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육(盧毓)은 자가 자가(子家)이고 탁군(탁郡) 탁현(탁縣) 사람이다. 부친 노식(盧植)은 당시 매우 명성이 있었다.

속한서에 이르길:
노식(盧植)은 자가 자간(子幹)이었다. 어려서 마융(馬融)을 모셨다. 정현(鄭玄)과 친구사이였다. 성격이 강직하고 굳세고 지조가 있었으며 항상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큰 뜻을 품었다. 구합취용[苟合取容:아부(阿附)하여 남의 환심(歡心)을 사려고 힘씀)하지 않았고, 주군에서 불러도 가지 않았다. 건녕(建寧: 168-172)연간에 박사(博士)로 임명되어, 관직에 나가, 구강태수(九江太守)가 되었는데, 병 때문에 그만 두었다. 좋은 문장 만들고 예기(禮記)를 훈고하는 것을 좋아했다. 나중에 시중(侍中), 상서(尚書)가 되었다.

184년에 장각(張角)이 황건적 난을 일으키자, 북중랑장(北中郎將)이 되어 장각을 토벌했는데, 패배하여 벌을 받았다. 다시 상서(尚書)로 복귀했는데, (십상시의 난때) 장량(張讓)이 한소제(少帝)를 협박하여, 소평진(小平津)로 황제를 이끌고 도망갈 때, 노식은 칼을 빼어들고, 장양의 무리들을 여러명을 쳐 죽이자, 장양들이 모두 무기를 버리고, 울면서 죄를 용서해 달라면서, 물에 빠져 죽었다. 동탁이 한소제를 폐위하고자 할때, 아무도 감히 반대를 못했는데, 노식만 혼자서 반대 의견을 냈는데, 이 이야기는 동탁전에 있다.


노식은 나중에 늙고 병들어 관직을 버리고, 상곡(上谷) 군도산(軍都山)에 들어가 숨어 살았는데, 초평 3년(192)에 죽었다. 태조가 북쪽으로 원정을 나가서 유성(柳城)을 정벌할때, 탁군현을 통과하게 되었는데, 그곳 태수에게 말했다.


"예전에 북중랑장 노식이 해내(海內)에서 그 명성이 자자했는데, 공부는 유학자로써, 선비는 모두 그를 존경하여, 乃國之楨幹也。昔武王入殷,封商容之閭,鄭喪子產而仲尼隕涕。孤到此州,嘉其餘風。春秋之義,賢者之後,有異於人。敬遣丞掾脩墳墓,并致薄醊,以彰厥德。"


노식은 아들이 4명 있었는데, 노육은 막내다.


노육은 열 살 때, 고아가 되었는데, 자기가 태어난 주에 난리가 일어나 두형이 전란 속에서 죽었다. 그때는 원소와 공손찬이 교전할 때로서 유주와 기주에는 기근이 발생했는데, 과부가 된 형수와 고아가 된 형의 아들을 양육했으며, 학식과 품행은 칭송을 받았다. 문제가 오관장이 되었을 때, 노육을 불러 문하적조(門下賊曹)에 임명했다. 최염은 노육을 천거하여 기주주부로 삼았다.

당시 천하는 창업 초기로써 도망친 사람들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도망친 사병에 대한 형벌은 무거웠으며, 죄는 처자식에까지 미쳤다. 도망친 병사의 아내인 백(白) 등은 남편의 집으로 시집온 지 며칠밖에 안되었고 남편과 만날 수 없었지만, 대리(大理)는 사형으로 판결한다고 상주했다. 노육이 이것을 반박하며 말했다.

"무릇 여인의 감정은 남편과 직접 만난 후에 애정이 생기고, 부인이 된 후에 의리가 두터워집니다. 때문에 <<시경>>에서는 '그대를 보지 못하니, 나의 마음 슬프구나. 그대를 본 후에는 나의 마음 편안하구나.' 라고 했습니다. 

