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소(劉劭)는 자가 공재(孔才)이고 광평군(廣平郡) 한단현(邯鄲縣) 사람이다. 건안(建安) 연간 계리(計吏)가 되어 허창(許)으로 왔다. 태사(太史)가 글을 올려 말했다.

- 정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을 것입니다.

유소는 당시 상서령(尚書令) 순욱(荀彧)의 관부에 있었다. 앉아 있는 사람의 수가 몇 십 명이었는데, 어떤 이는 새해에 지내는 조묘(朝)의 제사를 폐지해야 한다고 하고, 어떤 이는 조회를 뒤로 물려야 된다고 했다. 유소가 말했다.

“재신(梓慎)과 비조(裨灶)는 고대(춘추시대)의 뛰어난 사관인데, 수해와 화재의 점(占水火)에서는 천시(天時)를 잘못 이해하여 잃었습니다. 예기(禮記) 증자문(曾子門)에는 제후(諸侯)가 천자(天子)를 아침에 알현할 때, 문 앞까지 와서 예의를 끝마치지 못하는 경우는 네 가지인데, 일식이 그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성인이 제도를 정할 때, 변이 때문에 먼저 조례를 폐지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어떤 때는 재난과 변괴가 점점 사라져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미리 알아보는 기술에 잘못이 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순욱(彧)은 그의 말에 매우 찬성하였다. 명령을 내려 조회를 옛날처럼 하도록 하자, 일식 또한 일어나지 않았다. 


晉永和中,廷尉王彪之與揚州刺史殷浩書曰:「太史上元日合朔,談者或有疑,應卻會與不?昔建元元年,亦元日合朔,庾車騎寫劉孔才所論以示八座。于時朝議有謂 孔才所論為不得禮議,荀令從之,是勝人之一失也。何者?禮云,諸侯旅見天子,入門不得終禮而廢者四:太廟火,日蝕,后之喪,雨霑服失容。尋此四事之指,自 謂諸侯雖已入門而卒暴有之,則不得終禮。非為先存其事,而徼倖史官推術錯謬,故不豫廢朝禮也。夫三辰有災,莫大日蝕,史官告譴,而無懼容,不脩豫防之禮, 而廢消救之術,方大饗華夷,君臣相慶,豈是將處天災罪己之謂?且檢之事實,合朔之儀,至尊靜躬殿堂,不聽政事,冕服御坐門闥之制,與元會禮異。自不得兼 行,則當權其事宜。合朔之禮,不輕於元會。元會有可卻之準,合朔無可廢之義。謂應依建元故事,卻元會。」浩從之,竟卻會。


어사대부(御史大夫) 치려(郗慮)가 유소를 초빙하려는데, 마침 치려는 면직되었다. 유소는 태자사인(太子舍人)에 임명되고, 비서랑(祕書郎)으로 승진했다.


황초(黃初) 연간, 상서랑(尚書郎)ㆍ산기시랑(散騎侍郎)이 되었다.

조서를 받아 오경(五經)에 관한 여러 가지 서적들을 모아서 분류하여 황람(皇覽)을 만들었다.

명제(明帝)가 즉위하자 지방으로 나가 진류태수(陳留太守)가 되어 교화를 존중하였으므로 백성들은 그를 칭찬했다. 불러서 기도위(騎都尉)로 임명하고, 의랑(議郎) 유애(庾嶷)ㆍ순선(荀詵) 등과 법령을 제정하여 신률(新律) 18편을 만들고, 율략론(律略論)을 지었다.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승진했다. 이때 공손연(公孫淵)이 손권(孫權)으로부터 연왕(燕王)의 호를 받았다는 것을 듣고, 논의하는 사람들은 공손연의 계리(計吏)를 억류하고 병사를 파견하여 그를 토벌하자고 주장했다. 유소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 원상(袁尚) 형제는 공손연의 부친인 공손강(公孫康)에게 의지하였는데, 공손강은 그들의 머리를 베어 보냈습니다. 이것은 공손연의 선대(先世)가 충절을 지킨 것입니다. 또 전해들은 일의 허와 실이 분명한지 알 수 없습니다. 고대에는 먼 곳에서 복종하지 않으면 안으로 덕을 닦고 그들을 정벌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는 것을 중요시한 것입니다. 공손연에게 관대하게 대하여서 그 스스로 새로 바꿀 기회가 있도록 해야만 합니다.”

