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준(楊俊)은 자가 수재(季才)이고 하내군(河內郡) 획가현(獲嘉縣) 사람이다. 진류(陳留)의 변양(邊讓)에게서 학문을 배웠는데, 변양은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였다. 

양준은 병란이 일어나자, 하내군(河內)이 사방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에 해당되므로 반드시 전쟁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노약자들을 부축하여 경현과 밀현(京密)의 산간(山間)으로 갔는데, 함께 따라가는 자가 백여 호나 되었다. 양준은 가난하고 부족한 자를 힘껏 구해주고, 그들 중에서 있는 자와 없는 자를 서로 교류하게 하였다. 집안사람들과 친구들 중에서 다른 사람의 포로가 되어 노예가 된 자가 모두 여섯이나 되었는데, 양준은 집안의 재산을 기울여 그들을 샀다. 사마선왕(司馬宣王 : 사마의)은 16, 17세 때 양준과 서로 알고 지냈는데, 양준이 말했다.
 
“이 사람은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다.”
 
또 사마랑(司馬朗)이 일찍이 이름을 떨쳤으나, 그의 집안 형(族兄)인 사마지(芝)는 오히려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오직 양준만이 그들에게 말했다.
 
“사마지는 비록 일찍부터 명망을 떨친 점에 있어서는 사마랑에 미치지 못하나, 실제적으로는 뛰어나다.”
 
양준은 병주(并州)로 피난을 갔다. 그 군의 왕상(王象)이라는 자가 어려서 부모를 잃고,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되었다. 17, 8세 때 주인이 그에게 양을 치게 했는데, 그가 몰래 책을 읽다가 이로 인하여 채찍으로 심하게 두들겨 맞았다. 양준은 그의 재능과 인품을 가상히 여겨 즉시 왕상을 사서 집으로 돌려보내 장가를 보내고 집을 만들어준 연후에 그와 헤어졌다.

태조(太祖)는 양준을 곡량현(曲梁)의 장(長)으로 임명하고 조정으로 들여보내 승상연속(丞相掾屬)이 되게 하고 무재(茂才)로 천거하였고, 안릉현(安陵)의 현령(令)에 임명하고 남양태수(南陽太守)로 승진시켰다. 그가 도덕과 교화를 선행하고 학교를 세우자, 관리와 백성들이 그를 칭찬했다. 다시 정남군사(征南軍師)가 되었다. 위(魏)나라가 건국된 이후에 중위(中尉)로 옮겼다. 태조가 한중(漢中)을 정벌할 때 위풍(魏諷)이 업(鄴)성에서 모반을 일으키자, 양준은 스스로 태조가 있는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자책하였다. 양준은 자신이 죄로 인해 면직될 것으로 생각하고 태자(太子)에게 사직하는 편지를 썼다. 태자(문제 조비)는 기뻐하지 않고 말했다.
 
“양중위(楊中尉)가 이대로 가는 것은 어찌 이리 높고 요원한가!”
 
마침내 문서를 받아 평원태수(平原太守)로 좌천되었다. 문제(文帝 : 조비)가 황제에 즉위하자 다시 남양태수(南陽)에 임명되었다. 그 당시 왕상(王象)은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있었는데, 양준을 추천하며 말했다.
 
“신이 보건대, 남양태수(南陽太守) 양준(楊俊)은 순수하고 뛰어난 판단을 가지고 있으며, 충성스럽고 돈후한 역량을 이행하였고, 어짊을 체현하여 족히 만물에 미치고, 독실한 것은 족히 민중을 감동시키고, 후진을 잘 인도하며 다른 사람을 은혜롭게 하는 것이 그치지 않으며, 겉으로는 관대하고 내심은 정직하고, 어질며 과단성이 있습니다. 관직에 임명된 이후로 그가 가는 곳마다 교화로 뒤덮여 있으며, 두 차례나 남양태수(南陽)로 임명되었고, 은혜와 덕망이 흘러넘쳐 다른 이웃과 다른 도당에서 조차도 아이를 강보에 싸서 짊어지고 이릅니다. 이제 경계를 지키는 것이 청정하고 그의 지혜와 능력을 펼칠 바가 없으니, 마땅히 서울로 돌아오게 하여 폐하에게 힘을 바치고 황제의 대업을 빛나게 하도록 해주십시오.”
 
양준은 어렸을 때부터 성장할 때까지, 다른 사람을 품평하는 것을 스스로의 임무로 삼았다. 같은 군의 심고(審固)와 진류(陳留) 사람 위순(衛恂)은 본래 모두 병사출신인데, 양준은 그들을 원조하고 발탁하여 장려하고 모두 뛰어난 선비가 되게 하였다. 후에 심고는 군의 태수를 역임하였고, 위순은 어사(御史)와 현령(縣令)을 지냈다. 그가 인물을 명백하게 평가하고 의를 행하는 것은 이러한 유형의 일이 많았다.