또 <<예기>>에서는 '선조를 제사지내는 묘(廟)에 가지 않은 부인이 죽으면, 그 여자의 집으로 돌려보내 안장시키고, 부인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백 등은 살아서는 남편을 만나지 못한 슬픔이 있고, 죽어서는 부인이 되지 못한 통한이 있을 텐데, 관리들의 의론은 이들을 사형에 처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부부가 된 후에는 어떤 죄를 더할 것입니까? 

그리고 <<예기>>에서는 '형벌을 시행할 경우에는 가볍게 하라.'고 했는데, 이것은 사람의 죄를 처벌할 때는 가벼운 것을 따르는 것이 통례라는 말입니다. 

또 <<상서>>에서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어찌 죄의 판결을 가볍게 하게하고 과실을 범하는 것이겠는가?' 라고 했는데, 이것은 형벌의 과중함을 걱정한 것입니다. 백 등이 모두 예빙(禮聘)을 받아 이미 남편의 집으로 들어갔다면, 그녀를 형벌에 처할 수 있지만, 죽이는 것은 너무 무겁습니다."

조조가 말했다.

"노육이 주장한 것은 옳소. 또 경전을 인용한 것이 뜻이 깊어 나로 하여금 감탄하게 만드오."

이 때문에 노육은 승상법조의령사(丞相法曹議令史)가 되었고, 서조의 영사로 전임되었다.

위나라가 이미 세워진 후, 이부랑(夷部郞)으로 임명됐다. 

문제가 제위에 오르자 황문시랑으로 바꿔 임명되었고, 지방으로 나와 제음(濟陰)의 상이 되었으며, 양과 초 두 군의 태수가 되었다. 

문제는 초군(焦郡)이 자기의 옛 고향이었기 때문에 대규모로 백성들을 옮겨 그곳을 충실하게 하고 둔전을 시행하려고 했다. 그러나 초군의 토지는 척박하고 백성들은 곤궁하였으므로, 노육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표를 올려 백성들을 양(梁)나라로 옮겨 비옥한 곳으로 나아가게 할 것을 청했는데, 문제는 크게 실망했다. 비록 노육이 표를 올린 것을 듣기는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를 원망하였다. 그래서 노육을 좌천시켜 이주한 백성들을 관리하도록 하고 수양전농교위(수陽典農校尉)로 삼았다. 

노육의 마음은 백성들을 이롭게 하는데 있었으므로 직접 가서 시찰하고 좋은 밭을 선택하여 살도록 하였다. 백성들은 그를 신뢰했다. 안평(安平) * 광평(廣平)태수로 승진하였으며, 임지에서는 백성들에게 은혜와 교화를 폈다.

청룡 2년(234), 수도로 들어와 시중이 되었다. 이보다 앞서 산기상시 유소(劉邵)가 조서를 받아 법률을 제정했지만 완성하지 못했다. 노육이 글을 올려 고금의 법률의 의미를 논하고, 법률에는 마땅히 하나의 정확한 의미가 있어야지 두 종류의 해석이 있어서 간사한 관리들로 하여금 사사로운 감정을 갖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시중 고당륭(高堂隆)이 궁전을 세우는 일에 대해 몇 차례 간언하자 명제는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노육이 진언을 했다.

"신이 듣기에는 군주가 총명하면 신하는 정직하고, 옛날 성왕(聖王)은 자신의 허물을 듣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감히 간언하는 북을 설치했다고 합니다. 지금 신하들은 살펴 권하는 것을 다하고 있는데, 이 점에 있어서는 신 등이 고당륭에 미치지 못합니다. 고당륭 등의 유생들은 강직(剛直)하다고 불리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마땅히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3년간 재직하면서 정책적으로 반박하고 저항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조서를 내렸다.