후에 공손연은 과연 손권의 사자 장미(張彌) 등의 머리를 베어 보냈다. 유소는 일찍이 조도부(趙都賦)를 지었는데, 명제(明帝)는 그것을 매우 좋아하였으며, 유소에게 조서를 내려 허도부(許都賦)ㆍ낙도부(洛都賦)를 짓도록 하였다. 당시 나라 밖에서는 전쟁이 계속 일어났는데, 안에서는 궁전을 짓고 있었다. 유소는 두 편의 부를 지었는데, 모두 풍자와 간언의 뜻이 내재되어 있었다.

청룡(青龍) 연간, 오(吳)나라가 합비(合肥)를 포위하였다. 당시에는 동쪽에 있던 관리와 병사들이 모두 교대하여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정동장군(征東將軍) 만총(滿寵)은 표를 올려 중앙군(中軍兵)의 병사를 요청하고, 아울러 휴가중인 장수와 병사들을 부르고, 집결을 기다렸다가 오를 공격하기를 원했다. 유소의 의론은 이러했다.

“적은 방금 합비에 도착했으므로 싸우려는 마음이 한결같을 것이고, 기세는 날카로울 것입니다. 만총은 적은 수의 병사로 그 영지에서 싸우게 되었습니다. 만일 즉시 나아가 공격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적을 제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즉시 나아가 공격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적을 제어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총은 구원병을 청했는데, 손실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먼저 보병 5천 명과 정예기병 3천 명을 파견하여 군대가 선봉에서 출발할 때 대군이 길을 가는 소리를 내면, 강력한 형세를 과시할 수 있습니다. 기병이 합비에 도착한 후, 대열 배열을 흩어지게 하고, 그 깃발과 북을 많이 설치하여 적에게 성 아래에 병력을 과시하도록 합니다. 적을 유인하여 끌어낸 후, 그 돌아가는 길을 막고 양도(糧道)를 끊어야 합니다. 적은 대군이 왔고, 기병이 그 배후를 끊었다는 것을 들으면, 반드시 두려워하여 급히 달아날 것이니, 싸우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적을 격파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황제는 그의 건의를 따랐다. 군대가 합비성(合肥)에 도착하자 적은 과연 물러나 돌아갔다.

당시 황제는 조서를 내려 현명한 사람을 널리 구하였다. 산기시랑(散騎侍郎) 하후혜(夏侯惠)는 유소를 천거하며 말했다.

- 저는 상시(常侍) 유소를 관찰했는데, 충성심이 깊고 사고가 돈독하며, 여러 방면에서 재능을 몸에 갖추고 있고, 복잡한 그의 능력은 넓고 깊은 원류를 갖고 있습니다. 때문에 크고 작은 재능을 갖고 있는 신하들은 모두 자신과 서로 같은 능력을 갖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실한 선비들은 그의 온화하고 단정한 품행에 감복하고, 청정한 사람들은 그의 심원하고 겸허함을 흠모하며, 문학하는 선비들은 그의 추리가 상세하고 정밀함을 칭찬하고, 법률에 익숙한 선비들은 조문에 대한 그의 정확한 판단을 알고 있으며, 사색하는 선비들은 그의 깊고 확고한 사고를 알고 있고, 문장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의 저서ㆍ논문ㆍ운필을 좋아하며, 제도를 제정하는 선비들은 그의 역사적 변천의 개략과 근본에 밝음을 찬미하고, 계책을 세워 도모하는 사람들은 생각의 민첩함과 미묘함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무릇 이러한 평론은 모두 자기의 장점을 취해 그의 지류를 열거한 것입니다. 신은 누차에 걸쳐 그의 청담을 들었고, 그의 깊은 논의를 보았으며, 오랜 해감화를 받았고, 마음속으로 그를 존경하였으며, 사실 조정을 위해 그의 기량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인물이라면 기밀이 되는 일을 보좌하고 측근에 두어 의견을 말하도록 하여 받아들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도와 함께 융성해야 하며, 세속에 항상 있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직 폐하께서 한가할 때 아랫사람들의 의견을 듣는 은혜를 베풀고, 유소로 하여금 폐하가 한가하고 기쁠 때 앞에서 자신의 의견을 서술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폐하의 덕음(德音)은 전해질 것이고, 폐하의 광휘는 나날이 새로울 것입니다.


