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하(傅嘏)는 자가 난석(蘭石)이고, 북지군(北地郡) 이양현(泥陽縣) 사람이며, 부개자(傅介子)의 후손이다. 백부 부손(巽)은 황초(黃初) 연간에 시중상서(侍中尚書)를 지냈다. 

부자(傅子)에 이르길: 조부는 부예(傅睿)이고, 대군태수(代郡太守)가 되었고, 아버지는 부충(傅充)인데 황문시랑(黃門侍郎)이 되었다.

부하는 약관의 나이일 때 이름을 알렸으며, 사공(司空) 진군(陳群)에게 불려가 연(掾)이 되었다.

부자(傅子)에서 이르길: 이때 하안(何晏)以材辯顯於貴戚之間,등양(鄧颺)好變通,合徒黨,鬻聲名於閭閻,而하후현(夏侯玄)以貴臣子少有重名,為之宗主,교제하고자 하였으나 부하가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부하의 친구 순찬(荀粲)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물었더니 부하에게 묻길

"하후태초(夏侯泰初;하후현)는 지금 시대의 뛰어난 호걸로서, 허심탄회하게 교제를 원하고 있는데, 둘 사이의 교제가 이루어 진다면 더 좋을 것이 없겠지만 만일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곧 원한이 생길 것이오. 현명한 두 사람이 친해지지 않는다면 국가에도 이롭지 않지만 친해진다면 저 인상여(藺相如)가 염파(廉頗)에게 머릴 숙인 것처럼 미담이 될 것이오."

부하가 답하길

"태초(泰初)의 뜻은 그가 헤아리는 것이 크지만 능력은 헛된 소리에 합치되어서 실재적인 재주가 없소, 하평숙(何平叔;하안)은 원대한 것을 말하고 있지만 정실을 가까이하며, 변론을 좋아하지만 진실성이 없어서 이른바 '이로운 말을 잘하지만 나라를 뒤엎을 사람'이오. 등현무(鄧玄茂;등양)는 하는 것은 있지만 끝맺음이 없으며, 밖으로는 명리를 욕하면서 안으로는 단속하지 못하여 자기와 같은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미워하며, 말을 많이 하면 틈이 많이 생기고,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투기하면 친한 사람이 없게 되는 것이오. 내 입장에서 이 세 사람을 보니, 모두가 장차 자기 집안을 패망시킬 사람들이오. 이들을 멀리 하여도 오히려 화가 미칠까 두려운데, 하물며 이들을 가까이 하겠소?"


그 당시 산기상시(散騎常侍)였던 유소가 관리들에 대한 근무 평가 제도를 만들었는데, 이 일을 삼공(三府)의 관소에게 토론하게 되었다. 부하는 유소의 주장을 비난하며 논술하였다.

“황가의 제도는 방대하고 깊으며, 성인이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오묘하고 심원하다고 들었는데, 만일 재능 있는 사람을 얻지 못한다면 성인이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실행될 수 없을 것이고, 신비함을 체득하여 그것을 밝히는 것은 그 인물에게 달려 있습니다. 왕의 제도가 훼손된 이후로 성인의 도는 기록되지 않았으며, 정미한 말은 이미 손실되었습니다. 여섯 경전은 더럽혀지고 하자가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성인의 도는 방대하고 깊지만, 직책을 맡은 사람들이 분명하게 깨우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유소의 관리에 대한 근무평가 논의는 비록 이전 시대의 임용과 파면에 관한 문장에서 근거를 구하려고 했지만, 그 제도는 정말로 결여되고 산실되었습니다. 예(禮) 중 현존하는 것은 오직 주대(周)의 전례(典禮)가 있는 것뿐입니다. 밖으로는 후(侯)와 백(伯)을 세워 구복(九服)에 대하여 보호하고, 안으로는 여러 관직을 세워 여섯 개의 직책을 담당하도록 했으며, 토지에는 천자에게 바치는 일정한 세금이 있고, 관직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으며, 모든 관리는 모두 임무를 맡고 있고, 사농공상의 백성들은 맡은 일이 다릅니다. 때문에 근무 성적을 평가하는 것이 이치가 있고, 관리를 선발하고 파면하는 제도는 쉽게 실행되었습니다. 위대한 위(魏)는 백왕(百王)의 뒤를 이었고, 진(秦)과 한(漢)의 공적을 계승했지만, 제도로는 정돈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건안(建安) 이래로부터 청룡(青龍) 연간에 이르기까지 신은 같은 무력을 갖고 동란을 다스리고 제위의 기초를 공고히 했는데, 흉악하고 반역하는 자를 한 번에 쓸어내고, 남아 있는 적을 소멸시키며, 전쟁 깃발을 거두었다가 폈다가 하였으므로 매일 정무를 처리할 틈을 얻지 못했습니다. 나라와 군대를 다스릴 때, 권력과 법률을 함께 사용하고, 관리는 군사와 국정 두 방면을 통하여 임명되며, 때에 맞게 적절히 처리하여 정치의 변화에 대응합니다. 

