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엄(趙儼)의 자는 백연(伯然)이고 영천군(潁川郡) 양적현(陽翟縣) 사람이다. 난리를 피하여 형주(荊州)로 가서, 두습(杜襲)ㆍ번흠(繁欽)과 재산과 회계를 공동소유로 하고 합쳐 한 집에서 살았다. 태조가 처음으로 헌제(獻帝)를 맞아 허현(許)에 수도를 정했을 때, 조엄(儼)이 번흠에게 말했다.

“조진동(曹鎮東 : 鎮東將軍 조진)은 시대에 순응하고 세상을 다스리는 재간이 있으니, 반드시 중국(華夏)을 바로잡아 구제할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에게 귀의해야 할 것인가를 압니다.”

건안(建安) 2년(197), 27세 때 노인과 어린이를 데리고 태조를 알현했다. 태조는 조엄을 낭릉현(朗陵)의 장(長)으로 삼았다. 현 안의 호족들은 대부분 법을 지키지 않고 교활하며, 두려워하거나 거리끼는 바가 없었다. 조엄은 그 중에서 아주 심한 자들을 뽑아 체포하여 조사하고 모두 사형으로 판결했다. 조엄은 한편으로는 죄인을 수감하고, 한편으로는 표를 올려 그들을 사면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므로, 이로부터 위엄과 은혜가 모두 빛나게 되었다. 이때 원소(袁紹)가 병소를 일으켜 남쪽을 침략하고, 사자를 보내 예주(豫州)의 여러 군을 회유하여 불렀는데, 군들이 대부분 그의 명을 받았다. 오직 양안군(陽安郡)만이 듣지 않았는데, 도위(都尉) 이통(李通)이 급히 호구세(戶)를 징수하였다. 조엄이 이통을 보고 말했다.

"현재 천하는 아직 안정되지 않았고, 각 군들은 모두 모반하였으며, 귀의하는 사람들에게는 또 비단과 솜을 거둬들이고 있고 소인은 혼란을 좋아하니, 유한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또 멀건 가깝건 간에 우환이 많으니 신중히 기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통이 말했다.

“원소와 대장군(大將軍)의 대치 상황은 매우 급박하며, 주위의 군현(郡縣)은 모두 모반하고 있습니다. 만일 비단과 솜을 걷어 보내지 않는다면, 형세를 주목하고 있는 자들은 반드시 내가 관망하는 태도를 갖고 기다리는 바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조엄이 말했다.

“확실히 또 당신의 생각과 같을 것입니다. 하지만 응당 그것의 경중을 헤아려, 잠시 징수를 늦추고 저로 하여금 당신을 위해 이 근심을 제거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는 순욱(荀彧)에게 편지를 써서 말했다.

“지금 양안군(陽安郡)은 비단과 솜을 응당 보내야 되지만, 길이 험하여 틀림없이 적에게 약탈당하게 될 것입니다. 백성들은 곤궁하고 인근 성은 모두 모반하여 붕괴되기 쉬운 상황에서, 이것은 한쪽의 안위만을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양안군 사람들은 충절을 지키며 위험한 상황에서도 두 마음을 먹지 않고 있습니다. 작은 선(善)으로도 반드시 상을 준다면, 도의를 행하는 자를 면려하게 됩니다. 국가를 잘 다스리는 자는 국가 때문에 징수하지 않고 백성에게 소장하도록 합니다. 저는 국가가 백성들을 위로하고 어루만져, 징수한 비단과 솜을 모두 그들에게 돌려 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순욱이 답장했다.

- 나는 그대의 의견을 조공에게 말했고, 공문을 각 군에 배포하였으니, 비단과 솜을 백성들에게 전부 돌려주시오.

그래서 위와 아래가 기뻐하였고, 군내가 안정되었다.

조엄은 중앙으로 들어가 사공연속주부(司空掾屬主簿)가 되었다. [주1]

[주1]《위략》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조조가 북쪽에서 원소와 대치할 때 원근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원소에게 몰래 편지를 보내의 뜻을 전하지 않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조엄과 양안태수 이통은 함께 군을 다스리고 있었다. 이통도 역시 원소에게 사람을 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조엄이 원소가 반드시 패할 것이라고 설명하자 이통은 자신의 생각을 접었다. 원소가 패하여 도주하자 조조는 사람을 파견하여 원소의 문서보관실을 뒤지게 했다. 그러나 유독 이통의 편지만 없었다. 조조는 몰래 사실을 조사해본 후에 조엄의 계책이었음을 알고 이렇게 말했다.

“이는 반드시 조백연 때문일 것이다.”