臣松之以為凡相稱薦,率多溢美之辭,能不違中者或寡矣。惠之稱劭云「玄虛退讓」及「明思通微」,近於過也。

경초(景初) 연간, 조서를 받아 도관고과(都官考課)를 지었다. 유소가 상소를 올렸다.

- 백관에 대한 근무 평가는 국가정치의 근본이지만, 역대로 실행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정치의 법전은 완전하지 못하지만 보충하지 않았고, 능력있는 자와 무능한 자는 뒤섞여 있어 구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폐하는 성인의 위대한 지략으로 국가 기강의 느슨함을 가슴 아파하고, 내심 걱정하다가 밖으로 조서를 발표하였습니다. 신은 폐하의 넓은 은혜를 입었고, 조서를 받아 우매함을 깨우치고, 도관고과(百官考課) 72조를 지었으며, 또 설략(說略) 한 편을 지었습니다. 신은 학문이 적고 식견이 얕으므로, 실재로 폐하의 뜻을 널리 선양하여 법전을 지어 제도를 정하는 일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또 응당 예악제도를 제정하여 풍속을 바꾸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악론(著樂) 14편을 지어 완성을 하였으나 위로 바치지는 않았다. 마침 명제가 붕어하였으므로 시행하지 못했다.

정시(正始) 연간, 경학을 손에 들고 강의하였으며, 관내후(關內侯)의 작위를 받았다. 그가 평생 편찬한 저술은 법론(法論)ㆍ인물지(人物志) 류 등 백여 편이 있다. 그가 죽은 후, 광록훈(光祿勳)으로 추증됐으며, 아들 유림(琳)이 후사를 이었다.

유소와 같은 시대에 산 동해(東海) 사람 무습(繆襲) 또한 재능과 학식이 있었으며, 많은 문장을 썼다. 관직은 상서 광록훈(尚書光祿勳)까지 이르렀다.


선현행장(先賢行狀): 무비(繆斐)는 자가 문아(文雅)이다. 경전에밝았다 부모를 섬김에 있어서 온화하고 즐거운 안색으로 봉양하였으며(事親色養), 불려나가 박사(博士)가 되어 공부(公府)에서 일했다. 한나라 황제가 장안(長安)에 머무를때 여러 공경들이 유명한 유학자들을 천거할 때였는데, 이때 천거되어 시중(侍中)되었는데. 無所就。즉 무습의 아버지다.


문장지(文章志): 무습의 자는 희백(熈伯).이다. 어다대부부(御史大夫府)가 되었으며, 위나라 4 황제를 모셨다. 정시6년에 60세로 죽었다. 무습의 아들 무열(繆恱)의 자는 공택(孔懌)인데, 진나라 광록대부(光禄大夫)가 되었다. 무습의 손자인 무소(繆紹), 무파(繆播), 무징(繆徵), 무윤(繆胤)등은 명성이 있었다.


무습의 친구 산양(山陽) 사람 중장통(仲長統)은 동한 말기에 상서랑(尚書郎)으로 임명되었으나 요절했다. 창언(昌言)을 지었는데, 언사가 아름다워 볼만하다.