과거의 제도를 오늘 시행해도 사태는 복잡하고 내용도 다르므로 적용이 곤란합니다. 그러한 원인은 적합한 법령을 만들면 오래 시행할 수 있지만, 간혹 현실의 수요에 맞지 않을 수 있고 제정한 법령이 당시의 수요에는 부합되지만, 후세에 전해질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관직을 세워 직무를 담당하도록 하고, 백성을 바르게 다스리는 것은 국가를 세우기 위한 근본이며, 법령에 따라 실제를 고찰하고 이미 제정된 법규를 감찰하여 면려하는 것은 끝을 다스리기 위한 것입니다. 

현재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은 아직 세워지지 않았고, 법령의 세칙 또한 확정되지 않았으며, 국가의 정도(政道) 존중되지 않으면서 근무평가를 하는 제도가 선행되는 것은 현명한 자와 어리석은 자의 구분을 정하는 것과 유형과 무형의 도리를 구분할 수 없을까 걱정됩니다. 이전에 선왕이 재능 있는 사람을 선택할 때는 반드시 주 안에서 품행이 단정한 것을 기초로 하여, 학교에서 도의를 가르치고 덕행이 갖추어져 있으면 현자(賢者)라고 불렀고, 도덕을 닦은 자는 능자(能者)라고 불렀습니다. 향로(鄕老)는 왕에게 현자와 능자를 기록하여 바치고, 왕은 그것을 경의를 갖고 수리하여 그 현자를 기용할 경우는 지방으로 나가 장관(長)이 되게 하고, 그 능자를 선택할 경우에는 조정으로 들어오게 하여 해정을 담당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선왕이 인재를 거두는 방법입니다. 

지금 국가의 백성들은 경성으로 나아가는데, 여섯 향(鄉)에서 추천한 적이 없고, 그 인재를 선발하는 직무는 이부(吏部)에 전임되었습니다. 품행을 살펴 선발한다면 실제 재능은 반드시 적합하지 않을 것이고, 다소의 공로를 갖고 평가한다면 덕행은 문제되지 않습니다. 이와 같으면 가장 좋은 것과 가장 낮은 제도를 갖고 평가를 해도 인재를 충분히 사용할 수 없습니다. 조정의 제도를 통합적으로 서술하고, 국가의 전범에 전체적으로 조력하는 것은 내용이 심오하고 뜻이 넓은 것이므로 모두 얻기는 어렵습니다.“

정시(正始) 초년, 상서랑(尚書郎)에 임명되었고, 황문시랑(黃門侍郎)으로 옮겼다. 그 당시 조상(曹爽)이 정치의 실권을 쥐고 있었으므로 하안(何晏)이 정치의 실권을 쥐고 있었으므로 하안은 이부상서(吏部尚書)가 되었다. 부하는 조상의 동생 조희(曹羲)에게 일러 말했다.

“하평숙(何平叔)은 겉모양은 조용하지만 속마음은 간사하고 이익을 좋아하여 근본적인 일에 힘쓸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나는 그가 먼저 당신의 형제를 미혹시키게 될 것이 두렵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진 사람은 조정에서 멀어질 것이고, 조정의 정치는 파괴될 것입니다.”

