라에 핍박당하고 남쪽으로는 제나라와 초나라를 두려워하며 멸망을 걱정하느라 서로를 도와줄 겨를이 없었습니다.  

至於王赧,降為庶人,猶枝幹相持,得居虛位,海內無主,四十餘年。秦據勢勝之地,騁譎詐之術,征伐關東,蠶食九國,至於始皇,乃 定天位。曠日若彼,用力若此,豈非深固根蔕不拔之道乎?易曰;『其亡其亡,繫于苞桑。』周德其可謂當之矣。秦觀周之弊,以為小弱見奪,於是廢五等之爵,立 郡縣之官,棄禮樂之教,任苛刻之政;子弟無尺寸之封,功臣無立錐之地,內無宗子以自毗輔,外無諸侯以為藩衛,仁心不加於親戚,惠澤不流於枝葉;譬猶芟刈股 肱,獨任胸腹,浮舟江海,捐棄楫櫂,觀者為之寒心,而始皇晏然自以為關中之固,金城千里,子孫帝王萬世之業也,豈不悖哉!

주나라 난왕에 이르러 서인으로 폐해졌는데 오히려 가지가 서로를 지지해주고 있어 허위에 거할 수 있었으니 천하에 주인이 없는 것이 40여년이나 지속됐습니다. 진나라는 요충지를 점령하고 요사한 계책을 사용하여 관동을 정벌하고 아홉 나라를 잠식해 가더니 시황제에 이르러 마침내 천자의 지위를 정했습니다. 길게 지속된 시간이 저렇고 힘을 쓴 것이 이렇다면 어찌 뿌리를 깊게 하여 뽑기 어렵게 하는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역에 이르길 『그 망할까 그 망할까 하여야 포상(苞桑)에 맨 것 같으리라』하였으니 주나라의 덕이 가히 이에 합당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진나라는 주나라의 폐단을 보고 약소해지면 빼앗긴다는 걸 이유로 삼아 이에 오등의 작위제도를 폐지하고 군현의 관리를 세웠으며 예약의 정교를 버리고 가혹하고 각박한 정치에 맡겼습니다. 자제는 척촌의 봉토도 없고 공신들은 송곳을 세울만한 땅도 없어 안으로는 종자가 서로를 보호할 수 없고 바깥으로 제후들이 울타리가 돼주지 않으니 인자한 마음이 친척에게 가해지지 못하고 혜택이 지엽에 흘러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비유컨대 마치 고굉을 잘라내고 홀로 흉복에 맡기는 것과 같고 배를 강해로 띄워놓고 노를 내다버리는 것과 똑같으니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상심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진시황은 태연자약하게 스스로 관중의 견고함과 견고한 성이 천리에 걸쳐 있어 자손 제왕이 만세토록 가업을 유지할 수 있다 여겼으니 어찌 도리에 어긋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是時淳于越諫曰:『臣聞殷、周之 王,封子弟功臣千有餘(城)〔歲〕。今陛下君有海內而子弟為匹夫,卒有田常六卿之臣,而無輔弼,何以相救?事不師古而能長久者,非所聞也。』始皇聽李斯偏 說而絀其議,至於身死之日,無所寄付,委天下之重於凡夫之手,託廢立之命於姦臣之口,至令趙高之徒,誅鉏宗室。胡亥少習刻薄之教,長遭凶父之業,不能改制 易法,寵任兄弟,而乃師譚申、商,諮謀趙高;自幽深宮,委政讒賊,身殘望夷,求為黔首,豈可得哉?