// 신 송지가 보건데 무제기에 따르면 조조는 원소가 패한 이후에 군중에서 사람들이 보낸 편지를 얻었지만 모두 불로 태워 없앴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찾게 되면 편지의 유무에 따라서 사람을 평가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인심이 편안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략》에서 말한 내용은 의심스럽다.

당시 우금(于禁)은 영음(潁陰)에 주둔하고 있었고, 악진(樂進)은 양적(陽翟)에 주둔하였으며, 장료(張遼)는 장사(長社)에 주둔하였는데, 그 장수들은 기질에 따라 행동하고 대부분 서로 협력하지 않았으므로, 조엄에게 세 군대의 사무를 동시에 담당하도록 했다. 조엄은 매번 규분이 있을 때마다 훈계하여 깨우쳤으므로 결국 서로 친하게 되었다. 태조(太祖)가 형주(荊州)를 정벌할 때, 조엄에게 장릉태수(章陵太守)를 겸임하도록 하고, 도독호군(都督護軍)으로 바꿔 임명하고 우금(于禁)ㆍ장료(張遼)ㆍ장흡(張郃)ㆍ주령(朱靈)ㆍ이전(李典)ㆍ노초(路招)ㆍ풍해(馮楷) 등의 7군을 통솔하게 했다. 또 승상주부(丞相主簿)로 임명했으며, 부풍태수(扶風太守)로 옮겨 봉했다. 태조(太祖)가 한수(韓遂)ㆍ마초(馬超) 등 5천여 명을 한중에서 밖으로 이동시키고, 평난장군(平難將軍) 은서(殷署) 등으로 하여금 감독하게 하고, 조엄을 관중호군(關中護軍)으로 임명하여 여러 군대를 전부 지휘하도록 했다. 강족(羌)이 자주 침략해 와서 피해를 입혔으므로, 조엄은 은서 등을 인솔하여 신평(新平)까지 추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둔전(屯田)하는 객(客) 여병(呂並)이 자칭 장군(將軍)이라고 하고 무리를 모아 진창(陳倉)을 점거하였으므로, 조엄이 다시 은서 등을 이끌고 공격하자, 적은 즉시 무너져 멸망했다.


당시 한중(漢中)의 수비를 돕기 위해 1천 2백 명의 병사를 파견하라는 명령서를 받고 은서가 병사들을 감독하여 보냈다. 출발하는 병졸들은 갑자기 가족들과 이별하였으므로 모두 우울한 안색을 하고 있었다. 은서가 출발한 후 하루가 되자, 조엄은 그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걱정이 되어 직접 사곡구(斜谷口)까지 쫓아가서 병사들을 위로하고, 또 은서에게 특별히 경계를 하도록 했다. 조엄은 돌아오는 길에 옹주자사(雍州刺史) 장기(張既)의 집에서 묵었다. 은서의 군대는 또 앞으로 40리 전진하였는데 병사들이 과연 반란을 일으켰으며, 은서는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조엄 자신이 이끄는 보병ㆍ기병 150명 모두가 반란을 일으킨 자들과 같은 부대 소속이었고, 어떤 이는 인척관계가 있었으므로, 이 소식을 듣고는 모두 놀라며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어 매우 불안해 하였다. 조엄은 본영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장기 등이 이렇게 주장했다.

“현재 본영(本營)의 무리들은 이미 소란스럽게 되었을 것이니, 당신 한 몸이 가더라도 어떠한 이로움이 없을 것입니다. 그 분명한 소식을 기다려야 합니다.”

조엄이 말했다.

“비록 본영의 사병과 반란을 일으킨 병사들이 함께 도모하였다고 의심될지라도, 반드시 출발한 사람의 반란 소식을 들은 후에야 일어날 것입니다. 또 몇몇 선(善)을 따르려고 하는 자는 스스로 결정할 수 없을 것이니, 응당 그들이 주저하고 있는 때를 타서 빨리 가서 어루만져 주어야만 합니다. 또한 그들의 총지휘관인 자로 진무시킬 수 없어서 내 몸에 재앙이 닥치는 것은 운명입니다.”

그리고는 출발했다. 30리를 나아가서 멈추어 말을 풀어 쉬게 하고, 따르고 있는 자를 모두 불러 성공했을 때와 실패했을 때의 결과를 말하고, 간절하게 위로하고 격려하자, 모두 강개하여 말했다.

“죽든지 살든지 간에는 당연히 호군(護軍 : 조엄)을 따를 것이고, 감히 두 마음을 갖지 않겠습니다.”