하안 등은 마침내 이 때문에 부하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게 되었는데, 사소한 일을 계기로 하여 부하의 관직을 파면시켰다. 집안에 있으면서 형양태수(滎陽太守)로 임명되었으나 가지 않았다. 태부(太傅) 사마선왕(司馬宣王)은 그에게 종사중랑(從事中郎)이 될 것을 청했다. 조상(曹爽)이 주살된 후, 하남윤(河南尹)으로 임명되었고, 상서(尚書)로 승진했다. 

부자: 하남윤(河南尹)은 안쪽으로는 제도(帝都: 낙양)를 포함하고, 밖으로는 경기(京畿)를 통치하며, 고대의 육순육향(주대의 근교·외교의 지역의 행정 단위로 각각 6개 있다)의 통치자를 겸한다.

그곳에는 여러 가지 지방의 출신자가 잡거하고, 호족(豪門), 귀족(大族), 상인들(商賈), 북방민족(胡貊)들이 많다. 사방에서 이익을 쫒는 사람들이 몰려들며, 범죄도 많다. 예전에 하남윤이었던 사마지(司馬芝)가 그곳 기강을 태간(太簡)하게 하였고, 그 다음 하남윤이었던 유정(劉靜)도 만만치 않았는데, 후임이었던 이승(李勝)은 느슨하게 해서, 원망의 소리를 들었는데, 부하는 선임자인 사마지나 유정등의 정치 수법으로부터 배워, 嘏立司馬氏之綱統,裁劉氏之綱目以經緯之,李氏所毀以漸補之。郡有七百吏,半非舊也。河南俗黨五官掾功曹典選職,皆授其本國人,無用異邦人者,嘏各舉其良而對用之,官曹分職,而後以次考核之。其治以德教為本,然持法有恒,簡而不可犯,見理識情,獄訟不加檟楚而得其實。不為小惠,有所薦達及大有益於民事,皆隱其端迹,若不由己出。故當時無赫赫之名,吏民乆而後安之。。遷尚書。

부하는 항상 이렇게 생각했다.

“진(秦)이 처음으로 제후를 폐지하고 군수를 설치하였고, 관위를 설치하여 직책을 분배했으며, 고대 제도와 다르다. 한과 위(漢魏)는 진의 관제를 따랐으며 줄곧 지금까지 왔다. 그러나 유생(儒生)과 학사(學士)는 모두 삼대(三代)의 예제로써 현재 제도를 개혁하려고 했지만, 그 예제가 넓고 심원하여 그 시대 정치와 합쳐지지 않았으며, 일과 제도가 위배되었고 명칭과 실질이 부합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 시대를 지났지만 천하를 다스리는 국면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므로 대대적으로 관제를 개정하고, 고대에 의거하여 근본을 바르게 하려고 하는데, 지금은 황실이 매우 어려운 시기이므로 변혁할 수 없다.”

당시 논의하는 자들은 스스로 오(吳)를 토벌하려는 의견을 저술했는데, 세 명의 정토장군(征獻)장군이 바친 계책은 각기 달랐다. 황상은 조서를 내려 부하의 의견을 물었고, 이에 대답했다.

“옛날 부차(夫差)는 제(齊)나라를 누르고 진(晉)나라를 이겨서 위세를 중원에 떨쳤지만 고소대(姑蘇臺)에서 최후를 만났고, 제(齊)의 민왕(閔王)은 영토를 병합하고 변방을 개척하여 국토가 천 리나 확대되었지만 몸은 국가의 전복을 밟았습니다. 시작이 좋다고 끝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고대에 증명되었습니다. 

손권(孫權)은 친히 관우(關羽)를 격파하고 형주(荊州)를 병합한 후에 야심에 차고 욕망이 가득해져 흉악함이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이 때문에 선문후(宣文侯)는 원대한 계책을 제시했습니다. 현재 손권은 죽었고, 어린 아들은 제갈각(諸葛恪)에게 의탁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손권의 가혹함을 바로잡고 잔혹한 정치를 없애서, 백성들은 혹독한 학대를 받지 않고 은혜로 막 안정되며, 조정의 안과 밖에서 함께 국사를 걱정하며 같은 배를 타고 가는 사람으로 여긴다면, 비록 끝까지 안정을 지킬 수는 없을지라도 손권은 장강(長江) 밖(형주)에서 멸망의 시기를 연장하여 생명을 길게 할 수 있었겠지요. 