당시에 순우월이 간언을 하여 말하길 :『신이 듣기로 은나라와 주나라의 왕은 자제 공신들을 천 여개의 성에 봉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 해내에 군림하시는데 자제들은 필부가 되어 있으며 끝내 전상과 같은 대신이 있다면 보필이 없는데 어떻게 서로 구하려고 하십니까? 일을 할 때 옛날을 본받지 않고 능히 장구할 수 있는 사람을 저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진시황은 이사의 일방적인 말을 듣고 그 건의를 물리쳤는데 죽는 날에 이르러 부탁할 만한 사람이 없어 천하의 무거움을 범부의 손에 맡기고 폐립의 명을 간신의 입에 부탁하였으니 조고의 무리로 하여금 종실을 잔멸하게 하는데 이르렀습니다. 호해는 어렸을 때부터 각박한 교육에 익숙했고 자라서는 흉악한 아버지의 사업을 맞닥트렸으니 제도를 바꿔 형제를 총애하고 신임할 수 없었고 마침내 신불해와 상앙을 배워서 조고에게 조언을 구하고 스스로 깊은 궁궐에 있으며 정권을 간사한 도적들에게 맡겼으니 몸이 망이궁에서 죽는 날에 서민이 되고자 구했으나 어찌 얻을 수 있었겠습니까?

遂乃郡國離心,眾庶潰叛,勝、廣倡之於前,劉、項弊之於 後。向使始皇納淳于之策,抑李斯之論,割裂州國,分王子弟,封三代之後,報功臣之勞,士有常君,民有定主,枝葉相扶,首尾為用,雖使子孫有失道之行,時人 無湯、武之賢,姦謀未發,而身已屠戮,何區區之陳、項而復得措其手足哉?

마침내 곧 군국의 마음이 떠나고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켜 진승, 오광이 앞에서 창도하고 유방, 항우가 뒤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만약 시황으로 하여금 순우월의 계책을 채납하고 이사의 논의를 억눌러 주국을 나눠 자제를 왕에 분봉하고 3대의 후예를 봉하며 공신들의 노고에 보답했다면 선비는 일정한 임금이 있고 백성들은 정해진 주인이 있으니 지엽이 서로를 지지하여 머리와 꼬리가 각 자 쓰임이 있어 비록 자손이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지라도 당시의 사람중에 탕왕이나 무왕과 같은 현자가 없다면 간사한 계획이 발해지기 전해 몸이 벌써 주륙당하게 되니 어찌 구구한 진광이나 항우 따위가 다시 그 수족을 놀릴 수 있었겠습니까?

故漢祖奮三尺之劍,驅烏集之眾,五年之中,遂成帝業。自開闢以來,其興立功勳,未 有若漢祖之易也。夫伐深根者難為功,摧枯朽者易為力,理勢然也。漢監秦之失,封殖子弟,及諸呂擅權,圖危劉氏,而天下所以不傾動,百姓所以不易心者,徒以 諸侯彊大,盤石膠固,東牟、朱虛受命於內,齊、代、吳、楚作衛於外故也。

그러므로 한고조는 3척의 검으로 떨쳐 일어나 오합지졸들을 이끌고 5년안에 마침내 황제의 사업을 이루었습니다. 개벽 이래로부터 공훈을 세우는 것이 한고조와 같이 쉬웠던 때가 없습니다 무릇 뿌리가 깊은 사람을 공격하면 공을 세우기 어렵고 마르고 썩은 나뭇가지를 꺾는 것은 힘을 쓰기 쉬우니 사리와 형세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한나라는 진나라의 잘못을 거울삼아 자제들을 봉했는데 여러 여씨들이 권력을 농간하여 유씨의 위난을 도모하는 때에 이르러 천하가 경동하지 않고 백성들이 마음을 바꾸지 않은 까닭은 다만 제후가 강대하고 반석이 굳건하여 동모후와 주허후가 안에서 명을 받들고 제, 대, 오, 초나라가 바깥에서 방위하였던 연고입니다.