전진하여 진영에 도착하자, 악한 일에 가담한 반역자와 결탁한 자들 8백여 명이 들판에 흩어져 있는 것을 불러 나오게 하여 조사하고, 반란을 도모한 주모자만 잡아 처단하고, 그 나머지들에게는 묻지도 않았다. 군현에서 붙잡아 보낸 병사들 또한 모두 석방시켰다. 그래서 반란을 일으켰던 병사들은 서로 이어서 돌아와 투항해왔다. 조엄은 비밀리에 아뢰었다.

“장군을 파견하여 대본영(大營)에 가서 옛 병사로 하여금 관중(關中)을 지키게끔 요청하도록 하십시오.”

태조(太祖)는 장군(將軍) 유주(劉柱)를 보내 2천 명을 인솔하게 하고, 그의 도착을 기다렸다가 마초 등의 병사를 출발시키려고 했는데, 일이 누설되었다. 여러 진영이 크게 놀라 언정시킬 수 없게 되자, 조엄이 여러 장수들에게 말했다.

“옛 병사들은 적고, 동쪽의 병사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각 진영에서 모반을 기도한 것입니다. 만일 반란이 발생하면 재난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일 것입니다. 그들이 머뭇거리고 있는 때를 타서 빨리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리고 신병 중에서 온후한 자 1천 명을 남겨 관중(關中)을 지키도록 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동쪽으로 가도록 전했다. 그런 연후에 각 진영의 책임자를 불러 병사 명부를 거두어 와서 머리맡에 두고 신중히 심사하여 차이를 두어 구분하도록 했다. 남아있는 자들은 마음이 안정되어 조엄과 한마음을 가졌다. 동쪽으로 떠나야 하는 병사들 또한 감히 동요하지 않았다. 조엄은 하룻동안에 그들을 모두 파견하였으며, 기회를 틈타 남아 있는 1천 명을 나누어 영지에 주둔하도록 했다. 동쪽의 군사들이 곧 도착하여 또 위협하고 회유하였으므로 남아있던 1천 명을 이주시켜 서로 이어서 동쪽으로 가도록 했는데, 무사히 간 자가 2만여 명이나 되었다. [주2]

[주2] 손성(孫盛)이 말하길, 

저는 예로서 나라를 다스려야 하며, 백성들은 신의가 아니면 올바로 세우지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주성왕(周成王)은 오동나무 잎사귀로 했던 말을 저버리지 않았으며, 진문공(晋文公)은 원나라를 정벌할 때 약속을 어기지 않았습니다.2) 그렇게 하여 형조(刑措)3)의 공을 융성하게 함으로써 위대한 업적을 쌓았습니다. 조엄은 남아 있는 1천여명을 속여서 그들의 마음을 얻었습니다만 그것은 권도의 시작일 뿐이며 신뢰는 바닥이 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병사들을 위협하여 모았다가 또 그들을 강제로 옮겼으니 신의를 잃고서야 어떻게 백성들을 대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관우(關羽)가 번성(樊城)에서 정남장군(征南將軍) 조인(曹仁)을 포위하였다. 조엄의 의랑(議郎) 자격으로 조인의 군사(軍事)에 참여하여 남쪽으로 가서 평구장군(平寇將軍) 서황(徐晃)과 함께 앞으로 갔다. 번성에 도착한 후, 관우는 조인을 더욱 견고하게 포위했고, 남아 있던 구원병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서황이 이끄는 병사로는 포위망을 뚫기에 역부족이었지만, 장수들은 서황이 급히 구조하지 않고 있다고 질책을 했다. 조엄이 장수들에게 말했다.

“지금 적의 포위는 이전부터 견고하고 수공(水)속에서 내리는 비는 거셉니다. 우리쪽 병사는 단독이며 너무 적고, 조인은 따로 떨어져 있어 힘을 합칠 수 없습니다. 그런 행동은 실제로 안(번성의 조인)과 밖(서황과 조엄의 여러 군사)을 피로하게 할 뿐입니다. 지금은 군사를 전진시켜 포위망에 접근하여 첩자를 보내 조인에게 통지하여 그들로 하여금 밖에 구원병이 왔음을 알게하여 장수와 병사들을 면려하는 것만 못합니다. 북쪽의 지원군은 열흘을 넘기지 않고 도착할 것이며, 성 또한 굳게 지킬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연후에 안과 밖이 함께 움직이면 적을 격파시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만일 구원병이 늦어져 처형되는 일이 있게 된다면, 나는 여러 병사들을 위해 이 일을 맡을 것입니다.”