이전에 임치후(臨菑侯 - 조식)는 양준과 친했다. 태조는 태자를 세우지 아니하고 사사로이 모든 관리들에게 물었다. 양준은 비록 문제와 임치후의 재능을 각기 나누어 장점을 논하고 한쪽으로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임치후가 아름답다고 했다. 문제는 항상 이점에 대해서 한스러워했다.
 
황초(黃初) 3년(222), 문제의 수레가 완(宛)에 도착했을 때, 저자의 열기가 가득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화를 내며 양준을 잡아들였다. 상서복야(尚書僕射) 사마선왕(司馬宣王)과 상시(常侍) 왕상(王象), 순위(荀緯)가 양준을 구해주도록 청하며 머리를 조아리고 피를 흘렸으나, 문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양준이 말했다.
 
“나는 죄를 압니다.”
 
마침내 자살했다. 사람들은 그의 억울한 죽음을 애통해했다.
 
진수의 평: 양준(楊俊)은 원만하고 도의를 행했다.

世語曰:俊二孫:覽字公質,汝陰太守;猗字公彥,尚書:晉東海王越舅也。覽子沈,字宣弘,散騎常侍。魏略曰:王象字羲伯。既為俊所知拔,果有才志。建安中, 與同郡荀緯等俱為魏太子所禮待。及王粲、陳琳、阮瑀、路粹等亡後,新出之中,惟象才最高。魏有天下,拜象散騎侍郎,遷為常侍,封列侯。受詔撰皇覽,使象領 祕書監。象從延康元年始撰集,數歲成,藏於祕府,合四十餘部,部有數十篇,通合八百餘萬字。象既性器和厚,又文采溫雅,用是京師歸美,稱為儒宗。車駕南 巡,未到宛,有詔百官不得干豫郡縣。及車駕到,而宛令不解詔旨,閉巿門。帝聞之,忿然曰:「吾是寇邪?」乃收宛令及太守楊俊。詔問尚書:「漢明帝殺幾二千 石?」時象見詔文,知俊必不免。乃當帝前叩頭,流血竟面,請俊減死一等。帝不答,欲釋入禁中。象引帝衣,帝顧謂象曰:「我知楊俊與卿本末耳。今聽卿,是無 我也。卿寧無俊邪?無我邪?」象以帝言切,乃縮手。帝遂入,決俊法,然後乃出。象自恨不能濟俊,遂發病死。
분류 :
위서
조회 수 :
3997
등록일 :
2013.05.04
11:00:31 (*.148.47.205)
엮인글 :
http://rexhistoria.net/history_sam/2563/77d/trackback
게시글 주소 :
http://rexhistoria.net/2563

코렐솔라

2013.07.13
12:48:52
(*.52.89.88)
한문주석 추가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촉서 촉서 목차 링크 재원 2013-07-08 172093
공지 위서 위서 목차 링크 [1] 재원 2013-06-29 179914
공지 오서 오서 목차 링크 [3] 재원 2013-06-28 130640
290 위서 고당륭전 [1] 견초 2013-05-04 4942
289 위서 <배송지주>왕이전 [1] 재원 2013-05-04 5055
288 위서 양부전 [1] 견초 2013-05-04 6158
287 위서 <배송지주>신헌영전 [2] 재원 2013-05-04 4115
286 위서 신비전 [1] 견초 2013-05-04 4974
285 위서 왕관전 [1] 견초 2013-05-04 3982
284 위서 손례전 [1] 견초 2013-05-04 4720
283 위서 고유전 [5] 견초 2013-05-04 6226
282 위서 최림전 [1] 견초 2013-05-04 4258
281 위서 한기전 [1] 견초 2013-05-04 3953
280 위서 배잠전 [1] 견초 2013-05-04 4885
279 위서 조엄전 [1] 견초 2013-05-04 5432
278 위서 두습전 [1] 견초 2013-05-04 4466
» 위서 양준전 [1] 견초 2013-05-04 3997
276 위서 상림전 [2] 견초 2013-05-04 4408
275 위서 화흡전 [1] 견초 2013-05-04 4226
274 위서 노육전(노식의 아들) [1] 견초 2013-05-04 5477
273 위서 위진전 [1] 견초 2013-05-04 4368
272 위서 서선전 [1] 견초 2013-05-04 4452
271 위서 진교전 [5] 견초 2013-05-04 5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