向使高祖踵亡秦之法,忽先王之制,則天下已傳,非劉氏有也。然高祖封建,地過古 制,大者跨州兼郡,小者連城數十,上下無別,權侔京室,故有吳、楚七國之患。賈誼曰:『諸侯彊盛,長亂起姦。夫欲天下之治安,莫若眾建諸侯而少其力,令海 內之勢,若身之使臂,臂之使指,則下無背叛之心,上無誅伐之事。』文帝不從。至於孝景,猥用晁錯之計,削黜諸侯,親者怨恨,疏者震恐,吳、楚倡謀,五國從 風。兆發高帝,釁鍾文、景,由寬之過制,急之不漸故也。

만약 고조가 망한 진나라의 법도를 따라 선왕의 제도를 홀시하였다면 곧 천하는 이미 전해져 유씨의 소유가 아니게 됐을 겁니다. 그러나 고조의 봉건은 토지에 있어 옛날의 제도를 초과하였으니 큰 것은 주군을 넘어 겸유하고 작은 것은 연달아 수 십성을 가졌으니 위 아래에 분별이 없어 권한이 경성의 황실과 비슷했으므로 오, 초 7국의 반란이 있었습니다. 가의가 말하길 :『제후들이 강성하면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무릇 천하가 안녕하게 통치되록 하려면 제후들을 많이 세우고 그 힘을 적게 하는 것만 못하니 천하의 세력을 마치 몸이 어깨를 부리고 어께가 손가락을 부리는 것과 같이 한다면 아래는 배반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고 위에는 주벌하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게 된다.』고 하였으나 한문제가 따르지 않았습니다. 효경제의 시대에 이르러 지저분하게 조조의 계책을 사용해 제후들을 삭탈하여 친속들은 원한을 품고 소원한 사람들을 두려워 떨게 만들었으니 오나라와 초나라가 앞장서 모의하고 다섯나라는 그 바람을 따랐습니다. 징조는 고조로부터 시작하였고 움직임은 문제와 경제때에 있었으니 이유는 제도를 넘어서 관대하고 점차하지 않고 너무 급하게 실행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所謂末大必折,尾大難掉。尾同於體,猶或不從,況乎非體之尾,其可掉哉?武帝從主父之策,下推恩之 令,自是之後,齊分為七,趙分為六,淮南三割,梁、代五分,遂以陵遲,子孫微弱,衣食租稅,不預政事,或以酎金免削,或以無後國除。至於成帝,王氏擅朝。 劉向諫曰:『臣聞公族者,國之枝葉;枝葉落則本根無所庇蔭。方今同姓疏遠,母黨專政,排擯宗室,孤弱公族,非所以保守社稷,安固國嗣也。』其言深切,多所 稱引,成帝雖悲傷歎息而不能用。

소위 말절이 크면 반드시 꺾이고 꼬리가 크면 흔들기 어렵다고 합니다. 꼬리는 같은 몸에 달려있는 건데도 오히로 혹 따르지 않는데 하물며 몸에 달려 있지 않은 꼬리를 흔드는게 가능하겠습니까? 한무제는 주보의 계책을 따라 추은의 명령을 내려 이로부터 제나라는 7개로 나뉘었고 조나라는 6개로 나뉘었으며 회남은 3분됐고 양나라와 대나라는 5분되어 마침내 이로써 쇠미해져 자손은 미약해지고 의식과 세금이외에 정사에 관여하지 못했습니다. 혹은 주금률에 걸려 관작이 삭탈당하던가 혹은 후손이 없어 봉국이 제거됐습니다. 한 성제에 이르러 왕씨가 조정의 권력을 전권하니 유향이 간언하여 이르길 :『신이 듣기로 공족은 나라의 가지와 잎이라고 합니다. 지엽이 떨어지고 나면 뿌리는 비호해주는 자가 없게 됩니다. 방금에 동성들이 소원하고 외척이 정권을 오롯이 하고 종실을 배제하며 공족들을 고립되고 약하게 하니 사직을 보수하고 국가의 계승을 공고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그 말이 심히 간절하고 인용한 내용도 많았는데 성제가 비록 슬퍼하고 탄식하였지만 쓸수가 없었다.