장수들은 모두 좋아하였으며, 곧 땅속으로 길을 파고, 화살을 날려 조인에게 편지를 보내서 몇 차례 소식을 연락하였다. 북쪽의 지원군 또한 도착하여 힘을 합쳐 크게 싸웠다. 관우의 군사가 물러난 후, 촉나라의 배가 면수(沔水)를 점거하여 양양(襄陽)은 완전히 연락이 끊겼다. 그때 손권(孫權)이 관우의 치중(輜重)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관우는 이 소식을 듣고 즉시 퇴각하여 남쪽으로 돌아갔다. 조인은 장수들을 모아서 상의했는데, 모두 이렇게 말했다.

“지금 관우는 위기에 처해 있으니, 쫓아가면 반드시 체포할 수 있습니다.”

조엄이 말했다.

“손권은 관우의 연이은 싸움의 어려움을 틈타서 그 배후를 습격하려고 했지만, 관우가 구원병을 이끌고 돌아올 것을 염두에 두고 우리 군대가 양쪽 군대가 피로해진 틈을 타서 공격할 것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순종하는 말로 봉공(奉公)을 원하고 나와서는 틈을 타고 변화를 이용하여 우리 군사력을 관찰하려고 할 뿐입니다. 지금 관우는 이미 고립되어 달아났지만, 또 그가 손권의 심복이 될 걱정거리는 여전히 있습니다. 만일 패하여 달아난 자를 깊숙이 추격한다면, 손권은 관우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 우리에게 재앙을 일으킬 것입니다. 왕께서는 반드시 이 점을 깊이 헤아리셔야만 됩니다.”

조인은 그래서 전투태세를 풀었다. 태조는 관우가 달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장수들이 추격할 것을 걱정하여 과연 긴급히 조인에게 칙령을 보냈다. 그것은 조엄의 계책과 같았다.

문제(文帝)가 왕위에 오르자, 조엄은 시중(侍中)으로 임명되었다. 오래지 않아 부마도위(駙馬都尉)로 임명되었으며, 하동태수(河東太守)ㆍ전농중랑장(典農中郎將)을 겸임하게 되었다.

황초(黃初) 3년(222), 관내후(關內侯)의 작위를 하사했다. 손권이 변방지역을 침략하였으므로 정동대장군(征東大將) 조휴(曹休)가 다섯 주의 군사를 통솔하여 손권에게 대항하였고, 조엄을 불러 군사(軍師)로 삼았다. 손권이 물러난 후, 군대는 수도로 돌아왔으며, 승진하여 상서(尚書)가 되었다. 문제를 따라 손권을 정벌하러 광릉(廣陵)에 도착하였고, 또 남아서 정동군사(征東軍師)로 임명되었다.

명제(明帝)가 즉위하자 승진하여 도향후(都鄉侯)로 봉해졌으며, 식읍 6백 호가 증가되고, 감형주제군사(監荊州諸軍事)ㆍ가절(假節)이 되었으나, 마침 이때 질병이 있어서 부임하지 못했다. 또 상서(尚書)로 임명되고, 지방으로 나가 감예주제군사(監豫州諸軍事)가 되었으며, 대사마군사(大司馬軍師)로 전임되었고, 중앙으로 들어와 대사농(大司農)이 되었다. 제왕(齊王)이 즉위하자, 조엄을 감옹량제군사(監雍涼諸軍事)ㆍ가절(假節)로 삼았으며, 정촉장군(征蜀將軍)으로 전임하였고, 또 정서장군(征西將軍)ㆍ도독옹양제군사(都督雍涼諸軍事)로 옮겼다.

정시(正始) 4년(243), 노령과 질병을 이유로 돌아갈 것을 요청했다. 불러서 표기장군(驃騎將軍)으로 삼았으며,


魏略曰:舊故四征有官廚財籍,遷轉之際,無不因緣。而儼叉手上車,發到霸上,忘持其常所服藥。雍州聞之,乃追送雜藥材數箱,儼笑曰:「人言語殊不易,我偶問所服藥耳,何用是為邪?」遂不取。


사공(司空)으로 승진시켰다. 조엄이 죽자, 시호를 목후(穆侯)라고 했다. 아들 조정(亭)이 뒤를 이었다.

처음에 조엄은 같은 군 사람 신비(辛毗)ㆍ진군(陳群)ㆍ두습(杜襲)과 함께 이름이 알려졌고, 신(辛)ㆍ진(陳)ㆍ두(杜)ㆍ조(趙))라고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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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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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13
12:56:26
(*.52.89.88)
한문 주석 추가했습니다.

코렐솔라

2019.09.27
11:06:42
(*.46.174.164)
만일 비단가 솜을 걷어 보내지 않는다면
에서 비간가->비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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