산기상시(散騎常侍) 진류(陳留) 사람 소림(蘇林)[주1]과 광록대부(光祿大夫) 경조(京兆) 사람 위탄(韋誕)[주2], 악안태수(樂安太守) 초국(譙國) 사람 하후혜(夏侯惠)[주3], 진군태수(陳郡太守) 임성(任城) 사람 손해(孫該)[주4], 낭중령(郎中令) 하동(河東) 사람 두지(杜摯)[주5] 등도 문장과 부를 써서 자못 세상에 전해졌다.


[주1]위략(魏略)에 이르길:소림(蘇林)의 자는 효우(孝友)로,博學,多通古今字指,凡諸書傳文閒危疑,林皆釋之。建安中,為五官將文學,甚見禮待。黃初中,為博士給事中。文帝作典論所稱蘇林者是也。以老歸第,國家每遣人就問之,數加賜遺。年八十餘卒。

[주2]文章敘錄에 이르길:위탄(韋誕)의 자는 중장(仲將)으로, 太僕端之子。有文才,善屬辭章。建安中,為郡上計吏,特拜郎中,稍遷侍中中書監,以光祿大夫遜位,年七十五卒於家。初,邯鄲淳、衛覬 及誕並善書,有名。覬孫恆撰四體書勢,其序古文曰:「自秦用篆書,焚燒先典,而古文絕矣。漢武帝時,魯恭王壞孔子宅,得尚書、春秋、論語、孝經,時人已不 復知有古文,謂之科斗書,漢世祕藏,希得見之。魏初傳古文者,出於邯鄲淳。敬侯寫淳尚書,後以示淳,而淳不別。至正始中,立三字石經,轉失淳法。因科斗之 名,遂效其法。太康元年,汲縣民盜發魏襄王冢,得策書十餘萬言。案敬侯所書,猶有髣彿。」敬侯謂覬也。其序篆書曰:「秦時李斯號為工篆,諸山及銅人銘皆斯 書也。漢建初中,扶風曹喜少異於斯而亦稱善。邯鄲淳師焉,略究其妙。韋誕師淳而不及也。太和中,誕為武都太守,以能書留補侍中,魏氏寶器銘題皆誕書云。漢 末又有蔡邕采斯、喜之法,為古今雜形,然精密簡理不如淳也。」其序錄隸書,已略見武紀。又曰:「師宜官為大字,邯鄲淳為小字。梁鵠謂淳得次仲法,然鵠之用 筆盡其勢矣。」其序草書曰:「漢興而有草書,不知作者姓名。至章帝時,齊相杜度號善作篇,後有崔瑗、崔寔亦皆稱工。杜氏結字甚安而書體微瘦,崔氏甚得筆勢 而結字小疏。弘農張伯英者因而而轉精其巧。凡家之衣帛,必書而後練之,臨池學書,池水盡黑。下筆必為楷則,號『匆匆不暇草』,寸紙不見遺,至今世人尤寶 之,韋仲將謂之草聖。伯英弟文舒者,次伯英。又有姜孟潁、梁孔達、田彥和及韋仲將之徒,皆伯英弟子,有名於世,然殊不及文舒也。」//유명한 서예가입니다.


[주3] 하후혜는 하후연의 아들이다. 하후연전에 나온다.


[주4]文章叙録에 이르길: 손해(孫該)는 자가 공달(公達)인데, 뜻이 강하고 공부좋아하고, 나이 20일때 상계연(上計掾)이 되었고, 궁궐에 불려가 랑중(郎中)이 되었다. 위서(魏書)를 저술했다. 박사사도우장사(博士司徒右長史)가 되었고, 나중에 또다시 책을 저술작업에 들어갔다. 경원(景元) 2년 261년에 관직에 있다가 죽었다.


