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衛覬)의 자는 백유(伯儒)이며, 하동군(河東郡) 안읍현(安邑縣)사람이다. 어렸으나 조숙했고, 재능과 학문으로 칭송받았다. 태조는 그를 불러 사공연속(司空掾屬)으로 삼았고 무릉(茂陵)의 현령(令)과 상서랑(尚書郎)에 임명했다. 태조가 원소(袁紹)를 정벌하려고 할 때, 유표(劉表)는 군대를 일으켜 원소를 구원했으나 관중(關中)의 모든 장수들은 중립을 지켰다. 익주목(益州牧) 유장(劉璋)과 유포가 틈이 벌어지자, 위기는 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가 되어 익주(益州)에 사신을 보내 유장에게 군대를 파견하게 하여 유표의 군대를 견제하도록 했다. 장안(長安)에 이르렀는데 길이 막혀 나아갈 수 없자 관중에 남아 진지를 구축했다. 당시 많은 유민(流民)들이 관중으로 돌아왔는데, 관중의 여러 장수들은 대부분 그들을 불러서 부하로 만들었다. 위기는 순욱(荀彧)에게 편지를 보냈다.

- 관중(關中)은 비옥한 땅이지만 갑자기 기근과 동란을 만나, 백성들 중에서 형주(荊州)로 흘러들어간 자가 10만 명이나 되는데, 이들은 고향의 안녕을 듣고 모두 돌아오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자는 스스로 살 방법이 없고, 장수들은 각기 다투어 불러서 부하로 삼으려 하고 있습니다. 군현(郡縣)의 사람들은 가난하고 연약하므로 그들과 싸울 수 없고, 병사들은 나날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일단 변고와 동란이 발생하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 무릇 소금은 국가의 큰 보물인데, 동란 이래로 방치되어 있습니다. 응당 옛날처럼 사자를 두어 소금 매매를 감독하여야 하며, 그 이익으로 얼룩소를 사서 만일 돌아오는 백성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공급하십시오. 농경을 장려하고 곡물을 축적하여 관중을 풍요롭게 하십시오. 먼 곳에 있는 백성들이 이 소식을 듣고 반드시 주야로 다투어 돌아올 것입니다. 또 사예교위(司隸校尉)에게 관중에 남아 다스리도록 하여 그들의 주인이 되게 한다면, 장수들의 힘은 나날이 적어질 것이고, 관리와 백성들은 나날이 풍성해질 것이니, 이는 근본을 강하게 하고 적을 약하게 하는 유리한 계책입니다.

순욱은 그의 의견을 태조에게 보고했다. 태조는 그의 건의를 받아들여 처음으로 알자복야(謁者僕射)를 파견하여 염관(鹽官)을 감독하도록 하고, 사예교위(司隸校尉)에게 홍농군(弘農郡)을 다스리도록 했다. 관중이 복종하자, 곧 위기를 불러들이도록 진언하고 차제에에 상서(尚書)로 승진시켰다.


위서(魏書)에서 이르길: 당초에 한 왕조가 수도를 옮길 때 대각의 옛날의 제도들이 흩어져 없어졌다. 허창으로 수도를 정한 이후 점차 기강이 잡혔는데 위기는 고대의 법도를 참고하여 많은 부분을 바로잡았다. 이때 관서 제장들은 겉으로는 귀부했으나 내심은 믿을 수 없었다. 사례교위 종요는 3천 병을 청해 관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겉으로는 장로를 친다고 칭했으나 내심 실제로는 그를 위협하여 인질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태조가 순욱을 보내 위기(衛覬)에게 물으니 위기(衛覬)가 대답했다,