至於哀、平,異姓秉權,假周公之事,而為田常之亂,高拱而竊天位,一朝而臣四海。漢宗室王侯,解印釋紱,貢奉社稷,猶懼不 得為臣妾,或乃為之符命,頌莽恩德,豈不哀哉!由斯言之,非宗子獨忠孝於惠、文之閒,而叛逆於哀、平之際也,徒權輕勢弱,不能有定耳。賴光武皇帝挺不世之 姿,禽王莽於已成,紹漢嗣於既絕,斯豈非宗子之力也?而曾不監秦之失策,襲周之舊制,踵王國之法,而徼倖無疆之期。

애제와 평제때에 이르러 이성의 대신이 권력을 장악해 주공의 일에 빗대어 전상의 반란을 일으켰으니 팔짱을 끼고 가만히 천자의 자리를 훔쳐 하루아침에 사해를 신하로 삼았습니다. 한나라의 종실 왕후들은 인장을 풀고 관복을 벗으며 사직을 갖다 바쳤고 오히려 신첩이 되지 못할까 두려워하거나 혹은 마침내 이를 위해 상서로운 징조를 만들고 왕망의 은덕을 칭송하였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이로부터 말하건대 종실의 자제들이 유독 혜제와 문제때에 충효스럽고 애제와 평제때에 반역한 게 아니라 다만 권력이 가볍게 세력이 약하기 때문에 바로잡을 수 없었을 뿐입니다. 광무황제가 드러낸 불세출의 자태에 힘입어 이미 성공한 왕망을 붙잡고 이미 끊어진 한나라의 계승을 이었으니 이것이 어찌 종실자제의 역량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일찍이 진나라의 실책을 거울로 삼고 주나라의 구제를 답습하여 왕국의 법도를 잇지 않고 요행히 태평스러운 시기를 보냈습니다.

至於桓、靈,閹豎執衡,朝無死難之臣, 外無同憂之國,君孤立於上,臣弄權於下,本末不能相御,身首不能相使。由是天下鼎沸,姦凶並爭,宗廟焚為灰燼,宮室變為榛藪,居九州之地,而身無所安處, 悲夫!魏太祖武皇帝躬聖明之資,兼神武之略,恥王綱之廢絕,愍漢室之傾覆,龍飛譙、沛,鳳翔兗、豫,掃除凶逆,翦滅鯨鯢,迎帝西京,定都潁邑,德動天地, 義感人神。

환제와 영제 때에 이르러 환관들이 권력을 전횡하고 조정에는 어려움을 당해 목숨을 바치는 신하가 없고 바깥에는 걱정을 같이 해줄 봉국이 없어 임금은 위에서 고립되고 신하들은 아래에서 권력을 농간하니 본말이 서로 제어할 수 없고 머리와 몸이 서로를 부릴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이로부터 천하가 들끓어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들이 더불어 다퉈 종묘는 불타 재가 되고 궁실은 수풀로 변하였으니 9주의 땅에 거하면서도 몸이 안전한 곳이 없었습니다. 슬프구나 ! 위 태조 무황제께서 친히 성명스러운 자질로 신무한 모략을 겸했는데 왕의 기강이 폐해지고 끊어진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한실의 경복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초와 패에서 용흥하고 연주와 예주를 봉상하여 흉악한 역도를 소탕하고 악인들을 전멸시켰습니다. 서경에서 황제를 영접하여 영읍에 수도를 정하니 덕이 천지를 움직이게 하고 의로움이 사람과 귀신을 감동시켰습니다.