의론하는 사람들은 간혹 배를 띄워 장강을 건너 형주를 소탕하려고 하고, 간혹 사방의 길로부터 동시에 진격하여 그 성이나 보루를 공격하기를 원하며, 간혹 변방지역에서 대규모의 둔전을 행하여 기회를 타서 행동을 일으키기를 원합니다. 이런 것들은 확실히 모두 적을 공격하여 취하는 일상적인 계책입니다. 정병이 출발하였을 때부터 물러날 때까지는 3년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적을 침략한 지 60년이 되었지만, 군주와 신하를 거짓으로 칭하고, 길흉은 함께 재난을 맞이하며, 또 그 총대장(손권)을 잃어서 상하가 국가의 위기를 근심하고 있습니다. 설령 중요한 나루터에서 배를 나란히 하고 성을 공고히 하고 험한 곳을 점거할지라도, 장강을 가로지르는 계책은 아마 승리를 얻기 어려울 것입니다. 단지 군사를 나아가게 하여 커다란 밭을 만들도록 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입니다. 병사들이 백성들을 향해 나와서 침입하여 약탈하지 않는다면, 앉아서 쌓아놓은 곡물을 먹고 운송하는 병사를 번거롭게 하지 않아도 되며, 적군을 습격하여 원정하는 노고와 비용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군대에서 당면한 급한 일입니다. 

옛날 번쾌(樊噲)는 10만 병사로 흉노(匈奴) 땅에서 돌아다니기를 원했는데, 계표(季布)에게 당면하여 그러한 단점을 지적당했습니다. 지금 장강을 넘어 적의 영토를 밟으려는 책략 또한 번쾌와 똑같은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법령을 밝히고 병사를 훈련시키고 완전한 승리를 얻을 것 같은 상황 하에서 계책을 펴고 뛰어난 계책을 펼쳐서 적의 패잔병을 제어하는 것만 못합니다. 이것은 승리를 얻는 필연적인 방법입니다.”

사마표(司馬彪)의 전략(戰略)에 실린 부하此對,詳於本傳,今悉載之以盡其意。표에서 이르길:

가평(嘉平) 4년(252년) 4월 손권이 죽었다. 정남장군 왕창(王昶) 정동장군 호준(胡遵) 진남장군 관구검(毌丘儉) 등이 각기 오를 정벌할 계책을 바쳤다. 조정에서는 세 사람의 정벌 계책이 달라서 상서 부하에게 물었다. 부하가 대답하였다.

「昔夫差勝齊陵晉,威行中國,不能以免姑蘇之禍;齊閔辟土兼國,開地千里,不足以救顛覆之敗:有始不必善終,古事之明效也。孫 權自破蜀兼平荊州之後,志盈欲滿,罪戮忠良,殊及胤嗣,元凶已極。相國宣文侯先識取亂侮亡之義,深建宏圖大舉之策。今權已死,託孤於諸葛恪。若矯權苛暴, 蠲其虐政,民免酷烈,偷安新惠,外內齊慮,有同舟之懼,雖不能終自保完,猶足以延期挺命於深江之表矣。

