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견(孫堅)의 자는 문대(文臺)이며, 오(吳)군 부춘(富春)현 사람인데, 아마도 손무(孫武)의 후손이다.

[주 : 『오서(吳書)』에 이르길 

「손견의 집안은 대대로 오군에서 벼슬살이 했는데, 그 집은 부춘에 있고, 조상들은 성 동쪽에 장사지냈다. 무덤위에 여러 번 괴이한 빛이 있었는데, 운기(雲氣)가 오색 빛을 띠고 위로는 하늘에까지 이어고 수(數) 리에 만연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길가다 이를 보았다. 마을의 부로(父老)들이 서로 얘기하길 

“이것은 비범치 않은 기운이니, 손씨가 흥하게 될 것이다!”

라 했다. 그 어미가 손견을 배었을 때, 꿈에서 창자가 나와서 오의 창문(昌門=『손권전』에 나오는 주석에 의하면, 창문은 오군의 성 서쪽 외곽(郭)의 문으로, 옛 오나라와 부차(夫差)가 지은 것이라 합니다)을 둘러싸는 것을 꾸었는데, 깨고 나서는 두려워서 이를 이웃 어멈에게 알렸다. 이웃 어멈이 말하길 

“어찌 길조가 아니겠습니까?”

라 했다. 손견이 태어나니, 용모는 범상치 않았고 성품은 활달하며, 빼어난 절개(奇節)를 좋아했다」고 한다』

[유명록: 손견의 아버지 - 손종(孫鐘)은 오군(吳郡) 부춘(富春) 사람으로, 손견(孫堅)의 아버지이다. 어릴 때 집안이 가난하였고, 모친과 함께 살며 극진히 효도하였고 오이를 팔아 생업으로 삼았다. 오이가 익었을 때, 옷이 단정하고 용모가 아름다운 세 소년이 손종에게 오이를 구걸하였다. 손종은 그들을 초막으로 데려갔고, 오이와 밥을 대접하는 한편 예를 다하고 은근하게 모셨다. 셋은 가기 전에 손종에게 말하였다. 

"몽군(蒙君)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니, 무덤자리를 알려드리겠습니다. 현세에서 제후에 봉해지시겠습니까, 아니면 몇 대 후에 천자가 되시겠습니까?"

손종이 무릎 꿇고 절하며 말하였다.

"몇 대 후에 천자가 되는 것이 좋겠습니다."

곧바로 (손종은) 무덤자리를 정하였다. 또 (셋은) 말하였다.

"우리는 사명(司命 : 인간의 생명을 관장하는 신)이오. 그대는 산을 내려가되, 백 보를 걸을 동안 뒤를 돌아보지 마시오."

손종은 60걸음 만에 산을 내려갔다. 뒤를 돌아보니, 그들은 모두 흰 두루미가 되어 날아가고 있었다. 이윽고 손종은 그의 모친을 이곳에 묻었고, 무덤에서 기운이 나왔는데 하늘에 닿았다. 손종은 훗날 손견(孫堅)을 낳았고, 손견은 손권(孫權)을 낳았으며, 손권은 손량(孫亮)을 낳았고, 손량은 손휴(孫休)를 낳았고, 손휴는 손화(孫和)를 낳았고, 손화는 손호(孫皓)를 낳았다. 진(晉)이 토벌에 나서자, (손호는) 항복하여 귀명후(歸命侯)에 봉해졌다.]

젊었을 때 현의 관리가 되었다. 나이 17세 때, 아버지와 함께 배를 타고 전당(錢唐)에 이르렀는데, 해적인 호옥(胡玉) 등이 포리(匏里) 위에서 장사치(賈人)들의 재물을 약취하여, 막 언덕 위에서 이를 나누고 있으니, 행려자들은 모두 (그 자리에) 서있고 배들은 감히 나아가지 못했다. 손견이 아버지에게 말하길 

“이 도적놈들은 가히 공격할 수 있으니, 청컨대 토벌할까 합니다.”

라 했다. 그 아비가 말하길 

“네가 도모할 바가 아니다.”

라 했다. 손견이 칼을 쥐고 언덕으로 올라가니, 마치 부분(部分)을 나눈 병사들이 도적들을 펼쳐 막는 형세 같았다. 도적들이 이를 바라보고는 관병(官兵)이 붙잡으러 온 줄 알고, 곧 재물을 내팽개치고는 흩어져 달아났다. 손견이 추격하여 머릴 하나 참수해 얻고는 돌아왔다 : 그의 아비가 크게 놀랐다 이로 때문에 유명하게 되니, 관부에서 그를 불러 임시로 위(尉)의 직책을 서리하게 했다.

회계(會稽)의 요사스런 도적(妖賊)인 허창(許昌)이 구장(句章)에서 봉기하여, 스스로 양명황제(陽明皇帝)라 칭하고 그의 아들 허조(許詔)와 더불어 여러 현을 선동(煽動)하니, 그 무리가 수만이었다.

[주 : 『영제기(靈帝紀)』에 이르길 「허창은 그의 아비는 월왕(越王)으로 삼았다」고 한다]

손견의 군의 사마(司馬)로써 정용(精勇)한 자들을 모집하여 천여 명을 얻어서, 주군과 함께 합쳐 이들을 토벌해 격파하였다. 이해는 희평(熹平) 원년(172)이다. 

자사 장민(臧旻)이 그의 공적을 열거해 올리니, (황제가) 조서로써 손견을 염독(鹽瀆)현의 현승(丞)으로 제수하였고, 여러 해 만에 우이(盱眙)승으로 옮겨갔다가 또 하비승으로 옮겨갔다.