“서방의 제장들은 모두 천한 신분에서 몸을 일으켰으므로 천하에 웅거할 뜻이 없으니 실로 눈 앞의 안락을 구할 뿐입니다. 지금 국가에서 이들을 후하게 대우해 작호(爵號)를 더해주어 그 뜻을 이루게 해 준다면 중대한 사고가 없는 한 변고를 우려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의당 그 후에 도모해야 합니다. 만약 군사를 일으켜 관중으로 들어가 장로를 토벌한다면 장로는 깊은 산에 있어 도로가 통하지 않을 것이고 저들이 필시 의심이 품을 것입니다. 한번 놀라서 동요하게 되면 땅이 험하고 무리들이 강성하니 그 위태로움은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순욱이 위기(衛覬)의 의견을 태조에게 보고했다. 태조는 처음에는 그 말을 옳게 여겼으나 종요가 스스로 자신의 임무를 관장해야 한다고 하여 마침내 종요의 의견에 따랐다. (종요의) 군사가 처음 진격하니 관우(關右-관서)에서 크게 반란을 일으켰고 태조가 친히 정벌한 뒤에야 겨우 이를 평정할 수 있었고 전사자도 만 명을 헤아릴 정도였다. 태조가 위기(衛覬)의 의견에 따르지 않은 것을 후회했고 이로 말미암아 위기를 더욱 중용했다.


위나라가 건립된 이후, 위기는 시중(侍中)으로 임명되었고, 왕찬(王粲)과 함께 예의제도(典制)를 관장했다.

문제가 왕위에 즉위한 후, 상서(尚書)로 전임되었다. 오래지 않아 한조로 돌아가 시랑(侍郎)이 되었으며, 한 헌제에게 문제에게 선양하도록 권하고, 선양할 조서의 초고를 만들었다. 문제가 제위에 오르자, 위기는 상서(尚書)가 되었으며 양길정후(陽吉亭侯)로 봉해졌다.

명제가 즉위하자 승진하여 문향후(閺鄉侯)로 봉해지고 식읍 3백 호를 받았다. 위기는 상주하여 말했다.

- 아홉 가지 법률이 고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와 형벌을 판단했는데, 그 내용이 미묘합니다. 백 리 사방의 관리들은 모두 법률을 알아야만 합니다. 형법이란 국가에 대해서는 매우 귀중한 것이지만, 사사로이 의론하는 자에 대해서는 매우 가볍고 천한 것입니다. 옥리는 백성들의 생명을 손에 쥐고 있지만, 옥리를 선발하여 사용하는 자들에게 천시를 받습니다. 국가 정치의 병폐가 반드시 이로부터 야기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법률박사를 두어 서로 법률을 가르치도록 하기를 청합니다.

명제는 그의 건의를 시행했다. 당시 백성들은 빈곤하였지만 노역은 끊임없이 증가했으므로 위기가 상소를 올렸다.

- 성정을 바꾸어 본성을 연마하는 것은 억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신하가 그러한 말을 하는 것은 쉽지 않고, 다른 사람의 군주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또한 어렵습니다. 게다가 사람이 좋아하는 것은 부귀영화이고, 싫어하는 것은 빈천하고 죽는 것이지만, 이 네 가지는 모두 군주로부터 결정됩니다. 군주가 그것을 좋아하면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고, 군주가 그것을 싫어하면 빈천하고 죽을 것입니다. 군주의 의향에 따르는 것은 애정이 생기는 까닭이고, 군주의 의향을 위배하는 것은 증오가 생기는 까닭인 것입니다. 때문에 사람의 신하들은 모두 주군의 뜻에 순종하려고 다투고 뜻을 거스르는 것을 피합니다. 집을 파괴하여 국가를 위하고, 몸을 죽여 군주를 성공으로 이끄는 자가 아니면, 누가 군주의 안색을 범하고 거리끼는 것에 저촉하면서까지 계책을 세우고 진언하겠습니까? 폐하께서는 이 점에 유의하여 살피시면 신하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 국사를 논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하기 좋아하여, 정치를 말하면 폐하를 요순(堯舜)에 비교하고, 정벌을 말하면 오와 촉 두 적을 너구리나 쥐에 비유하는데, 신의 생각은 이와 같지 않습니다. 옛날 한 문제(漢文) 때, 제후국의 세력은 강대하였으므로, 가의(賈誼)는 국가가 위험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길게 탄식했습니다. 하물며 국가 내부는 셋으로 나뉘었으며 선비들은 힘을 다하여 각각 자기들의 군주를 위하고 있습니다. 투항해 오는 사람은 사악함을 버리고 정의로 돌아왔다고 말할 수 없고, 모두 곤란함과 위급함에서 도망쳐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여섯 나라로 분할하여 통치했을 때와 다르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지금 천 리에는 밥하는 연기가 보이지 않고 유민들은 가난과 고통을 안고 있는데, 폐하께서 이런 일에 대해 충분히 유의하지 않는다면 쇠망하고 피폐하여 다시는 소생할 수 없습니다. 예법에는 천자가 사용하는 기물에는 반드시 금이나 옥의 꾸밈이 있어야 하고, 음식과 안주에는 반드시 여덟 가지 진미가 있어야 하며, 흉년이 되면 음식을 줄이고 복장을 소박하게 해야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하므로 사치와 절약의 조절은 반드시 세상의 풍요로움과 빈궁함에 의거해야만 됩니다. 무황제(武皇帝) 때, 후궁의 식사에는 고기반찬이 한 가지뿐이었고, 의복은 비단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자리는 수식을 하지 못했고, 기물에는 붉은 칠을 하지 않았는데, 이로써 천하를 평정하고 자손에게 복을 만들어 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 폐하께서 직접 보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임무는 군신(君臣)과 상하(上下)가 함께 주의하여 방책을 생각하고, 국고의 재산을 계산하고,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하는 것입니다. 구천(句踐)은 인구를 늘릴 방법을 깊이 생각하였어도 미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였는데, 지금 상방(尚方)의 금은 제품은 점점 더욱 증가하고, 공사와 부역은 끊이지 않으며, 사치스러운 기풍은 나날이 성행하고, 국고는 나날이 텅 비어 가고 있습니다. 옛날 한무제(漢武)는 신선의 도를 믿고 구하여 구름 끝 이슬과 옥가루를 함께 먹으면 장생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선장(仙掌 : 높이 세운 손 모양의 그릇)을 세워 구름 이슬을 얻으려 했습니다. 폐하께서는 박식하고 현명하셔서 항상 그를 조소했습니다. 한 무제는 이슬을 구하려다 오히려 비난을 당했고, 폐하께서는 이슬을 구하지 않으면서 헛되이 선장을 세웠습니다. 이러한 기호에는 이익이 될 것이 없는데 인력과 비용을 낭비하고 있으니, 진실로 성스러운 생각으로 마땅히 명확하게 제정해야만 합니다.