漢氏奉天,禪位大魏。大魏之興,于今二十有四年矣,觀五代之存亡而不用其長策,睹前車之傾覆而不改於轍跡;子弟王空虛之地,君有不使之民,宗室 竄於閭閻,不聞邦國之政,權均匹夫,勢齊凡庶;內無深根不拔之固,外無盤石宗盟之助,非所以安社稷,為萬世之業也。且今之州牧、郡守,古之方伯、諸侯,皆 跨有千里之土,兼軍武之任,或比國數人,或兄弟並據;而宗室子弟曾無一人閒廁其閒,與相維持,非所以彊幹弱枝,備萬一之虞也。

한씨는 천명을 받들어 대위에게 선양하였습니다. 대위가 흥기한지 지금에 이르기까지 24년인데 5대의 존망을 봐놓고도 그 장책을 쓰지 않고 전군이 경복된 것을 목격하고도 경로를 바꾸지 않았습니다. 자제들은 공허한 땅의 왕 노릇을 하고 있고 임금은 있기는 하되 부리지 않는 백성이 있으며 종실들은 여염간으로 도망쳐 숨어들어 방국의 정치에 관해 얻어 듣지 않고 권세가 필부, 서민과 비슷합니다. 안으로는 뽑을 수 없는 깊은 뿌리가 없고 바깥으로는 반석과 같은 종실 맹약의 도움이 없으니 사직을 안정시키고 만세토록 계승되기 위한 행동이 아닙니다. 또한 지금의 주목, 군수들은 고대의 방백, 제후와 같아 모두 천리의 토지에 걸터앉아 군사의 임무를 겸하고 있는가 하면 혹은 이웃 나라의 여러 사람이 모두 이러하거나 혹은 형제가 더불어 점거하는데도 종실의 자제는 일찍이 한 사람도 그 사이에 끼어 서로 유지한 적이 없으니 근본은 강하게 하고 지엽을 약하게 하여 만일을 대비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今之用賢,或超為名都之主, 或為偏師之帥,而宗室有文者必限小縣之宰,有武者必置百人之上,使夫廉高之士,畢志於衡軛之內,才能之人,恥與非類為伍,非所以勸進賢能褒異宗室之禮也。 夫泉竭則流涸,根朽則葉枯;枝繁者蔭根,條落者本孤。故語曰『百足之蟲,至死不殭』,以扶之者眾也。此言雖小,可以譬大。

지금의 현명한 사람을 사용하는 것은 혹은 초월하여 명도의 통치자로 혹은 일군의 통수권자로 임명하나 종실중에는 문채가 있는 사람도 반드시 작은 현의 재로 한정하고 무력이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100명의 위에 두니 청렴고결한 선비는 반드시 궁궐안의 근신으로 근무하고 재능이 있는 사람은 같은 부류가 아닌 사람들과 동일한 대오에 들어 있는 것을 부끄럽게 만드니 현명하고 능력있는 사람들을 권장하고 표창하며 종실을 특수하게 대우하는 예법이 아닙니다. 무릇 샘이 고갈되면 흐름이 마르고 뿌리가 썩으면 잎이 마르며 지엽이 번성하면 뿌리를 가려주고 가지가 떨어지면 근본이 외로워지는 법입니다. 말에 이르길 『다리가 백개인 벌레는 죽어도 굳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지지해주는 자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비록 작으나 가히 큰 것을 비유할 수 있습니다.

且墉基不可倉卒而成,威名不可一 朝而立,皆為之有漸,建之有素。譬之種樹,久則深固其本根,茂盛其枝葉,若造次徙於山林之中,植於宮闕之下,雖壅之以黑墳,煖之以春日,猶不救於枯槁,而 何暇繁育哉?夫樹猶親戚,土猶士民,建置不久,則輕下慢上,平居猶懼其離叛,危急將若之何?是以聖王安而不逸,以慮危也,存而設備,以懼亡也。故疾風卒至 而無摧拔之憂,天下有變而無傾危之患矣。」冏,中常侍兄叔興之後,少帝族祖也。是時天子幼稚,冏冀以此論感悟曹爽,爽不能納。