[주5]文章敘錄에 이르길:두지(杜摯)의 자는 덕로(德魯)이다. 初上笳賦,署司徒軍謀吏。後舉孝廉,除郎中,轉補校書。摯與毌丘儉鄉里相親,故為詩與儉,求仙人藥一丸,欲以感切儉求助也。其詩曰: 「騏驥馬不試,婆娑槽櫪間。壯士志未伸,坎軻多辛酸。伊摯為媵臣,呂望身操竿;夷吾困商販,甯戚對牛歎;食其處監門,淮陰飢不餐;買臣老負薪,妻畔呼不 還,釋之宦十年,位不增故官。才非八子倫,而與齊其患。無知不在此,袁盎未有言。被此篤病久,榮衛動不安,聞有韓眾藥,信來給一丸。」儉答曰:「鳳鳥翔京 邑,哀鳴有所思。才為聖世出,德音何不怡!八子未遭遇,今者遭明時。胡康出壟畝,楊偉無根基,飛騰沖雲天,奮迅協光熙。駿驥骨法異,伯樂觀知之,但當養羽 翮,鴻舉必有期。體無纖微疾,安用問良醫?聯翩輕栖集,還為燕雀嗤。韓眾藥雖良,或更不能治。悠悠千里情,薄言答嘉詩。信心感諸中,中實不在辭。」摯竟不 得遷,卒於祕書。廬江何氏家傳曰:明帝時,有譙人胡康,年十五,以異才見送,又陳損益,求試劇縣。詔特引見。眾論翕然,號為神童。詔付祕書,使博覽典籍。 帝以問祕書丞何禎:「康才何如?」禎答曰:「康雖有才,性質不端,必有負敗。」後果以過見譴。臣松之案:魏朝自微而顯者,不聞胡康;疑是孟康。康事見杜恕 傳。楊偉見曹爽傳。

분류 :
위서
조회 수 :
4062
등록일 :
2013.05.04
10:56:27 (*.148.47.205)
엮인글 :
http://rexhistoria.net/history_sam/2541/489/trackback
게시글 주소 :
http://rexhistoria.net/2541

코렐솔라

2013.07.14
19:21:23
(*.52.89.87)
주석 추가. 위서를 쓴 사람은 간단하게 언급하고 넘어가는군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촉서 촉서 목차 링크 재원 2013-07-08 153505
공지 위서 위서 목차 링크 [1] 재원 2013-06-29 158317
공지 오서 오서 목차 링크 [3] 재원 2013-06-28 113504
270 위서 진태전 [3] 재원 2013-05-04 6128
269 위서 진군전 [2] 견초 2013-05-04 5706
268 위서 환계전 [3] 견초 2013-05-04 3882
267 위서 부하전 [1] 견초 2013-05-04 4350
» 위서 유소전 [1] 견초 2013-05-04 4062
265 위서 유이전 [1] 견초 2013-05-04 3759
264 위서 위기전 [3] 견초 2013-05-04 4151
263 위서 왕찬전 [9] 견초 2013-05-04 4953
262 위서 무문세왕공전(조조, 조비 아들들, 조충전 등) [6] 견초 2013-05-04 7789
261 위서 소회왕웅전(조웅전) [1] 견초 2013-05-04 3520
260 위서 진사왕식전(조식전) [3] 견초 2013-05-04 7099
259 위서 임성위왕창전(조창전) [10] 견초 2013-05-04 5629
258 위서 염온전 [1] 견초 2013-05-04 4048
257 위서 방육전 [3] 견초 2013-05-04 3780
256 위서 방덕전 [1] 견초 2013-05-04 7380
255 위서 전위전 [2] 견초 2013-05-04 7176
254 위서 허저전 [1] 견초 2013-05-04 6075
253 위서 여건전 [1] 견초 2013-05-04 4095
252 위서 문빙전 [1] 견초 2013-05-04 5915
251 위서 장패전 [1] 견초 2013-05-04 60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