위기가 한(漢)과 위(魏)의 시대를 통하여 때때로 충언을 바친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조서를 받아 저작을 담당하고, 또 위관의(魏官儀)를 지었으며, 모두 수십 편을 짓고 엮었다.

그는 고문(古文 : 秦 이전의 글자체)ㆍ전서(篆)ㆍ예서(隸)ㆍ초서(草)를 좋아하였으며, 뛰어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건안(建安) 말기에는 상서우승(尚書右丞) 하남(河南)의 반욱(潘勖)[주1], 황초(黃初) 때에는 산기상시(散騎常侍) 하내(河內)의 왕상(王象)이 또한 위기와 함께 문장으로 빛났다.[주2] 위기가 죽자 시호를 경후(敬侯)라고 했다. 아들 위관(瓘)이 뒤를 이었다. 위관은 함희(咸熙) 연간에 진서장군(鎮西將軍)이 되었다.[주3]


[주1]  文章志曰:勖字元茂,初名芝,改名勖,後避諱。或曰勖獻帝時為尚書郎,遷右丞。詔以勖前在二千石曹,才敏兼通,明習舊事,敕并領本職,數加特賜。二十年,遷東海相。未發,留拜尚書左丞。其年病卒,時年五十餘。魏公九錫策命,勖所作也。勖子滿,平原太守,亦以學行稱。滿子尼,字正叔。 


문장지(文章志)에 이르길:반욱(潘勖)의 자는 원무(元茂)로 처음 이름은 지(芝)였고 이름을 욱(勖)으로 고쳤는데 이후에 피휘한 것이다. 혹자는 말하길 반욱은 한 헌제시기에 상서랑이 되었다가 우승으로 승진하였다고 한다. 조서에 반욱은 이전에 2000석의 관리를 지냈는데 재주와 민첩함을 겸하여 통하고 옛 전장典章에 밝으므로 칙령을 내려 더불어 본직을 겸하도록 하고 수차례 특별한 하사품을 내렸다. (건안) 20년 동해상東海相으로 옮겼다. 출발하지 않았는데 남겨서 상서좌승에 임명하였다. 그 해에 죽었는데 당시에 나이가 50여세였다. 위공(魏公:곧 조조)이 구석을 받은 책명은 반욱이 지은 것이다. 반욱의 아들은 반만(潘滿)이었는데 평원태수를 지냈고 역시 학행으로 칭해졌다. 반만의 아들은 반니(潘尼)인데 자가 정숙(正叔)이다.