[주 : 『강표전(江表傳)』에 이르길 「손견이 3현의 보좌관(현승의 직책이 현령 다음의 관직으로 현령의 보좌관 역할입니다)을 역임하면서, 가는 곳마다 칭송이 있어서, 관리와 백성들이 친근히 귀부하였다. 고향의 옛 친구들로 어린 시절부터 사이가 좋았던 사람들이 왕래하는 자가 항상 수백 명이나 되었다. 손견이 그들은 접대하고 봉양하는 것이, 마치 자제(子弟)들에게 하는 것과 같이 하였다」고 한다]

중평(中平) 원년(184년), 황건적의 우두머리 장각(張角)이 위군(魏郡)에서 봉기하여, 신령(神靈)이 있음을 칭탁하며, 팔사(八使)를 보내 선한 도로써 천하를 교화하게 하고, 숨어서 몰래 서로 연결하며, 스스로 황천태평(皇天泰平)이 칭하였다. 3월 갑자일, 36만의 무리가 하루아침에 모두 일어나니 천하가 소리 내어 호응하고, 군현을 불태우며 장리(長吏)들을 살해했다.

[주 : 『헌제춘추(獻帝春秋)』에 이르길 「장각은 천공(天公)장군이라 칭했고, 장각의 아우 장보(張寶)는 지공(地公)장군이라 칭했으며, 장보의 아우 장량(張梁)은 인공(人公)장군이라 칭했다」고 한다] 

한(漢)에서는 거기장군(車騎將軍) 황보숭(皇甫崇)과 중랑장(中郞將) 주준(朱儁)을 파견하여 이들을 토벌하여 격파하게 했다. 이 표를 올려 손견을 좌군사마(佐軍司馬)로 삼을 것을 청하니, 향리의 젊은 사람들로 하비에 따라와 있던 자들은 모두 손견을 따르기를 원했다. 손견 또한 여러 상인 및 회수(淮水)와 사수(泗水) 지역의 정병을 모집하니, 합쳐 천여 명이 되었고, 주준과 함께 힘을 합려 분격(奮擊)하니, 향하는 곳마다 앞을 막는 자가 없었다. 

[주 : 오서에서 이르길 손견이 승세를 타서 깊이 진군하다 서화(西華)에서 손해를 입었다. 손견은 상처를 입고 말에서 떨어져, 풀 속에 누워 있었다. 군중(軍衆)은 분산되어, 손견의 행방을 몰랐다. 손견이 타던 총마(驄馬)가 군영을 달려 돌아가서, 땅에 넘어져 울어대니, 장수와 병사들이 그 말을 따라가 풀 속에서 손견을 찾았다. 손견이 군영으로 돌아온 지 십 수 일이 되어, 상처가 조금 낫자 다시 출전하였다」고 한다] 

여남(汝南)과 영천(潁川) 도적들이 곤궁하고 완성(宛城)으로 달아나 이를 보전했다. 손견은 몸소 한쪽 면을 맡아, 성에 올라 먼저 들어가니, 병사들이 이에 개미처럼 붙어서 올라가서 마침내 크게 격파하였다. 주준은 장계를 갖춰 위에 보고하니, 손견을 별부사마(別部司馬)에 배수하였다.  

[주 : <속한서> 으로 분할]

변장(邊章)과 한수(韓遂)가 양주(凉州)에서 난을 일으켰다. 중랑장 동탁이 그들을 막아 토벌했으나 공이 없었다.

중평(中平) 3년(186), 사공(司空) 장온(張溫)에게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임시로 삼아 파견해 서쪽으로 변장 등을 토벌하게 했다. 장온이 표를 올려 손견이 군사(軍事)일에 참여토록 청하고, 장안에 주둔했다. 장온이 조서로써 동탁을 소환했으나, 동탁은 아주 오랫동안 있다 장온에게 갔다. 장온이 동탁을 책망하자, 동탁의 응대함이 불순(不順)하였다. 

손견이 이때 자리를 같이 하고 있다가, 앞으로 가서 귓속말로 장온에게 말하길 

"동탁은 죄를 두려워하지 않고 거만하게 큰소리 치고 있으니, 마땅히 소환했으나 제때에 오지 않는 것으로 군법에 의거해 참수하야 합니다." 

라 했다. 

장온이 

”동탁은 본디 농(隴)과 촉(蜀) 사이에서 위명(威名)을 드러냈으니, 지금 그를 죽인다면 서쪽으로 가도 의지할 바가 없소“

라 했다. 

손견이 

”명공께서 친히 왕병(王兵)을 거느리고 천하에 위엄을 떨치시는데, 어찌해서 동탁에게 힘입으려 하십니까? 동탁이 한 말을 살피건대, 명공을 용납하지 않고 윗사람을 가벼이 보고 무례하였으니, 그 죄가 하나입니다. 

변장과 한수가 발호(跋扈)한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마땅히 때에 맞춰 진군해 토벌해야 했는데, 동탁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고 운운하여 군의 사기를 꺾고 군사들을 의혹케 하였으니, 두 번째 죄입니다. 

동탁은 임무를 받고도 공이 없었는데, 소환에 응하여서도 머물러 있으면서 위세 등등하여 스스로 높였으니, 그 죄가 세 번째 입니다. 