ㅡ 사람들의 재간에 근거하여 적합한 관직을 주는 것은 성명한 제왕들도 어려워했던 것이고, 반드시 훌륭한 보좌가 있어야 적임자를 뽑아 부적임자를 대신하도록 할 수 있다. 시중 노육은 천성이 바르고 곧으며, 마음이 공평하고 행위가 단정하므로 자리에서 게으르지 않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노육을 이부상서로 임명하라.

명제는 노육에게 그의 후임으로 한명을 선발하도록 하고 말했다.

"그대와 같은 사람을 얻을 수 있소."

노육이 상시 정충(鄭沖)을 천거하자, 명제가 말했다.

"문화(文和 ; 정충)는 나도 이전부터 알고 있소. 따로 내가 듣지 못한 자로 천거하시오."

그래서 원무(阮武)와 손옹(孫邕)을 추천하자, 명제는 이 중에서 손옹을 임용했다.

이 이전에 제갈탄과 등양이 명성을 떨쳤고, 사총팔달(四聰八達 ; 네 명의 총명한 인물과 여덟 명의 達人) 의 견해가 있었으므로 명제는 그들을 증오했다. 당시 중서랑 기용했는데, 조서를 내려 말했다.

ㅡ 적합한 사람을 얻고 얻지 못함은 노생(盧生)에게 달렸을 뿐이다. 명성은 땅이 그린 빵 같이 먹을 수 없다.

노육이 대답하여 말했다.

"명성은 특별한 사람을 부르기에는 충분하지 못하지만, 평범한 선비를 얻을 수는 있습니다. 평범한 선비는 가르침을 존경하고 선을 흠모한 연후에 유명하게 되므로 그들을 증오해서는 안 됩니다. 어리석은 신하는 특별한 사람을 알아보는 식견이 충분하지 못하며, 또 명성에 따라서 평범한 인물을 살피는 것을 직물 하고 있습니다. 단지 그 후의 일을 당연히 조사해야 됩니다. 때문에 옛날 사람들은 탄핵하거나 상주함에 있어서 말로써 하고, 그 말의 허실에 대하여 명확하게 조사를 할 경우에는 공적을 갖고 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관리의 성적을 평가하는 법은 폐지되었고 비난과 칭찬의 평판에 따라서 나아가고 물러남을 처리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진위가 혼란스럽게 섞여 있고, 허실이 서로 구분되지 않은 것입니다."

명제는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즉시 관리의 성적을 평가하는 제도를 만들도록 조서를 내렸다. 마침 사도의 직책이 결원이었다. 노육이 처사 관녕을 추천했지만, 명제는 기용할 수 없었다. 명제는 다시 그다음으로 기용될 수 있는지를 물었다. 노육이 대답하여 말했다.

"돈독하고 품행이 지극한 사람은 태중대부 한기(韓기(이고, 맑고 정직한 사람은 사예교위 최림(崔林)이며, 충정이 있고 순수한 사람은 태상 상림(常林)입니다."

명제는 한기를 기용했다. 노육의 인물에 대한 태도와 선발 태도는 우선 성품과 품행을 든 후에 대담과 재간에 이른다. 황문(黃門) 이풍은 일찍이 노육에게 이와 같이 해야 되는 까닭에 대해 물었다. 노육이 대답했다.

"재간은 선을 행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큰 재간은 큰 선을 이루고, 작은 재간은 작은 선을 이룹니다. 지금 재간이 있다고 칭찬하였지만 선을 행할 수 없다면, 이것은 재간을 사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풍 등은 그 말에 공감했다.

제왕(濟王)이 제위에 오르자, 관내후의 작위를 주었다. 당시 조상이 권력을 장악하고 자기의 당을 세우려고 하며, 노육을 복야로 옮기고, 시중 하안을 노육의 후임으로 삼았다. 오래지 않아, 노육을 지방으로 나가게 하여 정위로 임명하였고, 사예(司隸) 필궤(畢軌) 또한 왜곡된 상주를 하여 노육의 관직을 박탈했다.