尼別傳曰:尼少有清才,文辭溫雅。初應州辟,後以父老歸供養。居家十餘年,父終,晚乃出仕。尼嘗贈陸機詩,機答之,其四句曰:「猗歟潘生,世篤其藻,仰儀前文,丕隆祖考。」位終太常。尼從父岳,字安仁。


니별전에 이르길 : 반니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었고 문사가 온화하고 고아하였다. 당초에 주의 징벽에 응하였고 후에 아버지가 늙었다는 이유로 돌아가 공양하였다. 집에 있은지 10여년 아버지가 죽은 이후에 늦게 마침내 나와서 관직을 맡았다. 반니가 일찍이 육기에게 시를 줬는데 육기가 답하였는데 그 4구에 이르길:「훌륭하구나 반생이여 세상에서는 그 문장을 두터이 여기네. 이전의 문장을 우러러 헤아려 보니 조고(祖考:죽은 할아버지)를 드높였구나.」라 하였다. 직위는 태상까지 이르렀다. 반니의 종부는 반악(潘岳)인데 자가 안인(安仁)이다.


岳別傳曰:岳美姿容,夙以才穎發名。其所著述,清綺絕倫。為黃門侍郎,為孫秀所殺。 


악별전에 이르길 : 반악은 용모가 아름답고 어려서부터 훌륭한 재주로 명성이 있었다. 그의 저술은 청아하고 화려하여 비할 바가 없었다. 황문시랑이 되었다가 손수에게 살해당했다.    


尼、岳文翰,並見重於世。尼從子滔,字湯仲。 


반니와 반악은 문장을 짓는 능력으로 더불어 세상에서 귀중하게 여겨졌다. 반니의 종자인 반도(潘滔)는 자가 탕중(湯仲)이다.    


晉諸公贊:滔以博學才量為名。永嘉末,為河南尹,遇害。 


진제공찬에 이르길 : 반도는 박학다식으로 명성이 있었다. 영가 연간 말에 하남윤이 되었다가 해를 당했다.



[주2]  王象事別見楊俊傳。    


왕상의 사적은 별도로 양준전에 보인다.


[주3]   晉陽秋曰:瓘字伯玉。清貞有名理,少為傅嘏所知。弱冠為尚書郎,遂歷位內外,為晉尚書令、司空、太保。惠帝初輔政,為楚王瑋所害。世語曰:瓘與扶風內史燉煌索靖,並善草書。瓘子恆,字巨山,黃門侍郎。恆子玠,字叔寶,有盛名,為太子洗馬,早卒。    


진양추에 이르길 :위관(衛瓘)은 자가 백옥(伯玉)이다. 청정하고 올곧으며 말하는데 도리가 있어 어려서부터 부하(傅嘏)가 알아보았다. 약관에 상서랑이 되었다가 마침내 내외의 관직을 역임하다 진나라의 상서령, 사공, 태보를 지냈다. 진 혜제 초기에 정치를 보좌하다 초왕 사마위에게 살해당했다.    


세어에 이르길 : 위관과 부풍내사 돈황출신의 색정(索靖)은 더불어 초서草書를 잘 썼다. 위관의 아들은 위항(衛恆)이고 자가 거산(巨山)인데 황문시랑을 지냈다. 위항의 아들은 위개(衛玠)이고 자가 숙보(叔寶)인데 성대한 명성이 있었고 태자세마가 되었다가 일찍 죽었다.

분류 :
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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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4
10:55:51 (*.148.47.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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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14
18:30:58
(*.52.89.87)
한문 주석추가했습니다. 저 위관이라는 사람 진서에 열전도 따로 있고 유명한 녀석이죠.

코렐솔라

2013.08.12
13:29:13
(*.104.28.55)
미백랑님의 제보에 따라 추가했습니다. 원 번역은 고원님

코렐솔라

2017.03.17
17:15:59
(*.46.174.164)
맨 위 위서의 주석을 빼고는 dragonrz님의 번역으로 이것으로 위기전 모든 주석의 번역이 끝났습니다. 감사합니다. http://rexhistoria.net/159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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