옛날의 명장들은 부월(斧鉞)에 의지하여 군중에 임하여서, 단호히 참수하여 위엄을 보이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이 때문에 양저(穰苴; 원래는 전양저(田穰苴). 춘추시대 제(齊)나라 장군. 대사마에 제수되면서 사마양저(司馬穰苴)라 불림. 『사마병법(司馬兵法)』의 저자)는 장가(莊賈)를 참수했고(사마양저가 대사마(大司馬)가 되었을 때 제 경공(景公)은 총신인 장가를 감군(監軍)으로 삼았는데, 회합시간에 늦었다 하여 사마양저가 장가를 참수한 일), 위강(魏絳)은 양간(楊干)을 죽였습니다. 지금 명공께서 동탁에게 질책을 하면서도, 곧 주살을 하지 않아 위엄과 형벌을 훼손했기에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라 했다.

장온은 끝내 실행하지 않고 이에 말하길 

“그대는 돌아가 있게. 동탁이 사람을 의심할 것이네.”

라 했다. 손견이 이에 일어나 나왔다.

변장과 한수는 대병이 이리로 향하여 온다는 말을 들으니, 그 무리들이 흩어져 모두 다 항복을 빌었다. 군대가 돌아오자, 의논하던 자들이 군대가 적군에 임하지도 않았으니 공상(功賞)을 논단(論斷)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나, 손견이 동탁의 죄 3가지를 꾸짖으며 장온에게 참수할 것을 권했다는 것을 듣고는,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손견을 의랑(議郞)에 배수하였다.

이 때 장사(長沙)의 도적 구성(區星)이 장군이라 자칭하니, 그 무리가 1만 여명이나 되어서, 성읍을 공격해 포위하자, 이에 손견을 장사태수로 삼았다. (장사)군에 도착하여 친히 장수와 군사들을 거느리고 방략(方略)을 써서 한 달여 만에 구성들을 이기고 격파하였다. 

[주 : 『위서(魏書)에 이르길 「손견이 군에 도착하자 군중(郡中)이 두려워 복종하였는데, 어진 관리를 임용하였다. 관리들에게 경계시키길 

“삼가면 실로 어질고 선한 자를 만나고, 관부의 문서를 잘 다스리면 반드시 다스림에 쫓아져서, 도적들이 태수에게 귀부할 것이다.”

라 했다」라 한다]

주조(周朝)와 곽석(郭石) 또한 무리를 거느리고 영릉(零陵), 계양(桂陽)에서 봉기하여 구성과 서로 호응하였다. 마침내 군의 경계를 넘어오자 곧바로 토벌하니, 3군이 숙연해졌다. 한의 조정에서 전후의 공을 기록하여 손견을 오정후(烏亭侯)로 삼았다. 

[주 : 『오록(吳錄)』에 이르길 「이때 여강(慮江)태수 육강(陸康)의 조카가 의춘(宜春)현의 현장이 되었는데, 도적들에게 공격당하자 사신을 보내 손견에 구원을 청했다. 손견이 정엄(整嚴)하게 구원하였다. 주부(主簿)가 간언을 하자, 손견이 대답하길 

“태수(자신을 지칭)는 문덕(文德)이 없어 정벌을 공으로 삼는데, 경계를 넘어 공격해 토벌하여 다른 나라를 보전하오. 이 때문에 죄를 짓는다면, 얼마나 해내에 부끄러운 일이겠소?” 

라 했다. 이에 진군하여 가서 구원하니, 적들이 소식을 듣고 도주하였다.」고 한다]

영제(靈帝)가 붕어(崩御)하자, 동탁이 조정을 일을 천단하고, 경성(京城)에서 방자하게 횡포를 부렸다. 여러 주군에서 같이 의병을 일으켜 동탁을 토벌하고자 하였다. 

[주 : 『강표전(江表傳)에 이르길 「손견이 이 소식을 듣고 가슴을 치며 탄식하길 

“장공(장온)이 예전에 내말을 따랐다면, 조정이 지금 이 같은 난은 없었을 것이다.”

라 했다」고 한다.]

손견 또한 병사를 일으켰다. 형주자사 왕예(王叡)는 본래 손견을 대우함에 무례했는데, 손견이 (형주를) 지나다 그를 죽였다. 

[주 : 『왕씨보(王氏譜)』를 살펴보니, 왕예의 자는 통요(通耀)는 진(晉)나라 태보(太保)인 왕상(王祥)의 백부이다.

『오록』에 이르길,「왕예는 앞서 손견과 함께 영릉과 계양의 도적을 함께 공격했는데, 손견은 무관이라 언행이 자못 가벼웠다. 왕예가 거병하여 동탁을 치고자 했을 때에 이르러, 본래 무릉(武陵)태수 조인(曹寅)과 서로 용납하지 못하여서 마땅히 먼저 조인을 죽이리라고 떠들어 댔다. 조인이 두려워서, 거짓으로 문서를 만들어 사자를 보내 광록대부(光祿大夫) 온의(溫毅)의 격문인양 손견에게 보내어 왕예의 죄에 대하여 설명하고 행형(行刑)의 중지를 거두어들이라는 영을 내리고, 그러한 사정을 보고했다. 손견이 곧 격문을 받들자 병사를 이끌고 왕예를 쳤다. 왕예가 군대가 이른다는 소식을 듣고, 성루에 올라 바라보더니, 사람을 보내 무엇을 하려는지 물었다.

손견의 선봉군이 답하길 

“병사들이 오랫동안 힘써 전쟁을 치렀는데, 상으로 얻은 것은 의복으로 삼기에도 부족하니, 그저 사군(使君; 주자사(刺)에 대한 존칭)에 게 가서 군수품을 빌리고자 함일 뿐입니다.”