노육은 광록현이 되었다. 조상 등이 체포된 후, 태부 사마선왕은 노육으로 하여금 사예교위를 대행하도록 하고, 조상의 일을 처리하도록 했다. 또 이부상서로 임명되었으며 봉거도위(奉車都尉)의 관직을 더하고, 고곽정후(高郭亭侯)로 봉해졌으며 복야로 전임되었고, 여전히 선발과 등용을 관장하고 광록대부의 관직을 더하였다. 고귀향공이 즉위하자, 대량향후(大梁鄕侯)로 승진하여 봉해졌다. 한 아들을 정후(亭侯)로 봉했다. 관구검이 난을 일으키자 대장군 사마경왕이 출정하였고, 노육이 조정의 일을 총괄하였으며, 시중의 관직을 더했다.

정원 3년(256), 중병에 걸려 관직을 사퇴했지만, 사공으로 승진하여 임명되었고, 표기장군 왕창(王昶) * 광록대부 왕관(王觀) * 사예교위 왕상(王祥)을 강력히 추천했다.

조서를 내려 사자를 보내 즉시 인수(印綏)를 주고 작위를 승진시켜 용성후(容城侯)로 봉했으며, 식읍은 2천3백 호였다. 감로 2년(257)에 세상을 떠났고, 시호를 성후(成侯)라고 했다. 손자 노번(盧藩)이 뒤를 이었다. 노육에게는 아들 노흠(盧欽)과 노정(盧廷)이 있었는데, 함희 연간에 노흠은 상서가 되었고, 노정은 태산태수가 되었다.

세어에서 이르길:
노흠(盧欽)은 자가 자약(子若)이고, 노정(盧珽)은 자가 자홀(子笏)이다. 노흠은 태시 연간에 상서복야가 되었고, 함령(咸寧) 4년(278년)에 죽었다. 나중에 위장군(衛將軍), 개부(開府)로 추증되었다. 우예(虞預)의 진서(晉書): 노흠은 어려서 명예와 지위높게 살았는데, 그래서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었고, 청빈하게 살았다. 같은 군 사람인 장화(張華)가 집안이 가난하고 어려서 고아가 되었는데, 동네사람들과 같이 어울릴려고 하지 않았다. 오로지 노흠만이 그를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귀하게 여겼다. 노흠의 아들인 노부(盧浮)는 자가 자운(子雲)이다.

진제공찬(晉諸公贊): 장화는 아는것도 많고 들은 것도 많아서 모르는 것이 없었다. 浮高朗經博,有美於華,起家太子舍人,病疽,截手,遂廢。朝廷器重之,就家以為國子博士,遷祭酒。永平中為祕書監。珽及子皓、志並至尚書。志子諶,字子諒。 溫嶠表稱諶清出有文思。諶別傳曰:諶善著文章。洛陽傾覆,北投劉琨,琨以為司空從事中郎。琨敗,諶歸段末波。元帝之初,累召為散騎中書侍郎,不得南赴。永 和六年,卒於胡(胡)中,子孫過江。妖賊帥盧循,諶之曾孫。


※ 평하여 말한다. - 환계는 성공과 실패의 추세를 깊이 인식하였으며 재능은 당대에 널리 알려졌다. 진군의 거동은 명예와 도의에 따랐고 청아하고 아정하며 명망이 있었다. 진태는 널리 세상을 구하고 소박함이 지극해 관부의 일을 원만하게 처리했다. 위나라 시대는 대각(상서성)에서 정치를 충실히 하고, 안(궁정)을 중시하고 밖(국가)을 경시하였다 때문에 팔좌상서가 고대 육경의 일을 했다. 진교, 서선, 위진, 노육은 오랜 기간 자리에 있었다. 진교와 서선은 강인하고 과단성이 있었으며, 위진과 노육은 간언을 잘하고 사리를 분명히 하였으니 모두 그들의 직책에 부끄러움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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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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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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