왕창 등은 배를 띄워서 지름길로 건너는데, 장강밖으로 가로질러 가자고 하였습니다. 收民略地,因糧於寇;
或欲四道並進,臨之以武,誘間攜貳,待其崩壞;或欲進軍大佃,偪其項領,積穀觀釁,相時而動:凡此三者,皆取賊之常計也。然施之當機,則功成名立,苟不應 節,必貽後患。自治兵已來,出入三載,非掩襲之軍也。賊喪元帥,利存退守,若撰飾舟楫,羅船津要,堅城清野,以防卒攻,橫行之計,殆難必施。賊之為寇,幾 六十年,君臣偽立,吉凶同患,若恪蠲其弊,天去其疾,崩潰之應,不可卒待。今邊壤之守,與賊相遠,賊設羅落,又持重密,間諜不行,耳目無聞。夫軍無耳目, 校察未詳,而舉大眾以臨巨險,此為希幸徼功,先戰而後求勝,非全軍之長策也。唯有進軍大佃,最差完牢。可詔昶、遵等擇地居險,審所錯置,及令三方一時前 守。奪其肥壤,使還耕塉土,一也;兵出民表,寇鈔不犯,二也;招懷近路,降附日至,三也;羅落遠設,閒構不來,四也;賊退其守,羅落必淺,佃作易之,五 也;坐食積穀,士不運輸,六也;釁隙時聞,討襲速決,七也:凡此七者,軍事之急務也。不據則賊擅便資,據之則利歸於國,不可不察也。夫屯壘相偪,形勢已 交,智勇得陳,巧拙得用,策之而知得失之計,角之而知有餘不足,虜之情偽,將焉所逃?夫以小敵大,則役煩力竭,以貧敵富,則斂重財匱。故『敵逸能勞之,飽 能飢之』,此之謂也。然後盛眾厲兵以震之,參惠倍賞以招之,多方廣似以疑之。由不虞之道,以閒其不戒;比及三年,左提右挈,虜必冰散瓦解,安受其弊,可坐 算而得也。昔漢氏歷世常患匈奴,朝臣謀士早朝晏罷,介冑之將則陳征伐,搢紳之徒咸言和親,勇奮之士思展搏噬。故樊噲願以十萬之眾橫行匈奴,季布面折其短。 李信求以二十萬獨舉楚人,而果辱秦軍。今諸將有陳越江陵險,獨步虜庭,即亦向時之類也。以陛下聖德,輔相忠賢,法明士練,錯計於全勝之地,振長策以禦之, 虜之崩潰,必然之數。故兵法曰:『屈人之兵,而非戰也;拔人之城,而非攻也。』若釋廟勝必然之理,而行萬一不必全之路,誠愚臣之所慮也。故謂大佃而偪之計 最長。」時不從嘏言。其年十一月,詔昶等征吳。五年正月,諸葛恪拒戰,大破眾軍於東關。

후에 오나라 대장 제갈각(諸葛恪)은 동관(東關)을 막 공격한 후, 승기를 타고 성가를 날리며 청주와 서주(青徐)로 향하려 했으므로 조정에서는 이에 대해 준비를 하려고 했다. 부하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회수와 바다(淮海)는 적군이 쉽게 병사를 나아가게 할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또 옛날 손권(孫權)은 병사를 파견하여 바다로 들어가게 하였는데, 풍랑으로 침몰하여 익사하였고, 거의 살아남은 자가 없었습니다. 제갈각이 어떻게 근본이 되는 힘까지 기울여 운명을 용솟음치는 바다에 맡기고 승리를 얻기를 구했겠습니까? 제갈각은 평소 북과 수군의 별 볼일 없는 작은 장수만을 보내 바다에서 역류하여 회수(淮)로 들어가게 하여 청주와 서주(青徐)에 대해 시위운동을 하게하고, 제갈각 자신은 병사들을 모아 회남으로 향했을 뿐입니다.”

후에 제갈각은 과연 신성(新城)을 포위하여 공격하였지만,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漢書張湯傳曰:湯始為小吏,乾沒,與長安富賈田甲、魚翁叔之屬交私。服虔說曰:「乾沒,射成敗也。」如淳曰:「得利為乾,失利為沒。」臣松之以虔直以乾沒為 射成敗,而不說乾沒之義,於理猶為未暢。淳以得利為乾,又不可了。愚謂乾讀宜為乾燥之乾。蓋謂有所徼射,不計乾燥之與沈沒而為之。

사기 권122권 혹리열전(酷吏列傳)에 나오는 내용: 한서(漢書) 장탕전(張湯傳): 장탕(張湯)은 작은 관리로 시작했는데, 사리를 탐하여 (乾沒) 장안의 부상 전갑(田甲)이나 어옹숙(魚翁叔)과 남몰래 교제하기도 했다.

복건(服虔: 주석가중 하나): 건몰(乾沒)이란 승패의 뜻이다?

여순(如淳: 주석가의 하나): 승리하거나 이득이 생기는 것을 건(乾)이라 하고, 패하거나 잃는 것을 몰(沒)이라 한다.

부하는 항상 재성(才性)의 동이(同異)에 대해 논하였고, 종회(鍾會)는 그의 관점을 종합하여 사본론(四本論)을 지었다.