라 했다. 왕예가 말하길 

“자사가 왜 인색하게 굴겠는가?” 

라 하며, 바로 창고를 열고는 직접 들어와 보게 하여 남아있는 것이 없음을 알게 하였다. 병사들이 진군하며 성루 아래를 지나는데, 왕예가 손견을 보고는 놀라 말하길 

“병사들이 직접 상을 구하러 오는데, 손 부군(府君; 군 태수에 대한 존칭)이 어찌 그 속에 있는가?” 

라 물으니, 손견이 

“사자에게 그대를 주살하라는 격문으로 받았소.” 

라 했다. 왕예가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가?” 

라 하니, 손견이 

“가만히 앉아서 아는 바가 없는 것이오.” 

라 했다. 왕예는 상황이 궁박해지자, 쇠를 깎아 마시고 죽었다.」고 한다.]

손견이 남양(南陽)에 이를 즈음, 그 무리가 수만 명이나 되었다. 남양태수 장자(張咨)는 군대가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편안히 태연자약하였다.

 [주 : 『영웅기(英雄記)』에 이르길 「장자의 자는 자의(子議)이며 영천(潁川)군 사람이며, 또한 이름이 알려졌다.」고 한다.

『헌제춘추(獻帝春秋)』에 이르길 「원술이 표를 올려 손견을 임시 중랑장(中郞將)으로 삼게 했다. 손견이 남양에 도착하자, 태수에게 군량을 청한다는 격문을 보냈다. 장자가 강기(綱紀)에게 물어보니, 강기가 말하길 

“손견은 이웃한 군의 2천석 관리일 뿐이니, 군량 조달에 응하지 마십시오.”

라 했다. 장자가 마침내 주지 않았다.」고 한다.]

손견이 소와 술로 보내 장자에게 예의를 표하니, 장자가 다음날 또한 답례하러 손견에게 갔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장사군의 주부가 들어와 손견에게 고하길 

“이전에 남양에 문서를 보냈는데, 도로는 수리되어 있지 않고 군수품은 갖추어져 있지 않으니, 청컨대 (남양군의) 주부를 잡아들여 그 이유를 추문(推問)하십시오.” 

라 했다. 장자가 크게 두려워 가고자 했으나, 병사들이 사방에 두루 포진해있어 나갈 수 없었다. 

잠시 후, 주부가 다시 들어와 손견에게 고하길 

“남양태수가 의병을 지체하게 하여 때에 맞춰 적을 토벌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청컨대 보낸 문서를 거둬들이고 군법에 따라 일을 처리하십시오.”

라 했다. 곧바로 군문(軍門)에 장자를 끌어다 놓고 참수했다. 군내(郡內)가 두려워 떠니, 구해서 얻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주 :『오록』에 이르길 「처음 손견이 남양에 이르렀을 때, 장자는 이미 군량을 공급해 주지 못했고, 또한 손견을 보고 싶지 않았다. 손견이 병사를 진군시키려 하자, 후환이 있을까 두려워 이에 거짓으로 급질(急疾)을 얻는 것처럼 하니, 온 군(軍)이 두려워했고, 무당과 의사를 받아들여 부르며 산천에 빌고 제사지냈다. 친한 사람을 보내 장자를 설득하며, 병으로 곤란하여 병사를 장자에게 맡기려 한다고 말했다. 장자가 이를 듣고 마음속으로 그 병사를 욕심내어, 곧바로 보기(步騎) 5~6백 명을 거느리고 군영에 가서 손견의 병세를 물었다. 손견이 누워 있다가 서로 바라보고는, 까닭 없이 창졸간에 일어나 검을 끌어당겨 장자를 꾸짖고는 마침내 그를 잡아다 참수했다」고 한다. 

(배송지) 이 말은 본전의 내용과 다르다.]

전진하여 노양(魯陽)에 도착하여, 원술과 만났다. 원술은 표를 올려 손견을 행 파로장군(行破 虜將軍)으로 삼고 예주자사를 맡게 하였다. 마침내 노양성에서 군사를 조련하였다. 진군하여 동탁을 토벌하게 되었을 때, 장사(長史) 공구칭(公九稱)을 보내 병사를 거느리고 일을 처리하며 주(州)로 돌려보내 군량의 재촉을 감독하게 하였다. 성의 동문 밖에 장막을 베풀어, 행로신(行路神)에게 제사지내고(祖道) 공구칭을 전송하니, 관속(官屬)들이 모두 모였다.

동탁이 보기(步騎) 수만 명을 보내 손견을 역습하게 했는데, 경기병(輕騎兵) 수십 명이 먼저 도착하였다. 손견이 때마침 주연을 베풀고 담소를 나누고 있다가, 부곡(部曲; 사적 예속인)에 게 경계하여 행진(行陣)을 정돈하고 경거망동하지 못하게 하였다. 뒤에 오는 기병들이 점차 늘어나자, 손견은 천천히 자리를 파하고 군사들을 이끌고 성으로 들어가, 좌우에게 이르길 

“아까 이 손견이 곧바로 일어나지 않은 것은, 병사들이 서로를 뛰어넘고 밟아 제군들이 들어오지 못할까 걱정해서 그랬던 것뿐이다.” 