또한 담의 기초는 창졸간에 완성하면 안 되고 위명은 하루아침에 세우면 안 되니 모두 이를 점차하고 건립하는데 바탕이 있어야 합니다. 나무를 심는것에 비유하면 오래되면 그 본근이 깊고 굳건하여 지엽이 무성한데 만약 조차지간에 산림에서 옮겨와 궁궐의 밑에 심는다면 비록 검은 흙으로 북 돋아주고 봄날의 햇볕으로 따뜻하게 한다하더라도 오히려 고사를 구할 수 없거늘 하물며 빨리 기를 겨를이 있겠습니까? 무릇 나무는 친척과 같고 흙은 사민과 같으니 세운 오래되지 않으면 위아래가 반목하여 평상시에도 오히려 반란을 두려워 하는데 위급한 시기에는 장차 어떠하겠습니까? 이로써 성왕은 평안한 때에 부지런하여 위태로움을 생각하고 있을 때에 준비를 해놓는 것은 없을 때를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질풍이 갑자기 도래하여도 뽑힐 걱정이 없고 천하에 변란이 생겨도 경복될 걱정이 없었던 것입니다.」조경은 중상시의 형인 숙흥의 후손으로 소제의 족조(族祖:증조부의 조카정도일 듯하다.)이다. 당시에 천자가 어려서조경은 이 논문으로 조상을 감동시킬 바랐지만 조상은 채납할 수 없었다.

<조조 가계도>

조맹(曹萌) 고조부
백흥(伯興) 종증조부
중흥(仲興) 종증조부
숙흥(叔興) 종증조부
조등(曹騰) 증조부
조숭(曹嵩) 조부
조포(曹褒) 종증조부
조치(曹熾) 종조부
조윤(曹) 종조부
조인(曹仁) 당숙
조순(曹純) 당숙
조태(曹泰) 재종형제
조해(曹楷) 재종형제
조범(曹範) 재종형제
조초(曹初) 재종질
조씨(曹氏) 재종형제(여자) (손오 무열제 손견(孫吳武烈帝 孫堅)의 4남 손광(孫匡)의 부인)
손태(孫泰) 외재종질
손수(孫秀) 외삼종손
조조(曹操) 아버지
무선황후 변씨(武宣皇后 卞氏) 어머니
조덕(曹德) 숙부
조진(曹眞) 종형제
조상(曺爽) 당질
조희(曹羲) 당질
조훈(曹訓) 당질
조칙(曹則) 당질
조언(曹?) 당질
조애(曹?) 당질
조빈(曹彬) 종형제
덕양향주 조씨(德陽鄕主 曹氏) 종형제(여자) (하후상(夏侯尙)의 부인)
조빈(曹彬) 숙부
조휴(曹休) 종형제
조옥(曹玉) 숙부
조질(曹疾) 숙부
조앙(曹昻) 형
조완(曹琬) 조카
조렴(曹廉) 종손
조삭(曹鑠) 형
조잠(曹潛) 조카
조언(曹偃) 종손
조송(曹?) 종손
조비(曹丕)
조예(曹叡) 아들
조경(曹冏) 손자
조목(曹穆) 손자
조은(曹殷) 손자
조숙(曹淑) 손자
제장공주(齊長公主) 손녀
조순(曹詢) 손자
조방(曹芳) 손자 또는 종손
회황후 견씨(懷皇后 甄氏) 폐후 견씨(廢后 甄氏) (문소황후 견씨(文昭皇后 甄氏)의 조카손녀) 손자며느리이자 처재종손
조협(曹協) 아들
조심(曹尋) 손자
조유(曹蕤) 아들
조찬(曹贊) 손자
조감(曹鑒) 아들
조림(曹霖) 아들
조계(曹啓) 손자
조모(曹髦) 손자
황후 변씨(皇后 卞氏) 폐후 변씨(廢后 卞氏) (무선황후 변씨(武宣皇后 卞氏)의 조카증손녀) 손자 며느리이자 외재종손
조애(曹哀) 아들
조제(曹悌) 손자
조옹(曹邕) 아들
조온(曹溫) 손자
조공(曹貢) 아들
조엄(曹儼) 아들
동향공주(東鄕公主) 딸
조창(曹彰) 동생
조해(曹楷) 조카
조제(曹悌) 종손
조온(曹溫) 종손
조식(曹植) 동생
조금호(曹金瓠) 조카(질녀)
조지(曹志) 조카
조웅(曹熊) 동생
조병(曹炳) 조카
조충(曹沖) 동생
조종(曹琮) 조카
조거(曹據) 동생
조종(曹琮) 조카
조범(曹範) 조카
조천(曹闡) 조카
조우(曹宇) 동생
조환(曹奐) 조카
황후 변씨(皇后 卞氏) 진류왕비 변씨(陳留王妃 卞氏) (무선황후 변씨(武宣皇后 卞氏)의 조카손녀) 조카 며느리이자 외종질
조림(曹林) 동생
조위(曹闡) 조카
조찬(曹贊) 조카
조일(曹壹) 조카
조곤(曹袞) 동생
조부(曹孚) 조카
조현(曹玹) 동생
조찬(曹贊) 조카
조준(曹峻) 동생
조오(曹奧) 조카
조구(曹矩) 동생
조민(曹敏) 조카
조혼(曹?) 종손
조간(曹幹) 동생
조상(曹上) 동생
조표(曹彪) 동생
조가(曹嘉) 조카
조근(曹勤) 동생
조승(曹乘) 동생
조정(曹整) 동생
조범(曹範) 조카
조경(曹京) 동생
조균(曹均) 동생
조항(曹抗) 조카
조심(曹諶) 종손
조완(曹琬) 종손
조극(曹棘) 동생
조휘(曹徽) 동생
조흡(曹翕) 조카
조무(曹茂) 동생
조송(曹?) 조카
조헌(曹憲) 여동생
조절(曹節) 여동생
조화(曹華) 여동생
청하공주(淸河公主) 여동생
금향공주(金鄕公主) 여동생
안양공주(安陽公主) 여동생
고성공주(高城公主) 여동생
임분공주(臨汾公主) 여동생
  