傅子曰:嘏既達治好正,而有清理識要,好論才性,原本精微,尠能及之。司隸校尉鍾會年甚少,嘏以明智交會。臣松之案:傅子前云嘏了夏侯之必敗,不與之交,而 此云與鍾會善。愚以為夏侯玄以名重致患,釁由外至;鍾會以利動取敗,禍自己出。然則夏侯之危兆難睹,而鍾氏之敗形易照也。嘏若了夏侯之必危,而不見鍾會之 將敗,則為識有所蔽,難以言通;若皆知其不終,而情有彼此,是為厚薄由于愛憎,奚豫於成敗哉?以愛憎為厚薄,又虧於雅體矣。傅子此論,非所以益嘏也。

가평(嘉平) 말년에 관내후(關內侯)의 작위를 받았다. 고귀향공(高貴鄉公)이 제위에 즉위한 후, 부하를 승진시켜 무향정후(武卿亭侯)로 봉했다.

정원(正元) 2년(255) 봄, 관구검(毌丘儉)과 문흠(文欽)이 반란을 일으켰다. 어떤 사람은 사마경왕(司馬景王) 자신이 평정할 필요는 없고, 태위(太尉) 사마부(司馬孚)를 파견하여 가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직 부하와 왕숙(王肅)만은 그에게 권했다. 그래서 사마경왕은 친히 정벌하러 갔다. 

한진춘추: 부하는 사마사에게 함께 출정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권했지만 사마사가 따르려 하지 않았다. 부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회초(淮楚) 지역의 병사들은 날래고 관구검 등은 전력을 기울여 멀리 싸우러 왔으니 그 예봉을 당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 장수들이 전투를 하다보면 유리할 수도 불리할 수도 있는데 대세를 놓고 한 번 실수하게 되면 즉시 공의 대업은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이 당시 사마사는 눈에 난 혹을 막 째었는데 상처가 몹시 심했다. 부하의 말을 듣더니 결연히 일어나 말했다.

“내가 수레를 불러 급히 동쪽으로 가겠다.”

부하로써 상서복야(尚書僕射)를 대리하도록 하여 함께 동쪽으로 갔다. 관구검과 문흠을 격파시킨 것은 부하의 책모가 있었다. 사마경왕(景王)이 죽자, 부하는 사마문왕(司馬文王)과 함께 낙양(洛陽)으로 돌아가 사마문왕의 정치를 보좌했다. 이에 관한 기록은 종회전(鍾會傳)에 있다.

世語曰:景王疾甚,以朝政授傅嘏,嘏不敢受。及薨,嘏祕不發喪,以景王命召文王於許昌,領公軍焉。孫盛評曰:晉宣、景、文王之相魏也,權重相承,王業基矣。豈蕞爾傅嘏所宜閒廁?世語所云,斯不然矣。

종회는 이로부터 스스로 오만한 기색이 있었으므로, 부하는 그에게 충고했다.

“그대의 뜻은 원대하지만, 공업을 세우는 것은 어렵습니다.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부하는 공적으로 승진하여 양향후(陽鄉侯)에 봉해졌고, 식읍이 6백호 증가하여 이전 것과 합쳐 1천 2백호가 되었다. 이 해에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47세였다. 태상(太常)으로 추증하고, 시호를 원후(元侯)라고 했다. 

부자: 이풍(李豐)은 부하와 같은 마을 출신이었는데, 어려서 뛰어나다고 명성이 대단했고, 어린 나이에 관직에 올라, 명성이 대단했지만, 부하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부하는 이렇게 말했다.

"이풍은 거짓으로 수식을 하고 의심을 많이 품고 있으며, 자기의 작은 지혜를 자랑으로 여기며 권력과 이익에 눈이 어두워 있으니, 만약 기밀에 관한 일을 맡게 된다면 그가 죽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

하다. 이풍은 나중에 중서령(中書令)이 되었고, 하후현(夏侯玄)과 함께 반란을 꾸몄다가 부하가 말한 대로 죽었다. 부하는 일찍부터 기주자사 (兾州刺史) 배휘(裴徽)와 산기상시(散騎常侍) 순감(荀甝)과 사이가 좋았지만, 이 두 사람은 젊은 나이에 죽었다. 또한 진북장군(鎮北將軍) 하증(何曾), 사공(司空) 진태(陳泰), 상서복야(尚書僕射) 순개(荀顗), 후장군(後將軍) 종육(鍾毓)등과 친하였는데, 다들 명신(名臣)이 되었다.