라 했다. 동탁의 군대가 손견의 군사들이 매우 정연(整然)한 것을 보고는 감히 성을 공격하지 못하고, 이내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주 : 『영웅기』에 이르길 「처음 손견이 동탁을 토벌할 때, 양현(梁縣)의 양인(陽人=마을 이름. 하남군에 속합니다)에 도착하였다. 동탁 또한 보기 5천을 보내 맞게 하였는데, 진군(陳郡)태수 호진(胡軫)을 대독호(大 督護=독호는 원래 무관의 명칭으로 서진(西晉)시대에 기원합니다. 남북조 때는 각 방면 진장(鎭將)의 부장(部將)으로 독호가 있었습니다. 여기에 따르면 독호의 시원이 후한 때까지 연장되는군요. 흠. 『후한서 동탁전』의 주석에 실린 『구주춘추(九州春秋』에는 이 같은 사안에 대해 “호진을 대독(大督)으로 삼았다”는 기사가 보입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총감독자란 의미는 같습니다)로 삼고, 여포를 기독(騎督=삼국시대에도 자주 보이는 하나의 관명이지만, “기병을 감독한다.“ 라는 술어로 해석해도 무방합니다)으로 삼고, 그 나머지 보기의 장교와 도독(都督)인 자가 아주 많았다. 

호진의 자는 문재(文才)인데, 성격이 급해 미리 선언하길 

“지금 이번 출행에서는 응당 한명의 청수( 綬= 청색 인수(印綬)끈. 한나라 때 승상, 태위는 금색 도장(金印)에 자주색 인수(紫綬)끈을 사용했고, 2천석 이상 관리는 은색 도장(銀印)에 청색 인수끈을 사용했는데, 즉 청수란 청색 인수끈를 쓰는 관리를 지칭합니다. 손권이 2천석 직급인 군 태수이므로, 손견을 지칭하는 것입니다.)를 참수하고, (군대를) 정돈해 돌아갈 뿐이다.” 

라 했다. 여러 장수들이 이를 듣고 그를 미워했다. 군대가 광성(廣成)에 도착하니, 양인성과 수십 리 거리였다. 날이 저물자 군사와 말의 피로가 극심하여 응당 멈춰서 묵어야 했지만, 또한 본래 동탁에게 받은 절도(節度=명령서)에는 광성에서 묵으며 말을 어루만져 먹이고, 밤에 진군하여 새벽을 틈타 성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여러 장수들이 호진을 미워하고 꺼려서, 적들이 일을 망쳐주길 바랬지만, 여포 등이 선언하길 

“양인성 성중의 적들이 이미 도주하였으니, 응당 추격하여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놓칠 것이다.” 

라 했다.

바로 밤에 진군하였지만, 성중의 수비가 이미 갖추어져 있어 엄습할 수 없었다. 이에 관리와 병사들은 주리고 목말라, 인마(人馬)가 극도로 피곤하였는데, 또 밤이 되니 (진영에는) 참호와 보루도 없었다. 갑옷을 풀고 휴식을 취하는데, 여포가 또 깜짝 놀라 외치길 

“성중의 적들이 나왔다.” 

고 하였다. 군사들은 요란하게 달아나 모두 갑옷을 버리고 안장과 말을 잃었다. 10여리를 행군하여 적이 없음을 알자, 날이 밝아올 쯤 다시 되돌아와 병기를 수습하고 진격하여 성을 공격하려 했다. 성의 수비는 이미 견고하고 파놓은 참호도 깊으니, 호진 등은 공격하지 못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손견이 양주 동쪽으로 옮겨 주둔하였다가, 동탁군에게 크게 공격을 받으니, 손견과 수십 기만이 포위를 뚫고 탈출했다. 손견은 항상 붉은 두건(幘)을 쓰고 있었는데, 이에 두건을 벗어 친한 주위 장수 조무(祖茂)에게 이를 쓰게 하였다. 동탁의 기병들이 다투어 조무를 추격하니, 그래서 손견은 샛길로 탈출할 수 있게 되었다. 

조무는 (상황이) 곤박(困迫)해지자, 말에서 내려 두건을 무덤 사이에 씌어 놓고 기둥에 불을 놓아, 풀 속에 엎드렸다. 동탁의 기병들이 이것을 바라보고는 여러 겹으로 포위하고, 가까이 가서야 이것이 기둥임을 알고 이내 물러갔다. 손견이 다시 병사들을 수습해, 양인성에서 전투를 벌여 동탁군을 크게 격파하고, 도독(都督)인 화웅(華雄) 등을 효수(梟首)했다. 이때, 혹자가 원술에게 손견을 이간질하니, 원술이 의심을 품고 군량을 운반해 주지 않았다. 

[주 : 『강표전(江表傳)』에 이르길 「혹자가 원술에게 이르길 “손견이 만약 낙읍(洛邑)을 얻게 되면, 다시는 제어할 수 없으니, 이것이 이리를 제거하려다 호랑이를 키운 격입니다”라 했다. 그래서 원술이 그를 의심했다.」고 한다.]

양인성에서는 노양까지는 1백여 리나 떨어져 있었는데, 손견이 밤에 말을 달려 원술을 만나 땅에 그림을 그려가며 계획을 설명한 뒤 

“출군하여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위로는 나라를 위해 적을 토벌하고 아래로는 장군 가문의 사사로운 원한을 위로하고자 함입니다. 손견과 동탁은 골육의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닌데, 장군이 참소하는 말을 받아들여 도리어 서로 미워하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라 했다. 