조안민(曹安民) 종형제 또는 삼종형제
조문숙(曹文叔) 당질 또는 삼종질
조정(曹鼎) 종조부 또는 재종조부
조홍(曹洪) 당숙 또는 삼종숙
 
하후돈(夏侯惇) 당숙 또는 삼종숙
하후무(夏候楙) 매제이자 재종형제 또는 사종형제
하후연(夏侯淵) 삼종숙 또는 오종숙
하후형(夏侯衡) 사종형제 또는 육종형제(조진(曹眞) 처남)
하후적(夏侯績) 사종질 또는 육종질
하후포(夏侯褒) 오종손 또는 칠종손
하후패(夏侯覇) 사종형제 또는 육종형제
하후칭(夏侯称) 사종형제 또는 육종형제
하후위(夏侯威) 사종형제 또는 육종형제
하후영(夏侯嬰) 사종형제 또는 육종형제
하후혜(夏候惠) 사종형제 또는 육종형제
하후화(夏侯和) 사종형제 또는 육종형제
하후씨(夏侯氏) 오종손 또는 칠종손(동진원제(東晉元帝) 사마예(司馬睿)의 모후 서진선제(西晉宣帝) 사마의(司馬懿)의 손자 며느리)
 
하후덕(夏侯德) 재종형제 또는 팔종형제
하후상(夏侯尙) 재종형제 또는 팔종형제
하후현(夏侯玄) 재종질 또는 팔종질
하후휘(夏候徽) 재종질 또는 팔종질(서진경제(西晉景帝) 사마사(司馬師)의 부인)
하후후(夏侯?) 삼종손 또는 구종손
  
하후씨(夏侯氏) 재종형제(여자) 또는 팔형제(여자)
장포(張苞) 외재종질 또는 외팔질
장준(張遵) 외삼종손 또는 외구종손
장소(張紹) 외재종질 또는 외팔질
경애황후 장씨(敬哀皇后 張氏) 외재종질 또는 외팔질
장황후 장씨(張皇后) 외재종질 또는 외팔질

후한헌제 유협(後漢獻帝 劉協) 매제이자 장인
하안(何晏) (하진(何進)의 손자) 매제이자 이복형제
원담(袁譚) 매제이자 사돈

조조의 아들 - 손자 - 증손자들.