아들 부지(傅祗)가 뒤를 이었다.

함희(咸熙) 연간에 다섯 등급의 작위 제도가 세워졌는데 부하가 이전 황제 시대에 공훈이 빛났으므로 부지를 경원자(涇原子)로 바꿔 봉했다.

진제공찬(晉諸公贊)에 이르길:부지(傅祗)의 자는 자장(子莊)이고, 부하의 막내아들(少子)이다. 진나라 영가 연중에 사공(司空)이 되었다. 부지의 아들 부선(傅宣)은 자가 세홍(世弘)이다. 세상 사람들은 부선이 공명으로 이름 높았다 했다. 지위는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었다. 부선의 동생인 부창(傅暢)은 자가 세도(世道)인데, 비서승(祕書丞)이 되었고, 오랑캐의 난 중에서 죽었다. 진제공찬(晉諸公贊)이나 진공경례질고사(晉公卿禮秩故事)의 책을 썼다.

- 평하여 말한다.

옛날 문제(文帝 : 조비)와 진사왕(陳王 : 조식)은 공자(公子)의 존귀함을 받고 널리 문학을 좋아하였으며, 기호가 같은 선비들을 모았고, 문학적 재능이 있는 자들을 나란히 출현시켰다. 왕찬(粲) 등 여섯 명의 명성이 가장 높았는데 특히 왕찬은 항상 곁에 있는 관리가 되어 일대의 제도를 세웠지만, 그 허함을 지키고 세상을 덕으로 채운 서간의 순수함만은 못했다. 위기 또한 옛날 관례를 많이 알고 있었고, 당시 조정의 의식을 보좌했다. 유소는 학문에 관한 서적을 많이 읽어 문체와 품행이 모두 우수했다. 유이(劉廙)는 청결한 식견을 갖고 있어 저명했으며, 부하는 재능과 식견이 높아 이름이 빛났다.

臣松之以為傅嘏識量名輩,寔當時高流。而此評但云「用才達顯」,既於題目為拙,又不足以見嘏之美也。
분류 :
위서
조회 수 :
5089
등록일 :
2013.05.04
10:56:45 (*.148.47.205)
엮인글 :
http://rexhistoria.net/history_sam/2543/9f7/trackback
게시글 주소 :
http://rexhistoria.net/2543

코렐솔라

2013.07.14
19:28:14
(*.52.89.87)
주석 등록 및 배주 아닌 것 파랗게 처리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촉서 촉서 목차 링크 재원 2013-07-08 181015
공지 위서 위서 목차 링크 [1] 재원 2013-06-29 189506
공지 오서 오서 목차 링크 [3] 재원 2013-06-28 136237
270 위서 진태전 [3] 재원 2013-05-04 7003
269 위서 진군전 [2] 견초 2013-05-04 6628
268 위서 환계전 [3] 견초 2013-05-04 4524
» 위서 부하전 [1] 견초 2013-05-04 5089
266 위서 유소전 [1] 견초 2013-05-04 4743
265 위서 유이전 [1] 견초 2013-05-04 4387
264 위서 위기전 [3] 견초 2013-05-04 4820
263 위서 왕찬전 [9] 견초 2013-05-04 5681
262 위서 무문세왕공전(조조, 조비 아들들, 조충전 등) [6] 견초 2013-05-04 9441
261 위서 소회왕웅전(조웅전) [1] 견초 2013-05-04 4086
260 위서 진사왕식전(조식전) [3] 견초 2013-05-04 8466
259 위서 임성위왕창전(조창전) [10] 견초 2013-05-04 6496
258 위서 염온전 [1] 견초 2013-05-04 4694
257 위서 방육전 [3] 견초 2013-05-04 4418
256 위서 방덕전 [1] 견초 2013-05-04 8490
255 위서 전위전 [2] 견초 2013-05-04 8035
254 위서 허저전 [1] 견초 2013-05-04 7018
253 위서 여건전 [1] 견초 2013-05-04 4720
252 위서 문빙전 [1] 견초 2013-05-04 6853
251 위서 장패전 [1] 견초 2013-05-04 6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