[주 : 『강표전』에 실린 손견의 말에 의하면 

"「큰 공훈이 승리에 달려 있는데 군량이 이어지지 않으니, 이것은 오기(吳起)가 서하(西河)에서 탄식하며 운 까닭이요, 악의(樂毅)가 수성(垂成)에서 한을 남긴 까닭입니다. 원컨대 장군께서는 깊이 생각하십시오.“ 

라 했다고 한다.」] 

원술이 조심스러워 하며, 곧 군량을 조달해 보내주었다. 손견이 둔영으로 돌아왔다. 

동탁은 손견의 용맹하고 굳센 것을 꺼려하여, 이에 장군 이각(李傕) 등을 보내 가서 화친을 구하게 하면서 지금 손견의 자제들 중 자사나 군수로 임명할만한 자를 나열해 상소하며, 그 표를 허락하고 등용하겠다고 했다. 손견이 말하길 

“동탁은 하늘을 거슬러 무도하여, 왕실을 쓸어 뒤집어엎었으니, 지금 너의 삼족을 주살하여 사해에 내걸어 보이지 않으면, 내가 죽어서 눈을 감지 못하는데, 어찌 장차 같이 화친하겠는가?” 

라 했다. 다시 대곡(大谷)으로 진군하니, 낙읍(雒邑)과 90리 거리에서 대치했다.

[주 : 『산양공재기(山陽公載記)』에 이르길 

「동탁이 장사(長史) 유애(劉艾)에게 말하길 

“관동의 군대가 여러 차례 패하여 모두 나를 두려워하니, 능히 할 수 있는 게 없소. 오직 손견만이 젊고 외고집인데다, 자못 사람을 잘 등용하지만,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게 되어서는 나를 기피한다는 것을 알게 했소. 

나는 옛날에 주진(主神)과 같이 서정(西征)을 나섰는데, 서정은 변장과 한수를 금성(金城)에서 포위했소. 내가 장온에게 말하여, 거느리는 병사들로 주진의 뒤에 주둔케 하려 했는데, 장온이 듣지 않았소. 내가 이때 그 형세를 상언하였는데, 주진이 필히 이기지 못할 것을 알았소. 대각(臺閣 =상서)에는 지금 (당시 일의) 본말(本末)이 있소. 

일을 아직 보고하지 않았으면서 장온은 또한 나더러 선령(先零)의 모반한 강(羌)족들을 토벌하게 하여, 서방 지역을 일시에 소탕하려 하였소. 나는 모든 그 일이 옳지 않음을 알지만, 그만두게 할 수 없어, 마침내 일을 행하여 별부사마(別部司馬) 유정(劉靖)을 남겨두어 보기 4천명을 거느리고 안정(安定)에 주둔하여 성세(聲勢)로 삼았소. 모반한 강족들이 곧바로 돌아가면서 돌아가는 길을 끊고자 하기에, 내가 조금씩 공격하여 번번이 (길을) 소통시키니, 안정에 병사가 남아있음을 두려워했소. 

오랑캐들은 안정에 수만 명이 있다고 말하지만, 유정에 대해서만은 몰랐소. 이 때 또한 소장을 올려 그 상황을 말하니, 손견은 주진을 행군을 따르면서 주진은 1만의 병사를 거느리고 금성을 지으려 한다고 말하기에, 주진에게 2만 명으로 뒤에 주둔토록 하였소. 변장과 한수의 성중에는 묵을 곳이나 먹을 것이 없기에 응당 밖에서 운반하려 하지만, 주진의 대병(大兵)을 두려워하여 감히 가벼이 손견과 대전하지 못했고, 손견은 병사가 풍족하여 그 운반로를 끊고, 아이들을 써서 강족이 반드시 곡중(谷中)으로 돌아갈 것이라 하니, 양주(凉州)는 혹 안정될 수 있었소. 

장온은 이미 능히 나를 기용하지 못했고, 주진 또한 손견을 등용하지 못하여, 직접 금성을 공격하고 그 바깥담을 무너뜨려서, 말을 달려 장온에게 얘기하게 하여 나의 승리가 아침저녁에 달려 있다고 하니, 장온이 이 때 또한 스스로 계획이 적중했다 여겼소. 아과(兒果)에게 건너가 규원(葵園)을 끊어버리니, 주진은 군수품을 버리고 달아나고 아과는 내 계책대로 되었소. 대각에서는 이것 때문에 나를 도향후(都鄕侯)에 봉했소. 손견이 좌군사마(佐軍司馬)가 된 것은 이를 보는 바가 남들도 같이 보았듯이, 나도 할 수 있었던 것일 뿐이오.“

라 했다. 

유애가 말하길 

”손견이 비록 때에 맞춰 계획을 살폈지만, 원래 스스로는 이각이나 곽사만 못합니다. 듣자하니 미양정(美陽亭) 북쪽에 있는데, 보기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적들과 싸웠다가 거의 다 죽고, 인수마저 잃어버렸다 하니, 이것은 그가 일을 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라 했다. 동탁이 말하길 

”손견은 그 때 오합지졸의 무리로 의병을 따라와서 병사는 정예함만 못하지만, 또 전쟁에 있어서는 예리함과 노둔(老鈍)함이 있소. 다만 산동의 대세를 논해 본다면, 끝내 갈 곳이 없을 뿐이오.“

라 했다. 유애가 

”산동의 어린아이들이 백성들 핍박하고 약탈하여, 노략질과 반역을 저지르나, 그 예봉은 남들만 못하며, 견고한 갑옷과 예리한 병기와 강노의 활용도 남들만 못하니, 또한 어찌 오래 끌겠습니까?“ 

라 했다. 동탁이 

”그렇소. 다만 두 원씨와 유표, 손견만 죽이면, 천하는 스스로 복종하여 나를 따를 뿐이오.“

라 했다」고 한다.]