조앙(曹昻) - 조완(曹琬)
조비(曹丕) - 조예(曹叡) - 조경(曹경)
조은(曹殷)
조방(曹芳)
조순(曹詢)
조협(曹協) - 조심(曹尋)
조유(曹유) - 조찬(曹贊)
조감(曹鑒)
조림(曹霖) - 조계(曹啓)
조모(曹모)
조예(曹禮) - 조제(曹悌)
조옹(曹邕) - 조온(曹溫)
조공(曹貢)
조엄(曹儼)
조창(曹彰) - 조해(曹楷) - 조제(曹悌)
조온(曹溫)
조식(曹植) - 조지(曹志)
조웅(曹熊) - 조병(曹炳)
조삭(曹삭) - 조잠(曹潛) - 조언(曹偃)
조송(曹송)
조충(曹沖) - 조종(曹琮)
조거(曹據) - 조종(曹琮)
조범(曹範)
조천(曹闡)
조우(曹宇) - 조환(曹奐)
조림(曹林) - 조위(曹緯)
조찬(曹贊)
조일(曹壹)
조포(曹포) - 조부(曹孚)
조현(曹玹) - 조찬(曹贊)
조일(曹壹) - 조항(曹恒)
조준(曹峻) - 조오(曹奧)
조구(曹矩) - 조민(曹敏) - 조혼(曹혼)
조간(曹幹)
조상(曹上)
조표(曹彪) - 조가(曹嘉)
조근(曹勤)
조승(曹乘)
조정(曹整) - 조범(曹範)
조천(曹闡)
조경(曹京)
조균(曹均) - 조항(曹抗) - 조심(曹諶)
조완(曹琬)
조극(曹棘)
조휘(曹徽) - 조흡(曹翕)
조무(曹茂) - 조송(曹송)
분류 :
위서
조회 수 :
7789
등록일 :
2013.05.04
10:55:04 (*.148.47.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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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10
14:58:12
(*.104.141.18)
한문주석 추가합니다.

코렐솔라

2013.07.24
13:29:10
(*.104.141.18)
상상왕식->상상왕삭 으로 수정합니다.

출사표

2014.04.06
22:01:03
(*.177.232.97)
[주] 위략(魏略): 문제는 이렇게 말했다.


“형인 효렴 조앙(曹昂)이 일찍 죽은 것은 다 자기 운수 복이었다. 만약 창서(조창)가 살아 있었더라면 나 또한 천하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창서는 조창이 아니라 조충이라고 생각됩니다.

venne

2014.04.16
21:04:23
(*.186.21.9)
청룡 원년(233) 에 아들 민왕 조잠이 왕위를 계승했는데,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다.

청룡 2년(233), 에 아들 민왕 조잠이 왕위를 계승했는데,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다.

청룡 2년 (233), 아들 회왕 조언이 왕위를 계승하고 식읍은 2천5백호였다.

연호가 수정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코렐솔라

2016.07.19
10:52:06
(*.196.74.143)
관평애왕엄전 아래의 주석은 dragonrz님 번역입니다. 감사합니다!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samgugji&no=357322&page=6

그외 상상왕삭전에서 청룡2년을 234년으로 수정하고 234년에 잘못 가있는 한 줄을 제거했습니다.

조경의 상서는 뭐 이미 시기가 늦은 거 아닌가 싶군여...


PS '작으 현의 재로 한정하고' 부분에 오타가 난 것 같은데 수정해도 괜찮겠지요?

dragonrz

2016.07.19
13:56:20
(*.226.145.238)
먼저 삼갤에 올렸다 피드백을 받아본 다음에 나머지 자잘한 부분이랑 한번에 올릴려고했는데 벌써 반영하셨군요. ㅎㅎ

ps. 오타가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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