동탁이 바로 도읍을 옮겨 서쪽으로 관중으로 들어가면서, 낙읍을 불태웠다. 손견이 앞장서 입성하여 낙읍에 이르러서, 여러 능묘를 수리하고, 동탁이 파헤쳐 놓은 요새를 바로 해두었다. 

[주 : 『강표전』에 이르길 

「옛 도읍이 텅 비게 되니, 수백 리 중에 연기나 불빛 하나 없었다. 손견이 먼저 입성하였는데,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오서(吳書)』에 이르길 

「손견이 낙양에 입성하여서 한나라 종묘를 소제(掃除)하고, 태뢰(太牢=대뢰(大牢), 소 양 돼지 3가지를 희생으로 한 제사)로 써 제사지냈다. 손견이 성 남쪽에 주둔했는데 관아의 우물 위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또한 오색 기운이 있으니, 온 군대가 놀라 괴이하게 여겨, 감히 물 긷는 자가 없었다. 손견이 사람을 시켜 우물 속에 들어가 보게 하여, 한의 전국새(傳國璽)를 찾아내었는데, 거기에 쓰인 명문에 

“하늘에서 명을 받으니, 이제 수(壽)가 영원히 창성하리라(受命于天 旣壽永昌)”

고 되어 있고, 사방 둘레가 4촌이며 위에는 얽힌 5마리 용이 매여 있는데, 위에 한 부분이 빠져 있었다. 황문(黃門)인 장양(張讓) 등이 난을 일으켜 천자를 위협해 빠져 나왔을 때, 좌우는 흩어지고 옥새를 담당한 자가 우물 속으로 투신한 것이었다.」

고 한다.

『산양공재기』에 이르길 

「원술이 장차 존칭을 참람되어 칭하려 하였는데, 손견이 전국새를 얻었음을 듣고는, 손견의 부인을 잡아놓고 그것을 빼앗았다.」

고 한다.

『강표전』에 이르길 

「『한헌제기거주(漢獻帝起居注)』를 살펴보니, “천자가 하상(河上)에서 돌아와, 각상(閣上)에서 육새(六璽=진과 한나라 때 황제가 쓰던 6가지 옥새. 전국새까지 합쳐 7새라고 합니다) 를 얻었다.”고 하며, 또 태강(太康=진(晉)나라 초대 황제 무제(武帝) 사마염(司馬炎) 때 연호. 280~289년) 초에 손호(孫皓=오나라 마지막 황제. 말제(末帝)라고도 합니다)가 금새(金璽) 6매를 보냈는데, 옥이 없어 가짜임이 드러났다.」

고 한다.

우희(虞喜)의 『지림(之林))』에 이르길 

「천자의 육새는 (각각) 그 명문에 “황제지새(皇帝之璽)”, “황제행새(皇帝行璽)”, “황제신새(皇帝信璽)”, “천자지새(天子之璽)”, “천자행새(天子行璽)”, “천자신새(天子信璽)” 라 쓰여 있다. 이 육새는 (문서를) 밀봉하는 일이 다르기에, 문자도 같지 않다. 『헌제기거주』에 말한 “하상에서 돌아와 각상에서 여섯 옥새를 얻었다”고 한 것은 이것을 이른 것이다. 전국새는 한고조가 차던 것으로 진나라 황제의 옥새였는데, 대대로 전해 왔기에 이름을 전국새라 한 것이다.」

고 한다.

// 신 송지가 살펴보니, 전국새는 육새의 수에 포함되지 않는데, 어찌 그 설을 총괄할 수 있는가? 응씨(應氏=응소(應劭). 후한말의 학자)의 『한관(漢官)』, 황보씨(皇甫氏=황보밀(皇甫謐))의 『세기(世紀=제왕세기(帝王世紀)』 은 육새에 대해 논했지만, 글의 뜻이 모두 부합된다. 한의 궁에서 쓰던 전국새의 명문에 “하늘에서 명을 받으니, 이제 수를 누리고 또한 건강하리라(受命于天, 旣壽且康)”고 하였다. “차강(且康)”과 “영창(永昌)” 두 글자는 착오가 있는 듯한데, 두 사람의 설중에 어느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

금옥(金玉)의 정수이니, 대개 빛나는 기운이 있고, 신기(神器)가 비밀스런 보배(秘寶)에 더해지니, 그 광채가 더욱 빛나며, 무릇 일대(一代)의 빼어난 볼거리요 장래의 기이한 들을 거리인데, 해석하지 못하면서 억지로 가짜라고 하니, 또한 무망(誣罔)하지 않은가! 진수가 『파로전(破虜傳)』(=『손견전』)을 지으면서 또한 이 설을 삭제했다가, 같이 『(헌제)기거주』의 내용에 의혹되어, 육새가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전국새와 함께 7개가 된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오나라 때는 능히 옥을 새기는 못하였기에, 천자가 금으로 옥새를 만든 것이다. 옥새가 비록 금으로 되어 있다 해도 그 명문은 다르지 않다. 오나라가 항복하면서 옥새를 보냈다는 것은 천자의 육새를 보낸 것이니, 예전에 얻었던 옥새이며, 곧 옛 사람들이 남긴 인장이나, 베풀어 사용할 수 없었다. 천자의 옥새는 지금은 어려운 바가 없지만, 그 뜻이 통하지 않을 뿐이다. 

신 송지는 손견이 의흥군(義興軍) 중에서 가장 충렬(忠烈)이란 칭호가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만약 한왕조의 신기(神器)를 얻어 숨겨두고 말하지 않았다면, 이것은 남몰래 다른 뜻을 품는 것이니, 어찌 충신이라 하겠는가. 오나라의 사서들은 나라를 화려하게 꾸미고자 하였지만, 손견의 빼어난 덕을 훼손했음을 알지 못했다. 만약 그렇게 하여 자손에게 전했다면, 가령 육새의 수 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기르는 바도 틀렸을 것이고, 손호가 항복했어도 다만 또한 육새를 보내지 않고 전국새를 숨겨두었다고 했을 것이다. 하늘에서 천명을 받는 것인데, 어찌 천명이 돌아가는 당(堂)에서 취할 것이며, 만약 (앞서의) 좋은 말만 했다면, 이 옥새는 지금도 아직 손씨 가문에 있을 것이다. 필부가 옥벽을 숨겨도 오히려 죄가 있다고 하는데, 하물며 그 물건에 있어서랴!]

일이 끝나자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노양에 주둔했다. 

[주 : 『오록(吳錄)』에 이르길 「이때 관동(關東)의 주군에서 서로 겸병(兼竝)하여 스스로 강대해지는데 힘썼다. 원소가 회계(會稽)군의 주우(周喁)를 보내 예주(豫州)자사로 삼고는 내습(來襲)하여 그 주를 취하였다. 손견이 비분강개하여 탄식하길 

“같이 의병을 일으켜 장차 사직을 구하고자 하였다. 역적들이 거의 격파되려 하는데 각자 이같이 하니, 내가 마땅히 누구와 함께 힘을 합쳐야 하겠는가!” 

라 했다. 말을 하자 눈물이 흘러 내렸다. 주우의 자는 인명(仁明)이며, 주흔(周昕)의 아우이다.」라 한다.

『회계전록(會稽典錄)』에 이르길 「처음 조공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 사람을 시켜 주우에게 요청하니, 주유가 곧 병사들을 거두어 합쳐서 2천명을 얻어, 조공을 따라 정벌에 나서니, (그를) 군사(軍師)로 삼았다. 후에 손견과 함께 예주를 다투었는데, 여러 번 전투에게 실리를 잃었다. 둘째 형인 구강(九江)태수 주앙(周昻)이 원술에게 공격당하자, 주우가 가서 도왔다. 군대가 패배하자 향리로 돌아왔으나, 허공(許貢)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초평(初平) 3년(192), 원술이 손견을 시켜 형주를 정벌하게 하니, 유표를 공격했다. 유표가 황조(黃祖)를 보내 번(樊)과 등(鄧)현 사이에서 역습하게 했다. 손견이 이를 격파하고, 추격하여 한수(漢水)를 건너 마침내 양양(襄陽)을 포위했는데, 단마(單馬)로 현산(峴山)을 가다, 황조군의 군사에게 활을 맞아 죽었다.

[주 전략에 이르길: 『손견이 그 병사를 다 동원해 유표를 공격했지만, 유표는 성문을 닫고 밤에 장수 황조를 보내 몰래 나가 군사를 일으키게 했다. 황조가 병사를 이끌고 돌아오려 했으나, 손견이 역습하여 전투를 벌였다. 황조가 패주하여 현산 속에 숨었다. 손견이 승세를 타서 밤에 황조를 추격하였다. 황조의 부하 병사들 대나무 사이에서 몰래 손견을 쏘아 죽였다.」고 한다.

『오록』에 이르길 「손견의 이 때 나이 37세다」라 한다.

『영웅기』에 이르길 「손견이 초평 4년(193) 정월 7일 죽었다.」고 한다. 또 「유표의 장수 여공(呂公)이 병사를 거느리고 산을 따라 손견에게로 향하자, 손견의 경기병이 산을 수색하며 여공을 토벌했다. 여공의 병사들이 돌을 쏟아 부었는데, 손견의 머리에 맞았고, 이때 뇌가 흘러 나와 죽었다.」고 한다. 

// 신 송지가 보건데 서로 말이 다른 게 이와 같다.]

형의 아들 손분(孫賁)이 장수와 병사들을 거느리고 원술에게로 가니, 원술이 다시 표를 올려 손분을 예주자사로 삼았다.

손견의 네 아들은 손책(孫策), 손권(孫權), 손익(孫翊), 손광(孫匡)이다. 손권이 존호를 칭하게 되자, 손견의 시호를 올려 무열황제(武烈皇帝)라 했다. 

[주 : 『오록』에 이르길 「손견 묘의 존호는 시조(始祖)이고 묘는 고릉(古陵)이다」라 한다.

『지림(志林)』에 이르길 「손권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손책, 손권, 손익, 손광은 오씨(吳氏)의 소생이고, 막내아들 손랑(孫朗)은 서자로써 다른 이름은 손인(孫仁)이다」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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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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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30
09:15:59 (*.52.8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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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오대제

2013.04.30
09:27:56
(*.52.89.88)

김성모의 선견지명! 손견이 어렸을때 토벌한 도적 이름이 호옹이였군요. ㅋ

코렐솔라

2013.07.08
15:25:07
(*.52.89.87)
손견전은 모든 주석이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코렐솔라

2018.10.17
21:48:20
(*.74.126.228)
손권이 이에 일어나 나왔다.->손견으로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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